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영아- 저녁먹어라-”
“....”
“다영아!”
“알았어”

아무튼 이 녀석은 부르면 한번에 오는 때가 없다니깐.  다영이는 내가 애타게 부른지 한참 후에야 느릿느릿 식탁으로 온다.

“이 녀석아, 오빠가 밥먹으라고 부르면 제때제때 좀 와라”
“별로 배 안고픈데”  
“그래도 식사는 제때제때 해야지 좀.  그리고 밥 먹을때는 책 보지 말랬지?”
“재밌는걸”

녀석은 영어도 일어도 아닌 뭔가 이상한 꼬부랑 글씨체로 쓰여진, 둔기로 써도 될것같은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책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아니, 보여줘도 뭐가 재밌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

“바보니까”
“누가 바보야”
“오빠가”
“흥, 니가 지나치게 똑똑한 것 뿐이라고. 나는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된단 말이지.”
“바보가”
“뭐야?”
“바보면서”
“......”
  
소개하지.  내 이름은 이현수.  소년가장이라는 것만 빼면 평범한 20살.
그리고 이 녀석은 내 골치덩이 동생 이다영.  13살이고 대학생.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인종이라고 한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친척도 없어서, 나 혼자 이 녀석을 맡아 키우고 있다.
다행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이랑 보험금이 좀 많아서, 소년가장이라고 해서 딱히 가난하게 생활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엄연히 집도 있고, 그 외에 재산도 일을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을만큼 넉넉하다.

딱히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는데, 그게 이 말썽꾸러기 동생이라는 녀석이......

“너 또 학교가서도 그렇게 구는거 아니지? 나한테 그러는거야 뭐라고 안하겠는데, 니가 머리 좀 좋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무시하고 바보취급하고....”
“이랑 언니는?”
“으, 응?”
“고백은 언제 할꺼야?”
“갑자기 그 녀석 이야기가 왜 나와!”
“안할꺼야?”
“너 자꾸 그렇게 말 돌릴래? 오빠가 바보냐?‘
“오늘도 집 앞에 마트 놔두고 굳이 언니네까지 가서 장 봐왔잖아”
“......”
“다 봤어”



박 이랑.  우리아파트 약간 떨어진 곳의 주택가에서 살고있는, 내 어릴적부터의 친구, 말하자면 소꿉친구.  예전 사고가 났을 때 이랑이의 부모님도 같이 돌아가셔서 부모님이 안계시다. 현재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슈퍼를 경영하면서 대학 검정고시 준비중.  이래저래 야무지게 살아가는 녀석.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내가 좋아하게 되어버린 녀석.

“바보라니깐”
“야”


나는 결국 그렇게 실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이 녀석은 못당하겠다니깐

-오늘 밤, 태양이 역사상 유래없이 큰 활동을 보일것으로 예상되면서, 세계 천문학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NASA 에서는 이번 활동으로 자기폭풍이 위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것을 우려해....

한가로운 하루의, 한가로운 저녁의, 한가로운 밥상의...

“저기 이랑아, 내가 딱히 너 때문에 그런건 아닌데, 공짜영화표가 생겨서.  착각하지 마. 무슨 만화도 아니고, 그러니까, 아, 응,  저번에 헌혈을 하니까 영화표를 주더라고, 그래서....”

“우왓! 너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너 검정고시 준비한다고 맨날 콕 쳐박혀서 공부만 하느라고 영화도 한번 못봤지 이 바보야? 아, 딱히 널 위해서 이런게 아니라 그냥 니가 불쌍해서.........”

“너어어어어어!!!!”


-우당탕 퉁탕 와르르르르


....한가롭지 못한 대화.

TV 에서는 그런 한가로운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그렇게 그날 하루도 한가롭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김준섭 씨는 눈을 찌르는 햇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켠다.
켜지지 않는다.

“어라? 이거 왜 이러지? 형광등이 나갔나?”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주위를 살핀다.

바깥은? 굉장히 환하다.

시간은? 2시 15분......뭐?

“우왓! 지각이다!!!”

불이 안들어오고 자시고는 중요한게 아니다.  일단 그는 재빨리 화장실로 쳐들어갔다.

“응? 이건 왜 또 이래?”

화장실에도 불이 켜지질 않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졸졸졸 새어나오다가 만다.

어쩔 수 없이 있는 물로 대충 고양이세수만 하고 나온다.

“아움 여보 무슨일...어머나 시간좀 봐!”

아내가 뒤늦게 일어나서는 호들갑을 떤다.

“여보? 집안이 왜이런 거야?”

“아 몰라 아무래도 정전된 것 같은데”

급한대로 옷을 대충 챙겨입고 출근준비를 한다.

“꺄악! 여보! 냉장고 어떻게 해!”

돌아보니, 아내가 연 냉장고에서 녹은 물들이 줄줄줄 흘러나오고 있는것이 보인다.
냉장고도 완전히 뻗은 모양이다.

“여보 미안! 급하니까 일단 회사부터 갔다 와서 해줄께!”
“여보옷!”







김준섭씨는 지금 매우 황당해하고 있는 참이었다.

시속 120km 로 밟아줄 각오를 하고 차에 올라탔건만 차는 시동조차 걸리질 않고, 일단 회사에 전화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핸드폰을 들었는데 핸드폰도 전원이 안들어온다.
아무래도 날씨도 쌀쌀하고 해가 떠있는 모양새를 보니 낮 2시는 아니고 그냥 아침, 오전인 듯 하다.
시간을 살펴보려고 손목시계를 보니, 아까와 똑같은 시간이었다.
당황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목시계의 초침도 멎어있었다.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일단 차가 고장났으니 얼결에 아파트단지 바로 앞에 있는 카센터로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여보세요-  아무도 안계세요?”

카센터 안에도 아무도 없다.

“흐음 이거 참 뭐 이런일이 다 있담....”

“실례합니다-”

준섭씨의 중얼거림 사이로 왠 여자애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음? 너 옆집사는애 맞지?”

“아, 네, 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보려고....”

“나 여기 주인 아니다.  여기 주인 오늘 출근 안한 것 같은데?”

“그래요? 흐음....”

이라고 하면서 그 여자애는 카센터를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한다.

저 여자애 이름이..... 이.... 뭐였더라?

한창 구석에 놓여있는 공장용 대형 할로겐등, 백열전구 등등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다.

“동네가 죄다 정전이 된 것 같은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번에는 허락도 없이 멋대로 선반위에 놓인 드릴을 들고는 스위치를 당겨본다.
위험하다고 말리려 했지만, 어차피 작동되지도 않았다.

“저기, 이 드릴은 베터리로 움직이는 건가요?”

“응? 응.  코드가 없는걸 보니 베터리를 충전해서 쓰는 그런 드릴같은데.... 그러고보니 그렇네, 정전이 됬어도 이건 움직여야 할 텐데?”

“그렇네요....”

그러고는 그 꼬마는 그냥 휙 하니 돌아서서는 종종걸음으로 아파트로 뛰어가버린다.

김준섭씨는 그런 그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한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아야야야야야! 다영아! 뭐하는거야?”

“잔말말고 따라와”

아니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다영이의 맹렬한 닦달에 대충 옷부터 끼워입은 나는 그대로 다영이에게 한쪽 귀를 잡힌채 질질 끌려가고있다. 이게 뭐야 대체.

“아! 알았으니까 이것부터 놔! 어디로 가는건데 대체?”

“따라와보면 알아”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여긴....이랑이네 집?”

“그래”

그러고서는 현관문을 잡아당기고는, 잠겨있다는걸 확인하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현관문을 열어버리고는 당당하게 들어간다.

....어째서 니가 이랑이네 집 열쇠를 가지고 있는건데?
“일어나!”
“우웅....다영아? 안녕?”
“빨리 옷부터 갈아입어”
“그게 무슨....꺄악?!”
“야! 다영이 너 대체 무슨짓...”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퍽

다짜고짜 쳐들어간 다영이를 뒤따라 들어간 나는 다영이에 의해 옷이 반쯤 벗겨지는 중이었던 이랑이가 비명과 함께 집어던진 물건들에 얻어맞고는 얌전히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젠장.

조금을 기다리자 이번에는 다영이가 이랑이의 손을 잡고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야, 왜 너네 친오빠님은 귀고 이랑이는 손인데?

“이랑아! 또 어디가는거야 이번에는!”
“움직이면서 설명해줄게.  일단은 빨리 움직여야 해”
“뭘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거야? 이유라도 좀 말해봐 일단!”

다영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간단하게 말했다.

“이 세상은 곧 멸망할 거야”


전혀 간단한 소리가 아니었다.







첫째 날

시장과 그 아래 시의원들이 전 시내의 정전 및 고장 사태에 대한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경찰인력을 총동원해서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민심의 동요를 막았다.

