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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영미문학
장르문학-호러
판작안
설명
'빛의 톨킨이 있다면 어둠의 러브크래프트가 있다.' 라고 할 만큼 판타지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가. 특유의 음울하지만 방대한 설정으로,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추앙받고 있다.
생전의 러브크래프트는 그다지 저명한 작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평가는 점차 상승하여 현재는 20세기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호러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종종 애드가 앨런 포와 비교되기도 한다. 스티븐 킹은 러브크래프트를 "고전 호러물에 있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업의(the Twentieth Century의 greatest practitioner of the classic horror tale)."라고 부르기도 했다.
생애
1890년 8월 20일, 로드 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 시 엔젤 거리에 있는 가족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1961년에 파괴되었다.) 아버지 윈필드 스콧 러브크래프트는 보석과 귀금속의 외판원이었다. 1893년, 러브크래프트가 3살일 때, 그의 아버지는 업무상 여행 도중 시카고 호텔에서 정신병원에 걸렸다.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는 프로비던스로 돌아왔고, 버틀러 병원에 입원하여 여생을 마쳤다. (1898년 사망). 러브크래프트는 일생 내내 그의 아버지가 과로로 인한 "신경 소모"가 촉진한 마비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의 사인이 광증(general paresis of the insane)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러브크래프트가 아버지의 병의 상태나 그 원인(원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유사한 증세를 보이자 "예방"을 위해 극소량의 비소를 처방받았던 듯 하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어머니, 두 고모,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면서 여섯 살 때 까지 여장을 하며 지냈다. (당시에는 남자아이를 여장해서 키우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는 설도 있다.) 체격도 좋지 못하고 비쩍 마른 얼굴 등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러브크래프트의 외모를 추하다(ugly)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두살 때 시를 암송하고, 여섯살 때 창작 시를 완성한 천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의 독서를 격려하여 러브크래프트에게 고전문학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라비안 나이트』, 불핀치의 우화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등).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신의 창작 고딕 호러 동화를 들려줌으로서, 러브크래프트가 괴기물에 관심을 갖게 이끌기도 했다. 한편,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들을 불량아로 만들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유년시절의 러브크래프트는 병치례가 잦았으며, 그 중 몇 가지는 분명히 정신 신체증이었다. 그러나 그가 앓았던 다양한 질환들은 신체적 이유만으로 생겨난 것이다. 과거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신병이 선천적이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갖고 있던 매독이 그를 임신했던 어머니를 건너 태아 때의 그에게 감염되었다는 가설) 현재는 폐기되어가는 추세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성격 또한 불규칙적이고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는 8살 전까지 학교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으며, 1년 후 자퇴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기간동안 독서에 탐닉했고, 화학과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1899년에 러브크래프트는 The Scientific Gazette와 함께 여러 hectographed publications을 소규모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4년 후 러브크래프트는 Hope Street 고등학교의 public school로 복귀했다.
1904년에는 러브크래프트의 할아버지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러브크래프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잘못 관리한 탓에 그의 가족들은 곧 재정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결국 같은 거리에 위치하긴 했지만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집이자 출생지인 곳을 잃은 것에 강한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자살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시절 포의 소설이나 불핀치, 기타 고딕 소설들을 탐독하다가 나중에는 신경증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S. T. 조쉬는 자신의 러브크래프트 전기에서 이 쇠약의 주된 원인은 그가 고등 수학 과목의 성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등 수학은 전문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과목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브라운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랬으나 진학에는 실패했고, 이 때의 실망과 수치감은 훗날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러브크래프트는 소설도 조금 쓰긴 했지만 그가 내놓는 작품은 여전히 주로 시였다. 이 기간동안, 러브 크래프트는 은둔 상태로 지냈으며, 어머니를 제외한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이것은 러브크래프트가 펄프 잡지 The Argosy에 편지를 쓴 때부터 바뀌게 되었다. 이 편지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출판 작가들이 재미 없는 연애소설이나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지 칼럼(letters)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이 토론을 눈여겨 본 UAPA(미국 아마추어 출판 협회) 회장 에드워드 F. 다아스는, 러브크래프트에게 협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1914년) UAPA는 러브크래프트에게 활기를 주었으며 러브크래프트가 시와 에세이를 기고하도록 이끌었다. 1917년에는 서신 교환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The Tomb」「Dagon」과 같은, 보다 세련된 소설 작품들과 함께 소설 창작에 돌아섰다. 「다곤」은 러브크래프트의 첫 전문적 출판작이었다. (1919년 11월, W. 폴 콕의 The Vagrant에 수록) 이 시기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편지 친구들과의 방대한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긴 서한들은 그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편지 작가 중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와 편지를 나눈 사람 중에는 로버트 블로크, 클락 에쉬튼 스미스, 로버트 E. 하워드와 같은 이들도 있었다.
