A
  눈이 덮인 산이 있다. 북쪽 땅의 눈 덮인 산은 저 남쪽 먼 곳, 제국 수도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북쪽 땅의 작은 나라 사람들은 눈산에 기도를 올리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고 거대한 얼음덩이가 떨어졌다. 북쪽의 동물들이 눈을 피해 남으로 내려왔으며 용맹한 북쪽 왕국의 인간들조차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이 살던 나라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은 이윽고 거대한 산이 되었다. 북쪽 땅의 눈 덮인 산은 이제 둘이 되었다.
  제국의 황제는 이를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북쪽의 문제를 해결하여 북쪽 나라를 제국의 땅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황제는 제국을 찾아온 북쪽 사람들에게 땅과 집을 내어주어 자신의 신민으로 삼았다.
  왕자는 이주민의 이야기에 가슴 아파했다. 왕자는 황제에게 간언했고, 곧 북으로 떠날 연구원과 기사단이 꾸려졌다. 왕자는 이주민의 터전을 돌려줄 순찰대의 대장이 되었다. 곧 거대한 문이 열리고 순찰대는 북으로 떠났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제국의 북문은 굳게 닫혔다.
  북문이 다시 열린 것은 수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북쪽의 거대한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곧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황제는 왕자에게 물었다. 왜 둘밖에 없느냐고. 북쪽의 추위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왕자는 대답했다. 북쪽의 추위는 검은 마녀의 짓이라고. 검은 마녀의 검은 용에게 모든 순찰대원이 죽고 자신들만 살아남았다고. 결국, 마녀는 죽었으나 마녀의 저주가 남아 대륙을 괴롭힌다고.
  황제는 곧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북쪽 땅에선 그 무엇도 살 수 없다.'
  마녀의 저주가 북쪽 땅을 뒤덮었다. 곧 온 대륙이 추위에 휩싸였다.
  북쪽 땅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매년 산을 바라보며 마녀를 향해 제사를 지낸다.


B
  흰 눈이 내렸다.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거대한 남자는 눈을 맞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흐, 추워. 아주 추워 뒈지겠다."
  남자의 입은 쉬지 않았다. 어제부터 눈이 멈추지 않느니, 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느니, 발에 감각이 없으니 등의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여자는 남자가 뭘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의 입은 쉬지 않았지만, 그의 몸 또한 쉬지 않고 걸었기 때문이다. 지쳐 쓰러지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과였다.
  그런 여자가 입을 연 것은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섞여 나왔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여자는 자꾸만 들리는 욕지거리가 썩 언짢았다.
  "닥쳐."
  여자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라고 걷고 싶어서 걷나? 그냥 닥치고 걸어라."
  남자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코웃음을 치고선 앞을 향해 걸었다.
  그들은 눈밭에 남겨진 발자취를 좇고 있었다. 닥치고 걷던 남자는 그 발자국이 신경쓰였다. 거대한 그 발자국에는 작은 점이 다섯씩 찍혀 있었던 것이다.
  큼지막한 발자국의 모습이 꼭 맨발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여자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닥치고 있어야 했다. 축 처진 눈으로 지긋이 여자를 바라보았으나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말을 꺼낸 지 얼마 지냈다고 입을 열기엔 여자가 너무도 두려웠다.
  남자는 궁금증을 털어버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눈보라는 쉬지 않았다. 앞길은 하얗고 넓었으며 끝을 모르게 멀었다. 무언가 생각을 떠올릴수록 남자는 더욱 우울해졌다. 남자는 울고 싶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그저 닥치고 걸었다.
  두 쌍의 투박한 발자국이 거대한 발자취를 좇았다. 눈밭에는 네 쌍의 발자국이 나란히 새겨졌다.


A
  사내가 산을 오른다. 작은 아이가 사내를 향해 뛰었다. 아이는 사내를 앞질러 달렸고 가만 멈춰 사내를 기다렸다. 묵묵히 걷던 사내가 아이를 앞지를 때면 아이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 달리던 아이는 곧 힘없이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은 그저 비틀거릴 뿐이었다.
