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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서 떫고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담배연기 색의 몽롱함이 방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꿈과 모호함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류정에게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는데, 마셨는지 마시지 않았는지 기억에 없었다. 목이 마르고 시야는 흐리멍텅했다.
진정 지독한 꿈이다. 아, 조금만 더 깊은 잠에 빠진다면 헤어 나올 수 있을까, 꿈속에서 느끼던 슬픔, 가을의 한 가운데 있는 듯한 지독한 슬픔. 하지만 그 슬픔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그 슬픔을 인지하고도 나의 영혼은 버틸 수 있을까.
물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 물을 떠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발을 옮겼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두운 집안에서, 나는 가까스로 냉장고 앞에 이르렀다. 4인 가족이 쓴다고 해도 부족할 것 같은 커다란 냉장고, 류정은 이런 냉장고를 쓰는 게 꿈이라며 형편에도 맞지 않는 이렇게 커다란 냉장고를 샀었다. 꿈이라기에는 지독하게 소박했지만, 얼마나 행복했던가. 아니, 행복에 목마른 자들에게는 발을 담그는 것 정도의 행복은 얼마나 커다란 것이었던가.
- 연영아, 나 이런 냉장고를 가지는 게 꿈이었어! 어때 어때?
- 할부금은 어쩌려고 인간아!
- 히잉..
혼자 쓰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텐데, 이런 냉장고 따위에 행복해하던 사람은 이제 없다. 혼자, 혼자, 슬픔, 혼자.
"하아..."
커다란 냉장고 안을 홀로 을씨년스럽게 지키고 있던 물통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대로 냉장고 앞에 쓰러졌다. 맑은 물통사이로 바깥 풍경이 일그러져 시야로 들어왔다. 네온사인과 녹아내리는 달. 소년은 심호흡을 했다. 몽롱함과 함께 수마가 덮쳐왔다. 아, 물통이 아닌 눈으로 보는 세상도, 물에 빠진 듯 일렁이는 8월의 밤이었다.
"흐아아암"
아직 파릇파릇한 십대인 소년의 몸뚱이는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는 추운 곳에서 쪼그려 앉아 자도 힘이 넘쳤다. 비록 허리는 조금 당겨왔지만, 셋방이란 곳에서 자는 건 으레 그런 것이어서, 소년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화장실 세면대로 갔다. 곳곳에 곰팡이가 슬어 화장실인지 세균배양실인지 알 수 없는 곳이었지만, 소년은 자연스럽게 칫솔을 꺼내 소금을 듬뿍 퍼 이를 닦았다.
"염병"
이사이로 소금이 껴대는 바람에 이빨이 더 상하는 거 아닐지 모르겠다. 소년, 연영은 입안가득 느껴지는 꺼끌꺼끌함을 물로 헹궈버리고, 세면대에 걸린 거울 속 자신과 마주했다. 한국인이 맞기는 한 것일까, 새하얗게 탈색된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피가 일렁거리는 듯한 붉은 눈. 몸에 멜라닌 세포가 없이 태어난 특이한 돌연변이 체질, 쉽게는 백색증, 어렵게는 선천성 색소부족. 덕분에 자외선이나 직사광선을 맞으면 피부가 따갑고 심하게는 화상도 입지만, 그것 외에는 건강상의 문제없었다. 물론, 이 폐쇄성 강한 동양의 작은 반도국가에서, 이런 특이한 외모는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초례한다.
"그러니 이런 가발 따위를 쓰는 거지"
어느새 평범하고 칙칙한 교복을 챙겨 입은 연영은 가방과 가발을 챙겼다. 붉은 눈이야 색 렌즈로 가리고, 하얀 머리는 말아 올리고, 그 위로는 검은 색 가발을 눌러 쓴다. 거울을 보니 평소보다 만족스럽게 변장이 되었다. 가발도 뜨지 않았고, 눈도 아프지 않고, 단지 어젯밤 "꿈" 때문에 눈가에 눈물자국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까, 병적으로 새하얀 피부 때문에 조금 가녀리게 보이긴 하지만 가녀린 미소년은 분명 장점이지 단점이 아니라고.
