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게도 난 24살이나 먹었지만 변변찮은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어쩌면 결혼도 못한 채 혼자 늙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찌 보면 어린 날의 풋사랑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난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난 살이 많이 쩌 통통하고 활동적이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반 아이들과 잘 사귀질 못했고 딱히 친한 친구도 없었다. 대화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1,2 분 정도였으며 대게 필요에 의한 대화였다. 누구누구 못 봤느냐, 아까 선생님이 한 말이 뭐냐, 미술 시간 준비물은 뭐냐 따위.

아이들이 날 따돌린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겠는 존재. 성적은 좋아서 시험 볼 때는 눈에 띄지만 그 때말고는 신경 쓰지도 않고 쓸 필요도 없는 존재였다. 난 이런 상황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맘에 들었다. 가끔씩 쓸쓸할 때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방해받을 일이 없었기에 편했다.

상황이 변한 건 2학기 들어서였다. 2학기가 되자 짝을 바꾸었다. 보통은 짝을 하면 친해지지만 난 굳이 친해지길 원치 않았고 짝을 했던 두 아이도 나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기에 우린 그저 옆에 앉아만 있는 관계를 유지했다.

이번에도 이전과 같으리라 예상했다. 매일 매일 얼굴을 마주치다보면 친하지는 않아도 성격이 어떤지는 대강 파악하게 되는 법이다. 감정을 금방 금방 드러내는 아이들이기에 더욱 알기 쉽다. 아마 새로운 내 짝도 내 성격을 어느 정도는 알기에 무리를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내 예상이 오산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새로 짝이 된 아이는 꽤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큰 눈망울과 하얀 피부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게다가 성격까지 발랄하여 반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제비뽑기 결과 나와 짝이 되자 남자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안심을 했다. 나라면 그녀가 관심도 두지 않을 테고 친해지지도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계산이었을 거다.

난 그들이 내심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때만해도 난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 반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내가 볼 땐 흔해빠진 중학생 여자애에 불과했다. 남자아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짝 바꾸기가 끝나고 나와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주위는 소란스러웠다. 갑작스런 변화를 맞게 되면 사람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중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앞 뒤 옆 책상 모두 왁자지껄 했지만 우리 책상만은 조용했다. 그녀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밝게 웃으며 짝이 돼서 좋다느니 이 자리는 어때서 나쁘다느니 하는 말을 했겠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는 날 냉정하고 차가운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쌀쌀맞은 대답을 들을까 두려웠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전혀 생각도 못한 채 난 어서 빨리 종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짝을 바꾼 덕분에 귀가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늦어졌다. 집으로 돌아가야 내가 좋아하는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은 지루함의 연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 시간이면 100쪽은 읽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학교에 있느라 낭비한 시간이 아까운데 이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고문이었다.

평소라면 있지도 않았을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선생님은 아이들을 내버려둔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짜증이 났다.

“선생님.”

손을 들고 소리쳤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순간 내게 집중되었다.

“무슨 일이니?”

“학원에 가야 되는데 종례 안 하실 거면 집에 가도 되나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선생님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으나 시계를 보더니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러려무나. 오늘 자리를 바꾸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구나. 어차피 중요한 얘기를 할 것도 아니니. 다들 자리 바꾼 거 까먹고 내일 엉뚱한 데 앉지 마라.”

몇 몇 아이들이 피식 웃었다.

“그럼 숙제 잘하고 내일 아침에 보자.”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셨다. 시건방지게 들릴 수 있었던 아이의 말에 화내지 않고 따뜻하게 행동하셨다. 자신보다 미숙한 아이의 말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데. 자칫 잘못하면 애들한테 기가 죽는 물러터진 선생이란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날 선생님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 내가 너무 성급했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쨌든 집에 가게 되니 아이들은 좋아했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면서 슬쩍 슬쩍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들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가방을 쌌다. 내가 교실을 나올 때까지도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계속해서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면 잠시 후 난 교실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집은 걸어서 40분 정도 거리에 있었기에 중간에 한번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를 타면 10분, 15분 정도 시간이 덜 걸린다. 문득 버스 정류장 부근에 왔을 무렵 교통 카드를 놓고 왔단 걸 깨달았다.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불편해 보통 책상 서랍에 넣어두는데 자리를 바꾸다보니 깜빡 놓고 왔다. 이대로 집까지 걸어서 갈 수도 있었지만 서랍에 있는지도 불확실하고 돈이 들은 카드를 내일까지 내버려두기도 불안해 학교로 돌아갔다.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사람만 빼고.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창밖만 무심히 바라봤다. 그녀를 무시하고 카드를 찾으려 했지만 이상하게 그녀가 신경 쓰였다. 왜 아직까지 집에 안 갔을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하니 있지? 아마 그때 내가 느낌 건 호기심이었을 거다. 누군가의 감정이나 생각이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일이 발생한 원인을 알고 싶다는 논리적인 의문. 그래서 물었다.