  사내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아이의 몸에 둘렀다. 흰 털가죽에 싸인 아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죽 덩어리였다. 사내는 털가죽 덩어리를 번쩍 들어 엎었다. 아이가 칭얼거렸지만 사내는 그저 아이를 업고 걸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산 깊은 곳에 거대한 동굴을 발견했다. 아이는 동굴을 보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동굴에 들어선 남자는 아이를 내려놓고 홀로 동굴 안을 살폈다. 어두워 깊이 들어갈 순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도 딱히 없었다.
  사내는 조금 더 살펴볼까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북쪽 땅에선 그 무엇도 없다는 걸 며칠간 뼈저리게 깨달은 탓이다. 남자는 입구로 돌아와 아이를 업고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갔다. 동굴의 깊숙한 곳은 바깥보다 훨씬 따듯했다. 사내는 동굴 한쪽에 짐을 내려놓았다.
  동굴 깊은 곳에서 사내와 아이는 부둥켜안았다. 사내와 아이는 깊이 잠들었다. 잠들면서 사내는 내일을 걱정했다.


B
  발자취를 좇던 여자와 남자는 거대한 동굴 앞에 다다랐다. 발자취의 주인들은 지난밤을 동굴 안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조금 전 막 생겨난 발자국은 매우 선명했고, 그들이 동굴에서 다시 나온 흔적은 전혀 없었다. 남자는 그들이 아직 동굴 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여자는 동굴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막아섰다.
  "날이 춥지? 어서 끝마치고 돌아가자고."
  "그러니까 어서 들어가자. 뭘 꾸물대는 거야? 이러다 또 놓치겠어."
  남자가 신경질을 부렸지만, 여자는 길을 열지 않았다.
  "그러니 확실히 하자는 거다. 우리가 여기로 들어가면 그들은 반대쪽으로 나올 뿐이다."
  북쪽 산은 거대했다. 산 너머 북쪽 왕국은 멀었고 산을 돌아가는 길은 너무 길었으며 제국의 상인은 늦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곧 북쪽 산에는 북과 남을 잇는 긴 동굴이 생겼다. 북쪽 산의 동굴은 일종의 통로였다.
  한쪽에서 쫓아도 상대가 반대쪽으로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남자는 금세 여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입구를 막으려고?"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니군. 더는 도망칠 수 없게 만들자는 거다."
  입구가 하나가 된다면 출구도 하나뿐이다. 당분간 왕국으로 향하는 길은 막히겠지만 막힌 입구는 나중에 뚫으면 그만이다.
  여자가 산을 두어 번 두드리자 큰 소리와 함께 산이 무너져내렸다. 동굴 입구는 갑자기 일어난 눈사태에 눈으로 뒤덮였다.
  "웬일로 의욕적일세."
  "나는 본디 지키는 자다. 이런 귀찮은 일은 성미에 안 맞아. 차라리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게 편하다. 게다가,"
  여자가 남자를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집에 가고 싶은 건 너뿐만이 아니란 거다."
  남자는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좋아. 어서 끝내고 돌아가자. 집이 그리워."
  산은 넓고 갈 길은 멀다. 그들은 쉴 수도 없었다. 말을 마친 남자와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걸었다.
  "근데 산을 돌아가는 것보단 동굴을 가로지르는 게 빠를 거 같은데."
  "그건 생각하지 못했군."


A
  큰 소리가 들렸다. 놀란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사내에게 안겨 있던 아이가 내팽개쳐졌다. 아이가 어깨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낸다.
  "거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요."
  아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난밤도 어두웠지만, 지금은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내는 벽을 더듬으며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내디뎠다. 발치에서 지겨운 감촉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에요?"
  아이가 크게 소리쳤다.
  "입구가 막힌 거 같아!"
  사내는 눈사태가 일어난 것이라 짐작했다. 눈이 그칠 줄 모르더니 결국 눈산이 무너진 것이다. 발치의 눈이 허벅지까지 올라올 때 즈음 앞에 벽이 나타났다. 눈 벽 앞에 선 사내는 벽을 더듬었다.
  "어때요?"
  "여기론 나갈 수 없겠어!"
