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1-
그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벌써 세 달이 지났다.
그녀가 어쩌다 들어오는 날마다, 나는 서글퍼졌다.
새벽이 끝날 때까지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보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뛰어나가면, 그녀는 신발을 벗다말고 멍히 내 얼굴을 보다,
“얼른 나가봐야 돼.”
하고는 방에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들어가려 하면 그녀는 옷 갈아입을 거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럼 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기사를 읽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달려 나가는 것이다. 얼른 뒤에서 와락 안으면,
그녀는 나를 끌고 나가며 신발을 대충 우겨 신으며 말했다.
“놔. 얼른 가야 된다고.”
“나랑 이야기 좀 해.”
그녀가 내 손을 걷어내며 말했다.
“놓으라고. 좀, 진짜 남자가 짜증나게 왜 이래?”
“하루 쯤 쉬면 안 돼? 매일 매일 이러잖아! 아프다고 하고,”
“안 돼. 놔. 좀. 진짜. 왜 이래?”
딸깍, 하고 문이 열린다. 벌써 여기까지 끌려와 버렸다. 계단 위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샤워 좀 하고 집 청소 좀 하고. 담배 냄새 때문에 짜증나.”
그런 식이었다. 어쩌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기도 하지만, 거의 이런 패턴이다.
그녀가 나가고 나면 나는 쌓였던 피로를 주체 못해 잠든다. 일어나보면 집은 어둠에 삼켜져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불을 켜고 청소를 하려 해도 천정의 누런 자국과 싱크대에 가득 쌓인
그릇, 널브러진 이불, 바닥 여기 저기 늘어서 있는 깡통, 그리고 거기 쌓인 담배꽁초를 보면 뭘
하기가 싫었다. 다시 집을 어둠에 내어 준다.
배가 고파 역 앞 편의점에 가 컵라면을 사고 계산하려는데, 눈앞에 콘돔이 있었다. 혹시나, 하며
아르바이트생에게 물건을 넘겨주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바코드를 찍은 뒤, 검은 봉투를 꺼냈다.
나는 그냥 가져가면 된다고 하고는 거스름돈만 받고 나왔다. 주머니 속에서 그것이 내 다리를 쿡쿡 찔렀다.
집에 와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의 방은 책과 벗어 던져 놓은 옷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정리를 해줘야
할까 망설였지만 이건 그녀가 해야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두었다. 침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아직 쓰지 않은 콘돔 상자가 꽤 쌓여 있었다. 거기 방금 샀던 것을 넣고 다시 내 노트북 앞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문 뒤 웹서핑을 시작했다. 담배 연기가 방을 감싸, 마치 사후 세계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난 살아있는 걸까?
-2-
의심이 간다. 의심을 하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그녀가 가진 옷이 너무 많아 일일이 뭐다, 뭐다 하고 지적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왔다 가고나면 속옷들이
꽤 사라지곤 했다. 때로는 종이가방에 대충 우겨넣은 뒤,
출장.
이라고 하고는 며칠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집에 돌아올 때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들어
오는 것이다. 대체 왜 옷을 그렇게 많이 들고 나가냐고 하면, 그녀는 지방 출장이 워낙 잦으니 어쩔 수 있냐고
말하고 얼른 나가버렸다.
내가 기거하는 인터넷 모 커뮤니티에 조금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확실하다, 하는 답변이 달렸다. 바보같이 굴지 말고 그녀에게 묻던가, 헤어지던가 하라고. 심지어 어떤 녀석은
내가 직접 가서 그녀를 손봐주겠다고 했다.
내가 먼저 흔들리면 안 된다,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매일 매일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기다렸고, 그녀의
본가에 전화를 가끔 하며 안부를 물었다. 며칠 뒤에 그녀의 동생이 새로 얻은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녀가 조금 일찍 왔다. 아직 새벽이 찾아오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녀는 피곤하다며 긴 원피스 잠옷으로
갈아입고 온수 버튼을 눌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걸 억지로 붙들어 그녀의 방에 끌고
들어가 키스를 했다. 씻지 않아 바깥의 냄새가 좀 어려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땀 냄새마저 좋았다. 겨우
겨우 돌아온 이 감촉이 너무 좋았다.
