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728 추천 수 0 2010.09.08 06:11:42



 비가 왔다. 교회의 창문 밖으로 가는 빗줄기가 보였다. 고등부의 예배를 마친지 30분, 보조교사라는 직책은 의외로 해야할 일이 많기에 나는 이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청년부 예배가 시작하려면 50분 정도가 남아서 빵이나 사 먹을까 했던 난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의 일기예보는 뭘 맞춘 적이 없다니까. 이렇게 됐다면 급할 것도 없기에 나는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에는 고등부 여자애들이 모여있었다. 밖의 비는 적당히 셌다. 무슨 의미냐면, 남자애라면 무릅쓰고 뛰어나갈 수 있지만, 여자애라면 난감해 하며 멈춰있어야 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로비에 성제를 제외하고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성제의 어깨를 툭치고 '뭐하냐?'고 했다. 하지만 성제는 고개를 흔들뿐 대답이 없었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계속 내 귀를 간지럽혔다. 여자란 비가 와서 길이 막혔을 때 수다를 떠는 존재 인것 같다. 솔직히 어느 상황에 수다를 안 떠는지 궁금하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가까이 다가가서 대화 내용을 들으며 내가 끼어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대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비가 온다.->어쩌지?->기상청은 나쁘다.->수연이는 오늘 좋은 옷을 입었다.->수연이가 난감하다.->어쩌지?->기상청은 나쁘다.->수연이가 난감하다.->어쩌지?

 

이상. 무한 반복.

 

 흰색에 밝은 노랑과 분홍, 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차림새. 확실히 비싸보이는 옷이다. 저 옷을 망친다면 정말 기분이 좀 상하겠군. 수연이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난감한 얼굴로 흐린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성제를 흘끔 봤다. 그래서인가? 성제가 저기 멀찌감치 서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대화는 돌고 돌아, '어쩌지?'의 차례가 왔다.

 

 "수건을 쓰고 가는 건 어때?"

 

 갑작스런 사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시선이 집중된다. 유일하게 나와 나이가 같은 현진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말야, 지금 수연이의 문제는 저 옷을 입고 집에 가면 꼬라지가 말이 아니란 말 아니겠어? 그러니까 수건으로 가리는 거야. 그러면 최소한 다른 사람이 수연이가 누군지는 못 알아볼테니...."

 

 여기까지는 '말'을했다. 다음은 '비명'이다.

 

"끄억!"

 

 내 정강이!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내 생각은 허망히 흩어졌다. 손으로 정강이를 잡고 끙끙대며 뒤로 물러났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 정강이의 징벌자, 현진은 차갑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애들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다를 떤다. 냉정한 소녀들이여! 대화는 돌고 돌아서 도대체 끝이 어디고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저래서야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지. 도저히 이해 못 할 여자들의 특이한 점 하나, 왜 저렇게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나? 뭐라뭐라 말은 많지만 솔직히 상황은 굉장히 간단한 거 아닌가? 1.비가온다. 2.수연이는 비싼 옷을 입었다. 3.그래서 저 비를 맞고 갈 수는 없다. 4.그런데 우산이 없다. 5.그러므로 수연이는 난감하다. 이상 설명 끝.

 

 

 '비가 오지 않게 하자.' '옷을 겹쳐서 씌우자.' '옷을 벗은 다음 집에 보내서 다음에 가져가게 하자.' 등등 나는 창의적이고도 비상식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비상식성 보다는 내가 낸 의견이라는 이유로 모조리 기각되었다. 사실 받아들여지리라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다 일리는 있는 주장인데'라고 궁시렁 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들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성제는 아직까지 대화에 끼지도 가지도 않은 체 멀건히 서있었다. 아니, 그냥 서 있기만 한 건 아니다. 그는 수없는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씨익 웃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이건 어때?"

 

 귀찮음, 한심함, 성냄 등을 노골적으로 의미하는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부담되는 걸.

 

 "흑기사."

 

 "흑기사?" 현진이 말했다.

 

 "그렇지. 누군가가 저 비를 뚫고 달려 나가서 우산을 가지고 오는 거야."

 

 "오호."

 

 "어때 괜찮은 생각이지?"

 

 "괜찮네. 그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이어서,

 

 "그러면 잘 갔다와."

 

 ....라고 말했다. 아예 손까지 흔들었다.

 

 "내가?"

 

 천만의 말씀을!

 

 "그럼. 누구냐?"

 

 "아니, 대체 왜 난데?"

 

 "남자잖아?"

 

 ....를 시작으로 현진과 나의 맹렬한 말다툼은 시작됐다. 어째서 남자가 우산을 가져와야 하는가? 라는 주제는 그대로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차이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역사적으로 분담해왔던 역할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는 장엄한 여정을 거치게 되었다.

