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치 작업의 기한 연장을 위해 '개입'을 요청하신 게 맞나요, 닥터 그린?"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차후 보수 지급에 감산이 있을 겁니다."

상대방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다른 말이 날아든다.

"전자공학 엔지니어 한 명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 있습니까?"

"없습니다."

상당히 삭막하고 딱딱해 보이는 대화지만 그가 하는 말 중에 잘못된 것이나 추가할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당사자들에겐 효율적이고 편리한 대화법이다.

보고를 마치고(그것을 보고라 부를 수 있다면)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구실은 제법 넓었지만 - 프로그래머에게는 과할 정도로 - 창문도 없는 곳에서 1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가끔씩 갑갑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지만, 개입을 신청해 여유기간이 좀 생겼으니 잠시 쉬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팀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으로 보내기로 했다. 말 좀 부드럽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다음 날, 숙소에서 연구실에 막 도착한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저... 이곳이 그린 박사님의 연구실이 맞습니까?"

그리 늙어 보이지 않는(아마 학위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남자가 문을 살짝 열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엔지니어링 박사라고 소개했다. 용건을 물으니,

"유지보수팀 관리팀장님의 조언 요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만..."

아 기억났다. 전자공학 엔지니어를 한 명 보내 준다고 했었지. 개입은 가급적 작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일 같은 경우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뭐 크게 어려울 일은 없지만 일단 난 프로그래머니까.

"컴퓨터는 저쪽에 있는 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설계도와 관련 자료는 바로 전송해 드리지요. 할 일은 개입을 통해 건네 드린 그놈을 잠시 동안 사용할 수 없도록 망가뜨려 주시면 됩니다."

"에... 고장 내는 거라니 평소에 해 보기 어려운 경험이네요. 얼마나 크게 하면 되나요?"

"1년 정도로 부탁합니다."

혼자 일하긴 하지만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식사 시간마다 만나 제법 친해진 사람들도 있기에 외로이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엔 시간도 없고 그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난 사람을 쉽게 사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런 이유로 최근 난 적당히 외로움을 타고 있었고(스스로 외롭다고 자각한 건 아니지만, 내가 하는 꼴을 보니 제법 외로웠나 보다), 이번에 온 엔지니어가 사람과 얘기하는 것에 솜씨가 있어, 며칠 지난 후 우린 내가 이곳에서의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는 친해질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테뉴어 심사까지 미뤄 두고 여기에 왔는데 이게 뭐냔 말이죠. 예정일까지 10개월가량 남았다기에 시스템 적응하고 몇개월동안 패치 작업해서 테스트하고, 못해도 한두 달은 남길 줄 알았는데, 시뮬레이션 한번 돌리는 데만 1주일이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고대의 프로그래머도 아니고, 저걸 기다리느니 시험채점을 조교대신 직접 하고 말지."

"그래도 실력에 자신이 꽤나 있으셨나 보네요. 그 안에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니... 그 시뮬레이션은 왜 그리 오래 걸린답니까? 이곳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설비 관련 쪽에서만 있다 보니 그런 줄은 몰랐네요."

"시뮬레이션용 서버 리셋하고, 주위환경 인스톨 하고 하다 보니 그렇게 걸리는 거죠. 시스템 구조상 테스트할 부분만 따로 떼서 해 볼 수도 없고, 서버도 테스트용이라 메인보다 좀 느리니 어쩔 수 없지요 뭐."

처음 이걸 알았을 때는 정말 기가 막혀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소스 짜고, 컴파일 버튼 누르고, 딸깍, 에러 보고 다시 수정, 다시 컴파일, 딸깍딸깍, 프로그램 한번 돌리고, 생각 한번 하고, 코코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코드 손좀 보고, 반복. 대학 들어가 프로그래밍이란 걸 처음 할 때부터 몸에 밴 습관.
그렇게만 되었다면야 진작 끝났을 것을, 생각 한번과 코코아 한 모금이 있어야 할 자리에 7번의 수면과 21끼의 식사가 들어가 버리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자신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 노교수님의 대학시절 얘기를 듣고 나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 생각난다. 마치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듯이 교수님께 들었던 그대로 들려 주셨었다. 계산할 거 적어 놓고, 긴 종이에 순서대로 구멍 뚫고, 집어넣고 찰칵찰칵찰칵찰칵, 새로 구멍 뚫린 놈 옮겨 적고, 정리해서 다시 구멍 뚫고, 다시 찰칵찰칵.

소스코드 잔뜩 뽑아서 인쇄하고, 순서 기다리며 오타 찾고, 집어넣고, 덜컹덜컹덜컹, 반나절 후 튀어나온 결과 확인하고. 반나절의 덜컹거림 후 튀어나온 결과가 <에러 : 글자 하나 빼먹었음> 일 때의 절규는 한 다리 건너 전해 듣는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건 굳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존경스러운데.

개입 계획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전선의 한 지점의 전기저항 값에 +값을 주기로. 저항이 +가 되는 순간 그 지점에서 발열이 일어나고, 그 주위 전선도 같이 따뜻해지고 액체헬륨은 끓어오르고. 헬륨 좀 새어 나오고 전선도 점검하고 교체하거나 해야 할 테고. 상수 하나 잠시 바꾸니 주위까지 우루루루. 계획이 나온 지 1주 후에 개입은 이루어졌고, 난 반년 가량의 시간을 추가로 얻었다.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호기심이라는 건 잘 알고 있고, 여기의 경영철학이 완전한 인간사회 제공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솔직히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관련 실험이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몇 번이고 이루어 진 데다 이런 거 없다고 사회가 비사실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야 그저 돈 받고 서버 좀 만져 보고(테스트용이 내가 있던 대학에 있던 놈보다 더 좋다니, 이런 거 만져 볼 기회는 잘 없다)해서 별로 불만은 없지만, 가끔씩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그네들이 우주의 비밀을 알든 말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괜스레 일만 더 늘리고 말이다.

아무튼, 그 뒤로 작업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할짓없는 테스트기간을 제외한다면), 예정일 한 달 전에 최종 테스트를 포함한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다. 최종 패치가 담긴 칩을 서버 관리부서에 넘기는 것도 끝났고(보안상의 문제로 프로그램 업데이트에 관한 부분은 네트워크로 접근할 수가 없다) 이제 짐 싸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1년가량밖에 되지 않지만, 그 시간 중 절반은 그저 흘려보냈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고된 일이었다. 대학에 돌아가기 전 휴가라도 떠나야 겠다. 이번엔 좀 시끌벅적한 곳으로. 동아시아 쪽은 어떠려나. 난 확실히 기업에서 일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돈 좀 덜 받고 연구실 좀 좁으면 뭐 어떤가. 애들 가르치고 내가 하고 싶은 연구 할 수 있는 교수직이 최고다.



2009년 6월 23일,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가동을 시작하였다. 몇 번의 고장으로 인해 본래 계획된 일정보다 조금 미뤄졌지만,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비밀을 풀어줄 실험 결과를 고대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실험으로 인해 생긴 블랙홀이 지구를 파괴할 거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확실히 지구는 블랙홀로부터는 완벽히 안전했다.
하지만 이 실험이 전체 시스템의 붕괴를 불러올 수 있는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은 지구의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또한 그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업데이트를 할 때 관리자의 실수로 마지막 결과물 대신 그 전의 버전이 적용된 것은 시스템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실험이 이루어지는 순간,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앞의 세계가 무너져 내려가며 자신의 몸과 마음도 같이 붕괴되는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수천 명의 과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결국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할 시간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