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거리는 혼랍스러웠다. 깡패들이 가게를 들쑤시는 바람에 열린 가게가 얼마 되지 않았다. 경찰서 가까이에 가서야 거리는 정돈된 모습을 보였다. 나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편의점 밖 테이블에 앉았다. 겨울에 콘도 아닌 하드를 사먹는건 입에 하드가 달라붙기도 하고 입안과 밖이 다 시렵기도 해서 고역이었다. 어쨌든 맛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올해가 될 때까지, 아니 올해 7월1일이 될 때까지 2012년 종말설을 믿지 않았다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다. 하! 그런데 정부는 미리알고 지하에 쉘터를 만들어놨다고 한다. 그런 녀석들은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지만 난 별로 화를 내고 싶지도 않다. 쉘터에 들어갈 사람은 무작위로 뽑는다고 하지만 들어갈 수 있는 인원도 적고 발표대로 무작위로 뽑을 것 같지도 않다. 뭐 그리고 우리집이 꽤나 상류층이고 내가 최고급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된다고 해도 난 무작위의 대상에 들어간다. 우리가족은 고급인력일 뿐이라는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런 통지가 없는 걸 보니까 난 버려진 것이 맞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래도 난 오래전에 포기한 것 같다.
난 내 인생이 꽤나 즐거웠다고 생각한다. 해외에도 여러번 다녀왔고 친구들하고도 잘 지냈고 공부도 잘 했다. 우리 엄마가 외국에서 살다와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한국교육의 비효율성에 대한 열변을 들으면서 효율적으로 공부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탓에 난 놀것도 다 놀고 여친도 몇번 사귀고 그러면서 공부를 계속 잘해왔다. 아 그것때문에 공부잘하는 여자애들이 날 싫어하긴 했다. 그런 별 상관없는 문제는 있었지만 어려운 점이나 문제도 없었고. 꽤나 착하게 살아온 것 같고. 음. 분명 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확실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죽음을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불교에 대한 책을 몇번 봐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난 세계종말의 소식을 듣고도 공부를 평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했다. 그건 내 습관이기 때문일까?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이다. 혼란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지 뭔지 몰라도 정부에서는 정확한 멸망의 때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공영방송에서는 안나오지만 케이블에서는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었다. 요즘 몇몇 채널은 없어지거나 그냥 영화나 버라이어티 쇼의 전화 재방송같은 것이나 돌리고 있지만. 어쨌든 항간의 돌고 있는 소문에 의하면 유성우가 지구에 부딧혀서 망한다고 한다. 유성우가 보인다고 바로 폭격당하는게 아니라 며칠 비껴가다가 지구를 덮친다고 한다. 흠... 그러고보면 크리스마스에 애인하고 같이 유성우를 보다 죽는 것도 꽤나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은 애인이 없지만.
난 멍하니 하드를 빨았다. 꽤나 녹아서 하드에서 단물이 손가락으로 흘렀다. 글쎄 그것을 계기로 만나게 된 건지는 몰랐다. 진짜로 예쁜 여자가 다가와서 손수건으로 내 손가락에 묻은 단물을 닦아 준 것이다. 진짜로 예뻐서 난 정말 두근거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춥지 않으세요? 겨울에 하드를?"
그녀는 그러면서 호호 미소지었다. 책을 쓰는 놈들이 품성이 어쩌니 하지만 이정도의 미녀를 앞에 두고 뭐라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아차 내가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먹고 싶으니까..."
정말 멋없는 것 같다. 이건 정말 인생의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난 오늘 씼지도 않았지! 옷도 허접한 파카나 입고 있다.
"여기 좀 앉아도 될까요?"
"네. 물론."
역시 내 목소리는 별로 매력적인 것 같지가 않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삑사리처럼 목소리가 높았다.
그녀는 날 지긋이 바라봤다. 헉. 어떡해! 근데 이 아이스크림 어떡하지? 먹어야 되나? 나는 이쁜여자 옆에서 하드를 호호불면서 츕츕빠는 남자를 상상해봤다. 버리자.
"어머. 아이스크림 왜 버리세요. 아깝게."
"아니... 역시 좀 추워서요."
"호호."
그녀의 미소에 홀렸다가 정신을 차렸다. 헉. 나는 대답할 때 변태같은 웃음을 짓지 않았나? 그러면서 그녀의 가슴부분을 보지 않았나? 것보다 아이스크림은 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런데..."
그녀가 운을 띄웠다. 나는 그녀의 입과 말소리에 집중을 해서 얼마나 뜸을 들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난 아주 의젓하게 말했다. 그런데 하고보니까 이거 완전 조선시대 선비 아냐?
"호호. 의젓하시네요. 처음 보는데도 정말 의식이 있는 사람 같아요."
"아닙니다."
표정관리하자. 쉼호흡하고. 후우. 후우. 못하겠다! 내 얼굴은 되다 만 이상한 표정에 야릇한 미소를 첨가한 기분나쁜 그런 것일 것이다. 어휴.
"그래도 정말로 삶에 집착이 없을 리는 없겠죠. 소원이 뭐에요?"
"없어요."
그렇게 말했지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답했다. 재정신이 아니어서 잘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에 내 소원이 뭔지 물어봤다. 나는 쩔쩔 매다가 아까 생각하던게 떠올라서 그것을 말해버렸다.
"음... 아까 생각난 거긴 한데. 멸망 며칠전에는 유성우가 내린다잖아요. 애인하고 같이 그걸 보면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아 부끄럽네. 애인도 없는데."
그때 난 정말 이성이 날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럴줄 알았어요. 당신의 얼굴은 분명 고뇌가 서려있는 얼굴이었거든요. 그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오늘 하루 당신의 애인이 될게요. 지금 저는 선행을 쌓고 있어요. 어린양들의 소원을 제가 들어줄 수 있는 한 들어주는 거죠.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관대하고 평등히여 모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려주지만 저는 무언가 인류를 위해 더 하고 싶거든요."
...사이비 종교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말한 '책을 쓰는 놈들이 품성이 어쩌니 하지만 이정도의 미녀를 앞에 두고 뭐라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는 정말 이 상황에 잘 맞았다.
내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안좋아졌는지 그녀는 좀 움츠러 들었다. 참 안쓰러웠다.
"그럼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흠흠. 이건... 우발적인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나왔다. 잠깐만. 그런데 결국엔 해달라고 할 거 아냐. 여러번 사양하는 건 시간낭비고 말이지. 너라면 뭐라고 했겠어. 가식따위... 이런 논박은 정말로 시간낭비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열심히 말했다.
"음... 그럼 진도를 좀 빨리 나가야겠어요. 사실 종말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아, 종말이라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구의 생명과 문명은 멸망하겠지만 우리는 사므따쟈날잉 성인의 방주를 타고 새로운 행성 유토피아 아아각각갓으로 이주를 하게 되거든요. 정부가 쉘터를 만들어서 소수의 인원만 살리려고 하는 것하고도 달라요.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관대하고 선해서 모든 인간을 살리려고 해요. 그럴 능력도 되고요. 그걸 어떻게 아냐면 소수의 교감자가 있거든요. 그들은 사므따쟈날잉 성인의 초물리 신호를 받아들여 해석할 수가 있어요. 제가 아는 교감자도 벌써 5명이나 된다고요. 아..."
열성적인 언변에 나는 당황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조금 부끄러워하였다.
"죄송해요. 신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이에요. 음...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하는게 낫겠어요. 저는 엘리자베스 이에 아으앗입니다. 아으앗은 중간 관리층에게 붙는 호칭같은 거에요.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해드리겠지만 우리 신도들은 선각자로써 무지한 일반인들을 이끌어줘야 하거든요."
"엘리자베스..."
나는 입밖으로 내고 말았다. 나으 정신은 하이앟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미모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정신때문이기도 하고 그 모두의 복합적인 상관관계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이에는 제 진정한 이름이에요. 신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생소하겠지만. 진짜에요. 이에는 어... 사므따쟈날잉 성인의 알파벳같은 거라고 하던데 저는 잘 몰라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아 그녀는 벌써 몇번이나 사람들에게 박해와 미친년취급을 당한 것이다. 안쓰러웠다.
"저는 이민준이에요."
"아, 그런데 우리가 사귈 시간도 많지 않은데... 반말쓰자."
"으으응."
그녀는 친근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옆으로 와서 팔짱을 끼면서 나를 일으켰다. 홀리쉿! 날아갈 것 같다.
"데이트하자."