 

 현재 여자와 말싸움 하는 남자로서 말한다. 여자와 말싸움은 절대로 하지 말 것.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니까. 나는 거의 처참하게 얻어터지다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꼬리를 일단 돌리긴 했다. 그러나 대체 뭐가 '그런거'고 뭐가 '중요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기 위해 그냥 되는 대로 말을 했다.

 

 "어서 눈 앞에 놓인 일 부터 해결하자고, 수연이는 당장 우산이 필요하다니까?"

 

 현진의 잔인한 미소가 내 눈 앞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까 우산 가져와. 패배자."

 

 .....망할.

 "그런데 안돼."

 

 조금 급하게 내가 계획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에... 그러니까말이지. 꼭 내가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냐."

 

 사실 부분적으론 맞다.

 

 "다만 더 적격자가 있을 뿐이라고."

 

 "뭔소리야 그게?"

 

 "자자, 생각해보라고. 우산을 가져다 주는 기사의 역할이잖아. 그런데 누군가가 수연이를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그 누군가에게 이런 멋진 기회를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탄성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나를 향한 그 눈빛은 호기심 가득한 열망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기분 좋은 눈빛이다. 현진은 성제를 힐끗 보았다.

 

 "그래?"

 

 현진은 짖궂은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를 보고 난 생각했다, 지금 내 얼굴에도 저런 미소가 있을지 모른다고. 아니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공기가 이상해진 것 같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더 이상 이곳에 그 우울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여자애들은 지금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있다. 이런 이야기 만큼 저 또래의 여성을 흥분시키는 것은 없으리라. 현진은 그나마 침착을 유지했지만 그 와중에도 호기심에 빛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매달려서 묻기는 허락치 않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의문 가득한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그리고 지금 내 뒤에서 느껴지는 이것은 .....살기로군. 성제가 지금 나에게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수연이는 아무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있었다. 저 흥분통에선 견대내기 힘들겠지.

 

 "누구야?"

 

 여자애들 중 한명이 물어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좀 즐겨볼까나?

 

 "키가 좀 크지, 나보단 작지만."

 

 아마 남자애들한테 이랬다간, '가지고 노냐?'라면서 순식간에 멍석말이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대화를 주고 받더니 순식간에 후보자 명단을 주욱 뽑아버렸다. 얼추 후보자가 나왔다. 그 중엔 성제도 있었다.

 

 "그리고?"

 

 "눈이 커, 안경도 썼고."

 

 또 다시 열띤 대화가 진행되었다. 다시 한 번 후보자가 줄어들었다. 이제는 단 세 명이 남았다. 성제도 끼어 있었다. 다시 이어지는 스무고개. 약 세번의 힌트를 더 주었다. 하지만 후보자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줬거든. 결국 여자애들이 짜증이 나서 노려보자, 나는 뜨끔해서 슬슬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1분1초마다 짙어지는 살기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결정적인 힌트를 하나 주지."

 

 그 분노의 시선들이여, 어디로 갔느뇨! 그녀들의 순식간에 돌변하는 태도에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뭐야?"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리라. 그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솔직히 짝사랑은 그만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진도를 나가는 것이 그에게 최소한 지금 보다는 이로우리라. 애초에 그런 마음으로 계획했으니까. 난 그저 그 과정을 최대한 즐긴것 뿐이라고. 이 짧은 시간에 자기 합리화는 완성되었고, 나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말했다.

 

 "여기 있어." 라는 말과 동시에 나는 성제를 돌아봤다. 그를 놀리며 즐거워 할 시간이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이미 바람이 되었으니까. 성제는 초인적인 속도로 빗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여자 애들의 '어머. 어머.' '성제 힘내!' '꺄악!'하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아마 들렸겠지. 음속으로 달리지는 못 했을테니. 잠시 후 성제는 어딘 가에서 우산을 가져왔다. 그는 우리 모두의 박수갈채 속에서 수연이에게 직접 우산을 건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는 다시 바람이 되었다. 거, 귀엽네. 나는 한참을 웃었다. 무책임한 형에게 한 어설픈 연애상담은 이렇게 즐거운 해프닝으로 이어 질 수도 있는 법이다. 성제가 즐거워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런 건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제에게는 허무한 일이겠지만 그 우산은 쓰이지 않았다. 엄청난 수닷거리를 제공받은 그녀들은 그대로 휴게실에 눌러앉아 제대로 수다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그쳐서 구멍가게에서 빵을 사먹고 올 때까지도 그녀들의 수다는 그치지 않았다. 난 유심히 그 대화를 듣고, 또 수연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빵을 문 채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올라갔다. 핸드폰을 꺼내 성제에게 문자를 보낸다, '성제야 기뻐하거라'라고 시작하는 문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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