...라는 이상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장도, 시의원들도, 경찰청장도, 경찰들도, 모두들 자기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것에 의아해하고, 냉장고가 모조리 나가버린 것에 분통을 터뜨리고, 차가 모두 움직이지 않아 출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황당해하고,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화기를 들다가 간단한 전화통화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서로 나름대로 모여서 (물론 기껏해야 아파트 단지 정도의 범위로) 대책을 강구하다가, 그날따라 굉장히 일찍 찾아오는 어둠에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라고 서로 위안하며 각각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 2시쯤에, 거대한 태양활동이 있을 예정이었어.  태양이 커다란 활동을 하게 되면 태양에서 강렬한 자기폭풍이 일어나서 지구에까지 영향을 미쳐.  대기중의 전리층을 교란시켜 통신이 안된다거나, 혹은 극지대 같은곳의 전자장비가 일시적으로 고장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오빠가 그것도 모르는 바보인줄 알아?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엔 그게 좀 컷던 모양이야”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정전이 된 거라고? 으음, 그렇구나”






둘째 날

여전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대책을 세워본다.  딱히 좋은 대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도구들을 고쳐보고, 연락을 시도해 본다.  모조리 실패한다. 도구들을 고칠 부품들을 구하러 뛰어다녔다.  다 고장나있다.  각 가정에는 점점 마실 물이 떨어져간다








“으음 그렇구나 라고 끝날 문제가 아니야.  지금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전자장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고장났어. 모조리 다.  민감한 컴퓨터 같은 것 만이라면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전기가 통째로 끊기고, 핸드폰이 고장나고, 자동차도 움직이지 않고, 심지어는 벽시계의 작은 건전지, 백열전구의 필라멘트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다 끊어지고 고장났어”

“음, 그런데?”

“그런데 라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니까.  바보오빠라도 알아듣게 쉽게 설명을 해주자면”

“자꾸 바보바보 할래?”

“예상보다 강력한, 아니, 지금까지 유래가 없던 강한 태양활동으로 일어난 무지막지 거대한 자기폭풍이 들이닥쳐 모든 전자기기들을 망가뜨린거야. 초강력 EMP 충격파가 몰아친거지”



    










셋째 날

삼일째,  아직도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에 당혹해 한다.  사람들은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다.
단지 한 마을, 한 도시의 잠깐뿐인 정전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들 설마, 설마 라고 자문하며 내일이야말로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올 것이라고 애써 서로를 달랜다.

여전히 물과 식량은 점점 없어져간다.






“뭐가 문제야? 고치면 되잖아?”

“어떻게?”

“응? 너 바보바보 하더니 너까지 바보가 되버린거야? 어떻게 고치냐니?”

“자, 형광등이 고장났어, 어떻게 고칠꺼지?”

“갈아끼우면 되지”

“다른 형광등도 다 깨졌어”

“다?”

“응, 온 세상에 있는 형광등이 모조리 다”

“그럼... 공장에서 새로 만들면?”

“공장도 고장났어.  공장에 있는 기계들도 모조리 다”

“그럼 공장을 고쳐야....”

“그 공장을 고칠 다른 부품들도 다 고장났어”

“....”

“물론 그 공장을 고칠 다른 부품들을 만들 다른 공장들도 모두 다 고장났지”

이쯤되면 아무리 바보인 나라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넷째 날

사람들이 마실 물이 점점 떨어져 간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점점 없어져 간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불안에 떤다.
다들 설마설마 하면서도 저마다 식량과 물을 챙기기에 바쁘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많고, 물자는 너무 적다.
끊임없이 심장이 뛰고 혈액이 순환하듯이, 매일매일 쉬지않고 새것을 들여오고 헌것을 배출하는 커다란 도시.
순환이 멈춰버린 도시는 자신을 유지하는 것만도 힘에 부쳐한다.
가게주인들은 더 이상 물과 식량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돈의 가치가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목말라 한다.











“알겠어? 지금은 옛날처럼 하나하나 다 손으로 작업하고 만드는 시대가 아냐.  기계가 기계를 만들고, 기계가 기계를 수리하는, 기계들에 의해서 돌아가고 기계들에 의해서 지탱되는게 지금 우리 현대의 문명이야”

“......”

“기계들이 모두, 한꺼번에 죽었어. 우리는 기계로 이루어진 현대 문명의 기반 그 자체를 한꺼번에 통째로 파괴당한거야”





다섯째 날

가게들은 아예 셔터를 내리고 식량과 물을 내놓지 않는다.
사람들의 셔터를 두드리는 손길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목마름에 괴로워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목마름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아내, 자신의 남편, 자신의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아파한다.


















“하지만 어떻게 세상에 있는 모든 공장들이 다 고장났다고 하는거니 다영아? 여기만 일시적으로 그런건....”

“저 시계를 봐 언니.  2시에서 멈춰있지?”

“응? 응”

“저게 아마 어제 새벽 2시쯤에 자기폭풍이 지구를 덮쳤을 때 고장난 걸 거야.  그래서 새벽 2시에서 멈춰있는거고”

“새벽 2시.....아, 그러면.....”
“그래, 새벽 2시라면 우리나라는 밤이야.  우리나라가 태양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을 시간이야. 자기폭풍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을거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위치야”

“그런......그건.......”

“아마 지구를 넘어서, 혹은 지구를 관통해서 반대편의 우리나라까지 훑고 지나갈 정도로 강력한 자기폭풍이 밀어닥친거야.  여기에, 가 아니라, 이, 지구에”

“.....”

“여기만 이런게 아닐까가 아니라 여기마저도, 지구 반대편마저도 이렇게 되다니 라고 해야 맞는 말일껄”
















여섯째 날

사람들은 늦게나마 깨닫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제 곧 망할꺼라는 이야기야?”

“이미 망했어”

갑자기 정전이 되어버린 바로 그 날, 어두컴컴한 한밤중. 나와 이랑이는 여전히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기는 다영이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저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냥 너 혼자만의 망상이라고 생각되거든?  지금 이 세상은 그냥 잠깐 전기가 나간 것뿐이고 딱히 저 하늘에서 마왕이 내려오거나 핵미사일이 떨어지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 우리는 심장이 멈춘 몸에 남아있는 세포야.  지금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이 세상은 완전히 ‘죽게’ 될 거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런.....잠깐만!!!”


---챙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로 만들어진 총포상의 문이 박살났다.

물론, 싸이렌 같은것은 울리지 않았다.

다영이는 마치 여러번 해본 것 같이 자연스럽게 쇠지레로 벽의 엽총들을 구속하고 있는 쇠고리들을 뜯기 시작했다.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밤, 차도 사람도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밤.

마땅히 있어야 할 가게주인이 없고
마땅히 울려야 할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
마땅히 달려와야 할 경찰이 달려오지 않고
마땅히 난리를 쳐야 할 주위 사람들이 없고

고요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광경.
그 친숙하지 않은 비현실의 현장 한가운데에 서서 비현실을 조장해내고 있는, 친숙한 내 동생 다영이.

마치, 아득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게 현실이야”

내 마음을 짐작한 듯한 다영이의 날카로운 한마디.

“어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내일도 아무 일 없을꺼라는 그런 태평한 낙관론은 그만. 설마 그런일이 일어나겠어 라는, 일반상식을 방패로 한 현실도피도 그만둬.  현실을 직시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빠른 결단이야”


현실과 꿈이 뒤섞인듯한 그런 광경에 나와 이랑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도 같이 말라 죽게 될껄”

나는 홀린듯이 다영이가 건네는 엽총을 잡았다.











일곱째 날

인간의 이성은, 1주일도 채 버티지 못했다.









“우우움...”

“...다영아”

“우웅...오빠 바보....”

“......”

이 녀석은 왜 잘 때는 떨어져 있었으면서 아침에는 항상 내 위에 올라타 나를 깔아뭉게고 있는 걸까.  예전에는 잠버릇도 그리 심하지 않았었는데.

역시 불안감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걸까?




그 후로 1달이 지났다.




첫째 날, 우리는 다영이의 맹렬한 닥달에 의해 지영이네 슈퍼의 식량들과 물, 음료수들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이곳으로 옮겼다.
이곳은 우리 시내 옆의 야트막한 언덕배기의 공장이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야트막한 언덕 공장지대.

첫째 날, 세상은 이제 멸망할 것이며 사람들이 물과 식량을 놓고 서로 죽고 죽이게 될테니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면서 식량과 물이 절대로 없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접근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피해있어야 한다는 다영이의 주장에 의해서 선택된 곳이다.

우리는 설마했지만, 설마설마 하면서도 다영이의 말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리고는 이 공장의 지하실에 무려 한달동안이나 숨어있었다.
첫째날 밤 잠깐 나가서 총포상 털어온 것 빼고는.

그동안 바깥은

조용하다가
시끄러워지고
시끄러워지고
시끄러워졌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아마 1주일째인가 2주일째인가부터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팍 줄어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고요했다.




어느 소설에서 본 것처럼, 소리의 부재로 일어나는 침묵이 아닌, 소리를 다 죽여버린듯한 그러한 침묵.
그런 묘사가 딱 들어맞는것 같다.  소리를 다 죽여버린....


다영이는 태연했지만 이랑이와 나는 태연하게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공장사람들이 멀쩡히 출근해서는 우리를 보고 도둑이라고 생각할까봐 겁냈다.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혹시 불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며 매일밤을 전기스토브를 콘센트에 꽂고는 하염없이 기다려보았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장난 라디오라도 들고 들어왔다.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전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 전기, 나오지도 않는 비상대책방송, 시끌시끌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바깥, 그리고....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







“한번 나가보자”

“나가보자고? 바깥이 위험하다고 여기 처박혀있자고 한 건 너잖아?”

“이제는 괜찮아.  아마 사람들은 다 죽었을껄?”

