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문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일까. ‘그’의 존재를 증명해줄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가 범죄자들을 처단하고 다닌다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다. 무법자들의 수가 눈에 띌 정도로 줄기는 했으나 뚜렷한 근거는 안 된다.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다. 허나 그들이 자발적으로 도시를 떠났을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왜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려 들겠는가. 이제는 무법자들조차 뒷골목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흔히 남자로 알려져 있다. 범죄자를 상대하려면 강인한 근력이 있어야하는데 이는 여자의 몸으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한다. 단 몇 초 만에 무법자를 제압하고는 무법자들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한다. ‘그’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는 무법자들을 어떻게 했을까. 우리는 그저 짐작만할 따름이다.


2. 목격자(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글)

- 어젯밤 ‘그’를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려는 말을 믿을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저도 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모두 다 진실입니다. 결코 꾸미거나 만들어낸 얘기가 아니에요. 전 ‘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해요. ‘그’에 대한 소문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그’를 사람들이 만들어낸 존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분명히 존재해요. 어젯밤 저는 ‘그’를 똑똑히 봤어요.

새벽까지 가게에서 일하다 오는 길이었지요. 길거리는 한적하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 걸어가자니 으스스했지만 매일 다니던 길이라 견딜 만했습니다. 집 근처 골목길까지 왔을 때였어요. 다 낡아빠진 집들만 있는 동네인데다 사람마저 별로 다니지 않은 곳이어서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었죠. 전 별빛 의지해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달이 꽉 차 있었다는 게 위로가 되었죠.

그때였어요. 제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건. 뭔가가 바닥에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다시 났어요. 무슨 일일까 겁이 나기도 했지만 궁금한 마음이 컸기에 슬쩍 골목 끝으로 걸어갔어요. 어째 소리를 내면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가능한 조심스럽게 걸어갔죠. 전 벽에 붙어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어요. 그때 전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골목길엔 ‘그’가 있었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을 손에 들고서. 주변이 어두웠지만 전 그 사람이 ‘그’라는 걸 알 수 있었죠. 여태까지 들어온 ‘그’에 대한 소문과 딱 맞아떨어졌으니까요. 검은 옷을 뒤집어쓴 190cm나 2m쯤은 되는 사람이 새벽길을 돌아다닌다면 누구라도 ‘그’를 떠올릴 거예요. 비록 ‘그’의 뒷모습만 보았지만 ‘그’의 강인한 힘과 위엄을 느낄 수 있었죠. 뒤이어 일어난 일은 제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었죠.

‘그’는 들고 있던 사람을 몇 번씩 들었다 내동댕이 치더군요.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어요. 아마 ‘그’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중이었나 봐요. 한동안 ‘그’는 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분이 풀렸는지 들고 있던 사람을 내려놓더군요. 전 이제 그만둘 줄 알았어요. 이미 바닥이 피투성이로 변한지 오래였거든요. 어떤 죄를 지었건 이만하면 죄 값을 치렀다 생각했죠. 헌데 ‘그’는 쓰러져있는 사람의 몸을 하나씩 잡아 뜯더군요. 팔, 다리부터 시작해 머리, 몸통까지 남기지 않고 분해해버렸어요. 전 차마 그 광경을 똑바로 볼 수 없었어요. 아무리 범죄자라곤 하지만 도가 지나친 것 같았어요. 이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그건 나중에야 떠올린 생각이고 당시의 전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벌벌 떨 뿐이었죠. 자칫 잘못하면 저도 저렇게 토막 날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정의로운 인물이라 알려져 있지만 제가 볼 땐 살인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전 ‘그’가 날 발견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그’가 절 보는 순간 제가 토막 나리라는 건 확실했죠. 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물러났죠. 다행히도 ‘그’는 시체를 분해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전 너무도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 뒷걸음질 쳤어요. 차마 몸을 돌려 걸어갈 용기는 없었지만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긴장하며 걷다보니 빨리 걷지 못했어요. 익숙하지 않은 뒷걸음질이다 보니 더욱 그랬죠. 그래도 계속 쉬지 않고 뒷걸음질 쳤는데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밟고 만 거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고 전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도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을 거고 그 순간 제 존재를 알아차렸겠죠. 전 도망가야 된다 생각했지만 두려운 나머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어요. 온 몸이 떨렸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어요. 발을 떼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제 몸은 이미 제 몸이 아니었어요. 사자 앞에선 토끼의 심정이 이와 같았으리라 생각해요. 곧 있으면 ‘그’가 다가올 거고 저는 끝장나겠지요. 토막토막 잘려서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도 못할 상태가 되겠죠. ‘그’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는 서두르지 않았어요.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성큼 성큼 발자국 소리가 커질수록 제 심장은 빠르게 뛰었죠. 결국 전 두려움과 긴장을 이기지 못한 채 쓰려지고 말았어요.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전 이제 다시는 해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유배달부가 절 흔들어 깨웠을 때 당황하고 말았죠. ‘그’는 보이지 않았어요. 분명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절 무시하고 간 거죠. 아직까지도 공포가 남아있었기에 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어요. 문을 잠그고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벌벌 떨었죠. 오후가 돼서야 긴장이 풀린 전 어제 있었던 일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피가 바닥을 흠뻑 적셨으니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으리란 생각이었죠. 아직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 그곳에 다시 갔답니다. 그런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젯밤의 피비린내 나는 흔적은 전혀 보이질 않았죠.

