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SF대회
글 수 47
진수성찬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입을 다문 기분을 아는가?
“자, 아아~”
먹으라고 젓가락을 떠미는데도 입을 벌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쇠꼬챙이들 사이에 끼인 고기조각에 독이 묻은 건 아니다.
독 대신 발린 달콤짭짤한 소스 냄새가 식욕을 부추긴다.
그래도 내 경계심은 죽지 않았다.
“왜 안 먹는 거야? 고기 싫어해?”
‘그럴 리가 있냐? 이 여자야.’
고기라면 못 먹어서 환장하지, 싫어해서 안 먹는 게 아니다.
끼니마다 배급받는 급식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고기다.
이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상등품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태어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최상급 안심 스테이크에 소스까지 뿌려져 있다니.
그야말로 사치 중의 사치다.
그래도 눈앞의 고기는 받아먹을 수 없었다.
“아휴, 알았어. 나갈게, 나가면 되잖아?”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내던지는 여인.
그 바람에 바닥에 깔린 장판이 더럽혀졌다.
이래놓고는 나중에 다시 와서 박박 닦아내겠지.
자기 일거리를 만드는 꼴이 참 이상하다.
“에이씨, 어렵게 손에 넣었더니 이게 뭐람?”
그녀는 힐끔 날 바라보더니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간다.
배려 없는 빠른 움직임에 휘둘린 둥근 목걸이가 재깍 반응하지 못해 은빛 동선을 그린다.
-딸각
곧이어 잠금장치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터운 철문에 여러 개의 자물쇠까지.
어쩌면 저만큼 철저하게 납치할 준비를 했을까?
대체 언제부터 날 지켜봤을까?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을 거라 눈치 채긴커녕,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여기에 감금되어 있었다.
여인이 자리를 비운 뒤에야 난 걸귀처럼 그릇에 달라붙어 한 손 가득 고기를 움켜쥔다.
그대로 입에 쑤셔 넣고 씹는 순간 혀에 달라붙는 맛은 이곳에 온 이후, 몇 번이나 느끼는 것이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내 평소 처지대로라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이 맛은 남은 여생 동안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기를 먹는구나.’
내게 배급되는 저급한 고기와는 질이 달랐다.
어느 부위일지도 모를 딱딱한 고기반찬에 양념이라곤 소금간이 다였다.
이런 고기를 끼니마다 내놓는 걸 보면 이 여자의 집이 상당히 부유하다는 걸 안다.
‘그런 부자가 무슨 목적으로 날 납치한 걸까?’
난 잘난 거라곤 하나 없는 이 시대의 낙오자에 불과하다.
나 따윌 납치해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을까?
장기 밀매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거 치곤 날 너무 오래 살려두는군.’
처음엔 목이 쉬기 직전까지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건 날 감금한 여인뿐.
나중에 그녀에게 들은 말인데, 이 방은 몇 겹으로 방음처리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주 맘 놓고 교성을 질러대는지도 모를 노릇이지.’
덕분에 여인에게 당하는 첫 강간 때도, 동정을 떼인다는 충격 따윈 그녀의 강렬한 목소리에 눌려버렸던 거 같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걸까? 혹시 성관계를 목적으로 날 가둔 거야?’
매일 밤마다 요구, 아니, 강간하는 걸 보면 그런 의심도 생긴다.
하지만 어째서 나 같은 걸 감금하면서까지 관계를 가지려 할까?
그리 못생긴 얼굴도 아니고 이 정도의 돈이라면 대다수 남자들은 쉽게 넘어올 텐데…….
그렇다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억지로 참으려는 나와 비교할 때, 여인은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았다.
그건 분명 즐기고 있는 거다.
그나저나 이렇게 낯짝 두꺼운 여자도 드물지 않나 싶다.
칠십 생애를 살아오면서도, 여자가 남자를 덮친다는 건 직접 당해보기 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5세기 전이라면, 핵전쟁 이전의 문명이 발달한 시대였다면, 떠들썩한 화제가 되어, 신문에 올랐을 법한 일이다.
물론 머리말은 바뀌겠지.
-70대 노인, 여인에게 강간당하다
25세기인 현대와 과거인 20세기는 가치관이 다르다 한다.
당시의 70살은 갓난아기 수준의 노약자로 취급받았던 거 같다.
그 당시는 모두에게 장수 유전자 대신 노화 유전자가 있었다하니 내가 살기에 좋은 시기였을 터다.
“고작 70살짜리가 빌빌대는 거야?”
내 등록증을 멋대로 훑어보며 내뱉은 저 대사가 작금에는 별로 신통찮은 일이라니, 현대는 내게 너무 가혹하다.
비슷한 나이의 여자 하나 제압하지 못하는 쇠약한 몸뚱이가 원망스럽다.
날 이런 몸으로 낳아주신 부모님께도 죄송하지만 원망이 앞선다.
