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거짓말처럼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고 마지막 사랑이었다. 난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은 천천히 익어가는 곡식처럼 애정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었다. 그랬던 내가 그녀를 본 뒤 생각이 달라졌다.
그녀는 내가 가끔 가던 까페의 새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넋을 잃어 내가 뭘 시키려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뭘 드시겠어요. 그녀가 날 일깨워주고 나서야 아무렇게나 메뉴판을 가리켰다. 뒤돌아서 가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긴 흑발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난 매일매일 까페에 갔다. 허나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기에 그저 주문을 할 때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다. 매일 밤 내일은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말해야지. 고민하고 결심을 하다가도 막상 다음날이 되면, 저거 주세요. 하고 입을 닫아버리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고민을 토로해보기도 하고 어찌해야 되나 상담도 했지만 하나같이 하는 말은 똑같았다.
“가볍게 대화의 물꼬를 틀면서 친해져봐. 좀 친해졌다 싶으면 데이트 신청하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여자는 한 명뿐이 아니야.”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게서 주문 받는 것조차 꺼릴까 두려웠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대로가 낫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가 싶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다른 이가 보기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홀로 술을 마시고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니다 술에 취해 잠들곤 했다. 허나 술도 나를 위로해주진 못했다. 방황의 나날 끝에 결심을 했다. 차라리 말해버리자. 그리곤 잊어버리자. 마음을 먹자 오히려 편해졌다. 그동안의 고민이 허망할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나는 그 정도 말밖에 못하는 남자다.
“왜요?”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어서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뜬금없고 당황스러웠겠지. 매일 까페에 찾아와 달랑 커피만 시켜놓고 시간만 때우다 가는 남자가 뭐가 맘에 들겠어. 그 짧은 순간에 무수한 상상을 했다. 미처 거절의 말을 듣기 전에 귀를 막아 버리려했다. 헌데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가 들은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네, 놀랐어요? 거절할 줄 알았단 표정이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변명하지 않아도 되요. 당신이 우유부단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당황했다. 그녀는 나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따 7시쯤에 다시 올게요.”
허둥지둥 말을 꺼내곤 까페를 나와 버렸다. 멍청한 짓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제대로 말해보려다 관두었다. 그랬다간 더욱 비참해지겠지. 가능한 좋은 상상을 하려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냥 가버리진 않았을까? 나 때문에 실망하거나 불쾌하진 않았을까. 시계만 연신 쳐다봤다.
채 5시도되기 전에 연구실을 뛰어나왔다. 그녀는 아직 까페에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아까는 말이죠.”
그녀가 검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나중에 말해요. 일하고 있잖아요.”
맥이 빠졌다. 이런 걸 간접적인 거절이라고 하나. 나가려다 부질없는 희망이 살아나 자리에 앉았다.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이나 남았다. 그 사이 그녀의 맘이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나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대범한 행동이었다.
“잠깐만요, 저녁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었죠.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죠? 몰라서 물어요?”
평소의 나였다면 거기서 관두었을 거다. 허나 그때는 용기가 났다.
“생각은 언제든지 바뀌기 마련입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생각을 바꿀 기회를 주십시오.” 나는 가능한 애절하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게 그녀를 움직였을까. 아님 단지 나를 시험하는 중이었을까. 어쨌든 그녀의 대답은 날 기쁘게 했다.
“좋아요.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에요.”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자주 가던 돈가스 집으로 갔다. 여자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어디가 적당한지 몰랐다. 괜히 멋모르는 장소에 가서 당황할 바엔 잘 아는 곳에 가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녀의 표정은 도도했기에 여기가 맘에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고기를 썰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내게 관심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요?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의심 안할 사람이 있나요? 사장님도 제가 나온 뒤부터 당신이 까페를 매일같이 찾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정도면 확실하죠.”
“근데 당신은 계속 까페를 오락가락 하기만하고 제게 아무 말도 걸지 않더군요. 제가 착각을 했나 싶었죠. 차라리 뭘 할 거면 빨리 하지 뭐 이리 질질 끄나. 아무래도 아닌가 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고 신경을 껐죠. 아니 끄려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당신은 초췌해지더군요.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변함없었구요. 정 말을 안 하면 저라도 말을 하려 했어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날 보는 건 불쾌하니 그만해 달라. 뭐 이런 식으로요. 손님이 하나 줄지도 모르지만 언제까지 어정쩡한 상태로 있을 순 없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내더군요.”
