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초청 단편
제3회 판타지 갤러리 단편 대회 출품작
남부화풍
by Girdap
따스한 햇볕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아침저녁으로 제자들이 깨끗이 청소한 덕분인지 그 햇볕 사이로 먼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따스한 햇볕은 전형적인 중부의 날씨다웠다. 더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전 지역에서 명망 높은 화원이 있었다. 수백 개의 방이 있는 커다란 건물 안에 많은 이들이 그림을 배우러 왔고 또 그리고자 했다.
선생은 붓을 들었다. 붓끝을 살짝 물감에 담갔다 꺼내어 종이 위에 놀렸다. 종이에 미리 물을 뿌려둔 덕에 물감이 살며시 번지기 시작했다. 생각한 그대로 되어 기분이 좋을 법도 하련 만은 선생의 표정은 변한 것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계속 붓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휴우."
선생은 한참을 더 그리다 붓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그림을 보고 숨을 내쉰 적이 없었다. 자칫 잘 못 하다가는 물감이 숨결에 번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그림을 한번 아래위로 훑어 보고 잠시 쉴 요량으로 일어나 그림을 옆으로 치워두고 손목을 주물렀다.
'똑똑.'
"누구시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선생이 물었다.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란 늘 정해져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접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살며시 올라갔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는 선생의 제자였다. 북부에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이곳 중부로 유학온 여자는 북부여인답게 긴 검은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이국적인 풍모의 아가씨였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재주가 뛰어나 다른 선생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제자는 들어와 예법대로 인사를 올리고 선생이 내준 자리에 앉았다. 정식수업시간은 아니었고 이 재주가 뛰어난 제자는 때때로 이렇게 선생의 방에 들어와 선생의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고 선생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붓질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선생의 지론 덕분이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그리 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이 북부여인만 그 시간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왔다. 어쩌면 선생이 쉬고자 일어나려고 한 것도 이 제자가 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자는 말없이 선생의 신작들을 살펴보았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저..여쭙기 어려우나.."
"그림을 논하는데 어려울 것이 무어 있겠느냐. 허심탄회 이야기하라 하지 않았느냐."
선생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자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있어 저리 꺼리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선생이 생각 없이 대강 그렸던 그림 하나를 가지고 하나부터 열까지 잘 못 된 점을 또박또박 말하기까지 했었다. 심지어 붓을 놀리고 형을 잡는 법 같은 그림의 기술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자가 그림 앞에서 취해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까지 마치 꼬장꼬장한 노인네 마냥 따졌었다.
"저... 스승님. 요사이 심려되시는 일이 있습니까?"
제자는 방금 자신이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은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침묵이 화실을 감쌌다. 잠시간 그리 있다 선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최근에 그리신 그림이...많이 어두워 보입니다."
선생은 다시 아무 말을 하지 못 했다. 그리는 자가 생각을 화폭에 담는다지만 그것이야 자신도 모르게 되는 일이니, 그림이 어두운지 밝은지는 스스로가 미처 생각하지 못 해 옆에서 보는 자가 외려 정확하게 아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은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자신도 모르게 들켰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조금 전과 동일한 질문이었지만 뜻하는 바가 다른 것을 제자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림의 어디가 어둡게 만드느냐는 질문이었다.
"여기, 스승님께서 몇 년 전에 그리신 그림들은 색과 형이 뚜렷하고, 이것과 같이 절벽의 기상이 높은 것을 보면 장중하고 고고한 느낌을 받습니다. 스승님께서 지금까지 명망을 얻으셨던 그림들은 대부분 그런 느낌을 주었습니다. 저쪽의 그림들은 스승님께서 몇 달 전에 그리신 그림들인데 조금 좋으신 일이 있는지 붉은색 꽃들이 몇 년 전의 그림들에서처럼 눈 위에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초목들과 조화를 이루어 따뜻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허나, 최근 며칠간의 그림들은..."
"며칠간의 그림들은?"