‘아버지, 어머니. 당신네가 이렇게 힘든 삶을 사셨음에도, 제게 같은 고난을 안겨주신 겁니까?’
단수마을 바깥의 사람들은 노화하지도 않고, 평균 수명이 200살을 넘는 경우도 잦다.
노화 유전자가 도태되고, 장수 유전자가 번성한 탓이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식이 50살이 될 때까지도 뒷바라지를 해주고, 자식들은 그에 힘입어 40살이 넘어갈 때까지 취업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내가 나고 자란 단수마을에선 얘기가 달랐다.
내가 20살이 됐을 때, 우리 부모님께선 50살이 넘어 한창 피부가 주름질 때였다.
단수마을 사람들은 80살까지 사는 일도 드무니까, 그건 결코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몸이 쇠약해진 부모님께선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셨고, 난 30이 안 된 나이에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일들은 단기적인 신문팔이나 구두닦이 정도에 불과했다.
월급 좋고, 대우 좋은 일자리는 보다 높은 실력을 요했으니까.
더욱이 게으른 자들은 도태되어 버리고 부지런한 자들만 남아버린 현대다.
그네들이 고작 20년 정도밖에 배우지 못한 풋내기를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우리 부모님 또한 나처럼 젊은 나이부터 3D 직종에 종사하셨겠지.
‘왜 저를 낳으신 겁니까?’
그런 불효막심한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내가 그분들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단수마을의 마지막 부부로써 자손을 남길 의무가 있었을 테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려는 그 위대한 의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삶이 너무 고달프기 때문에 그분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내겐 자식이 없다는 게 다행일지 모른다.
열등한 유전요소를 가진 사람을 원하는 여자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난 단수마을의 마지막 후예이며 인류의 마지막 노인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이 방은 내겐 너무 사치스럽다.
스프링이 들어간 듯한 푹신한 침대와 보송보송한 이부자리.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고, 저녁에는 때때로 술이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나 마셨지, 현대에선 장식품에 가까운 술이 나온다는 게 이상하긴 하다.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과거의 폐해라 하여 천대받는 음료가 아니던가?
현대의 사람들 중에 술을 마셔본 사람은 드물 테고, 술을 빚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거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대우는 꽤 좋다.
그 대가로 내가 당하는 일은 실험이나 노동도 아니며,
단지 여인으로부터의 소름끼치는 행패 정도에 불과하다.
수시로 방에 난입해 잔뜩 주름진 피부를 쓰다듬거나,
끼니마다 자기 손으로 내게 먹이를 먹이려고 한다거나,
밤마다 침대에 올라와 날 강간한다거나.
술이 나오는 날이면 그녀 또한 취해서 과격한 행위를 강요하기도 하지만 견딜 만은 하다.
딱히 실험을 당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여인은 내게 자유를 제외한 대부분의 편의를 제공해준다.
‘왜 이렇게 좋은 대접을 해주는가?’
생각해보면 이건 마치 애완동물, 아니 노예 같다.
하루 24시간을 여인에게 감시받고 있으니까.
방 천장에 달린 감시카메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 멋대로 방에 드나드는 걸 보면 직장에도 가지 않나 싶을 정도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이 납치를 할 리는 없겠지….’
그런 가운데도 편안함을 느끼고 만족을 찾는 나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느낀다.
무슨 목적에서 날 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의 편안함은 부정하기 어렵다.
당장 이 침대만 해도 그렇다.
지나치게 폭신한 나머지 눕기만 해도 눈이 스르르 감겨온다.
더구나 잔뜩 부른 배가 포만감을 불러일으킨다.
‘한숨 자야겠군.’
내 처지를 더 한탄하길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침대와 이불 사이에 파묻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정말 노예로 타락해버려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편했다….
70평생 바닥에서 자던 습관 탓일까?
침대에서 자다보면 누군가 옆에 올라오는 걸 민감하게 감지하게 된다.
모서리서부터 조금씩 다가오는 무게감.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이 귓불을 물어뜯길 기다릴 필요도 없다.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끈적거리는 손길을 피했다.
목표를 놓친 여인의 눈망울엔 아쉬운 한숨이 어린다.
“왜 이러는 거야?”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저 눈빛이 더없이 부담스럽다.
“왜 이러긴? 좋으니까 이러지.”
“거짓말 마…. 진짜 목적이 뭐야?”
‘그런 거짓말, 믿을 거 같아?’
“거짓말이 아냐.”
‘왜 그런 헛소릴 하지?’
이 시대의 도태자인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딜 가나 무시와 모멸감만이 날 반겼을 뿐.
지금까지 70년, 내 생애의 대다수를 그런 차가운 시선 속에 살아왔다.
그런 난,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난 병이 있거든.”
“뭐?”
어이가 없어 한 순간에 말문이 막힌다.
