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1]
딸랑딸랑, 어디선가 구세군 종소리가 들려오고, 여기저기 반짝이는 불빛이 거리를 수놓는다. 주변 분위기에 한껏 들뜬 연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바삐 걷고, 아이들의 아버지일 중년남성은 커다란 곰 인형을 어깨에 두르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점점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번화가를 오가는 인파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함을 거리에 각인시키듯, 반짝이는 주변 조명들과 동화되어 불규칙적으로 일렁인다. 그 일렁임의 흐름에 거스른 채, 멍하니 담배를 태우는 동원의 뒤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를 위협하며 번쩍였다.
‘여러분! 여길 보세요! 이 불쌍한 놈은 오늘 같은 날에 쭈그려 앉아 담배나 태우고 있네요!’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수군댔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갑자기 동원은 으슬으슬 추워오는 것 같았다.
네 번째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동원은 일어섰다. 시계바늘이 10시를 막 넘어 내달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거리. 그 차가운 공기는 지나는 사람들의 설렘으로 가득 채워져 갔지만, 그래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손을 뻗었다. 그는 눈이 내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다.
**********
파격! 스타빡쓰 커피숍 - 2009년 동안 쭈~욱 커플 반값 이벤트!
산타클로스가 내민 전단지에는 그런 것들이 적혀있었다. 2009년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고, 동원은 지금 커플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 시간 전이었다면 해당되는 사항이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앞을 가로막고 나타난 산타클로스를 향해, 동원은 의도적인 조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 산타는 종이쪼가리도 선물하나요?”
자신을 향한 싸늘한 비아냥거림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산타클로스는 태연하게 턱 밑의 수염을 뜯어내고 있었다. 분장을 해체한 산타클로스는 의외로 귀여운 인상의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그녀는 싸구려 산타 모자를 다시 고쳐 쓰곤, 동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 기억 안 나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동원은 파편화된 기억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갔다. 아는 사람인가? 아니, 분명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동그란 뿔테안경을 꺼내 쓰곤, 다시 동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동원이 그녀를 기억해내게 된 건 순전히 그녀의 눈웃음 때문이었다. 동그란 뿔테안경은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그녀는 한 시간 전에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던 여성이었다.
“기억나죠?”
“안 나는데요.”
“거짓말, 레스토랑에서 봤잖아요?”
“잠깐 봤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죠.”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며, 반갑게 인사라도 해주길 바란 걸까.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원은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그럼 그 레스토랑에는 있었단 얘기네요?”
그녀가 떼어낸 수염을 다시 붙이며 말했다. 수염이 잘 붙지 않아 꾹꾹 누르는 와중에도 빤히 동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워 동원은 그냥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랑 헤어졌죠?”
“뭐라고요?”
“내가 뒤에서 다 들었는데…….”
그녀는 지금 도발하고 있는 것이고, 여기에 말려들면 지는 것이다. 동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의연하게 대답했다.
“뭐, 그랬죠.”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넌 나한텐 너무 버거워!”
“그랬죠.”
“그리고 그 목도리도 놔두고 가! 내가 백수라 그런 거라도 필요한 상황이거든!”
“그랬죠…….”
“근데 이건 너무 쪼잔 했던 거 아니에요?
“뭐 하는 거 에요? 지금?”
말려들었다. 끝까지 태연하게 넘겼어야 했는데. 상대는 산타클로스로 크리스마스의 제왕이고, 동원은 한 시간 전에 실연한 크리스마스의 천민이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고, 이겨서 남는 것도 없다. 동원은 뒤늦게 상황을 수습해보려 애썼다.
“아……, 그 목도리는 진짜 필요했어요. 날씨가 이렇게 추운 줄 모르고 옷을 가볍게 입고 왔거든요.”
동원은 최대한 태연해 보이도록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별에 대해서 무감각한 모습으로 어필되길 원했다. 꼭 그녀가 아니어도 좋다. 사실은 아무에게나 얘기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에 거리를 홀로 걷고 있지만, 정말 괜찮다. 오히려 후련하다. 자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간파했다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왜 웃어요?”
“그냥요, 그냥 웃겨서…….”
“어차피 내가 사 준건데. 뭐 어쩌라고요?!”
그녀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게 다 내 돈인데! 난 내 돈이 다시 돌아온 게, 너무 기뻐 미칠 것 같아요!”
동원은 짜증스럽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개의치 않고 목도리를 더 단단히 동여매더니, 행복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려 보이기까지 했다.
“알겠어요?!”
“네, 정말 그래 보이네요.”
“이제 됐죠?”
이 뜬금없는 실랑이는 이제 끝이다. 한 시간 전의 사건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복잡해 터질 것 같았다. 동원은 전단지를 둘둘 말아들고 터벅터벅 그녀의 옆을 지나쳐갔다. 하지만 몇 걸음 안가 뒤 돌아섰다.
“아, 이 치즈케이크는 사진을 잘 찍었네요. 맛있어 보여요.”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맛있어요. 좋아해요? 치즈케이크?”
“아니요.”
동원은 다시 걸었다. 하지만 곧 멈췄다.
“아니요,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내가 살게요.”