  벽을 두드리고 파헤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단히 언 모양이었다. 사내는 혀를 차며 뒤로 돌아섰다. 나갈 수 없다면 빨리 다른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 사내의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사내는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발을 멈추었다. 곧 큰 소리가 들렸다. 꼭 잠에서 깨었을 때 들은 소리와 같았다. 사내는 끔찍한 상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서 내가 제명에 못 죽지."
  큰 소리와 함께 눈 벽이 사내를 덮쳤다.
  "아빠!"
  소리에 놀란 아이가 사내를 불렀다. 눈 벽의 소리가 멈췄지만,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아이는 소리가 났던 방향을 생각하며 무작정 달렸다. 달리면서 아이는 계속 사내를 불렀다.
  달리던 아이가 멈춘 것은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을 때였다. 아이는 고꾸라지며 눈 바닥에 처박혔다. 아이가 투덜거리자 아이의 옆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넘어진 아이는 오른팔을 옆으로 내밀었다. 두툼한 가죽 코트가 느껴졌다. 아이는 팔과 다리로 바닥을 기어 코트의 끝자락을 찾았다. 머리털이 손에 잡혔다.
  "아빠?"
  "손 놓자. 아빠 아프다."
  아이는 환히 웃으며 사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동굴 안에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사내는 아이의 손을 꼬옥 쥐었다. 반대 손으로 벽을 짚고 동굴 안쪽 길을 짐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사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탈출구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사내가 무언가를 밟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바닥에 손을 대었다.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손에 잡혔다. 잡고 흔들어보니 움직이지 않았다. 위험한 것 같진 않았다.
  사내와 아이는 그 근방의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사내도 아이도 어둠에는 익숙했고 곧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다. 같은 모양의 무언가가 사다리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레일 같죠?"
  사다리는 반대편 동굴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아이의 말에 사내는 재빨리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리곤 더듬더듬 벽에 손을 대었다. 처음 입구와는 다르게 다듬어진 벽이었다. 생각해보면 발에 그 흔한 돌멩이 하나 채이지 않았었다. 확실히 자연스레 만들어진 동굴은 아니었다.
  사내는 등에 진 도끼를 들었다. 레일을 부수고 돌을 튀겨 불씨를 만들었다. 기름을 조금 붓자 곧 모닥불이 크게 타올랐다.
  깎여 다듬어진 벽과 바닥이 보였다. 동굴을 가로지르는 레일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레일 위에는 작은 짐차가 있었다. 사내는 레일을 잡아당겼다. 짐차를 마구 마구 흔들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았지만, 동굴도 레일도 짐차도 더할 나위 없이 튼튼했다.
  사내는 고민 없이 결정했다. 모닥불에 쌓인 땔감 하나를 주워들어 짐차에 묶었다. 짐차의 주변이 밝아졌다. 사내는 아이를 안아 들고 짐차에 올랐다. 레일의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른 걱정을 할 여유가 없다. 이대로 동굴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사내가 짐차의 레버를 움직이니 짐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달리면서 사내는 몇 번이나 레버를 당겼다. 혹시라도 낙후된 짐차가 고장 날까 걱정인 것이다. 짐차가 멈출 때 레일과 짐차는 크고 끔찍한 소리를 냈다. 그럴 때면 아이는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사내도 귀를 막고 싶었지만, 레버를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짐차가 빨라진다 싶을 때면 사내는 여김 없이 레버를 당겨 짐차를 멈추었다. 사내도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이 찡그린 얼굴을 폈을 때는 레버를 수십 번은 당겼을 때였다. 사내는 짐차에서 내려 꺼져가던 횃불을 들어 올렸다. 앞을 비추자 몇 대의 짐차가 레일 옆에 놓여 있었다.
  레일의 양극단은 상당히 비슷했다. 심지어 내리쳐 부서진 레일의 모습과 타다 남은 모닥불의 흔적까지 닮았다. 선객이 있었던 걸까? 사내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에 겨울이 온 뒤로 북쪽 땅에선 무엇도 살 수 없었다. 수백 년 전쯤에야 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빠."
  "왜?"
