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덧붙여, 감히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설을 읽는 것역시 힘든 일이다. 그러니, 힘들게 쓰여진 소설을 힘들게 읽고, 감상을 쓰는 일이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물론 감상문도 '재미있네요'/'재미없네요'라는 다섯 글자로 끝마칠 수 있다면 훨씬 간단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대부분의 감상문을 그렇게 써 왔다.) 그러나 판갈의 환상독회쯤 되는 장소라면, '무엇이', '어떻게', '왜', 재미있었는지/재미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그나마 '언제', '어디서'라는 시공간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이 '무엇이', '어떻게', '왜'라고 하는 논리적인 부분에 약하다. 그렇기에 나는 판갈에는 되도록 감상문을 올리지 않도록 해 왔고, 환상독회에도 참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상작품인 <용과 거미의 노래>를 읽으며 한달 남짓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판갤/판갈 및 작가 호워프에 대한 내 애정의 표시로, 감히 <용과 거미의 노래>에 대해 나름 '각잡고' 써 보기로 하였다.

  문제는 감상문이라고는 중고등학교때, 독후감 쓰던 이후로 손을 댄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막막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엇을', '어떻게' 감상하면 좋단 말인가?

  여기서는 무난하게(?) 소설 구성의 3요소라고 하는 인물, 사건, 배경에 대해 평해 보기로 하겠다. 아마 장르소설적으로는 캐릭터. 스토리, 세계관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설의 3요소인 주제와 문체를 덧붙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내 내공이 닿지 못 한다.


1.        억연이라고 하는 캐릭터는 필요했을까?

  일단 주인공인 아츠보그와 데닌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합격점을 줄 만 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각성 후, 갑자기 '개똥철학'을 구구절절 늘어놓게 되는 부분은 좀 에러였지만.
  루살카, 아그렉, 마둘, 살인자 노인 같은 대립자 캐릭터들도 각각 개성이 있어서 좋았다. 특히 살인자 노인에 대한 묘사는 내가 전율할 만큼 일품이었다.
  파쉬팀, 베레스트, 피르지와 같은 캐릭터들도 전형적이지 않고, 인간의 이중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데카르트의 경우, 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뱉은 철학자의 이름을 따왔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으나, 마지막 장의 반전에서 납득하게 되었다.

  음, 그러나 몇몇 캐릭터들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특히 여성캐릭터의 비중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연이나 티는 루살카를 별개로 하면 거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데 그 비중이 너무 적다.

  먼저 가장 아쉬운 것은 억연이다. 초반에 그녀가 나왔을 때는 적어도 아츠보그나 데닌과 버금가는 중심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그 기대는 충족되지 못 했다. 일단 그녀가 한 역할이 무엇인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약제사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약상은 거의 없었던 듯 하다.

  그나마 그 최후만이 그녀가 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으로 아츠보그의 분노게이지 상승, 혹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이라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더라면 나름대로 의미있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어느 정도 그런 요소가 존재하기는 한다. 다만, '떡밥'이 부족했던 것이다. 조금 더 억연의 비중을 초반부에 더 깊이 다뤘어야만 한다. 살아 생전에 별 러브신도 없었는데, 죽고 나서 갑자기 '아, 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을까' 라는 독백을 듣게 되면 독자로서는 뜬금이 없다 못해, 헛웃음까지 치게 된다.

  나로서는 억연이라는 캐릭터가 꼭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남주인공만 둘이면 비엘소설로 오해받을까봐, 일부러 집어넣은 것일까? 그렇지만 히로인이 없는 것이나, 히로인이 별 역할 없이 죽어버리는 것이나 별 차이는 없을 듯 하다.

  마찬가지로 아쉬운 것은 티다. 억연이 죽고 난 후, 등장한 이 캐릭터는 일순 억연의 뒤를 잇는 차대 히로인으로 등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당히 안타깝게도, 5장에서만 등장하는 이 캐릭터가 한 역할을 생각해 봐도 그다지 없었던 듯 하다. 뭐, 5장부터는 루살카가 본격적으로 히로인 역할을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찬가지로 옌첸과 마래역시 꼭 등장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캐릭터였다. (만약 내 추측대로 옌첸이란 캐릭터가 내 닉네임인 예니체리를 모티브로 쓰여졌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낚시스러운 캐릭터는 사제의 관료 아케트라브다. 주인공을 속여먹는 악독한 관료라고 하는, 상당히 멋진(?) 캐릭터를 가진 아케트라브, 그가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장면에서는, 이 캐릭터가 뭔가(?)를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했을 것이다. 사제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아케트라브가 시체마저 발견되지 않고,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을 때, 바야흐로 나는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모종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결국은 아케트라브의 등장을 염원한 내 기대를 져버리고,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았다.

  죽었다는 설명을 곧이 듣지 않고, 쓸데없는 기대를 해 버린 내 잘못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떡밥'을 풀었을 때는 '떡밥'을 납득이 가게 회수해 갈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이 캐릭터들에 대한 소감이었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캐릭터들도 적지 않았으나 몇몇 캐릭터들이 낚시스러웠던 것 같다. 아무래도 모든 캐릭터에게 개성과 역할을 부여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이해한다.