"...다녀올게"
얼마나 오랫동안 기름칠을 안했는지 비명을 지르는 문을 나서며, 소년은 아무도 없는 집에게 인사했다.
과학의 끝은 어디일까? 인간은 산을 뒤엎고, 바람의 속도로 날고, 우주로 나아가며, 생명을 창조해낸다. 아아, 그렇다. 인간은 이미 과거 자신들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창조 된지는 지는 알아도, 어째서 창조 된지는 모른다. 그들은 인간을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이 무엇이냐는 본질적 물음에는 대답만 할뿐. 해답을 알지 못한다.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미궁. 그 깊은 어둠 앞에 선 과학자들은 말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인간들은 결국 그 문제를 외면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과학이라는 광신 앞에. 그가 나타났다.
미르천. 세상을 거부하는 초록색머리, 초점 없는 눈동자. 그리고 팔목에서 끝없이 흐르는 피. 불타는 성경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채, 스스로 미르천이라 칭했다.
그는 과학의 파멸을 예언했다. 이대로라면 세상은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모두 회계하라! 하지만 파멸을 예언하는 대부분의 예언자가 그러하듯, 세상은 그를 외면했다.
그는 3년간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누군가는 그가 미쳤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단순한 관심부족이라고, 누군가는 비범한 인물이라며 추켜세웠지만, 그는 단지 세계를 떠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의 그날, 인간은 진화했다.
검은 단발머리 가발을 쓴 소년, 연영은 간단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짜증. 그는 오랜만에 일찍 일어난 김에 조금 돌아서 가지만 싼 버스를 탔고, 그 버스노선은 왼지 통행 금지가 되어있고, 덤으로 찌는 날씨, 덤에 덤으로 버스 에어컨은 불량! 아아, 1년치 액땜을 여기서 하는 구나. 연영은 통풍이 안 되서 땀이 차기 시작하는 가발을 박박 긁으며 괜한 짜증을 부렸다.
"아으.. 설마 지각까지 하는 건 아니겠지"
연영은 그렇게 한숨 섞인 말을 내뱉고는 푹푹 찌는 버스가 아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4차선, 정신 나간 듯 열기를 내뿜는 태양 아래로 새카만 험비 한 대가 묵직하게 서있었다. 무광처리를 한 듯, 검은 색 주제에 땡볕아래서 빛 한 점 반사되지 않는 모습은 약간의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는데, 과거 20세기부터 미군용 차량으로 쓰여온 차량이 서울도심 4차선에서 서있는 모습은 기묘하기 까지 했다. 거기다 험비는 민간용으로 나온 허머도 아니니... 평소라면 관심을 가지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연영에게는 자동차를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
-콰아앙!
통제표지판 뒤에서 일단의 폭발이 일어났다! 빵빵거리던 경적이 멈추고, 차선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폭발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회백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아아악! 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빛과는 하등 상관없는 소리는 손쉽게 연기를 통과해버렸다. 도로 전체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에어컨 때문에 창문까지 모두 닫고 있던 운전자들에게 들릴 만큼 크고 처절한 비명소리.
"뭐..뭐꼬, 영화 촬영이라도 하는 기가?"
약간은 낙천적인 인상의 버스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썼다. 언제인가 리얼성을 살리기 위해 실제로 도시를 통제한 헐리웃 영화가 있다고 하던데 그것을 밴치마킹 하는 건가?
하지만 버스기사의 낙천적인 예상과 달리, 도로는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뚜둑. 뚜둑,
침묵사이로,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 꺾는 소리 같기도 하고, 비트는 소리 같기도 하다. 고무 속에 있는 파이프를 꺾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아니, 파이프는 텅 비어있으니 이런 소리가 날 리 없다. 마치... 닭뼈를 꺾을 때 나는 소리처럼 들리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꿀꺽
버스의 기묘한 침묵사이로, 승객 중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동시에,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풍이 불어와 통제표지판 뒤의 연기를 천천히 몰아냈다.