조금 전까지 동원을 조롱하던 그녀가 이젠 치즈케이크를 사겠다니.
“왜요?”
“치즈케이크 좋아한다면서요?”
“같이 먹겠다고는 안했잖아요.”
“뭔가 구실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그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산타 옷을 뒤적였다. 그러다 들고 있던 전단지 뭉치가 쏟아져 내려 길바닥을 도배해 버렸고, 그녀는 쭈그려 앉아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종이들을 짜증스럽게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 많은 종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란 힘들어 보였다.
“안 도와줘요?”
“쪼잔 한 놈이잖아요.”
“캐릭터가 확고하시네.”
전단지 뭉치를 대중 구겨 들고 일어선 그녀는 주머니에서 두꺼운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사실은 제가 시 쓰는 게 취미거든요. 근데 댁을 주제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연당한 남자의 애환? 뭐 그런 거!”
전단지 몇 장이 다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동원을 바라보며 생글 눈웃음 지었다.
“인터뷰가 필요하단 말인가요?”
“그렇죠!”
“제가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죠!”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마다 전단지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역시나 신경 쓰지는 않았다.
“좋아요.”
“좋아요?!”
뭐가 그리 기쁜지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그녀는 폴짝폴짝 뛰어댔고, 전단지는 거의 다 바닥에 떨어져 몇 장은 짓뭉개졌다.
“근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동원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 실연 안 당했어요.”
“아, 찬 거죠?”
“찬 거죠.”
2]
동원이 눈을 떴을 땐 혼자였다. 그는 흐리멍덩한 정신을 씻어내기 위해, 힘겹게 일어나 물을 들이켰지만 다시 침대에 뻗어버렸다. 창밖에서 환한 빛이 커튼사이를 뚫고 들어와 어두운 방안을 유일하게 밝혔다. 지금은 한 낮이었다. 동원은 끊겨버린 필름을 이어붙이며 지난밤 기억들을 돌이켜 봤다. 어젯밤엔 2년 동안이나 교제해 온 여자 친구와 헤어졌던 것 같았다. 그리고는 산타클로스와 만나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맞아, 그랬지.’
거기부턴 흑백 무성영화처럼 흐릿하지만 빠르게 재생됐다. 동원은 그녀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의 험담을 늘어놨다. 그녀는 신나게 맞장구를 쳐줬고,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술도 몇 잔 하게 됐을 것이다. 재생은 여기까지. 동원은 자신이 어떻게 이 모텔의 침대에 누워있게 된 건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단지 나체로 누워있던 그녀의 뒷모습만이 영화 포스터처럼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시를 쓴다고 했다. 자신이 어제 했던 말들이 그녀가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됐을까? 확신할 순 없다. 어제 했던 말이라곤 예전 여자 친구에 대한 욕설뿐이었다. 그런 게 도움이 될 리가 없지.
동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들을 힘없이 주워들었다. 두꺼운 니트를 목에 걸치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상태로 굳어버린 채, 그의 머리 깊숙한 곳에선 필사적으로 묘한 기분의 정체를 파헤쳐가고 있었다.
그 정체의 본질은 꽤나 의외적인 것이라 정작 본인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쓴 시를 읽어보고 싶다고 외치는 듯 했다. 대체 뭐라고 썼을까? 나에 관한 얘기가 들어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싶다.
황급히 옷들을 전부 주워 입고, 동원은 문밖을 나섰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그녀에 대한 생각만으로 지배되어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지난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만약 알아차렸더라도 지금의 동원에겐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3]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아니, 정말 그녀인가? 동원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젯밤 분명히 그녀와 함께 이 카페에 왔었다. 저기 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지. 첫 만남은 꽤나 까칠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도 괜찮아졌다. 그녀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고, 지금 그녀는 동원의 앞에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아아, 저기……. 아무거나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거나 달라니. 한심하다.
“메뉴를 고르셔야 하는데요.”
태연하고 차분한 말투였다. 누가 봐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식이면 구겨진 자존심은 둘째 치고 일단 오기가 생겨버린다. 동원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우리 어제 만났잖아요?”
“네?”
“여기서 치즈케이크도 먹었고, 2차로 술도 마셨죠.”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는 마치 자신이 치근덕거리는 꼴이 아닌가. 동원은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 더 강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 뒤에는 아마 모텔까지 갔을 거 에요.”
이래도 모른 척 하긴 힘들 것이란 생각에 내놓은 수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동원을 노려봤다. 그냥 이 얘긴 꺼내지 말걸, 동원은 뒤늦게 후회했다.
“진짜 기억 안 나요?”
동원의 목소리는 이젠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어젠 그렇게 즐거워 해놓고!’
간절하게 일그러지는 동원의 표정에 조금 동요했는지,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잠깐 봤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잖아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대사였다. 이렇게 되돌아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릴 걸 예상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뭐, 그건 당연하겠지. 동원은 자신이 했던 실언을 뒤늦게 후회했다. 사실 실언도 아니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으니깐. 일단 여기선 동원이 물러서야 했다.
“그래요, 그땐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은 레스토랑에서 봤던 거 기억하고 있었어요.”