“.....정전 좀 됬다고 해서?  그 얘기는 아무리 해도 믿을 수 없어.”

“나가보면 믿게 될 꺼야.  언니는 여기를 지키고 있어줘”

“내가 현수랑 같이 나갔다 올께”

“안되. 언니던 오빠던 나랑 같이 가야해. 언니랑 나랑 둘이 같이가면 여자라서 위험하잖아”

다영이랑 꼭 같이 가야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영이는 이랑이에게 엽총을 건낸다.

“알지 언니? 우리말고 누가 찾아오면...”

“주저하지 말고 쏴버리라고? 하지만 다영아, 그건....”

“무조건 그렇게 해.  자, 가자 오빠”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하면서, 다영이는 총과 마실 물을 챙겨들었다.







시내는 황폐했다.

무슨 난동이 일어났는지 가게란 가게는 모조리 다 박살나있고, 불도 한바탕 난 듯 여기저기 한 채 두 채, 혹은 연달아 몇십채씩 불탄 건물들이 보이고.

그런 황폐한 시내 사방에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아니, 정말 정전 좀 된 거 가지고 이렇게까지 되나?

“교통수단,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수십키로미터 밖의 강에서 끌어온 물을 마실수도 있고, 수백키로, 수천키로 떨어진 곳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을수도 있게 되었지”

다영이는 그런 시내를 한가롭게 거닐며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도시는 수십만, 수백만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은 거야.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할 음식, 물, 기타등등 온갖 물자들이 매일매일 도시로 들어오고, 그렇게 해서 생긴 쓰레기들을 또 매일매일 내보내.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켜서 우리몸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고 노폐물을 수거해가는 것처럼”

“그리고 심장이 멈췄지”

“그래”


잠시간의 침묵


다영이는 곧 이어 한숨을 쉬듯이 말을 이어갔다.

“일단 식량은 여기저기 꽤 널려있었겠지. 뭐 그것도 곧 없어질테지만 그건 둘째치고.... 일단 가장 먼저 물의 공급이 중단돼.  상수도가 고장나고 이 도시는 더 이상 물을 공급받지 못해.  평소에 물이 단수되면 보통은 물탱크라던가 각각 물을 저장해 놓고 버티게 되지.  좀 오랬동안 물이 공급되지 못한다면 다른곳에서 급수차가 와서 사람들이 마실 물을 공급해주고.  뉴스 같은것에서 봤잖아?  하지만 그런것을 기대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

“결국은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사막으로 변하는거야. 그것도 물을 하루에 몇L 씩 마셔야만 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있는 거대한 사막.  모래로 된 사막따위와는 비교가 안되지”

“하지만 사람이 한명도 없다니....설마 다들 목말라 죽은건 아닐꺼 아냐”

“죽기는 싫잖아?  서로 죽고 죽이다 못해서 다들 먹을꺼 마실꺼 싸들고 시냇가던 강이던 뭔가 마실 물이 있는곳을 찾아 떠났겠지”

“내가 알기로는 이 근방에는 그런 거 거의 없어. 공장이 많아서 강이고 지하수고 전부 다 오염되어있던걸”

“그럼 다 죽었겠군”



다영이는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가자”

“더 이상 안 찾아봐?”

“물자가 없어서 도시가 이 모양이 된거잖아? 먹을꺼 마실꺼 쓸만한 거 있는대로 전부 챙겨 떠났을 꺼야. 그게 다 떨어지면 죽는거고.  몇몇 놈들 빼고는 자기가 가진 거 다 먹고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 죽었겠지”

“그럼 왜 나온거야?‘

“내 짐작이 맞나 틀리나 확인하려고.  그리고 맞다면 오빠한테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려고.  돌아가자”








“도, 도와주세요!”

“엥?”



누군가가 우리를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어떤 중년의 아저씨다.  옷도 찢어지고 여기저기 그을리고 불난집에서 방금 뛰쳐나온듯한 몰골의 아저씨가 저기 골목길에서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하아! 이제야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하다니! 도와주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아, 아저씨 잠깐만요. 도와달라뇨?”

“식량도 물도 하나도 없이 굶은지 며칠은 됐어요. 주위에는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하나도 안보이고 온통 시체뿐이고 주위는 폐허고.....제발 나 좀 살려주게나 젊은이들. 이렇게 부탁하네. 응?”

음... 난처하네, 그래도 한달만에 보는 사람이라니 나름 반갑기도 하고, 몰골이 거지중에 상거지 몰골이라 불쌍하기도 하다. 주위에 사람도 다 죽었는지 떠났는지 하나도 없는데, 이럴때는 도와주고 서로 돕는게 좋겠지?

내 동생을 보니 그 녀석은 아까부터 아무말도 없이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고 있다가, 아저씨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건다.

“아저씨 혼자에요?”

“그래, 난리통에 가족들하고는 다 헤어지고 나 혼자만 이렇게 간신히 살아남아서 숨어있었단다.  마누라도 우리 딸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


-탕!



잠시 상황이 접수가 안된다.

거의 울 듯한 불쌍한 얼굴로 불쌍한 자초지종을 털어놓던 불쌍한 아저씨는 총 한방에 불쌍하게 고꾸라진다.

아, 그러니까, 내 동생이, 다영이가, 지금, 저 불쌍한 아저씨를 쏴버려......



“야, 야, 너, 너, 너, 너 지금 무슨, 무슨 그러니까, 너, 어떻게, 그게.....”

“가자 오빠”

“...야!! 뭐하는 짓이야 이게!!!!”

“그럼 어떻게 해. 우리가 이 아저씨 먹여 살려?”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을 그렇게 그냥 죽여?”

“의심스럽잖아”

“뭐가! 이 다 죽어가는 아저씨가 우리를 해치기라도 할까봐?”

“며칠 굶은것 치고는 도와달라는 소리도 참 우렁차더라”

“마지막으로 기력을 짜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럼 이건? 저 아저씨는 말이지...”

-탕!

다영이는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저씨를 총으로 가르키는 듯 하다가.....그대로 쓰러진 그 사람의 머리를 한방 더 쏴버렸다.

맙소사

그리고는 아저씨의 품을 뒤적여서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피가 잔뜩 말라붙은 식칼이다.

“이건 어때?”

“.....”

“가자, 가면서 설명해줄게.  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니. 누가 총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사람을 죽여버리다니! 말도 안되!”

“몇 번을 말해줘야 해 바보오빠? 일단 살아있는 이상 다 살인자고 다 적이야.  안 그럼 어떻게 저 지옥같은 사막에서 한달씩이나 어떻게 살았겠어”

“그냥 자기 물건가지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면 안돼?”

“사람들이 뺏으려고 다 달려들텐데?  뺏으려고 죽이던 지키려고 죽이던 아무튼 사람을 죽인 놈이야. 자기가 살기 위해서.  위험해”

“다른 방법으로 살아있었을 수도 있지! 우리처럼 숨어있던가!”

“그런 방법 없어. 우리처럼 미리 알고 숨어있었으면 저딴 꼴을 당했겠어?”

“좀 좋게 생각할 수는 없어?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눈으로 직접 봤잖아. 아까 그 식칼은 폼이야? 그 피는 양파썰다가 손가락 베여서 달라붙었나? 자해라도 했어?”

“그...그래, 그 아저씨가 사람들 좀 죽였다고 하자.  그럼 어떻게 할건데? 앞으로 사람들 만날때마다 족족 다 쏴죽일 거야?”

“그래”

“말도 안되!”

“일단 저기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남을 죽이고 다른사람 것을 훔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라니까”



와.....정말 무섭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들을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저렇게 태연하게 하지?  내가 언성을 높이다 못해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에 비해 다영이는 그냥 표정하나 말투하나 안 바뀐 채 태연하게 응수한다.

“아 모르겠다.  이왕 저질러 버린 거.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

“이야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죽고 빼앗기기 싫다면 먼저 죽이고 빼앗아야 해. 여기 살아남아 있는 놈들은 다 똑같은 살인자야.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이고 살아남은 놈들이야”

“.....”

사실 다영이 말이 맞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럴지 몰라도 감정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세상에, 거리낌도 없이 그렇게 사람을 단박에 죽이려 들다니.  얘가 천재에다가 좀 쌀쌀맞고 오빠를 좀 많이 놀려먹고 좀 그 외의 사람들은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왜 이렇게 변해버렸지?

“......“



그렇게 한바탕 의미없는 말싸움을 하면서 오다보니 우리 아지트(?) 에 거의 다 도착했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공장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랑아- 우리왔어-”

“다녀왔어 언니”

나갔다 들어온 우리를 이랑이가 나와서 반갑게 맞아준다.

“아, 와, 왔구나? 어서와”

정정. 반갑게가 아니다. 왠지는 몰라도 허둥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 그래?”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말할게 있는데...”




“....................언니”


사람 죽일때도 태연하던 동생의 목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9박10일 나인헬 풀코스관광을 다녀온 듯한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변했다.  다영이의 손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옆을 꽉 쥐고 있다. 어찌나 세게 쥐고있는지 손이 하얗게 돼서 부들부들 떨린다.

“이 꼬마는 누구야?”

“뭐?”

지하실 쪽으로 가보니, 왠 남자애가 한손엔 밥, 한손엔 참치통조림을 든 채로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아...아하하하, 안녕하세요?”