“노, 놔. 씻을, 읍, 꺼,”
약간의 전희를 끝낸 뒤 침대에 윗몸을 걸쳐주고, 엉덩이를 붙잡아 뒤에서 했다. 좋아서 몸이 춤을 췄다. 그녀의 몸을
내가 칭칭 감는 기분에 날아갈 것 같았다.
“… 끝났지? 나 씻을래.”
말 그대로 ‘끝낸’ 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벽을 붙잡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얼른 뒤에서 안고 무슨 말을 하려는데
―오늘의 감상이라던가, 우리 내일이라던가―, 그녀는 툭, 하고 내 손을 치고 화장실 안에 들어가 샤워기를 세게 틀었다.
난 대충 현장을 정리한 뒤 현관을 단단히 잠갔다.
샤워실엔 안개가 가득 끼여 있었고, 불지옥처럼 푹푹 찌고 있었다. 찬물로 몸을 씻어내고 나와 보니, 그녀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고 들어가 보니 침대 구석에 몸을 꼭꼭 만 채, 어깨만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잠들 수 있을 이가 없지.
“우리 이야기 하자.”
하고 어깨를 만졌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꾸물거리며 더 구석으로 가며 말했다.
“잠 좀 자게 해 줘.”
“잠보다 중요한 일이 있잖아. 그러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쳐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만큼 괴롭혔으면 됐잖아. 제발, 나 좀 자게 해줘.”
“내가 괴롭혔다는 거야? 너도 즐거웠잖아.”
“뭐래. 미쳤어.”
그녀가 몸을 이불로 더 돌돌 말려는 걸 억지로 잡아 당겼다. 그녀는 몇 번 저항하다, 갑자기 이불에서 빠져나와
침대 밖으로 나와 말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넌?”
“무슨 이야기냐니.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나 듣고 싶기도 하고, 우리 미래도 생각하고 싶고. 아 맞아, 어머니께
이야기 들었어? 네 동생 곧 여기 올라온다고,”
“다 알아. 다 아니까 제발, 제발 좀 내버려두라. 응? 왜 이렇게 징징대? 피곤해, 나 피곤하단 말이야. 제발, 제발
좀. 응?”
“나도 피곤하다고. 그러니까,”
“됐어. 나 피곤해.”
라고 한 뒤, 날 밀어내고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가 버렸다. 난 그녀의 옆에서 무슨 이야기든 꺼냈지만 답은 하나도
없었다. 난 이야기하는 걸 포기하고,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할 만큼 쓸쓸해져 그녀가 감고 있었던 이불을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참새우는 소리가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지 모를 햇빛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귀가 따가워졌다.
그날 밤, 그녀가 무척 일찍 돌아왔다.
정시 퇴근했으면 딱 집에 도착했을 시간인, 8시였다.
-3-
그녀의 동생이 왔다. 그녀와 공통점이라고는 키뿐인 녀석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그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는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바로 뭐야 이게, 라고 말하고는, 현관 구석으로 맥주병을 밀어 넣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것들을 이리 저리 밀어내며 거실로 들어오려다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녀의 방으로 피신했다. 나는 다시
노트북에 붙었다.
그는 내일부터 바로 일하러 가야된다고 하며 냉장고를 열어본 뒤, 싱크대 쪽에 갔다. 그가 뭔가를 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역한 냄새가 났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가 음식물
쓰레기봉투 안에 음식들을 쓸어 넣고 있었다.
“밥도 쉬었잖아요?”
“그냥 하기 뭐해서. 그냥 둬.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릇들이 더 심하게 요동치고, 바닥에 있던 것들이 편의점 봉투 안에 담기고 있었다.
그가 현관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폭발해버렸다.
“그냥 좀 둬. 좀 있다 해도 되잖아!”
“내가 싫어서 그러니까 거기서 컴퓨터 하고 계세요. 나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냐. 걱정 마요. 평소에도 자주 했던
거니까.”