“왜 집에 안 가고 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궁금증이 더 커졌다. 허나 좀처럼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아무 말이나 아니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그때 내가 다른 말을 했더라면 우린 지금 다른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난 종종 생각한다.

“난 교통 카드를 놓고 와서 찾으러 왔어. 넌 누구 기다리니?”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나 싶었는데 그녀는 잠시 후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카드를 찾았다. 카드는 예전 서랍 안에 있었다.

나이를 먹어 세상살이에 조금은 익숙해진 지금은 알 수 있다. 왜 그녀가 책상에 앉아만 있었는지를. 그녀에게 들은 건 아니다. 때때로 물을 수 없는 질문도 있는 법이다. 당시엔 몰랐지만 그녀는 예뻤다. 그녀는 어디 가서 거절당한 적도 없고 상처 받은 적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으며 그녀는 이를 당연한 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난 달랐다. 그녀에게 신경도 안 썼다. 그 정도는 그녀로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을 거다. 원래부터 말이 없는 사람은 분명히 있으니까.

그랬기에 처음엔 그녀도 남들처럼 날 무시하려고 했을 거다. 외모도 별 볼일 없는데다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 무슨 매력이 있어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겠는가. 어른들이라면 목적을 위해서 친한 척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아이들은 순수하다. 때론 욕설을 내뱉기도 하지만 어른에 비하면 아이들의 내면은 몇 배는 깨끗하다. 헌데 난 선생님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다고. 난 정말 집에 가고 싶었기에 그리 말한 거지만 그녀는 내 얘기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이 여자와는 도저히 같이 못 있겠다고.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평소에 내가 말도 잘하고 발표를 가끔이라도 해왔던 아이라면 그녀도 내 행동을 오해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날까지도 난 누가 말을 걸기 전엔 대답하는 적이 없었고 발표 따윈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짝을 바꾸자마자 손을 들어 누가 듣기에도 성급하고 건방진 말을 했으니 그녀가 오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항상 받아들여지기만 한 그녀에게 내가 한 말은 큰 충격이었을 거다. 그녀의 나이가 좀 더 많았다면 오해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고 설령 오해를 했더라도 한번 코웃음치고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순수했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애정이 과한 상태에 익숙하다보니 반대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만남은 첫 단추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본의 아니게 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확실한 건 아니다. 내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학교가 파하고 30분이 넘도록 교실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내가 다시 교실에 왔을 때 그녀는 내심 기뻤을 거다. 잠시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러 왔구나 하고.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거다.

그렇게 오해의 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변했을 지도 모른다. 난 지금도 가끔씩 후회한다.

“안녕.”

다음날 그녀는 날 보자마자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의외였다. 어제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목소리엔 활기가 넘쳤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밝고 명랑했고 천진난만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심 안도가 됐다. 사실 약간은 의아했었다. 보통 때는 발랄했던 그녀가 어제는 왜 날 무시했는지. 하지만 오늘 보니 별 일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내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의 웃음이 꾸며진 것이었단 걸 간파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나도 그녀의 인사에 대답했다. 말 수가 적은 편이긴 했지만 남의 말을 무시하진 않았다.  

“안녕.”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웃으며 인사했겠지만 평소에 잘 웃지 않다보니 막상 웃으려니 어색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보통은 내 반응을 보고는 무안해서라도 딴 짓을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을 거다. 허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걸었다. 그때 나는 의심했어야 했다. 그녀가 내게 반한 것도 아닌데 무신경한 남자와 말을 하려는 이유가 뭘까. 그녀의 행동은 상식 밖을 벗어나 있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아? 난 맑은 날이 좋더라고. 이런 날은 앉아서 공부만 하기 너무 아까워. 그래, 숙제는 했니?”

“응. 얼마 안 되더라.”

단지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수다스러울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들이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털어놓은 건 아니다.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는 사람에게 얘기를 한다. 내 예전 짝들도 받아만 줬다면 충분히 수다스러워 졌을 거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김없이 말을 걸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때로는 수업시간에도. 처음엔 얘가 왜 이러나 당황스러웠지만 점점 익숙해졌고 조금씩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우리는 꽤 친해졌다. 주로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가끔씩은 내가 말을 걸기도 했다.