하하,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여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순간 침묵이 흘렀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기왕 이리 된 거 하고 싶었던 말이라도 토해내기로 했다.
‘첫 눈에 반했습니다.“
“왜죠?”
“아름다워서요.”
“진부하네요. 나보다 예쁜 여자는 많잖아요.”
“아닙니다. 당신은 특별해요.”
“난 평범한 까페 직원일 뿐이에요.”
지지부진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그녀를 띄웠고 그녀는 자신을 깎았다. 우리는 의미 없는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내가 말했다.
“저는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서로 간의 애정이 쌓이고 쌓여야 진정한 사랑이 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에게 반했으니 제 생각도 틀려버렸군요.”
“아!”
그녀가 탄식했다.
“왜 그러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도 첫 눈에 반한다는 걸 믿지 않아요.”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일치한 순간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그 다음부터 그녀와의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알아갔고, 그녀는 나에 대해 알아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유도 없이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거짓말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녀는 항상 툴툴거렸다. 악의 없는 빈정거림이라고 할까. 화가 나서, 불만이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습관에 가까웠다. 틱틱 거리는 그녀의 말투조차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그녀를 알아갈수록 그녀가 좋아졌다. 이미 반해버린 이상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긴장해서 그녀를 만나면서도 주저주저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무수히 고민했다. 좀 더 그녀에게 다가가도 되는 걸까. 저 고운, 만지면 부러질 듯한 팔목을 내가 손대도 되는 걸까. 그런 내가 한심했는지 내 손을 확 낚아채며 말했다.
“소심하기는.”
따스한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오며 가슴이 떨렸다. 말없이 우리는 쭉 걸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빌었다.
검고 그윽한 눈동자와 마주칠 때면 불현듯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꼭 안고 키스를 해주었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키스는 별로네. 입 냄새나.”
“양치하고 올게.”
그녀는 세면대로 가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가끔은 나쁘지 않은 걸.”
살며시 웃으며 드러난 하얀 치아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련만. 허나 이제 그녀는 없다. 남아 있는 건 추억과 눈물뿐이다.
난 종종 후회했다. 내가 그녀와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녀를 끝까지 바래다주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피곤하다고 택시를 태워 보냈는지 나도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을까.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과 슬픔이 밀려와 괴로웠다.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난 문득 깨달았다. 현재에는 그녀가 없지만 과거에는 그녀가 있다. 타임머신만 있다면 그녀를 살리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결론을 내리자 맘이 편해졌다. 주위 상황을 정리한 후 타임머신 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모두가 시간여행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상대성 원리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말할 때도 무시했다. 그딴 건 내게 아무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를 살릴 수 있기만 하면 됐다.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타임머신이 완성되던 날 거울을 보았다. 머리는 온통 백발로 변해 있었다. 내가 몇 살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총을 집어넣었다. 혹여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를 대비한 호신용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2009년 12월 16일 오후 8시 7분이었다. 그녀가 사고를 당한 시간은 12시 34분이다. 사고가 난 순간 택시의 시계가 멈춰버렸기에 시간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대략 4시간 남은 셈이다. 여유 있게 도착할 계획이었는데 약간 오차가 생겼다. 타임머신 연료는 많지 않았다. 앞으로 딱 한 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녀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허나 너무 오래된 탓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약속장소도 그녀의 집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핸드폰 번호가 생각나긴 했지만 전화로 해도 믿을 얘기가 아니고 예전의 난 모르는 데서 온 전화는 잘 받지 않았다.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했다. 고심 끝에 생각난 건 내 집 정도였다. 연구만 한 데다 기력이 쇠해 예전 집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과거의 나와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었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허나 벨을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이미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한 건 우리가 그 날 술을 마셨단 거다. 어디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벌써 10 시였다. 이제 겨우 두 시간 밖에 안 남았다. 먼저 우리가 잘 가던 신림동으로 갔다. 술집이 무수히 많았다. 이 가게도 맞는 것 같고 저 가게도 맞는 것 같았다. 얄팍한 기대를 품고 나와 그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은 없었다. 홀로 술집을 돌아다니는 미심쩍은 늙은이를 바라보는 시선만이 있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시간은 한 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이번에도 난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그녀는 시체가 돼 있을 거다. 허나 좌절하긴 일렀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미래로 돌아가지 못해도 그녀만 살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
과거로 가기 전, 옛 집으로 가보았다. 불은 꺼져있지만 나는 분명히 저 안에 있다. 아마 아무 것도 모른 채 자고 있겠지. 그를 깨워서 뭐라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려다 관두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내 실패를 자위하려는 꼴 밖에 안 된다. 그와 나를 위해선 그녀를 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다시 깨달았다.