“주문 안하실거에요? 뒤에 다른 손님들 기다리시는데.”
동원이 뒤를 돌아보자, 서너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표정이라기 보단, 동원과 그녀 사이의 실랑이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는 듯 했다.
“창가 쪽 테이블에서 기다릴게요. 한 시간 뒤에는 끝나죠?”
“아니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완전히 몸을 돌려버렸다. 완전한 거절의 표시.
“저, 저기! 그러면 시 쓴 거라도 보여줘요! 어제 몰래 쓰고 있는 거 다 봤어요!”
물론 지어낸 말이었다. 상황이 급하다보니 동원의 입에선 아무렇게나 멘트가 튀어나왔다.
“그거 날 주제로 쓴 거니까, 나한테도 초상권이 있어요! 볼 권리가 있다는 얘기죠!”
이 억지논리는 동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것조차 통하지 않으면 그땐 진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막다른 길의 보이지 않는 활로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동원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 시간 뒤면 끝나요. 커피는 어제 마셨던 거면 됐죠?”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동원의 진심이 통한건지, 아니면 옆에서 눈치 주던 나이 많은 동료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됐든 그녀와 이야기할 시간을 벌었으니 성공이다. 그렇게 안도하며 동원은 뒤를 돌아봤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축하한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볍게 박수까지 치고 있다.
‘아, 왠지 쪽팔린다.’
**********
동원은 그녀가 내민 수첩을 받아들었다. 까칠까칠한 재질의 하드커버를 넘기자, 종이를 띄엄띄엄 메우고 있는 글귀들이 드러난다.
“오~ 이거에요?”
“맨 뒤에 것만 읽어요.”
그녀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만나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내보이는 모든 반응들은 한마디로 산뜻하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조차 동원에겐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됐다.
“정말 읽고 싶었던 거 맞아요?”
“물론이죠.”
제목은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별. 중학교 때 이후로 시를 읽는 일은 처음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시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쉽게 말해 가볍고 귀여운 시는 기억에 잘 남는다. 동원은 그녀가 쓴 시가 그런 쪽에 가깝다고 생각됐다. 그냥 가벼운 취미정도니깐.
“어때요?”
“와, 좋은데요.”
“거짓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동원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랑은 분위기가 뭔가 다르다. 왠지 그녀의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다는 생각에, 동원은 살짝 과하게 떠들어댔다.
“진짜에요, 진짜 좋아요. 특히 마지막 행의 이 문장이 너무 좋아요. 제 감정이 이랬거든요. 궁상맞게 살짝 우울해 있었죠.”
“근데 왜 지금은…….
지금? 지금이 어떻기에?
“지금은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아, 그야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표정과 반응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으니깐. 하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내진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가르며, 묘한 기류를 뭉게뭉게 만들어낸다.
“왜 나 모른 척 했어요?”
동원이 던진 질문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어제 자신이 그녀를 모른척했던 것에 대한 사사로운 복수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면 큰 문제가 된다. 차라리 아무 이유가 없는 쪽이 더 나았다.
“제가 술 마시고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옛 여자 친구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조금 감정적으로 대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리고 모텔도 제가 먼저 가자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뭘 모른다는 거지? 분명 무언가 핀트를 잘못 잡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래요, 아무 것도 몰라요. 하지만 왠지 우리는 서로 더 잘 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동원은 바로 앞에서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 지금 고백하는 거 에요?”
“비슷해요.”
인정해버렸다. 어정쩡한 타이밍이지만, 지금을 넘기면 이건 고백이 아니라 싸움이 돼버릴 분위기였다. 그녀는 가만히 눈웃음 지으며 실실 웃고 있었는데, 그게 긍정의 표현인지, 부정의 표현인지 동원에겐 감을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녀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동원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한동원입니다.”
“신유라에요.”
만난 지 약 16시간 정도. 그 사이 함께 술을 마시고, 만취된 상태로 모텔을 거친 뒤, 약간의 실랑이 끝에서야 간신히 우스꽝스러운 통성명을 마친 것이다.
“그래요, 이름은 지금 알았네요. 하지만 아직은 모르는 게 더 많아요.”
“시를 쓰는 걸 좋아하고, 저처럼 치즈케이크를 좋아하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자친구가 없어요.”
동원은 묘하게 자신감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아니, 아마 없을 거 에요.”
“있어요.”
“그럼 좀 소개해 줄래요? 만나서 밥이라도 먹죠.”
왠지 모르게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던 건지, 정말 있어도 상관없었던 건지. 끝까지 맞받아치는 동원을 보고 그녀는 곤란한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사실은 없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건 내 겉모습일 뿐이지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에요. 진짜 나를 알면 분명 실망할걸요?”
“설마.”
“아뇨, 분명 실망할 거 에요.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서로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겠죠. 그리고 그런 불만들을 속으로만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결국엔 어제처럼 한 번에 폭발시키고 끝날 거 에요. 동원씨가 그런 성격이라는 건 고작 하루 봤지만 충분히 알 수 있어요.”
그럴 리 없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오늘의 동원의 행동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건 그녀가 근본적으로 뭔가 다른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은 왠지 다를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은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동원은 그렇게 확신했다.