사실 제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누군가에게 어제 겪은 일을 말하고 하소연 하고 싶지만 증거가 하나도 없으니 믿질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럴 바엔 차라리 인터넷에나 올리자는 게 제 생각이었죠. 여러분이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분이라도 믿어주시면 위안이 될 듯하네요. 그럼 이만.


3. 기자들

“요즘 들어 시국이 어지럽다보니 사람들이 영 신문을 읽지 않아. 하긴 나 같아도 신문 읽고 싶은 맘이 안 들겠어. 만날 어렵다 어렵다 힘들다 힘들다는 얘기뿐이니 누가 기분 잡쳐가면서까지 읽으려하겠어. 사건은 매일같이 터지는 데 쓸 기사가 없어. 기사가.”

동석이 불평을 터뜨렸다. 동석은 한 일간지의 기자였다. 동석의 말을 듣고 있던 광호가 입을 열었다. 둘은 입사 동기였기에 제법 친했다.

“진정해. 흥분해봐야 좋을 거 있나. 마침 내가 쓸 만한 가십거리를 하나 물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읽어보겠나? 잘만 하면 대박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뭔데? 어디 보세.”

“여기 게시판에 글이 있으니 우선 읽어보세.”

호기심이 동한 동석은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광호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젯밤 ‘그’를 보았습니다? 요새 유행하고 있는 ‘그’에 관한 글이군. 이거 다 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 아닌가. 이런 걸 기삿거리로 던져주려 하다니 자네도 한물갔군. 나라가 어려울 땐 기이한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야. 구한말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든가 수백 마리의 거북이가 떼죽음을 당했던가 하는 얘기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그’에 관한 소문도 마찬가지야.”

“단지 소문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이상한 점이 많아. 제법 신빙성 있는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는데다가 지명이 언급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조작이라든가 헛소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소문이 소문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지만 이번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다른 지역에 사는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그 말을 믿어도 좋지 않겠어? 실제 범죄율도 최근 들어 급감했고 전과자들 중 상당수가 안 보여.”

“너무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냐? 괜히 쓸데없는 거 취재하러 다니다가 욕만 먹고 자리가 위태로워질지도 몰라. 가뜩이나 경기가 어려운데 몸조심해야지. 정 하고 싶으면 자네가 하게.”

동석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도통 시간이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잖아. 이건 기회야. 무덤을 파는 일이 아니라. ‘그’에 관한 글은 항상 조회 수가 보통 글의 수십 배야.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다는 증거지. 어려울 때일수록 영웅을 원한다고 하잖아. ‘그’야말로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는 인물이지. 술집에서조차 ‘그’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정도야. ‘그’가 있다 없다를 놓고 논하는 사람도 상당수고.”

동석의 표정이 변했다. 조금은 달리 생각하는 눈치다.

“이 일이 실패할 확률은 없어.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잡든 존재한다는 증거를 잡든 간에 특종은 따 놓은 당상이지. 아마 ‘그’에 대해 누군가 기사를 내면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기사를 낼 걸? 사회 통념 상 차마 기사를 못 내고 있을 뿐이지 내심 고민이 많을 거야. 그러니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돼. 늦기 전에 말이야.”



4. 술집에서의 대화

두 남자가 골목길에 있는 삼겹살집으로 들어온다. 한 남자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드러내려하진 않았지만 제법 옷에 공을 들인 티가 났다. 그는 한때 법조계에서 일하다 회의를 느끼고 사회운동에 투신한 강기철이었다. 키가 훤칠한데다 눈빛 또한 강렬해 어떤 사물도 쉽사리 꿰뚫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 주장하면 결코 굽히지 않는 곧은 성격의 소유자이며 뚜렷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남들이 틀리다 말해도 스스로의 신념에 걸맞다면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어떤 비난이나 비판도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다른 남자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사내와는 반대로 왜소한 체격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듯한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옳다 싶으면 쉽게 받아들일 줄 알며 때론 생각을 숨길 줄 알았다. 이는 그의 직업에서 반쯤은 연유했다. 취재를 하다보면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했고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이더라도 받아 적어야했다. 직업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간혹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할 때도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기철은 자신의 주장을 받아주는 광호가 좋았고, 광호는 자신에게 모자란 거친 면모를 가진 기철을 좋아했다. 얼핏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까닭은 이 때문이다.

“자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야기 들어봤나?”

“어떤 얘기 말씀이십니까?”

“‘그’라고 불리는 남자에 대한 소문 말일세. 요새 어딜 가나 그 얘기를 안 하는 곳이 없더군. 단지 소문으로만 넘어가기엔 증거가 너무 많아. 이젠 무시하기 힘들 정도네.”