타임머신의 날짜를 일주일 전으로 맞추었다. 전 번엔 과거로 오기만 하면 쉽사리 모든 일이 풀릴 줄 알고 시간을 촉박하게 잡았다. 그게 실수였다. 같은 우를 범하는 일을 없을 것이다. 도착해 보니 사고가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다. 난 그녀가 일하는 까페를 찾아갔다. 그것마저 기억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유리창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려 했는데 참을 수 없었다. 좀 더 뚜렷이 그녀를 보고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하나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애정이 숨겨진 눈동자를 보자 왈칵 눈물이 솟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가까스로 울음을 멈추곤 주문을 했다.
“저기, 할아버지. 혹시 아들 있으세요?”
“아니, 없단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왜 그러니?”
모른 척 질문을 했다.
“좀 닮은 사람이 있어서요. 실례했습니다.”
말을 똑 끊는 점도 여전했다.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는 모습. 순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벅차올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 이상 그녀를 본다면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 것이다. 그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나는 그녀를 탐하러 온 게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난 커피 값만 치르고 까페를 빠져나왔다. 이제부터는 절대 그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계획이다. 그녀를 지키는 건 멀리서도 가능하다.
까페와 가까운 데 방을 잡았다. 미래의 푼돈도 과거에선 거금이었기에 돈은 넉넉했다. 매일 매일 그녀를 따라다녔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미행한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내가 그녀와 만나는 걸 몰래 지켜봤다.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웃었다. 가끔 그녀가 쌜주룩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들을 보며 설령 그녀가 살아나더라도 잃어버린 내 과거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느꼈다.
며칠 그녀를 따라다닌 덕분일까.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나와 그녀는 종로의 한 술집에 갔었다. 일식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확히 어떤 가게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기에 전날 모든 일식집을 파악해두었다. 총 23개였다. 가게 수가 많았지만 두 시간이면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모든 게 결정된다 생각하니 잠도 오지 않았다. 세 시간도 못 자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까페에 출근했다. 그녀의 행동반경은 일정했지만 변수가 있을 수 있기에 항상 감시해야했다. 난 렌트 카 안에 앉아 초조하게 시간을 죽였다.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자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역으로 갈 줄 알았던 그녀는 길을 건넜다.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내 쪽으로 오고 있단 걸 깨닫고 시동을 걸려했는데 차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열쇠를 찾고 시동을 걸려는데 차문이 열렸다.
“며칠 전에 가게에 왔던 할아버지 맞죠?”
부인할 수 없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계속 날 쫓아다닌 거 다 알아요. 웬만하면 조금 따라다니다 말겠지 싶었는데 오늘은 차까지 타고 왔네요. 날 납치라도 할 생각인가 보죠?”
오해를 샀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녀를 밀쳐내고 달아나려 했는데 소용없었다. 그녀는 내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재빨리 내 목을 졸랐다.
“오, 오해야. 내가 다 설명할게.”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설명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경찰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간단히 진술한 뒤 경찰서를 나갔다. 졸지에 난 파렴치한이 돼버렸다. 낭패였다. 여차하면 경찰서에서 날을 샐 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했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선 노숙자만도 못한 신세였다. 신분이 없었고 도와줄 친구가 없었다. 어찌해야 되나 머리를 부여잡다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난 항상 그녀와 찍은 사진을 가지고 다녔다. 이걸 잘 이용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
형사에게 말했다.
“여기 사진 보이시죠? 이 청년이 제 아들입니다. 잘 보세요. 닮았죠? 아까 그 여자는 제 아들과 사귀는 사이인데 장차 며느리 감이 될 여자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 며칠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물론 아들은 그런 짓을 싫어하기에 아들 몰래 했지요.”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신분 확인은 해야 되는데요. 정말 신분증 없으세요? 제껀 기억 안 나지만 아들 건 압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 주민 번호까지 외운다고 했다. 형사는 납득했는지 날 풀어주었다. 생판 모르는 남이 얼굴마저 비슷하고 주민 번호까지 알 확률은 낮다. 허술한 형사의 태도에 감사했다.