  "장갑 벗겨지겠어요."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내는 아이의 손을 놓고서 벗겨지려던 장갑을 다시 끼워주었다.
  사내는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레일을 부숴 나무를 등에 졌다. 북쪽 땅에서 땔감은 귀하다. 사내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B
  예민한 추격자는 불을 피우는 족족 그들을 찾아냈다. 추격자를 따돌린 지 어언 이레가 지났으니 그들은 조금 방심하기로 했다. 동굴 속에서 피우는 불까지 들키진 않을 것이다.
  청년은 레일을 부숴 땔감을 만들고 모닥불을 피웠다. 간만에 보는 불빛에 소녀가 환히 웃었다.
  청년은 허리춤에 매어둔 흰 짐승의 가죽을 벗겼다. 청년이 모닥불에 짐승을 올리자 소녀는 짐을 뒤져 소금을 꺼냈다. 청년도 소녀도 노숙에는 익숙했다.
  소녀는 짐승의 뼈를 바르고 소금을 뿌렸다.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코를 막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청년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녀의 움직임이 둔해질 때 청년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남은 음식을 주머니에 넣었다.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을 살핀다. 아직 불씨가 죽지 않았다. 나뭇조각을 들고 천을 말아 기름을 부었다. 소녀가 환히 타오르는 불꽃을 들어 올리자 청년이 새까만 발로 모닥불을 밟아 껐다. 소녀가 횃불을 들지 않은 손으로 사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배가 고프지 않으니 오래 걷진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소녀는 횃불을 들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레 걸었다. 마주 잡은 손에 의지하여 청년과 함께 걸었다. 청년이 없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소녀는 문득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어?"
  "그냥요. 이러니까 꼭 우리가 동화 속 공주님과 기사님 같지 않아요?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기사님이 공주님을 이끄는 거예요."
  청년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공주와 기사보단 마녀와 악마가 더 잘 어울리는군. 제목은 검은 마녀와 검은 용 정도가 좋겠어."
  "어휴. 뭐에요 그게."
  투덜대는 소녀를 두고 청년은 계속 걸었다.
  소녀는 너무 느긋했다. 남자가, 남자를 따르는 여자가 언제 자신들을 따라잡을지 모르는데. 최대한 멀리, 최대한 오래 걸어야만 하는데. 소녀는 너무 마음 놓고 걷는 게 아닐까. 청년은 그런 소녀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출구가 보이고 햇살이 비친다. 어둠에 익숙지 않은 소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소녀가 출구에 횃불을 들이밀었다.
  "야. 도망쳐."
  동굴 입구엔 입구만큼 거대한 붉은 눈동자만이 아른거렸다.


A
  동굴 입구엔 입구만큼 거대한 검은 눈동자만이 아른거렸다.
  "형님 안되오. 이럴 순 없소."
  사내는 저 눈동자를 본 적 있었다. 제국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제국을 지킬 날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붉은 용을 알고 있었다. 결국, 황제는 사내를 잡고자 용의 잠을 깨운 것이다.
  "아빠, 붉은색이 아니야."
  "뭐?"
  "눈을 봐. 붉은 용이 아니야."
  "용의 눈은…."
  용의 눈은 붉은색일 텐데? 사내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거대한 검은 눈동자.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모습이었다.
  수백 년 전. 제국의 압도적인 힘에 많은 용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것은 제국을 지키는 붉은 용뿐. 다른 용이 있을 리가 없다. 만일 살아남은 용이 있다면? 사내는 생각했다. 수백 년 전, 대륙에 겨울이 오기 전. 검은 눈동자의 용은?
  세상의 종말을 노래하는 소녀. 무너지는 하늘과 끝없이 내리는 눈. 얼음 기둥이 쏟아지고 붉은 대지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검은 용과 붉은 용이 서로 물어뜯고, 빛의 왕자는 검은 마녀의 목에 검을 꽂는다.
  대륙의 겨울을 겪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모를 리 없다. 사내는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검은 용이 그 큰 머리를 동굴로 밀어 넣었다. 동굴이, 눈 덮인 산이 크게 흔들렸다. 사내는 아이를 안고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넘어진 사내 위로 턱이 스쳐 지나간다.