"...맙소사"
연영은 천천히 걷혀지는 연기를 보며 신음했다. 마치 산처럼 쌓여있는 승용차와 인간, 아니, 마치 골격인형처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지가 꺾여 피를 뿌리는 시체들의 산.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 모습에, 기묘한 침묵은 10초정도 더 흘러갔다.
"꺄아아!"
총의 해머가 총알을 때리 듯, 작은 소형차에 앉아 있던 여성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아니, 격발이라고 해야 할까? 그 비명과 동시에, 도로는 패닉상태에 빠졌다.
"우웨엑"
"어서 차빼! 이 미친놈들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이시여..."
시체를 보고 정신없이 토하는 사람, 차를 후진하기 위해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까지... 하지만 도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연영과 같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한 채 멍하니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퍼엉!
폭발음과 함께 비명을 지르던 여성의 소형차가 꺾였다. 차의 앞바퀴와 뒷바퀴가 부딪히고, 차의 중앙 부분은 불성 사납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표현 그대로, "ㄱ"자로 차가 꺾여버린 것이다! 연영은 안에 있던 여성이 걱정 되 눈을 좁혀봤지만, 보이는 건 차 창문 가득히 펴발라진 붉은 피 뿐이었다.
"미친!"
연영의 외침과 동시에, 공포에 휩싸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차에서 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공포를 더한 공포가 짓눌러 버린 것이다. 일단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기 시작하자, 패닉상태였던 도로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기 시작했다. 도망가던 사람들은 후진하던 자동차에 치여 넘어지고, 넘어진 사람들 위로는 도망가는 사람들의 발이 그들을 밟고 도망친다.
재앙은 생존본능을 부르고, 본능은 이기심을 낳고, 이기심은 사람의 죽음을 빗는다.
"추악하군"
끔찍하게 비틀어진 소형차의 잔해 위에서, 변성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색 자켓과 청바지,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지저분한 갈색머리. 그리고.... 너무나 이질적인 보랏빛 눈동자.
"하지만...이 추악함을 관람해줄 손님에게 너희의 추악함은 좀 모자란 감이 있구나."
소년의 입술이 말려 올라가고, 그의 눈에는 기묘한 기쁨이 차올랐다.
연영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체로 산이 쌓이고, 눈앞에서 자동차가 비틀어지고, 살기위해 사람이 사람을 밟아 죽이며 도망친다. 이런 것이 현실일리 없어! 강한 부정과 함께, 바들바들 떨며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이 아까 전에 본 허머로 향했다.
순간. 새카만 허머의 문이 열리고 회백색 코트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검은 생머리와 검은 눈동자와 대비되는 새하얗고 가녀린 얼굴, 지나가다 한번쯤 돌아볼 정도의 외모의 소녀였지만, 패션센스는 외모와 비례하지 못한 듯, 기다란 바바리코트 안으로 사우스파크의 케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와 핫팬츠를 입고 기하학적인 모양이 그려진 샌들을 신고 있었다.
"오셨군요."
허머를 주시하던 보라색 눈의 소년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한 그 미소는 한편으로는 너무 매혹적이어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했다.
"미친놈, 꼴에 남자란 거냐? 저지르면 참 크게도 저지르네, 뒷감당도 못하면서 말이지."
회백색 코트의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소년을 향해 중지를 들어보였다. 주요 기관이 꺾여서 그런지, 비틀어졌던 작은 소형차가 폭발을 일으켰다.
"거기다 무대도 조잡해"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멈춰있는 버스를 바라보았다. 순간, 굳어있던 연영과 눈을 마주쳤다. 연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돌렸지만, 소녀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민간인을 끌어들이다니, 조잡하다 못해 추악하군."
"제 무대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당신을 위해 정성껏 준비했답니다. 오만의 성녀."
바로 옆에서 자동차가 폭발했음에도, 보랏빛 눈의 소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특유의 미소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철없는 수컷들이 싸질러 놓은 총알은 항상 지저분한 법이지. 더욱이, 그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놈의 것이라면."