“좋아한다더니, 이번엔 병이라고? 그런 말로 날 혼란스럽게 하면 속을 거 같아? 대체 날 납치한 이유가 뭐야?”
기가 막혀하는 날 앞에 두고, 그녀는 슬쩍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어쩔 수 없었어.”
황당한 차원을 넘어 웃기기까지 하다.
“어쩔 수 없어? 그게 남을 납치해놓고 할 소리야?”
“응, 최소한 죽이진 않았잖아.”
“그럼 죽인 사람도 있단 의미로군.”
부정은커녕 활짝 웃어 보이는 여인에게 받은 이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나, 어릴 때부터 그랬어. 욕심이 나면 참을 수 없어. 나 자신도 말리지 못해.”
“그, 그건 그렇고 왜 내가 좋다는 거야?”
“지런토필리아라서.”
“뭐야? 그게.”
당신들과 달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나다.
저런 비상식적인 단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잖은가?
“노인애라고 하면 되겠네.”
노인애.
설마 노인을 사랑한단 말야?
이 시대에는 나를 마지막으로 멸종해버린 노인을?
“거짓말이야.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헛소릴 할 생각은 마.”
나도, 내 외양이 결코 매력적이란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축 늘어진 피부에 비실한 근육의 어디가 반할 구석이 있단 말인가?
“왜 헛소리라고 생각해?”
“노인은 허약하고 추레해. 보고도 모르겠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하다니, 정말 최악이다.
날 여기 가뒀단 사실보다도 그게 더 화난다.
“그래도 나, 노인이 너무 좋아.”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말이 어이없게 느껴진다.
“정말 모르는 거야? 이제 내 목숨은 20년도 안 남았다고.”
내 조상들의 평균 수명은 90을 넘기기도 힘들었으니까.
노화 유전자를 가진 종이 괜히 사라진 게 아니다.
벌써 3세기도 전부터 도태되기 시작했단 걸 이 여인은 모르는가?
“그래도 못 견디겠어. 희게 세어버린 머리며, 쪼글쪼글해진 피부, 접힌 주름살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야.”
잔뜩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노인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여인.
열정과 욕정에 사로잡힌 눈빛은 더 이상 그녀의 이성에 구애받지 않았다.
“흡!”
폐에서 산소를 훔쳐가려는 듯한 흡입력 있는 입맞춤이 대화를 가로막았다.
그녀의 목걸이가 가슴에 닿아 금속 특유의 차가움을 전한다.
그날 밤은 그 이상으로 여인에게 캐물을 수 없었다.
눈이 뜨였다.
일단 좌우 순서로 옆을 돌아본다.
침대에 누워있는 건 나 혼자.
그렇다면 아침이다.
여인은 아침이 되기 전에 방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방에 창문은 나있지 않기에 아침 해는 보지 못하지만, 벽에 걸린 시계는 지금이 7시란 걸 알려준다.
이제 곧 그녀가 아침상을 들여오겠지.
가끔 30분~1시간 정도 늦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7시 즈음에 아침을 차려주기 때문이다.
-달칵
아주 옛말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안다던가….
지금이 바로 그 꼴이다.
“좋은 아침. 오늘 아침엔 카레라이스를 만들어봤어.”
어울리지 않게 빙긋 미소 지으며 접시를 가져오는 여인.
그 얼굴에 어젯밤의 기억이 겹쳐 오른다.
-나, 노인이 좋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말도 안 되잖아?’
이 시대의 사회에서 노인은 이미 낙오된 종이다.
단수마을에 아직 노인들이 남아있던 때조차도, 기초교육반 또래의 학생들은 노인의 외양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
머리를 희게 염색한 일반인 정도로 인식한 학생도 있었을 정도니까.
“아~ 해봐. 먹여줄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먹기 좋을 정도로만 밥을 나르는 숟가락.
그걸 빤히 보면서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늘 역시 그 의미모를 호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지 말고~, 먹여주면 편하잖아.”
정말 질리지도 않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을 주는 거지?
“진짜, 이유가 뭐야? 왜 날 가둬놓고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무리 들어도 여운이 남지 않는 가벼운 대답.
“왜 나 같은 걸 덮치는 거야?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봐. 거기다가 난 고자가 아냐. 당신도 석녀가 아니라면 임신할 거라고.”
“그럼 낳으면 되지.”
역시 믿을 수 없다.
이 여자의 말은 너무 비상식적이다.
“그럴 리 없어. 그렇다고 해도 이건 잘못됐어. 백번 양보해서 좋아한다고 해도, 당신이 날 감금할 권리는 없어.”
여인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럼 도망갈 거잖아?”
“그럼, 당신이라면 도망치지 않겠어?”
여인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날 가둬두지 않았을 때의 행동이라고 가정해도, 날 놀린다는 생각이 들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평생토록 시달렸는데, 얼마 안 남은 목숨을 끝까지 갖고 놀겠단 건가?