1919년에는 오랜 기간 히스테리와 절망으로 고통받은 끝에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신경 쇠약에 걸렸으며, 러브크래프트의 아버지가 입원했던 버틀러 병원에 입원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두 모자는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1921년 5월 21일 사망하기 전까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인은 담낭 수술의 합병증. 러브크래프트는 어머니를 잃은 것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죽고 난 몇 주 뒤, 러브크래프트는 보스턴에서 열린 UAPA 컨벤션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소니아 그린을 만났다. 소니아 그린은 우크라이나 유태인 혈통으로, 러브크래프트보다는 7살이 많았다. 그들은 1924년에 결혼했고, 이 커플은 뉴욕 시 브루클린 자치구로 이사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고모들은 이 결합을 못마땅해 했다. 러브크래프트가 '장사꾼'과 결혼한 것을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니아는 모자 가게의 주인이었다). 처음에 러브크래프트는 뉴욕에 매료되었지만 곧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니아는 모자 가게를 잃었고, 빈약한 건강 상태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를 돕기 위한 일을 찾는데 실패했고, 결국 소니아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클리브랜드로 이사해야 했다. 소니아가 떠난 후 러브크래프트는 브루클린의 레드훅 지구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으며 뉴욕에서의 삶을 격렬히 혐오하게 되었다.
더욱이 뉴욕으로 엄청나게 밀려드는 — 특히 비 앵글로 색슨 계통의 — 이민자들 때문에 아무런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이 참담한 실패는 그의 인종차별주의를 부채질했다. 당시의 두려움은 「레드훅의 공포」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에는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나 어스타운딩 스토리(Astounding Story) 같은 싸구려 펄프잡지에 중/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나 1928년 위어드 테일즈에 '크툴루의 부름(The Call of Cthulhu)' 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크툴루 신화'의 설정을 시작한다.
몇년 간의 별거 후 러브크래프트와 소니아는 이혼에 합의했지만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고모들을 돌보기 위해 프로비던스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소설을 쓰는 일에만 열중하기 시작한다. 러브크래프트가 섹스에는 전혀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고, 결혼 생활이 불행했던 것 때문에, 러브크래프트가 불능(asexual)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친구였던 로버트 E 하워드가 게이 취향이 있었다) 하지만 소니아는 그를 "꽤 훌륭한 연인"이라고 평한걸 보면 단순히 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 뿐인듯 하다.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뒤에는 1933년까지 10 Barnes Street의 "spacious brown Victorian wooden house"에서 거주했다. (이 주소는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에 등장하는 윌레트 박사의 주소로 나오기도 한다)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후 사망하기까지의 이 기간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적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걸작 단편 대부분을 써냈으며, 『찰스 덱스터워드의 비밀』와 『광기의 산맥에서』과 같은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종종 다른 작가들을 위해 개작하기도 했고 엄청난 양의 대필을 하기도 했다. ("The Mound", "Winged Death", "Imprisoned with the Pharaohs" , "The Diary of Alonzo Typer")
하지만 이 뛰어난 문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점점 궁핍해져 가기만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고모와 함께 더 작고 더 허름한 하숙집으로 옮겨가야 했으며 로버트 E. 하워드의 자살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1936에는 대장암 진단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937년에는 콩 통조림과 아이스크림만 먹는 등 기괴한 식생활을 보였다. (이유는 가난으로 추정된다.)
1937년 3월 15일, 프로비던스에서 영면.
러브크래프트의 유해는 필립스가의 가족 묘지에 양 부모 사이에 안치되었다. 이것은 팬들 사이에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리하여 일련의 팬들이 러브크래프트만의 비석을 사기 위한 돈을 모금했다. 그 묘비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 탄생일과 사망일, 그리고 그의 사적인 편지에서 인용한 "I AM PROVIDENCE."라는 문장이 새겨졌다.