전에는 사람의 표정이 다양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무시하려 했었다. 사람과 사귀는 건 내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대화하게 된 후로 난 매일같이 그녀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과장해서 말할 땐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고 기분이 안 좋을 땐 입 꼬리가 살짝 내려가기도 했다. 흥분하면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는데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건 그녀의 미소였다.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아져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때쯤엔 그녀도 나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최초의 목적을 잊은 채 나와 수다를 떨었다. 당시의 난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길 즐겼다. 보통의 아이들보다 생각도 성숙하고 아는 것도 많았다. 그녀는 나란 존재가 신기하고 새로웠을 거다. 그것은 어린 아이가 동물원에서 신기한 동물을 보거나, 외국에 처음 나가봤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녀는 내게 어떤 매력을 느꼈지만 그건 사랑은 아니었다. 난 그걸 착각했다.

과도한 애정도 문제지만 애정이 모자라는 것 또한 문제다. 나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난 애정에 굶주려있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나와 친구가 되어주기를, 나를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친절히 대해줬으며 내 태도에 개의치 않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잠이 오지 않던 밤 난 생각했다. 그녀가 나와 친해지려고 한 건 무슨 까닭일까. 성격이 밝은 건 알았지만 예전의 짝들도 딱히 내성적이지 않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녀는 기를 쓰며 나와 친해지려했고 결국은 성공했다. 왜 일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그녀는 날 좋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 좋아했기에 나와 친해지려고 애썼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게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녀가 날 좋아한다.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예뻤다. 반 여자애들 중에서 단연코 눈에 띄었고 남자 아이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녀가 날 좋아한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자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녀를 의식하게 되었다.

웃을 때 살짝 내려가는 눈초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고 바람이 불 때면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도 신경 쓰였다. 어쩌다라도 그녀의 몸에 손이 닿기라도 하면 온 몸이 짜릿짜릿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을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버벅거렸고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점차 그녀와의 대화가 꺼림칙해졌고 끝내는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화를 냈다. 왜 갑자기 이러니?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니?

이래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급기야 우리는 첫날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라도 해야 옳았지만 내겐 용기가 없었다. 침묵의 나날이 길어질수록 그녀와의 대화가 그리워졌다. 밝고 따뜻했던 이야기들. 웃으며 말하던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난 단 맛을 본 뒤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된단 말인가. 너는 날 좋아하니? 아니면 네가 너무도 신경 쓰여서 너와 얘기하다보면 긴장이 돼 미치겠어. 라고 말할까? 지금도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 어린 내가 방황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고심 끝에 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하지만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한번 바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해했다. 아니, 이해했다고 착각했다.

우리가 다시 친해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일단 사이가 좋아지자 그동안 못 다한 말을 토해내듯이 우리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지 나조차도 몰랐었다. 그녀도 얼마쯤은 놀랐었다.

“의외로 수다스러운 걸.”

짤막한 말이었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제서야 난 내가 30분이 넘도록 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귀여운 눈망울과 활기 찬 목소리만이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그녀를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전보다 수만 배는 그녀를 생각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잠을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를 볼 때면 가슴이 떨렸다. 그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난 항상 그녀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다. 어렴풋이나마 난 이런 감정이 사랑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기에 어색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기뻤다. 단지 표현을 못했을 뿐이지 내 감정은 확실했다.

그녀는 나와 얘기할 때면 곧잘 웃었기에 나는 그녀 또한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고백을 하는 일뿐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고백을 하면 좋을지 고심하고 고심했다.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시간은 언제를 택하지. 아무래도 직접 말하는 게 좋겠지? 편지는 조금 고리타분한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널 사랑해는 조금 부담스럽고 널 좋아해정도로 할까. 생각해보니 그건 또 너무 약한 것 같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난 우유부단해 쉽게 결정을 못하는 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게 내 입장으로선 불행일지도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 수업이 끝나자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할 말이 있어.”

난 내심 기대를 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내게 고백을 하는구나. 기뻤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알았어. 기다릴게.”

태연히 응답을 하고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학교 뒷문 쪽으로 서서히 걸어오는데 그날따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무슨 일인데?”

짐작은 했지만 모른 척 했다.

“비밀을 말할 건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귀는 걸 비밀로 하자는 건가. 부끄러운 가 보다. 어쨌든 순순히 대답했다.

“응, 맹세할게.”

“실은 말이야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침을 꼴깍 삼켰다. 긴장이 돼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음...,,,, 직접 말하려니 쑥스럽네.”

“괜찮으니 어서 말해.”

조급해진 난 그녀를 재촉했다.

“넌 입이 무거운 거 같아서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소문 내지마.”

“알았어.”

“3반에 영수 있잖아. 학원에서 매일 보긴 하는데 학교에서 만나면 말도 못 붙이겠어. 어떻게 하지? 고백하자니 차일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미칠 거 같아.”