그래. 사이비에 빠진들 그게 사랑과 무슨 상관이냐. 신경쓰려고 하지 말자. 후훗. 난 진정한 승자다. 멍청하고 불쌍한 놈들. 옆을 보면서 그렇게 히죽히죽 웃었다.
11시쯤이었지만 우리는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얼마 전에도 간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요즘은 고급 레스토랑이 호황기였다. 훗날을 기약받은 사람보다 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기에 7월부터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지금까지 사치했어도 남은 돈이 있는 사람이 적은 건지 질려서 그런건지 종말에 절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한산했기에 나는 요즘에서야 잘 들렸다. 아빠가 왕창 준 돈으로 오랫만에 풀 코스좀 먹어볼까?
그녀는 꽤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자부심을 느끼며 스테이크며 와인이며 디저트등을 시켰다. 무언가 더 시키려고 했지만 그녀가 다 못 먹는다면서 나를 말렸다. 그녀가 쑥쓰러워하며 말했다.
"헤헤. 요즘에 맛있는 거 별로 못먹었는데."
"왜?"
"아아각각갓 행성에 가는데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우리하고 먹는게 달라서 그쪽에서 식량을 확보해줄 수가 없거든. 그래서 우리가 식량을 확보해야해. 어휴. 그런데 정부가 비상식량같은 유통기한이 긴 걸 독점으로 사들이고 있어서 식량모으는게 정말 힘들어. 값도 많이 올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은 브랜드가 아니었다. 머리도 보통 여자들처럼 파마하지 않았고 생머리였다. 화장도 안 한 것 같았다. 꾸미지 않았을 때 진정한 모습이 나오지. 진정한 미녀야.
"꾸미지 않았을 때 진정한 모습이 나오지. 진정한 미녀야."
허허.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참 놀랍다. 게다가 생각한 다음에 말했다. 우와. 종말이 오는데도 우울해하지 않거나 이런말을 하는 걸 보면 난 좀 미친 걸지도 모른다. 끝이 가까운데 무엇을 못하리!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귀여웠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와 함께 와인을 쭉쭉 들이켰다. 술 잘 못한다는 그녀에게 마셔마셔하면서 마시게 했는데 진짜로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취해서 그런건지 내 와인까지 다 마셔버렸다. 그녀는 취하면 졸린가보다. 냠냠 아무것도 없는 포크를 계속 물고 있었다. 겨우 일으키고 팔짱을 낀건지 부축하는 건지 잘 모를 자세로 레스토랑을 나왔다. 하하. 그런데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서 파카를 먹고 있었다. 침이 주륵 흐르며 냠냠 물고 늘어졌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대낮인데 이렇게 정신을 잃어버리면 시간이 아까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나는 그녀를 내 팔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파카를 물고 늘어졌다.
"엘리...(사람들을 의식해서 여기서 목소리가 작아졌다.)자베스! 일어나. 모처럼 데이트하는데 시간이 아깝잖아."
"냠냠냠."
하면서 그녀는 내 팔을 감싸안아 파카를 씹으며 붙어있었다. 그녀를 흔들어 깨우다보니깐 뭔가 이상했다.
"지금 깨있지? 장난하지 말고 좀!"
그녀는 헤헤거리며 떨어졌다. 찬바람을 쐬서 술기운이 좀 빠진 것 같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알았어. 냠. 그럼 이제 뭐할거양?"
그녀는 흔들거리며 서 있었다.
"음... 영화관이나 가자."
그렇게 말한것과 동시에 그녀는 내쪽으로 쓰러졌다. 어쩔 수 없군. 그녀는 아까 먹어서 침 범벅이 된 것을 보고 다른 쪽 팔에 들러붙어 우물우물거렸다. 후후. 정말 귀여워. 아니 그런데... 가엽기도 하군!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럴까.
우리는 영화관에 갔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고 장식이 되어있었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곳이 있었다. 게다가 풍선을 달아 놓은것은 여지없이 터져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내가 가는 대로 따라 왔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친구에게서 연인들이 멜로영화를 보다가 섹스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떡하지?
그녀가 말했다.
"음... 요즘에는 영화에 관심을 안둬서 무슨 영화가 재밌는지 몰라. 어떤거 볼까?"
"어...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용기를 내자. 용기가 안나!
그녀는 유심히 팜플렛을 쳐다봤다. 흠... 내가 여기서 멜로영화를 보자고 제안해도 될까? 어우! 부끄러워.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같다.
그녀가 팜플렛의 그림을 짚으며 말했다. 오우! 예이!
"라스트 러브랑 2013, 둘 중에서 어떤게 좋을까?"
그녀는 라스트 러브의 그림을 짚고 있었다. 둘다 종말과 관련되어서 뭐 사랑이라든지 2013이라는 SF같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좀비같은 걸 다루고 있었다. 음... 라스트 러브가 좋겠어. 라고 생각했으니까 아까처럼만 내 입으로 나오면 된다. 안되잖아!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음... 근데 2013이 더 재밌을 것 같다. 라스트 러브는 정말 뻔할 거 같애. 제목도 별로고."
저기... 2013도 짝퉁B급같은 느낌이 드는데...
라고 말하지 못하고 나는 그녀가 고른 영화의 표를 샀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좋은 것이다. 내 이미지를 위해. 하하.
우리는 팝콘을 사고 상영관에 들어갔다. 사람은 한산해서 우리는 그냥 아무데나 좋은 중간쯤 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남자들이 공짜영화가 어쩌니 웅성웅성거리는 걸 보니 돈이 좀 아깝기도 했다.
나는 곧 영화에 몰입했다. 2012년의 종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재건하고 있는데 외계 바이러스가 좀비를 만들어내는 B급 영화였다. 꽤나 스펙타클하고 좀비도 엄청 현실성이 있었다. 그리고 한 흑인이 아름다운 가정얘기를 하는 걸 보니 저 녀석 분명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난 눈물을 조금 흘리겠지. 어. 그런데 백인남자와 동양인 여자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여자의 실감나는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설마. 뒤쪽 구석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리가 계속 커지기에 난 겸연쩍게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아. 전혀 몰랐다. 그녀는 또 내 팔에 기대 침을 흘리며 옷을 먹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좋아. 한번 봐보자. 뒤를 돌아보니 어? 아까 떠들던 남자들이 이동하고 있다? 구석에 있는 연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거 긴장되는데? 절묘하게도 그 장면은 영화의 긴박한 음악과 매치되었다. 긴박한 음악이 흐르고 아무래도 동양인 여자는 죽을 것 같았고 섹스하고 있는 연인들도 위험할 것 같았다. 꽝 하면서 음악과 빛이 없어지고 다음 순간 남자들이 연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도 위험한가? 그러나 불행 중 다행 중 불행으로 섹스하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경비원이 느릿느릿 다가 오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다. 내가 그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는지 아니면 이 영화가 허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엔딩은 좀 이상했다. 외계 바이러스에 항체를 지닌 인간이 나오고 좀비가 그 인간을 숭배하면서 세상은 부족시대로 돌아갔다. 영화가 미친거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깨우고 영화관에서 끌고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졸린 눈으로 말했다.
"영화 어땠어?"
"음... 좀 이상했어. 갑자기 외계바이러스에 항체를 가진 사람을 좀비가 따르고 세상이 부족사회로 돌아가고 그런 내용이었어."
"흐음. 그것도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 하고 있네. 자기한테 이상한 영향이 가면 안되니까 내가 정확하게 설명해줄게."
자기... 그것참 달콤하구나! 그건 그렇지만 좀 그러네. 저쪽에서 소란이 났다. 깡패가 또 소란을 피우는 것 같다. 이것이 기회야!
"그런데 밖에 돌아다니는 거 위험할 것 같지 않아?"
"그러네... 그럼 어떡하지?"
엘리자베스도 깡패의 소란을 의식하고 있나보다.
"일단 백화점에 가자. 건물 안에 있으면 어느정도는 안전해. 경비원도 있고."
우리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큰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산타 모형이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세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맞아! 옷을 사줘야겠다. 저런 옷을 입고 다니게 할 수야 없지. 귀걸이랑 목걸이랑 구두랑 백이랑 반지도... 커플링 해야즹. 아 화장품도 사줘야지. 그러고보니 돈도 빼와야 되는데 ATM이 살아있으려나?
그녀는 백화점에 들어온김에 여자답게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갖고 싶은거 다 말해. 오빠가 다 사줄게."
나는 목소리를 깔고 있어보이는 척 말했다.
"호호. 몇살인데 오빠야?"
"세 쨜."