"예. 여기...이것과 같이 뿌옇게 안개에 싸여있습니다. 물론 이전의 그림에서도 안개를 그리시긴 했으나 대게 형의 원근을 위하여 조금 쓰셨거나 풍취가 돋궈지는 정도였지만 최근의 그림들은 뜬금없이 길이나 하늘에 끼어 있어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하니, 스승님께서 심려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제자의 긴 설명에 선생은 다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도 그림을 잘 읽는 녀석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 한단 말인가. 선생의 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중부에 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저 하얀 피부는 상하는 법이 없었다. 이국적인 풍모이긴 하나 아름답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 얼굴이다. 다만 저 눈. 저 새까만 눈이 사람을 사로잡곤 했다. 그림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그림을 읽어 낼 때의 눈은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이것이 네가 그린 그림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저 눈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북부에서 유학생이 오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저 완고한 북부 사내들이 여인들을 외부에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인 덕에 선생들이 모두 모여 여인의 그림을 돌려보았다. 오랫동안 혼자서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힌 자치고는 제법 그렸다. 선생은 그 그림에서 기술도 기술이었지만, 그녀를 읽을 수 있었다.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감에 차있다고 말들 하는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코웃음을 치곤 했다. 달리는 말이라던가 힘차게 내리는 폭포수가 자신감의 상징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이 생각하는 바는 달랐다.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 이 진정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처음 입학하기 전에 선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기술 이상을 보여주려고 애써 외려 그림을 망치는 반면 이 여인은 그림의 조화를 이루려 애썼을 뿐이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데 있어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허심탄회하게 그림에 대하여 논하고 자신이 실수하거나 모자랐을 경우 상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녀의 눈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저 새카맣고 아름다운 눈이 선생의 흐릿한 그림을 담고 있었다. 선생은 한숨을 내쉬고 제자에게 답을 해주었다.
"남부에 호수와 강이 많은 것은 알고 있느냐?"
"예."
"그리하여 그곳에는 안개가 자주 낀다고 하더구나. 그림에도 그것이 그대로 나타나있고. 남부의 그림이 비록 지금은 나라를 잃어 그 힘을 잃고 있지만 몇백 년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으니, 그 풍을 한번 따라해 보고자 했다."
"하오나 남부의 그림에는 안개가 수면 근처나 산 위에 끼어 자연에.."
"그리 알고 있거라."
선생은 제자의 말을 끊어버렸다. 제자는 선생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으나 선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아무리 친하다고는 하지만 선생은 선생이었고 지금 묻고자 했던 것은 그림의 감상이 아니었고 사적인 영역이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합당한 것이었다. 선생은 어색한 침묵이 싫어 일어나 그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감이 마른 것과 마르지 않은 그림들을 구분하여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며 생각나는 데로 아무 말이나 던졌다.
"준비는 잘 돼가느냐?"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돌아가는 것을 아니면 대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제자도 침묵이 싫었는지 재빠르게 되물어 대답을 대신했다.
"돌아가는..아니 둘 다 말이다."
"둘 다를 한 번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인 듯합니다."
"그것은 또 무슨 뜻인고?"
"돌아가려 준비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고향에 간만에 돌아간다는 마음에 뭐랄까 이상한 기분이 들어 붓을 잡기 어렵습니다. 하니 돌아갈 준비는 하고 있으나 대전 준비는 못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향에 돌아가 준비하여 출품해야 할 듯합니다."
선생이 그림을 치우는 동안 제자 된 몸으로 가만히 있기 뭣 한지 이리저리 물감을 부산스레 챙기며 답했다. 선생은 치운 그림을 탁자에 올려두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 결혼을 한다니 즐거워 그림 그릴 마음이 나겠느냐. 아니 지금 그림을 그리면 분홍 화조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렷다? "
선생이 비꼬자 제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말을 잇지 못 했다. 선생은 자신도 조금 너무 했나 싶어 평소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애썼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그리 힘들게 배우기 시작한 그림인데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돌아가야 한다니 안타까워 그렇다. 내 알기로는 북부에서는 여인들이 결혼한 후에 집 밖으로 나오기도 힘들다던데 대전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
제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가주께서 정하진 약혼자가 다행히도 문예에 눈이 밝아 여인이 그림을 그리던 노래를 부르던 신경 쓰지 않으니, 아니 외려 장려한다 하니 직접 참여하기는 어려우나 출품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계속 그림도 그릴 수 있고요."
