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판타지 갤러리 단편 대회 출품작

피그말리온

by Blues

 

 1.
 많이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신화 속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여인상을 조각한 후 그 조각상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 조각상과 맺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그는 결국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인간이 된 여인상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 분명 행복한 결말임에도 이 이야기는 나에게 오히려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런 감정은 비단 이 피그말리온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화나 동화의 모든 해피엔딩은 진정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늘을 날 수 없기 때문에 신화는 이카로스를 하늘을 날게 하였고, 현실 속에서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여자와 결혼해줄 왕자는 없기에 동화 속의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피그말리온의 이야기 역시 현실 속에서 조각이 실제로 살아나는 일은 없기에 피그말리온은 인간이 된 조각상과 결혼할 수 있었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슬픈 이야기다.
 현실 속에서도 해피엔딩일 수 있는 신화는 없을까?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 않는 동화는 없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마는 신화나 동화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만을 이야기하게 된다면, 더는 신화나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을 희박한 가능성 정도로 내려놓는다면 절충안이 되지 않을까? 이미 이 시대는 복권이 도깨비 방망이를 대체한 세상 아니던가.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지어내는 이야기는 무책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단 손 가는대로 이야기를 먼지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는 내 능력의 부족을 이미 알기에 통제되지 않고 종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는 공상의 힘을 빌면 오히려 어떤 해결에 도달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요행수이다.

 

 2.
 상혁은 화가였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름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예술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보잘것없는 삶을 살았고, 그나마 이름을 알린 화가라 하더라도 그 고단한 삶이 예술가의 치열한 삶의 열정으로 비추어질 만큼 생전에 명예나 부와는 인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상혁은 매우 운이 좋은 극소수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평단의 극찬과 상업적 인기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상혁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면 전문가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었고 이에 자극받은 부호들은 자신의 교양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거액의 수표를 결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미술에 애호가 있는, 또는 미술에 애호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이라고 한다면 집에 하나 정도는 구입하여 걸어놓아야 할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예술가에게 좌절과 고난의 습작기가 없다면 진정한 예술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편견이 있기도 하지만, 상혁의 삶에는 그런 시기 따위는 없었다. 이미 대학생 때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이 어느 대부호의 눈에 들어 구입된 이후, 그의 부와 영예의 길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내리막길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을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만 생각한다면 상혁의 인기는 미술 관련 전문가들이나 구매력이 있는 일부 몇 사람들에게만 한정될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상혁은 한 때 일반 대중들에게서도 높은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의 그림은 구경조차 하지 못한 이들도 상혁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상혁이 부와 재능에 더불어 멋진 외모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언론이라는 것은 듣는 이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알리는 이 자신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집단이다. 그들에게는 대중의 관심과 호응의 정도가 곧 이윤이기에, 대중의 관심을 모을만한 정보가 없다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했다. 그런 언론에게 상혁이란 존재는 매우 쓸모 있는 원재료였다.
 당연히 언론은 일반인들이 가늠하기 어려운 상혁의 미술적 재능보다는, 훌쩍 큰 키에 어울리는 긴 팔다리와 조금 여윈 듯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지성이 돋보이는 수려한 얼굴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그의 미술계에서의 명성도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명문대를 나온 연예인이 학벌로서 시선을 끌려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다루어 졌다.
 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의 생존 경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혁의 남다른 삶은 고단한 생활에 지친 대중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관심이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든 선망에서 비롯된 것이든 언론으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대중의 이목을 모으기 위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계속되면서 어느새 상혁을 사회의 시선의 중심에 속하는 인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을 때는 상혁 자신도 새로운 경험인지라 흥미롭기도 하였고, 자신의 작품과 생각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즐겁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언론 매체에서 각종 섭외가 들어올 때면 흔쾌히 받아들이곤 했지만,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의 대부분이 작품 그 자체보다는 신변잡기나 부유함과 명성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상혁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은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팬클럽이라는 곳은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외모와 부를 소재로 삼아 자기 위안적인 공상을 쏟아놓는 것에 불과했으며, 인터넷에 자신에 대한 기사가 실릴 때면 삽시간에 근거 없는 악의적인 험담이 수백 개가 매달렸다.