“아니,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녀석이 막 울면서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

“........”

“엄마도 돌아가시고 혼자 남았다고 해서 너무 불쌍해서.....”


동생을 돌아보니, 동생은 한심하다는 표정과 짜증난다는 표정과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듯한,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이랑이를 바라보며....총으로 그 꼬마를 겨누었다.

“꼬마야, 너 혼자라고?”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잠깐 잠까아안!!!!”


나는 결사적으로 다영이의 총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까 그 아저씨 죽일때랑 똑같은 대사잖아 그거!

“이거 놔”

“안돼! 아직 꼬맹이잖아! 불쌍하잖아!”

“키울수도 없잖아. 내다 버리던지 죽여야 해”

“저게 무슨 강아지인줄 알아! 안돼! 잠깐 기다려봐!”



다영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총구를 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이랑이에게 물었다.

“언니, 저 녀석한테 작은방도 보여줬어?”

“어? 으, 으응.......응”

작은방이라면 우리가 총포상에서 가져온 온갖 총들을 보관해 둔 방이다.

다영이는 한층 더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이랑이를 바라보더니....


“누구냐!”

갑자기 정문쪽을 향해 총을 겨눴다.

“뭐?”

이런, 설마 누가 우리 뒤를 쫓아온건가? 나는 재빨리 총을 들고 정문쪽을 향해 몸을 돌렸고.....

-탕!

“으아아아아아아악!!!”


그 잠깐 사이에 다영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 그 꼬마를 겨누고 그대로 쏴버렸다

오 맙소사  

다행히 총알이 빗나갔는지 그 꼬맹이는 들고있던 걸 팽개치고는 지하실 저쪽으로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앙!!!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너 이리 안와?!”

-탕! 탕! 탕탕!!

그리고 다영이는 그런 꼬맹이를 쫓아서 날듯이 지하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영아 잠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안!!!!!!”








“훌쩍, 이름은 지현이구요. 송지현. 14살이구요, 가람중학교 1학년이구요,  저기 저쪽 청솔마을 312 번지에 살았었구요...”

“누가 그딴 거 물어봤어? 지난 1달동안 어떻게 살아있었는지나 말해”

“으흑...네...훌쩍 훌쩍 그러니까 엄마가....”


이야기를 듣자 하니, 폭동이 온 도시를 덮쳤을 때, 아빠와 엄마와 함께 지하실입구를 보이지 않게 잘 숨긴 다음 먹을것을 들고 그 안으로 숨어들어갔고, 먹을것이 점점 떨어져가자 아빠와 엄마가 잠깐씩 나가서 먹을것을 어떻게든 구해왔었는데....

“아빠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훌쩍, 그래서, 그래서 엄마가 밖으로 나가면서 혹시 엄마도 안돌아오면 음식이랑 물 들고 이쪽으로, 훌쩍, 아무한테도 말 걸지도 말고 들키지도 말고 공장들 있는 쪽으로 도망가라고, 훌쩍, 거기는 먹을 것도 없지만 그러니깐 사람들이 없으니까 안전할 꺼라고 말하고는 훌쩍, 그러고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도 으흐흑, 엄마도 안, 안 돌아, 안 돌아오, 오.....으에에에에에에에에엥”


그 꼬맹이, 지현이는 그렇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랑이는 그런 지현이를 안아서 다독거려주며 다영이에게 말했다.

“자, 이제 오해가 풀렸지?”

“무슨 오해?”

“들었잖아. 저 꼬맹이가 누구를 죽이고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그치?”

“응, 그렇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응?”

“저 애가 결백하다는 거 하고 저 애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거 하고 무슨 상관? 논리적으로 날 설득시켜봐 언니”

“그....”

“먹을거는 우리도 모자라. 적어도 두 달은 버틸 수 있겠지만 두 달만 살고 말 거야?”

“아니 그....”

“저 애를 키운다고 해서 우리한테 뭐 도움 될 것도 없어. 저 꼬맹이가 밥을 만들 거야 쌀을 만들거야? 키워서 잡아먹을 거야?‘

“그.....”

“저 꼬마가 배신하면? 셋이 먹으면 2달이지만 혼자 먹으면 6달은 버틸꺼 아냐?”

“....”

불쌍한 이랑이, 폭풍같은 다영이의 언변에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다영이가 또박또박 한마디 할때마다 저 꼬마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파랗게, 종래에는 시꺼멓게 변해서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흐끅흐끅 대고있다. 우와, 정말 불쌍하다

이랑이는 한창 고민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미안,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언제 말싸움으로 얘 이기는거 봤니.

이랑이는 결국 절망적으로 외쳤다.

“.....부.....불쌍하잖아!!!!”

“우리가 더 불쌍해”

“.....”

“적어도 작은방은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어. 우리 자고있는 사이에 총 하나 들고 나와서 쏴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하지만 키우면서 끝까지 안 보여줄수도 없잖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도 있고”

“그래, 그러니까 죽이자니까?”

“자, 잠깐! 이런 애가 총 쏘는 방법이나 알겠어?”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꼬마야, 볼래? 여기에 이렇게 총알을 넣고”

-다가닥

“이렇게 장전한 다음”

-철컥

“겨누고 쏘면 되는거야. 쉽지? 이제 총 쏘는 법도 잘 알았지? 그러니까 죽어”

“으아아아아아아앙!!!!”

“잠깐만!!!”

“야!!”

“농담이야”

다영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 녀석을 겨누던 총을 내려놓았다.  농담? 방금 분명히 방아쇠가 반쯤 당겨졌었는데?

“그렇게 키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언니. 그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첫째, 저 녀석이 작은 방이나 총에 10 미터 안으로 접근하면 바로 쏴버릴 거야”

“응,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잘 봐줄께. 그리고?”

“돌봐주라는게 아니라 감시하라는 거야. 아무튼 둘째, 저 녀석까지 만이야. 이후로 발견하는 다른 사람들은 그냥 다 쏴죽일테니깐 그렇게 알아”  

“.......”




그렇게 군식구가 한명 더 늘게 되었다.



어쨌든 한달만에 처음 밖에 나가본 결과로, 우리는 최대한 빨리 이 도시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 있어봤자 남은 거 다 먹고 말라죽는 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제 가을 중반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겨울이 찾아온다.

공장에서 발견한 리어카에 식량이랑 물을 싣고, 지도를 따라서 저 멀리 60km 바깥쪽에 있는 산골짜기를 향해서 떠난다.  별로 유명하지는 않은, 계곡으로 표시된 관광지. 근처의 팬션에 자리를 잡고 계곡물이라도 떠다 마시던 얼음을 깨서 녹여서 마시던 겨울동안만 이라도 버티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먹을것의 경우에는...

“먹을 건 걱정 없어.  식량도 다들 먹어서 모자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어차피 물 없으면 죽을테니깐 식량은 좀 남지 않았겠어?  4천만명이 먹을 식량이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이 1천만명 정도라면 식량이야 넉넉하겠지. 단지 이 도시는 사람들이 되는대로 먹을거 싸들고 가버렸으니까 텅텅 빈 거고”

“하지만 계곡이라니 춥지 않을까? 난방기구도 없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 안오겠지. 일단 근처 집에 자리잡고 불을 피우면서 살면 적어도 얼어죽지는 않을거고, 계곡이라서 물을 찾아온 사람들이 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강가 같은곳보다는 나을거야.  사람들이 산골짜기의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물을 따라 하류로, 강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우리는 상류를 차지하는거야”


다영이는 언제나 사람들을 최대한 만나지 않는것이, 어쩔 수 없이 만난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적게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사람들을 적게 만나야 처리 (내 동생은 처리라고 했고, 나와 이랑이는 설득이라고 했지만) 건 설득이건 하기도 더 쉬울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폐허가 된 도시를 뒤지면서 남은 식량등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갈 곳과 코스를 한번 점검해보고, 그리고....




그리고, 며칠간 이 곳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로 인류가 망하리라고 생각해?”

“응, 직접 봤잖아”

“하지만 전자장비가 동시에 모두 고장났다는건 아무래도 이상해. 아무리 EMP 충격파가 몰아닥친다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잖아? 접지고 전자파 방지처리고 뭐고 할거없이 죄다 박살나버리다니”

“저걸 보고도 모르겠어?”

다영이는 하늘을 가르켰다.

밤하늘이다. 멋진 밤하늘, 언제봐도 장엄한,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감상하면서 마음껏 탄성을 지르고 좋아할 그런 밤하늘, 거대한 빛의 커튼, 오로라가 화려하게 펼쳐져있는....


“평소에는 태양의 자기풍을 대기권이 막아주고 남은 자기입자가 지구의 자석에 이끌려 극지대로 가서 극지대에서만 오로라가 나타나는데, 여기까지 이 모양이라면 볼 장 다 본거야.  단순히 자기풍만 날아든다고 해서 오로라가 저렇게 나타나는건 절대 아니라고. 사실 평상시라면 극지대에 가도 저런 엄청난 오로라는 흔치 않아.  뭔가 지구에 굉장히 중대한 변화가 생겼을 거야.  어쩌면 지구라는 땅덩어리가 통째로 달과 함께 대전되어버렸다던가...”

“달?”
  