소녀는 소년의 미소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주인을 잃은 차가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도로로 뛰어들었다. 차와 차 사이를 타넘으며 달려오는 회색코트 소녀의 속도는 경이적이기까지 했다.
"아아, 열정적인 관객은 배우를 즐겁게 하는 법이죠!"
분명 적의를 가지고 달려오는 소녀를 보면서도, 소년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발을 들어 아스팔트로 포장된 땅을 굴렀다. 순간, 소년 주변으로 미증유의 힘이 퍼져나갔다.
-쿠구궁!
아스팔트가 반으로 꺾이고, 토사가 위로 솟구쳤다. 마치 천막 속에서 무언가 솟아난 것처럼, 아스팔트를 받쳐주고 있던 땅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 영향으로 땅과 함께 솟아오른 자동차들은 중력과 함께 쓸려내려 갔다. 한 대 중량만으로 인간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자동차가 해일이 되어 도로를 휩쓸었다!
"What the..."
막 에쿠스를 뛰어넘던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어짜피 직각으로 가속이 붙지 않는 이상 그녀에게 밀려오는 자동차는 귀찮은 장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추락하는 버스 안에 있는 소년에게는 재앙일터.
"쳇"
위기에 처한 민간인과 이 모든 재앙의 근원, 어린양과 늑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목동의 갈등이 그녀를 덮쳐왔다.
"어린양에게 구원을"
애석하게도, 그녀는 양치기가 되지 못했다. 사냥꾼, 오직 늑대를 사냥하기 위해 존재하는 늑대사냥꾼! 그녀는 작게 성호를 그리곤 자동차 더미 뒤에서 미소 짓는 녀석에게 뛰어 들었다.
"아직 종막은 멀었는데, 조금 더 느긋하게 즐기시면 어떻습니까?"
"이런 저질 작품을 보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야!"
그녀는 3m 가까이 되는 소형트럭에서 뛰어내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주먹이 바람을 스친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지만,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몸을 스쳤다. 그 직후에 소녀는 백스핀을 돌며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를 후려치려 했지만, 소년의 발 구르기가 조금 더 빨랐다.
-푸확!
이번에도 둘 사이로 아스팔트가 솟아올랐다. 방금과 같이 무식하게 큰 크기의 벽은 아니었지만, 족히 2m 가 넘어 보이는 토벽이 솟구쳐 올라 그녀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팔꿈치와 아스팔트 벽이 충돌 했는데도, 아스팔트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만약 저런 것을 직격으로 맞는다면...
"아아, 당신은 정말 좋은 관객입니다. 내가 보증해요!"
소년은 그렇게 외치며 자신이 만든 아스팔트 벽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벽이 힘없이 꺾이며 대량의 흙먼지를 만들어냈다.
시야가 막힌 사이 또다시 흙벽을 만들어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선수필승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녀는 소년이 녹아든 흙먼지를 노려보는 것 의외의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작은 바람이 불고, 먼지가 조심스레 그 장막을 벗는 순간! 흙먼지 사이로 소년의 팔이 튀어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팔로 가드를 하며 카운터를 먹이겠지만, 능력을 가진 녀석과의 접근전이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경우가 다반사. 거기다 상대의 능력도 모를 때라면야! 소녀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소년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왼팔을 스쳤다.
-뚜둑
무언가 꺾이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왼팔전체가 정상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꺾여들었다. 손가락과 손목, 그리고 팔목 전체가 끔찍하게 비틀어져버렸다.
"목을 잡으려고 했는데... 역시 만들어진 성녀도 성녀는 성녀라는 걸까요?"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소년은 주먹을 내지른 그 자세 그대로 손끝에 닿았던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을 상기하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성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접촉하는 그 무엇이든 의지대로 "꺾는다" 인가, 이능력은 분명... 특별관리대상 34호. 네놈에게는 배우보다 모형 예술가가 어울려."
자신의 예술품이 사랑받길 원하는 예술가와 사랑받는 예술품을 만든 자신을 하살하길 바라는 예술가. 이 세상 모든 예술가를 이 두 틀에 넣어 나눌 수 있다면 소년은 분명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말에 그는 순수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아아, 모형예술가는 예전에 그만 두었어요. 인간은 너무 빨리 썩어버리니까요."
