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어찌어찌하다 보니 넷이 모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외로운 늑대들끼리 여자라도 꼬셔보자며 모인 건 아니었고, 솔로끼리 서로의 어깨를 안아주며 고독을 달래보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다들 바빠서 약속 날짜를 미루고 미루다보니 한가한 날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덕분에 넷은 고교시절처럼 술만 진창 퍼마셨다.
태수는 뭘 해도 앞장서길 좋아했는데 이는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셔, 마셔!”
보통 태수의 속도를 따라 마시다보면 한 시간도 안 돼 뻗어버리기에 다들 몰래 술을 버리는 관행이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니들이 웬 일이냐? 주는 대로 다 마시고.”
태수도 바보는 아니었다.
“짜식, 내가 제대로 마시면 넌 상대도 안 돼.”
학교 다닐 땐 태수한테 설설 기었던 기석이 큰소리를 냈다. 술에 취한 탓인지, 명문대에 들어간 뒤 간이 커졌는지 기석은 기고만장했다.
“따라, 더 팍팍! 누구 코에 붙이라고 요거 밖에 안 줘.”
"오늘따라 좀 개기는데?“
기석과 태수는 옆에 있는 둘을 무시하곤 서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꾼 둘이 대작한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간 넷이 마신 소주가 네 병이었는데 십여 분만에 소주 세 병이 추가됐다. 곁에서 보고 있던 주승이 걱정되었는지 기석을 말렸다. 주승과 기석의 집은 가까웠기에 기석이 뻗어버리면 주승이 책임져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야, 그만 좀 마셔. 넌 태수처럼 술 쎄지도 않잖아.”
주승은 침착하게 설득하려 했지만 취한 자는 고집불통이다.
“내비 둬. 네가 내 엄마냐? 기분 좋은데 산통 깨고 있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 찢어진다는 말도 몰라? 네 꼴이 딱 그래.”
“어쭈, 내 앞에서 문자 쓰는 거야?”
기석은 명문대 생의 자존심이 상한 듯해 불쾌했다. 친구라곤 하지만 적당한 대학에 들어가 적당한 학점을 받고 앞으로도 적당히 살아갈 인간이 감히 어디서 충고를 해.
“좋아. 정 그렇다면 내가 왜 오늘 술을 마셔야 되는지 설명해 주지.”
기석은 작심했는지 술잔을 내려놓고 주승과 마주 앉았다.
“넌 지금 내가 외로워서, 솔로인 게 억울해서 술을 마신다 생각하겠지.”
“아냐?”
“틀렸어. 난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날 무수한 생명들이 머지않아 죽어갈 거라 생각하니 슬퍼서 견딜 수 없어. 가슴 아파 미칠 지경이라고. 너도 알다시피 크리스마스 이브엔 무수한 연인들이 함께 밤을 보내지. 그 결과 수많은 생명이 생겨나. 거기까지는 좋아. 근데 우리나라의 연간 낙태건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자그마치 5만 건이야. 5만 명이나 되는 생명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이런 데도 내가 술을 안 마실 수 있겠어?”
주승은 기석이 사회학과에 가더니 말도 안 되는 이론만 배워왔다 생각했지만 딱히 반박은 못했다. 헌데 여태까지 말없이 술만 마시던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말 수가 적지만 가끔씩 옳은 말을 한다.
“야, 그냥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신다고 하면 되지 뭐 그리 거창한 이유를 붙이냐.”
아무래도 주승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내 말을 이해 못 했나 본데 뭐 좋아. 친구라도 같은 사상을 가지란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말 나온 김에 얘기해야겠어. 우리는 왜 크리스마스라고 고독에 몸부림쳐야하지? 솔로여도 당당하게 살면 안 돼? 이건 모두 대중매체에 선동되어 자아를 잃고 물신화 되어버린 현대인들의 비극을 보여주는.......”
“시끄러!”
보다 못한 태수가 소주병을 들어 기석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러자 기석은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렸다.
“술 맛 떨어지게 개소리하고 있어.”
태수는 남은 술병 조각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뒤 술을 쓱 들이켰다.