“좋아요, 그럼 내기를 하죠.”
“네?”
“지금부터 눈을 감고 5초를 셀게요. 만약 내가 그렇게 귀찮고, 그렇게 싫다면 일어나서 그냥 가세요.”
그녀는 멍하니 동원을 바라봤다. 어리둥절해 더 이상 눈웃음도 짓지 않았다.
“나는 ‘유라씨가 가지 않는다.’에 걸게요. 내가 이기면 바로 밥먹으러가죠.”
동원은 진짜로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 2 …….’ 속도는 조금 빨랐다. 5초를 마쳤을 땐, 실제론 약 3초 후반정도. 동원은 재빨리 눈을 떴다.
사실 그 사이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일어나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원은 안도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눈이 와서 보고 있던 거 에요.”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창밖엔 진짜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동원씨가 귀찮고 싫데요?”
얼굴을 붉히며 발끈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원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어느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뭐 먹고 싶어요?”
동원이 물었다.
“요 앞에 괜찮은 일식집이 생겼다던데…….”
“일식?”
“싫어해요?”
“좋죠. 초밥.”
동원과 그녀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거리에 얕게 쌓인 흰 눈을 밟으며 둘은 나란히 걸었다. 동원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4]
불쌍한 고양이
그녀가 비리다고 말하기 전까지
생선을 잡아 요리를 준비 했습니다.
그녀가 무섭다고 말하기 전까지
옥상에 올라 별을 바라보았지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어요.
**********
퇴근하는 길에 동원은 제과점에 들렀다. 제과점 안은 상당히 붐벼, 거의 다 팔리고 얼마 남지 않은 치즈케이크 몇 조각만을 간신히 건져들 수 있었다. 평소보다 비싼 가격이지만, 요새 통 먹은 적이 없으니깐. 게다가 내일은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분위기 좀 내보려는 마음이었다.
제과점을 빠져나오면서 동원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부재중 전화가 6통. 마지막 전화는 한 시간 전이었고, 그 뒤론 문자조차도 와 있지 않았다. 이제 좀 지쳤을라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동원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전화했었어?”
“응.”
유라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설마 울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지. 동원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아, 사실은 회식이 있었어. 연말이잖아. 복잡해서 전화 온 줄도 몰랐어.”
회식을 핑계로 내세운 게 벌써 몇 번째이더라, 동원은 머릿속으로 헤아려보다가 그만뒀다. 이정도면 누가 봐도 억지수준이지만 그녀는 또 넘어가 주겠지. 그 뒤엔 미안하다며 약속을 조금 뒤로 미루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피한지도 벌써 한 달에 가까워져갔다.
“저기, 유라야. 그래서 말인데…….”
어색한 침묵을 깨고 동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 만나기로 했던 거, 좀 뒤로 미루자. 미안해. 근데 알지? 우리 회사 요즘 바빠서 휴일이고 뭐고 없는 거…….
“.....”
“이번 주말 어때? 내가 근처에 괜찮은 식당 알고 있거든. 미리 예약해 놓을게.”
“그만.”
동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만해.”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
“우리 그만 하자.”
동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라의 그 한마디는 동원이 그동안 바라면서도 미뤄왔던 이별 선언이었다. 자신이 언제쯤 마음먹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먼저 해버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한 달 전의 그 날? 아니, 훨씬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겠지.
“동원씨,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유라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동원씨가 모텔로 날 끌고 갔잖아. 처음 만난 날이었는데…….”
“그랬나.”
“응, 그랬어. 둘 다 술에 취해 헤롱헤롱하고 있을 때, 동원씨가 먼저 말을 꺼냈지.”
유라는 헤헤하며 웃었다. 동원은 휴대전화 너머로 짓고 있을 그녀의 표정을 상상했다. 하지만 잘 떠오르진 않았다.
“동원씨는 은근히 밝힌다니깐?”
“미안, 기억이 잘 안나.”
“자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랬다. 중요한건 상대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아니었다. 알아야 할 건 자기 자신이다. 왜 끝까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서 나름 알게 됐더라도, 그런 게 과연 앞으로의 자신을 바꿀 수나 있을까?
**********
“선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집 앞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그녀를 향해 동원은 손에 든 치즈케이크 상자를 들어보였다.
“어! 이거 뭐에요?”
“치즈케이크. 좋아해?”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완전 싫어해요! 느끼하잖아요. 암튼 빨리 들어가요! 추워요!”
무언가 텅 비어있다. 이 느낌은 뭘까? 어딘지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이 묘하게 간질거린다. 그리고 허전하다.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동원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앉았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따뜻한 체온에 몸을 녹여간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선배, 오늘 좀 이상해요.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래.”
“정신 좀 차려요! 오늘 크리스마스에요!”
그녀는 동원의 팔을 잡고 흔들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시계바늘이 12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오늘 눈 내렸으면 좋겠다! 그쵸?”
“눈?”
동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했다.
“선배, 왜 그래요?”
그리곤 재빨리 블라인드를 걷어 재꼈다. 하지만 눈은 내리고 있지 않았다.
“나는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던 건가.”
“선배…….”
“응?”