어우 징그러워. 내 표정때문인지 "세 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호호 웃고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그녀는 외투가 갖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녀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을 찾아다니면서 옷갈아입히기 놀이를 했다. 내가 쇼핑을 즐겁게 할 줄이야. 외투만 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는 골라놓은 옷을 가지고 계산대로 갔다. 그녀가 날 만류했다.
"뭘 그렇게 대여섯벌이나 사줄라고 그래."
"귀걸이랑 목걸이랑 구두랑 백이랑 커플링 그리고 화장품도 사줄건데?"
그녀는 당황과 기쁨의 표정을 지었다.
"됐어. 곧 이런건 쓸모없게 될 텐데."
"괜찮아. 재산분배를 미리해가지고 나 진짜 돈많아. 이거 전부 주세요."
점원이 바코드를 찍는 사이 지갑을 열어봤더니 생각보다 돈이 적었다.
"돈 빼와야겠네. 아줌마. 좀 있다가 올테니까 옷 잘 지켜줘요."
"돈 못뺄걸요."
점원이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왜요? 백화점에 있는 ATM 망가졌어요?"
"그것도 그렇고 아까 이 근처 은행이 다 털렸잖아요. 엄청 소란스러웠는데. 아, 카드 안되는 거 아시죠? 수표도 안되요."
아아. 그랬구나.
"그러면 이거 하나만 주세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젠장할! 이건 억울하다. 억울한 일이다. 꼴사나운 일이다!
"네. 48만원입니다."
"어... 이거 세일하는 거 아니에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자 점원은 한숨을 쉬었다.
"네. 그거 세일하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원래 가격보다 비싸잖아요."
그러고보니 그랬다. 점원은 펑범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깡패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저기 말이죠... 요즘엔 인플레이션이 아주아주 많이 되요. 왜냐면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사장은 좋은 자리 얻어놨으니까 돈을 더 벌려고 크리스마스 세일이니 뭐니 하지만 우리는 자리도 없는데 돈이라도 있어야지 좀 살아갈 수가 있거든요."
"안사요."
엘리자베스는 내 팔을 잡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가게의 점원이 슬금슬금 우리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서 방금 나온 옷가게의 점원을 노려봤다.
"어쩌자는 거야?"
"몰랐던거 같으니까 뭐 싸게 해줄게요. 40만으로 깎아줄게."
나는 말리는 엘리자베스를 뿌리치고 값을 치렀다. 그러자 점원이 여러가지 지껄여 주었다.
"야. 손님. 너 진짜 운 좋은 줄 알어. 요즘엔 우리가 좀 난폭하게 해서 손님도 없었으니까 좀 봐준거야."
"그렇게 돈을 모은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아?"
"맞아요. 지구의 물건은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행성인 유토피아 아아각각갓에서는 쓸 수가 없어요. 당연히 돈도 그렇고요."
점원은 박장대소했다. 기분이 나빴다.
"하하... 쯧쯧. 아니, 곧 죽는데 사이비가 어떻든 상관없지. 그런데 우리는 살 수 있거든."
점원은 기분이 좋아져서 멋대로 비밀스러운 것들을 지껄였다. 백화점의 점원이 합심해서 지배인을 쫓아냈다는 둥, 지하에 쉘터를 지을 거라는 둥, 백화점에는 물건이 많으니까 좋다는 둥. 우리들은 쉘터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둥. 비밀로 안하면 빨리 죽게 될거라는 둥.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흥미로워서 들었다. 점원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하자 자리를 떴다.
"살려고 발버둥치네. 미쳤어."
"호호. 어쩔 수 없지."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난 물론 엘리자베스가 빠진 사이비종교같은 걸 믿지 않는다. 결국엔 될대로 될 것이다.
5만원권을 다발로 갖고 왔는데 이제 20만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침에는 지갑이 정말 빵빵했는데...
나는 보석가게에 가서 커플링을 맞췄다. 20만원에 맞춰서 별 말없이 샀다. 싸구려인지 제 값을 치른건지도 모르겠다. 커플링은 심플한 은링에 서로의 이니셜을 세긴 것이었다.
그녀를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았다. 억울했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사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에 내 잘못도 아닌데 면목이 없어서 별 말을 건내지 못하였다. 집에 들어가기에는 좀 일렀지만 엘리자베스와 나는 우리집에 갔다.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우리 아파트가 아무리 좋고 관리인이 일을 잘 한다고 해도 가끔 토사물이 보이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러나 우리집은 다르다고. 엄마는 세상이 이지경이 되었어도 잘 청소를 해놓는다. 나는 현관문을 열쇄로 열고 들어갔다. 역시나 넓찍하고 깔끔한 거실이 우리를 맞았다. 큰 트리가 있고 이것저것 장식되어 있어서 진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다. 참 오랫만인 것 같은 향수가 느껴졌다. 어이쿠 거실에 식칼이 굴러다니네.
엘리자베스는 꽤나 감탄하며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에 있는 식칼을 주워 주방에 들어갔다. 엄마가 속옷에 앞치마만 걸치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엄마 뭐해?"
소리지른 건 아니고 그래도 소리가 컸던건 사실이다.
"우리도 부부야."
와. 그렇구나.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지. 어쨌든.
"어쨌든 손님이 왔으니까 옷 좀 입어. 일단 내방에 데려다 놓을게."
"누군데?"
"어... 설명하기 힘든데..."
정말 힘들었다. 당최 뭐라고 해야할지 생각이 안 난다. 엄마는 어쨌든 친구를 방에 데려다 주라고 했다. 주방을 나오니까 막 엘리자베스가 이쪽으로 올려고 했네. 휴우.
방에 들어가니까 나는 도대체 그녀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고뇌하기 시작했다.
애인이긴 한데 아침에 사귀기로 한거다. 그것도 엄청 갑자기. 선행을 쌓는데 내가 불쌍해보여서?인지 뭔지 하는 이유로 애인이 되어 주었다. 게다가 뭐 사이비종교 때문이기도 하고. 외계인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하고. 또... 엄청 예쁘고. 밥도 사줬고. 코트도 사줬고. 커플링도 맞췄다. 영화도 봤고.
아아. 정리가 안된다.
"민준아! 친구 소개해줘야하지 않겠니?"
왠지 엄마가 그렇게 소리쳤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엘리자베스는 방문을 열었다.
"어머. 여자친구였구나."
"안녕하세요. 엘리자베스입니다."
"잘도 이렇게 얘쁜 혼혈을 그런 꼴을 하고 다 죽어가는 이 시대에 사귀었네."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잠깐만 왜 이래. 하지만 이 앞은 더 가관이었다.
"언제부터니? 우리들은 상관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뭘하고 낑낑거려도 우리도 같은 짓거릴 할 테니까. 아! 로션은 맘대로 쓰거라."
엘리자베스는 이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엄마 왜 이래? 정신 나갔어? 미친 거 아냐? 엄마가 먼저 인간답게 죽자고 말했잖아!"
"네 아빠가 당첨됐어! 저기 안방에서 힘이 빠져서 쳐 잠들고 있는 바람둥이 짐승이!"
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 안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몸도 마음도 가만히 있었다. 아니다. 놀라움이 있었다.
아빠가 안방에서 정장을 입고 나왔다.
"얘기 좀 하자. 민준아."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은 이미 만찬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칠면조는 오븐에 있었지만 여러가지 셀러드와 그릇, 음료와 컵이 식탁위에 있었다. 우리는 아빠의 맞은 편에 앉았고 엄마는 요리를 하며 돌아다녔다.
"엄마 말대로 나는 쉘터에 들어갈 수 있다. 두달 전에 서류가 왔다. 신기하게도 너와 엄마가 없고 나만 집에 있을 때 말이다. 뽑혔다는 건 비밀이고 오늘까지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없이 그냥 나온 행동이었다.
"미안하긴 뭐가!"
엄마가 음식을 거칠게 놓으면서 말했다.
"이놈이 아까 뭐라고 했는지 아니? 지금까지 나한테 잘못해 온걸 일일히 말하면서 용서해달라고 하지뭐니. 아니 용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용서해달라는 거랑 똑같지. 참나! 정말 어이없어. 결혼 3년부터 애인이 있었데."
엄마의 목소리는 떨렸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나와 엄마와 아빠가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이 분위기를 결국엔 이기고 말을 했다. 편안하고 조용한 미소로. 마치 성모같이!(나는 부모님 때문에 천주교에 다니긴 하지만 이런 수사를 자연스럽게 쓸 정도는 아니다.)