  "검은 마녀와 검은 용…."
  사내의 품 안에서 아이가 작게 뇌까렸다.


B
  검은 용은 동굴을 박차고 날았다. 일곱 쌍의 날개를 펴고 붉은 용에게 달려들었다. 두 용이 괴성을 질렀고 남자와 소녀는 귀를 막았다. 두 용은 서로 엎치락뒤치락 바닥을 뒹굴고 물어뜯고 할퀴었다. 붉은 용이 큰 상처를 입고 물러났다.
  검음 용이 불을 뿜었다. 붉은 용은 불길을 뚫고 검은 용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물었다. 목덜미를 물자 더는 불꽃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붉은 용이 앞발로 검은 용의 뿔을 꽈악 잡아 쥐었다. 검은 용이 붉은 용을 뿌리치자 뿔과 함께 살점이 한 움큼 뜯겨 나갔다. 목덜미에 서른두 개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다. 검은 용이 고통을 참으며 달려들려 하자 붉은 용이 자신의 몸체만 한 꼬리를 휘둘렀다. 바닥을 구르는 검은 용에게 붉은 용이 불을 뿜었다.
  검은 용을 에워싼 불꽃은 멈출 줄 몰랐다. 마침내 기운을 다한 검은 용이 쓰러지자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용이 쓰러지는 충격에 땅이 울리고 먼지바람이 불었다.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에 가려 앞을 볼 수 없었다. 눈물을 닦자 동굴 밖 검은 용의 눈동자가 보였다.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소녀는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A
  검은 용이 앞발을 동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동굴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이 용의 위치를 짐작게 했다. 사내는 아이를 안고 뒷걸음질쳤다. 사내의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으앗!"
  사내가 놀라 뒹굴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죽을상을 지었다. 사내의 뒷머리 털이 한 움큼 사라졌다. 목덜미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횃불이었다.
  사내는 아이를 내려놓고 횃불을 손에 들었다. 횃불을 앞으로 내밀고 용을 비추었다. 옛 이야기 속과는 사뭇 다른 상처투성이의 모습. 하지만, 상처투성이라도 지금의 그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다.
  용을 두고 도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대로 도망치면 동굴 안에 갇힐 뿐이다. 사내는 결심한 듯 소리를 지르며 용에게 달려들었다.
  용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사내는 놀라 멈칫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동굴이 용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용의 입이 헛짓을 하자 사내는 재빨리 뛰어올랐다. 있는 힘껏 용의 왼쪽 눈에 횃불을 찔렀다. 검은 용이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용이 왼쪽 눈을 잡고 땅 위를 뒹굴었다. 쓰러진 용은 고통에 못 이겨 불길을 뿜었다. 용의 불길은 애꿎은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B
  그때 쓰러진 검은 용이 불길을 뿜었다. 놀란 붉은 용은 우선 눈밭 위에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굴려도 불을 꺼지지 않았고, 붉은 용의 몸이 그 붉은 몸만큼 새빨갛게 타올랐다.
  검은 용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불길에 타올랐던 검은 몸은 번쩍이던 윤기를 잃었지만, 남자의 눈에는 오히려 전보다 위압적이었다. 검은 용은 다친 왼쪽 눈을 찡그리고 소녀를, 소녀의 앞에서 검을 쥔 남자를 바라보았다. 소녀를 지켜야 한다. 용은 남자를 향해 이빨을 내밀며 그르릉하고 울었다.
  그때 소녀가 용에게 다급히 외쳤다. 붉은 용이 일어나 검은 용의 날개를 잡아챈 것이다. 붉은 용은 검은 용을 밀치자 검은 용의 날개가 뜯겨 나갔다. 검은 용에겐 더는 반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동굴 앞에서 마녀를 지키는 검은 용은 이제 없다. 어느새 검을 용을 무찌른 붉은 용 또한 모습을 바꾸고 남자의 옆에 섰다. 남자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검을 쥔 남자를 바라보았다. 주저앉은 마녀가 뒷걸음질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마녀 주제에 죽음이 두렵다고? 마녀의 그 모습은 그저 두려움에 떠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자가 검을 들어 마녀를 찌른다. 소녀의 가슴팍 깊이 검이 박힌다.