“야, 어떡해. 죽은 거 아냐.”
주승이 걱정됐는지 쓰러진 기석에게 다가갔다.
“피 안 나지?”
“응.”
“그럼 괜찮아. 곧 있으면 깨어날 거야.”
주승은 믿을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도 소주병이 날아올까 봐 모르는 척 자리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냐.”
가만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현우의 말이었다.
“무슨 뜻이야?”
앞 뒤 잘라먹고 핵심만 얘기하는 현우를 보자 주승은 내심 걱정됐다. 저러다 쟤마저 뻗겠다. 다행히 주승의 상상이 현실이 되기 전에 현우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에 커플이여야만 한다는 건 이상해. 솔로여도 행복할 수 있잖아. 크리스마스가 낙태율에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고.”
“과연, 그렇군. 내가 왜 커플들을 보면 화가 났는지 이제야 알겠어.”
기석이 말할 때는 개소리로 취급하던 태수가 현우의 말엔 동의했다.
“역시 커플들이 악의 축이었던 거야. 내가 정의로운 남자란 건 다들 알지?”
주승은 태수의 주먹이 두려워 마지못해 동의했다. 현우는 태수 덕에 힘을 얻었는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먹었는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커플들을 떨어뜨려 솔로로 만드는 거야 말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지름길이야!”
누가 봐도 술 취한 솔로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허나 주승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 간 솔로로 지내온 주승이었기에 쉽게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의견을 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구체적인 계획 있어?”
말이 쉽지, 사랑으로 똘똘 뭉친 커플을 떼어놓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짜내고 있을 때, 널부러져 있던 기석이 깨어났다.
“아우, 머리가 왜 이리 아프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기석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하느라 붙어 들 있어? 내 뒷담화라도 하는 거야?”
주승은 그간의 토론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명문대 생답게 기석은 쉽게 이해했다.
“브레인이 빠지니 아무 것도 못 하는구만.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태수는 잃은 기억을 되살려주려다 참았다.
“넌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냐?”
“커플들 헤어지게 하는 거야 간단하지.”
기석은 아이디어를 냈고,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셋은 좋은 의견이라고 박수를 쳤다. 기석은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자.”
“왜? 그냥 여기서 하지?”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어. 우린 이 가게에 오래있었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살펴봤다. 커플들이 많은 가게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굳이 여러 군데를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죄다 커플들이라 동성끼리 뭉쳐있으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이 가게가 괜찮겠네. 손님이 별로 없어.”
셋은 기석을 따라 들어갔다. 술집엔 커플이 셋 있었을 뿐 다른 이들은 없었다. 넷은 간단한 안주를 시킨 뒤 기다렸다. 얘기를 들을 땐 좋다고 찬성했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주승은 긴장됐다. 그에 비해 기석과 태수는 여유만만 했고, 현우는 조용히 술만 마셨다.
“야, 들어간다.”
태수가 화장실로 가는 남자를 보고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여자 친구와 함께 희희낙락거렸던 남자다. 일단 태수가 먼저 화장실로 가고 다음은 기석, 주승, 현우 순이었다. 주승은 적당주의자라서 앞서가거나 뒤처지는 건 싫었다.
남자는 오줌을 싸는 중이었다. 오줌이 묻으면 곤란했기에 넷은 잠시 기다렸다. 오줌이 멈추자 태석이 점퍼를 머리에 씌워 시야를 가렸다. 남자는 불의의 공격을 받은 데다 한 손은 지퍼에 가 있고 앞마저 보이지 않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놔, 놔. 이거.”
남자는 몸부림 쳤지만 각 팔다리에 한 명씩 달라붙었기에 소용없었다.
“니들 뭐야. 대체.”
넷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윗도리를 전부 벗기고 바지를 벗기자 남자가 소리쳤다.
“안 돼! 거기만은.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
“우리도 그쪽 취향은 아냐.”
“쉿!”
기석이 태수에게 주의를 줬다. 혹여 목소리를 기억했다 신고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넷은 남자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은 뒤 변기에 가뒀다. 그리곤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좋았어. 이제 확인만 하면 돼.”
