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선물 받다.
피레요린은 크리스마스를 맞는 거리에서 조용히 귤 껍질을 벗기며 고향을 떠올렸다. 차가운 눈모래가 햇살 아래에서 결코 녹지 못하고 출렁이는 곳. 그녀가 커다란 마법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언 발과 뜨거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어다녔을 태어난 곳이다. 적어도 그곳은 서울처럼 춥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하얀 입김이 하늘로 흩날렸다. 흐린 하늘이 부드러운 눈모래를 닮았다고 그가 말해준 눈을 보여줄 것 같았다. 그녀는 귤을 삼켰다.
맵시있는 보랏빛 코트를 입고 두꺼운 검은 목도리를 두른 위로 피레요린의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서울의 사람들과 그녀가 가장 다른 것은 빨간 눈과 새하얀 머리카락. 그러나 그는 그녀를 토끼와 닮았따고 꼭 안아주었다. 그것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가로등에 기댄 채로 말끔하게 벗겨낸 귤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따. 이곳에서는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이곳의 땅은 그녀의 고향처럼 흐르지 않았다.
"외계인 맞아요?"
"아, 맞나봐."
"염색 아니지? 렌즈 아니지?"
어렴풋이 들려오는 질문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피레요린의 귓등을 타고 내려떨어졌다. 반년 전의 그녀라면 바람에 날은 옷가지를 움켜쥐고 눈동자를 흔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지구에 불시착 한지는 꼭 반년이 흘렀다.
그녀의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마법을 건 것은 아마 악명 드높은 마법사 회젠일 것이다. 모두 이 마을만은 비켜가라고 빌었건만 회젤은 소문을 뒤쫓아오고 말았다. 거센 바람소리에 섞여 들리는 광소를 지나치며 모두가 회오리에 삼켜졌다. 그녀는 눈모래에 파묻혔을 때보다 두려웠다. 회오리 안에는 붙잡을 만한 고래도 헤엄치지 않았다. 뭉개지는 고통 속에서 눈 뜬 후에 그녀는 서울의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억지로 언어가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채웠다. 그녀는 곧 서울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모두 서울말로 떠올려야만 했고, 다시 고통이 들이닥쳤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짧은 머리를 긁더니 얕게 외쳤다.
"토끼 같아!"
그리고는 피레요린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토끼라는 동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자신이 토끼와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대로 아늑한 거실과 따뜻한 코코아, 조금은 큰 청바지와 티셔츠. 그는 빙긋 웃으며 피레요린의 이름을 묻더니 곧이어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김우진이야, 김. 우. 진."
"김, 우, 진."
"고등학교 졸업하고 지금은 택배 일을 하고 있어. 나중에 화물차 경력이 쌓이면 개인택시를 모는 게 꿈이고. 음, 그래서 나중에는 좋은 가정을 만드는 게 진짜 꿈이고. 넌 꿈이 뭐야?"
"무슨 단어인지 뜻을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꿈이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전 가족도 없고 태어나서 알고있는 사람들이라곤 마을 사람들과 여행자 몇 뿐이라……."
피레요린은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고 우진은 그럴 때마다 손수건으로 그녀의 뺨을 닦아주었다. 어느새 그녀가 우진에게서 새벽과 아침나절을 앗았다. 그리고 우진은 순진하게 그녀를 믿게 되었다.
우진은 낭만적인 만큼이나 현명하게 행동했다. 그는 피레요린의 손을 잡고 백화점의 속옷 매장부터 들어갔다. 옷을 사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먹었다. 처음 영화관에 갔고, 아이스크림을 살짝 핥아보았다. 그녀에게는 바깥에서 걷는 걸음마다 긴장되는 일 투성이었지만 우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스텝을 밟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끌리면서도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피레요린과 다른 외계인들의 사진과 영상은 어느새 인터넷을 통해 흩어졌고, 우진과 함께 서울거리를 쏘다닌 탓에 그녀는 이미 유명한 인간이 되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외계인들이 지상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새하얀 머리와 빨간 눈동자를 가진 인간들을 쉽게 구별해냈다. 프랑스 파리에서 구걸을 하던 헤렉 할아버지도 길게 머리를 기른 탓에 금방 세상에 알려졌으며, 레델즈 오빠는 영국 황실의 귀빈이 되어 있었다. 피레요린은 어느덧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옛 마을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헤렉 할아버지는 프랑스 어로 이야기했고, 로테드 언니는 일본어로 이야기했다. 크란 아주머니는 솥뚜껑만한 손을 탁자에 내려치며 영어로 이야기했으며, 꼬마 유리제는 중국어로 중얼거렸다. 레델즈는 심각한 영국 사투리로 로테드와 이야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간단한 몇마디 밖에는 전하지 못했다.
