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SF대회
글 수 47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영이를 꽉 끌어안았다.
"으흑, 흑, 으흐흐흑, 으하아앙, 오빠, 흑, 오빠아아. 으흑, 바보, 흑. 흑, 오빠, 흑흑, 으흐흑"
"미안해....미안해.....미안해 다영아......"
"오빠"
"응"
"자?"
"아니. 왜?"
"나 추워"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심한 일을 당했는데, 혹시 어디 아픈게 아닐까? 열이라도 나는 건?
나는 다영이의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다행히도 열은 없었다.
"...열은 없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고?"
"응, 그냥 추워"
다행히도 열은 없지만, 아무래도 몸이 좀 안좋아 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나 춥다니깐?"
어둠에 적응된 눈에,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밤하늘의 희미한 빛으로, 다영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할지 몰라서,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주저주저하다가.....
그대로 다영이 옆에 함께 누워서... 다영이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이게.....맞나?'
"뭐야? 바보, 변태, 저질, 짐승"
아무래도 틀린 것 같은데.
"흥, 바보, 아직도 춥잖아"
"쿡쿡"
"왜 웃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다영이를 내 품으로 더욱 더 꼬옥 안아주었다.
이렇게 작고
이렇게 여리고
이렇게 연약한 아이인데
나는 왠지 모르게 내 품이 젖어오는 것을 느끼며, 다영이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오빠"
"응?"
"고마워"
"아니야, 미안해"
"됐어"
"응"
"오빠"
"응?"
"잘자"
"응. 다영이도 잘 자"
"..."
"다영아"
"왜?"
"이제 안 추워?"
-퍽
윽, 괜히 물어봤나?
팔을 올려 내 얼굴을 퍽 때리고는, 다시 내 품으로 쏘옥 들어온다.
그리고는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든다.
미안해. 그런 심한 일을 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
잘 자렴. 내 동생 다영아.
그 뒤로 한달 후, 우리는 그 도시를 떠났다.
그 지긋지긋한 도시를 하루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영이가 그런 힘든 일을 당했고, 이랑이도 총에 맞아 다쳐서 둘이 제대로 회복될 때까지 더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놈들이 있던 곳에서 식량을 꽤 많이 발견해서, 충분히 시간을 두고 머무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식량은 우리 네명이서 4달 분량 정도. 물은 그 계곡에서 충당하면 될테고, 4달 후 라면 겨울도 이 거의 다 지나갈 참일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 괜찮을 것이다.
"아 진짜! 형! 이거 좀 바꿔줘요!"
"뭘?"
"내가 왜 제일 무거운걸 끌어야 하는데요? 나는 겨우 중 1 이고 키도 작은데"
"내가 제일 무거운 걸 끌면 내 두손이 자유롭지가 못하니까 위험하잖아"
"아무도 안보이잖아요! 좀 바꿔주면 안되요? 아니, 그러니까 잠깐씩 서로서로 바꿔서 끄는건 어때요? 네? 힘들어 죽겠어요"
"아니, 니가 위험하다고"
"...."
"...."
"왜 그래요 진짜? 내가 총에 눈길만 줘도 뭐라고 그러고. 요즘 다영이보다 형이 더 심한거 알아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는 사람이 믿어 지냐? 응? 우리들 말고 다른놈들은 다 짐승새끼에 괴물로 보이는데?"
"그 '우리' 에 나도 같이 포함되야죠! 나도 같이 싸웠잖아요!"
"지랄. 혼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던 놈이"
"그래도요!"
"그래도는 무슨 얼어죽을 그래도! 입 다물고 가기나 해!!"
"...씨발"
"뭐? 너 지금 뭐라그랬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씨발이라고 했어. 오빠"
"..."
"..."
도시를 떠난 지 6일째.
우리는 길가의 텅빈 민가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잠을 청했다.
내일이면 계곡에 도착할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날씨도 많이 쌀쌀해졌는데 아무리 물이 있다고는 해도 식량도 구하지 못할 그런 산골짜기에 남아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최대한 사람이 없기만을 바랄뿐.
만약에, 사람이 있으면?
죽인다. 우리가 죽기 전에. 죽인다. 그뿐이다.
이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살인자니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나를, 다영이가 흔들어 깨웠다.
"오빠, 일어나 봐"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게 잘못된 것 같아"
"응?"
"조용히 하고 들어봐"
나는 입을 다물고 귀에 내 신경을 집중했다.
조용한 밤 공기를 통해서 멀리서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온다.
-탕...탕탕...
"젠장, 총소리?"
"쉿, 더 들어봐"
-타타타타타탕...타탕.....
-드드드드드드드득.....
"이 소리는.....자동소총?"
"그래"
맙소사,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군인들이야"
다영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아니야"
"생각처럼 제대로 잘 안되네..."
"아니야. 괜찮을 꺼야"
"..."
나와 다영이는 일찍이, 지금의 이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군인들 이라고 생각한 바가 있다.
더 말할것도 없이 강력한 무기를 지닌 인간들이 수백명, 수천명씩 엄청난 결속력으로 묶여있는 군대.
그 강력한 무기들, 그 엄청난 인원들도 문제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것은 그 결속력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죽고 죽이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 집단이 서로 결속해서 다른 이들에게로 총구를 돌린다면?
사상 최강의 약탈집단이 탄생하게 된다. 유사이래로 많은 군대가 나라가 망하고 산적으로 변했지만, 이번엔 정말로 차원이 다르다. 저 군대라는 집단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게 된다.
이쯤되면, 제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모두 다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부대를 피해서 도망치는 것도 쉽지않다.
대한민국에 현역이 60만명이다. 60만. 60만이라는 숫자의 군인들이 대한민국 전역에 깔려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들을 어떻게 피해야 하지?
어디로?
피해서 어디로 가야하지?
만약에, 그런 집단들이 정말로 존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그런 집단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된 이상에야....차라리 오빠의 그 이상론이 맞았으면 좋겠어"
"응?"
"오빠가 매일 말하던 그 이상론말이야. 사람들이 다들 협력해서 집단으로 살아간다고 하던 그거"
"아, 그거?"
"저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이상적인 집단이라면 우리도 몸을 의탁할 수 있겠지. 강가라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고, 강력한 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군인이라는 집단이 있으니까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닐꺼야"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모든 문제는 저 군인들에게 달렸어. 저 군인들이 단순한 약탈집단이 아닌,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희망과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기를 바라는 수 밖에"
"...."
"물론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지. 그리고 가능성 이라는 말 나는 별로 안 좋아해. 우리는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확률게임에 걸고 장난을 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원래는 사람들을 무조건 피하려고 했는데... 우리의 목적지를 저들에게 이미 점거당한 이상 한번 부딪쳐 보는 수밖에는 없어"
"아니라면?"
"만약 저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그런 이들처럼 상대방을 죽이고 빼앗아서 사는 그런 살인자 집단이라면....."
"..."
"잡아먹히는 거지"
"...."
"...."
"어떻게 알 수 없을까?"