넷은 가게 입구가 잘 보이는 데 숨어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안 되겠어. 이만 집에 가자. 옷도 없고, 추워서.......”
커플이 헤어지는 걸 보고 기석은 환호했다.
“대성공이야. 니들도 봤지.”
주승은 내심 폭력을 썼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낙태될 생명을 구했단 생각을 하자 마음이 풀렸다. 기석은 흥분했는지 다른 이들을 보챘다.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좀 떨어진 데로 가자. 가까운데서 또 하면 위험하잖아.”
현우가 모처럼 의견을 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태수가 입을 열었다.
“야, 들을 땐 좋아보였는데 실제로 해보니 영 아니야. 이래가지곤 밤새도록 해봐야 다섯 커플이나 집으로 돌려보낼까 말까야.”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대안도 없으면서 괜히 반대하기는.”
성공으로 기가 살았는지 기석이 대범하게 말했다. 태수는 소주병을 찾다 보이지 않자 꾹 참았다.
“할 거면 한방에 해치우자고. 찔끔찔끔 하지 말고.”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태수가 기석의 아가리를 쳤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어. 다들 날 따라와.”
나머지 셋은 하는 수없이 태수를 따라갔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여기서 뭘 하려고.”
기석이 터진 입으로 궁시렁댔다.
“잠자코 태울만한 거 있으면 모아와.”
투덜거리며 기석은 시키는 대로 하는 척 하긴 했다. 물론 그리 열심히는 안 했다. 주승 또한 욕 안 먹으려 적당히 할뿐이었다. 이에 반해 현우는 학창시절 남들 다 청소 땡땡이 칠 때 묵묵히 청소하던 것처럼 쓰레기를 모았다.
“야, 이제 어쩔 건데? 어디 가서 불장난이라도 할 거야?”
기석이 물었다.
“맞아. 모텔에 갈 거야.”
“모텔?"
"모텔엔 커플들이 떼로 몰려들지. 모텔에 불이나면 알아서 커플들이 찢어지지 않겠어?”
“너 미쳤냐? 방화라니.”
기석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냐. 좋다고 아이디어를 낸 게 누구더라.”
“난 옷만 벗기자고 했을 뿐이야. 너는 불을 지르자고 하고 있고. 방화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모르지 너?”
“짜식, 내가 생각이 그렇게 없는 줄 아냐. 불이 난 척만 할 거야. 쓰레기들을 태워서 연기가 나게 한 다음에 화재 경보 시스템을 작동시키면 땡.”
“그게 말처럼 쉽냐. 자칫하면 방화미수로 잡혀들어가. 하려면 너나 해.”
기석은 불만을 표시했다.
“뭐야, 이제 와서 관두겠다고? 의리 없게.”
“의리 따질 일이 따로 있지. 미친 짓하려는데 같이 손잡고 뛰어들어 줘야하냐?”
명문대 생으로서 창창한 앞길을 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기석은 뒤로 물러섰다. 억지로 끌어들이려하면 도망치기라도 하겠다는 양.
“너는 됐어. 빠져. 니들은 같이 할 거지? 우린 친구잖아.”
주승은 적당 주의자였고 적당히 남들이 하는 대로 물 흐르듯이 끌려가는 걸 좋아했다. 변화나 튀는 것을 주승은 거부하곤 했고 때마침 술마저 깼다.
“나도 안 할래.”
“젠장.”
태수는 기대에 찬 눈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25년간 솔로였기에 태수가 하려는 일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알았어. 하자. 대신 쟤네 둘도 집에 가면 안 돼. 참여는 안하더라도 허튼 짓하면 안 되니 같이 있어줘야겠어.”
“니들도 따라와. 시키진 않을 테니 옆에서 지켜보기 만이라도 해. 도망가면 우리 9년 우정은 그 날로 끝이다. 어? 알았지?”
기석과 주승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넷은 입구가 하나이고 비상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모텔을 골랐다.
“여기가 좋겠어.”
현우는 2개월간 소방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기에 소방 설비에 관한 지식이 약간 있었다. 현우는 손님인척 모텔에 들어가 소방 설비를 확인한 뒤 나왔다.