종로에 도착하니 열시였다. 사람이 많아 차가 다닐 틈이 없었다. 난 뛰기 시작했다. 체력이 없는 낡은 몸을 빨리 움직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가 돌아봐주길 기대하면서. 허나 기운이 딸려 소리도 몇 번 못 질렀다. 채 30분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눈짓조차 하기 힘들만큼 힘이 빠졌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다시 달렸다.
16번째 가게를 나와 시계를 보니 11시 11분이었다. 1시간 23분 남았지만 아직은 모른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다리가 무거웠지만 계속 걸었다. 걸을수록 희망이 사그라졌다. 몇 가게를 더 갔을 때 나를 만났다. 마침내 찾았다는 생각에 기쁨이 솟아올랐다가 옆에 그녀가 없단 걸 깨닫고 좌절했다. 왜 그녀를 그냥 보냈냐고. 잡아두지 못했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허나 그것이 부질없는 외침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따라가면 그녀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차를 멀찍이 주차해 두었기에 택시를 타야했다. 여러 차례 손을 흔들었지만 내 앞에 서는 차는 없었다. 허름한 옷차림 때문인 듯싶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호신용으로 들고 온 총을 꺼냈다. 승객을 태우려는 택시 문을 열고 말했다. 내려. 말로는 소용 없었기에 하늘로 총을 한 방 쐈다. 탕! 순식간에 차가 비었다.
엑셀을 힘껏 밟고 달렸다. 그녀는 분명 집으로 가고 있다. 그간의 미행 덕에 그녀의 집은 파악하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 그녀의 차를 세울 수 있을 거다. 그녀는 회색 소나타 택시를 탔었다. 수도 없이 보았던 차니 어둡지만 분간할 수 있다. 설령 자신이 없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차 사이를 요리저리 빠져나가며 속도를 올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그녀를 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구할 수 없다면 죽는 게 나았다. 그녀는 내 전부였다. 그녀가 죽은 뒤 삶의 의미를 잃었다. 그녀만이 날 구원할 수 있었다. 속도계는 예전에 160 km/h를 넘겼다. 다른 차와 슬쩍 부딪히기만 해도 그대로 훅 갈 게 뻔했다. 차가 없는 고속도로에나 어울리는 속도였건만 여기는 평범한 도심이었다. 주변엔 차가 즐비했다.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앞 차와의 간격이 너무 좁아지기 전에 옆으로 가야했고 속도를 줄이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차선으로 바꾸어야했다. 끼어들고 끼어들면서 달렸다. 손끝이 떨릴 때면 운전대를 꽉 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다른 차를 벗어날 때면 온 몸이 서늘해졌다. 순간순간마다 정신이 마모되는 걸 느꼈다.
한강이 가까워지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였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고 뇌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속도를 올렸다. 지금쯤 시내는 때 아닌 총격과 질주 때문에 난리가 났겠지만 뒤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12시 15분. 19분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까지 밖에 못 왔다니. 속도를 더 올렸다. 그녀의 집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아무리 엑셀을 밟아도 닿을 수 없는 공간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건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거다.
사고가 나면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도로는 멈춘다. 길이 뚫려있다는 건 그녀가 무사하단 증거였다. 허나 그것도 큰 길까지의 얘기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간은 12시 24분. 이제 10분 남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따라잡아야한다. 차를 멈추지 못하면 그녀는 죽는다. 좁은 골목을 고속도로마냥 달렸다. 잠깐이라도 멈출 틈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사람이 없길 빌며 핸들을 움직였다.
그녀의 집에 가까워지자 차가 한 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웠지만 어떤 차인지 확실히 알았다. 회색 소나타였다. 위에 있는 TAXI 캡까지 내가 찾던 차가 확실했다. 그녀가 무사하게 왔단 걸 알게 되자 안심이 됐다. 내 할 일을 다 했단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렸다. 이제 차를 세우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브레이크를 밟자 피로가 몰려왔다. 순간 차가 빨라졌다.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차에서 나와 일그러진 소나타 쪽으로 갔다. 문을 열고 그녀를 살펴봤다. 숨을 쉬지 않았다. 으깨져버린 그녀를 내버려두고 차를 빠져나왔다. 난 오늘 세 시간도 못자고 하루 종일 달렸다. 난 지쳐있었다. 누구라도 내가 한 실수를 했을 게 틀림없다. 젠장, 다 변명이다. 호신용 총을 꺼내 머리에 겨누었다. 탕!