"글쎄... 판단을 내릴만한 근거가 너무 부족해. 지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원래 저곳에는 군인들 같은건 없어야 한다고. 대체 어디서 온 자들인지, 무슨 부대 소속인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거기다가 원래 저곳에 없어야 했던 것이니 만큼, 저기에 자급능력이 생길정도로 충분하게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 집단으로 있을거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어, 기껏 많아봐야 몇십명..."
"...."
"하아, 도저히 모르겠어. 저쪽에 대해서 조금만이라도 더 알 수 있다면..."
이쯤에서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거가 없다면, 근거를 찾아 오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와 지현이는 예정을 바꿔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다영이와 이랑이는 둘이 함께 그 집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다영이가 말해준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고 있었다.
"일단 총소리의 방향으로 볼 때 군인들이 있는 곳은 계곡 아래의 강가같아. 강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작으나마 마을도 하나 있다고 되어있고. 있다면 그곳이겠지"
"일단 계곡은 안돼. 저 아래 강가에 군인들이 있다면 계곡쪽도 별로 안심할 수는 없어. 물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높은 곳을 찾아. 저 강가랑 마을을 관찰할 수 있을만한.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안심하고 들어가도 될 만한 곳인지, 우리를 해질 자들인지 아닌지를 정찰하고 오는거야"
"그걸 확살하게 확인할 때 까지는 절대로 저들과 마주쳐서는 안돼.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없으니까. 최대한 저들과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저들을 관찰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곳...."
다영이는 지도에서 저들이 살고 있을만한 곳, 주요 이동경로등을 예상해서 가장 적합한 관찰포인트 세 군대와 그곳까지 도달하는 가장 안전한 코스를 각 포인트마다 3개씩 총 9개를 산출했다. 순전히 다영이의 짐작만으로 도출된 결과지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다영이의 짐작 덕분이었으니까.
"판단의 근거는.... 일단, 사람들의 숫자야"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많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집단이라면 믿을 수 있어.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서 일정숫자 이상이 되면 서로 남게 되는 노동력을 교환하게 되고 점점 자급능력이 생겨서, 결국은 서로 죽이고 빼앗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깐. 재난 이전과 같은, 기계들이 없었던 옛날 시대의 마을, 도시의 부활인 셈이지. 오빠가 그렇게 희망하던 그 이상론 말이야"
"일단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는것 자체가 최소한 서로를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런자들은 아니라는 뜻이잖아? 어차피 서로 못믿을 자들이라면 그렇게 많이 모여있지도 않을테고 서로를 못 믿어서 예전 우리 도시에서처럼 다들 10명 이하의 단위로 숨어있을 뿐이겠지"
"어중간하게 많은 것도 안돼. 최소한 1천명 이상. 그 이하는 안되. 그 정도는 되어야지 충분한 자급능력이 생길꺼야. 그리고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으면 내부 결속력이 강해지고, 그만큼 타지사람에 대해서 베타적이 되. 또, 그 정도 숫자는 되어야 우리 4명을 받아줘도 별로 큰 흔들림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겠지. 사람숫자가 너무 적으면 우리도 죽임당하고 빼앗길 뿐이라고. 잊지마. 언제나 명심해"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정찰에서는 별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지금 세번째 포인트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다영이가 골라준 길인 덕분인지 중간에 군인들과 마주치게 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첫번째를 포인트를 갔다 와서 집에 한번 들르고, 다시 두번째 포인트를 지난 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바로 세번째 포인트로 이동하는 중. 덕분에 우리가 집에서 다시 나온지 벌써 3일이나 되었다. 다영이와 이랑이는 잘 있을까....
우리는 결국 도착했다.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세번째 포인트. 마을이 한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지현이와 나는 그곳의 적당히 높은 곳에서 자리를 펴고, 도시에서 가져온 쌍안경으로 마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형, 뭐좀 보여요?"
"아니"
"...."
"...."
"10분 째인데요?"
"그래도 잘 좀 찾아봐 임마. 너 또 대충 막 찾고있는거 아니지?"
"네, 가르쳐 준 데로 기준점 몇개 잡고 청소하는 것처럼 그 기준점에 따라서 남김없이 훑어내려가고 있어요"
"그래,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잘 하고 있구나"
"...다영이가 가르쳐 준 거면서..."
"...."
-꽁!
"아야! 왜 때려요! 어디까지 찾고 있었는지 놓쳤잖아요!"
"벌이다. 다시 찾아봐. 니가 찾는건 아무래도 믿을수가 없단 말이야. 두번씩 샅샅이 찾아"
"씨잉"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형, 벌써 1시간 째에요"
"기다려 봐 좀. 정말 아무도 안보이냐?"
"네"
"...."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죠?"
"좀 더 찾아보자. 여기에서도 사람들을 못 발견하면 우리는 다시 다른곳으로 떠나야 해"
"...아무리 찾아봐도 호텔밖에는 없는데..."
"...호텔?"
"네. 그렇잖아요"
"너, 그쪽 보고있었냐?"
"형이 보랬잖아요"
-꽁!
"아야!"
"야! 너 왜 나랑 같은데를 보고 있는거야? 내가 저쪽 보고있으랬잖아!"
"형이 언제요! 형이 분명히 저쪽부터 저쪽까지 보랬잖아요!"
"내가 언제! 나는 분명히 저쪽이라고 했지!"
"아니에요! 저쪽 분명히 맞다니깐요!"
"으이구..... 그럼 저쪽은 아직 한번도 관찰 안한거네?"
"저는 형이 관찰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뭐 그렇게 된 거죠"
-꽁!
"됐다. 너는 찾아보지 마. 그냥 나 혼자 다 찾아볼련다"
"씨잉...."
"....."
"형"
"......"
"...형?"
"....."
"형, 형? 형!"
"....."
"왜 그래요! 뭐가 좀 보여요?"
나는 똑바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보인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가 기움에 따라, 어디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단체로 길을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저건 분명히 어디로 이사가는것은 아니다. 다들 음식이나 물을 잔뜩 싸짊어지고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간단한 도구들만 각자 들고 있었다. 전부다 남자들이랑, 그 중간중간에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이 몇명씩.... 길게 늘어선 줄이 아마 적게 잡아도 50명, 아니, 100명은 되는것 같다.
잘 둘러보니, 마을 곳곳에서 이런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해가 지게 되니까 다들 나오다니. 게다가 저들이 다들 향하는 곳은.....
"형! 저쪽좀 보세요!"
"저쪽? 어디?"
"저기 학교요!"
그곳에는 많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학교를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쓰는 듯,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제대로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대략 비율로 따져봤을때 학교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200명.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까지 합하면 몇명이나 될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주로 여자들이 있었다. 그럼, 그럼 지금 저 남자들이 나갔다가 들어오는건, 뭐랄까, 그러니까, 출퇴근?
"....찾았다...."
"찾았다고?"
"응, 못해도 1천명, 2천명 정도는 되보였어! 내가 직접 눈으로 샌 것만 400명이 넘어! 가려져서 안보이는 쪽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을꺼야!"
"그래? 숫자말고 다른건?"