A
  사방에 불을 뿜는 검은 용을 두고 사내가 외쳤다.
  "동굴로 들어가! 들어가서 찾아!"
  "뭘요?"
  용은 본디 지키는 자. 검은 용도 무언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마녀를!"
  마녀의 가슴팍엔 제국의 상징이 있다. 사내와 아이는 허둥지둥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벽과 바닥을 더듬었다. 어두운 동굴 속을 보니 용의 눈에 박힌 횃불이 너무 아쉬웠다.
  그때, 사내의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손을 더듬어 살펴보니 누군가의 시체인 것 같았다.
  사내는 의외로 시체의 몸이 작고 여린 것에 놀랐다. 이게 마녀의 시체라고? 북쪽 땅에 저주를 내린 시체는 작은 소녀였다.
  문득 사내는 뒤를 바라보았다. 한쪽 눈을 찡그린 용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늦을세라 마녀의 가슴팍에 손을 내밀었다. 마녀의 가슴팍엔 제국의 상징이, 수백 년 전 잃어버린 용 살해의 검이 있을 테니까.
  사내가 검을 쥐자 검이 요동쳤다. 수백 년 만에 제 주인을 찾은 것이다. 제국의 핏줄을 알아본 빛의 검은 이윽고 얌전히 새 주인을 맞았다.
  검을 손에 쥔 사내는 용을 보며 외쳤다.
  "마녀는 죽었다! 네가 시체쪼가리를 지킬 이유는 없다. 물론 우리가 마녀를 노릴 필요도, 네가 우릴 죽일 이유도 없다. 허나, 네가 우릴 적대한다면 감히 난 용을 죽이겠다. 그러니 물러가라!"
  검은 용이 숨을 죽이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검은 용의 입에 불길이 머물자 사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용이여!"
  사내가 온 힘을 다해 용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는 사내를 꼭 동화 속에 나오는 빛의 왕자 같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손에 쥔 빛의 검이 밝게 빛났다.


B
  왕자가 검을 들어 마녀를 찌르려 할 때였다. 동굴의 입구가 부서지고 검은 용의 앞발이 동굴 안 깊숙이 들어왔다. 동굴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이 용의 위치를 짐작게 했다. 남자가 넘어져 뒷걸음질칠 때 어깨에 무언가 닿았다.
  "으앗!"
  남자가 놀라 뒹굴었다. 남자의 뒷머리 털이 한 움큼 사라졌다. 목덜미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소녀가 동굴을 안에서 들고 다녔던 횃불이었다.
  남자는 검을 놓고 횃불을 손에 들었다. 횃불을 앞으로 내밀고 용을 비추었다. 상처투성이의 모습의 검은 용이 여자로 변한 붉은 용을 입에 물고 있었다. 검은 용은 입에 문 것을 질겅질겅 씹어 뱉었다.
  "젠장…."
  여자의 신음에 남자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여기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도망쳐야만 한다. 반대편 출구는 막혀 있지만 적어도 살 순 있을 것이다. 용기사인 자신이 살아 있는 이상 붉은 용도 죽진 않는다. 붉은 용이 몸을 추스르면 자신을 도울 테니 걱정할 건 없다. 남자는 결심한 듯 동굴 안쪽을 향해 달렸다.
  검은 용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남자를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용의 크기에 비해 동굴은 턱없이 작았다. 성난 용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놀란 사내가 멈칫할 때 소녀가 사내의 등을 향해 튀어 올랐다. 소녀의 손안에는 빛의 검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A
  검은 용은 그 사악한 이빨로 붉은 용을 물어뜯었습니다. 붉은 용이 검은 용을 뿌리치려 했습니다. 그때 검은 용의 입에서 검은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정의로운 붉은 용은 불에 휩싸여 기절했습니다.
  왕자님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
  "검은 마녀! 네 악행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대륙의 끝에서부터 너는 저주받을 것이다! 네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는가?"
  그러자 검은 마녀가 대답했습니다.