"그건 능력자라고 다르지 않지"
그 말과 동시에, 회색 코트가 나풀거리며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소년의 손은 닿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꺾어버리는" 손, 이것은 근접전에서 최강의 창이자 방패다. 이번에는 목을 꺾어드리죠! 소년의 보랏빛 눈에서 기괴한 욕망이 차오름과 동시에, 그의 손은 소녀의 피부에 닿았다!
"체크메이트입니다!"
소년이 능력을 발동하고, 피와 살이 허공을 수놓았다. 이겼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며 핏물로 가득한 하늘을 주시했다. 날아간 그것은?
"왼팔?!"
"병신"
어느새 그의 품을 파고든 회색코트의 소녀는 남은 오른 팔만으로 녀석의 턱을 멋지게 쳐올렸다. 완벽한 자세의 승룡권! 턱뼈가 부숴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소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름대로 방어를 해보겠다고 해본 것인데 몸이 튕겨져 오른 것이다.
"컥!"
보통 인간이라면 쇼크로 기절할만한 치명상이었지만, 녀석은 기절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몸으로 오는 충격을 "꺾어" 대부분의 물리적 충격을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막아냈다는 게 턱뼈에 금이 가버릴 정도다.
소년은 시야로 들어오는 회색그림자를 보면서 절망을 느꼈다. 그의 능력은 그의 사고 능력에 기인한다. 고통으로 주변 사물을 인식하기도 힘든 이 상황에서 그의 능력이란 그야 말로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아아..."
그녀는 떨어진 왼팔을 주워들고는 제자리에 끼워 맞추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떨어졌던 근육과 살들이 마치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끌어당기며 재생하는 것이 아닌가? 비틀어져 있던 왼팔도 기괴한 소리와 함께 뼈가 맞춰지고, 피부가 이어 붙으며 재생되었다.
"저질무대에 어울리는 저질스러운 결말이군."
왼손의 손가락을 움직이며 감각을 확인하던 소녀는 참혹한 도로를 둘러보며 그렇게 감상을 표했다. 아스팔트는 이미 알아볼 수도 없었고, 땅이 토해낸 듯 한 모래와 흙덩이 들이 이리저리 찌그러진 자동차들을 덮고 있었다.
"그럼... 마무리를 지어볼까"
소녀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보라색을 담고 있는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이 참상을 만들어낸 소년. 그 소년의 눈에는 패배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왜? 어째서?
-퍼억!
뼈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온다. 체내의 내장을 동시에 짓이기는 일격. 소년은 신의 몸통을 뚫은 소녀의 주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즐거워서 짓는 지, 괴로워서 짓는 건지 모르는 기괴한 미소.
"아아, 이제 종막으로 가는 길이 열렸어요. 준비는 되었나요? 오만의 성...컥!"
피와 위액이 역류하고, 턱이 부서진 상태에서도 말을 이어나가던 소년의 보랏빛 눈이 초점을 잃었다. 그의 몸을 뚫은 소녀의 손이 그의 심장을 터트려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장이라고 하나 인간의 심장은 전체가 근육으로 이루어져있다. 인간의 몸에서 가장 많이 단련되고, 가장 많이 쓰이는 근육인 만큼 단면적에 비해 강력한 힘을 내는 곳이 것만, 소녀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터트려버렸다.
"어린양에게 구원을"
그 스스로가 죽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중하게, 소녀는 소년의 명복을 빌었다. 그녀는 손안 가득 묻은 피를 티셔츠에 슥슥 문지르고는, 핫팬츠 주머니에서 작은 캡슐을 꺼냈다. 사우스파크 캐릭터 티셔츠에 피가 가득 묻었지만, 워낙 잔혹한 만화이다 보니 피가 묻은 캐릭터들도 별로 위화감이 없었다.
-푹
간단한 소리와 함께 죽은 소년의 뱃속에 캡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소년의 시체가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선한 인간도, 아무리 추악한 인간도 이 캡슐앞에서는 평등하게 녹아내린다.