“대체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딸랑딸랑, 어디선가 구세군 종소리가 들려오고, 여기저기 반짝이는 불빛이 거리를 수놓는다. 주변 분위기에 한껏 들뜬 연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바삐 걷고, 아이들의 아버지일 중년남성은 커다란 곰 인형을 어깨에 두르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점점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번화가를 오가는 인파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함을 거리에 각인시키듯, 반짝이는 주변 조명들과 동화되어 불규칙적으로 일렁인다. 그 일렁임의 흐름에 거스른 채, 멍하니 담배를 태우는 동원의 뒤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를 위협하며 번쩍였다.
‘여러분! 여길 보세요! 이 불쌍한 놈은 오늘 같은 날에 쭈그려 앉아 담배나 태우고 있네요!’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수군댔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갑자기 동원은 으슬으슬 추워오는 것 같았다.
네 번째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동원은 일어섰다. 시계바늘이 10시를 막 넘어 내달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거리. 그 차가운 공기는 지나는 사람들의 설렘으로 가득 채워져 갔지만, 그래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손을 뻗었다. 그는 눈이 내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다.
**********
파격! 스타빡쓰 커피숍 - 2009년 동안 쭈~욱 커플 반값 이벤트!
산타클로스가 내민 전단지에는 그런 것들이 적혀있었다. 2009년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고, 동원은 지금 커플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 시간 전이었다면 해당되는 사항이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앞을 가로막고 나타난 산타클로스를 향해, 동원은 의도적인 조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 산타는 종이쪼가리도 선물하나요?”
자신을 향한 싸늘한 비아냥거림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산타클로스는 태연하게 턱 밑의 수염을 뜯어내고 있었다. 분장을 해체한 산타클로스는 의외로 귀여운 인상의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그녀는 싸구려 산타 모자를 다시 고쳐 쓰곤, 동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 기억 안 나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동원은 파편화된 기억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갔다. 아는 사람인가? 아니, 분명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동그란 뿔테안경을 꺼내 쓰곤, 다시 동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동원이 그녀를 기억해내게 된 건 순전히 그녀의 눈웃음 때문이었다. 동그란 뿔테안경은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그녀는 한 시간 전에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던 여성이었다.
“기억나죠?”
“안 나는데요.”
“거짓말, 레스토랑에서 봤잖아요?”
“잠깐 봤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죠.”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며, 반갑게 인사라도 해주길 바란 걸까.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원은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그럼 그 레스토랑에는 있었단 얘기네요?”
그녀가 떼어낸 수염을 다시 붙이며 말했다. 수염이 잘 붙지 않아 꾹꾹 누르는 와중에도 빤히 동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워 동원은 그냥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랑 헤어졌죠?”
“뭐라고요?”
“내가 뒤에서 다 들었는데…….”
그녀는 지금 도발하고 있는 것이고, 여기에 말려들면 지는 것이다. 동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의연하게 대답했다.
“뭐, 그랬죠.”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넌 나한텐 너무 버거워!”
“그랬죠.”
“그리고 그 목도리도 놔두고 가! 내가 백수라 그런 거라도 필요한 상황이거든!”
“그랬죠…….”
“근데 이건 너무 쪼잔 했던 거 아니에요?
“뭐 하는 거 에요? 지금?”
말려들었다. 끝까지 태연하게 넘겼어야 했는데. 상대는 산타클로스로 크리스마스의 제왕이고, 동원은 한 시간 전에 실연한 크리스마스의 천민이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고, 이겨서 남는 것도 없다. 동원은 뒤늦게 상황을 수습해보려 애썼다.
“아……, 그 목도리는 진짜 필요했어요. 날씨가 이렇게 추운 줄 모르고 옷을 가볍게 입고 왔거든요.”
동원은 최대한 태연해 보이도록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별에 대해서 무감각한 모습으로 어필되길 원했다. 꼭 그녀가 아니어도 좋다. 사실은 아무에게나 얘기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에 거리를 홀로 걷고 있지만, 정말 괜찮다. 오히려 후련하다. 자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간파했다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왜 웃어요?”
“그냥요, 그냥 웃겨서…….”
“어차피 내가 사 준건데. 뭐 어쩌라고요?!”
그녀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게 다 내 돈인데! 난 내 돈이 다시 돌아온 게, 너무 기뻐 미칠 것 같아요!”
동원은 짜증스럽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개의치 않고 목도리를 더 단단히 동여매더니, 행복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려 보이기까지 했다.
“알겠어요?!”
“네, 정말 그래 보이네요.”
“이제 됐죠?”
이 뜬금없는 실랑이는 이제 끝이다. 한 시간 전의 사건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복잡해 터질 것 같았다. 동원은 전단지를 둘둘 말아들고 터벅터벅 그녀의 옆을 지나쳐갔다. 하지만 몇 걸음 안가 뒤 돌아섰다.
“아, 이 치즈케이크는 사진을 잘 찍었네요. 맛있어 보여요.”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맛있어요. 좋아해요? 치즈케이크?”
“아니요.”
동원은 다시 걸었다. 하지만 곧 멈췄다.
“아니요,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내가 살게요.”