그녀는 내가 가끔 가던 까페의 새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넋을 잃어 내가 뭘 시키려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뭘 드시겠어요. 그녀가 날 일깨워주고 나서야 아무렇게나 메뉴판을 가리켰다. 뒤돌아서 가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긴 흑발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난 매일매일 까페에 갔다. 허나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기에 그저 주문을 할 때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다. 매일 밤 내일은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말해야지. 고민하고 결심을 하다가도 막상 다음날이 되면, 저거 주세요. 하고 입을 닫아버리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고민을 토로해보기도 하고 어찌해야 되나 상담도 했지만 하나같이 하는 말은 똑같았다.
“가볍게 대화의 물꼬를 틀면서 친해져봐. 좀 친해졌다 싶으면 데이트 신청하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여자는 한 명뿐이 아니야.”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게서 주문 받는 것조차 꺼릴까 두려웠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대로가 낫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가 싶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다른 이가 보기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홀로 술을 마시고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니다 술에 취해 잠들곤 했다. 허나 술도 나를 위로해주진 못했다. 방황의 나날 끝에 결심을 했다. 차라리 말해버리자. 그리곤 잊어버리자. 마음을 먹자 오히려 편해졌다. 그동안의 고민이 허망할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나는 그 정도 말밖에 못하는 남자다.
“왜요?”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어서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뜬금없고 당황스러웠겠지. 매일 까페에 찾아와 달랑 커피만 시켜놓고 시간만 때우다 가는 남자가 뭐가 맘에 들겠어. 그 짧은 순간에 무수한 상상을 했다. 미처 거절의 말을 듣기 전에 귀를 막아 버리려했다. 헌데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가 들은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네, 놀랐어요? 거절할 줄 알았단 표정이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변명하지 않아도 되요. 당신이 우유부단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당황했다. 그녀는 나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따 7시쯤에 다시 올게요.”
허둥지둥 말을 꺼내곤 까페를 나와 버렸다. 멍청한 짓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제대로 말해보려다 관두었다. 그랬다간 더욱 비참해지겠지. 가능한 좋은 상상을 하려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냥 가버리진 않았을까? 나 때문에 실망하거나 불쾌하진 않았을까. 시계만 연신 쳐다봤다.
채 5시도되기 전에 연구실을 뛰어나왔다. 그녀는 아직 까페에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아까는 말이죠.”
그녀가 검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나중에 말해요. 일하고 있잖아요.”
맥이 빠졌다. 이런 걸 간접적인 거절이라고 하나. 나가려다 부질없는 희망이 살아나 자리에 앉았다.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이나 남았다. 그 사이 그녀의 맘이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나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대범한 행동이었다.
“잠깐만요, 저녁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었죠.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죠? 몰라서 물어요?”
평소의 나였다면 거기서 관두었을 거다. 허나 그때는 용기가 났다.
“생각은 언제든지 바뀌기 마련입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생각을 바꿀 기회를 주십시오.” 나는 가능한 애절하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게 그녀를 움직였을까. 아님 단지 나를 시험하는 중이었을까. 어쨌든 그녀의 대답은 날 기쁘게 했다.
“좋아요.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에요.”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자주 가던 돈가스 집으로 갔다. 여자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어디가 적당한지 몰랐다. 괜히 멋모르는 장소에 가서 당황할 바엔 잘 아는 곳에 가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녀의 표정은 도도했기에 여기가 맘에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고기를 썰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내게 관심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요?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의심 안할 사람이 있나요? 사장님도 제가 나온 뒤부터 당신이 까페를 매일같이 찾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정도면 확실하죠.”
“근데 당신은 계속 까페를 오락가락 하기만하고 제게 아무 말도 걸지 않더군요. 제가 착각을 했나 싶었죠. 차라리 뭘 할 거면 빨리 하지 뭐 이리 질질 끄나. 아무래도 아닌가 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고 신경을 껐죠. 아니 끄려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당신은 초췌해지더군요.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변함없었구요. 정 말을 안 하면 저라도 말을 하려 했어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날 보는 건 불쾌하니 그만해 달라. 뭐 이런 식으로요. 손님이 하나 줄지도 모르지만 언제까지 어정쩡한 상태로 있을 순 없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내더군요.”