"관찰 결과로는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때면 돌아오고, 그동안 여자들이 마을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어! 마치 출근 퇴근을 하는 것처럼! 정말 대단해! 제대로 된 체재가 있고 질서가 있어! 드디어 찾았어! 찾았다고!"
"다행이네"
"그래! 다행이야! 우리도 이제 제대로 살 수 있을꺼야! 다영이 니 생각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옷!"
나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다영이를 끌어안고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랑이도, 지현이도 다들 너무나도 기뻐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죽임당할, 사냥당할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집단에서 보호받으며 함께 살 수 있다. 너무나도 기뻣다.
"그러니까"
나도 입가에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하지만 순전히 운이 좋아서 그렇지. 만약 저런 안전한 집단이 아니었으면 큰일났을꺼야. 내 경솔한 판단으로 우리 모두가 위험해 질 뻔한 거라고"
"아니야! 결국은 옳았잖아! 이제 저기 들어가서 우리도 합류하면 되! 그리고..."
"그리고?"
"너도 이제는 그렇게 걱정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어"
다영이의 얼굴이 희미하게 동요한다.
"항상 우리 앞날을 걱정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나가야 할 길을 혼자서 다 결정하고....많이 힘들었지?"
"...."
"이제는 더이상 그런 걱정 안해도 되. 이제는 안심하고 푹 쉴수 있어"
".....피, 오빠가 너무 바보라서 내가 그렇게 고생한거 아냐"
"아하하하하하, 그래그래. 하하하하하하하"
다영이의 얼굴에도 그제서야 미소가 감돌았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우와 무서워라, 내가 군인들에게 말을 거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십수개의 총구가 우리 둘, 나와 지현이에게로 향한다.
주변에는 군인들 십수명과 남자들 수십명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접근하여 말을 건 것이다.
아무래도 남자들은 일을 하고 군인들이 그 주위를 경계하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자, 우리들은 모습을 드러냈고, 저들의 총구는 우리들에게로 겨누어졌다.
나와 다영이의 판단이 옳다면, 우리들은 이들에게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틀렸다면? 잡아먹히는 거지.
"뭐하는 분들이십니까?"
나와 지현이도 거의 반사적으로 군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기는 했지만, 군인들의 말투는 뜻밖에도 정중했다.
딱히 우리들을 크게 경계하는것 같지도 않고, 다들 행동에서 여유가 엿보인다. 굉장히 좋은데?
"아, 여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네, 다른 곳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용건은요?"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폐허 뿐이고, 먹을 것도 하나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살인자들 천지고, 그래서 저희도 여기서 같이 살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그러자, 그 군인들은 놀랍게도 총구를 우리들에게서 거두어버렸다.
"네, 그러시군요, 저희 마을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
나와 지현이는 서로를 바라보고 살짝 웃으며, 총을 거뒀다.
"어서오십시오 여러분. 제가 이곳의 최고책임자, 우리 부대의 대대장입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저기, 이런말 부터 하는건 실례지만, 여기에 식량은 충분히 있나요?"
"하하하하, 하긴 그것부터 걱정하시는게 당연하겠죠. 걱정 마십시요. 식수로 쓸 수 있는 강도 끼고있고, 식량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 대대장이라는 사람은 정말 사람 호탕하게 웃었고, 나는 왠지 바보가 된 듯한 느낌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저희같은 사람들이 오면 항상 대대장님께서 직접 면담을 하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사람과 사람의 믿음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지요"
믿음이라... 음, 도대체 얼마만에 들어보는 소리일까.
"이 곳에 사람은 얼마나 되는거죠? 대대라면...몇명이더라?"
"하하, 대대라고는 하지만 우리 부대는 그때 제대로 한번 작살나서 말입니다. 실제 부대원들은 200명이 채 안됩니다. 사실 이름만 대대장이죠"
"200명이요?"
"네, 그리고 그 난리 이후로 저희들은 반토막난 우리 대대를 간신히 추스려서, 화평군 을산리 쪽을 넘어...."
그래서 원래는 없어야 할 군인들이 이곳에 있는 거였군.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요"
"민간인들이죠. 이 근방에서 구조한 사람들, 오면서 합류한 사람들, 그리고 여러분들처럼 찾아오신 분들. 저희 부대원 165명이 총 2358 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2360명이 되겠군요"
"네, 그렇군요...."
"그런데 실례지만...."
이런 저런 잡담들도 좋지만, 슬슬 가장 중요한 말을 꺼내야 할 때다.
"며칠전에 이쪽으로 오다가 총성을 들었는데요. 그 총성은 뭐죠?"
"그건..."
대대장이라는 사람의 낮빛이 살짝 흐려진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살인자들을 소탕하는 작전이 며칠전에 있었습니다"
"살인자들이요?"
"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서로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가려는 이들이 굉장히 많아서 말입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갔다가 몇명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서 소탕했습니다. 뭐 사실 그 녀석들도 여기에 이렇게 많은 군인들이 있는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그렇구나....그랬구나....
자, 들을 만한 것들은 이제 다 들었고,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금의 이곳에는 다영이도 없고 나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언제나 다영이가 해 오던 일, 우리 모두의 목숨을, 미래를 결정하게 될 판단을 나 혼자서 해야하는 것이다.
새삼 이렇게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다영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오빠의 판단을 믿을께'
"저기! 대대장님!"
"네, 말씀하십시요"
"저기 사실은...일행이 있습니다. 저와 이 꼬맹이 2명만 말고도요"
대대장의 얼굴에 함뿍 미소가 떠오른다.
"이제야 말해주시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들어와서도 안심하기는 커녕 계속 긴장을 놓지 않고 이것저것 살펴보고 여러가지를 물어보시길래요. 뭐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하하,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시대가 시대 아닙니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은 몇명이나 되죠?"
"여자 2명입니다"
"저런, 아가씨들을 모시고 계셨다니, 그래서 그렇게 안심을 못하셨던 거군요"
"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네..."
"그럼 그걸 말해주셨다는 건, 저희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어줘서 감사하다니,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인데....
그 대대장은, 미소가 가득 찬 그 밝은 얼굴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희 마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 손을 굳게 맞잡았다.
우리들은 드디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쁜와중에도 대대장님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들을 직접 환영해주었다.
우리들은 우리가 가져왔던 식량과 무기들을 모두 저쪽에 넘겼다.
이 곳에서는 다같이 공동 생산, 공동배분을 하는 공산주의 체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처럼 실패할 염려는 없다. 다들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굶게 될 것이다. 식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몇달을 버틸만한 수준이고.
그렇다고 몇달만 살고 죽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 우리의 세상은 노동의욕이 어쩌구 인간의 이기심이 저쩌구 할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처지인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넘긴 물품 목록들은 모조리 기록되어 문서화되어 이 마을의 행정부서에 넘겨졌다.
나중에 제대로 세상이 재건될 때를 대비하여, 이 마을에 각자 공헌한 정도를 적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식량을 넘길때는 약간 손이 떨리기도 했지만, 총을 넘길때는 정말로 속이 다 후련했다.
이제는 이런 무기를 잡을 필요가 없다.