조금 전까지 동원을 조롱하던 그녀가 이젠 치즈케이크를 사겠다니.
“왜요?”
“치즈케이크 좋아한다면서요?”
“같이 먹겠다고는 안했잖아요.”
“뭔가 구실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그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산타 옷을 뒤적였다. 그러다 들고 있던 전단지 뭉치가 쏟아져 내려 길바닥을 도배해 버렸고, 그녀는 쭈그려 앉아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종이들을 짜증스럽게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 많은 종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란 힘들어 보였다.
“안 도와줘요?”
“쪼잔 한 놈이잖아요.”
“캐릭터가 확고하시네.”
전단지 뭉치를 대중 구겨 들고 일어선 그녀는 주머니에서 두꺼운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사실은 제가 시 쓰는 게 취미거든요. 근데 댁을 주제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연당한 남자의 애환? 뭐 그런 거!”
전단지 몇 장이 다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동원을 바라보며 생글 눈웃음 지었다.
“인터뷰가 필요하단 말인가요?”
“그렇죠!”
“제가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죠!”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마다 전단지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역시나 신경 쓰지는 않았다.
“좋아요.”
“좋아요?!”
뭐가 그리 기쁜지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그녀는 폴짝폴짝 뛰어댔고, 전단지는 거의 다 바닥에 떨어져 몇 장은 짓뭉개졌다.
“근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동원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 실연 안 당했어요.”
“아, 찬 거죠?”
“찬 거죠.”
2]
동원이 눈을 떴을 땐 혼자였다. 그는 흐리멍덩한 정신을 씻어내기 위해, 힘겹게 일어나 물을 들이켰지만 다시 침대에 뻗어버렸다. 창밖에서 환한 빛이 커튼사이를 뚫고 들어와 어두운 방안을 유일하게 밝혔다. 지금은 한 낮이었다. 동원은 끊겨버린 필름을 이어붙이며 지난밤 기억들을 돌이켜 봤다. 어젯밤엔 2년 동안이나 교제해 온 여자 친구와 헤어졌던 것 같았다. 그리고는 산타클로스와 만나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맞아, 그랬지.’
거기부턴 흑백 무성영화처럼 흐릿하지만 빠르게 재생됐다. 동원은 그녀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의 험담을 늘어놨다. 그녀는 신나게 맞장구를 쳐줬고,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술도 몇 잔 하게 됐을 것이다. 재생은 여기까지. 동원은 자신이 어떻게 이 모텔의 침대에 누워있게 된 건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단지 나체로 누워있던 그녀의 뒷모습만이 영화 포스터처럼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시를 쓴다고 했다. 자신이 어제 했던 말들이 그녀가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됐을까? 확신할 순 없다. 어제 했던 말이라곤 예전 여자 친구에 대한 욕설뿐이었다. 그런 게 도움이 될 리가 없지.
동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들을 힘없이 주워들었다. 두꺼운 니트를 목에 걸치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상태로 굳어버린 채, 그의 머리 깊숙한 곳에선 필사적으로 묘한 기분의 정체를 파헤쳐가고 있었다.
그 정체의 본질은 꽤나 의외적인 것이라 정작 본인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쓴 시를 읽어보고 싶다고 외치는 듯 했다. 대체 뭐라고 썼을까? 나에 관한 얘기가 들어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싶다.
황급히 옷들을 전부 주워 입고, 동원은 문밖을 나섰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그녀에 대한 생각만으로 지배되어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지난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만약 알아차렸더라도 지금의 동원에겐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3]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아니, 정말 그녀인가? 동원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젯밤 분명히 그녀와 함께 이 카페에 왔었다. 저기 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지. 첫 만남은 꽤나 까칠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도 괜찮아졌다. 그녀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고, 지금 그녀는 동원의 앞에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아아, 저기……. 아무거나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거나 달라니. 한심하다.
“메뉴를 고르셔야 하는데요.”
태연하고 차분한 말투였다. 누가 봐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식이면 구겨진 자존심은 둘째 치고 일단 오기가 생겨버린다. 동원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우리 어제 만났잖아요?”
“네?”
“여기서 치즈케이크도 먹었고, 2차로 술도 마셨죠.”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는 마치 자신이 치근덕거리는 꼴이 아닌가. 동원은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 더 강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 뒤에는 아마 모텔까지 갔을 거 에요.”
이래도 모른 척 하긴 힘들 것이란 생각에 내놓은 수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동원을 노려봤다. 그냥 이 얘긴 꺼내지 말걸, 동원은 뒤늦게 후회했다.
“진짜 기억 안 나요?”
동원의 목소리는 이젠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어젠 그렇게 즐거워 해놓고!’
간절하게 일그러지는 동원의 표정에 조금 동요했는지,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잠깐 봤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잖아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대사였다. 이렇게 되돌아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릴 걸 예상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뭐, 그건 당연하겠지. 동원은 자신이 했던 실언을 뒤늦게 후회했다. 사실 실언도 아니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으니깐. 일단 여기선 동원이 물러서야 했다.
“그래요, 그땐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은 레스토랑에서 봤던 거 기억하고 있었어요.”