하하,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여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순간 침묵이 흘렀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기왕 이리 된 거 하고 싶었던 말이라도 토해내기로 했다.
‘첫 눈에 반했습니다.“
“왜죠?”
“아름다워서요.”
“진부하네요. 나보다 예쁜 여자는 많잖아요.”
“아닙니다. 당신은 특별해요.”
“난 평범한 까페 직원일 뿐이에요.”
지지부진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그녀를 띄웠고 그녀는 자신을 깎았다. 우리는 의미 없는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내가 말했다.
“저는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서로 간의 애정이 쌓이고 쌓여야 진정한 사랑이 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에게 반했으니 제 생각도 틀려버렸군요.”
“아!”
그녀가 탄식했다.
“왜 그러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도 첫 눈에 반한다는 걸 믿지 않아요.”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일치한 순간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그 다음부터 그녀와의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알아갔고, 그녀는 나에 대해 알아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유도 없이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거짓말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녀는 항상 툴툴거렸다. 악의 없는 빈정거림이라고 할까. 화가 나서, 불만이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습관에 가까웠다. 틱틱 거리는 그녀의 말투조차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그녀를 알아갈수록 그녀가 좋아졌다. 이미 반해버린 이상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긴장해서 그녀를 만나면서도 주저주저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무수히 고민했다. 좀 더 그녀에게 다가가도 되는 걸까. 저 고운, 만지면 부러질 듯한 팔목을 내가 손대도 되는 걸까. 그런 내가 한심했는지 내 손을 확 낚아채며 말했다.
“소심하기는.”
따스한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오며 가슴이 떨렸다. 말없이 우리는 쭉 걸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빌었다.
검고 그윽한 눈동자와 마주칠 때면 불현듯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꼭 안고 키스를 해주었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키스는 별로네. 입 냄새나.”
“양치하고 올게.”
그녀는 세면대로 가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가끔은 나쁘지 않은 걸.”
살며시 웃으며 드러난 하얀 치아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련만. 허나 이제 그녀는 없다. 남아 있는 건 추억과 눈물뿐이다.
난 종종 후회했다. 내가 그녀와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녀를 끝까지 바래다주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피곤하다고 택시를 태워 보냈는지 나도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을까.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과 슬픔이 밀려와 괴로웠다.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난 문득 깨달았다. 현재에는 그녀가 없지만 과거에는 그녀가 있다. 타임머신만 있다면 그녀를 살리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결론을 내리자 맘이 편해졌다. 주위 상황을 정리한 후 타임머신 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모두가 시간여행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상대성 원리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말할 때도 무시했다. 그딴 건 내게 아무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를 살릴 수 있기만 하면 됐다.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타임머신이 완성되던 날 거울을 보았다. 머리는 온통 백발로 변해 있었다. 내가 몇 살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총을 집어넣었다. 혹여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를 대비한 호신용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2009년 12월 16일 오후 8시 7분이었다. 그녀가 사고를 당한 시간은 12시 34분이다. 사고가 난 순간 택시의 시계가 멈춰버렸기에 시간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대략 4시간 남은 셈이다. 여유 있게 도착할 계획이었는데 약간 오차가 생겼다. 타임머신 연료는 많지 않았다. 앞으로 딱 한 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녀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허나 너무 오래된 탓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약속장소도 그녀의 집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핸드폰 번호가 생각나긴 했지만 전화로 해도 믿을 얘기가 아니고 예전의 난 모르는 데서 온 전화는 잘 받지 않았다.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했다. 고심 끝에 생각난 건 내 집 정도였다. 연구만 한 데다 기력이 쇠해 예전 집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과거의 나와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었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허나 벨을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이미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한 건 우리가 그 날 술을 마셨단 거다. 어디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벌써 10 시였다. 이제 겨우 두 시간 밖에 안 남았다. 먼저 우리가 잘 가던 신림동으로 갔다. 술집이 무수히 많았다. 이 가게도 맞는 것 같고 저 가게도 맞는 것 같았다. 얄팍한 기대를 품고 나와 그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은 없었다. 홀로 술집을 돌아다니는 미심쩍은 늙은이를 바라보는 시선만이 있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시간은 한 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이번에도 난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그녀는 시체가 돼 있을 거다. 허나 좌절하긴 일렀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미래로 돌아가지 못해도 그녀만 살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
과거로 가기 전, 옛 집으로 가보았다. 불은 꺼져있지만 나는 분명히 저 안에 있다. 아마 아무 것도 모른 채 자고 있겠지. 그를 깨워서 뭐라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려다 관두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내 실패를 자위하려는 꼴 밖에 안 된다. 그와 나를 위해선 그녀를 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다시 깨달았다.