 상혁은 자신이 놀림거리가 된 듯싶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실한 것을 보려 하지 않는 우매한 대중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치욕과 경멸에서 비롯된 분노에 몸을 떨며 자신의 한적한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서는 대중들에게 자신이 잊히길 기다렸다.
 상혁의 작업실 겸 집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도로와 다리가 지나고 있었지만, 호수가의 길을 따라 휘어서 굽어진 후미진 곳에 숨이 있는지라 외부에서의 소음과 시선을 완벽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근방에는 작은 시골마을조차 없는 것이어서, 생필품을 사려면 30분을 넘게 운전하여야 했다.
 그야말로 은둔자의 삶이었다. 몇 주 동안 다른 사람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언론에 호되게 데인 이후로는 TV나 라디오조차 집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화면을 통해서 사람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위성 수신기를 통한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긴 했지만, 익명의 공간에서 비롯되는 갖가지 행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할 때보다 더욱 역겨운 것이어서 상혁은 일 때문에 전자우편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상혁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역설적인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상혁은 사람이 그리웠다. 자신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제 30에 접어든 젊은 나이의 그에게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서도 만족시킬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상혁은 친구가 그립고, 여자가 그리웠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밤새도록 즐겁고 때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며, 눈매가 부드러운 여자의 무릎에 누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고운 손길을 느끼고 싶었으며, 자신의 성욕을 덜 민망하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해소하고 싶었다.
 때때로 상혁은 사회로 나아가 자신의 친인이 되어줄 이들을 구했다. 하지만 막상 사람을 대하면 좀처럼 가까이 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끄러움 때문도 아니었고, 상대의 거절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혁은 사람을 대할 때 당당했고, 상대들도 모두 상혁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상혁의 눈에는 항상 그들의 모자란 점만이 보이고, 자신과 친해지려는 진정한 의도가 의심스럽기만 했다.
 온후함이 그리워 순박한 사람을 찾게 되면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둔함에 짜증이 치밀었고, 번득이는 통찰력이 그리워 지적인 사람을 찾게 되면 그 교활한 가식이 역겨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진저리나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아직도 사회에는 상혁을 기억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상혁의 외모에 이미 솔깃해져 있던 여자들은 그의 부와 명성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달려들곤 했다. 상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말 그대로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몇몇 여자들의 공세를 겪은 후로는 점점 자신을 대하는 여자들의 진정을 믿기가 어려워졌다. 여자의 육체를 앞에 대할 때면 오랫동안 억눌러 온 자신 속의 수컷이 날뛰려 했지만, 여자들의 탐욕에서 느낀 환멸은 오랜 화가활동으로 단련된 관찰력을 과도하게 각성시켜 성욕마저도 시들게 하였다. 얼핏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외모의 단점들, 예를 들어 약간 삐뚤어진 눈이라던가, 송곳니의 실금, 좌우 대칭이 맞지 않은 귀 같은 것들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상혁 자신도 그런 것에 집착한다는 것이 편집증적인 강박관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욕지기를 느끼며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이날도 사람들로 말미암아 피로를 느끼며 집에 돌아온 상혁은 멍한 상태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어둠 속에서 그저 책상등의 불빛 하나면 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내가 잘못된 것인가? 나도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렸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물론 그 답은 알고 있었다. 언론 매체에게, 대중들의 앞에서 자신이 농락당했다고 생각했던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정말 자신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그때까지 보지 못하던 것에 눈을 뜨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던 상혁은 책상을 무심코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치밀어 오른 묘한 느낌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책상에 펼쳐진 종이에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무심코 끄적거린 대강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이목구비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대강의 윤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상혁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명치 언저리에서 뭔가 아릿한 것이 맴도는 것 같았다. 이미 늦은 밤이었음에도 상혁은 그 종이를 들고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전에도 영감이 치밀어오를 때면 며칠씩 작업에 몰두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은 그때와도 또 달랐다. 상혁은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다. 상혁의 얼굴은 초췌하게 변하였지만, 눈에서만은 그 어떤 피로의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빛을 받는 검은 진주처럼 그의 눈에선 초조함이 섞인 희열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기에 어느 때보다 활기차보였다. 그 기이한 열정 앞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도 멈춘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물을 마시고 소변을 보았을 뿐 상혁은 잠도 자지 않고 종일 그림만 그렸다.