“저희 신문에서도 한번 다루어 볼까하는 얘기입니다. 잘만 쓰면 특종이 되겠죠.”

“나도 그 사내에게 깊은 흥미를 갖고 있네. ‘그’가 실존을 확신하고 있을 정도지. 모든 소문은 ‘그’가 범죄자들을 처단한다고 말하고 있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고 사람들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범죄자들을 어찌하는 가에 관해서일세. ‘그’가 범죄자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사람을 죽였다면 한 두 사람도 아닌데 증거가 남을 겁니다. 그런데 시체가 나왔단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죽이기보다는 어딘가에 감금을 한 게 아닐까요? 그리 생각하는 게 훨씬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소문의 반만 사실이라 해도 열 명 가까이 가둬두고 있단 소리가 되네. 그 많은 범죄자들을 숨길 장소는 물론이고 먹일 음식을 마련하는 게 쉽겠는가. 도주를 막으려면 지속적인 감시 또한 필요하지. 이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보나?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달리 있을 걸세. 화학약품을 쓸 수도 있고 사람들이 모르는 장소에 묻어버릴 수도 있지. 막말로 시체를 토막 낸 뒤 갈아서 물에 버리면 대체 누가 알겠는가. 방법은 찾아보면 무궁무진하네.”

“범죄자를 잡아오는 사람이 따로 있고 감시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요?”

광호는 처음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이 일은 보통 정신력을 지닌 사람으로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네. 난 그렇게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 둘이나 있을 거라 믿지 않아. 설사 있다하더라도 항시 배신의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지. 만약 내가 ‘그’라면 난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겠네.”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군요.”

“내 줄곧 궁리해오고 있던 생각이 하나 있네만 드러내놓고 말하기엔 위험한 부분이 꽤 있는 생각이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네. 사실 자네를 오늘 부른 것도 이 때문이지.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하지 말게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죄를 없애기 위해 ‘죄’를 짓는다면 그 ‘죄’는 죄일까. 아닐까.”

“극단적인 생각이군요. 선생님께서 말하길 꺼리신 것도 이해가 갑니다. 아무래도 죄를 지었으니 벌을 해야겠지요.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처벌해야할 텐데 살인까지 저질렀다면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네. ‘죄’를 없애지 않으면 더 큰 ‘죄’가 범람하게 되네. 난 그 ‘죄’를 막기 위해서라도 작은 죄는 무시해도 좋다고 보네.”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없애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요?”

“물론 그게 가능하다면 내 이리 고민하지도 않았겠지. 세상엔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처벌할 수 없는 죄인이 많네. 지은 죄에 어울리지 않는 죄 값만 치르는 자도 부지기수고. 법은 악인을 단죄하기 위해 있네. 그런데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누군가 법을 대신해야 되지 않겠나?"

“사회정의를 위한 필요악이란 소리군요. 하지만 사적인 처벌을 용납하다보면 끝내는 사회 질서가 붕괴될 겁니다.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과 처벌받지 않아도 될 사람을 정하는 기준이 대체 뭐죠? 그 기준을 정할 권한이 '그'에게 있다는 소리십니까?"

"그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만 여태까지의 자료를 보면 '그'를 신뢰해도 좋을 것 같네. ‘그’가 처단하는 인물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죽어 마땅한 자들뿐이네. 연쇄 살인 용의자로 떠올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강명석이라든가, 12명의 아이들을 성폭행 했음에도 겨우 5년만 살고 나온 오만오라든가, 전국적인 폭력조직의 수괴로 경찰조차 손대길 두려워했던 김두억 같은 인물이 그 예지. 또 ‘그’는 죄인이 아니면 결코 죽이지 않는 사람일세. 그를 목격하고도 무사했다는 증언이 여럿 올라와 있어. 한 두 사람의 말이 아닐세. 그 말들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믿고 싶네."

“선생님 바람대로 '그'는 제 1의 악인이 되어 악을 모두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는 새로운 정의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도 들 정돕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문제를 불러올 겁니다. 비단 우리가 방금까지 얘기한 문제들뿐만이 아니라요. 전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가고 있죠. 여기 이 고깃집만 해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으론 두려워하고 한편으론 찬사를 보내죠. 날이 갈수록 이 경향을 심화될 겁니다. 끝내는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그'의 행동을 모방하려 이들이 나타나겠죠. 물고기가 많은 물은 맑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할 겁니다. '그'또한 타락시킬지도 모르고요."

"나도 그 점이 염려되는 바이네.”


5. 추적자

난 한 남자를 쫓는 중이다. 그를 찾기 위해 한 달 가까이 밤거리를 헤맸다. 특종에 대한 열렬한 열망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재빨랐고 좀처럼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까스로 흔적을 잡았다 싶어서 달려가 보면 번번이 허탕이었다. 긴 추적기간 동안 내가 그를 실제로 본 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처음 추적을 시작했을 땐 ‘그’를 찾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도무지 행적을 예상할 수 없었고 단서 하나 없었다.