“딱 좋아. 실제로 불이 나면 다 타 죽겠어.”
현우는 만족스러웠는지 활짝 웃었다. 태수와 현우는 필요한 도구들을 봉투에 넣은 뒤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 직원이 알겠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화재 경보 장치는 복도마다 있었지만 구색 맞추기 식으로 관리한 덕에 허술했다. 둘은 가져온 복면을 쓴 뒤 불을 피워 연기가 가득하도록 했다.
“잘못하면 불이 붙는 거 아냐?”
태수가 걱정을 했다.
“괜찮아. 붙진 않았지만 공부해서 다 알고 있어. 쓰레기들을 담은 통은 불연재라서 불에 타지 않아. 연기만 많이 날 뿐이지. 어느 정도 타면 연기도 가라앉고.”
연기가 적당히 퍼졌다 싶을 때 화재 경보 장치를 작동시켰다. 순식간에 모텔이 소란스러워졌다.
태수와 현우는 1층 입구로 갔다. 둘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부식된 쇠붙이를 손에 들었기에 위협적이었다. 커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태수가 소리쳤다.
“아랫도리를 벗은 사람만 나갈 수 있다. 살고 싶으면 바지랑 치마를 벗어!”
허공을 가르는 쇠붙이의 날카로운 소리를 듣자 아무도 저항할 생각을 못했다. 커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어재꼈다. 이미 옷을 벗어둔 사람도 많았기에 동시에 빠져나가느라 입구가 막히진 않았다. 절반쯤 나갔는가 싶었는데 연기가 훨씬 심해졌다. 태수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이만 나가자. 충분히 벗겼잖아.”
“먼저 나가. 난 마지막에 나갈 테니.”
현우가 끝끝내 고집을 부리자 태수도 하는 수 없이 기다렸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연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기석이 모텔로 들어왔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불났잖아. 콜록콜록.”
“뭐? 뭔 소리야. 연기만 난다고 했는데.”
“바깥에서 불길이 보일 정도야.”
진실을 알아챈 태수가 현우의 멱살을 잡았다.
“너, 구라 쳤구나.”
“그래. 연기만 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미쳤냐 너?”
“커플들은 다 죽어야 돼! 불에 타 죽어 마땅하다고! 니들은 그래도 연애를 해보기라도 했지. 나는 25년간 솔로였어!”
현우는 태수의 손길을 뿌리친 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계단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저 자식.”
태수는 기석의 손에 이끌려 모텔을 나왔다. 경찰들이 오기 전에 현장에서 벗어나야했지만 현우가 걸려 그럴 수 없었다. 셋은 모텔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몸을 숨긴 채 얘기했다.
“현우는 어떻게 됐을까?”
주승의 목소리는 우울하기만 했다.
“몰라. 기다려봐야 알겠지.”
“야, 김태수. 너는 옆에서 보면서 현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어? 네가 눈치 채기만 해도 막을 수 있었는데.”
기석은 울분을 터뜨렸다.
“하, 평소에 허튼 소리를 안 하던 애라서 철석 같이 믿었지. 좀 더 의심해봤어야 했는데.”
태수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정말 크리스마스 따위는 누가 만든 걸까. 크리스마스만 없었어도 우리는 이런 모의를 하지 않았을 거고 현우가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맞아. 크리스마스는 인류의 재앙이야. 풍족한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명절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겐 빨리 지나쳐 갔으면 하는, 없는 게 차라리 나은 날이야.”
셋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성토했다. 토론을 하느라 잠시 현우를 잊었던 셋은 갑자기 들려온 현우의 목소리에 모텔 쪽으로 달려갔다.
현우는 불이 다 꺼진 모텔 옥상에 서 있었다.
“가까이 오면 뛰어내리겠어. 가까이 오지 마!”
“요구 사항이 뭔가?”
스피커 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적이 지속되는가 싶더니 현우가 울부짖었다.
“커플 무죄! 솔로 유죄! 돈 없어도 커플이면 무죄! 돈 있어도 솔로면 유죄! 솔로면 이상하게 보는 이 세상은 잘못 됐다. 솔로여도 존중하고 인정해라!”