“그만해!”
난 그녀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손끝에 걸린 딱딱한 감각이 내게 용기를 북돋는다.
“아!”
억눌렸던 울화는 내게 여인에 대한 공포도 떨쳐낼 만용을 선사했다.
그에 감사하며, 그녀의 얼굴이 떠나가라 고함쳤다.
“내가 잘못이라곤 부모를 고르지 못했단 것밖에 없어!”
“이거 놔!”
여인의 새파래진 안색에도 불구하고 말을 끊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나는 억눌려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누구보다 힘들게 살았어!”
“놔!”
비록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못한 결과를 얻는다 할지라도, 난 어떻게든 살아가려 발버둥쳤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남들이 안 먹는 것을 먹고,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살면서도, 모두에게 배척받으면서도 살아남으려 애썼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모르겠지.
나에게 베푸는 과도한 친절조차도, 당신들에게 있어선 한 때의 호기심에 불과할 테지.
“모두가 날 싫어해도, 난 어떻게든…, 그런데, 그런 날, 당신은….”
“놓으란 말야!”
여인은 날 거칠게 털어냈다.
-털썩
자기는 80살이라 소개하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와는 차이나는 젊음의 힘에 밀려 우스운 꼴로 침대 위에 나가떨어졌다.
-파삭
여인은 돌아섰다.
여느 때처럼 날 두고 잠시 사라지려고 한다.
그런 여인에게 뭐라 한 마디 더 쏘아붙이자 싶었다.
그래서 침대를 짚고 일어서려다 찔끔 놀라버린다.
손에 쥐인 묵직한 감촉에 주먹을 펴보니, 그 가운데 놓인 건 목걸이였다.
여인이 애지중지 걸고 다니던 그것.
타원형의 순은 목걸이는 앞뒤는 물론이며, 자잘한 구석구석, 심지어 목걸이 줄까지 화려한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다.
‘응?’
그 무늬를 구경하다 말고, 문득 목걸이가 갈라졌단 걸 깨달았다.
‘이건 갈라진 게 아냐.’
크기가 약간 크다 싶더라니, 액자형 목걸이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방금 전 실랑이의 충격인지 뚜껑이 열렸던 거다.
그걸 열어본 후에 비로소, 그녀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았다.
“당신도 도태자였군.”
그 한 마디에 방을 나서려던 여인의 동작이 굳어졌다.
“당신도 낙오자였어.”
이 부유한 재산은 그녀가 쌓은 게 아니다.
그녀의 부모 세대 혹은 그 윗세대가 저축한 걸 까먹고 있었겠지.
여인의 윗대는 엘리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다르다.
여인 혼자만을 놓고 본다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에 불과하다.
도가 지나칠 정도의 나태함과 집착.
내가 보아온 모습에 따르면 여인은 일주일 중 단 하루도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술 또한 거리낌 없이 마셔댄다.
그런 나태함은 근면함을 무기로 경쟁해온 사회 속에서 그녀를 낙오시킬 원인이 된다.
부모 세대가 아무리 뛰어난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면 무슨 소용일까?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진심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없었으리라.
아무도 결함 인자를 가진 여성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얻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
액자형 목걸이 속에 사진 대신 걸려있던 건 자잘한 칼자국들.
그건 걸려있던 사진을 난폭하게 긁어낸 상흔이다.
“그래서 날 고른 거였어.”
조금은 여인이 딱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이 있으니 알고 있다.
“그래도 나보단 낫네.”
적어도 그녀가 가진 단점은 나처럼 쉽게 드러나진 않으니까.
혼자 살아가는데 있어선 부족함이 없었을 거다.
다만 그녀는 혼자되는 외로움을 참아내지 못했던 거겠지.
이제사 왜 그녀가 나를 납치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딱히 노인을 좋아하는 게 아냐. 그저 당신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그렇다면 상당히 괜찮은 일일는지도 모른다.
여인에겐 배신하지 않을 애완동물이 필요했을 뿐이고,
마침 나 또한 이 우리가 내 집보다 아늑하단 걸 체감하던 차다.
우리에겐 타협점이 있다.
이 방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자진해서 여인의 입술을 빨았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면서.
“그렇다면 좋아. 남은 몇 년, 당신의 애완동물이 되어줄게.”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이로서 내가 속한 낙오종은 최소한 한 세대는 더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머잖아 여인은 내 아이를 밸 테니까.
노화 유전자를 가진 나와, 나태 유전자를 가진 그녀의 교잡이다.
결코 지금 세상에서 쉽게 살아갈 운명은 아닐 테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여인을 보건대, 그녀라면 어떤 결함이 있더라도 결코 수태한 아이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아이는 나처럼 낙오될 것이며, 혹은 도태될지도 모르지만,
난 단지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든 조상들과 같은 일을 저지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자, 아아~”
먹으라고 젓가락을 떠미는데도 입을 벌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쇠꼬챙이들 사이에 끼인 고기조각에 독이 묻은 건 아니다.