다른 이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손을 떠닌 무기들은 이제 무기고로 가게 되고, 필요할 때에 꺼내져서 군인들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비상사태가 아닌 한, 이제는 이 손에 무기를 잡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기분이다.
보통 게임이나 영화라면 이쯤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며 '해피엔딩 해피엔딩,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라는 멘트가 나와도 좋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수능 끝난다고 공부는 평생 안하고 대학가서 놀기만 할 수 있을까?
무조건 그렇게 행복하게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로 끝날수 있을까?
우리는,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잠을 따로 자야한다구요?"
총을 넘기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총을 넘기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다영이랑 이랑이와 떨어져서 자야한다고? 어떻게? 대체 뭘 믿고? 왜?
"물론이지요. 남자숙소와 여자숙소가 따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거기 여성분들은 저쪽 학교 별관 여자숙소에서, 남성분들은 학교 본관 남자숙소에서 자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믿고요!"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자고, 저희들이 불침번을 서면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 강ㄱ...."
바로 옆에 다영이가 있는데 그런 말을 쓸 수는 없었다.
"...나쁜놈들이 혹시나 있으면요!"
말해놓고 보니 굉장히 쪽팔리고 유치한 말이 되었다.
"그러니까 남자분들 여자분들을 따로 주무시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굉장히 바보같은 말이기도 했다.
"하아....오빠도 참"
윽, 다영이 너까지.
"저희도 다 생각을 해서 이렇게 한 겁니다. 처음에는 아시는 분들끼리 각자 따로 잠을 자게 해드렸지만, 그렇게 하고 보니 경계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군인들이 다 커버를 하지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는사람들끼리 모여서 다 함께 한 장소에서 모여서 자도록 해 드렸더니 이번에는..."
그러고는 다영이와 이랑이를 힐끗 보고는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쁜놈들이 그렇게 들끓어서 말입니다. 저희도 생각을, 아니, 생각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을 다 해보고 나서 내린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결론입니다. 저희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됐어 오빠, 우리가 여기에 우리를 맡기기로 한 이상, 이곳의 규칙에 따를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런게 오빠가 원하던 거잖아?"
사실 그렇다. 그렇게 나온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됐으니까, 오빠도 가서 이제 자. 피곤하다"
"으응..."
"우리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
"잘자 오빠"
"응, 다영이도 잘자"
"잘자 현수야, 지현아"
"응, 이랑이도..."
"응, 누나도 잘 자요"
나는 그렇게 잠자리에 누웠다.
사람들이 교실 안에 모여서 각자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고, 군인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며 불침번을 서고 있다.
저쪽에는 지금쯤 여자들이 모여서 이렇게 자고있고, 그 바깥을 군인들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나마 안심이다. 비록 다영이와 이랑이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도시에서의 그 잠 못 이루던 밤에 비하면 훨씬 안전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다. 총을 잡지 않아도, 다영이와 이랑이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도, 안심하고, 믿고, 우리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그런 체재와 질서가 잡혀있는 강력한 집단.
하지만....하지만....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안심하고 잘 수 있겠냐고오!!"
-덜컹!
"무슨일입니까!"
"형 왜 그래요?!"
"아 뭐요?"
"잠 좀 잡시다 좀!"
"...네..."
결국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날이 밝았다. 나는 졸립다고 투정하는 지현이 녀석의 손목을 그러잡고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이랑이와 다영이를 향해 달려갔다.
"하아...하아...하아..."
"응? 현수야?"
"응, 하아, 이랑아, 다영아, 하아, 하아.....밤에는 잘잤어?"
"응, 오빠도 잘 잤어?"
"응, 후우... 그런데...이랑아? 너 얼굴이 왜 그래?"
"아니....하암....어제 한숨도 못잤거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 목소리가 저절로 싸늘해진다.
"한숨도......한숨도 못 잤다고?"
"응, 아줌마들하고 언니들한테 둘러쌓여서 바깥은 좀 어떠냐, 어디서 왔냐, 뭐하고 살았냐 등등, 한참 수다떠느라고 말이지. 군인아저씨들이 제발 좀 주무셔달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말이야. 헤헷, 수학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
"...."
이 경우는 내가 바보가 된 게 맞지?
"근데 오빠야말로 얼굴이 왜 그래? 잠 못잤어?"
"...."
"일이요?"
"네, 이 마을에 들어오신 이상, 각자에게 맞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이제 우리도 이 집단 안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일단 모두가 힘든 시기이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식량을 구해야만 하니까.
"이전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저는....대학생...."
"무슨 학과셨죠?"
"사회복지과...인데요..."
소대장이라는 사람이 난처한듯 웃음을 짓는것이 보였다. 이런, 아무래도 막노동 확정인가보다. 이 마을은 행정부서라고 해봤자 대대장 휘하 몇명 간부들과 문서보관실이 전부니까.
"저기, 그럼 이랑이는 어떻게 되는거죠?"
이랑이는 튄 총알에 맞은 어께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 응급의료를 익힌 다영이가 그동안 이랑이를 열심히 돌봤지만, 제대로 된 도구도 없는 데다가, 어께라는것은 온갖 뼈와 관절과 근육이 복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라서 완벽한 치료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몇가지 큰 응급치료를 하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 뿐. 비록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터가 남았고, 무엇보다 오른쪽 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일을 하기에는 많이 힘들것이다.
"괜찮습니다. 몸이 아프시거나 불편하신 분들, 어린이와 노인분들을 위한 간편한 소일거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하하, 네, 거꾸로 말하자면 사실 불편하신 분들 손까지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다치신분들도 짐이 안되고 무언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다들 만족해주시니 다행이지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한때는 쓸모없다고 혹시 버리거나 하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역시 바보같은 고민이었나 보다.
"그럼 여기 현수씨는 외부노동 인원으로, 지현군은 내부용역으로, 아,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을테니까 걱정 말렴. 그리고 여기 이랑씨와 다영양은...."
"저는 의학을 익혔어요. 의사 한사람의 몫은 충분히 될 거에요"
세상이 망하던 그 첫날, 다영이는 식량과 물 뿐만 아니라 집에서 자신이 읽던 책들을 한무더기 같이 가져갔었고, 그 중에 분명히 의료에 관한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아파오는 영어로 쓰여있어 잘 모르겠지만 빨간 십자가에 온갖 인체그림이 그려져있는 것을 보니까 맞겠지. 이랑이의 치료를 맡은것도, 그 동안 그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의 건강을 챙겨준 것도 다영이었다. 수술같은건 못할지 몰라도 응급처치만은 왠만한 초짜인턴 뺨칠 실력일 것이다. 다영이의 진료실력은 내가, 우리가 언제든지 보증해 줄 수 있다. 겉모습만 보고 깔보다가는 놀라게 될걸?
"어허 다영양, 이건 의사놀이가 아니에요"
"도구만 충분히 갖춰져 있다면 간단한 응급수술 까지도 해볼 수 있어요"
"...."
...나까지도 놀랐다. 수술까지 할 수 있다고?
"정말로? 아가씨가?"