 광기 어린 작업이 사흘 째 계속되던 날 저녁, 상혁은 마침내 그림을 완성했다. 자신이 완성한 작품을 바라보던 상혁은 문득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사흘 동안의 고된 작업으로 말미암아 한계에 달한 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작품을 보고 밀려드는 엄청난 감동과 희열을 정신이 감당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급기야 바닥에 쓰러져 옆으로 길게 누운 상혁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그림 속에는 실물 크기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호수가를 등에 지고 하늘거리는 우윳빛 천에 둘러싸인 여인의 나신은 마치 그 옛날 미의 여신의 탄생을 그린 그림을 연상시켰다. 하얀 천을 감은 고운 손으로 치부를 살짝 가리고 두 눈은 자신의 발치를 향한 그녀의 모습에서는 요염함과 단아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차분하였으며, 고상하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색정을 자극하였지만 온화한 정도 함께 내보였다. 상혁은 자신이 이런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후 자신의 기량과 영감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리한 작업으로 지치고 더러워진 몸을 먹이고 씻기는 동안에도 혹시나 자신의 일생일대의 걸작이 사라질까 불안하기만 했다. 결국 상혁은 그날 밤 자신의 그림 앞에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상혁은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여명이 여인을 얼굴을 비추는 가운데 눈을 떴다. 덜 깨인 잠으로 게슴츠레하던 상혁의 눈이 그 자신을 내려보는 듯한 그림 속의 여인의 모습이 보게 되면서 점점 또렷하게 떠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노란 빛을 받은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눈앞이 어찔해지더니 심장 박동이 격렬해 지기 시작했다. 상혁의 입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 세상에…….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내가 …….”
 그 자신도 믿고 싶지 않았지만, 30세가 되던 해의 어느 봄날 아침, 상혁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상혁은 이런 자신이 두렵고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외딴 호수가에 숨어들게 된 이후로 항상 자신의 사랑을 쏟을 대상을 찾았지만, 정작 그에게 찾아온 사랑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혁이 원하던 사랑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그림과 사랑에 빠진 이후로 상혁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처음 상혁을 괴롭게 했던 것은 그림과 사랑하게 된 자신에 대한 공포와 수치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내가 미친 걸까?”
 한 때 상혁은 자신이 미치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에 그림을 찢어 불태우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림 앞에 설 때면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그림 앞에서 감히 칼을 들고 있지도 못하였다. 그림이 살아 자신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춤주춤 칼을 허리춤에 숨겨 떨어뜨리고는 또 몇 시간 동안이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 때 즈음에는 상혁은 자신의 광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리 걱정하고 부인해 봐도 그림을 보면 격렬해지는 심장박동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상혁은 자신이 그림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억제하던 두려움과 수치심이 사라졌지만, 오히려 상혁의 마음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도, 부드러운 살결을 느낄 수도, 머릿결에서 풍겨오는 청아한 향기를 맡을 수도 없는, 오로지 바라 볼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애절하게 쓰다듬어도 차갑고 매끄러운 액자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괴로운 마음에 상혁은 언제 부터인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음주가 아니었기에 식사도 하지 않고, 거실에 걸어놓은 그림 앞에 주저앉아 독한 술을 며칠씩이나 꼬박 위장에 부어 넣는 것이었다. 황폐해진 정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은 술이었지만, 오히려 그나마 건강했던 육체까지도 침식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혁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고, 몸은 앙상하게 메말라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면 상혁의 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름이 끝날 무렵, 상혁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밤도 상혁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안주도 없이 독한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하하, 그래도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가 돌봐주던 신화 속의 시대를 살았어. 하지만 넌 기적도 구원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야. 도대체 신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어디로 갔느냐고, 이 개자식들아!”
 상혁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쥐고 있던 술병을 벽에 집어던졌다. 그러다가는 취기에 휩싸인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으로 벌렁 쓰러졌다. 거실등은 꺼져 있었지만, 해가 지면 켜지는 집 밖의 보안등 불빛이 그림 속의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말없이 자신을 내려보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상혁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오,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 누가 나 좀 이 지옥에서 꺼내줘.”
 이렇게 상혁이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덧 거실의 열린 창문에서는 안개가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원래 상혁의 집은 산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우묵한 곳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지어졌다. 호수를 바라보는 거실의 전후가 모두 넓은 창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이전에도 앞뒤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을 때면 구름처럼 피어난 호수의 안개가 집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날의 안개는 그 어느 때보다 유달리 짙었다.