현우는 말을 마치곤 뛰어내렸다. 그는 죽을 때도 혼자였다.
태수는 뭘 해도 앞장서길 좋아했는데 이는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셔, 마셔!”
보통 태수의 속도를 따라 마시다보면 한 시간도 안 돼 뻗어버리기에 다들 몰래 술을 버리는 관행이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니들이 웬 일이냐? 주는 대로 다 마시고.”
태수도 바보는 아니었다.
“짜식, 내가 제대로 마시면 넌 상대도 안 돼.”
학교 다닐 땐 태수한테 설설 기었던 기석이 큰소리를 냈다. 술에 취한 탓인지, 명문대에 들어간 뒤 간이 커졌는지 기석은 기고만장했다.
“따라, 더 팍팍! 누구 코에 붙이라고 요거 밖에 안 줘.”
"오늘따라 좀 개기는데?“
기석과 태수는 옆에 있는 둘을 무시하곤 서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꾼 둘이 대작한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간 넷이 마신 소주가 네 병이었는데 십여 분만에 소주 세 병이 추가됐다. 곁에서 보고 있던 주승이 걱정되었는지 기석을 말렸다. 주승과 기석의 집은 가까웠기에 기석이 뻗어버리면 주승이 책임져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야, 그만 좀 마셔. 넌 태수처럼 술 쎄지도 않잖아.”
주승은 침착하게 설득하려 했지만 취한 자는 고집불통이다.
“내비 둬. 네가 내 엄마냐? 기분 좋은데 산통 깨고 있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 찢어진다는 말도 몰라? 네 꼴이 딱 그래.”
“어쭈, 내 앞에서 문자 쓰는 거야?”
기석은 명문대 생의 자존심이 상한 듯해 불쾌했다. 친구라곤 하지만 적당한 대학에 들어가 적당한 학점을 받고 앞으로도 적당히 살아갈 인간이 감히 어디서 충고를 해.
“좋아. 정 그렇다면 내가 왜 오늘 술을 마셔야 되는지 설명해 주지.”
기석은 작심했는지 술잔을 내려놓고 주승과 마주 앉았다.
“넌 지금 내가 외로워서, 솔로인 게 억울해서 술을 마신다 생각하겠지.”
“아냐?”
“틀렸어. 난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날 무수한 생명들이 머지않아 죽어갈 거라 생각하니 슬퍼서 견딜 수 없어. 가슴 아파 미칠 지경이라고. 너도 알다시피 크리스마스 이브엔 무수한 연인들이 함께 밤을 보내지. 그 결과 수많은 생명이 생겨나. 거기까지는 좋아. 근데 우리나라의 연간 낙태건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자그마치 5만 건이야. 5만 명이나 되는 생명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이런 데도 내가 술을 안 마실 수 있겠어?”
주승은 기석이 사회학과에 가더니 말도 안 되는 이론만 배워왔다 생각했지만 딱히 반박은 못했다. 헌데 여태까지 말없이 술만 마시던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말 수가 적지만 가끔씩 옳은 말을 한다.
“야, 그냥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신다고 하면 되지 뭐 그리 거창한 이유를 붙이냐.”
아무래도 주승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내 말을 이해 못 했나 본데 뭐 좋아. 친구라도 같은 사상을 가지란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말 나온 김에 얘기해야겠어. 우리는 왜 크리스마스라고 고독에 몸부림쳐야하지? 솔로여도 당당하게 살면 안 돼? 이건 모두 대중매체에 선동되어 자아를 잃고 물신화 되어버린 현대인들의 비극을 보여주는.......”
“시끄러!”
보다 못한 태수가 소주병을 들어 기석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러자 기석은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렸다.
“술 맛 떨어지게 개소리하고 있어.”
태수는 남은 술병 조각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뒤 술을 쓱 들이켰다.
“야, 어떡해. 죽은 거 아냐.”
주승이 걱정됐는지 쓰러진 기석에게 다가갔다.
“피 안 나지?”
“응.”