제자도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제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다 멈칫했다. 도로 손을 거두고는 가만히 그대로 있다 선생은 어렵게 입술을 쪼갰다.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그래도 지금 그림에 멈춤이 있으면 아니 되느니 출품할 작품이 아니더라도 하루라도 붓을 쉬지 말거라."
바보 같으니! 선생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더냐! 제자는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고 작게 말했으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선생은 다시 손을 들어 주저하다 가만히 제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자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제자가 놀라기는 했으나 화를 내거나 손을 거두어내지 않는 것에 용기를 내어 남은 손도 어깨에 올렸다. 선생의 손은 따뜻했다. 선생은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다시금 들어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선생의 손이 천천히 얼굴에 다가오자 제자는 눈을 크게 뜨고는 뒤로 살며시 물러났다.
"하..하루라도 그림이 멈춤이 있으면 안 된다 하셨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붓을 들고자 합니다."
제자는 선생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나가버렸다. 선생은 제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은 그녀가 사라진 흔적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 그녀의 따뜻함이 남아있는 듯했다.
제자가 그날 그렇게 나간 이후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매일 하듯이 그림을 그리고 다른 학생들을 가르쳤다. 늘 그렇듯이 여러 번 물감이 손에 묻곤 했다. 선생은 자신의 손을 닦으려다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자 고소했다. 어린애도 아닌 것을 무슨 생각인가 싶어 평소보다 정성을 다해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에 손이 닿자 그녀의 따뜻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선생은 일상을 영위하다 간간이 손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붓을 잡아왔던 손이었다. 사실 붓만을 잡았던 손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무엇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하얗고 주름 하나 없는 손이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그 북부의 제자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며칠인가 지나 선생은 그림을 그리다말고 붓을 내려놓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올 시간이 다 돼간다. 선생은 잠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남부풍의 그림이었다. 안개 너머로 꽃이 핀 산이 있었고 사람 하나가 그 밑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나설지 나서지 않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선생은 붓을 다시 들고 무언가 하나를 더 그리고 싶었지만, 이를테면 산을 바라보는 자 옆에 다른 인영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지만 그림은 이미 균형이 완전하게 잡혀 있어 더 무엇을 그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이 답답하여 한숨을 내쉴 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제자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제자는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가끔 제자는 수업시간 이외에도 그림을 가지고 와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제자의 그림을 받고 펼쳐보았다.
"무엇을 그린게냐?"
제자는 금세 선생의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제 바람이 담겨진 그림입니다."
제자가 가져온 그림을 본 선생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며칠 전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그녀가 그린 그림치고는 온화하고 따뜻한 기운이 풍만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그리던 것과 달리 작은 초막을 근경에서 그린 것이다. 초목이 가득 찬 그림이었다. 그녀가 평소에 그리던 그림이란 대게 북부인답게 깎아내리는 절벽과 폭포 웅장한 산들이 약간은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번은 정반대였다.
"약혼자를.......본 적이 있느냐?"
초막의 열려진 창문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살며시 엿보였다. 한 사람의 그림자에 비녀의 흔적이 보이는 것이 분명 여인의 인영이었다. 두 인영 사이에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가 있었다.
"예?"
그림을 한참 뜯어보던 선생의 갑작스런 질문에 제자는 놀라 반문했다.
"약혼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질문을 던지자 왠지 모르게 속이 쓰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자 제자는 조심스레 답했다.
"예. 제 육촌 오라버니 됩니다. 어릴 적에 여러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림을 처음 시작한 것도 그분이 보여주신 화첩을 보고......"
"그래.그런자라 결혼을 하는 것이 기쁘기는 하겠구나."
"예?"
"이만하면 잘 그렸으나 출품하는 작품을 평소대로 기개가 보이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겠다."
선생의 차가운 태도에 제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스승님. 그것이 아니오라,"
"두 인영 사이에 거리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니 육촌오라비이자 남편 될 자의 거리로서는 딱 알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곧 돌아가면 아이도 낳고 즐거이 살 수 있으렷다."
"스승님, 그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아니라는게냐?"