“주문 안하실거에요? 뒤에 다른 손님들 기다리시는데.”
동원이 뒤를 돌아보자, 서너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표정이라기 보단, 동원과 그녀 사이의 실랑이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는 듯 했다.
“창가 쪽 테이블에서 기다릴게요. 한 시간 뒤에는 끝나죠?”
“아니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완전히 몸을 돌려버렸다. 완전한 거절의 표시.
“저, 저기! 그러면 시 쓴 거라도 보여줘요! 어제 몰래 쓰고 있는 거 다 봤어요!”
물론 지어낸 말이었다. 상황이 급하다보니 동원의 입에선 아무렇게나 멘트가 튀어나왔다.
“그거 날 주제로 쓴 거니까, 나한테도 초상권이 있어요! 볼 권리가 있다는 얘기죠!”
이 억지논리는 동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것조차 통하지 않으면 그땐 진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막다른 길의 보이지 않는 활로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동원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 시간 뒤면 끝나요. 커피는 어제 마셨던 거면 됐죠?”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동원의 진심이 통한건지, 아니면 옆에서 눈치 주던 나이 많은 동료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됐든 그녀와 이야기할 시간을 벌었으니 성공이다. 그렇게 안도하며 동원은 뒤를 돌아봤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축하한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볍게 박수까지 치고 있다.
‘아, 왠지 쪽팔린다.’
**********
동원은 그녀가 내민 수첩을 받아들었다. 까칠까칠한 재질의 하드커버를 넘기자, 종이를 띄엄띄엄 메우고 있는 글귀들이 드러난다.
“오~ 이거에요?”
“맨 뒤에 것만 읽어요.”
그녀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만나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내보이는 모든 반응들은 한마디로 산뜻하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조차 동원에겐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됐다.
“정말 읽고 싶었던 거 맞아요?”
“물론이죠.”
제목은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별. 중학교 때 이후로 시를 읽는 일은 처음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시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쉽게 말해 가볍고 귀여운 시는 기억에 잘 남는다. 동원은 그녀가 쓴 시가 그런 쪽에 가깝다고 생각됐다. 그냥 가벼운 취미정도니깐.
“어때요?”
“와, 좋은데요.”
“거짓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동원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랑은 분위기가 뭔가 다르다. 왠지 그녀의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다는 생각에, 동원은 살짝 과하게 떠들어댔다.
“진짜에요, 진짜 좋아요. 특히 마지막 행의 이 문장이 너무 좋아요. 제 감정이 이랬거든요. 궁상맞게 살짝 우울해 있었죠.”
“근데 왜 지금은…….
지금? 지금이 어떻기에?
“지금은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아, 그야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표정과 반응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으니깐. 하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내진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가르며, 묘한 기류를 뭉게뭉게 만들어낸다.
“왜 나 모른 척 했어요?”
동원이 던진 질문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어제 자신이 그녀를 모른척했던 것에 대한 사사로운 복수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면 큰 문제가 된다. 차라리 아무 이유가 없는 쪽이 더 나았다.
“제가 술 마시고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옛 여자 친구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조금 감정적으로 대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리고 모텔도 제가 먼저 가자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뭘 모른다는 거지? 분명 무언가 핀트를 잘못 잡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래요, 아무 것도 몰라요. 하지만 왠지 우리는 서로 더 잘 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동원은 바로 앞에서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 지금 고백하는 거 에요?”
“비슷해요.”
인정해버렸다. 어정쩡한 타이밍이지만, 지금을 넘기면 이건 고백이 아니라 싸움이 돼버릴 분위기였다. 그녀는 가만히 눈웃음 지으며 실실 웃고 있었는데, 그게 긍정의 표현인지, 부정의 표현인지 동원에겐 감을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녀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동원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한동원입니다.”
“신유라에요.”
만난 지 약 16시간 정도. 그 사이 함께 술을 마시고, 만취된 상태로 모텔을 거친 뒤, 약간의 실랑이 끝에서야 간신히 우스꽝스러운 통성명을 마친 것이다.
“그래요, 이름은 지금 알았네요. 하지만 아직은 모르는 게 더 많아요.”
“시를 쓰는 걸 좋아하고, 저처럼 치즈케이크를 좋아하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자친구가 없어요.”
동원은 묘하게 자신감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아니, 아마 없을 거 에요.”
“있어요.”
“그럼 좀 소개해 줄래요? 만나서 밥이라도 먹죠.”
왠지 모르게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던 건지, 정말 있어도 상관없었던 건지. 끝까지 맞받아치는 동원을 보고 그녀는 곤란한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사실은 없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건 내 겉모습일 뿐이지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에요. 진짜 나를 알면 분명 실망할걸요?”
“설마.”
“아뇨, 분명 실망할 거 에요.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서로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겠죠. 그리고 그런 불만들을 속으로만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결국엔 어제처럼 한 번에 폭발시키고 끝날 거 에요. 동원씨가 그런 성격이라는 건 고작 하루 봤지만 충분히 알 수 있어요.”
그럴 리 없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오늘의 동원의 행동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건 그녀가 근본적으로 뭔가 다른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은 왠지 다를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은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동원은 그렇게 확신했다.