"하아..."
소녀는 폐허가 되어버린 도로를 둘러보다가, 처리해야할 시체가 하나 더 남은 것을 깨달았다.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보다는 의무에 충실한 편이였다.
"으으윽..."
토사와 어느 목사가 타던 고급자동차, 어느 셀러리맨이 타던 중고차, 그리고 볼성 사납게 찌그러진 버스 아래에서 고통스러운 소년의 신음이 들렸다.
연영은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감각덕분에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꿈이라면 꿈에서 깰 필요도 없지 않은 가! 비교적 자유로운 왼팔을 들어 눈가를 매만져 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돌아보니 오른팔은 찌그러진 버스좌석에 깔려있었다. 그가 악몽을 꾸는 사이 출혈이라도 일어난 듯, 바닥에는 피가 질척거리고. 약간의 현기증이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콰앙!
연영이 시야가 흐릿흐릿 해지던 그때, 버스의 옆면이 강렬한 충격과 함께 박살나며 무너져 내렸다. 자칫하면 버스 전체가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행위였지만, 덕분에 그의 오른팔을 짓누르고 있던 좌석도 덩달아 부서져 버렸다. 그 일단의 파괴행위를 자행한 범인은 회색코트를 나부끼며 버스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이건."
소녀는 특유의 무감정한 말투로 연영을 내려다봤다. 오른팔은 짓눌려 거의 형체를 찾아 볼 수도 없고,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니 이미 가망이 없어보였다.
"어디 계신지 모를 아버지, 이 어린양에게 구원을"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내리치려고 했다. 그냥 캡슐을 던져 녹여버려도 되지만, 그건 살아있는 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이다. 그녀는 나름 고통을 줄여주고자 주먹을 휘둘렀지만, 소년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흠"
연영의 뒤편, 버스의 구석진 곳에는 파란 옷을 입은 버스기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소년이 깔린 좌석은 운전자용 좌석. 좌석에서 얼어붙은 버스기사를 구하려다가 팔이 잘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하지만 어차피 살리기에는 늦었다. 이미 팔에서 난 출혈은 도를 넘어섰다. 지혈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예비용 팔이 있다면 모를까,
예비용.. 팔?
소녀는 급히 밖으로 나가 녹아내리고 있는 시체를 찾았다. 몸통부분은 연기를 뿜으며 모두 녹아내린 그 시체는, 팔과 다리, 목을 따라 남은 사지마저 녹아내리고 있었다.
소녀는 녹아내리는 오른팔을 들어, 녹아내리는 부위 전체에 중화제를 뿌려 약의 진도를 막았다. 그리곤 버스로 돌아와, 쓰러져 있는 연영의 오른팔을 재보기 시작했다. 채 10초도 되지 않아. 그녀는 수도로 아직 덜렁거리며 남아있는 연영의 오른팔을 절단해버렸다.
"뭐,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당사자가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그녀는 작은 물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절단된 연영의 오른팔부위에 주워온(?) 팔을 끼워 맞추고 그 위로 물병의 물을 뿌렸다.
연영의 몸 위에 떨어진 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상처를 찾아 흐르기 시작했다. 절단면으로 그것들이 흡수되자, 뼈와 뼈, 근육과 근육, 피부와 피부가 서로를 끌어당기며 융합하기 시작했다.
"어린 양에게 구원을"
기다란 흑발의 소녀가 낡은 소파위에 몸을 파묻었다. 공업용 폐자재로 만들어 외향만 그럴싸하게 꾸민 싸구려 소파인데다가 지독하게 낡아 준 덕분에,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피어났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14인치 아날로그 tv가 빛을 뿜고 있었나, 그나마 흑백이 아닌 것이 다행이리라.
tv에서는 사우스파크라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고 있었는 데, 주황색 점퍼를 입은 어린아이 캐릭터가 몸에 불이 붙은 채 타죽어가고 있었다.
-딱.