선생의 질문에 제자는 답하지 못 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지 입을 벙긋 벙긋하다 도로 닫고는 다시 열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 고개를 돌렸다. 불긋해진 얼굴이 부끄러운 듯했다. 선생은 그 모습에 더 속이 쓰렸다. 그렇다. 제자는 북부여인이다. 남편 될 자를 저리 대놓고 언급하니 부끄럽기도 하겠지.
"내가 남편 될 자를 이야기하니, 부끄러운게로구나. 이곳 중부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니 내 결례했지만, 너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으니 그만큼은 포용할 수 있겠지."
말은 사과였지만 누구라도 사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수 없었다. 제자는 그말에 얼굴을 찌푸리다 선생에게 물었다.
"이 두 인영이 제 약혼자와 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제 곧 혼약할 처자가 그릴 사람이라고는 그뿐 밖에 없지 않느냐. 또한 누구라도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 않겠느냐?"
"스승님, 제 속을 어찌 그리 긁으시는 것입니까?"
"무어라?"
선생은 눈꼬리를 치켜뜨었다.
"제발, 그렇게 말씀하시옵소서."
"지금 내가 네 속을 긁는다 했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게야? 내 속을 긁는 것이 누군데?"
선생은 옆에 있던 물감접시를 내동댕이쳤다. 접시는 산산조각나며 튄 파편에 선생의 얼굴에 긴 상처가 났다. 깨진 접시 조각이 제자와 선생의 사이에 흩어져있었다. 제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선생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제자가 소리없이 흘리는 눈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저의 장점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를 수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제자는 고개를 들고 선생을 바라보았고 선생도 그런 제자의 눈을 피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눈을 피한 적이 없었지만, 눈물이 가득 고인 저 눈을 지금은, 지금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제자는 선생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가... 저는 그런, 그런 성격을 가지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게야?"
제자는 선생의 물음에 여전히 답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저를 지금 아프게 합니다."
제자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선생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뿌연 안개가 껴있는 것 같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 눈물이 번잡한 머릿속을 뒤집는 듯했다. 속이 뒤집어 지는 듯했다. 선생은 이 혼란이 싫었다.
"나가보거라."
선생은 더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니다. 저 바로 보는 눈을 피하고 싶었다. 그말에 제자는 눈을 감았다.
"정말....그것 밖에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선생은 머리가 뒤집어지는 듯했다.
"......이틀 후에 출발하는 표를 끊어 두었습니다. 아마.... 그날 와서 뵙기 어려울 듯 합니다. 아니, 다시는 뵙기 어렵겠지요."
제자는 큰절을 올렸다. 천천히 내려앉으며 고개를 숙이자 검고 긴 머리가 갈라져 어깨로 흘러내리며 그녀의 흰 목이 보였다. 머리카락 몇 올이 그 목 위에서 비틀어져 있었다. 제자는 일어나 아직까지 멍한 혹은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선생에게 제자는 짧게 말했다.
"그림은.... 스승님께 남깁니다. 지금까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문을 닫고 나갔다.
이틀간 그 시간이 되어도 제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에 매달리던 선생은 가끔은, 아주 가끔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문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틀간 그림에 집착한 끝에 한 장이 완성되었다. 선생은 붓을 내려두고 그림을 훑어 보았다.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되는 데로 붓을 놀렸기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낯설기 그지없었다. 남부풍의 그림이었다. 물 혹은 바다가 있었고 섬이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남부의 그림이 흔히들 그렇듯 나룻배 하나가 있었지만 사공이 없었다. 육지에는 섬을 바라보듯 등을 돌린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섬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시야의 동선은 전형적인 남부화풍처럼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고 뿌옇게 흐려져 사람이 섬을 바라보는지 저 허공을 바라보는지 언뜻 알 수 없었다.
선생은 이틀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덕에 뻣뻣해진 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림을 그대로 내려두고 물감이며 붓이며 대강대강 옆으로 밀어내어 치워두었다. 그럴 적에 밖이 제법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어 창문을 열어보았다. 밖에는 제자가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가방을 싸들고 학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선생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학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길을 나설 적에 잠시 뒤돌아 선생의 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생은 그녀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저 남부의 그림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