결국 내가 중국집에 주문을 넣는 걸로 협상을 했다. 하지만 협상이 끝난 뒤에도 그의 손은 바삐 움직였고, 자장면이
도착했을 땐 바닥에 두 사람이 앉아 식사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었다.
그가 말했다.
“누나는 언제 와요?”
“새벽되기 전엔 올 거야.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계속 있어야죠. 회사가 가까운 곳에 있거든요.”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네.”
그녀의 옆에 남자가 있었다. 키가 무척 크고, 얼굴이 깔끔한 남자였다. 드레스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어딜 보나
회사원임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릇을 치운 뒤 그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셨다. 그는 ‘굳이’ 내게 어머니께 전화 왔음을 액정으로
확인시켜 준 뒤, 내가 잘 있다느니, 와서 자장면을 먹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옆방으로 들어갔고, 그대로 잠든
듯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쪽이 내 남자친구야.”
무슨 소리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함께 잤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했다. 물론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추정은 있었지만, 분명 그녀는 나와 하나인 사람이었다.
“이제 됐지? 앞으로 연락하지 마. 전화번호도 바꿀 테니까. 이 집에서 나가. 나랑 내 동생이 여기서 살 거니까.”
“네 동생이 살건 말건 여기는 우리 집이잖아.”
“맞아. 우리 집이지. 그러니까 나가.”
달려드는 날, 그 남자가 떠밀었다. 인상을 험하게 쓰고 병이라도 들고 치려 했지만 그녀가 그 남자의 팔을 잡아당긴
탓에 무슨 실랑이가 일어날 틈도 없이 다 끝나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싶어 멍히 있는데, 그가 주머니에서 차
리모컨을 꺼냈다.
잠겼던 문이 열렸다. 혹시 그녀인가 싶어 바다에서 뛰쳐나와 보니, 동생이었다.
아침 일찍 회사에 나간다고 사라진 그가 반쯤 눈이 풀린 채로 들어와 무슨 말도 없이 샤워하러 들어간 뒤, 난 그의
핸드폰을 열어 봤다. 새까만 색에 은색 띠가 둘러진, 나온 지 2년은 훨씬 지난, 복고풍 컨셉의 핸드폰이었다.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통화 버튼을 누른 순간, 비밀번호 입력창이 떴다.
그가 다 씻고 나온 뒤, 나는 저녁을 함께 먹자고 권하며 끌고 나왔다.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감자탕 집에 앉힌 뒤,
술을 한잔 건네주며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가 몇 개월이나 집에 제대로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까지.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점점 더 옛날, 그녀를 처음 휘감았던 날까지
돌아가고 있었다. 잔이 비고나면 서로 빈 곳을 채워주었다.
그가 말했다. 혀가 꼬이진 않았지만, 얼굴이 새빨간 것이 곧 부풀어 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나가 잘못한 게 맞네요.”
내 편이 생겼다. 약간 기뻐졌다.
“이왕 된 거, 누나 회사로 가는 게 어때요?”
“그렇게 하면, 나쁜 소문이 난다고, 어린애처럼 굴 생각 없어. 서로 이야기해서 풀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해.”
“그래도 그러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감자탕을 다 비운 뒤, 우리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앞장서고, 나는 뒤에 섰다. 그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 그 장단을
맞추면 몸에서 힘이 다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4-
명백히 그녀가 배신을 한 것이다. 그녀의 집에 알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겠다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동생이니만큼 그에겐 바뀐 번호를 알려줬을 것이다. 이번엔 짬뽕을 시켜 먹이며 말했다.
“동생. 누나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줄래?”
“형, 안 찾아갔어요? 이틀 지났는데.”
“왔을 때 내가 집에 있어야 이야기를 하잖아. 엇갈리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알려줘.”
그는 그대로 짬뽕을 내버려 둔 채,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이가 사라져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야! 번호 알려주라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알던 그 방과 뭔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정리가 되었다,
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야, 나 네 매형이다.”