독 대신 발린 달콤짭짤한 소스 냄새가 식욕을 부추긴다.
그래도 내 경계심은 죽지 않았다.
“왜 안 먹는 거야? 고기 싫어해?”
‘그럴 리가 있냐? 이 여자야.’
고기라면 못 먹어서 환장하지, 싫어해서 안 먹는 게 아니다.
끼니마다 배급받는 급식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고기다.
이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상등품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태어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최상급 안심 스테이크에 소스까지 뿌려져 있다니.
그야말로 사치 중의 사치다.
그래도 눈앞의 고기는 받아먹을 수 없었다.
“아휴, 알았어. 나갈게, 나가면 되잖아?”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내던지는 여인.
그 바람에 바닥에 깔린 장판이 더럽혀졌다.
이래놓고는 나중에 다시 와서 박박 닦아내겠지.
자기 일거리를 만드는 꼴이 참 이상하다.
“에이씨, 어렵게 손에 넣었더니 이게 뭐람?”
그녀는 힐끔 날 바라보더니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간다.
배려 없는 빠른 움직임에 휘둘린 둥근 목걸이가 재깍 반응하지 못해 은빛 동선을 그린다.
-딸각
곧이어 잠금장치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터운 철문에 여러 개의 자물쇠까지.
어쩌면 저만큼 철저하게 납치할 준비를 했을까?
대체 언제부터 날 지켜봤을까?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을 거라 눈치 채긴커녕,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여기에 감금되어 있었다.
여인이 자리를 비운 뒤에야 난 걸귀처럼 그릇에 달라붙어 한 손 가득 고기를 움켜쥔다.
그대로 입에 쑤셔 넣고 씹는 순간 혀에 달라붙는 맛은 이곳에 온 이후, 몇 번이나 느끼는 것이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내 평소 처지대로라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이 맛은 남은 여생 동안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기를 먹는구나.’
내게 배급되는 저급한 고기와는 질이 달랐다.
어느 부위일지도 모를 딱딱한 고기반찬에 양념이라곤 소금간이 다였다.
이런 고기를 끼니마다 내놓는 걸 보면 이 여자의 집이 상당히 부유하다는 걸 안다.
‘그런 부자가 무슨 목적으로 날 납치한 걸까?’
난 잘난 거라곤 하나 없는 이 시대의 낙오자에 불과하다.
나 따윌 납치해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을까?
장기 밀매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거 치곤 날 너무 오래 살려두는군.’
처음엔 목이 쉬기 직전까지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건 날 감금한 여인뿐.
나중에 그녀에게 들은 말인데, 이 방은 몇 겹으로 방음처리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주 맘 놓고 교성을 질러대는지도 모를 노릇이지.’
덕분에 여인에게 당하는 첫 강간 때도, 동정을 떼인다는 충격 따윈 그녀의 강렬한 목소리에 눌려버렸던 거 같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걸까? 혹시 성관계를 목적으로 날 가둔 거야?’
매일 밤마다 요구, 아니, 강간하는 걸 보면 그런 의심도 생긴다.
하지만 어째서 나 같은 걸 감금하면서까지 관계를 가지려 할까?
그리 못생긴 얼굴도 아니고 이 정도의 돈이라면 대다수 남자들은 쉽게 넘어올 텐데…….
그렇다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억지로 참으려는 나와 비교할 때, 여인은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았다.
그건 분명 즐기고 있는 거다.
그나저나 이렇게 낯짝 두꺼운 여자도 드물지 않나 싶다.
칠십 생애를 살아오면서도, 여자가 남자를 덮친다는 건 직접 당해보기 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5세기 전이라면, 핵전쟁 이전의 문명이 발달한 시대였다면, 떠들썩한 화제가 되어, 신문에 올랐을 법한 일이다.
물론 머리말은 바뀌겠지.
-70대 노인, 여인에게 강간당하다
25세기인 현대와 과거인 20세기는 가치관이 다르다 한다.
당시의 70살은 갓난아기 수준의 노약자로 취급받았던 거 같다.
그 당시는 모두에게 장수 유전자 대신 노화 유전자가 있었다하니 내가 살기에 좋은 시기였을 터다.
“고작 70살짜리가 빌빌대는 거야?”
내 등록증을 멋대로 훑어보며 내뱉은 저 대사가 작금에는 별로 신통찮은 일이라니, 현대는 내게 너무 가혹하다.
비슷한 나이의 여자 하나 제압하지 못하는 쇠약한 몸뚱이가 원망스럽다.
날 이런 몸으로 낳아주신 부모님께도 죄송하지만 원망이 앞선다.