우선 글에 적힌 장소들부터 찾아갔다. 사람들이 '그'를 목격했다 주장하는 장소들로. '그'도 사람인 이상 무슨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으리란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허나 모든 장소에는 먼지 밖에 없었다. 그 흔한 핏자국조차 없었다.

다음으로 난 목격자들을 찾아다녔다. 실마리가 있길 바랐지만 그들도 도움이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글을 올렸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으며 어쩌다 대답을 해 준 이들로부터도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글의 내용을 확인, 확인 또 확인할 뿐이었다. ‘그’는 거대한 몸짓에 가공할만한 힘과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움직임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는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단지 회상만 하는데도 몸을 떠는데 실제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심 떨리면서도 ‘그’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했다.

‘그’는 멀리 가 있었다.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을만큼. 난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난 때론 역발상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가 가 있을 장소에 미리 가 있으면 된다. 그가 처벌할 범죄자를 알 수 있다면 그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는 스스로 찾아올 것이므로.

경찰서와 연줄이 닿아있었기에 ‘그’가 처리했다 추정되는 사람들의 목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사망자나 다름없었다. 난 목록을 바탕으로 추리를 했다. 그 결과 ‘그’가 어떤 기준으로 범죄자를 선별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에겐 규칙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장 죄질이 나쁜 범죄자부터 처단했다. 그 판단은 대중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지만은 않는 이유였다. 전혀 악인이라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처단을 당한다면 사람들은 자신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누가 봐도 분명히 죄를 지은 이들만 처단 당한다면 겁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일종의 쾌감마저 느낄 거다.

나는 다음 차례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몇 골랐다. 그 중 한사람이 유력한 후보였다. 박두환은 전직 대통령으로 재임시절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살육했고 부정부패로 수 만 명이 쓰고도 남은 재산을 축적했다. 재판을 통해 박두환의 죄가 낱낱이 폭로, 인정되어 사실상의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지만 고작 1년의 형을 살고 특사로 풀려났다. 바로 어젯밤에. 사람들은 정의가 죽었다 말했고 공공연하게 정부를 비난했다. 감옥에서 죽어도 마땅한 인물을 풀어주다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고. 한 가지 걸림돌만 없었더라면 고민 없이 박두환이 '그'의 목표물이라 생각했을 거다. 허나 여태까지 '그'는 정치색이 없는 인물만 처단했다.  순수하게 죽어 마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만이 목표물이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중립이었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게 '그'의 원칙인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가 진정으로 죄인을 심판하고자한다면 박두환을 내버려둘 리가 없다. 어쩌면 '그'가 박두환을 심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나또한 박두환이 죽어 마땅한 이라 생각했고 누군가 박두환을 죽여주기를 원했으니까. 저녁 10시가 되자 박두환의 집에서 200미터 떨어진 길에 차를 세우고는 안에서 기다렸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으슥한 곳에서 따로 범죄자를 단죄한다고 한다. 난 이 근처에서 인적이 드문 곳을 두 군데 알아놓았다. '그'가 두 곳 중 하나를 선택할 확률은 매우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데리고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야하는데 그건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일 거다. 일을 결행한다 해도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오늘 밤이 될 수도 내일 밤이 될 수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밤 뿐이었다. 그래도 난 기다렸다. '그'가 나타날 거라 확신하고서.

4일째 밤이었다. 계속 밤을 새다보니 무척 지쳐있었고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 그러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내 차 옆을 지나고 있었다. 잠깐 조는 사이 사건이 터진 모양이었다. 졸지 않았으면 '그'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었다면 바로 대박이었을 텐데 눈앞에서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내 태만함을 반성할 틈이 없었다. 바로 시동을 건 뒤 출발했다. 이대로 뒤를 따라가면 늦는다. '그'는 추적자들을 쉽사리 따돌릴 게 틀림없었다. 그리곤 못 다한 일을 마저 하기 위한 장소를 찾을 게다. 난 그쪽으로 가야했다. 두 곳 중에 어디에 '그'가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장소 간의 거리는 7km에 불과했지만 한 곳에 갔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까지 적어도 5분은 걸릴 터였다. 5분이면 '그'가 일을 마무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일 수도 있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한 쪽을 고르면 한 쪽은 포기해야했다. 두 곳 중 하나는 '그'가 도망간 방향과 가까웠고 다른 한 곳은 멀었다. 몇 번씩이나 생각을 뒤집고 뒤집은 끝에 결정을 내렸다. 조금 더 먼 장소로 가기로. 추적자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곳 주위에서 일을 처리하기 보다는, 추적자들을 엉뚱한 곳에 떼어놓고 안전하게 일을 하는 게 나을 거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다. '그'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다. 차를 속력으로 몰았다.

도착하는데 겨우 7분이 걸렸다. 차보다 빨리 도착할 순 없을 테니 내가 먼저 도착했을 거다. 1분, 2분, 3분이 지났다. '그'는 오지 않았다. 5분, 10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난 점점 초조해졌다. '그'가 이곳으로 오기는 올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그'가 보통 사람의 기준에 맞춰 행동한다 해도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생각하는 게 나와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다른 쪽으로 갔다면 일을 끝내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난 차 밖으로 나왔다. 허나 그것이 실수였다.