2.        계획된 반전인가? 방향성없는 전개인가?

  내가 스토리라는 부분을 평가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과연 스토리가 이야기 안에서 시종일관 정합성과 개연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기준은 캐릭터와 세계관이라는 요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일례로 내가 판타지소설의 수작 중 하나로 꼽는 <드래곤레이디>와 <카르세아린>의 경우 반전이 충격적이다. 처음 시작할 때와 마지막이 전혀 다르다. 과연 두 작품의 작가들은 처음부터 이 반전을 계획하고 쓰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회의적이다. 방향성없는 전개를 하다보니 어느샌가 전혀 다른 얘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위의 두 작품은 그나마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거의 경악과 분노에 가까운 전개를 가져다 준 작품의 예로 만화 <봉신연의>를 든다면 납득할 것이다.

  반면, 내가 한국 판타지의 최고봉으로 꼽는 <눈물의 마시는 새>와 <룬의 아이들>의 경우, 작가가 상당히 성의를 가지고 짜임새있게 썼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눈마새와 룬아도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티'가 나지 않게 적절히, 능숙하게, 교묘하게 묘사해 내었다는 점에서는 뛰어나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역시 독자(여기서는 나자신을 상정하고)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자, <용과 거미의 노래>의 경우 어떤가? 자세한 언급은 스포일러방지를 위해 피하도록 하지만, <용과 거미의 노래>에서도 <눈물을 마시는 새>급의 반전을 가지고 있다.

  아, 먼저 고백하겠다. 난 반전에 약하다. 머리가 단순한 탓인지, 독자로 하여금 감탄사를 터뜨리게 하는 반전은 도저히 쓰지를 못 한다. 난 절대로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을 쓰지 못할 것이다.

  <용과 거미의 노래>의 반전은 어느만큼 잘 짜여 있을까? 뜬금없는 반전과 짜임새있는 반전의 차이는, '떡밥'을 얼마나 많이 풀어놓느냐 하는 것이다. <용과 거미의 노래>에서도 군데군데 복선을 많이 묻어 놓은 흔적이 보인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복선을 조금 더 알기 쉽게, 그러니까, 마지막에서 터뜨릴 때, 독자로 하여금 '아, 그때 그건 이 얘기였구나' 싶게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3.        용거노와 어마소아; 세계관에 대한 고뇌?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용과 거미의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매력은 세계관이다. 아마 추측컨대, 작가 호워프가 이 소설에서 가장 고뇌한 문제는 세계관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고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역시 같은 고뇌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란 무엇인가?

  이 고뇌는 아마 판타지소설의 작가라면, 소설을 비롯한 창작에 손을 대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세계를 살아간 사람들이라면,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뇌는 이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듯 하다.

  모든 것은 7년 전의 이 무렵으로 돌아간다. 21세기의 첫 해, 남북정상회담의 다음 해, 한일 월드컵의 전 해, 9월11일, 그때의 모든 이들은 가치전환을 목격했다. 호워프나 나와 같은 올해(혹은 작년이나 내년) 20세를 맞이하는 포스트 911세대는 그날 텔레비전을 통해, 비행기가 빌딩에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한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물론 용과 거미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은유라고 단정하는 것은 과격하고, 위험하고, 경솔하고, 안일하고, 억지스러운 해석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빼앗은 이들과 빼앗긴 이들의 은유라고 보는 편이 맞으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과 거미의 노래>가 모든 가치의 충돌과 통합, 파괴와 재창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 하다. 마치 <어스시를 마시는 소오강호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여기서 나는 단편 연작 <어스시를 마시는 소오강호의 아이들>(이하 어마소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나는 어마소아에 대한 판갤의 여러가지 비난과 비판, 오해에 대해 입을 다물어 왔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털어놓을 수 있는 사실은, 어마소아가 용거노와 같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911의 갑갑함 속에서 세계관에 대한 의문과 고뇌. 그 의문과 고뇌에 대한 해답을 소설로서 풀어내려는 첫 시도가 어마소아였다. 그렇다, 어마소아는 용거노의 쌍둥이 동생인 것이다.

  파멸을 향한 끝없는 의지. 나는 용거노에서 그런 인간 본연의 갈망을 읽어냈다. 아마 어마소아에서도 같은 갈망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4.        결론

  이상이 <용과 거미의 노래>에 대한 캐릭터, 스토리, 세계관에서의 접근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왜' 재미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었을까? 나로서는 자신이 없다. 어쩌면 본의아니게 작품에 대한 지적에 대한 부분이 부각되어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 작품을 하나의 '세계'로서 평가하고 있다.

  작가 호워프는 현재 새로운 작품 <벽돌의 마법사>를 연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용거노에서 보여준 고뇌를 더나은 작품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줄요약- 내년 3/4분기 환상독회는 어마소아로 하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