 어느덧 온 집안에 안개가 자욱하게 들어찼지만, 상혁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워낙에 몽롱한 상태였던지라 안개가 들어오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누워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치 거품과 같이 뭉클뭉클 들어서는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는 상혁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개보다 더 하얀 무언가가 하늘하늘 움직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취한 탓인지 상혁에게는 그 광경이 두렵다거나 괴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기대감과 호기심이 일며 그 물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다가오던 그것은 어느덧 누워있는 상혁의 몸의 앞에까지 다가왔다. 그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상혁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서늘한 손이 상혁의 이마에 와 닿다니 가볍게 밀어 다시 상혁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물속의 수초처럼 나풀거리는 하얀 천 사이로 그림 속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아니. 어떻게?”
 하지만 여인은 그림 속에 있을 때의 그 표정과 마찬가지로 예의 수줍은 듯하면서도 한 편으로 도발적인 미소를 입에 담은 채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상혁은 까닭 모를 비현실적인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느새 다가온 그녀의 서늘하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내리누르는 순간, 모든 논리의 끈을 놓아버렸다. 상혁은 신음 소리를 내고는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받아 들였다.
 상혁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이미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해가 너무 높이 떠버린 시간이었다. 누운 채로 잠시 상황을 정리해 보던 상혁은 지난 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떠올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밤 거실을 가득 채운 안개는 이미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던져 깨뜨린 술병의 흔적도 그대로 있었다. 상혁은 몸을 떨며 천천히 그림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문득 상혁의 자신의 바짓가랑이가 축축한 것을 느끼고는 내려 보았다. 그 원인을 알아차린 상혁은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에 몽정이라니…….’
 지난밤의 일은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지만, 술 깬 정신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랫도리에 고스란히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가? 상혁은 쓴 웃음을 짓더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자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받으며 상혁은 지난밤의 꿈을 곰곰이 생각했다. 비록 몽정이었지만, 상혁이 느낀 것은 그저 사정의 쾌감뿐이 아니었다. 눈물이 나도록 사무치는 당시의 환희와 안락함이란 정말 꿈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저 꿈이었다는 것에 대한 허망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위로를 거부하기에는 그 간의 외로움과 안타까움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상혁은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초췌한 안색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깡마른 사내가 서 있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을 자꾸 되씹어 보던 상혁은 면도기를 들어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씻기를 마친 상혁은 옷을 차려 입고는 두 달만의 외출을 했다.
 두 달간의 무절제한 폭음으로 말미암아 상혁의 외모도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의 모습에는 여자들을 이끌 수 있는 매력이 남아있었다. 이 날도 예전처럼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여인들의 시선 속을 그저 지나치던 상혁은 문득 그 눈길들 속에서 어떤 여인을 발견하고는 경악으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어떻게 된 거지?’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일이었다. 상혁의 그림과 똑같은 모습의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상혁은 간신히 추스르며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날 밤 여인은 호수가에 있는 상혁의 집으로 따라왔다.
 자신의 이름을 현정이라고 밝힌 여인은 몹시도 말수가 적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것도 그림 속의 여인과 닮았지만, 하지만 보안등이 켜진 채로 안개에 휩싸여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상혁의 집을 보았을 때는 그녀의 얼굴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이런 곳에 집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안개에 휩싸인 모습이 너무 멋지군요.”
 하지만 아까부터 격정으로 떨고 있던 상혁은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손이 떨려 현관의 문손잡이에 열쇠도 제대로 꽂지 못할 정도였다. 현정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선 상혁은 불을 켠 후에 곧 그림을 보게 될 그녀를 넌지시 살폈다.
 “어?”
 현정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그녀 역시 그림 속의 여인이 자신과 몹시 닮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던 것이었다.
 “저를 원래 알고 있었던가요?”
 상혁은 거칠어지려는 숨을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래서 저도 아까 현정씨를 봤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정말 이건 굉장한 일이로군요.”
 “네.”
 감추려고 했지만, 상혁은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미 상혁의 머릿속에는 어젯밤의 꿈이 계속 되풀이되며 떠오르고 있었다. 상혁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현정이 싱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가만히 손을 들어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지난밤에 느꼈던 그 감촉, 그 느낌이었다.