차에서 내리며 차문을 닫았다. 몸에 베인 습관이었기에 주의해야겠단 생각조차 못했다. 차문 닫히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난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순간 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난 누군가 있을 거란 걸 알았지만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한동안 기이한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극도로 긴장된 나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내가 먼저 결단을 내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가면 될 거다. ‘그’도 내가 ‘그’를 확인하지 않는 한 구태여 따라오진 않을 거다. 그런데 그만 실수를 했다. 앞으로 가야하는데 뒷걸음질을 치고만 것이다. 내 몸이 그와 닿았고 그 순간 소름이 끼쳐 올랐다.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뒷걸음질 치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그’는 검은 두건 쓰고 있었기에 눈코입만 보였다. 난 ‘그’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엔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귀기와 광포함이 들어있었다. 초록색 안광에 빛이 차오르며  맹렬하게 쳐다보는 모습은 먹잇감을 찾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형형한 눈동자를 번득일 때마다 감출 수 없는 야성이 드러났다. ‘그’는 광기의 화신이었다. ‘그’의 눈을 보고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광인일 것이다.

난 어째서 사람들이 증거를 단 하나도 내밀 수 없었는지 이해했다. 그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에게 압도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그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증거 따위가 생각날 리가 만무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난 ‘그’의 입도 보고 말았다. 입가엔 피가 가득했고 검은 두건은 피로 물들어 검붉게 변해있었다. 난 그가 시체들을 어떻게 했는지 알았다. 그는 그 시체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던 것이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시체를 찾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식육을 목격한 날 내버려둘 리가 없다. 단지 살인을 목격한 이들과 난 달랐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은 수 십 배씩 빨리 뛰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그’와 나의 거리가 계속해서 줄어든다. 소름이 돋는다. 두렵다. 미치겠다. 달아나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그가 다가온다. 제발, 제발. 으아아악.


6. 사회운동가 강기철의 글

- 이 글은 외부로부터 투고된 글로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새 단연코 화제가 되는 인물은 ‘그’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라는 사람이 범죄자를 처벌하고 다닌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수많은 범죄자들이 이를 반증한다. 경찰들도 ‘그’를 찾느라 혈안이다. 논란의 대상이 됐던 전직 대통령 박두환도 ‘그’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경찰에선 아직 생사가 확실하지 않다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 전 대통령이 죽었다 믿고 있다.

‘그’는 판사이자 사형집행인이 되어 범죄자들을 죽이고 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엄연한 범법자다.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죄를 지었으면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와 같은 인물이 나왔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몸이 아프면 백혈구가 몸을 스스로 치유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 정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상황이기에 ‘그’와 같은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그’를 벌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반성해고 고쳐나가야 한다. 설령 ‘그’를 잡아 가둔다 해도 병폐가 남아있는 한 또 다른 ‘그’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문제다. 최근 한 일간지에 기사가 하나 실렸다. ‘그’가 사람을 먹기 위해 범죄자를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적이고 생생한 글이었기에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신문도 다 같은 신문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신문이 있고 소설로 받아들어야 할 신문이 있다.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주장을 신뢰해선 안 된다. 상업적 이득을 위해 국민들을 기만하려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소문들이 퍼지면 퍼질수록 민심의 혼란은 가중된다. 우리는 항시 비판적으로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7. 대화

기철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광호 때문에 오후 내내 한가로이 책을 읽으려던 계획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웬일인가 자네.”

광호는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선생님이 쓴 글 봤습니다.”

“어떤 글? 아, 그거. 뭐 문제되는 거 있나?”

“선생님께선 저희 신문이 낸 기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계시더군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하시면서요. 하지만 그 글은 진실입니다. 비록 사진 한 장 없지만요.”

“기사 날조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제 동료인 최동석 기자가 분명히 경험한 일입니다. 직접 그를 봤다면 선생님도 함부로 말하진 못하셨을 겁니다. 그는 이틀 동안이나 혼수상태였어요. 깨어나서도 충격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죠. 그러다 며칠 전에야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진실을 전해야한다는 일념 하에
기사를 쓴 겁니다.”

“난 아닌 것을 아니라 했을 뿐이네.”

“아직까지 어떤 상황인지 파악을 못하셨군요. 지금 선생님이 쓴 글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기자를 당장 사임시키고 신문사 차원에서 사과를 하라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 십 통씩 걸려옵니다. 모두 다 ‘그’의 추종자들이겠지요. 선생님 글은 그들을 부추긴 꼴 밖에 안 됐습니다. 그들은 ‘그’를 신격화하고 있었는데 식인이라니 보통 사람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충격적인 진실에 추종자들이 떨어져나갈 판국이었죠. 헌데 그 순간 선생님의 글이 나온 겁니다. 공개적인 언론에요. 선생님은 기사를 반박하고 ‘그’를 은근히 지지했죠. 그들은 선생님 덕에 다시금 힘을 얻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결속은 더욱 강해지겠지요. 곧 있으면 ‘그’를 따라 범죄자들을 죽이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사회 정의 구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지. 방법은 좀 거칠지라도.”