1997년 10월 13일에는 누군가가 무덤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유해를 파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유해가 새로운 묘 밑에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 하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세계
선입견으로 가지기 쉬운 생각과는 달리 현대에 흔한 경우처럼 생전의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이 창작한 신화를 정리하여 "설정집"을 쓴 것은 아니고, 오히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고대신들에 관한 신화가 직접적으로 상세히 묘사되는 소설은 적은 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신화가 정리된 것은 그가 사망한 후의 일이다. 또한 러브크래프트와 친분이 있는 여러 작가들이 교류하며 서로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정리에는 논란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로 코난 사가의 작가 로버트 어윈 하워드와 러브크래프트는 펜팔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 것이 많다.
크툴후 신화를 축약하자면, 크툴후는 인간도 포유류도 없던 과거 지구를 지배하며 살던 고대신들로, 그 고대신들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며 인간들에게 공포를 선사한다는 내용이다. 톨킨의 판타지가 여러가지 민족의 신화들을 종합해서 엮어낸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정말로 독창적인 신화와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그의 소설 속에 잘 언급되는 책인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이라는 책에 대해 의견이 많은데, 이 책은 '실제로는 없는 책'이다. 즉 러브크래프트가 지어낸 책인데, 러브크래프트의 팬들이 이 책을 써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물론 팬들의 창작이 덧붙여져서 여러 종류의 이본이 있다.) 일단 작내의 네크로로미콘은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의 원작. 알 아지프의의 번역제목이다.
일군의 러브크래프트 신화작가군에 의해 만들어진 네크로노미콘의 행적 덕분에, 전 세계의 대형 도서관은 연례행사처럼 네크로노미콘에 대한 문의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네크로노미콘의 저자인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는 아랍식의 작명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한다. 러브크레프트가 아람어에 대해 잘 몰라서 벌어진 상황.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가치가 재조명 된 것은 러브크래프트 사후 50년가량이 지난 1980년대부터의 일이다. 러브크래프트 자신은 생전에 그렇게 유명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Weird Tales와 같은 유명한 펄프 잡지들에 수록되었고, 때때로 잡지의 애독자들로부터 분노에 찬 (outrage) 편지들을 받기도 했지만 독자 대다수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클락 애쉬튼 스미스와 어거스트 덜레스와 같은 현대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을 뿐이다. 이 서신 교환자 그룹은 "러브크래프트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축복과 격려 아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등장한 요소들을 자유롭게 공유하였다. 러브크래프트의 사망 후에도 러브크래프트 서클은 계속되었다.
그 중 어거스트 덜레스의 작업물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덜레스의 창작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거리가 남아 있다. 그가 만든 설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선(善)한 '선대의 신(Elder Gods)'과 악(惡)한 '바깥 신들(Outer Gods)'·'위대한 옛것들(Great Old Ones)'들이 대립한다는 것이다. 본래 '우주적 중립성'을 지키고 있었던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선악 대립 구조를 가져왔던 이 설정은 많은 이들에게 '러브크래프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왔다.
하지만 위대한 옛것들에 적대적이라고 하여 이 존재들이 그런 인간적 개념에서의 선악관(옳고 그름)에 전적으로 합당한 것은 아니다. 선한 신이라고 해도 인류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것보다는 좀 더 너그럽고 온건하게 대하는 위치에 서있을 뿐이다. 즉 크툴루 신화의 모든 신들은 인간을 대함에 있어 정도차이만 지니고 있을 뿐 인류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위협과 공포로 자리매김될 수밖에 없는 본원적으로 적대적 존재들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인종차별주의
러브크래프트는 심각한 백인우월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해 호감을 표한 일기도 있다.) S. T. 조쉬는 "러브크래프트가 인종차별 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는 식으로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러브크래프트는 당대 사람들에 비해서도 훨씬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또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인종차별주의가 깃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적고 있다. 미셸 우엘벡은 자신의 저서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인종 혐오"는 러브크래프트가 대작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감정적 원동력을 제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결혼은 유태계 이민자와 한 탓에, 인종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유태계였던 아내가 자신도 유태인이라는걸 계속 말해주어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파경은 부부 싸움 보다는 러브크래프트가 도시 생활을 견디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고, 이혼 후에도 계속 편지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유지했다고 한다.