 상혁은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고는 불을 껐다. 보안등의 불빛을 타고 창문 밖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밀려들어오자 현정이 재미있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더니 상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안개가 들어차기 시작하는 거실에서 두 사람은 하나로 포개어졌다. 모든 것이 어젯밤의 꿈과 같았다.

 

 3.
 이후로 상혁과 현정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가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만해서 끝내는 것도 하나의 결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연과 기적은 다르다. 우연은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이지만,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상혁의 이야기는 기적에 가까울 정도의 우연이지만, 일단 조각상이 인간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기에 애초에 글을 시작한 의도와 들어맞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현실성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필연성은 우연성, 또는 가능성이 합당하고 일반적인 형태를 취득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입맛 까다롭고 눈매 날카로운 독자들이 작가의 실수만 벼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대로 글을 끝낸다는 것은 명백한 희극이 될 것 같다. 이야기로써 사람을 웃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써서 내놓는 행위 자체가 비웃음을 사는 것이다. 그 비웃음은 이야기의 개연성 부족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전설, 기담의 시대에나 어울렸을 법한 유치하고 졸렬한 마무리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나 역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는 것은 싫은 소심하고 평범한 녀석이거니와, 우선 내 스스로 이런 결말은 마뜩치 않다.
 다행인 것은 이 이야기에는 지금까지 달려오던 관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뒤로 살을 붙인 이야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비웃음을 산다 하더라도, 그 힘을 빌려 조금 더 나아가 봐야 할 것 같다.

 

 4.
 이후로 상혁은 현정에게 빠져들었다. 그동안의 외로움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거의 매일 같이 만나며 사랑을 나누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던 여자를 찾은 상혁은 이후로 과연 행복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하였다. 현정이라는 그릇 자체는 그 이상을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지만, 그 안에는 담긴 것은 그렇지 못하였다. 조용하고 우아한 현정의 표정 뒤에는 상혁이 가장 혐오스러워하던 허영심과 탐욕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상혁이 그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현정의 소개로 만난 현정의 친구들이 상혁의 부에 대해 보이는 관심과 경탄 속에서 우쭐해 하는 현정의 눈빛을 보았을 때는 그저 보통 여자들이 갖고 있는 현시욕이겠거니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 이후 함께 했던 쇼핑에서 상혁의 돈에 기대어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기세를 노골적으로 보이면서는 상혁도 눈치를 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상혁은 현정의 단정하고 조용한 태도가 지적인 연마와 고상한 성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모만으로도 남자들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음을 아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간간이 엿보이는 탐욕스러운 눈빛을 알면서도, 상혁은 현정에게 몰두하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쩌다 그녀를 며칠 만나지 못하게 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초조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면 그것이 현정과 자신의 관계에 오히려 독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온갖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하지만 현정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줄수록 상혁은 괴로워져만 갔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상대에게 맞추어 가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현정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상혁 역시 현정의 허영심을 이해하게 되기는커녕 경멸만이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다. 상혁은 자신이 현정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현정과 헤어지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헤어진다면 다시는 그림 속의 여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좀처럼 상혁이 현정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정의 탐욕을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한 상혁의 조심스러운 시도 역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속물적 근성을 상혁이 사랑하는 예술이나 지식에 대한 욕구로 전환해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상혁의 방법이 서툴렀고 진부했던 데다가, 사람의 욕심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것인지라, 현정의 허영심이 더욱 정교해지고 은밀해지는 부작용만 낳고 말았다. 또한 현정에게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 역시 깊어졌다. 상혁은 현정에 대한 애증에 휩싸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날 밤도 상혁은 침울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찾았다. 이미 가을로 접어들며 꽤나 쌀쌀한 날씨였지만, 술기운으로 말미암아 전신에 열이 오른 상혁은 온 집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거실의 벽에 기대어 술을 마시던 상혁은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댔다.
 “가장 원하던 육체를 찾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은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더라. 하하, 과연 세상은 공평한 것이로군. 하긴 기적이 아닌 우연이 완전하길 바라는 것도 지나친 욕심이지. 이 모든 게 내 허황된 욕심인데 뭘 더 바라겠나. 그래도……. 그래도 기왕의 행운이라면 이것보다는 나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름다운 얼굴에 그렇게까지 역겨운 욕심을 담을 필요는 없었잖아!”