하잔 얘기가 이거였나? 힘이 쑥 빠졌다. 순간 허탈해졌다. 남의 연애 따위야 어찌되든 좋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해. 정 그러면 고백해버리면 되잖아.”
“어쩜 말을 그렇게 하니. 남의 속도 모르고.”

“암튼 알았으니 난 갈게.”

내가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떠올리자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소리쳤지만 난 무시하고 걸어갔다. 계속 그녀의 얼굴을 봤다간 무슨 소리를 할지 몰랐다.

다음 날 우리 사이엔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로서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상상하다 나 혼자 배신당한 것에 불과하다. 그녀는 단지 친절했을 뿐이다. 그것이 지나친 친절이 되어 내게 비수가 될 줄은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거다. 처음 사이가 나빠졌을 땐 모든 게 내 잘못이었고 관계를 되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녀와 화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그녀를 얻을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어떤 사이든 이제는 의미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다시 짝을 바꾸었다. 우리는 서로 갈라졌고 점점 더 멀어져갔다. 두 달이 지나자 우리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 방학이 되었다. 학원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어떤 남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녀가 말한 남자였다. 이미 끝난 일이긴 했지만 내심 약간의 가능성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정히 붙어있는 두 남녀를 보자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밝게 웃었다. 그것은 내게 보여줬던 웃음과는 또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난 확실히 깨달았다. 그날로 난 그녀를 깨끗이 잊었다. 아니, 잊은 척 했다.

3학년이 되자 그녀와 난 다른 반이 되었다. 우린 가끔씩 복도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모른 척 했다. 주로 시선을 피하는 건 내 쪽이었다. 중학교 땐 매일 같이 간식을 먹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 자연스레 음식이 줄었다. 그러다보니 살도 제법 빠졌다. 고등학교 땐 거의 공부만 했다. 학교, 학원, 집, 도서관 외에는 가지도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여유가 생겼고 때때로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예전에 그녀가 왜 나와 친해지려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한 날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반하게 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을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도 그녀를 싫어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미움 받기 싫은 애정 과다인 소녀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목적을 잊고 나와 정말로 친해졌다. 하지만 난 그걸 몰랐다. 그랬기에 착각을 했던 거다.

옛 추억을 떠올리자 불현듯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난 개인 홈페이지를 뒤져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녀는 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채팅을 하며 과거의 추억을 나누었다. 난 조심스럽게 한번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그녀도 순순히 수락했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는데 무척 설렜다.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아름다울까. 아쉽게도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사진이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오랜만에 봤지만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예전 모습이 남아있긴 했지만 전보다 훨씬 이뻐졌다. 그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다. 소화하기 쉬운 색이 아닌데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그녀의 눈망울은 여전히 컸고 피부도 새 하얬다. 하지만 그녀는 날 못 알아봤다. 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 살 많이 빠졌구나.”

“응, 아무래도 성장기다 보니.”

“키도 많이 컸네.”

“너도 예뻐졌어.”

오랜만에 만나니 어색할 거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일단 물꼬가 트이자 우리는 쉬지 않고 얘기했다. 난 이 느낌을 계속해서 그리워했단 걸 깨달았다. 단지 잊으려고 애썼을 뿐이다. 내가 그녀에게 빠져들게 했던 웃음은 한층 더 매혹적으로 변했다. 보는 사람을 중독 시키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녀의 웃음을 보자 옛 감정이 살아났다. 하마터면 난 고백할 뻔했다. 계속해서 널 생각해왔다고, 널 잊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예전에 너를 좋아했었다고, 차마 말할 순 없었지만 너만 좋다면 이제라도 시작하고 싶다고.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내가 상념을 멈췄다.

“여보세요. 응? 자기야. 나? 친구 만나고 있지. 남자 아냐. 여자야 여자. 나 못 믿어? 알았어. 이따 봐요. 여봉~”

정확한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절실히 깨달았다. 그녀에게 난 과거의 사람일 뿐이며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때 친했던 친구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레포트 쓸 게 있어서 말이야. 나 먼저 일어설게.”

“벌써? 아쉽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럼, 갈게. 안녕.”

“다음에 한 번 또 보자~”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내겐 다음이란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 뒤 동네 술집에 가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 기분이 우울했다.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털어놓기엔 부끄러웠다. 모든 게 착각에서 비롯된 일임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날 밤 홀로 세 병을 마셨다. 가게가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 밤새 앉아있었을 거다.

그로부터 그녀에게 두 번 문자가 왔다.
‘언제 한번 만날까?’
‘며칠 날 중학교 동창회를 하는데 너도 꼭 와.’

하지만 난 답장을 하지 않았고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 처음 짝을 바꾼 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니 교실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오해를 풀어줬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정말로 사랑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와 후회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지만 자꾸만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