"네, 정 의심가면 직접 보여드릴께요"
"그 애는 천재거든요"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렇게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으흑, 흑, 으흐흐흑, 으하아앙, 오빠, 흑, 오빠아아. 으흑, 바보, 흑. 흑, 오빠, 흑흑, 으흐흑"
"미안해....미안해.....미안해 다영아......"
"오빠"
"응"
"자?"
"아니. 왜?"
"나 추워"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심한 일을 당했는데, 혹시 어디 아픈게 아닐까? 열이라도 나는 건?
나는 다영이의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다행히도 열은 없었다.
"...열은 없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고?"
"응, 그냥 추워"
다행히도 열은 없지만, 아무래도 몸이 좀 안좋아 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나 춥다니깐?"
어둠에 적응된 눈에,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밤하늘의 희미한 빛으로, 다영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할지 몰라서,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주저주저하다가.....
그대로 다영이 옆에 함께 누워서... 다영이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이게.....맞나?'
"뭐야? 바보, 변태, 저질, 짐승"
아무래도 틀린 것 같은데.
"흥, 바보, 아직도 춥잖아"
"쿡쿡"
"왜 웃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다영이를 내 품으로 더욱 더 꼬옥 안아주었다.
이렇게 작고
이렇게 여리고
이렇게 연약한 아이인데
나는 왠지 모르게 내 품이 젖어오는 것을 느끼며, 다영이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오빠"
"응?"
"고마워"
"아니야, 미안해"
"됐어"
"응"
"오빠"
"응?"
"잘자"
"응. 다영이도 잘 자"
"..."
"다영아"
"왜?"
"이제 안 추워?"
-퍽
윽, 괜히 물어봤나?
팔을 올려 내 얼굴을 퍽 때리고는, 다시 내 품으로 쏘옥 들어온다.
그리고는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든다.
미안해. 그런 심한 일을 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
잘 자렴. 내 동생 다영아.
그 뒤로 한달 후, 우리는 그 도시를 떠났다.
그 지긋지긋한 도시를 하루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영이가 그런 힘든 일을 당했고, 이랑이도 총에 맞아 다쳐서 둘이 제대로 회복될 때까지 더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놈들이 있던 곳에서 식량을 꽤 많이 발견해서, 충분히 시간을 두고 머무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식량은 우리 네명이서 4달 분량 정도. 물은 그 계곡에서 충당하면 될테고, 4달 후 라면 겨울도 이 거의 다 지나갈 참일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 괜찮을 것이다.
"아 진짜! 형! 이거 좀 바꿔줘요!"
"뭘?"
"내가 왜 제일 무거운걸 끌어야 하는데요? 나는 겨우 중 1 이고 키도 작은데"
"내가 제일 무거운 걸 끌면 내 두손이 자유롭지가 못하니까 위험하잖아"
"아무도 안보이잖아요! 좀 바꿔주면 안되요? 아니, 그러니까 잠깐씩 서로서로 바꿔서 끄는건 어때요? 네? 힘들어 죽겠어요"
"아니, 니가 위험하다고"
"...."
"...."
"왜 그래요 진짜? 내가 총에 눈길만 줘도 뭐라고 그러고. 요즘 다영이보다 형이 더 심한거 알아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는 사람이 믿어 지냐? 응? 우리들 말고 다른놈들은 다 짐승새끼에 괴물로 보이는데?"
"그 '우리' 에 나도 같이 포함되야죠! 나도 같이 싸웠잖아요!"
"지랄. 혼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던 놈이"
"그래도요!"
"그래도는 무슨 얼어죽을 그래도! 입 다물고 가기나 해!!"
"...씨발"
"뭐? 너 지금 뭐라그랬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씨발이라고 했어. 오빠"
"..."
"..."
도시를 떠난 지 6일째.
우리는 길가의 텅빈 민가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잠을 청했다.
내일이면 계곡에 도착할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날씨도 많이 쌀쌀해졌는데 아무리 물이 있다고는 해도 식량도 구하지 못할 그런 산골짜기에 남아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최대한 사람이 없기만을 바랄뿐.
만약에, 사람이 있으면?
죽인다. 우리가 죽기 전에. 죽인다. 그뿐이다.
이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살인자니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나를, 다영이가 흔들어 깨웠다.
"오빠, 일어나 봐"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게 잘못된 것 같아"
"응?"
"조용히 하고 들어봐"
나는 입을 다물고 귀에 내 신경을 집중했다.
조용한 밤 공기를 통해서 멀리서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온다.
-탕...탕탕...
"젠장, 총소리?"
"쉿, 더 들어봐"
-타타타타타탕...타탕.....
-드드드드드드드득.....
"이 소리는.....자동소총?"
"그래"
맙소사,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군인들이야"
다영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아니야"
"생각처럼 제대로 잘 안되네..."
"아니야. 괜찮을 꺼야"
"..."
나와 다영이는 일찍이, 지금의 이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군인들 이라고 생각한 바가 있다.
더 말할것도 없이 강력한 무기를 지닌 인간들이 수백명, 수천명씩 엄청난 결속력으로 묶여있는 군대.
그 강력한 무기들, 그 엄청난 인원들도 문제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것은 그 결속력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죽고 죽이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 집단이 서로 결속해서 다른 이들에게로 총구를 돌린다면?
사상 최강의 약탈집단이 탄생하게 된다. 유사이래로 많은 군대가 나라가 망하고 산적으로 변했지만, 이번엔 정말로 차원이 다르다. 저 군대라는 집단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게 된다.
이쯤되면, 제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모두 다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부대를 피해서 도망치는 것도 쉽지않다.
대한민국에 현역이 60만명이다. 60만. 60만이라는 숫자의 군인들이 대한민국 전역에 깔려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들을 어떻게 피해야 하지?
어디로?
피해서 어디로 가야하지?
만약에, 그런 집단들이 정말로 존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그런 집단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된 이상에야....차라리 오빠의 그 이상론이 맞았으면 좋겠어"
"응?"
"오빠가 매일 말하던 그 이상론말이야. 사람들이 다들 협력해서 집단으로 살아간다고 하던 그거"
"아, 그거?"
"저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이상적인 집단이라면 우리도 몸을 의탁할 수 있겠지. 강가라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고, 강력한 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군인이라는 집단이 있으니까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닐꺼야"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모든 문제는 저 군인들에게 달렸어. 저 군인들이 단순한 약탈집단이 아닌,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희망과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기를 바라는 수 밖에"
"...."
"물론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지. 그리고 가능성 이라는 말 나는 별로 안 좋아해. 우리는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확률게임에 걸고 장난을 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원래는 사람들을 무조건 피하려고 했는데... 우리의 목적지를 저들에게 이미 점거당한 이상 한번 부딪쳐 보는 수밖에는 없어"
"아니라면?"
"만약 저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그런 이들처럼 상대방을 죽이고 빼앗아서 사는 그런 살인자 집단이라면....."
"..."
"잡아먹히는 거지"
"...."
"...."
"어떻게 알 수 없을까?"