‘아버지, 어머니. 당신네가 이렇게 힘든 삶을 사셨음에도, 제게 같은 고난을 안겨주신 겁니까?’
단수마을 바깥의 사람들은 노화하지도 않고, 평균 수명이 200살을 넘는 경우도 잦다.
노화 유전자가 도태되고, 장수 유전자가 번성한 탓이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식이 50살이 될 때까지도 뒷바라지를 해주고, 자식들은 그에 힘입어 40살이 넘어갈 때까지 취업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내가 나고 자란 단수마을에선 얘기가 달랐다.
내가 20살이 됐을 때, 우리 부모님께선 50살이 넘어 한창 피부가 주름질 때였다.
단수마을 사람들은 80살까지 사는 일도 드무니까, 그건 결코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몸이 쇠약해진 부모님께선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셨고, 난 30이 안 된 나이에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일들은 단기적인 신문팔이나 구두닦이 정도에 불과했다.
월급 좋고, 대우 좋은 일자리는 보다 높은 실력을 요했으니까.
더욱이 게으른 자들은 도태되어 버리고 부지런한 자들만 남아버린 현대다.
그네들이 고작 20년 정도밖에 배우지 못한 풋내기를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우리 부모님 또한 나처럼 젊은 나이부터 3D 직종에 종사하셨겠지.
‘왜 저를 낳으신 겁니까?’
그런 불효막심한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내가 그분들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단수마을의 마지막 부부로써 자손을 남길 의무가 있었을 테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려는 그 위대한 의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삶이 너무 고달프기 때문에 그분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내겐 자식이 없다는 게 다행일지 모른다.
열등한 유전요소를 가진 사람을 원하는 여자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난 단수마을의 마지막 후예이며 인류의 마지막 노인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이 방은 내겐 너무 사치스럽다.
스프링이 들어간 듯한 푹신한 침대와 보송보송한 이부자리.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고, 저녁에는 때때로 술이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나 마셨지, 현대에선 장식품에 가까운 술이 나온다는 게 이상하긴 하다.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과거의 폐해라 하여 천대받는 음료가 아니던가?
현대의 사람들 중에 술을 마셔본 사람은 드물 테고, 술을 빚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거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대우는 꽤 좋다.
그 대가로 내가 당하는 일은 실험이나 노동도 아니며,
단지 여인으로부터의 소름끼치는 행패 정도에 불과하다.
수시로 방에 난입해 잔뜩 주름진 피부를 쓰다듬거나,
끼니마다 자기 손으로 내게 먹이를 먹이려고 한다거나,
밤마다 침대에 올라와 날 강간한다거나.
술이 나오는 날이면 그녀 또한 취해서 과격한 행위를 강요하기도 하지만 견딜 만은 하다.
딱히 실험을 당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여인은 내게 자유를 제외한 대부분의 편의를 제공해준다.
‘왜 이렇게 좋은 대접을 해주는가?’
생각해보면 이건 마치 애완동물, 아니 노예 같다.
하루 24시간을 여인에게 감시받고 있으니까.
방 천장에 달린 감시카메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 멋대로 방에 드나드는 걸 보면 직장에도 가지 않나 싶을 정도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이 납치를 할 리는 없겠지….’
그런 가운데도 편안함을 느끼고 만족을 찾는 나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느낀다.
무슨 목적에서 날 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의 편안함은 부정하기 어렵다.
당장 이 침대만 해도 그렇다.
지나치게 폭신한 나머지 눕기만 해도 눈이 스르르 감겨온다.
더구나 잔뜩 부른 배가 포만감을 불러일으킨다.
‘한숨 자야겠군.’
내 처지를 더 한탄하길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침대와 이불 사이에 파묻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정말 노예로 타락해버려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편했다….
70평생 바닥에서 자던 습관 탓일까?
침대에서 자다보면 누군가 옆에 올라오는 걸 민감하게 감지하게 된다.
모서리서부터 조금씩 다가오는 무게감.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이 귓불을 물어뜯길 기다릴 필요도 없다.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끈적거리는 손길을 피했다.
목표를 놓친 여인의 눈망울엔 아쉬운 한숨이 어린다.
“왜 이러는 거야?”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저 눈빛이 더없이 부담스럽다.
“왜 이러긴? 좋으니까 이러지.”
“거짓말 마…. 진짜 목적이 뭐야?”
‘그런 거짓말, 믿을 거 같아?’
“거짓말이 아냐.”
‘왜 그런 헛소릴 하지?’
이 시대의 도태자인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딜 가나 무시와 모멸감만이 날 반겼을 뿐.
지금까지 70년, 내 생애의 대다수를 그런 차가운 시선 속에 살아왔다.
그런 난,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난 병이 있거든.”
“뭐?”
어이가 없어 한 순간에 말문이 막힌다.