"레델즈 씨는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계인과 통역자 모두 말을 멈췄다. 지구에 잘못 불시착한 때문에 죽은 세미헨 할머니와 아직 발견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지구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는 시신을 흘려보낼만한 눈모래가 없었고, 모두들 세미렌 할머니를 화장하기로 했다. 지구의 대표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금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세미헨은 이름모를 강에 흩뿌려졌다.
세미헨은, 피레요린을 가장 귀여워했던 세미헨 할머니는 사라져버렸다.
지구의 학자들은 외계인들이 지구인들과 같은 몸을 가졌다고 알려주었다. 지구인들과 외계인들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같은 전염병에 전염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때서야 자신들이 받았던 수많은 검사와 주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주적 난민이라는 허가를 받고 여러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해나갔다. 그들의 존재가 모든 일이 거짓이고 연극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학자들이 몇가지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음에도 그런 말들은 이곳저곳을 나돌아다녔다. 어쨌거나 지구의 대표자는 빼앗긴 옷가지들 대신 통장을 주었다. 통장에는 매달 일정한 돈이 지급되었다.
TV에 출연하는 마을 사람들도 많았고, 마을에서 불리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드는 마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세미헨을 빼고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던 피레요린은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교수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는 주민등록증도 가지고 있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서울의 거리에서 우진을 기다리는 것도 익숙했다.
간간히 들리는 촬영음은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아져야 멈출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피부가 검은 인간들에 대한 대우에 대해서는 교수들 모두 얼버무리기를 좋아했다. 우진도 좋은 해답을 내지는 못했다.
이곳에 오면서 피레요린이 만원짜리를 집어넣은 구세군 냄비 주위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졌다.
"울면안돼. 울면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아이에게는 선물을 안주신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피레요린에게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커다란 도시라면 모를까 자신의 마을에는 그런 것이 없으며, 여행자들이 치유에 기적을 행하는 건물에 대해 들려주었던 이야기만 안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그들은 그런 이야기로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레요린은 그들의 제사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지만 처음 보는 외계의 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색했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외계인의 천국에는 자신과 기억을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가 같은 천국에 온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도 예수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자신과 같이 조그만 마을에 흘러들어온 고아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느낌에 몸이 떨릴 정도로 그는 빛났다. 혹시 이번에 찾아온 여행자가 자신의 피붙이는 아닐까, 자신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되어 잠시 들리지는 않을까 허무한 기대를 잇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우진도 위대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너무 많은 것들을 선물받았다. 더 이상 삶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 세계 자체도 커다란 선물이었다.
피레요린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우진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성큼 걸었다.
우진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때 입었던 연한 녹색 외투가 펄럭였다. 약간은 쌀쌀한 날씨에 뛰어온 탓인지 그의 코끝이 빨갛게 번졌다. 우진은 코를 쓱 문지르더니 피레요린에게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다.
"어젠 왜 아무말도 없이 간 거야?"
피레요린은 캔커피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따. 크리스마스 이브에 밤을 보내고 모텔에서 먼저 도망나온 일 때문에 그가 염려하는 것이리라.
"그냥 부끄러웠어."
당황한 것은 우진이었다.
"아, 음. 그러니까 나도 그게 처음이었고, 너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굳이 서로 부끄럽지 않은 척 해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
한참을 중얼거릴 것처럼 말을 꺼낸 우진은 갑자기 말을 뚝 끊고 빙긋 웃었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달콤한 하늘로 빠져든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안고 있다. 자신을 닮아 그에게 사랑받는 딸아이다.
"왜 그래? 괴로운거야?"
그는 항상 그녀의 정확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처음 그녀에게 사랑을 외칠 때에도 우진은 틀리지 않았따. 피레요린은 씁쓸한 말을 심장에서 쥐어내었다.
"난 말야,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아."
"나는 널, 넌 날 좋아하는 걸로 충분하잖아. 지구에는 어느 시대에도 사랑에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어. 자격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던 적이라면 모를까."
"우리에게는 항상 자격이 필요했어. 난 우리 마을이 있던 행성의 이름도 모르며 살았지만, 자격 없이 결혼한 여행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아. 그 여행자는 조금씩 차가워져. 그리고 언젠가 빨간 눈까지 푸르게 식으면 산산히 부서져 눈모래가 되어버리는거야. 모두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쓸쓸하게 부서지고말아. 내 부모님도 아마 그렇게 떠돌다가 돌아가셨겠지."