"글쎄... 판단을 내릴만한 근거가 너무 부족해. 지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원래 저곳에는 군인들 같은건 없어야 한다고. 대체 어디서 온 자들인지, 무슨 부대 소속인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거기다가 원래 저곳에 없어야 했던 것이니 만큼, 저기에 자급능력이 생길정도로 충분하게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 집단으로 있을거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어, 기껏 많아봐야 몇십명..."
"...."
"하아, 도저히 모르겠어. 저쪽에 대해서 조금만이라도 더 알 수 있다면..."
이쯤에서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거가 없다면, 근거를 찾아 오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와 지현이는 예정을 바꿔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다영이와 이랑이는 둘이 함께 그 집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다영이가 말해준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고 있었다.
"일단 총소리의 방향으로 볼 때 군인들이 있는 곳은 계곡 아래의 강가같아. 강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작으나마 마을도 하나 있다고 되어있고. 있다면 그곳이겠지"
"일단 계곡은 안돼. 저 아래 강가에 군인들이 있다면 계곡쪽도 별로 안심할 수는 없어. 물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높은 곳을 찾아. 저 강가랑 마을을 관찰할 수 있을만한.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안심하고 들어가도 될 만한 곳인지, 우리를 해질 자들인지 아닌지를 정찰하고 오는거야"
"그걸 확살하게 확인할 때 까지는 절대로 저들과 마주쳐서는 안돼.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없으니까. 최대한 저들과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저들을 관찰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곳...."
다영이는 지도에서 저들이 살고 있을만한 곳, 주요 이동경로등을 예상해서 가장 적합한 관찰포인트 세 군대와 그곳까지 도달하는 가장 안전한 코스를 각 포인트마다 3개씩 총 9개를 산출했다. 순전히 다영이의 짐작만으로 도출된 결과지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다영이의 짐작 덕분이었으니까.
"판단의 근거는.... 일단, 사람들의 숫자야"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많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집단이라면 믿을 수 있어.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서 일정숫자 이상이 되면 서로 남게 되는 노동력을 교환하게 되고 점점 자급능력이 생겨서, 결국은 서로 죽이고 빼앗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깐. 재난 이전과 같은, 기계들이 없었던 옛날 시대의 마을, 도시의 부활인 셈이지. 오빠가 그렇게 희망하던 그 이상론 말이야"
"일단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는것 자체가 최소한 서로를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런자들은 아니라는 뜻이잖아? 어차피 서로 못믿을 자들이라면 그렇게 많이 모여있지도 않을테고 서로를 못 믿어서 예전 우리 도시에서처럼 다들 10명 이하의 단위로 숨어있을 뿐이겠지"
"어중간하게 많은 것도 안돼. 최소한 1천명 이상. 그 이하는 안되. 그 정도는 되어야지 충분한 자급능력이 생길꺼야. 그리고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으면 내부 결속력이 강해지고, 그만큼 타지사람에 대해서 베타적이 되. 또, 그 정도 숫자는 되어야 우리 4명을 받아줘도 별로 큰 흔들림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겠지. 사람숫자가 너무 적으면 우리도 죽임당하고 빼앗길 뿐이라고. 잊지마. 언제나 명심해"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정찰에서는 별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지금 세번째 포인트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다영이가 골라준 길인 덕분인지 중간에 군인들과 마주치게 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첫번째를 포인트를 갔다 와서 집에 한번 들르고, 다시 두번째 포인트를 지난 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바로 세번째 포인트로 이동하는 중. 덕분에 우리가 집에서 다시 나온지 벌써 3일이나 되었다. 다영이와 이랑이는 잘 있을까....
우리는 결국 도착했다.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세번째 포인트. 마을이 한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지현이와 나는 그곳의 적당히 높은 곳에서 자리를 펴고, 도시에서 가져온 쌍안경으로 마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형, 뭐좀 보여요?"
"아니"
"...."
"...."
"10분 째인데요?"
"그래도 잘 좀 찾아봐 임마. 너 또 대충 막 찾고있는거 아니지?"
"네, 가르쳐 준 데로 기준점 몇개 잡고 청소하는 것처럼 그 기준점에 따라서 남김없이 훑어내려가고 있어요"
"그래,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잘 하고 있구나"
"...다영이가 가르쳐 준 거면서..."
"...."
-꽁!
"아야! 왜 때려요! 어디까지 찾고 있었는지 놓쳤잖아요!"
"벌이다. 다시 찾아봐. 니가 찾는건 아무래도 믿을수가 없단 말이야. 두번씩 샅샅이 찾아"
"씨잉"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형, 벌써 1시간 째에요"
"기다려 봐 좀. 정말 아무도 안보이냐?"
"네"
"...."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죠?"
"좀 더 찾아보자. 여기에서도 사람들을 못 발견하면 우리는 다시 다른곳으로 떠나야 해"
"...아무리 찾아봐도 호텔밖에는 없는데..."
"...호텔?"
"네. 그렇잖아요"
"너, 그쪽 보고있었냐?"
"형이 보랬잖아요"
-꽁!
"아야!"
"야! 너 왜 나랑 같은데를 보고 있는거야? 내가 저쪽 보고있으랬잖아!"
"형이 언제요! 형이 분명히 저쪽부터 저쪽까지 보랬잖아요!"
"내가 언제! 나는 분명히 저쪽이라고 했지!"
"아니에요! 저쪽 분명히 맞다니깐요!"
"으이구..... 그럼 저쪽은 아직 한번도 관찰 안한거네?"
"저는 형이 관찰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뭐 그렇게 된 거죠"
-꽁!
"됐다. 너는 찾아보지 마. 그냥 나 혼자 다 찾아볼련다"
"씨잉...."
"....."
"형"
"......"
"...형?"
"....."
"형, 형? 형!"
"....."
"왜 그래요! 뭐가 좀 보여요?"
나는 똑바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보인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가 기움에 따라, 어디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단체로 길을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저건 분명히 어디로 이사가는것은 아니다. 다들 음식이나 물을 잔뜩 싸짊어지고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간단한 도구들만 각자 들고 있었다. 전부다 남자들이랑, 그 중간중간에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이 몇명씩.... 길게 늘어선 줄이 아마 적게 잡아도 50명, 아니, 100명은 되는것 같다.
잘 둘러보니, 마을 곳곳에서 이런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해가 지게 되니까 다들 나오다니. 게다가 저들이 다들 향하는 곳은.....
"형! 저쪽좀 보세요!"
"저쪽? 어디?"
"저기 학교요!"
그곳에는 많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학교를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쓰는 듯,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제대로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대략 비율로 따져봤을때 학교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200명.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까지 합하면 몇명이나 될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주로 여자들이 있었다. 그럼, 그럼 지금 저 남자들이 나갔다가 들어오는건, 뭐랄까, 그러니까, 출퇴근?
"....찾았다...."
"찾았다고?"
"응, 못해도 1천명, 2천명 정도는 되보였어! 내가 직접 눈으로 샌 것만 400명이 넘어! 가려져서 안보이는 쪽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을꺼야!"
"그래? 숫자말고 다른건?"