"괜찮아요. 우리는 모두 살 수 있어요.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우리를 구하러 방주를 타고 오시고 있거든요.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모두 관대하고 선한 품성을 갖고 있어서 인간 모두를 구할거에요. 동물이나 식물은 방주에 자리가 없어서 안되지만요. 물론 물건을 가져갈 수도 없어요. 사람만 탈 수가 있어요. 우리는 사므따쟈날 성인의 방주를 타고 새로운 행성 유토피아 아아각각갓에 대려다 줄거에요. 물론 유토피아답게 먹을 것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곳이에요. 건물같은 건 지어야 되지만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도와줄거니까 괜찮아요. 사므따쟈날잉 성인 덕분에 과학기술도 훨씬 발달할거고 사람들의 품성도 지금보다 훨씬 착해질 거에요. 이건 교감자라고 하는 분들이 초물리 신호를 해석해서 알아낸 거에요. 이건 진짜에요. 많은 교감자가 동시에 같은 내용의 신호를 받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어쨌든 믿든 안 믿든 우리는 구원을 받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우리는 착각에 빠져서 난동을 부리는 추한 자들을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구원하지 않을 까봐 걱정이에요."
"아... 그러니까... 너는 시스터라도 되는거니?"
엄마가 띄염띄염 물었다. 엄마는 독실했다. 요즘엔 교회에 안나가지만.
"다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엘리자베스 이에 아으앗입니다. 아으앗은 중간 관리층에게 붙는 이름이에요. 우리들은 선각자로써 혼란에 빠진 일반인을 이끌어줘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어요."
엄마는 다시 요리를 시작하며 말했다.
"민준아. 저런 광신도하고는 사귀지 마.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서 다니던 교회도 결국엔 미친놈 소굴이 됐어. 결국 믿을 건 성경과 자신이야. 다른 것에 의존하면 저렇게 망가지고 말아."
"뭐라고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인간이라면 모두 구원받습니다."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엘리자베스가 먼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니다. 이제와서 뭘 못하겠니.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하게 최후를 맞이하면 좋은거지."
"구체적인 걸 말씀드릴게요. 여러분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 교감자께서 이건 되도록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 오늘밤에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오십니다. 산타로 변신해서요."
"어?"
황당했다.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교감자와 통신을 하면서 지구의 몇몇 풍습에 대해 배우셨거든요. 교감자중 알버트라는 미국인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산타복장을 입고 오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안을 하셨어요. 구원을 선물하는 산타라고 하시면서요. 호호. 내일 하늘을 보시면 알거에요. 전 세계에서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시게 될거에요."
그리고 그녀는 식사시간 내내 사므따쟈날잉 언어를 가르쳐 줬다.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인간과 발성기관이 달라서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사므따쟈날잉 언어를 구사하기 어렵지만 노력하면 조금은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강의를 열심히 들으며 기가악잇(안녕하세요)와 악웃힙긱숩(고맙습니다)의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결국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원래 자기도 며칠 연습을 했다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근데 내 발음하고 그녀의 발음의 차이를 모르겠다.
어느새 우린 내 침대에서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밥을 먹고 우리방으로 돌아온 나는 왠지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되었었다.
어두운 방에 들어온 도시의 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잘 볼 수가 있었다. 거의 보름달 같은 달도 떠 있는 것 같았다. 침대는 1인용이라서 조금 좁았다.
후우.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온다. 우리의 사랑에 대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게 일어난 것이 그것같긴 하지만 과연 첫눈에 반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인데. 게다가 지금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을 떠맡기는 것 같이 그녀에게 준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일까. 그리고 내가 옷이나 백같은 걸 사주지 못했다고 억울하게 느낀 것도 더러웠다. 사랑이란게 물질적인 건가. 나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진정한 사랑을 했을까? 지금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더럽게 느껴진다. 결국 섹스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절대 있을 수 없는일. 그러나...
"저기..."
그녀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아까 내가 좀 흥분해서 무서웠나?
"오늘 12시까지 가야하는 데가 있거든."
나는 시계를 봤다. 11시였다.
"그리고... 애인도 12시에 끝이야."
그렇다. 그녀가 날 사랑하는지는 모른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데려다주기 위해 아빠에게 차를 빌렸다. 면허는 없지만 7월 초부터 계속 운전을 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그러고보니 유성우를 못봤네."
"응."
그러나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의 더러운 공기에 가려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현달인지 하현달인지는 반쯤 구름에 가려있었다.
"별이 잘 보이는 데로 가자. 조금 지각해도 되니까."
그녀가 말했다. 아. 어디로 가야할까. 별이 잘 보이는 곳따위 내가 알리가 없었다. 나는 외곽도로를 타고 나갔다. 어딘가 농촌에. 높은 곳이 좋을 것이다. 네비게이션에 찍을 도착지도 없고. 어쨌든 나는 달렸다. 가로등과 집의 불빛이 드문 곳까지.
"여기서 보자. 너무 지각하면 안돼."
사실 나는 길을 달린것 뿐이었다. 별이 잘 보이는 곳을 찾지는 않았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따라간 것뿐이다. 나는 차를 멈추었다. 우리는 차밖으로 나갔다. 밖은 예상외로 아주 까맣지는 않았다. 가로등도 없고 빛이 켜져있는 집은 드문드문 있었다. 차도 다니지 않았다.
"달이 이렇게 밝은 건줄은 몰랐어."
아아. 달 때문에 이렇게 밝았구나. 마음이 들뜨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믐달이었으면 좋았을 거다. 유성우도 잘 보일테고.
"아직 유성우 안 내리나 보네."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따듯한 음료라도 사올걸.
"오늘은 즐거웠어. 우주선에서 만나면 무시하지마."
그녀가 말했다.
"난 널 사랑해."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정말로 널 사랑해. 오늘 처음 만났고 너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렇지만 널 사랑한다고."
"저기... 날 너무 당황스럽게 만들지말아줘..."
그녀는 정확히 두 번 힘없이 웃었다.
12시까지 13분밖에 안 남았다. 우리는 아무말도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12시까지 유성우는 결국 내리지 않았고 12시가 되자 그녀는 네비게이션에 도착지를 설정하며 자기를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존댓말로. 나는 심술이 나서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교외의 산 중턱이었다. 근처에는 차가 엄청나게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길가뿐만 아니라 길 한가운데에도 주차가 되어있어서 차를 멀리두고 걸어가야했다. 약수터 길에서 옆으로 샜다. 풀이 무성했지만 다 밟혀있었다. 그 길은 꽤 넓은 공터로 이어져 있었다. 공터의 모서리엔 각각 나무를 때고 있는 드럼통이 하나씩 있었다. 그곳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중엔 정말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 있었다. 한사람한사람이 산타와 뭐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뒤쪽 오솔길로 들어갔다. 우리가 지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은 길었다. 나는 UFO가 없다는 데에 왠지 화가 났다.
"UFO 없네."
내 말투는 신랄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럴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작별을 하고 돌아서자 그녀가 나를 불러새웠다.
"저기..."
그녀의 얼굴은 붉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흰 입김이 나왔다. 추워서 그런지 불빛 때문에 그런지.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빨간 천을 꺼내며 나에게 내밀었다.
"모자야. 줄까말까 했어. 솔직히 난 그냥 선행을 쌓으려고 한건데 네가 그렇게 진심으로 대하니까... 당황했어. 나도 경솔했지만 너도 처음엔 그냥..."
나는 모자를 낚아챘다. 그리고 길을 갔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약이란걸 처음 해봤다. 죽을 때 쓰려고 몰래 사놓은 거다. 똑같은 알약을 한번에 여러개 먹은 것도 처음이다. 삼키기 힘드네. 취할대로 취해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으면 했다. 모자를 봤다. 끝에 둥근 털 공이 달린 전형적인 산타모자다. 으이구. 나는 그것을 머리에 썼다. 모르겠다. 이제 죽으면 된다.
"어휴!"
나는 침대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약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직 헛것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무언가 해야한다! 하고 싶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죽는 건 화가 나서 못해먹겠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왔다. 폭발하는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느새 유성우가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젠장! 난 눈물을 닦았다. 유성우가 눈물이니 뭐니하는 징글징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징그러워! 저건 게임에 나오는 메테오일 뿐이다. 어떤 씨발놈이 운석같은 걸 소환해서. 씨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 머리아퍼. 마약이 도는 건가?
아.
밤하늘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젠장 이상한 환상이나 보여주고 말이지! 역시 마약은 안 좋은거다. 나는 창을 주먹으로 쳤다. 씨발. 아프지도 않네. 좀 아프긴 하지만.