우진은 피레요린의 말을 믿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이곳은 네 고향이 아니잖아. 네가 부서져내릴 눈모래도 이곳엔 없어."
눈은 그떄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가온 구름이 조금씩 스스로를 떼어 떨어뜨렸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닮았어."
피레요린이 짧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 떨어진 눈송이가 사그라들었따.
"여기서 나는 이렇게 녹아 없어질지도 몰라."
우진은 선뜻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따. 녹아 없어질 때 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고, 그는 떨어지는 눈의 서늘함에 움츠러들었다.
"그 자격은 어떤 건데?"
피레요린은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머리카라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네가 먼저 말해버렸어."
그녀는 울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겠다고 마음먹기 전에 고백해서는 안돼. 나는 이미 늦었어. 네 고백을 듣고 나서야 널 사랑한다는 마음을 먹었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우진의 손수건이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피레요린은 뒤돌아섰다.
"잠깐만, 잠깐 기다려줘. 사랑하지는 않아도 잠깐 이야기는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우진은 피레요린의 손을 잡고 한적한 길을 걸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그네 두 개와 미끄럼틀만 놓여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지 공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쌍의 그네가 삐걱거렸따. 피레요린은 조용히 캔커피를 따면서 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나같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 없어."
"그런 식의 사랑이라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지 모를 때에도 사랑하는 거. 그건 아마 티르펜 같은 신이나 가능할거야. 물론 지구의 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아."
우진으나 빈 캔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후 그녀에게 물었다.
"티르펜은 어떤 신인데?"
피레요린은 차가워져 가는 커피를 홀짝였다.
"처음으로 가이노스의 씨를 눈모래에 뿌린 신이야. 가이노스는 원래 뜨거운 남쪽의 바위산에서 자라던 볼품없는 식물이었는데 티르펜은 그 식물이 눈모래에서 훨씬 크게 자라난다는 걸 발견하고 그 식물을 눈모래에 뿌렸어. 가이노스는 그렇게 눈모래를 떠다니면서 우리보다 훨씬 크게 자라나."
그녀는 가이노스의 키를 가늠하는지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거의 매일 새로운 가이노스가 마을 주변을 지나가. 우리는 사냥하듯 달려가서 열매가 달린 가이노스의 가지를 꺾어. 열매와 잎사귀는 우리가 먹고, 부드러운 가지는 가축에게 먹이지. 우리는 가이노스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해. 그래서 우리는 항상 씨앗을 마을이 있는 돌지대 위에서 싹이 틀 때까지 기른 후에 다시 눈모래 위로 흘려보내. 우리가 먹지 못해도, 다른 마을에 그 가이노스가 갈 수 있도록. 티르펜의 가호는 항상 가이노스를 사람들에게로 이끄니까. 모든 것은 티르펜으로부터 시작되었어. 우리는 티르펜처럼 처음을 정하지 못해. 그가 지나간 눈모래를 따라갈 뿐이야."
우진은 피레요린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에서 그녀에게 줄 선물이 부드럽게 쓸렸다.
"정말 사람이 얼어서 부서지는 걸 본 적이 있어?"
"본 적이 없어도, 눈모래는 항상 그렇게 속삭이곤 해. 눈모래가 흐르면서 노래를 불러."
"산타가 사실은 없다는 거, 알고 있어?"
"응. 배워서 알고 있어."
우진은 한 손으로 피레요린의 손을 잡았다. 두 그네가 같이 흔들렸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들의 산타가 되어준다는 것도?"
"응."
"이곳은 그런 곳이야.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신들을 흉내내도 괜찮은 곳이야. 봐, 이곳의 눈은 노래부르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우진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나는 네게, 너도 내게 처음이야. 처음이니까 아무래도 좋은 거야. 처음이니까 헤어져서는 안돼. 그러면 네 마을 사람들도 지구인들과 헤어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안돼."
피레요린은 훌쩍거렸따. 우진은 피식거리면서 그녀와 같이 울어주었다. 눈은 바람에 흩날리지 않으며 포근하게 쏟아졌다.
잠시 후 우진은 주머니에서 그녀에게 줄 선물을 꺼냈다.
"어젯밤에 주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버렸네. 넌 눈도 붉고 머리카락도 희니까 잘 어울릴 것 같았어."
피레요린은 우진이 건네준 산타클로스 모자를 뒤집어썼다. 모자꼬리가 옆으로 내려앉은 모습에 우진은 또 귀엽다는 말을 외치며 피레요린을 안고 눈 위로 쓰러졌다. 우진은 드디어 선물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