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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5
(2008/9/16) 판타지 갤러리. written by 미스트
* 글의 게재를 허락해주신 미스트님께 감사드립니다.
* 글의 어조 등에 있어서는 별다른 수정이 없이, DCinSide 판타지 갤러리의 글을 원본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중세는 기독교 교리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따라서 (당연히) 일부일처제입니다. 이혼하는데도 교회의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헨리 8세가 그놈의 이혼 허가가 안 나와서 카톨릭 걷어차버리고 국왕이 교회 수장이 되는 성공회를 만들었죠. =ㅅ=;;;;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젊은 나이에 여자를 알게 되지만, 결혼은 '적당한 여자' 즉 가문이 좋고 지참금을 많이 가져올 여자가 생겼을 때 했습니다.
그 외의 여자는 흔히 말하는 '동거 생활'로, 현대 법으로 따지자면 '사실혼'에 가깝겠지만 당시에는 교회의 허가를 받은 결혼이 아니면 인정되지 않은 관계로, 해당 귀족이 결혼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낳고 귀족이 죽을 경우 이 아이는 사생아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럽에 사생아들이 바글바글 하던 이유죠.)
보통 이런 사생아들은 비천한 태생으로 취급받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낭만적인 소설들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출신 성분을 인정받고 적자보다는 후위지만 상속권도 가지며, 적절한 교육을 받아 기사가 되어 가문에 봉사하거나 적절한 절차를 따라 성직자가 되어 교회 내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높이거나 했습니다.
(사실 이건 상속권 1위가 아닌 대다수 형제들이 걷는 길입니다. 이 외에도 십자군에 참가한다거나 하는 선택지가 있기도 합니다.)
결혼 대상자는 물론 양측 가문의 합의하에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왕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귀족들의 영지 역시 왕의 것을 빌려주는 것으로 명분상으로 실제 소유자는 왕이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는 귀족들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인정받았는데, 왕이 이 귀족의 영지에 실질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남자 계승자가 끊긴 가문의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적당한 남자 계승자가 없는 가문의 미망인 혹은 딸들을 보호하고 적절한 혼처를 찾아주는 것은 왕의 중요한 직무 중에 하나였는데, 이들에게 남편을 찾아주는 기간 동안은 영지에서 걷는 세금은 왕의 금고로 들어갔고, 또한 왕이 골라주는 남편감이란 자연히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기 마련. 그런 식으로 왕은 귀족들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신분이 낮거나 계승순위가 낮은 귀족 청년들의 충성을.....)
이 방법은 왕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의 세력을 강화해주는 주 된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 여성들에겐 거부권이란 없었습니다. -_-;;; 그래서 40줄의 아저씨와 15세 소녀의 약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지극히 친애의 정을 담아, 소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계를 미루기로 했다."고 낭만적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로리콤도 아니고 여자에 굶주리지(?)도 않아서 어린애한테까지 손을 댈 필요를 못느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조건이 좋으면 어린애한테도 냉큼 침발라서 내 아내! 해버리는 인간들도 많았을 겁니다. -_-;;;) 20대 청년과 60대 할머니-_-의 결혼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다보니 남자고 여자고 애정이라곤 별로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 (놀랍게도 그런 타산 만으로 점철된 듯한 결혼에도 애정 넘치는 잉꼬 부부는 늘 있었.....) 흔히 말하는 '궁정식 사랑', 즉 젊은 귀부인과 젊은 기사간의 불륜의 사랑 (어느 쪽이 기혼이냐 미혼이냐는 아무 상관없는)의 관습이 생겨날 수 밖에요.
아무튼, 결론은 중세 사회는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다는 겁니다. 그럼요. 기본이고 말구요. 교회의 말 한마디에 '우오오 이단자들을 죽여라!' '주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죽여라!' 하던 시대였으니..... .... ....
....음? 생각해보니 현대랑 별로 다르지 않은거 같기도 하지만.

* 글의 게재를 허락해주신 미스트님께 감사드립니다.
* 글의 어조 등에 있어서는 별다른 수정이 없이, DCinSide 판타지 갤러리의 글을 원본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중세는 기독교 교리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따라서 (당연히) 일부일처제입니다. 이혼하는데도 교회의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헨리 8세가 그놈의 이혼 허가가 안 나와서 카톨릭 걷어차버리고 국왕이 교회 수장이 되는 성공회를 만들었죠. =ㅅ=;;;;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젊은 나이에 여자를 알게 되지만, 결혼은 '적당한 여자' 즉 가문이 좋고 지참금을 많이 가져올 여자가 생겼을 때 했습니다.
그 외의 여자는 흔히 말하는 '동거 생활'로, 현대 법으로 따지자면 '사실혼'에 가깝겠지만 당시에는 교회의 허가를 받은 결혼이 아니면 인정되지 않은 관계로, 해당 귀족이 결혼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낳고 귀족이 죽을 경우 이 아이는 사생아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럽에 사생아들이 바글바글 하던 이유죠.)
보통 이런 사생아들은 비천한 태생으로 취급받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낭만적인 소설들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출신 성분을 인정받고 적자보다는 후위지만 상속권도 가지며, 적절한 교육을 받아 기사가 되어 가문에 봉사하거나 적절한 절차를 따라 성직자가 되어 교회 내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높이거나 했습니다.
(사실 이건 상속권 1위가 아닌 대다수 형제들이 걷는 길입니다. 이 외에도 십자군에 참가한다거나 하는 선택지가 있기도 합니다.)
결혼 대상자는 물론 양측 가문의 합의하에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왕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귀족들의 영지 역시 왕의 것을 빌려주는 것으로 명분상으로 실제 소유자는 왕이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는 귀족들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인정받았는데, 왕이 이 귀족의 영지에 실질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남자 계승자가 끊긴 가문의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적당한 남자 계승자가 없는 가문의 미망인 혹은 딸들을 보호하고 적절한 혼처를 찾아주는 것은 왕의 중요한 직무 중에 하나였는데, 이들에게 남편을 찾아주는 기간 동안은 영지에서 걷는 세금은 왕의 금고로 들어갔고, 또한 왕이 골라주는 남편감이란 자연히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기 마련. 그런 식으로 왕은 귀족들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신분이 낮거나 계승순위가 낮은 귀족 청년들의 충성을.....)
이 방법은 왕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의 세력을 강화해주는 주 된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 여성들에겐 거부권이란 없었습니다. -_-;;; 그래서 40줄의 아저씨와 15세 소녀의 약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지극히 친애의 정을 담아, 소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계를 미루기로 했다."고 낭만적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로리콤도 아니고 여자에 굶주리지(?)도 않아서 어린애한테까지 손을 댈 필요를 못느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조건이 좋으면 어린애한테도 냉큼 침발라서 내 아내! 해버리는 인간들도 많았을 겁니다. -_-;;;) 20대 청년과 60대 할머니-_-의 결혼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다보니 남자고 여자고 애정이라곤 별로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 (놀랍게도 그런 타산 만으로 점철된 듯한 결혼에도 애정 넘치는 잉꼬 부부는 늘 있었.....) 흔히 말하는 '궁정식 사랑', 즉 젊은 귀부인과 젊은 기사간의 불륜의 사랑 (어느 쪽이 기혼이냐 미혼이냐는 아무 상관없는)의 관습이 생겨날 수 밖에요.
아무튼, 결론은 중세 사회는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다는 겁니다. 그럼요. 기본이고 말구요. 교회의 말 한마디에 '우오오 이단자들을 죽여라!' '주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죽여라!' 하던 시대였으니..... .... ....
....음? 생각해보니 현대랑 별로 다르지 않은거 같기도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