나는 책장을 밀어서 창문을 가렸다. 물론 책이나 상패같은게 다 떨어졌다. 상패에 다리를 찧여서 아팠다. 책장을 세우든 눕히든 창문이 다 가려지지 않았다. 젠장할. 될대로 되라! 나는 힘이 빠져서 침대에 누웠다. 곧 의식을 잃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올해가 될 때까지, 아니 올해 7월1일이 될 때까지 2012년 종말설을 믿지 않았다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다. 하! 그런데 정부는 미리알고 지하에 쉘터를 만들어놨다고 한다. 그런 녀석들은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지만 난 별로 화를 내고 싶지도 않다. 쉘터에 들어갈 사람은 무작위로 뽑는다고 하지만 들어갈 수 있는 인원도 적고 발표대로 무작위로 뽑을 것 같지도 않다. 뭐 그리고 우리집이 꽤나 상류층이고 내가 최고급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된다고 해도 난 무작위의 대상에 들어간다. 우리가족은 고급인력일 뿐이라는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런 통지가 없는 걸 보니까 난 버려진 것이 맞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래도 난 오래전에 포기한 것 같다.
난 내 인생이 꽤나 즐거웠다고 생각한다. 해외에도 여러번 다녀왔고 친구들하고도 잘 지냈고 공부도 잘 했다. 우리 엄마가 외국에서 살다와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한국교육의 비효율성에 대한 열변을 들으면서 효율적으로 공부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탓에 난 놀것도 다 놀고 여친도 몇번 사귀고 그러면서 공부를 계속 잘해왔다. 아 그것때문에 공부잘하는 여자애들이 날 싫어하긴 했다. 그런 별 상관없는 문제는 있었지만 어려운 점이나 문제도 없었고. 꽤나 착하게 살아온 것 같고. 음. 분명 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확실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죽음을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불교에 대한 책을 몇번 봐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난 세계종말의 소식을 듣고도 공부를 평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했다. 그건 내 습관이기 때문일까?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이다. 혼란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지 뭔지 몰라도 정부에서는 정확한 멸망의 때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공영방송에서는 안나오지만 케이블에서는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었다. 요즘 몇몇 채널은 없어지거나 그냥 영화나 버라이어티 쇼의 전화 재방송같은 것이나 돌리고 있지만. 어쨌든 항간의 돌고 있는 소문에 의하면 유성우가 지구에 부딧혀서 망한다고 한다. 유성우가 보인다고 바로 폭격당하는게 아니라 며칠 비껴가다가 지구를 덮친다고 한다. 흠... 그러고보면 크리스마스에 애인하고 같이 유성우를 보다 죽는 것도 꽤나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은 애인이 없지만.
난 멍하니 하드를 빨았다. 꽤나 녹아서 하드에서 단물이 손가락으로 흘렀다. 글쎄 그것을 계기로 만나게 된 건지는 몰랐다. 진짜로 예쁜 여자가 다가와서 손수건으로 내 손가락에 묻은 단물을 닦아 준 것이다. 진짜로 예뻐서 난 정말 두근거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춥지 않으세요? 겨울에 하드를?"
그녀는 그러면서 호호 미소지었다. 책을 쓰는 놈들이 품성이 어쩌니 하지만 이정도의 미녀를 앞에 두고 뭐라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아차 내가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먹고 싶으니까..."
정말 멋없는 것 같다. 이건 정말 인생의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난 오늘 씼지도 않았지! 옷도 허접한 파카나 입고 있다.
"여기 좀 앉아도 될까요?"
"네. 물론."
역시 내 목소리는 별로 매력적인 것 같지가 않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삑사리처럼 목소리가 높았다.
그녀는 날 지긋이 바라봤다. 헉. 어떡해! 근데 이 아이스크림 어떡하지? 먹어야 되나? 나는 이쁜여자 옆에서 하드를 호호불면서 츕츕빠는 남자를 상상해봤다. 버리자.
"어머. 아이스크림 왜 버리세요. 아깝게."
"아니... 역시 좀 추워서요."
"호호."
그녀의 미소에 홀렸다가 정신을 차렸다. 헉. 나는 대답할 때 변태같은 웃음을 짓지 않았나? 그러면서 그녀의 가슴부분을 보지 않았나? 것보다 아이스크림은 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런데..."
그녀가 운을 띄웠다. 나는 그녀의 입과 말소리에 집중을 해서 얼마나 뜸을 들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난 아주 의젓하게 말했다. 그런데 하고보니까 이거 완전 조선시대 선비 아냐?
"호호. 의젓하시네요. 처음 보는데도 정말 의식이 있는 사람 같아요."
"아닙니다."
표정관리하자. 쉼호흡하고. 후우. 후우. 못하겠다! 내 얼굴은 되다 만 이상한 표정에 야릇한 미소를 첨가한 기분나쁜 그런 것일 것이다. 어휴.
"그래도 정말로 삶에 집착이 없을 리는 없겠죠. 소원이 뭐에요?"
"없어요."
그렇게 말했지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답했다. 재정신이 아니어서 잘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에 내 소원이 뭔지 물어봤다. 나는 쩔쩔 매다가 아까 생각하던게 떠올라서 그것을 말해버렸다.
"음... 아까 생각난 거긴 한데. 멸망 며칠전에는 유성우가 내린다잖아요. 애인하고 같이 그걸 보면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아 부끄럽네. 애인도 없는데."
그때 난 정말 이성이 날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럴줄 알았어요. 당신의 얼굴은 분명 고뇌가 서려있는 얼굴이었거든요. 그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오늘 하루 당신의 애인이 될게요. 지금 저는 선행을 쌓고 있어요. 어린양들의 소원을 제가 들어줄 수 있는 한 들어주는 거죠.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관대하고 평등히여 모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려주지만 저는 무언가 인류를 위해 더 하고 싶거든요."
...사이비 종교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말한 '책을 쓰는 놈들이 품성이 어쩌니 하지만 이정도의 미녀를 앞에 두고 뭐라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는 정말 이 상황에 잘 맞았다.
내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안좋아졌는지 그녀는 좀 움츠러 들었다. 참 안쓰러웠다.
"그럼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흠흠. 이건... 우발적인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나왔다. 잠깐만. 그런데 결국엔 해달라고 할 거 아냐. 여러번 사양하는 건 시간낭비고 말이지. 너라면 뭐라고 했겠어. 가식따위... 이런 논박은 정말로 시간낭비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열심히 말했다.
"음... 그럼 진도를 좀 빨리 나가야겠어요. 사실 종말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아, 종말이라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구의 생명과 문명은 멸망하겠지만 우리는 사므따쟈날잉 성인의 방주를 타고 새로운 행성 유토피아 아아각각갓으로 이주를 하게 되거든요. 정부가 쉘터를 만들어서 소수의 인원만 살리려고 하는 것하고도 달라요.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관대하고 선해서 모든 인간을 살리려고 해요. 그럴 능력도 되고요. 그걸 어떻게 아냐면 소수의 교감자가 있거든요. 그들은 사므따쟈날잉 성인의 초물리 신호를 받아들여 해석할 수가 있어요. 제가 아는 교감자도 벌써 5명이나 된다고요. 아..."
열성적인 언변에 나는 당황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조금 부끄러워하였다.
"죄송해요. 신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이에요. 음...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하는게 낫겠어요. 저는 엘리자베스 이에 아으앗입니다. 아으앗은 중간 관리층에게 붙는 호칭같은 거에요.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해드리겠지만 우리 신도들은 선각자로써 무지한 일반인들을 이끌어줘야 하거든요."
"엘리자베스..."
나는 입밖으로 내고 말았다. 나으 정신은 하이앟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미모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정신때문이기도 하고 그 모두의 복합적인 상관관계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이에는 제 진정한 이름이에요. 신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생소하겠지만. 진짜에요. 이에는 어... 사므따쟈날잉 성인의 알파벳같은 거라고 하던데 저는 잘 몰라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아 그녀는 벌써 몇번이나 사람들에게 박해와 미친년취급을 당한 것이다. 안쓰러웠다.
"저는 이민준이에요."
"아, 그런데 우리가 사귈 시간도 많지 않은데... 반말쓰자."
"으으응."
그녀는 친근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옆으로 와서 팔짱을 끼면서 나를 일으켰다. 홀리쉿! 날아갈 것 같다.
"데이트하자."
그래. 사이비에 빠진들 그게 사랑과 무슨 상관이냐. 신경쓰려고 하지 말자. 후훗. 난 진정한 승자다. 멍청하고 불쌍한 놈들. 옆을 보면서 그렇게 히죽히죽 웃었다.