타임머신의 날짜를 일주일 전으로 맞추었다. 전 번엔 과거로 오기만 하면 쉽사리 모든 일이 풀릴 줄 알고 시간을 촉박하게 잡았다. 그게 실수였다. 같은 우를 범하는 일을 없을 것이다. 도착해 보니 사고가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다. 난 그녀가 일하는 까페를 찾아갔다. 그것마저 기억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유리창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려 했는데 참을 수 없었다. 좀 더 뚜렷이 그녀를 보고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하나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애정이 숨겨진 눈동자를 보자 왈칵 눈물이 솟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가까스로 울음을 멈추곤 주문을 했다.
“저기, 할아버지. 혹시 아들 있으세요?”
“아니, 없단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왜 그러니?”
모른 척 질문을 했다.
“좀 닮은 사람이 있어서요. 실례했습니다.”
말을 똑 끊는 점도 여전했다.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는 모습. 순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벅차올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 이상 그녀를 본다면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 것이다. 그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나는 그녀를 탐하러 온 게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난 커피 값만 치르고 까페를 빠져나왔다. 이제부터는 절대 그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계획이다. 그녀를 지키는 건 멀리서도 가능하다.
까페와 가까운 데 방을 잡았다. 미래의 푼돈도 과거에선 거금이었기에 돈은 넉넉했다. 매일 매일 그녀를 따라다녔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미행한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내가 그녀와 만나는 걸 몰래 지켜봤다.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웃었다. 가끔 그녀가 쌜주룩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들을 보며 설령 그녀가 살아나더라도 잃어버린 내 과거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느꼈다.
며칠 그녀를 따라다닌 덕분일까.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나와 그녀는 종로의 한 술집에 갔었다. 일식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확히 어떤 가게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기에 전날 모든 일식집을 파악해두었다. 총 23개였다. 가게 수가 많았지만 두 시간이면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모든 게 결정된다 생각하니 잠도 오지 않았다. 세 시간도 못 자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까페에 출근했다. 그녀의 행동반경은 일정했지만 변수가 있을 수 있기에 항상 감시해야했다. 난 렌트 카 안에 앉아 초조하게 시간을 죽였다.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자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역으로 갈 줄 알았던 그녀는 길을 건넜다.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내 쪽으로 오고 있단 걸 깨닫고 시동을 걸려했는데 차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열쇠를 찾고 시동을 걸려는데 차문이 열렸다.
“며칠 전에 가게에 왔던 할아버지 맞죠?”
부인할 수 없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계속 날 쫓아다닌 거 다 알아요. 웬만하면 조금 따라다니다 말겠지 싶었는데 오늘은 차까지 타고 왔네요. 날 납치라도 할 생각인가 보죠?”
오해를 샀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녀를 밀쳐내고 달아나려 했는데 소용없었다. 그녀는 내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재빨리 내 목을 졸랐다.
“오, 오해야. 내가 다 설명할게.”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설명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경찰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간단히 진술한 뒤 경찰서를 나갔다. 졸지에 난 파렴치한이 돼버렸다. 낭패였다. 여차하면 경찰서에서 날을 샐 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했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선 노숙자만도 못한 신세였다. 신분이 없었고 도와줄 친구가 없었다. 어찌해야 되나 머리를 부여잡다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난 항상 그녀와 찍은 사진을 가지고 다녔다. 이걸 잘 이용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
형사에게 말했다.
“여기 사진 보이시죠? 이 청년이 제 아들입니다. 잘 보세요. 닮았죠? 아까 그 여자는 제 아들과 사귀는 사이인데 장차 며느리 감이 될 여자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 며칠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물론 아들은 그런 짓을 싫어하기에 아들 몰래 했지요.”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신분 확인은 해야 되는데요. 정말 신분증 없으세요? 제껀 기억 안 나지만 아들 건 압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 주민 번호까지 외운다고 했다. 형사는 납득했는지 날 풀어주었다. 생판 모르는 남이 얼굴마저 비슷하고 주민 번호까지 알 확률은 낮다. 허술한 형사의 태도에 감사했다.