“알려주지 마라, 고 누나가 말했어요.”
“넌 누나가 말한다고 다 들어 주냐? 너 바보야? 알려주라고! 이야기 잘 되면 다 끝난다니까!”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나가 잘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난 누나편이에요. 어떤 잘못을 했든.”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척 많이 화를 냈던 것 같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다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 니들 꼴리는 대로 잘 해봐라.”
하고 노트북에 붙었다. 그리고 한껏 신나게 게임을 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나와 저녁을 먹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깐 내게 얼굴을 비춘 뒤 나가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물어보면 밥은 먹었다고 말했다. 어떨 때는 대놓고 삼각 김밥을 사서 들어와 그녀의 방 안에서 먹은 뒤 쓰레기만
던지고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점점 그녀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오지도 않고 있는 점은
똑같았지만, 그녀의 동생이 내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내 살을 파고들었다. 그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집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밤에 나가 그녀를 만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잘 아는 친구의 집에서 며칠 머물기로 하고, 짐을 싸 나가기로 했다. 원래 내 것이었던 책상과 노트북, 게임기와
TV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하고 옷가지를 라면 상자 안에 넣은 뒤, 내가 쓸 식기를 몇 개 쌌다. 난 그에게 아침 일찍 갈
거라고 말했고, 그는 알겠다며 아침 일찍 깨워주겠다고 하며 내게 열쇠를 달라고 했다.
“야. 여긴 내 집이야.”
하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잠깐 갸웃하더니,
“나가면서 왜 열쇠를 가지고 가요?”
했다. 이 자식이, 싶어 열쇠를 내주지 않기로 했다. 그도 내게 더 요구하진 않았다. 난 잠들기 전, 그에게 난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웃기게도 그가 늦잠을 잔 바람에 아침이 무척 바빠졌다. 미리 분리해놓지 않은 책상을 분해하느라 시간이 더 늦어졌고,
그는 미안하다고 하며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용달차 아저씨는 최대한 일찍 오라고 해 놓고 이게 뭐냐며 핀잔을 줬다.
친구의 집에 짐을 풀어놓은 뒤 PC방에서 저녁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때로는 내 집 근처에 숨어 있었다. 내가 이사를 나간
그날, 정말 그녀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집에 갔다 금방 빠져 나왔다.
말을 걸 틈도 없이, 막을 틈도 없이 멀리 사라졌다.
아니, 말을 걸 기회가 분명 있었다. 그냥 달려들면 그만이었다. 사랑한다 말하면 전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꿈도 꾸었었다.
그런데 난 달려들지 못한 채, 그냥 멀리서 서성이고 있었다.
-5-
집은 내가 떠난 이후부터 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동생은 내가 나간 직후 남아있는 가구를 재배치했고, TV대신 새로 산 PC를
거실에 뒀다. 선반에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이고 냉장고가 텅 비어버렸으며, 쓰레기는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발코니인지 창고인지
모를 공간에 박혀 있던 책들도 모조리 실려 나와 고물쟁이들 손에 인계되었다. 텅텅 빈 책장에는 그의 책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옷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어쩌다 PC로 서핑을 하고, 물을 마시다 시간이 되면 빠져나와 친구의 집에 갔다.
그러다 하루는 내 집에서 자기로 했다. 문이 잠겼다 다시 열렸다. 그는 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기 왜 왔어요?”
“왜냐니, 우리 집이니까.”
그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그녀가 집으로 오는 패턴 자체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무튼 난 내 집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난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되돌아오기만 하면 전부 용서할 수 있다고. 그러니 핸드폰 번호
좀 알려달라고.
그는 또 거절한 뒤 적당한 책 하나를 꺼내들고 그녀의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결국 한숨 자겠다는 계획을 실행하기는커녕 쫓겨나듯
나가버렸다. 그가 하는 행동이 전부 그녀가 하는 행동 같아 숨이 턱턱 막혔다.
그가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배웅할 필요 없다고 하자, 그는 나는 따로 갈 곳이 있어서요, 하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어머니께 연락을 했다. 그리고 제발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애매한 답변을 하며, 점점 목소리를
줄여나가셨다.