“하늘을 봐. 항상 오로라의 일부는 태양 쪽에서, 밤이니까 지구 지표면 쪽에서 올라와서 지구를 쓰다듬듯이 지나가서, 하늘을 크게 양분하듯이 크게 가로질러서 태양 반대쪽으로, 하늘위로 솟구치는 방향으로 뻗어있지.  사실 솟구치는 것 까지는 잘 안보이지만, 아무튼 태양과 항상 반대되게 움직여.  저걸 잘 보면 시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일부는 달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쳐져 나오는 방향으로 떠있고 이건 달과 함께 움직여.  아마 달과 지구의 자기력이 서로 상호작용을..... 나도 몰라. 아무튼,  지구를 통째로 휩쓸고 지나갈만한 거대한 자기폭풍인데 달에도 뭔가 영향이 갔을꺼야.  반대로 말하면 지구에서 30만 km 까지 떨어진 달까지 저 모양으로 만들만한 엄청난, 우주적인 규모의 자기폭풍인데 지구상에 뭔가가 남아있으리란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소리지”

그렇구나, 어느새 그런것까지 다 생각하다니 대단한데? 나는 항상 달에 오로라가 멋있게 걸려있길래 와 멋있다 구도 죽인다 사진찍어놓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밖에는 안했는데.

“바보오빠”
“.....”
“.....”
“그나저나, 오로라가 참 예쁘네”
“말 돌리는 거야?”
“.....”
“뭐, 예쁘긴 예쁘네”

그렇게 말하며 내 동생은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보다 더 예뻐?”
“.....”


그건 무슨 뜻이니?















“어쨋건 왜 이렇게 되어버렸나 하는 과학적인 설명따위 하고 있어봤자 소용없어. 태양이 어찌됬던 우주가 어찌됬던 일단 일어난 건 일어난 거고.  우리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고, 좀 더 현실적인 걱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 저 오로라에 관한 잡설도 사실 시계 이상으로 중요한건 아니야.”

나와 함께 한참 밤하늘을 멍하니 구경하던 다영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장 밤하늘을 관찰하느라 눈앞의 구덩이를 못 보고 빠지는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잖아?”

다영이는 그렇게 말하고 힘없이 웃으면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비로운 초승달과 함께, 두 가지 패턴으로 화려하게 교차하는 오로라가 수놓아진 밤하늘.

그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다영이의 모습이, 항상 무표정한 얼굴에 오랜만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가 그날따라 더욱 더 슬퍼보였다.












“현수야”

“응?”

“우리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걸까?”



아무래도 이랑이가 많이 힘든 모양이다.

나는 그 동안 동생과 열심히 이야기한 세계의 현재와 미래, 우리들의 앞날 계획, 우리 앞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있는 위험들과 그 대처방안 등등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다가, 다 집어치우고는 그냥 내 옆에 앉아있는 이랑이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었다.

으, 으흠,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온 소꿉친구고, 지난 어려운 오랜 시간동안 함께 했고, 또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같이 해쳐나갈 동료일 텐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믿음직스러운 거라면야 나보다는 내 동생이 한 100만 배는 더 믿음직스럽겠지만.

그러고보니 내 동생.  사실 내 동생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거겠지.  내일은 그 녀석한테 뭐라고 한마디쯤...

내 생각은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이랑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이랑이에게서 돌려버렸다

이랑이가 쿡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수야”

“응?”

“얼굴 빨개졌어”

“...#$%&$*#$%&#*$&($%^*#!!”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랑이는 그렇게 맑게 웃고는, 내가 잡은 손을 함께 맞잡았다.


“동생하고는 맨날 그렇게 정답게 손잡고 다니면서, 나는 왜?”


“아, 아니 그게 너...”

-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라고 평소처럼...

“...그런 착...”

-착각 따위 하지말라고! 라고 할까....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니가.....”

-윽, 바보같이, 나도 모르게 니가 좋아 라고 말해버릴 뻔 했다



내 머리는 이미 새하얗게 변해서, 그렇게 몇 가지 말을 하다말다 하다말다 주워섬기다가 말아버린, 굉장히 이상한 중얼거림만을 내뱉고 말아버렸다.  젠장, 이러니 믿음직해 보일 리가 있나.

  

“있잖아..... 나 매일 현수랑 다영이랑 그렇게 정겹게 손잡고 다니는 걸 보면서, 좀 많이 부러웠었어”

“그, 그래?”

내 손을 맞잡은 이랑이의 손에 살짝 더 힘이 들어간다.

“아니, 부럽다기보다는..... 에헤헷, 사실 살짝 좀 질투했었어”

질투?

오 하나님 맙소사 신이시여


질투라는게 어떻게 하는거였더라? 아니, 언제 하는거였더라? 그러니까 내 동생이랑 손 잡고 다니는걸 이랑이가 질투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태양의 전자기펄스가 지구의 식량들을 다 먹어치워서 그러니까 설라무네......


“오빠”

“우와아아아악!”

“꺄악!”

“아....방해했어? 미안해”


으아아아아악! 분위기 좋았었는데! 저 녀석이!
다영이는 그렇게 대충 말하고서는 저편으로 도도도도 달려간다.
그러고서는 갑자기 돌아서서 문 너머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는

“아아,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

그러고는 가버린다.



이런 뻘쭘한 분위기에서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우리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들의 앞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좀 거창할 지도 모르지만 인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서









“다영아”

“왜”

“정말 세상은 망했을까?”

“하아.....   대부분 나라의 수도는 큰 도시고, 큰 도시는 우리동네처럼 이렇게 다 작살나서 볼장 다 봤고, 서로 연락도 안되는 상태에서 큰 도시들부터, 일단 수도부터 붕괴되어 버리면 뻔한 거 아냐? 멸망은 아니더라도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되겠지. 일단 도시에서 직접 굶어죽는 사람만 따져도 억단위로 죽어나갈 거야.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되겠지.  세계인구가 몇십억에서 몇억으로 줄어버릴수도 있어.  단지 순환계, 심장이 멈춘것 뿐만이 아니라 서로 연락할 수단들도 다 붕괴되어 버렸다는 것도 커.  서로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불안은 증폭되고 상황을 타개할 대책도 세우기 힘들어져.  체제의 붕괴가 도덕을 증발시켜.  경찰도 치안도 질서도 도덕도 없어. 결론은 배틀로얄 파이트 시작. 심장은 멈추고 전신 신경은 마비되었는데 살아있는 게 이상하지”

“...”

어찌나 많이 생각했는지 대답하는 속도가 그야말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다. 대단한걸?

“됐지? 궁금증 다 풀렸지?”
“으, 으응...”

“그런데 나한테 할 말 이라고는 그런 얘기들 밖에는 없어?”

할 얘기라....

“너! 그때 이랑이랑 간만에 분위기 좋았는데 눈치없이! 너 알고서 일부러 그런거지! 그렇지!”
“흥, 내가 뭘 어쨌다고?”

다영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혀를 베- 내밀어 보인다음 종종걸음으로 도망간다.
그냥 장난치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저건 아마 삐진거다.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도망가는 다영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는 다영이를 살짝 힘을주어 끌어당겼다.
별로 저항하는 기색도 없이, 다영이의 작은 몸이 내 품에 포옥 안긴다.

“고마워”

다행히도 정답인 것 같다. 다영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이차이가 7살이나 나는, 동생이라기보다는 딸 같은 기분이 드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어른스러운, 내 동생 다영이.  천재라는게 밝혀진 이후로, 이렇게 어른스러워 진 이후로는 이 녀석에게 이렇게 해주는것도 정말 얼마만인지.... 나는 다영이를 한손으로 살짝 안고는 다독거려주었다.

“그동안 다영이 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건데, 나는 맨날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고맙다고 말도 한번 안하고, 괜히 소리만 질러대고....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다영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하지만 내 눈으로 볼때는 한없이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조금은 똑똑해 졌네, 바보오빠”
“니 오빠잖아”

그래도 조금 쑥스럽다.  다영이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안아주는 건 너무 오버인가?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영이는 한참 눈을 감고 나에게 기대듯이 서있더니, 갑자기 내 어께에 손을 올려 내 얼굴을 끌어내리고는...


“참 잘했어요”

쓰다듬쓰다듬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아유, 착해착해”
“......”
“참 장해요 오빠.  자, 상으로 뽀뽀. 쪽”

그 녀석은 내 얼굴을 잡고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내 볼에 뽀뽀까지 하고 나서는

“자, 이만 가자”

뒤도 안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우리 집을 향해 뛰어간다.
저건 아마 쑥쓰러워 하고 있는 거겠지?
아까전의 나처럼 ‘내가 너무 오버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왜인지 실없이 피식 웃으며 다영이의 뒤를 따랐다.


다영이는, 그때와 같은 그런 힘없는 웃음보다는 더욱 더 밝아진 듯한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띄고 있었다.











그렇게 나름 한가롭다면 한가로운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가로운? 이 꼬맹이가 정말 뒈지고 싶어? 나날이 식량하고 물은 떨어져가고 점점 한 발짝 씩 죽음을 향해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데 한가로와?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니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입이라도 하나 더 줄여서 우리끼리만 더욱 더 한가로워져 볼까?”
“으으, 으러허어하아아어”
“뭐라는거야? 똑바로 말 안해? 제대로 알아듣게 말 안하면 동의하는걸로 알 거야”
“다영아, 그렇게 입에다가 총구를 쳐박고 있으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잖니....”