“선생님마저 ‘그’의 추종자가 돼버리신 겁니까? 예전에는 달리 말하셨던 것 같은데요.”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일세. ‘그’ 덕분에 이 사회가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모르겠나? 큰 목적을 위해선 약간의 희생과 부작용쯤은 감수할 수 있어야해. 자네말대로 추종자들이 난리 법석을 피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한때네. 결국에 혼란은 수습되고 사회는 긍정적으로 변할 걸세.”

“정말 답답하군요. 추종자들이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선생님은 저희 신문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로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저희 신문과 최동석 기자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선생님 같이 영향력 있는 분은 글 하나를 쓰더라도 신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쓴 글은 개인적인 감정 표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철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기철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말했다.

“난 잘못 한 게 없네. 자네야말로 고지식한 틀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구만. 자네와 이리 말다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참 아쉽군.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사과만 하시면 다 해결될 일입니다.”

“그 얘기 더는 하지 말 게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좋습니다. 후....... 어차피 말해봐야 설득될 분도 아니고 저희가 알아서 해결해야죠.”

“됐나? 이제?”

“한마디만 더 하죠. ‘그’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또한 한명의 사람일뿐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초인일지라도.
저는 ‘그’가 법을 대신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정의로운 인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욕망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있을 수도 있죠. 죄인만 골라 죽이는 건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객관성을 잃으셨기에 주제넘게 참견해봤습니다.”

“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입장이 뚜렷해질수록 ‘그’의 활동 영역도 넓어지고.......”

딩동~ 딩동~
벨이 울린다.

“택배인가 보군. 마늘 즙 주문한 게 있거든. 잠시만 기다리게.”

“누구시죠?”

“한전 택배입니다. 강기철 씨 댁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기철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일련의 사내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손들어!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움직이지 마라.”

“무, 무슨 일입니까?”

반정부적인 인사를 옹호하고 정부를 비판한 게 총구를 갔다댈 정도의 큰 죄였단 말인가. 기철은 이 나라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일단 총 내려놓고 얘기하시죠. 설명을 하시면 다.......”

“움직이지 말라니깐!”

탕!

앞장 서 있던 경찰이 총을 쏘았다. 그 순간 기철은 보았다. 광호가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8. 심문

“정말 몰랐습니까? 당신 둘은 굉장히 자주 만나는 사이였는데?”

“몰랐습니다. 그는 저에게 아무런 언급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 광호가 ‘그’일거란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지금도 전 이 모든 게 거짓말 같습니다.”

“좋습니다. 아무래도 진실인 것 같군요. 우리도 당신 말을 믿겠습니다. 저희도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사실 우리가 주시했던 대상은 바로 당신이었죠.”

“네?”

“우연히 고깃집에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꽤 강한 인상을 받았지요. 그래서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여러모로 우리가 뽑아낸 프로파일에 적합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뛰어난 지능을 가진 독신남성이며 냉철한 인물이라 생각했죠.
매일 밤 돌아다녀도 의심할 가족이 없어야하며 뚜렷한 소신과 일관된 생각, 강인한 추진력을 갖고 있어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반사회적인 인물이어야 했죠. 딱 당신이었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데다 일관되게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죠. 어떤 소리를 들어도 논조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물론 독신이었구요. 달리 용의자도 없었던 터라 우리는 당신을 중점적으로 감시했습니다. 동시에 당신 주변 인물도 주시했죠.”

“어떻게 됐는지 알 것 같군요. 절 감시하다 광호가 눈에 띄었고 광호를 감시하다가 흔적을 발견했다?”

“맞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죠. 그는 거의 매일같이 밖으로 나갔는데 뚜렷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나갔다 온 날이면 범죄자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우린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 여러 번 추적을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그를 놓쳤고 그럴수록 의심을 커져갔습니다. 그를 체포하고 싶긴 했지만 마땅한 증거가 없었고 잡아봐야 석방될 게 뻔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박두환을 죽였고 이로 인해 정부의 압력이 거세졌습니다. 우린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았습니다. 사실, 문을 열고 총을 들이밀 때까지 우린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우린 당신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하, 하하.”

지레짐작하고 스스로 무덤을 팠단 말인가?  


“그는 죽었습니까?”

기철은 아까부터 입안을 맴돌던 말을 했다. “죽지 않았습니다. 총알을 12발이나 맞았는데도 살아있죠. 점차 상처가 아무는 중입니다. 놀라운 생명력이죠. 믿을 수 없을 정돕니다.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회복 될 것 같아요.”

“혹시 그를 볼 수 있을까요?”

“안됩니다. 경찰 7명이 죽고 20명이 다쳤습니다. 그 중 5명은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런 인물을 내버려둘 수 있을까요? 그는 철저한 감시 하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재판때까지 아무도 만날 수 없어요.”

“아무래도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강대하다 들었습니다만 광호는 약골입니다. 키도 기껏해야 170밖에 안 됩니다. 광호는 소문하고 너무 달라요.”