11시쯤이었지만 우리는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얼마 전에도 간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요즘은 고급 레스토랑이 호황기였다. 훗날을 기약받은 사람보다 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기에 7월부터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지금까지 사치했어도 남은 돈이 있는 사람이 적은 건지 질려서 그런건지 종말에 절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한산했기에 나는 요즘에서야 잘 들렸다. 아빠가 왕창 준 돈으로 오랫만에 풀 코스좀 먹어볼까?
그녀는 꽤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자부심을 느끼며 스테이크며 와인이며 디저트등을 시켰다. 무언가 더 시키려고 했지만 그녀가 다 못 먹는다면서 나를 말렸다. 그녀가 쑥쓰러워하며 말했다.
"헤헤. 요즘에 맛있는 거 별로 못먹었는데."
"왜?"
"아아각각갓 행성에 가는데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우리하고 먹는게 달라서 그쪽에서 식량을 확보해줄 수가 없거든. 그래서 우리가 식량을 확보해야해. 어휴. 그런데 정부가 비상식량같은 유통기한이 긴 걸 독점으로 사들이고 있어서 식량모으는게 정말 힘들어. 값도 많이 올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은 브랜드가 아니었다. 머리도 보통 여자들처럼 파마하지 않았고 생머리였다. 화장도 안 한 것 같았다. 꾸미지 않았을 때 진정한 모습이 나오지. 진정한 미녀야.
"꾸미지 않았을 때 진정한 모습이 나오지. 진정한 미녀야."
허허.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참 놀랍다. 게다가 생각한 다음에 말했다. 우와. 종말이 오는데도 우울해하지 않거나 이런말을 하는 걸 보면 난 좀 미친 걸지도 모른다. 끝이 가까운데 무엇을 못하리!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귀여웠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와 함께 와인을 쭉쭉 들이켰다. 술 잘 못한다는 그녀에게 마셔마셔하면서 마시게 했는데 진짜로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취해서 그런건지 내 와인까지 다 마셔버렸다. 그녀는 취하면 졸린가보다. 냠냠 아무것도 없는 포크를 계속 물고 있었다. 겨우 일으키고 팔짱을 낀건지 부축하는 건지 잘 모를 자세로 레스토랑을 나왔다. 하하. 그런데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서 파카를 먹고 있었다. 침이 주륵 흐르며 냠냠 물고 늘어졌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대낮인데 이렇게 정신을 잃어버리면 시간이 아까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나는 그녀를 내 팔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파카를 물고 늘어졌다.
"엘리...(사람들을 의식해서 여기서 목소리가 작아졌다.)자베스! 일어나. 모처럼 데이트하는데 시간이 아깝잖아."
"냠냠냠."
하면서 그녀는 내 팔을 감싸안아 파카를 씹으며 붙어있었다. 그녀를 흔들어 깨우다보니깐 뭔가 이상했다.
"지금 깨있지? 장난하지 말고 좀!"
그녀는 헤헤거리며 떨어졌다. 찬바람을 쐬서 술기운이 좀 빠진 것 같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알았어. 냠. 그럼 이제 뭐할거양?"
그녀는 흔들거리며 서 있었다.
"음... 영화관이나 가자."
그렇게 말한것과 동시에 그녀는 내쪽으로 쓰러졌다. 어쩔 수 없군. 그녀는 아까 먹어서 침 범벅이 된 것을 보고 다른 쪽 팔에 들러붙어 우물우물거렸다. 후후. 정말 귀여워. 아니 그런데... 가엽기도 하군!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럴까.
우리는 영화관에 갔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고 장식이 되어있었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곳이 있었다. 게다가 풍선을 달아 놓은것은 여지없이 터져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내가 가는 대로 따라 왔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친구에게서 연인들이 멜로영화를 보다가 섹스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떡하지?
그녀가 말했다.
"음... 요즘에는 영화에 관심을 안둬서 무슨 영화가 재밌는지 몰라. 어떤거 볼까?"
"어...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용기를 내자. 용기가 안나!
그녀는 유심히 팜플렛을 쳐다봤다. 흠... 내가 여기서 멜로영화를 보자고 제안해도 될까? 어우! 부끄러워.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같다.
그녀가 팜플렛의 그림을 짚으며 말했다. 오우! 예이!
"라스트 러브랑 2013, 둘 중에서 어떤게 좋을까?"
그녀는 라스트 러브의 그림을 짚고 있었다. 둘다 종말과 관련되어서 뭐 사랑이라든지 2013이라는 SF같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좀비같은 걸 다루고 있었다. 음... 라스트 러브가 좋겠어. 라고 생각했으니까 아까처럼만 내 입으로 나오면 된다. 안되잖아!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음... 근데 2013이 더 재밌을 것 같다. 라스트 러브는 정말 뻔할 거 같애. 제목도 별로고."
저기... 2013도 짝퉁B급같은 느낌이 드는데...
라고 말하지 못하고 나는 그녀가 고른 영화의 표를 샀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좋은 것이다. 내 이미지를 위해. 하하.
우리는 팝콘을 사고 상영관에 들어갔다. 사람은 한산해서 우리는 그냥 아무데나 좋은 중간쯤 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남자들이 공짜영화가 어쩌니 웅성웅성거리는 걸 보니 돈이 좀 아깝기도 했다.
나는 곧 영화에 몰입했다. 2012년의 종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재건하고 있는데 외계 바이러스가 좀비를 만들어내는 B급 영화였다. 꽤나 스펙타클하고 좀비도 엄청 현실성이 있었다. 그리고 한 흑인이 아름다운 가정얘기를 하는 걸 보니 저 녀석 분명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난 눈물을 조금 흘리겠지. 어. 그런데 백인남자와 동양인 여자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여자의 실감나는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설마. 뒤쪽 구석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리가 계속 커지기에 난 겸연쩍게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아. 전혀 몰랐다. 그녀는 또 내 팔에 기대 침을 흘리며 옷을 먹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좋아. 한번 봐보자. 뒤를 돌아보니 어? 아까 떠들던 남자들이 이동하고 있다? 구석에 있는 연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거 긴장되는데? 절묘하게도 그 장면은 영화의 긴박한 음악과 매치되었다. 긴박한 음악이 흐르고 아무래도 동양인 여자는 죽을 것 같았고 섹스하고 있는 연인들도 위험할 것 같았다. 꽝 하면서 음악과 빛이 없어지고 다음 순간 남자들이 연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도 위험한가? 그러나 불행 중 다행 중 불행으로 섹스하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경비원이 느릿느릿 다가 오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다. 내가 그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는지 아니면 이 영화가 허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엔딩은 좀 이상했다. 외계 바이러스에 항체를 지닌 인간이 나오고 좀비가 그 인간을 숭배하면서 세상은 부족시대로 돌아갔다. 영화가 미친거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깨우고 영화관에서 끌고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졸린 눈으로 말했다.
"영화 어땠어?"
"음... 좀 이상했어. 갑자기 외계바이러스에 항체를 가진 사람을 좀비가 따르고 세상이 부족사회로 돌아가고 그런 내용이었어."
"흐음. 그것도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 하고 있네. 자기한테 이상한 영향이 가면 안되니까 내가 정확하게 설명해줄게."
자기... 그것참 달콤하구나! 그건 그렇지만 좀 그러네. 저쪽에서 소란이 났다. 깡패가 또 소란을 피우는 것 같다. 이것이 기회야!
"그런데 밖에 돌아다니는 거 위험할 것 같지 않아?"
"그러네... 그럼 어떡하지?"
엘리자베스도 깡패의 소란을 의식하고 있나보다.
"일단 백화점에 가자. 건물 안에 있으면 어느정도는 안전해. 경비원도 있고."
우리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큰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산타 모형이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세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맞아! 옷을 사줘야겠다. 저런 옷을 입고 다니게 할 수야 없지. 귀걸이랑 목걸이랑 구두랑 백이랑 반지도... 커플링 해야즹. 아 화장품도 사줘야지. 그러고보니 돈도 빼와야 되는데 ATM이 살아있으려나?
그녀는 백화점에 들어온김에 여자답게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갖고 싶은거 다 말해. 오빠가 다 사줄게."
나는 목소리를 깔고 있어보이는 척 말했다.
"호호. 몇살인데 오빠야?"
"세 쨜."
어우 징그러워. 내 표정때문인지 "세 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호호 웃고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그녀는 외투가 갖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녀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을 찾아다니면서 옷갈아입히기 놀이를 했다. 내가 쇼핑을 즐겁게 할 줄이야. 외투만 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는 골라놓은 옷을 가지고 계산대로 갔다. 그녀가 날 만류했다.
"뭘 그렇게 대여섯벌이나 사줄라고 그래."