지금의 저 무표정한 다영이가 어제의 그 다영이하고 동일인물이 맞는건지....

어쨌든,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후면 이 도시를 떠난다.
이제는 태양이 어떻고 별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그런 여유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사실 그 동안 세상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현실도피 하듯이 그런 이야기만 한 것도 사실이야.
사람들은 전부 다 죽고 혹은 어디론가 떠나고, 환상적인 오로라의 밤하늘 아래, 폐허가 된 도시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셋....

“도, 도와주세요!”

-탕!

...정정하지. 가끔 생존자가 있기는 했지만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렸으니까.

어쨌든, 세상이 다 멸망하고 우리들만 남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낭만적인 기분에 젖어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분 만끽하고 있을 여유따위는 없어
이제는 이 도시를 벗어나서, 저 세상으로 나가야 해.
우주니 인류니 하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이야기 따위는 집어치우고, 피비린내 나는 이 현실과, 남을 죽이고 살아남은 살인자들과 대면해야해.

누가 말했더라?
죽는쪽과 죽이는 쪽, 당연히 죽는쪽은 죽고 죽이는 쪽은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살인자의 후손이다....라고.
좀 극단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엔 비유로 된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지금 이렇게 그 말이 말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에 놓여있게 되었다니, 참 어이가 없다.

아참, 내가 또 현실을 잊고 괜시리 철학적인 듯한 그런 기분에 젖어있었나?

“바보오빠”
“....”

















그날도 폐허가 된 도시를 거닐면서, 다영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이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비록 기계들은 다 망가졌지만, 원래 옛날 사람들은 기계들도 없는 상태에서 지금껏 이런 문명을 만들어낸 거잖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힘을 합치면 곧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있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 안해?”

“생각 안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서로 힘을 합쳐서 살아보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까?"

"있겠지"

"응?"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오빠 말대로 집단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아니, 있을꺼야. 도리어 없다는게 말이 안되지"

"뭐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나는 그런 집단이 있으리라는 것 까지 부정한 적 없어.  그런 집단들은 분명히 존재할꺼야. 하지만, 안돼"

"왜?"

“오빠랑 내가 그 꼬맹이에게 하는 짓을 보면 알지”

“지현이? 그게 왜?  그리고 지현이가 너보다 나이 많아보이는데 언제까지 꼬맹이라고 부를 거야? 키도 니가 더 작으면서”

“오빠는 내가 그녀석한테 오빠라고 부르는게 보고 싶어?”

“...아니, 그건 싫다”


나와 다영이는 그런 잡담을 나누면서 도시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제 3일 후면 이곳을 떠난다.  내일까지 도시를 뒤져보고, 내일 모래는 집에서 충분히 푹 쉬고, 글피날 떠나는 것이다.  사실 60km, 짐이 무겁다고는 해도 하루에 10km 씩 1주일도 안되는 여행가지고 뭘 이리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우리로써는 목숨이 걸린 일이다.  절대로 허투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영이가 나를 불러세웠다.


저쪽에 사람이 서 있었다.

하아...또 죽여야 하는건가?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뭔가 달랐다.

우리들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오지고,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우리처럼 총을 어깨에 매고서 폐허에 여유롭게 서 있는 20대의 남자. 뭐하는 사람이지 대체?


“안녕하슈”

“아,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인사를 해버렸다.



“용케들 살아계시는구만? 어디서 오셨수들?"

“아 저희는...”

이런 젠장. 나는 말하면 안될것 같다.  저기 언덕쪽에 우리집이 있어요.  거기에 식량하고 물도 잔뜩 쌓아놨어요. 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랑 오빠는 옆 동네에서 왔어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무서워서 사람들 많은 큰 도시쪽으로 왔는데... 사람이 하나도 없네요"

"보시다시피 여기도 사람들은 없소"

와 거짓말쟁이.  분명히 '그동안 어떻게 살아있었냐' 라는 질문일텐데 저렇게 교묘하게 넘기는것 좀 봐.  하지만 그런 거짓말도 못하고 어버버 하다가 여기 식량있어요 이렇게 까발려져 총 맞는 것보다는 낫다.


"아저씨는요?"

"허허, 팔팔한 이팔청춘이건만 아저씨라니..."

그 말투가 제일 아저씨같다.

"운 좋게 마트 하나를 발견해가지고는 거기서 먹고 살고 있수"

와, 숨기지도 않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좀 봐.

"여기는 사람들 없으니까 가려면 다른데로 가보는게 좋을께요"

"네...그렇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잘 가슈들"


우리는 그렇게 그 남자를 뒤로하고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저 멀리로 멀어질때쯤 부터, 다영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위험해"

"그 남자 말이야? 척 보기에도 위험하게 생겼어. 총도 들고 있고"

"그게 아니라, 너무 여유롭잖아"

"음..."

"우리한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지도 않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지도 않고, 아마 꽤 오래 먹을만한 식량이나 물을 쌓아두고 있거나... 최소한 굶고 있는것 같지는 않았어"

"그리고 이런 곳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건 더더욱 지독한 살인자란 뜻이겠지"

"그래. 그리고 그 여유만만한 태도, 우리들을 붙잡지도 않고 대놓고 경계하지도 않고.  일행들이 있는게 틀림없어.  그리고 높은 확률로 우리 둘 보다는 더 많은 숫자일 테고, 다들 총 하나씩은 들고 있겠지.  위험해"


일행이 있을 거라니. 그렇게 되면 사태가 심각하다.

"아까 그 대화를 생각해봐. 굉장히 앞뒤 안맞고 대충 끝났지?  뭔가 딴 생각이 있는거야.  나야 도망갈 생각으로 대충대충 끝낸거지만. 거기다가..."



"거기까지. 이 쬐끄만 것들이 누구 뒷다마를 까는거야?"



돌연 옆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남자들 2명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다...당신들 누구야!"



"기껏 곱게 보내줬더니 그러면 못쓰재야"

반대쪽 옆에서도 아까 그 남자에다가 다른 2명까지 합쳐 3명이 나타났다.  다들 총 하나씩을 들고.


"이런 젠장...."








5명의 남자들은 그렇게 총을 들고 현수와 다영이를 완전히 둘러싸 버렸다.

공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3,4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하나, 아마 친구들처럼 보이는 껄렁한 20대 남자들이 넷.

"크크크크크크크크큭"

"야, 이거 여자 보는것도 오랜만인데?"

"뭐야 어린애잖아? 여자 발견했다고 해서 좆빠지게 달려왔구만"

"좀 어린애면 어때? 좋잖아?"

"변태새끼"

"뭐야?"

"키키키키키키키킥"

현수와 다영이는 각각 그들에게 총을 겨누면서 대치했지만, 저들은 이미 그 총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유작작한 태도다.


다영이는 주위를 살펴보면서 정황을 파악한다.  아무래도 힘들어 보인다.  현수의 경우에는...


"다, 당신들 뭐야!"

"뭐긴? 아까 만났잖수?"

"그게 아니라 지금 이게 뭐하는 거냐고!"

"보고도 몰라?  뭐 됐어, 잡설은 필요없고"


그들 앞에서 대화하던 그 남자는 다영이와 현수의 뒤에 서 있는 한명의 남자에게 눈짓을 한다.  그냥 질질 끌 것 없이 남자놈 빨리 죽여버리고 즐겨보자는 것이다.  지목받은 남자는 씨익 웃으면서 총을 고쳐잡고 겨눈다.


"잠깐만"

그때 다영이가 앞으로 나서서 말을 하며 막 현수를 쏘려던 그 남자에게 정확하게 총을 겨눴다.

남자들은 내색은 안하지만 다들 속으로 꽤나 놀랐다.


"당신들 뭐지?  뭐 안물어봐도 알 것 같지만..."

"킥킥킥, 알면서 뭘 그래?  다 같이 어렵고 힘들때 좀 같이 즐겨보자는 이야기지"


그리고 주위의 남자들은 요란하게 웃어재낀다.

다영이는 주위를 한번 더 살펴본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쪽은 겨우 2명, 저쪽은 5명, 오빠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고....

다영이는 결심한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

"그래, 뭐지 아가씨?"

"이 중에 남자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 그러면 이 남자는 보내주지그래?"

"다영아!"

"뭐?"

"오빠는 가만 있어,  내가 가면 되는거지?  원하는 대로 해줄테니까 이 남자는 보내줘"

아까 눈짓을 했던, 대장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답한다.

"호오, 저 남자는 보내달라고?"

"그래"

"그런데 그럴 필요가 뭐 있지?  여기는 이제 사람들도 경찰도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그냥 저 남자 쏴 죽인다음에...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라고 말하면서 그 남자는 다시 은근슬쩍 반대편의 남자에게 눈짓을 한다.

다영이는 눈길도 안돌리고 총을 돌려서 정확히 그 남자를 겨눴다.

그 남자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태연하게 말했다.

"안 그래? 우리가 니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굳이 있나 꼬마아가씨? 선택권은 우리한테 있는것 같은데.  뭐 그 대신 조건으로 걸 꺼라도 있나? 뭘 걸래??"

"안 그러면...."


다영이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총을 거꾸로 들고 자신의 턱 아래를 겨냥했다.


"자살해버릴꺼야"



"......."