“좋아한다더니, 이번엔 병이라고? 그런 말로 날 혼란스럽게 하면 속을 거 같아? 대체 날 납치한 이유가 뭐야?”
기가 막혀하는 날 앞에 두고, 그녀는 슬쩍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어쩔 수 없었어.”
황당한 차원을 넘어 웃기기까지 하다.
“어쩔 수 없어? 그게 남을 납치해놓고 할 소리야?”
“응, 최소한 죽이진 않았잖아.”
“그럼 죽인 사람도 있단 의미로군.”
부정은커녕 활짝 웃어 보이는 여인에게 받은 이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나, 어릴 때부터 그랬어. 욕심이 나면 참을 수 없어. 나 자신도 말리지 못해.”
“그, 그건 그렇고 왜 내가 좋다는 거야?”
“지런토필리아라서.”
“뭐야? 그게.”
당신들과 달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나다.
저런 비상식적인 단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잖은가?
“노인애라고 하면 되겠네.”
노인애.
설마 노인을 사랑한단 말야?
이 시대에는 나를 마지막으로 멸종해버린 노인을?
“거짓말이야.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헛소릴 할 생각은 마.”
나도, 내 외양이 결코 매력적이란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축 늘어진 피부에 비실한 근육의 어디가 반할 구석이 있단 말인가?
“왜 헛소리라고 생각해?”
“노인은 허약하고 추레해. 보고도 모르겠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하다니, 정말 최악이다.
날 여기 가뒀단 사실보다도 그게 더 화난다.
“그래도 나, 노인이 너무 좋아.”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말이 어이없게 느껴진다.
“정말 모르는 거야? 이제 내 목숨은 20년도 안 남았다고.”
내 조상들의 평균 수명은 90을 넘기기도 힘들었으니까.
노화 유전자를 가진 종이 괜히 사라진 게 아니다.
벌써 3세기도 전부터 도태되기 시작했단 걸 이 여인은 모르는가?
“그래도 못 견디겠어. 희게 세어버린 머리며, 쪼글쪼글해진 피부, 접힌 주름살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야.”
잔뜩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노인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여인.
열정과 욕정에 사로잡힌 눈빛은 더 이상 그녀의 이성에 구애받지 않았다.
“흡!”
폐에서 산소를 훔쳐가려는 듯한 흡입력 있는 입맞춤이 대화를 가로막았다.
그녀의 목걸이가 가슴에 닿아 금속 특유의 차가움을 전한다.
그날 밤은 그 이상으로 여인에게 캐물을 수 없었다.
눈이 뜨였다.
일단 좌우 순서로 옆을 돌아본다.
침대에 누워있는 건 나 혼자.
그렇다면 아침이다.
여인은 아침이 되기 전에 방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방에 창문은 나있지 않기에 아침 해는 보지 못하지만, 벽에 걸린 시계는 지금이 7시란 걸 알려준다.
이제 곧 그녀가 아침상을 들여오겠지.
가끔 30분~1시간 정도 늦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7시 즈음에 아침을 차려주기 때문이다.
-달칵
아주 옛말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안다던가….
지금이 바로 그 꼴이다.
“좋은 아침. 오늘 아침엔 카레라이스를 만들어봤어.”
어울리지 않게 빙긋 미소 지으며 접시를 가져오는 여인.
그 얼굴에 어젯밤의 기억이 겹쳐 오른다.
-나, 노인이 좋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말도 안 되잖아?’
이 시대의 사회에서 노인은 이미 낙오된 종이다.
단수마을에 아직 노인들이 남아있던 때조차도, 기초교육반 또래의 학생들은 노인의 외양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
머리를 희게 염색한 일반인 정도로 인식한 학생도 있었을 정도니까.
“아~ 해봐. 먹여줄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먹기 좋을 정도로만 밥을 나르는 숟가락.
그걸 빤히 보면서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늘 역시 그 의미모를 호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지 말고~, 먹여주면 편하잖아.”
정말 질리지도 않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을 주는 거지?
“진짜, 이유가 뭐야? 왜 날 가둬놓고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무리 들어도 여운이 남지 않는 가벼운 대답.
“왜 나 같은 걸 덮치는 거야?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봐. 거기다가 난 고자가 아냐. 당신도 석녀가 아니라면 임신할 거라고.”
“그럼 낳으면 되지.”
역시 믿을 수 없다.
이 여자의 말은 너무 비상식적이다.
“그럴 리 없어. 그렇다고 해도 이건 잘못됐어. 백번 양보해서 좋아한다고 해도, 당신이 날 감금할 권리는 없어.”
여인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럼 도망갈 거잖아?”
“그럼, 당신이라면 도망치지 않겠어?”
여인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날 가둬두지 않았을 때의 행동이라고 가정해도, 날 놀린다는 생각이 들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평생토록 시달렸는데, 얼마 안 남은 목숨을 끝까지 갖고 놀겠단 건가?