“그럼 괜찮아. 곧 있으면 깨어날 거야.”
주승은 믿을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도 소주병이 날아올까 봐 모르는 척 자리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냐.”
가만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현우의 말이었다.
“무슨 뜻이야?”
앞 뒤 잘라먹고 핵심만 얘기하는 현우를 보자 주승은 내심 걱정됐다. 저러다 쟤마저 뻗겠다. 다행히 주승의 상상이 현실이 되기 전에 현우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에 커플이여야만 한다는 건 이상해. 솔로여도 행복할 수 있잖아. 크리스마스가 낙태율에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고.”
“과연, 그렇군. 내가 왜 커플들을 보면 화가 났는지 이제야 알겠어.”
기석이 말할 때는 개소리로 취급하던 태수가 현우의 말엔 동의했다.
“역시 커플들이 악의 축이었던 거야. 내가 정의로운 남자란 건 다들 알지?”
주승은 태수의 주먹이 두려워 마지못해 동의했다. 현우는 태수 덕에 힘을 얻었는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먹었는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커플들을 떨어뜨려 솔로로 만드는 거야 말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지름길이야!”
누가 봐도 술 취한 솔로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허나 주승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 간 솔로로 지내온 주승이었기에 쉽게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의견을 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구체적인 계획 있어?”
말이 쉽지, 사랑으로 똘똘 뭉친 커플을 떼어놓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짜내고 있을 때, 널부러져 있던 기석이 깨어났다.
“아우, 머리가 왜 이리 아프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기석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하느라 붙어 들 있어? 내 뒷담화라도 하는 거야?”
주승은 그간의 토론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명문대 생답게 기석은 쉽게 이해했다.
“브레인이 빠지니 아무 것도 못 하는구만.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태수는 잃은 기억을 되살려주려다 참았다.
“넌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냐?”
“커플들 헤어지게 하는 거야 간단하지.”
기석은 아이디어를 냈고,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셋은 좋은 의견이라고 박수를 쳤다. 기석은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자.”
“왜? 그냥 여기서 하지?”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어. 우린 이 가게에 오래있었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살펴봤다. 커플들이 많은 가게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굳이 여러 군데를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죄다 커플들이라 동성끼리 뭉쳐있으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이 가게가 괜찮겠네. 손님이 별로 없어.”
셋은 기석을 따라 들어갔다. 술집엔 커플이 셋 있었을 뿐 다른 이들은 없었다. 넷은 간단한 안주를 시킨 뒤 기다렸다. 얘기를 들을 땐 좋다고 찬성했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주승은 긴장됐다. 그에 비해 기석과 태수는 여유만만 했고, 현우는 조용히 술만 마셨다.
“야, 들어간다.”
태수가 화장실로 가는 남자를 보고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여자 친구와 함께 희희낙락거렸던 남자다. 일단 태수가 먼저 화장실로 가고 다음은 기석, 주승, 현우 순이었다. 주승은 적당주의자라서 앞서가거나 뒤처지는 건 싫었다.
남자는 오줌을 싸는 중이었다. 오줌이 묻으면 곤란했기에 넷은 잠시 기다렸다. 오줌이 멈추자 태석이 점퍼를 머리에 씌워 시야를 가렸다. 남자는 불의의 공격을 받은 데다 한 손은 지퍼에 가 있고 앞마저 보이지 않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놔, 놔. 이거.”
남자는 몸부림 쳤지만 각 팔다리에 한 명씩 달라붙었기에 소용없었다.
“니들 뭐야. 대체.”
넷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윗도리를 전부 벗기고 바지를 벗기자 남자가 소리쳤다.
“안 돼! 거기만은.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
“우리도 그쪽 취향은 아냐.”
“쉿!”
기석이 태수에게 주의를 줬다. 혹여 목소리를 기억했다 신고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넷은 남자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은 뒤 변기에 가뒀다. 그리곤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좋았어. 이제 확인만 하면 돼.”
넷은 가게 입구가 잘 보이는 데 숨어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안 되겠어. 이만 집에 가자. 옷도 없고, 추워서.......”
커플이 헤어지는 걸 보고 기석은 환호했다.