"......."



남자들은 잠시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멀뚱멀뚱히 서 있다.
뭐지? 저 꼬맹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지금?



"그....."

"자, 머리통이 날아간 시체하고 섹스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가 아니라면 오빠는 보내주시지"

"......"

"아니면 여기를 쏠까?"

총구를 내려서는 자신의 배 아래를 겨냥한다.

두번째로 충격.  저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놀랄만한 발언에 다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다영아!!!"

"오빠는 가만있어. 자 어쩔꺼야?"


그 대장은 생각했다.  뭐 저런애가 다 있지?  분명히 총을 겨누고 있는 건 우리인데, 우리조차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생각하는게 엄청 빠르다.   보통 사람들이 총을 겨누고 자, 지금부터 남자는 쏴죽이고 여자는 겁탈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일단 덜덜덜 떨거나 살려달라고 빌거나 발광하는게 정상 아닌가? 저렇게 냉정하게 자신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얼핏 말도 안되보이는 제안을, 그것도 자신이 희생하겠다는 제안을 자신의 목숨을 담보삼아서 태연하게 꺼내고, 거기다 말도 안되게 엄청나게 빠른 상황판단에 아까 눈짓하니까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눈치도 좋고 냉정하고 과감한 결단력에 배짱에... 대단한걸?


"크하하하하하핫!!"


그 남자가 터뜨린 폭소에, 다영이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살짝 풀어진다.  물론 현수만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로만.


"좋아좋아, 당찬 아가씨로구만. 마음에 들었다. 저 남자는 보내주지"

"잘 생각했어"

"잠깐! 안되 다영아! 그럴수는 없어!"

"이게 최선이야"

"말도 안되! 차라리 내가 이놈들을 막을 테니깐 너는 도망가!"



다영이는 잠시 한심하다는 얼굴로 현수를 돌아본다.

"말이 되 오빠?"

"아........으윽"

"가. 내가 희생하는게 아니야.  나도 살고 오빠도 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어"

"......."

현수는 가만가만,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그래, 일단 그렇게라도 도망쳐야지.  도망쳐서 나중에라도 다시 와서 다영이를 구해내는게 좋은거지, 하지만 그럴 동안에 다영이는.....


현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영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다영아... 조금만 참아, 오빠가 꼭 구하러 올께. 응?"

"아이구 무서우셔라. 구하러 오신다고? 그러면 이거 그냥 보내서는 안되겠는데? 안 그래? 어떻게 생각해 아가씨는?"


대장의 여유로운 발언에 현수의 몸이 옴찔한다.


다영이는 아까보다 한층 더 한심하다는 얼굴로 현수를 노려본다.


"오빠 바보야?"

"......."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와, 이거 뭐냐 진짜?"

"눈물없이는 못보겠구만?"

"크크크크크크 아 웃겨 크크크큭"



남자들의 폭소 한가운데서, 현수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현실감각을 다시 붙잡으려 애썼다.  그래, 이게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돌아가서, 아무런 내색도, 찍소리도 하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서....



그 대장격인 남자는 현수를 보고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한다.

"거기 병신.  나는 이 여자애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가 열심히 귀여워 해 줄테니까 안심하라고. 크크크크크크크큭"

"...이....이....."

"자, 형씨는 어떻게 할꺼지?"

"나....나는..."

"아가씨 말대로 순순히 총 내려놓고 도망가시던지, 아니면 싸워볼래? 응?"

"우우! 치사하다! 남자가 되가지고!"

"남자면 한번 붙어봐야 하는거 아냐?"

"너같으면 어떻게 할래?"

"나였으면 당연히 도망가지"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다시한번 왁자하게 날아드는 폭소와 조롱, 비웃음.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다영이만은... 아니다, 다영이만은 이 아니다, 싸우면 죽는다, 나도, 나만이라면 괜찮지만 다영이도, 다영이가 죽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현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는것을 느꼈다.

그런 현수의 속마음을 다 아는것처럼, 다영이가 조용히 말했다.


"오빠. 부탁인데 제발 더 이상 헛소리 하지말고 빨리 꺼져. 돌아가"

"다영아...."

"야! 들었냐? 꺼지랜다!"

"크하하하하하하!"

"꺼져라! 꺼져라! 휘익! 꺼져라!"

"아니지! 싸워라! 싸워라! 카하하하하하하하!"


현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총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 가"


그제서야 다영이의 얼굴이 풀어진다.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 앞에서 현수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금방 다시올께, 조금만 참아, 등등 온갖 말이 머리속에서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다.  말을 할 수도 없다.

다영이는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미소까지 지으며 현수를 보낸다.



"잘 살아"


'크윽......'


현수는 이내 몸을 돌려 맹렬하게 뛰어가기 시작한다.



"야! 남자가 치사하다!"

"와 꺼지라니까 진짜 꺼지는거 봐!"

"그럼 이 여자애는 우리가 잘 먹을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말도 안되.


내가 다영이를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다영이가 나를 위해 희생하다니, 이건 아니야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가만히 잘 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았는데.

조금만 있으면 이제 다른곳으로 옮겨갈 계획이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저런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들이 모든것을 망쳐놓는거지?

왜? 왜? 왜? 왜? 왜!!!

어째서!!!

뭐야 저 개새끼들은!!!!

왜 내가 저새끼들에게 다영이를 빼앗겨야 해?

왜 다영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해?

그냥 재수없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고작 저쪽의 숫자가 우리보다 좀 많다는 이유로?

그냥 그런 이유로? 정말로? 응?




......젠장! 아무리 다시 올 걸 내색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체 '잘 살아' 가 뭐야 '잘 살아' 가!!!!!!





나는 집으로 뛰어갔다.  아무리 바보인 나라도 다영이가 말한 '돌아가' 라는 말이 집을 들키지 않도록 다른길로 돌아서 가라는 말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는 없다. 차마 그럴수는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영이는, 다영이는, 다영이가.....!!


집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전력으로 뛰어간다.  아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친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오빠가 꼭 구해줄께, 제발 아무일 없이 무사히 있어줘, 부탁이야















"자, 그럼 아가씨, 이제 총은 좀 내려놓지? 팔 떨어지겠다"

"아직"

"그 형씨 간지 벌써 5분은 됬겠다. 시간 좀 작작끌어. 자꾸 성질긁으면 그냥 느이 년놈들 다 쏴죽여버리고 마는 수가 있다"


다영이는 한숨을 쉬면서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살짝 뒷걸음질 쳤다.



"됐지?"

"오오, 그래그래 착하다"

"말도 잘듣네 우리아가"

"키키키키키키키키"

"야, 근데 대단한데? 어떻게 혼자 남을 생각을 하냐?"

"혼자 우리 다섯명을 상대할 수 있어? 대단한데?"

"거기가 강철로 되있나? 막 총알도 튕겨내고 그래?"

"사실 그 동안 엄청 쌓여있었던거 아냐? 저런 병신 고자새끼 같은거하고 같이 있어서?"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핫!"

"와, 진짜 보기랑은 다르게 발랑 까진 아가씨구만?"

"이거 혹시 걸레인가?"

"이렇게 쬐끄만 애가? 이런 변태같은 새끼 아까부터 생각하는거 하고는"

"아가씨 걱정마, 그동안 못한거 우리가 화끈하게 풀어줄게, 응?"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왁자하게 웃는다.


다영이는 그런 온갖 저질스러운 말들에도 그냥 별 다른 내색도 하지않고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잡소리를 하면서 떠들다가, 대장은 남자들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자, 그럼 너하고 너. 그 병신 쫓아가"

"뭐에요? 왜 또 나야?"

"아 싫어요! 다른사람 시켜요!"

"뭐야? 이 쬐그만 것들이?"

"아 맨날 우리만 시키고"

"아 그럼 니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던지 아무나 2명 갔다 와"

"알았어요. 야, 갈라 갈라"

"아오 진짜 시키면 그냥 좀 갔다 오지"

"아 싫다고. 우리 갔다오면 재는 벌써 너덜너덜해져 있겠네"

"자자, 하자하자. 가위바위보! 보!"


남자들 4명이 그렇게 가위바위보를 하는 동안, 대장인 남자는 다영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다영이는 현수를 뒤쫓아간다는 남자들의 말에도 표정하나 안 바뀌고 태연하다. 이 아가씨가 '보내준다고 했잖아요!' 라고 따지고 들면 '그래서 보내 줬잖아?' 라고 응수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나올것도 다 알았다 이 말이지?  그래서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어댄거고... 이 아가씨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아 씨발!"

"아싸! 이겼다!"

"크크크크크크크, 야, 잘 갔다와라? 우리는 먼저 놀고 있을께"

"아저씨, 저 병신 아무래도 다시 돌아올것 같은데 그냥 안가고 기다리면 안되요?"

"지랄한다. 가위바위보 지니까 이제와서.... 빨리 쫓아가서 어디사는지 확인하고 쏴죽이고 먹을거나 싸그리 다 긁어와"

"쳇"

"아 씨발, 야, 그냥 빨리 갔다오자"

"그럼 다녀와라. 먼저 가있을 테니까 집으로 와"

"잘~ 갔~ 다 와라~ 크크크크크크"

그렇게 그 두 남자는 투덜거리면서 총을 매고는 현수가 사라진 방향으로 터벅터벅 뛰어간다.