"관찰 결과로는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때면 돌아오고, 그동안 여자들이 마을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어! 마치 출근 퇴근을 하는 것처럼! 정말 대단해! 제대로 된 체재가 있고 질서가 있어! 드디어 찾았어! 찾았다고!"
"다행이네"
"그래! 다행이야! 우리도 이제 제대로 살 수 있을꺼야! 다영이 니 생각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옷!"
나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다영이를 끌어안고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랑이도, 지현이도 다들 너무나도 기뻐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죽임당할, 사냥당할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집단에서 보호받으며 함께 살 수 있다. 너무나도 기뻣다.
"그러니까"
나도 입가에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하지만 순전히 운이 좋아서 그렇지. 만약 저런 안전한 집단이 아니었으면 큰일났을꺼야. 내 경솔한 판단으로 우리 모두가 위험해 질 뻔한 거라고"
"아니야! 결국은 옳았잖아! 이제 저기 들어가서 우리도 합류하면 되! 그리고..."
"그리고?"
"너도 이제는 그렇게 걱정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어"
다영이의 얼굴이 희미하게 동요한다.
"항상 우리 앞날을 걱정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나가야 할 길을 혼자서 다 결정하고....많이 힘들었지?"
"...."
"이제는 더이상 그런 걱정 안해도 되. 이제는 안심하고 푹 쉴수 있어"
".....피, 오빠가 너무 바보라서 내가 그렇게 고생한거 아냐"
"아하하하하하, 그래그래. 하하하하하하하"
다영이의 얼굴에도 그제서야 미소가 감돌았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우와 무서워라, 내가 군인들에게 말을 거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십수개의 총구가 우리 둘, 나와 지현이에게로 향한다.
주변에는 군인들 십수명과 남자들 수십명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접근하여 말을 건 것이다.
아무래도 남자들은 일을 하고 군인들이 그 주위를 경계하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자, 우리들은 모습을 드러냈고, 저들의 총구는 우리들에게로 겨누어졌다.
나와 다영이의 판단이 옳다면, 우리들은 이들에게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틀렸다면? 잡아먹히는 거지.
"뭐하는 분들이십니까?"
나와 지현이도 거의 반사적으로 군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기는 했지만, 군인들의 말투는 뜻밖에도 정중했다.
딱히 우리들을 크게 경계하는것 같지도 않고, 다들 행동에서 여유가 엿보인다. 굉장히 좋은데?
"아, 여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네, 다른 곳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용건은요?"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폐허 뿐이고, 먹을 것도 하나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살인자들 천지고, 그래서 저희도 여기서 같이 살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그러자, 그 군인들은 놀랍게도 총구를 우리들에게서 거두어버렸다.
"네, 그러시군요, 저희 마을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
나와 지현이는 서로를 바라보고 살짝 웃으며, 총을 거뒀다.
"어서오십시오 여러분. 제가 이곳의 최고책임자, 우리 부대의 대대장입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저기, 이런말 부터 하는건 실례지만, 여기에 식량은 충분히 있나요?"
"하하하하, 하긴 그것부터 걱정하시는게 당연하겠죠. 걱정 마십시요. 식수로 쓸 수 있는 강도 끼고있고, 식량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 대대장이라는 사람은 정말 사람 호탕하게 웃었고, 나는 왠지 바보가 된 듯한 느낌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저희같은 사람들이 오면 항상 대대장님께서 직접 면담을 하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사람과 사람의 믿음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지요"
믿음이라... 음, 도대체 얼마만에 들어보는 소리일까.
"이 곳에 사람은 얼마나 되는거죠? 대대라면...몇명이더라?"
"하하, 대대라고는 하지만 우리 부대는 그때 제대로 한번 작살나서 말입니다. 실제 부대원들은 200명이 채 안됩니다. 사실 이름만 대대장이죠"
"200명이요?"
"네, 그리고 그 난리 이후로 저희들은 반토막난 우리 대대를 간신히 추스려서, 화평군 을산리 쪽을 넘어...."
그래서 원래는 없어야 할 군인들이 이곳에 있는 거였군.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요"
"민간인들이죠. 이 근방에서 구조한 사람들, 오면서 합류한 사람들, 그리고 여러분들처럼 찾아오신 분들. 저희 부대원 165명이 총 2358 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2360명이 되겠군요"
"네, 그렇군요...."
"그런데 실례지만...."
이런 저런 잡담들도 좋지만, 슬슬 가장 중요한 말을 꺼내야 할 때다.
"며칠전에 이쪽으로 오다가 총성을 들었는데요. 그 총성은 뭐죠?"
"그건..."
대대장이라는 사람의 낮빛이 살짝 흐려진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살인자들을 소탕하는 작전이 며칠전에 있었습니다"
"살인자들이요?"
"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서로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가려는 이들이 굉장히 많아서 말입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갔다가 몇명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서 소탕했습니다. 뭐 사실 그 녀석들도 여기에 이렇게 많은 군인들이 있는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그렇구나....그랬구나....
자, 들을 만한 것들은 이제 다 들었고,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금의 이곳에는 다영이도 없고 나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언제나 다영이가 해 오던 일, 우리 모두의 목숨을, 미래를 결정하게 될 판단을 나 혼자서 해야하는 것이다.
새삼 이렇게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다영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오빠의 판단을 믿을께'
"저기! 대대장님!"
"네, 말씀하십시요"
"저기 사실은...일행이 있습니다. 저와 이 꼬맹이 2명만 말고도요"
대대장의 얼굴에 함뿍 미소가 떠오른다.
"이제야 말해주시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들어와서도 안심하기는 커녕 계속 긴장을 놓지 않고 이것저것 살펴보고 여러가지를 물어보시길래요. 뭐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하하,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시대가 시대 아닙니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은 몇명이나 되죠?"
"여자 2명입니다"
"저런, 아가씨들을 모시고 계셨다니, 그래서 그렇게 안심을 못하셨던 거군요"
"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네..."
"그럼 그걸 말해주셨다는 건, 저희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어줘서 감사하다니,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인데....
그 대대장은, 미소가 가득 찬 그 밝은 얼굴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희 마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 손을 굳게 맞잡았다.
우리들은 드디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쁜와중에도 대대장님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들을 직접 환영해주었다.
우리들은 우리가 가져왔던 식량과 무기들을 모두 저쪽에 넘겼다.
이 곳에서는 다같이 공동 생산, 공동배분을 하는 공산주의 체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처럼 실패할 염려는 없다. 다들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굶게 될 것이다. 식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몇달을 버틸만한 수준이고.
그렇다고 몇달만 살고 죽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 우리의 세상은 노동의욕이 어쩌구 인간의 이기심이 저쩌구 할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처지인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넘긴 물품 목록들은 모조리 기록되어 문서화되어 이 마을의 행정부서에 넘겨졌다.
나중에 제대로 세상이 재건될 때를 대비하여, 이 마을에 각자 공헌한 정도를 적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식량을 넘길때는 약간 손이 떨리기도 했지만, 총을 넘길때는 정말로 속이 다 후련했다.
이제는 이런 무기를 잡을 필요가 없다.