하지만 그때, 백발의 소년이 tv버튼을 눌러 채널을 돌려버렸다. 돌려진 채널에서는 폭력매체에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의 폭력성 문제를 다루는 특집방송에 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나와 정신적 안정 어쩌고 라는 말을 떠들어댔다.
"방금 케니가 죽었는데."
무표정했던 소녀의 눈가에 아쉽다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캐릭터가 죽는 모습을 못봤다고 아쉬워하다니? 백발의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술을 씰룩거렸다.
"능력자라는 것들은 모두들 너 같은 거야?"
소년은 긴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으며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봤다. 오른 손이 미묘하게 어긋나서 머리끈이 계속 흐트러졌다.
"무슨 뜻?"
"그러니까.. 사람 목숨을 우습게 보느냐고"
소년, 연영은 거기까지 말하고 턱을 괴어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애초에,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듯한 어린 여자애가 능력자라고 하는 것부터가 넌센스다.
"대답을 원한다면 no.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네가 본 것처럼 미친 짓을 하고 다니는 놈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모두 위성의 추적을 받으며 특별관리하에 있다."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tv채널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tv코드를 뽑아버린 소년의 저지에 막혀버렸다.
"...케니는 이미 죽어서 환생했을 거야, 이제 더 이상 잔인한 장면은 안나올테니 봐도 되지 않나?"
"안돼, 전기세 많이 나온단 말야"
애초에 전기세 걱정을 할꺼면 집안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커다란 냉장고는 무엇이냐고 따지고 싶은 소녀였지만 뭐, 사람은 각자의 사정을 안고 사는 법이다.
"그럼... 그 특별관리 대상이 어째서 우리나라 한복판에서 깽판을 친거야? 그놈은 아무리 잘봐줘도 동양인으로는 안보였다고"
"녀석은 특별보다 한 단계 아래인 집중관리대상. 애초에 능력도, 사상도 "특별"에 들어가지 못하는 놈이었어. 그렇기에 여행을 목적으로 이나라에 온다고 했을 때도 승인을 해준 것일터인데.."
소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람이 두 자릿수로 죽은 사건의 전말을 말하는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무신경한 태도였지만, 이 소녀는 세 자리에 가까울 뻔한 사상자를 두 자리로 줄인 당사자였다.
"결국 위성관리라는 건 믿을 만한게 못된다는 거네"
"대답은 yes.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적어도 이런 갑작스런 영지의 개화는 손에 꼽을 정도니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소녀는 핫팬츠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조금 부스럭거린 것만으로 소파는 흡사 기침이라도 하 듯 먼지를 토해냈다. 하지만 흩날리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소녀는 능숙하게 핸드폰 안테나를 쭉빼 전파를 맞추기 시작했다.
"또 토했군, 결국 녀석은 게이가 될 운명인가"
"뭐..뭐야, 꼭 우리집 tv가 아니더라도 tv는 볼 수 있었던거야?"
사고 당시에 참상을 기억하고 축 쳐져있던 연영은 핸드폰 스피커로 들리는 fuck king...비스므리한 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순간, tv를 통해 빠져나간 전기가 돈이 되어 그의 어깨위로 떨어지는 환상이 그를 덮쳐왔다.
"예상보다 심각하군"
"뭐?"
지금 자신의 전기세보다 심각한게 있단 말인가?
"이번일로 인해서 이 나라 여론이 거칠어졌다. 집중관리 대상 조차 하나 없는 이런 영지靈知의 불모지에서 이런 격한 반응이라니. 단일 민족이란 것들은 모두 이런 건가? 거기다 능력자 규제를 공약으로 거는 진보적인 놈도 있군. 애초에 표퓰리즘에 이끌리는 줏대 없는 것들이란 건 익히 들어 왔지만… 무식한게 똑똑한 척은 다한다고. 애초에 영지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놈이 하나도 없군"
"에?"
인영이 뭐라 반응하기도 힘들 정도로 신랄하고 쾌속한 비판이 소녀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지껏 둘이 나눈 대화보다 많은 말이다. 놀란 인영이 소녀 옆에 붙어 핸드폰 화면을 보니 한 민간단체가 능력자 명단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콰직.