“사람들은 자신이 용기 있다 생각하죠. 자신들이 용기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소한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할까요? 자기도 모르게 합리화를 한 거죠.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그도 스스로 인정을 했습니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는데 이젠 현실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심문은 여기까지 하죠. 쉬다보면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기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9. 편지

이 편지는 살인마 박광호가 강기철에게 보낸 것이다. 본보는 편지를 입수하는데 성공하였기에 이를 게재한다. 지면관계상 일부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한다. 전문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 (전략)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죽인 날 저는 집안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된 채 개를 파묻고 있던 저를 발견하셨고 저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왜 돌아올 수 없는지, 제겐 가족이라곤 어머니 밖에 없는지 그제야 알았습니다. 광기가 집안을 몰락하게 만든 것이지요. 광기가 시작된 건 조부 때였습니다. 그때 조부께서는 함경도 장평에 살고 계셨는데 일제의 수탈에 풀칠하기도 힘드셨죠. 하는 수 없이 국경을 넘어 만주지방으로 일거리를 찾으러 다니셨는데 거기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결국 모두들 꺼리는 한 탄광에서 가까스로 일을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파내기만해도 광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갱도가 깊고 지반이 약해 일주일에도 사람이 5~6명씩 죽어나가는 곳이었죠.

처음 몇 주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합니다. 조부께선 딱 1년만 일을 하고 돌아가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탄광이 무너져 내려버린 겁니다. 탄광에 들어간 수 십 명의 사람이 꼼짝없이 죽을 판국이었죠. 무너진 탄광을 정리할 인력도, 기술도 없었기에 탄광관계자들조차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탄광이 무너진 지 22일이 되던 날
조부께서 갑자기 돌무더기를 뚫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옷은 모조리 찢어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온 몸은 피투성이였는데 상처하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지만 증조부께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부께서 돌아오신 뒤에 태어난 것이 제 아버지입니다. 조부께는 자식이 셋 있었는데 제 아버지께선 셋째였습니다. 첫째 아버지께선 강제 징집을 당해 끌려가셨다 돌아오지 못하셨고 둘째 아버지께선 폐렴에 걸려 돌아가셨으니 실질적으로 남은 자식은 제 아버지뿐이셨습니다. 조부께선 바깥출입을 삼가셨고 가능하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했답니다. 사람 사귀는 걸 좋아했던 분이었는데 예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제 추측에 불과하지만 조부께선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조부께선 나날이 불안해지셨고 끝내는 집을 나가셔서는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일이 터진 건 얼마 후였습니다. 조부께선 단신으로 경찰서에 들어가 일제의 앞잡이 수 십 명을 죽이고는 사살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부의 의기를 칭찬했지만 저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부께선 도무지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누군가 사람을 죽이지 않고선 견디실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끝내는 그런 방법을 택하고 만 겁니다.

조부께서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께선 독립투사의 아들로 암암리에 지원을 받으며 문제없이 성장했다 합니다. 그러다 독립이 되었고 아버진 조부의 후광 덕에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전쟁만 터지지 않았다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갔을 겁니다. 두 모자는 전쟁을 피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와중에 아버지께선 피와 살점이 날아다니는 살육의 현장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미친 자들보다 더 광기에 물들어 있었고 전쟁의 경험은 아버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광기가 깨어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처음엔 단지 씨앗뿐이었지만 씨앗은 자라기 마련입니다.

남쪽엔 연고가 없었고 가난한 두 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조모께선 온갖 궂은일을 하셨고 아버지께서도 어머니를 도와가며 틈틈이 학업을 계속해나갔습니다. 매 순간 순간이 쉴 틈 없는 나날이었기에 아버지는 광기에 물들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보면 다행이고 어찌 보면 불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여유가 있었더라면 전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쳇바퀴 같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바빴기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정부에선 군인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에 파견하기 위함이었죠. 높은 보수가 보장되어있었고 공까지 세우고 돌아온다면 앞날은 확실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위해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은 억제하고 있던 광기를 몇 배로 키워냈습니다. 광기는 전쟁이란 양분을 바탕으로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아버지는 무수한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끝에 전쟁 영웅으로 거듭났습니다. 국가에서조차 아버지의 공을 높이 살 정도였지요.
허나 전쟁은 결국 끝이 났고 아버지는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광기의 맛을 볼대로 본 사람이 보통 삶을 해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속 불길을 참아낼 뿐이었습니다. 병사들을 폭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테니까요.

아버지는 결혼을 할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미친 피를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강하게 끌렸고 결심을 바꾸게 됩니다. 광기는 정열로 바뀌었고 아버지는 매일같이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가 광기로 점철된 집안 사를 들으신 것도 이때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정성에 감동한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하룻밤의 소산이 바로 저입니다. 달콤하고도 짜릿했던 밤이 지나고 아버지는 후회하셨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또 다른 광기의 씨앗을 뿌릴지도 모르겠다는 게 그 이유였겠지요. 아버지는 뱃속에 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셨죠.