다음 날 또 가고 또 가도, 변하는 게 없었다. 그녀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동생이 그녀에게
연락해, 집에 오지 말라고 한 것 아닐까? 그녀의 집안에서 날 몰아내려는 것 아닐까?
모든 게 내 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런 기분으로는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눈물과 술을 함께 들이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집을 되찾으러 가기로 했다. 친구에겐 곧 짐을 뺄 거라고 선언했다. 그는 잘 됐으면 좋겠다며 아직 풀지도 않은
라면 상자를 출구 쪽에 놨다. 짐을 싹 싼 뒤 용달차를 불러 내 집 주소로 갈 거니 준비해달라고 했다. 아침 일찍 갈 거라고.
-6-
아침 9시, 집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청소를 한 거려니, 싶어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가 보니 그 많던 그녀의 옷도, 가스레인지도,
그릇도, 침대도, 동생이 가져왔던 것도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쓰레기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짐을 가지고 내려오는 용달
아저씨에게 잠시만, 한 뒤 옆집 문을 두드렸다.
“아, 그 총각 말이야? 어제 저녁에 이사 갔어.”
“그 총각이라뇨. 제가 이 집 주인이었잖아요!”
그럴 이가 없다, 했다. 어제 왔을 때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가 갈 곳이 있다하며 나갈 때도 어디 한 곳에도 이사를 간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저 쓰레기들이 사라졌을 뿐이다. 쓰레기가 빠졌을 뿐인데 집이 텅 비어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혼자서 참 열심히 하더라고. 어디서 상자를 가득 구해 와서 거기에 가득 싸는데, 한 스무 박스 넘게 나왔던 것 같더라.
주인집 아가씨가 싱크대 부서진 거랑 집세 밀린 것 때문에 보증금 이야기를 했다던데.”
얼른 전화를 걸었다. 끊어질 듯 말듯, 소리샘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리기 직전 음악이 끊겼다.
“여보세요.”
“어디, 어디 있어?”
그는 답하지 않았다.
긴 이야기를 했다. 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어떻게든 다시 되돌리고 싶다고. 그녀가 지은 죄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돌아오게 해 달라고. 번호를 알려주기 싫으면 네 핸드폰으로 연락해 달라고.
“이야기는 해 볼게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제가 실망한 만큼, 누나도 실망했을 테니까. 뭐 하나 분명히 말해도 되요?”
“뭐? 뭐 말이야?”
“앞으로 형이랑 저는 적이 될 거라는 거 말에요. 누가 잘못했는지 알아도,”
“누가 잘못을 했고 안 했고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 응? 다 되돌릴 수 있다니까.”
잠깐의 침묵.
“앞으로,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텅텅 빈 집을 다시 둘러보았다. 누렇게 변한 벽지와 천장 외에 나와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의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엔가 그녀와 내가 머물렀다는, 그리고 예전에는 사랑을
했고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는 증거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건 없었다. 성실하디 성실한 동생은 모든 쓰레기를
봉투에 담에 바깥에 던져버렸고,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먼지 하나까지 깨끗하게 밀어냈다. 그에겐 구별이라는 게 없었다.
난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 누렇게 얼룩진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이전을, 그녀와 함께 살며
느낀 감촉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과거는 그가 깨끗이 말소된 이 공간에서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그녀가 없는 시간마다 그녀를
떠올리며 행했던 것들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제발, 되돌아와.
처음 이 곳에 이사 왔던, 사랑이 흠뻑 차오르던 그날처럼 텅텅 빈 방에서 그렇게 외쳤지만, 그 무엇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난 이곳에
왜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이전에는 말을 하던 벽이 단단히 침묵한 채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서 벗어나,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용달 아저씨의 경적소리 때문에 난 방을 나서야 했다. 계단 쪽으로 나오자,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되돌아보니, 거기에는 아직도 내가
있었던 그때의 어둠이 가득 메어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내 손을 벗어난 모든 것이 사라져, 흐릿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