소녀의 손에서 핸드폰이 박살 나버렸다. 나무젓가락 하나도 못부술 것 같은 손에서 공엽용 프레스와 같은 악력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이... 이거 비싼거 아냐?"
연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는 핀트가 조금 어긋난 것 같지만, 자기 것도 아닌 핸드폰이 조각나 떨어지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이래서 중국산이란"
나도 한숨 쉴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군, 소녀는 박살난 핸드폰을 던지고 회색코트를 걸쳤다.
"아무래도 일이 복잡해질 것 같군"
"에? 뭐가?"
"녀석이… 이 나라에 있다"
소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집문을 나섰다. 낡은 경칩이 비명을 지르고, 당황한 연영이 황급히 가발을 챙겨 쓰고 뒤를 따랐다.
"아무리 민중사이에 숨어 있다고 해도 매스컴과는 가까워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능력자 규탄 시위대의 외곽, 금발 벽안의 "표준 양키" 외모를 가진 곱상한 소년이 시위대를 찍는 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소년은 게르만과 슬라브의 혼혈로 정확히는 표준양키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의 마스터는 항상 그를 "양키" 라고 불렀다.
"에이, 뭐 어때? 우리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말이야"
싸구려 염색약으로 염색한 듯 부분 부분 본래의 금색이 들어난 푸른 머리, 초점없는 탁한 벽안. 채 대학생이나 되었을까? 너저분한 펑크 패션의 청년은 양키의 머리를 박박 쓰다듬었다.
"밀입국도 범죄는 범죄인데요?"
속칭 양키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그의 마스터를 흝겼다. 하지만 마스터란 작자는 아~ 그렇구나 라며 잠시 벙찐 표정을 지을뿐, 전혀 자각이 없는 듯 했다.
"에휴..."
"어? 너 설마 날보고 한숨 쉰거냐?"
"글쎄요."
충격 받은 듯 몸을 꼬아대는 마스터의 시선을 피해, 양키는 시위대로 고개를 돌렸다.
과학이 현실과 정신의 정점에 서있던 21세기 초반. 예언자 미르천에 의해 이상혁명이라 불리는 재앙이 인류를 덮쳤다.
그것은 운석도 아니었고,
바이러스는 더더욱 아니었다.
영지靈知, 거대한 자의식의 증폭.
어떤 과학도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어떤 종교도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 혁명 직후부터 태어난 모든 아이들 중 일부는 이 "영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설명해냈다! 불로, 얼음으로, 염력으로. 초능력이라 불리는, 물리법칙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영지"를 가진 아이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믿음이지."
「불신지옥 믿음천국」이라고 쓰인 시위판을 보며 흑발의 소녀는 쓴웃음 지었다. 역설적이게도, 영지靈知의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발톱을 들이댄 것은 종교단체 들이었다. 신의 구원을 빙자해 교세를 유지하던 기득권 종교들은 더욱 심했다. 예언자 미르천을 가장 많이 배척하고, 다가온 이상혁명조차 막아내지 못해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었으니, 몇 명의 아이들이 신의 이름아래 죽었을까? 아아,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현재 가장 많은 능력자 아이들을 거느린 자들 또한 그들이었다.
부모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고, 인권을 유린했다. 아니, 애초에 영지의 아이들에게는 인권이란 게 없었다. 그래서, 그렇기에, 그들은 들고 일어났었다. 탱크와 열 살이 채 안된 소년이 대치하고, 평범하게 학교에 다녀야할 아이의 머리에 총알이 지나갔다. 죽지 못한 아이들은 해부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관리대상이란 이름하에 숨을 죽이고 있는 현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상념에 젖어있던 소녀의 귓가로 걸걸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척봐도 가발인게 보이는 어설픈 가발에, 평소에 쓰던 렌즈는 채 챙기지 못했는 지 핏물이 일렁이는 붉은 눈. 연영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서울시청"
그들을 막고 있던 신호가 초록색으로 변하고, 검은색 허머가 서울 도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