"후우...."


다영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  오빠가 잘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는....


"왜 그래, 걱정되?  안 죽일테니까 걱정마.  우리 말만 잘 들으면 계속 이뻐해줄께. 알았지?"

"...."

"야 진짜 이게 왠 떡이냐?  맨날 한번 하고 죽이고 하고 죽이고 하기도 지쳤는데.  고정 섹돌이 생겨버렸네?"

"걱정마. 안 죽여. 오래오래 살아야지. 응? 안 그래? 우리도 너 죽는건 싫다고"

"그래, 1회용은 이제 지겹다. 이제는 좀 오래오래 좀 쓰자"

"크크크크크크크큭"



다영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빠가 달려간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우리들의 행복한 보금자리로?"



대장은 다영이의 어깨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다영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아...하아....하아.....하아...."


-덜컹!


"이랑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랑아? 야! 박이랑! 어디있어! 야! 지현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랑아...지현아.....어디간거야....너네들 까지....."


발걸음은 저절로 작은 방으로 향하면서도,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 앞이 깜깜해진다.

이랑이는, 지현이는 어디로 간거지?

설마 너희들도 다른 놈들한테 잡혀간걸까?

죽은거야 설마?




"야~ 집 좋은데? 이런곳에서 사는거야?"

"야! 병신 찐따! 나와! 어디숨었냐!"

"니 일로 들어가는거 다 봤어! 언넝 나와!"

"우리도 빨리 니 동생 쑤시러 가야돼! 빨리 안가면 걸래된다고!"

"키키키키키킥. 나와라! 열받지도 않냐?"



이런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다.  

쫓아온건가? 2명? 하아,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해야겠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하지? 젠장, 이랑이나 지현이가 있었으면 좋을텐데, 젠장!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방 구석에 있는 총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옆의 탄통을 열고 총알을 장전한다. 최대한 소리 안나게, 조용히, 조용히, 조용하게....


-철컥


"야! 거기 숨어있었냐?"

"하는짓도 참 병신같다 진짜 크크크크크큭"

"나와! 안 나오면 우리가 간다?"

"안나오면 쳐들어 간다 쿵짜라 쿵짜!"

"나와라 거깄는거 다 안다 병신아!"



제기랄, 나는 작은방의 문 옆에 몸을 기대고 숨을 죽이고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한명뿐이라면 들어오는 순간 쏴버리면 어떻게든 될 것같은데, 2명이라니.  여기서 이렇게 죽는거야? 다영이는?





-탕!

"크악!"

"아 씨발 뭐야!"

-탕탕탕! 탕! 탕!

"꺄아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재빨리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한명은 쓰러져있고, 또 한명은 옆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가 내가 나온걸 보고 당황하다가....

-탕!!!

내가 쏜 총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이랑아! 이랑이지!"

나는 그 놈들의 머리를 한방씩 쏴 주고는, 그놈들이 총을 겨누고 있던 옆방으로 들어갔다.

"흐윽...흑....으극...."

그 방에는 이랑이가 총을 들고 문 옆의 벽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야! 현수야!"

"현수야? 현수야, 현수야아....흑..."


보니까, 이랑이의 오른쪽 어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이랑아! 맞은거야?! 괜찮아?"

"응, 바로 맞은건 아니고, 총알이 튀어서 좀 맞은거 같아. 괜찮아"

"하아...어떻게 된 거야?"

"옥상에서 너를 기다리는데, 니가 총도 없이 막 뛰어오고, 그 뒤를 저놈들이 따라오는게 보였어, 그래서 놀라서 재빨리 내려와서 숨었는데, 아, 대답 안한건 미안해. 혹시 그놈들한테 들킬까봐서, 그래서...."



그렇구나. 다행이다.  



"지현이는?"

"저쪽방에 숨어있어.  그런데 현수야.  다영이는 어떻게 된거야? 다영이가....."

"...잡혀갔어. 구하러 가야 해"

"흑....흐윽...."

이랑이는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이랑아, 가서 다영이를 구해 올 테니깐, 여기에 있어. 알았지?"

"응, 으응, 알았어, 알았...흐윽. 흑"


치료해주고 싶지만 방법도 모르고, 시간도 없다.  나는 대충 옷을 찢어서 맞은 부위에 붕대처럼 감아주고 일어났다.



"송지현!!!!"


나는 건너편 방의 문을 열었다.

지현이가 방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오들오들 떨고있었다.


"흑...흐흑...흑...."

"일어나. 가자"

"나, 나는 총 쏠줄도 모르고...."

"가르쳐줄께. 가자"

"나, 나는 아무 도움도 안될꺼에요. 으흑, 나는, 나는, 아까도 너무, 훌쩍, 무서워서, 그래서, 흐끅흐끅, 나는..."

"시끄러!!! 닥치고 나와!!!!"



암담하다.  이랑이는 다쳤고 이놈은 맛이 갔고.  이런놈을 데리고 가서 다영이를 구하러 가야 한다니.



"이랑아"

"응"

"다녀올께"

"응"

"...."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응"

"..."

"꼭 돌아올께"














"하아....하아....."

"형! 같이가요!"

"조용히 해 이 새끼야!"


내 윽박지름에 그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는 숨는다. 그놈들한테 들킬지도 모르는데 저새끼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없다.


그 녀석들이 없다.



아까 분명히 여기였는데.




여기서 집으로 전력으로 달려가고, 그놈들 쏴 죽이고, 다시 달려오고



시간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없다





"형 여기 맞아요?"





지현이의 물음도 내 귀에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거지?




다영아


다영아


다영아


어디있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단지의 상가 1층에 있는 어떤 가게. 그곳이 그들의 아지트, 그들의 '집' 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물과 음료수, 식량들이 잔뜩 쌓여있었고, 다른쪽 구석에는 다영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들의 얼굴은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늦지?"

"그러게요"

"아까는 빨리 오고싶어서 환장을 하더니"

"가다가 또 어떤 년 발견해서 따먹고 오는 거 아냐?"

"키키키키키킥"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가볍게 웃는다.



"당한것 같은데"

"그 병신한테요? 에이, 설마 그럴리가요"

"혹시 모르지...병신으로 치면 그 녀석들이 더 병신이고..."



대장인 그 남자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한가롭게 말하며, 그 자리에 누워서는 들고있던 잡지를 얼굴에 덮었다.  아예 한숨 자려는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다른 두명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찾으러 가봐야겠지?"

"응"

"가자고 하자"

"잠깐만, 한번만 더 하고"

"에라이 짐슴새끼. 아까부터 한번만 한번만 하고 벌써 몇번째냐?"

"존나 오랜만인데 뭘 그래"

"오랜만은 무슨, 이런 일 일어나기 전에는 대마법사였던 새끼가"

"지랄, 내가 언제?"

"크크크크크크크큭"





-챙그랑!






갑자기, 가게의 뒷문, 그 문에 나있는 창문으로 커다란 돌이 날아들어 창문을 박살냈다.

"누구야!"

"무슨일이야?!"


다들 재빨리 총을 잡는다.

그 대장격인 남자도 재빨리 일어나서는 총을 잡는다.


"갑자기 창문으로 돌이..."

"바보야! 쳐들어 왔으면 총부터 쏴야지 왜 돌을 던지고 있어! 반대쪽...."



-쾅!!!


그 소리와 함께, 그들이 보고있던 뒷문의 반대쪽, 정문이 큰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고, 그 안으로 총을 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젠장!"

-탕!
-탕!탕탕!탕탕!
-탕탕탕탕탕!




대장이 눈치를 먼저 채고 몸을 돌려놓고 있었던 참이라 대장이 그 침입자보다 먼저 총을 쐇고, 곧바로 몸을 돌린 두 남자들도 총을 마구 쏴댔다.  들어온 남자는 총 한방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하고 벌집이 되어 쓰러져버렸다.



"하아...하아.....뭐야 저건?"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체? 젠장, 그럼 아까 돌 던진...'


대장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뒷문으로 몸을 다시 돌렸다.


자신의 뒤에 있던 두 남자들은 어느새인지 벌써 쓰러져있었고, 그리고 뒷문에 누군가가 서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






-탕!




















"후우"


나는 마지막 그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에 조용히 손에 총을 묶어놓은 시체를 기대 새워놓고,  내가 뒷문에 돌을 던져서 유리창을 깨면 곧바로 지현이가 정문을 엽총으로 쏴서 문을 연다.  기대놓은 시체가 안으로 들이닥치고, 그들이 정신이 팔린사이에 적들의 요란한 총소리에 몰래 섞여서 제일 뒤에있는 놈부터 하나씩 처치한다.



다행히도 맞아떨어진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쓰러져있는 녀석들의 머리에 총알을 두방씩 갈겨주고서는, 몸을 돌려 다영이를 바라보았다.











다영이는 옷이 다 벗겨진 채로, 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

".........."

"다영아"

"바보오빠. 늦었잖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미안해, 찾느라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저질, 누가 그런거 말했어?  뒤쫓아 간 놈들을 처치했으면 빨리 와야지.  여기 이 녀석들이 일행이 안오니까 의심해서 찾으러 나가려고 했잖아"


"...."

"게다가 그 어설픈 작전은 뭐야? 재들이 바보라서 다행이지 들켰으면 어쩔 뻔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