종로에 도착하니 열시였다. 사람이 많아 차가 다닐 틈이 없었다. 난 뛰기 시작했다. 체력이 없는 낡은 몸을 빨리 움직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가 돌아봐주길 기대하면서. 허나 기운이 딸려 소리도 몇 번 못 질렀다. 채 30분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눈짓조차 하기 힘들만큼 힘이 빠졌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다시 달렸다.
16번째 가게를 나와 시계를 보니 11시 11분이었다. 1시간 23분 남았지만 아직은 모른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다리가 무거웠지만 계속 걸었다. 걸을수록 희망이 사그라졌다. 몇 가게를 더 갔을 때 나를 만났다. 마침내 찾았다는 생각에 기쁨이 솟아올랐다가 옆에 그녀가 없단 걸 깨닫고 좌절했다. 왜 그녀를 그냥 보냈냐고. 잡아두지 못했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허나 그것이 부질없는 외침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따라가면 그녀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차를 멀찍이 주차해 두었기에 택시를 타야했다. 여러 차례 손을 흔들었지만 내 앞에 서는 차는 없었다. 허름한 옷차림 때문인 듯싶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호신용으로 들고 온 총을 꺼냈다. 승객을 태우려는 택시 문을 열고 말했다. 내려. 말로는 소용 없었기에 하늘로 총을 한 방 쐈다. 탕! 순식간에 차가 비었다.
엑셀을 힘껏 밟고 달렸다. 그녀는 분명 집으로 가고 있다. 그간의 미행 덕에 그녀의 집은 파악하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 그녀의 차를 세울 수 있을 거다. 그녀는 회색 소나타 택시를 탔었다. 수도 없이 보았던 차니 어둡지만 분간할 수 있다. 설령 자신이 없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차 사이를 요리저리 빠져나가며 속도를 올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그녀를 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구할 수 없다면 죽는 게 나았다. 그녀는 내 전부였다. 그녀가 죽은 뒤 삶의 의미를 잃었다. 그녀만이 날 구원할 수 있었다. 속도계는 예전에 160 km/h를 넘겼다. 다른 차와 슬쩍 부딪히기만 해도 그대로 훅 갈 게 뻔했다. 차가 없는 고속도로에나 어울리는 속도였건만 여기는 평범한 도심이었다. 주변엔 차가 즐비했다.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앞 차와의 간격이 너무 좁아지기 전에 옆으로 가야했고 속도를 줄이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차선으로 바꾸어야했다. 끼어들고 끼어들면서 달렸다. 손끝이 떨릴 때면 운전대를 꽉 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다른 차를 벗어날 때면 온 몸이 서늘해졌다. 순간순간마다 정신이 마모되는 걸 느꼈다.
한강이 가까워지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였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고 뇌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속도를 올렸다. 지금쯤 시내는 때 아닌 총격과 질주 때문에 난리가 났겠지만 뒤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12시 15분. 19분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까지 밖에 못 왔다니. 속도를 더 올렸다. 그녀의 집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아무리 엑셀을 밟아도 닿을 수 없는 공간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건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거다.
사고가 나면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도로는 멈춘다. 길이 뚫려있다는 건 그녀가 무사하단 증거였다. 허나 그것도 큰 길까지의 얘기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간은 12시 24분. 이제 10분 남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따라잡아야한다. 차를 멈추지 못하면 그녀는 죽는다. 좁은 골목을 고속도로마냥 달렸다. 잠깐이라도 멈출 틈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사람이 없길 빌며 핸들을 움직였다.
그녀의 집에 가까워지자 차가 한 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웠지만 어떤 차인지 확실히 알았다. 회색 소나타였다. 위에 있는 TAXI 캡까지 내가 찾던 차가 확실했다. 그녀가 무사하게 왔단 걸 알게 되자 안심이 됐다. 내 할 일을 다 했단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렸다. 이제 차를 세우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브레이크를 밟자 피로가 몰려왔다. 순간 차가 빨라졌다.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차에서 나와 일그러진 소나타 쪽으로 갔다. 문을 열고 그녀를 살펴봤다. 숨을 쉬지 않았다. 으깨져버린 그녀를 내버려두고 차를 빠져나왔다. 난 오늘 세 시간도 못자고 하루 종일 달렸다. 난 지쳐있었다. 누구라도 내가 한 실수를 했을 게 틀림없다. 젠장, 다 변명이다. 호신용 총을 꺼내 머리에 겨누었다. 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