다른 이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손을 떠닌 무기들은 이제 무기고로 가게 되고, 필요할 때에 꺼내져서 군인들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비상사태가 아닌 한, 이제는 이 손에 무기를 잡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기분이다.
보통 게임이나 영화라면 이쯤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며 '해피엔딩 해피엔딩,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라는 멘트가 나와도 좋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수능 끝난다고 공부는 평생 안하고 대학가서 놀기만 할 수 있을까?
무조건 그렇게 행복하게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로 끝날수 있을까?
우리는,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잠을 따로 자야한다구요?"
총을 넘기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총을 넘기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다영이랑 이랑이와 떨어져서 자야한다고? 어떻게? 대체 뭘 믿고? 왜?
"물론이지요. 남자숙소와 여자숙소가 따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거기 여성분들은 저쪽 학교 별관 여자숙소에서, 남성분들은 학교 본관 남자숙소에서 자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믿고요!"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자고, 저희들이 불침번을 서면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 강ㄱ...."
바로 옆에 다영이가 있는데 그런 말을 쓸 수는 없었다.
"...나쁜놈들이 혹시나 있으면요!"
말해놓고 보니 굉장히 쪽팔리고 유치한 말이 되었다.
"그러니까 남자분들 여자분들을 따로 주무시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굉장히 바보같은 말이기도 했다.
"하아....오빠도 참"
윽, 다영이 너까지.
"저희도 다 생각을 해서 이렇게 한 겁니다. 처음에는 아시는 분들끼리 각자 따로 잠을 자게 해드렸지만, 그렇게 하고 보니 경계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군인들이 다 커버를 하지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는사람들끼리 모여서 다 함께 한 장소에서 모여서 자도록 해 드렸더니 이번에는..."
그러고는 다영이와 이랑이를 힐끗 보고는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쁜놈들이 그렇게 들끓어서 말입니다. 저희도 생각을, 아니, 생각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을 다 해보고 나서 내린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결론입니다. 저희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됐어 오빠, 우리가 여기에 우리를 맡기기로 한 이상, 이곳의 규칙에 따를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런게 오빠가 원하던 거잖아?"
사실 그렇다. 그렇게 나온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됐으니까, 오빠도 가서 이제 자. 피곤하다"
"으응..."
"우리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
"잘자 오빠"
"응, 다영이도 잘자"
"잘자 현수야, 지현아"
"응, 이랑이도..."
"응, 누나도 잘 자요"
나는 그렇게 잠자리에 누웠다.
사람들이 교실 안에 모여서 각자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고, 군인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며 불침번을 서고 있다.
저쪽에는 지금쯤 여자들이 모여서 이렇게 자고있고, 그 바깥을 군인들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나마 안심이다. 비록 다영이와 이랑이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도시에서의 그 잠 못 이루던 밤에 비하면 훨씬 안전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다. 총을 잡지 않아도, 다영이와 이랑이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도, 안심하고, 믿고, 우리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그런 체재와 질서가 잡혀있는 강력한 집단.
하지만....하지만....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안심하고 잘 수 있겠냐고오!!"
-덜컹!
"무슨일입니까!"
"형 왜 그래요?!"
"아 뭐요?"
"잠 좀 잡시다 좀!"
"...네..."
결국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날이 밝았다. 나는 졸립다고 투정하는 지현이 녀석의 손목을 그러잡고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이랑이와 다영이를 향해 달려갔다.
"하아...하아...하아..."
"응? 현수야?"
"응, 하아, 이랑아, 다영아, 하아, 하아.....밤에는 잘잤어?"
"응, 오빠도 잘 잤어?"
"응, 후우... 그런데...이랑아? 너 얼굴이 왜 그래?"
"아니....하암....어제 한숨도 못잤거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 목소리가 저절로 싸늘해진다.
"한숨도......한숨도 못 잤다고?"
"응, 아줌마들하고 언니들한테 둘러쌓여서 바깥은 좀 어떠냐, 어디서 왔냐, 뭐하고 살았냐 등등, 한참 수다떠느라고 말이지. 군인아저씨들이 제발 좀 주무셔달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말이야. 헤헷, 수학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
"...."
이 경우는 내가 바보가 된 게 맞지?
"근데 오빠야말로 얼굴이 왜 그래? 잠 못잤어?"
"...."
"일이요?"
"네, 이 마을에 들어오신 이상, 각자에게 맞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이제 우리도 이 집단 안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일단 모두가 힘든 시기이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식량을 구해야만 하니까.
"이전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저는....대학생...."
"무슨 학과셨죠?"
"사회복지과...인데요..."
소대장이라는 사람이 난처한듯 웃음을 짓는것이 보였다. 이런, 아무래도 막노동 확정인가보다. 이 마을은 행정부서라고 해봤자 대대장 휘하 몇명 간부들과 문서보관실이 전부니까.
"저기, 그럼 이랑이는 어떻게 되는거죠?"
이랑이는 튄 총알에 맞은 어께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 응급의료를 익힌 다영이가 그동안 이랑이를 열심히 돌봤지만, 제대로 된 도구도 없는 데다가, 어께라는것은 온갖 뼈와 관절과 근육이 복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라서 완벽한 치료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몇가지 큰 응급치료를 하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 뿐. 비록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터가 남았고, 무엇보다 오른쪽 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일을 하기에는 많이 힘들것이다.
"괜찮습니다. 몸이 아프시거나 불편하신 분들, 어린이와 노인분들을 위한 간편한 소일거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하하, 네, 거꾸로 말하자면 사실 불편하신 분들 손까지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다치신분들도 짐이 안되고 무언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다들 만족해주시니 다행이지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한때는 쓸모없다고 혹시 버리거나 하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역시 바보같은 고민이었나 보다.
"그럼 여기 현수씨는 외부노동 인원으로, 지현군은 내부용역으로, 아,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을테니까 걱정 말렴. 그리고 여기 이랑씨와 다영양은...."
"저는 의학을 익혔어요. 의사 한사람의 몫은 충분히 될 거에요"
세상이 망하던 그 첫날, 다영이는 식량과 물 뿐만 아니라 집에서 자신이 읽던 책들을 한무더기 같이 가져갔었고, 그 중에 분명히 의료에 관한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아파오는 영어로 쓰여있어 잘 모르겠지만 빨간 십자가에 온갖 인체그림이 그려져있는 것을 보니까 맞겠지. 이랑이의 치료를 맡은것도, 그 동안 그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의 건강을 챙겨준 것도 다영이었다. 수술같은건 못할지 몰라도 응급처치만은 왠만한 초짜인턴 뺨칠 실력일 것이다. 다영이의 진료실력은 내가, 우리가 언제든지 보증해 줄 수 있다. 겉모습만 보고 깔보다가는 놀라게 될걸?
"어허 다영양, 이건 의사놀이가 아니에요"
"도구만 충분히 갖춰져 있다면 간단한 응급수술 까지도 해볼 수 있어요"
"...."
...나까지도 놀랐다. 수술까지 할 수 있다고?
"정말로? 아가씨가?"
"네, 정 의심가면 직접 보여드릴께요"
"그 애는 천재거든요"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렇게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