“대성공이야. 니들도 봤지.”
주승은 내심 폭력을 썼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낙태될 생명을 구했단 생각을 하자 마음이 풀렸다. 기석은 흥분했는지 다른 이들을 보챘다.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좀 떨어진 데로 가자. 가까운데서 또 하면 위험하잖아.”
현우가 모처럼 의견을 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태수가 입을 열었다.
“야, 들을 땐 좋아보였는데 실제로 해보니 영 아니야. 이래가지곤 밤새도록 해봐야 다섯 커플이나 집으로 돌려보낼까 말까야.”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대안도 없으면서 괜히 반대하기는.”
성공으로 기가 살았는지 기석이 대범하게 말했다. 태수는 소주병을 찾다 보이지 않자 꾹 참았다.
“할 거면 한방에 해치우자고. 찔끔찔끔 하지 말고.”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태수가 기석의 아가리를 쳤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어. 다들 날 따라와.”
나머지 셋은 하는 수없이 태수를 따라갔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여기서 뭘 하려고.”
기석이 터진 입으로 궁시렁댔다.
“잠자코 태울만한 거 있으면 모아와.”
투덜거리며 기석은 시키는 대로 하는 척 하긴 했다. 물론 그리 열심히는 안 했다. 주승 또한 욕 안 먹으려 적당히 할뿐이었다. 이에 반해 현우는 학창시절 남들 다 청소 땡땡이 칠 때 묵묵히 청소하던 것처럼 쓰레기를 모았다.
“야, 이제 어쩔 건데? 어디 가서 불장난이라도 할 거야?”
기석이 물었다.
“맞아. 모텔에 갈 거야.”
“모텔?"
"모텔엔 커플들이 떼로 몰려들지. 모텔에 불이나면 알아서 커플들이 찢어지지 않겠어?”
“너 미쳤냐? 방화라니.”
기석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냐. 좋다고 아이디어를 낸 게 누구더라.”
“난 옷만 벗기자고 했을 뿐이야. 너는 불을 지르자고 하고 있고. 방화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모르지 너?”
“짜식, 내가 생각이 그렇게 없는 줄 아냐. 불이 난 척만 할 거야. 쓰레기들을 태워서 연기가 나게 한 다음에 화재 경보 시스템을 작동시키면 땡.”
“그게 말처럼 쉽냐. 자칫하면 방화미수로 잡혀들어가. 하려면 너나 해.”
기석은 불만을 표시했다.
“뭐야, 이제 와서 관두겠다고? 의리 없게.”
“의리 따질 일이 따로 있지. 미친 짓하려는데 같이 손잡고 뛰어들어 줘야하냐?”
명문대 생으로서 창창한 앞길을 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기석은 뒤로 물러섰다. 억지로 끌어들이려하면 도망치기라도 하겠다는 양.
“너는 됐어. 빠져. 니들은 같이 할 거지? 우린 친구잖아.”
주승은 적당 주의자였고 적당히 남들이 하는 대로 물 흐르듯이 끌려가는 걸 좋아했다. 변화나 튀는 것을 주승은 거부하곤 했고 때마침 술마저 깼다.
“나도 안 할래.”
“젠장.”
태수는 기대에 찬 눈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25년간 솔로였기에 태수가 하려는 일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알았어. 하자. 대신 쟤네 둘도 집에 가면 안 돼. 참여는 안하더라도 허튼 짓하면 안 되니 같이 있어줘야겠어.”
“니들도 따라와. 시키진 않을 테니 옆에서 지켜보기 만이라도 해. 도망가면 우리 9년 우정은 그 날로 끝이다. 어? 알았지?”
기석과 주승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넷은 입구가 하나이고 비상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모텔을 골랐다.
“여기가 좋겠어.”
현우는 2개월간 소방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기에 소방 설비에 관한 지식이 약간 있었다. 현우는 손님인척 모텔에 들어가 소방 설비를 확인한 뒤 나왔다.
“딱 좋아. 실제로 불이 나면 다 타 죽겠어.”