“좋아요, 그럼 내기를 하죠.”
“네?”
“지금부터 눈을 감고 5초를 셀게요. 만약 내가 그렇게 귀찮고, 그렇게 싫다면 일어나서 그냥 가세요.”
그녀는 멍하니 동원을 바라봤다. 어리둥절해 더 이상 눈웃음도 짓지 않았다.
“나는 ‘유라씨가 가지 않는다.’에 걸게요. 내가 이기면 바로 밥먹으러가죠.”
동원은 진짜로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 2 …….’ 속도는 조금 빨랐다. 5초를 마쳤을 땐, 실제론 약 3초 후반정도. 동원은 재빨리 눈을 떴다.
사실 그 사이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일어나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원은 안도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눈이 와서 보고 있던 거 에요.”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창밖엔 진짜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동원씨가 귀찮고 싫데요?”
얼굴을 붉히며 발끈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원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어느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뭐 먹고 싶어요?”
동원이 물었다.
“요 앞에 괜찮은 일식집이 생겼다던데…….”
“일식?”
“싫어해요?”
“좋죠. 초밥.”
동원과 그녀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거리에 얕게 쌓인 흰 눈을 밟으며 둘은 나란히 걸었다. 동원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4]
불쌍한 고양이
그녀가 비리다고 말하기 전까지
생선을 잡아 요리를 준비 했습니다.
그녀가 무섭다고 말하기 전까지
옥상에 올라 별을 바라보았지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어요.
**********
퇴근하는 길에 동원은 제과점에 들렀다. 제과점 안은 상당히 붐벼, 거의 다 팔리고 얼마 남지 않은 치즈케이크 몇 조각만을 간신히 건져들 수 있었다. 평소보다 비싼 가격이지만, 요새 통 먹은 적이 없으니깐. 게다가 내일은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분위기 좀 내보려는 마음이었다.
제과점을 빠져나오면서 동원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부재중 전화가 6통. 마지막 전화는 한 시간 전이었고, 그 뒤론 문자조차도 와 있지 않았다. 이제 좀 지쳤을라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동원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전화했었어?”
“응.”
유라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설마 울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지. 동원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아, 사실은 회식이 있었어. 연말이잖아. 복잡해서 전화 온 줄도 몰랐어.”
회식을 핑계로 내세운 게 벌써 몇 번째이더라, 동원은 머릿속으로 헤아려보다가 그만뒀다. 이정도면 누가 봐도 억지수준이지만 그녀는 또 넘어가 주겠지. 그 뒤엔 미안하다며 약속을 조금 뒤로 미루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피한지도 벌써 한 달에 가까워져갔다.
“저기, 유라야. 그래서 말인데…….”
어색한 침묵을 깨고 동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 만나기로 했던 거, 좀 뒤로 미루자. 미안해. 근데 알지? 우리 회사 요즘 바빠서 휴일이고 뭐고 없는 거…….
“.....”
“이번 주말 어때? 내가 근처에 괜찮은 식당 알고 있거든. 미리 예약해 놓을게.”
“그만.”
동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만해.”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
“우리 그만 하자.”
동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라의 그 한마디는 동원이 그동안 바라면서도 미뤄왔던 이별 선언이었다. 자신이 언제쯤 마음먹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먼저 해버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한 달 전의 그 날? 아니, 훨씬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겠지.
“동원씨,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유라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동원씨가 모텔로 날 끌고 갔잖아. 처음 만난 날이었는데…….”
“그랬나.”
“응, 그랬어. 둘 다 술에 취해 헤롱헤롱하고 있을 때, 동원씨가 먼저 말을 꺼냈지.”
유라는 헤헤하며 웃었다. 동원은 휴대전화 너머로 짓고 있을 그녀의 표정을 상상했다. 하지만 잘 떠오르진 않았다.
“동원씨는 은근히 밝힌다니깐?”
“미안, 기억이 잘 안나.”
“자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랬다. 중요한건 상대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아니었다. 알아야 할 건 자기 자신이다. 왜 끝까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서 나름 알게 됐더라도, 그런 게 과연 앞으로의 자신을 바꿀 수나 있을까?
**********
“선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집 앞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그녀를 향해 동원은 손에 든 치즈케이크 상자를 들어보였다.
“어! 이거 뭐에요?”
“치즈케이크. 좋아해?”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완전 싫어해요! 느끼하잖아요. 암튼 빨리 들어가요! 추워요!”
무언가 텅 비어있다. 이 느낌은 뭘까? 어딘지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이 묘하게 간질거린다. 그리고 허전하다.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동원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앉았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따뜻한 체온에 몸을 녹여간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선배, 오늘 좀 이상해요.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래.”
“정신 좀 차려요! 오늘 크리스마스에요!”
그녀는 동원의 팔을 잡고 흔들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시계바늘이 12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오늘 눈 내렸으면 좋겠다! 그쵸?”
“눈?”
동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했다.
“선배, 왜 그래요?”
그리곤 재빨리 블라인드를 걷어 재꼈다. 하지만 눈은 내리고 있지 않았다.
“나는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던 건가.”
“선배…….”
“응?”
“대체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