“그만해!”
난 그녀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손끝에 걸린 딱딱한 감각이 내게 용기를 북돋는다.
“아!”
억눌렸던 울화는 내게 여인에 대한 공포도 떨쳐낼 만용을 선사했다.
그에 감사하며, 그녀의 얼굴이 떠나가라 고함쳤다.
“내가 잘못이라곤 부모를 고르지 못했단 것밖에 없어!”
“이거 놔!”
여인의 새파래진 안색에도 불구하고 말을 끊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나는 억눌려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누구보다 힘들게 살았어!”
“놔!”
비록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못한 결과를 얻는다 할지라도, 난 어떻게든 살아가려 발버둥쳤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남들이 안 먹는 것을 먹고,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살면서도, 모두에게 배척받으면서도 살아남으려 애썼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모르겠지.
나에게 베푸는 과도한 친절조차도, 당신들에게 있어선 한 때의 호기심에 불과할 테지.
“모두가 날 싫어해도, 난 어떻게든…, 그런데, 그런 날, 당신은….”
“놓으란 말야!”
여인은 날 거칠게 털어냈다.
-털썩
자기는 80살이라 소개하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와는 차이나는 젊음의 힘에 밀려 우스운 꼴로 침대 위에 나가떨어졌다.
-파삭
여인은 돌아섰다.
여느 때처럼 날 두고 잠시 사라지려고 한다.
그런 여인에게 뭐라 한 마디 더 쏘아붙이자 싶었다.
그래서 침대를 짚고 일어서려다 찔끔 놀라버린다.
손에 쥐인 묵직한 감촉에 주먹을 펴보니, 그 가운데 놓인 건 목걸이였다.
여인이 애지중지 걸고 다니던 그것.
타원형의 순은 목걸이는 앞뒤는 물론이며, 자잘한 구석구석, 심지어 목걸이 줄까지 화려한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다.
‘응?’
그 무늬를 구경하다 말고, 문득 목걸이가 갈라졌단 걸 깨달았다.
‘이건 갈라진 게 아냐.’
크기가 약간 크다 싶더라니, 액자형 목걸이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방금 전 실랑이의 충격인지 뚜껑이 열렸던 거다.
그걸 열어본 후에 비로소, 그녀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았다.
“당신도 도태자였군.”
그 한 마디에 방을 나서려던 여인의 동작이 굳어졌다.
“당신도 낙오자였어.”
이 부유한 재산은 그녀가 쌓은 게 아니다.
그녀의 부모 세대 혹은 그 윗세대가 저축한 걸 까먹고 있었겠지.
여인의 윗대는 엘리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다르다.
여인 혼자만을 놓고 본다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에 불과하다.
도가 지나칠 정도의 나태함과 집착.
내가 보아온 모습에 따르면 여인은 일주일 중 단 하루도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술 또한 거리낌 없이 마셔댄다.
그런 나태함은 근면함을 무기로 경쟁해온 사회 속에서 그녀를 낙오시킬 원인이 된다.
부모 세대가 아무리 뛰어난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면 무슨 소용일까?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진심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없었으리라.
아무도 결함 인자를 가진 여성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얻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
액자형 목걸이 속에 사진 대신 걸려있던 건 자잘한 칼자국들.
그건 걸려있던 사진을 난폭하게 긁어낸 상흔이다.
“그래서 날 고른 거였어.”
조금은 여인이 딱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이 있으니 알고 있다.
“그래도 나보단 낫네.”
적어도 그녀가 가진 단점은 나처럼 쉽게 드러나진 않으니까.
혼자 살아가는데 있어선 부족함이 없었을 거다.
다만 그녀는 혼자되는 외로움을 참아내지 못했던 거겠지.
이제사 왜 그녀가 나를 납치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딱히 노인을 좋아하는 게 아냐. 그저 당신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그렇다면 상당히 괜찮은 일일는지도 모른다.
여인에겐 배신하지 않을 애완동물이 필요했을 뿐이고,
마침 나 또한 이 우리가 내 집보다 아늑하단 걸 체감하던 차다.
우리에겐 타협점이 있다.
이 방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자진해서 여인의 입술을 빨았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면서.
“그렇다면 좋아. 남은 몇 년, 당신의 애완동물이 되어줄게.”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이로서 내가 속한 낙오종은 최소한 한 세대는 더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머잖아 여인은 내 아이를 밸 테니까.
노화 유전자를 가진 나와, 나태 유전자를 가진 그녀의 교잡이다.
결코 지금 세상에서 쉽게 살아갈 운명은 아닐 테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여인을 보건대, 그녀라면 어떤 결함이 있더라도 결코 수태한 아이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아이는 나처럼 낙오될 것이며, 혹은 도태될지도 모르지만,
난 단지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든 조상들과 같은 일을 저지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