  "종말이 올 것이다! 대륙의 겨울을 준비하라! 제국의 상징은 그 주인을 욕보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빛의 왕자는 그 자신의 검에 목숨을 잃으리니!"
  검은 마녀는 왕자님을 비웃을 뿐이었습니다.
  "나 빛의 왕자는 죽지 않는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빛의 정신은 모두의 마음속에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먼 훗날, 빛이 찾아와 그대를 단죄할 것이다! 바로 여기, 대륙의 끝에서!"
  검은 마녀는 두려움에 몸이 떨렸습니다. 마녀는 그런 모습을 왕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왕자님을 보았습니다. 왕자님은 담담히 자신의 검을 마녀에게 주었습니다.
  "자, 네 저주와 같이 날 찌르라!"
  왕자님이 당당히 외쳤습니다. 마녀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왕자님의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었습니다. 왕자가 죽자 검은 마녀는 검은 용을 타고 날아올랐습니다. 대륙은 마녀의 저주에 휩싸였고 곧 따뜻한 황궁까지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붉은 용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왕자님은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붉은 용은 눈물을 흘리며 왕자님을 황궁으로 옮겼습니다.
  붉은 용은 제국을 뒤로하고 저 멀리 숲 속으로 떠났습니다. 왕자님의 죽음을, 그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겁니다. 그날 우린 제국의 상징 중 하나인 붉은 용을 잃고 말았습니다.
  빛의 검은 아직도 빛나고 있습니다. 먼 훗날 새로운 빛의 왕자가 검을 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빛의 왕자가 검은 마녀를 찾아갈 때엔 붉은 용도 함께 나서겠지요. 대륙의 봄이 찾아올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답니다.


  …….
  잠에서 깬 왕자는 간밤에 꿈을 생각하며 흥분에 몸을 떨었다. 해가 밝진 않았으나 왕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꿈을 잊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다시 잘 순 없다. 왕자는 황제의 방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아바마마! 굉장한 꿈을 꾸었어요."
  "허허. 재미있는 꿈을 꾸었나 보구나."
  황제에겐 이런 왕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왕자는 자신이 꾼 꿈을 잊기 전에 풀어놓았다.
  "거대한 용과 하얀 나라의 꿈을 말이에요. 꿈에선 아바마마도 나왔어요. 아바마마가 빛의 검을 들고 검은 용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꼭 빛의 왕자같이 말이에요."
  황제는 이야기를 들으며 검은 마녀와 검은 용을 떠올렸다. 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동화니까. 아마 왕자는 동화책을 읽다 잠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에요. 꿈에선 검은 용은 있었지만 검은 마녀가 나오질 않았거든요. 작은 소녀의 시체만 있었어요."
  왕자는 조금 망설이다 황제에게 물었다.
  "검은 마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화책에도 검은 마녀의 이야기만 쏘옥 빠져 있잖아요. 가만 생각해보면 동화책도 뭔가 이상해요."
  "글쎄. 아직 북쪽 땅에서 저주를 내리고 있진 않을까 생각되는구나. 마녀가 죽었다면 북쪽 땅이 아무것도 없는 땅이 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마녀의 저주도 아직까지 멈추질 않았잖느냐."
  마녀의 저주로 대륙 전체가 추위에 휩싸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 빛의 왕자가 마녀를 무찔렀다면 지금같이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야."
  황제가 매년 추위에 죽어가는 백성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왕자도 그런 황제의 고충을 모르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왕자는 환히 웃었다.
  "아바마마. 제가 황제가 되면 따뜻한 마음으로 나라를 통치할 거예요. 그러면 대륙의 겨울도 물러가지 않겠어요? 그러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황제 앞에서 황제가 된다고 말하다니. 큰 불경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왕자가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는 그런 왕자의 모습이 귀엽고 또한 대견스러웠다.
  "그래. 따뜻한 마음을 가져라. 따뜻한 마음으로 대륙을 뒤덮어 대륙의 봄을 되찾아 주려무나."
  그렇게 말하곤 옆에 뉘인 제국의 상징을 들었다. 황제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어 왕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다음 빛의 왕자는 네가 아니더냐."
  왕자가 손에 쥔 빛의 검이 밝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