"귀걸이랑 목걸이랑 구두랑 백이랑 커플링 그리고 화장품도 사줄건데?"
그녀는 당황과 기쁨의 표정을 지었다.
"됐어. 곧 이런건 쓸모없게 될 텐데."
"괜찮아. 재산분배를 미리해가지고 나 진짜 돈많아. 이거 전부 주세요."
점원이 바코드를 찍는 사이 지갑을 열어봤더니 생각보다 돈이 적었다.
"돈 빼와야겠네. 아줌마. 좀 있다가 올테니까 옷 잘 지켜줘요."
"돈 못뺄걸요."
점원이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왜요? 백화점에 있는 ATM 망가졌어요?"
"그것도 그렇고 아까 이 근처 은행이 다 털렸잖아요. 엄청 소란스러웠는데. 아, 카드 안되는 거 아시죠? 수표도 안되요."
아아. 그랬구나.
"그러면 이거 하나만 주세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젠장할! 이건 억울하다. 억울한 일이다. 꼴사나운 일이다!
"네. 48만원입니다."
"어... 이거 세일하는 거 아니에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자 점원은 한숨을 쉬었다.
"네. 그거 세일하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원래 가격보다 비싸잖아요."
그러고보니 그랬다. 점원은 펑범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깡패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저기 말이죠... 요즘엔 인플레이션이 아주아주 많이 되요. 왜냐면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사장은 좋은 자리 얻어놨으니까 돈을 더 벌려고 크리스마스 세일이니 뭐니 하지만 우리는 자리도 없는데 돈이라도 있어야지 좀 살아갈 수가 있거든요."
"안사요."
엘리자베스는 내 팔을 잡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가게의 점원이 슬금슬금 우리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서 방금 나온 옷가게의 점원을 노려봤다.
"어쩌자는 거야?"
"몰랐던거 같으니까 뭐 싸게 해줄게요. 40만으로 깎아줄게."
나는 말리는 엘리자베스를 뿌리치고 값을 치렀다. 그러자 점원이 여러가지 지껄여 주었다.
"야. 손님. 너 진짜 운 좋은 줄 알어. 요즘엔 우리가 좀 난폭하게 해서 손님도 없었으니까 좀 봐준거야."
"그렇게 돈을 모은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아?"
"맞아요. 지구의 물건은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행성인 유토피아 아아각각갓에서는 쓸 수가 없어요. 당연히 돈도 그렇고요."
점원은 박장대소했다. 기분이 나빴다.
"하하... 쯧쯧. 아니, 곧 죽는데 사이비가 어떻든 상관없지. 그런데 우리는 살 수 있거든."
점원은 기분이 좋아져서 멋대로 비밀스러운 것들을 지껄였다. 백화점의 점원이 합심해서 지배인을 쫓아냈다는 둥, 지하에 쉘터를 지을 거라는 둥, 백화점에는 물건이 많으니까 좋다는 둥. 우리들은 쉘터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둥. 비밀로 안하면 빨리 죽게 될거라는 둥.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흥미로워서 들었다. 점원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하자 자리를 떴다.
"살려고 발버둥치네. 미쳤어."
"호호. 어쩔 수 없지."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난 물론 엘리자베스가 빠진 사이비종교같은 걸 믿지 않는다. 결국엔 될대로 될 것이다.
5만원권을 다발로 갖고 왔는데 이제 20만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침에는 지갑이 정말 빵빵했는데...
나는 보석가게에 가서 커플링을 맞췄다. 20만원에 맞춰서 별 말없이 샀다. 싸구려인지 제 값을 치른건지도 모르겠다. 커플링은 심플한 은링에 서로의 이니셜을 세긴 것이었다.
그녀를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았다. 억울했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사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에 내 잘못도 아닌데 면목이 없어서 별 말을 건내지 못하였다. 집에 들어가기에는 좀 일렀지만 엘리자베스와 나는 우리집에 갔다.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우리 아파트가 아무리 좋고 관리인이 일을 잘 한다고 해도 가끔 토사물이 보이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러나 우리집은 다르다고. 엄마는 세상이 이지경이 되었어도 잘 청소를 해놓는다. 나는 현관문을 열쇄로 열고 들어갔다. 역시나 넓찍하고 깔끔한 거실이 우리를 맞았다. 큰 트리가 있고 이것저것 장식되어 있어서 진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다. 참 오랫만인 것 같은 향수가 느껴졌다. 어이쿠 거실에 식칼이 굴러다니네.
엘리자베스는 꽤나 감탄하며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에 있는 식칼을 주워 주방에 들어갔다. 엄마가 속옷에 앞치마만 걸치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엄마 뭐해?"
소리지른 건 아니고 그래도 소리가 컸던건 사실이다.
"우리도 부부야."
와. 그렇구나.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지. 어쨌든.
"어쨌든 손님이 왔으니까 옷 좀 입어. 일단 내방에 데려다 놓을게."
"누군데?"
"어... 설명하기 힘든데..."
정말 힘들었다. 당최 뭐라고 해야할지 생각이 안 난다. 엄마는 어쨌든 친구를 방에 데려다 주라고 했다. 주방을 나오니까 막 엘리자베스가 이쪽으로 올려고 했네. 휴우.
방에 들어가니까 나는 도대체 그녀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고뇌하기 시작했다.
애인이긴 한데 아침에 사귀기로 한거다. 그것도 엄청 갑자기. 선행을 쌓는데 내가 불쌍해보여서?인지 뭔지 하는 이유로 애인이 되어 주었다. 게다가 뭐 사이비종교 때문이기도 하고. 외계인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하고. 또... 엄청 예쁘고. 밥도 사줬고. 코트도 사줬고. 커플링도 맞췄다. 영화도 봤고.
아아. 정리가 안된다.
"민준아! 친구 소개해줘야하지 않겠니?"
왠지 엄마가 그렇게 소리쳤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엘리자베스는 방문을 열었다.
"어머. 여자친구였구나."
"안녕하세요. 엘리자베스입니다."
"잘도 이렇게 얘쁜 혼혈을 그런 꼴을 하고 다 죽어가는 이 시대에 사귀었네."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잠깐만 왜 이래. 하지만 이 앞은 더 가관이었다.
"언제부터니? 우리들은 상관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뭘하고 낑낑거려도 우리도 같은 짓거릴 할 테니까. 아! 로션은 맘대로 쓰거라."
엘리자베스는 이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엄마 왜 이래? 정신 나갔어? 미친 거 아냐? 엄마가 먼저 인간답게 죽자고 말했잖아!"
"네 아빠가 당첨됐어! 저기 안방에서 힘이 빠져서 쳐 잠들고 있는 바람둥이 짐승이!"
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 안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몸도 마음도 가만히 있었다. 아니다. 놀라움이 있었다.
아빠가 안방에서 정장을 입고 나왔다.
"얘기 좀 하자. 민준아."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은 이미 만찬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칠면조는 오븐에 있었지만 여러가지 셀러드와 그릇, 음료와 컵이 식탁위에 있었다. 우리는 아빠의 맞은 편에 앉았고 엄마는 요리를 하며 돌아다녔다.
"엄마 말대로 나는 쉘터에 들어갈 수 있다. 두달 전에 서류가 왔다. 신기하게도 너와 엄마가 없고 나만 집에 있을 때 말이다. 뽑혔다는 건 비밀이고 오늘까지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없이 그냥 나온 행동이었다.
"미안하긴 뭐가!"
엄마가 음식을 거칠게 놓으면서 말했다.
"이놈이 아까 뭐라고 했는지 아니? 지금까지 나한테 잘못해 온걸 일일히 말하면서 용서해달라고 하지뭐니. 아니 용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용서해달라는 거랑 똑같지. 참나! 정말 어이없어. 결혼 3년부터 애인이 있었데."
엄마의 목소리는 떨렸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나와 엄마와 아빠가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이 분위기를 결국엔 이기고 말을 했다. 편안하고 조용한 미소로. 마치 성모같이!(나는 부모님 때문에 천주교에 다니긴 하지만 이런 수사를 자연스럽게 쓸 정도는 아니다.)