병사들이 아버지의 폭행을 폭로한 것은 이때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철창에 끌려가셨다 끝내는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결국 저는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단지 아버지께서 우리 모자를 버린 줄로만 알았죠.

어머니는 집안의 과거를 잘 알고 계셨기에 교육에 온 신경을 집중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내면에 미치광이 같은 면모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정성이 광기를 씻어 내린 것이지요. 제가 17살 때였습니다. 학교를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지요. 사거리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뛰어가더군요. 마침 차가 지나다니질 않았거든요. 그때였습니다.
멀리서 달려오던 트럭이 그 얘를 쳐버렸습니다. 그 얘는 순식간에 몸이 찌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움직이질 않더군요. 전 그날 처음 시체를 보았습니다. 길바닥에 흩뿌려진 피와 일그러진 살점은 절 흥분시키더군요. 단지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도 비상한 쾌감이 느껴졌습니다. 곧이어 사람들이 달려와 시체를 수습했기에 더는 볼 수 없었고 전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방금 전 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죠.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 몸이 떨리고 심장이 격하게 뛰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죠. 다시 한 번 그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현장은 정리됐을 확률이 컸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전 집에서 기르던 개를 떠올렸습니다. 사람과 다르긴 하지만 개도 피와 살점을 지닌 존재니까요. 개를 죽이는 순간 아까 느꼈던 짜릿함이 살아났습니다. 개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저를 더 흥분시켰죠. 하지만 숨을 끊고 나니 흥분이 가라앉았고 허무함만이 밀려왔습니다. 동시에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죠. 일단 개를 마당에 묻은 뒤 나중에 처리하자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헌데 제가 개를 묻으려는 찰나 어머니께서 그 광경을 보신 거죠.

어머니는 모든 얘기를 마치신 뒤 눈물로서 호소하셨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고생을 익히 봐왔기에 차마 어머니의 말씀을 거스를 수가 없었죠. 그 날 이후로도 살육을 저지르고 싶단 충동이 일었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며 참았습니다. 가끔씩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만 동물을 잡아 죽였죠.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러다 전 군 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규칙적이고 빈틈없이 틀에 박힌 생활은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욕구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지만 해소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사회와는 달리 동물을 죽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첫 휴가 때 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동물로는 해소할 수 있는 욕구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한번 사람을 죽이고 나니 그 다음은 쉽더군요. 십년 전에 일어난 의문의 연쇄 살인은 모두 제가 저지른 짓입니다. 복무기간동안 전 모두 세 명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면서 제가 마음 편했던 건 아닙니다. 죽이는 순간순간에 쾌감을 느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가 도덕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셨고 항시 전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모든 쾌감의 순간이 지나간 뒤엔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회의가 들었죠.

욕망을 못 이겨 살인을 하고, 후회하고, 욕망을 못 이겨 살인을 하고, 후회하고, 이런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전 하나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한다면 죽어 마땅한 사람만 죽이자. 그게 바로 제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머니도 돌아가셨기에 거리낄 게 없었죠. 살인을 하면 할수록 전 더 많은 피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거리엔 범죄자들이 끊이질 않았죠. 잡히지만 않았다면 전 죽을 때까지
악인의 피를 빨아먹고 다녔을 겁니다. 사람들이 절 정의의 사도로 칭송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지만 전 제 주제를 알았습니다. 전 욕망에 찌든 살인자에 불과했습니다. (후략) -

10. 재판

모년 모시 모월 살인마 박광호의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시작한지 10분 만에 끝났다.

“피고인 박광호를 경찰 9명을 살해한 죄로 사형에 처한다.”

형은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재판으로부터 3일 뒤 박광호는 사형 당했다.

11. 결(結)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이게 누군가? 재현이 아닌가.”

재현은 기철의 학교 후배로 재학시절엔 친했지만 졸업 후 자연히 멀어지게 된 친구다.

“저녁 드셨나요?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마침 나도 안 먹었네. 근처에 내가 잘 아는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세.”

둘은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요새 하는 일은 잘 되고 있고? 아직까지도 그 일하나?”

“그만둔 지 꽤 됐어요. 요즘은 부동산 쪽에서 일합니다.”

둘은 서로 어떻게 사는 지를 물었고 기탄없이 대답했다. 술잔이 여러 차례 오갔고 비워진 병만 벌써 두 병째였다.

“그런데, 선배님.”

“뭔가?”

“막상 말하려니 조금 걸리긴 하는데 워낙 궁금했던 터라.”

기철은 술기운이 올라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개의치 말고 말해보게.”

“박광호 말입니다. 그는 정말 미치광이였을까요?”

“음, 그 얘기 말인가.......”

잠시 기철이 뜸을 들이는 사이 재현이 이때다 싶어 말했다.

“그는 범죄자를 죽이기 시작한 후로는 단 한 번도 범죄자 아닌 사람에게 손 댄 적이 없다 합니다. 평소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었구요. 만일 경찰이 그를 잡지 않았다면 그는 범죄자를 계속해서 없애 이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는 영웅이 될 수도 있었어요.”

기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모르겠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세.”

기철은 조용히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기철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