L. Sprague de Camp의 전기에 따르면, 러브크래프트도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견해를 다소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그는 폭력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하여 혐오했는데, 1930년대에 독일에서 벌어진 반 유태인 폭력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혐오스러운 에스키모인의 혼혈" 등의 묘사를 할 정도로 타 인종을 혐오했던데다 히틀러를 찬양하기까지 했던 그도, 타인종을 폭력으로 없애버려야 된다고까진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에 보면 다른 인종이나, 다른 무언가에 대한 공포, 혐오등이 보이는데, 어쩌면 어려서부터 늘 혼자 틀어박혀 살았던지라 그의 인종차별은 사실 타 인종에 대한 혐오라기보다는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서구의 진보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냉소주의
러브크래프트는 독일 보수 혁명 이론가 오스왈드 슈펭글러의 저작을 탐독하기도 했다. 『서구의 몰락』에서 보여주는 근대 서구의 쇠락에 대한 슈펭글러의 비관적 명제는 러브크래프트의 종합적인 반(反)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세계관 속 중대한 요소를 형성했다. 부패의 순환에 대한 슈펭글러의 발상은 『광기의 산맥에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S. T. 조쉬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치·철학적 관념에 대한 토론의 중심에 슈펭글러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러브크래프트는 문명의 쇠락(decadence)에 대해 다룬 니체의 저작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러브크래프트 문명이 보다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요소와 맞서 싸우는 문명과 싸운다는 소재를 자주 쓰곤 한다. 대부분 이 투쟁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물러 있다. 그가 창조한 주인공들 대부분은 교양이 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불분명하고 두려운 힘에 의해 점차 무너져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
러브크래프티안 호러와 대중문화에서의 크툴후 신화
"크툴후 신화"를 비롯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에 의한 직간접적 변주를 통해 대중문화에 깊은 인상을 남겨왔다. 이른바 '러브크래프트적인' 요소들은 수많은 소설, 영화, 음악, 만화 등에서 발견된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러브크래프트의 친구, 동료, 편지 교환자였던 동시대 작가들이다. (어거스트 덜레스, 로버트 E. 하워드, 로버트 블로크, 프릿츠 레이버 등) 후대의 수많은 창작자들 또한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은 무수하다.
러브크래프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들
- 닐 게이먼
- 렘지 캠벨
- 벤틀리 리틀
- 브라이언 럼리
- 앨런 무어
- 스티븐 킹
- 조 R. 랜스데일
- 조넨 베스퀴즈
- 토마스 리고티
- 케이틀린 R. 키어넌
- 클라이브 바커
- F. 폴 윌
- T.E.D. 클레인
이 외에도 영화감독(존 카페터, 스튜어트 고든, 길레르모 델 토로), 게임 디자이너(샌디 피터슨, 토야마 케이치로), 호러 만화가 (이토 준지), 화가(H.R.기거) 등이 러브크래프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보르헤스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기법을 흉내낸 단편 「더 많은 것들이 있다」를 하나 쓰기도 했다. 『독서의 역사』의 저자이며, 눈먼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어찌나 짜증스러워 했는지" 그의 작품을 패러디해서 단편을 쓰기도 했다고 전한다. 현대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문학 전기를 썼으며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러브크래프트 작품선의 서언을 쓰기도 했다. Library of America는 2005년에 한권짜리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을 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러브크래프트가 정전으로 인정받은 미국 작가로 언급된다. http://www.amazon.com/dp/1931082723/ref=sr_1_1&s=books&qid=1226216067
사실 크툴루 신화와 관련없는 단편 중에도 유명한 것이 있다. 일세를 풍미한 좀비 영화인 좀비오(Reanimator)의 원작이 그것인데, 이름하여 [허버트 웨스트의 소생 실험 Herbert West-Reanimator]이다.
판본
한국에서는 동서문화사가 전 5권인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펴냈지만 형편없는 번역으로 인해 별 대접은 못받고 있는 상황이다. 추리 전문가 정태원 씨가 러브크래프트 전집 출간을 위해 여러 출판사를 타진했지만 출판사들이 난색을 표해 출간되지 못했고... 현재는 황금가지 사에서 기획을 진행하고 있지만 말만 하고 있을 뿐 출간은 되지 않고 있다. 듀크 뉴켐 포에버가 출간되는 날 같이 출간될지도..
참고 자료
알라딘 「사진으로 보는 절판본 (25) : H. P. 러브크래프트」(나귀)
엔젤하이로「러브크래프트」
위키피디아「H. P. Lovecraf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