현우는 만족스러웠는지 활짝 웃었다. 태수와 현우는 필요한 도구들을 봉투에 넣은 뒤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 직원이 알겠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화재 경보 장치는 복도마다 있었지만 구색 맞추기 식으로 관리한 덕에 허술했다. 둘은 가져온 복면을 쓴 뒤 불을 피워 연기가 가득하도록 했다.
“잘못하면 불이 붙는 거 아냐?”
태수가 걱정을 했다.
“괜찮아. 붙진 않았지만 공부해서 다 알고 있어. 쓰레기들을 담은 통은 불연재라서 불에 타지 않아. 연기만 많이 날 뿐이지. 어느 정도 타면 연기도 가라앉고.”
연기가 적당히 퍼졌다 싶을 때 화재 경보 장치를 작동시켰다. 순식간에 모텔이 소란스러워졌다.
태수와 현우는 1층 입구로 갔다. 둘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부식된 쇠붙이를 손에 들었기에 위협적이었다. 커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태수가 소리쳤다.
“아랫도리를 벗은 사람만 나갈 수 있다. 살고 싶으면 바지랑 치마를 벗어!”
허공을 가르는 쇠붙이의 날카로운 소리를 듣자 아무도 저항할 생각을 못했다. 커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어재꼈다. 이미 옷을 벗어둔 사람도 많았기에 동시에 빠져나가느라 입구가 막히진 않았다. 절반쯤 나갔는가 싶었는데 연기가 훨씬 심해졌다. 태수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이만 나가자. 충분히 벗겼잖아.”
“먼저 나가. 난 마지막에 나갈 테니.”
현우가 끝끝내 고집을 부리자 태수도 하는 수 없이 기다렸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연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기석이 모텔로 들어왔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불났잖아. 콜록콜록.”
“뭐? 뭔 소리야. 연기만 난다고 했는데.”
“바깥에서 불길이 보일 정도야.”
진실을 알아챈 태수가 현우의 멱살을 잡았다.
“너, 구라 쳤구나.”
“그래. 연기만 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미쳤냐 너?”
“커플들은 다 죽어야 돼! 불에 타 죽어 마땅하다고! 니들은 그래도 연애를 해보기라도 했지. 나는 25년간 솔로였어!”
현우는 태수의 손길을 뿌리친 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계단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저 자식.”
태수는 기석의 손에 이끌려 모텔을 나왔다. 경찰들이 오기 전에 현장에서 벗어나야했지만 현우가 걸려 그럴 수 없었다. 셋은 모텔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몸을 숨긴 채 얘기했다.
“현우는 어떻게 됐을까?”
주승의 목소리는 우울하기만 했다.
“몰라. 기다려봐야 알겠지.”
“야, 김태수. 너는 옆에서 보면서 현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어? 네가 눈치 채기만 해도 막을 수 있었는데.”
기석은 울분을 터뜨렸다.
“하, 평소에 허튼 소리를 안 하던 애라서 철석 같이 믿었지. 좀 더 의심해봤어야 했는데.”
태수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정말 크리스마스 따위는 누가 만든 걸까. 크리스마스만 없었어도 우리는 이런 모의를 하지 않았을 거고 현우가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맞아. 크리스마스는 인류의 재앙이야. 풍족한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명절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겐 빨리 지나쳐 갔으면 하는, 없는 게 차라리 나은 날이야.”
셋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성토했다. 토론을 하느라 잠시 현우를 잊었던 셋은 갑자기 들려온 현우의 목소리에 모텔 쪽으로 달려갔다.
현우는 불이 다 꺼진 모텔 옥상에 서 있었다.
“가까이 오면 뛰어내리겠어. 가까이 오지 마!”
“요구 사항이 뭔가?”
스피커 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적이 지속되는가 싶더니 현우가 울부짖었다.
“커플 무죄! 솔로 유죄! 돈 없어도 커플이면 무죄! 돈 있어도 솔로면 유죄! 솔로면 이상하게 보는 이 세상은 잘못 됐다. 솔로여도 존중하고 인정해라!”
현우는 말을 마치곤 뛰어내렸다. 그는 죽을 때도 혼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