"괜찮아요. 우리는 모두 살 수 있어요.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우리를 구하러 방주를 타고 오시고 있거든요.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모두 관대하고 선한 품성을 갖고 있어서 인간 모두를 구할거에요. 동물이나 식물은 방주에 자리가 없어서 안되지만요. 물론 물건을 가져갈 수도 없어요. 사람만 탈 수가 있어요. 우리는 사므따쟈날 성인의 방주를 타고 새로운 행성 유토피아 아아각각갓에 대려다 줄거에요. 물론 유토피아답게 먹을 것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곳이에요. 건물같은 건 지어야 되지만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도와줄거니까 괜찮아요. 사므따쟈날잉 성인 덕분에 과학기술도 훨씬 발달할거고 사람들의 품성도 지금보다 훨씬 착해질 거에요. 이건 교감자라고 하는 분들이 초물리 신호를 해석해서 알아낸 거에요. 이건 진짜에요. 많은 교감자가 동시에 같은 내용의 신호를 받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어쨌든 믿든 안 믿든 우리는 구원을 받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우리는 착각에 빠져서 난동을 부리는 추한 자들을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구원하지 않을 까봐 걱정이에요."
"아... 그러니까... 너는 시스터라도 되는거니?"
엄마가 띄염띄염 물었다. 엄마는 독실했다. 요즘엔 교회에 안나가지만.
"다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엘리자베스 이에 아으앗입니다. 아으앗은 중간 관리층에게 붙는 이름이에요. 우리들은 선각자로써 혼란에 빠진 일반인을 이끌어줘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어요."
엄마는 다시 요리를 시작하며 말했다.
"민준아. 저런 광신도하고는 사귀지 마.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서 다니던 교회도 결국엔 미친놈 소굴이 됐어. 결국 믿을 건 성경과 자신이야. 다른 것에 의존하면 저렇게 망가지고 말아."
"뭐라고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인간이라면 모두 구원받습니다."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엘리자베스가 먼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니다. 이제와서 뭘 못하겠니.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하게 최후를 맞이하면 좋은거지."
"구체적인 걸 말씀드릴게요. 여러분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 교감자께서 이건 되도록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 오늘밤에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오십니다. 산타로 변신해서요."
"어?"
황당했다.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교감자와 통신을 하면서 지구의 몇몇 풍습에 대해 배우셨거든요. 교감자중 알버트라는 미국인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산타복장을 입고 오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안을 하셨어요. 구원을 선물하는 산타라고 하시면서요. 호호. 내일 하늘을 보시면 알거에요. 전 세계에서 사므따쟈날잉 성인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시게 될거에요."
그리고 그녀는 식사시간 내내 사므따쟈날잉 언어를 가르쳐 줬다. 사므따쟈날잉 성인은 인간과 발성기관이 달라서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사므따쟈날잉 언어를 구사하기 어렵지만 노력하면 조금은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강의를 열심히 들으며 기가악잇(안녕하세요)와 악웃힙긱숩(고맙습니다)의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결국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원래 자기도 며칠 연습을 했다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근데 내 발음하고 그녀의 발음의 차이를 모르겠다.
어느새 우린 내 침대에서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밥을 먹고 우리방으로 돌아온 나는 왠지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되었었다.
어두운 방에 들어온 도시의 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잘 볼 수가 있었다. 거의 보름달 같은 달도 떠 있는 것 같았다. 침대는 1인용이라서 조금 좁았다.
후우.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온다. 우리의 사랑에 대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게 일어난 것이 그것같긴 하지만 과연 첫눈에 반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인데. 게다가 지금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을 떠맡기는 것 같이 그녀에게 준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일까. 그리고 내가 옷이나 백같은 걸 사주지 못했다고 억울하게 느낀 것도 더러웠다. 사랑이란게 물질적인 건가. 나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진정한 사랑을 했을까? 지금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더럽게 느껴진다. 결국 섹스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절대 있을 수 없는일. 그러나...
"저기..."
그녀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아까 내가 좀 흥분해서 무서웠나?
"오늘 12시까지 가야하는 데가 있거든."
나는 시계를 봤다. 11시였다.
"그리고... 애인도 12시에 끝이야."
그렇다. 그녀가 날 사랑하는지는 모른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데려다주기 위해 아빠에게 차를 빌렸다. 면허는 없지만 7월 초부터 계속 운전을 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그러고보니 유성우를 못봤네."
"응."
그러나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의 더러운 공기에 가려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현달인지 하현달인지는 반쯤 구름에 가려있었다.
"별이 잘 보이는 데로 가자. 조금 지각해도 되니까."
그녀가 말했다. 아. 어디로 가야할까. 별이 잘 보이는 곳따위 내가 알리가 없었다. 나는 외곽도로를 타고 나갔다. 어딘가 농촌에. 높은 곳이 좋을 것이다. 네비게이션에 찍을 도착지도 없고. 어쨌든 나는 달렸다. 가로등과 집의 불빛이 드문 곳까지.
"여기서 보자. 너무 지각하면 안돼."
사실 나는 길을 달린것 뿐이었다. 별이 잘 보이는 곳을 찾지는 않았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따라간 것뿐이다. 나는 차를 멈추었다. 우리는 차밖으로 나갔다. 밖은 예상외로 아주 까맣지는 않았다. 가로등도 없고 빛이 켜져있는 집은 드문드문 있었다. 차도 다니지 않았다.
"달이 이렇게 밝은 건줄은 몰랐어."
아아. 달 때문에 이렇게 밝았구나. 마음이 들뜨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믐달이었으면 좋았을 거다. 유성우도 잘 보일테고.
"아직 유성우 안 내리나 보네."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따듯한 음료라도 사올걸.
"오늘은 즐거웠어. 우주선에서 만나면 무시하지마."
그녀가 말했다.
"난 널 사랑해."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정말로 널 사랑해. 오늘 처음 만났고 너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렇지만 널 사랑한다고."
"저기... 날 너무 당황스럽게 만들지말아줘..."
그녀는 정확히 두 번 힘없이 웃었다.
12시까지 13분밖에 안 남았다. 우리는 아무말도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12시까지 유성우는 결국 내리지 않았고 12시가 되자 그녀는 네비게이션에 도착지를 설정하며 자기를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존댓말로. 나는 심술이 나서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교외의 산 중턱이었다. 근처에는 차가 엄청나게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길가뿐만 아니라 길 한가운데에도 주차가 되어있어서 차를 멀리두고 걸어가야했다. 약수터 길에서 옆으로 샜다. 풀이 무성했지만 다 밟혀있었다. 그 길은 꽤 넓은 공터로 이어져 있었다. 공터의 모서리엔 각각 나무를 때고 있는 드럼통이 하나씩 있었다. 그곳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중엔 정말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 있었다. 한사람한사람이 산타와 뭐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뒤쪽 오솔길로 들어갔다. 우리가 지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은 길었다. 나는 UFO가 없다는 데에 왠지 화가 났다.
"UFO 없네."
내 말투는 신랄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럴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작별을 하고 돌아서자 그녀가 나를 불러새웠다.
"저기..."
그녀의 얼굴은 붉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흰 입김이 나왔다. 추워서 그런지 불빛 때문에 그런지.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빨간 천을 꺼내며 나에게 내밀었다.
"모자야. 줄까말까 했어. 솔직히 난 그냥 선행을 쌓으려고 한건데 네가 그렇게 진심으로 대하니까... 당황했어. 나도 경솔했지만 너도 처음엔 그냥..."
나는 모자를 낚아챘다. 그리고 길을 갔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약이란걸 처음 해봤다. 죽을 때 쓰려고 몰래 사놓은 거다. 똑같은 알약을 한번에 여러개 먹은 것도 처음이다. 삼키기 힘드네. 취할대로 취해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으면 했다. 모자를 봤다. 끝에 둥근 털 공이 달린 전형적인 산타모자다. 으이구. 나는 그것을 머리에 썼다. 모르겠다. 이제 죽으면 된다.
"어휴!"
나는 침대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약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직 헛것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무언가 해야한다! 하고 싶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죽는 건 화가 나서 못해먹겠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왔다. 폭발하는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느새 유성우가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젠장! 난 눈물을 닦았다. 유성우가 눈물이니 뭐니하는 징글징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징그러워! 저건 게임에 나오는 메테오일 뿐이다. 어떤 씨발놈이 운석같은 걸 소환해서. 씨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 머리아퍼. 마약이 도는 건가?
아.
밤하늘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젠장 이상한 환상이나 보여주고 말이지! 역시 마약은 안 좋은거다. 나는 창을 주먹으로 쳤다. 씨발. 아프지도 않네. 좀 아프긴 하지만.
나는 책장을 밀어서 창문을 가렸다. 물론 책이나 상패같은게 다 떨어졌다. 상패에 다리를 찧여서 아팠다. 책장을 세우든 눕히든 창문이 다 가려지지 않았다. 젠장할. 될대로 되라! 나는 힘이 빠져서 침대에 누웠다. 곧 의식을 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