 상혁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술잔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벌컥벌컥 병째로 술을 들이켜더니, 으르렁대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몸에서 그 구역질나는 정신을 도려내고 싶어.”
 열린 창문을 넘어 짙은 안개가 스멀스멀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여름의 꿈처럼, 처음 현정을 만나던 날의 밤처럼 짙은 안개였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몽롱한 상태로 상혁은 그 안개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묘한 느낌이 술기운을 밀어내고 머릿속을 감돌고 있었다.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안개 속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상혁은 천천히 집 밖으로 나가서 안개에 휘감긴 보안등 불빛 아래 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피어오른 안개는 상혁의 집뿐만 아니라, 그 일대를 전부 감싸고 있었다. 대 여섯 걸음 앞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일대가 신비로운 고요함에 쌓인 가운데 상혁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희뿌연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고요함을 깨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쇠가 뭉그러지며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였다. 순간 벌레라도 기어가는 듯 이상한 감각이 상혁의 온몸을 간질이며 흘러갔다. 어느덧 상혁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뛰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를 헤치며 호수가의 길을 따라 얼마나 뛰었을까? 어느새 상혁은 호수에서 도로로 올라서는 비탈길 앞에까지 와 있었다. 호흡은 헐떡이고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상혁을 휘감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말미암아 상혁은 조바심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개 속에서도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저만치에 무언가가 길가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가갈수록 드러내는 빨간 몸체는 분명 상혁이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이었다. 상혁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과연 그곳에는 상혁이 현정에게 사 준 빨간색 스포츠카가 가로등에 정면으로 들이받혀 있었다.
 상혁은 허겁지겁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눈을 감은 현정이 운전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현정아! 현정아!”
 소리쳐 불러 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듣기로 부상자를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사고자를 빨리 차에서 꺼내어야 한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다. 망설이던 상혁은 결국 조심스럽게 현정을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길가에 누운 후로도 현정은 의식이 없었다.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휴대전화를 지니지 못한 상태였다.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던 상혁은 그제야 현정의 휴대전화에 생각이 미치고는 그녀의 가방을 찾아 차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허둥대고서야 비로소 구급차를 부를 수 있었다.
 구급차를 타고 함께 병원으로 갔던 상혁은 현정의 병원에서 내리 며칠을 꼬박 세웠다. 사고 경위에 대해서 경찰들이 조사를 하러 나오기도 했지만, 짙은 안개로 인한 사고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였기에 건성건성 조사를 마치고 돌아갈 뿐이었다.
 결국 현정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비록 숨은 쉬고 있었지만, 출혈로 인한 뇌 손상이 너무 심각했다. 의사로부터 뇌사란 말을 듣는 순간, 상혁은 문득 온몸에 흐르는 이상한 기분에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현정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죽음이라는 뇌사 판정을 들은 지금에는 묘하게도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불어 현정에게 그녀를 보살필 만한 친인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듣고서야, 자신을 격동시키는 그 야릇한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상혁은 현정이 사고를 당하던 날 무엇엔가 홀린 듯 안개를 따라 집 밖으로 나오기 바로 전에 혼자 술을 마시며 중얼거렸던 자신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섬뜩할 정도의 공교로움이었지만, 몇 달 후 현정을 자신의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오는 상혁의 입가에는 분명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미리 준비해둔 방에 현정을 눕히고는 상혁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 안에서 기생하고 있던 추악한 부분은 모두 사라져 버렸기에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서 더는 저열한 탐욕을 보며 괴로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현정은 그림 속의 여인처럼 조용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상혁의 감각이 미치는 곳에서 살아있었다. 상혁은 눈감은 현정을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사무치는 사랑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던 여인을 찾았던 것이다.
 상혁은 천천히 거실로 나와서는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안개가 돌봐주는 이 집에서 오랫동안 이어질 행복과 만족의 시간을 누릴 것이다. 이곳이야말로, 상혁이 바라는 것은 모두 이루어진 이곳이야말로 바로 그에겐 새로운 신화의 공간이다. 오늘도 호수 기슭을 넘고 담장을 넘어 안개가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상혁은 활짝 열려진 창문을 통해 집안에 들어차는 안개를 보며 벅차오르는 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