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했다. 아니 취해야 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었거든. 갈색 병에 담긴 황금색 액체가 나의 뺨을 타고 거칠게 흘러 내렸지만, 닦을 생각 따윈 없다. 그래야 내가 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위장에 처넣은 게 몇 병이더라.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나는 아직도 취하지 못한 게다. 마지막으로 부어넣은 맥주병을 거칠게 바닥으로 팽개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책상위의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노트북이 부팅되는 동안 나는 냉장고로 걸어가 술 몇 병을 더 꺼내 들었다. 재떨이와 담배도 찾아 책상위에 함께 올려 두었다. 어차피 밤은 길고, 나도 취하지 못할 것 같으니 잡문이나 끼적거릴란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그 아이의 모습이 차츰 기억나기 시작했다. 바람처럼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난 그 아이는 예뻤다. 요즘 tv에 나오는 아이돌. 딱 그 아이돌을 닮았다. 뭐라고 부르더라.... [소녀패]라고 했던가. 숏팬츠와 후드티를 입고 나와 무대에서 섹시 춤을 춤추는 애들 말이다. 그 아이도 그랬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숏 팬츠에 노란색 반팔티를 안에 받쳐 입고, 그 위에는 소매 없는 흰 후드 자켓을 허벅지까지 늘어뜨렸으며, 머리에는 핑크색 야구 모자를 눌러 쓴 10대 소녀였다. 여리디 여린, 보호받아야 마땅할 10대 여자아이. 하지만, 반대로 보호가 필요한건 나였다.

“아저씨, 입술 꽉 깨물어.”

짜악.
경쾌하게 싸다구를 날리는 소리. 맞는 건 나고, 후려치는 건 보호받아야 마땅하게 생긴 그 여자아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라 온 손에 나는 이렇다 할 방어태세도 취하지 못한 채 오른 쪽 뺨을 내주고 말았다. 눈물 나게 매서운 손을 가졌다라고 생각한 동시에 매끈한 다리가 내 가슴께로 날아와 박혔다.

끄엑!!!
그다지 남자답지 못한 소리를 내며 나는 2m를 날아가 떨어졌다. 그 후로도 구타는 계속되었다. 한마디 말도 못한 채 무작정 두드려 맞았지만, 두 번째 강타당한 명치 때문에 말 대신 ‘억’, ‘윽’, ‘컥’, ‘큭’, ‘하악하악’등 별로 창의적이지 못한 외마디 비명만 내뱉었다. 몇 분쯤 지나자 녀석은 지쳤는지 폭행이 잦아들었고, 나는 몸을 잔뜩 수그려 몸을 보호하면서 겨우 숨만 헐떡이며 말할 기회를 노렸다. 입 안에서 비릿한 맛과 단내가 동시에 났다. 자율신경계를 상실한 것 마냥 침은 계속 흘러서 땅바닥을 적셨다. 눈꺼풀도 무거운 걸 보니 눈물도 쫌 났나보다. 겁내 무서웠다. 좀비보다도 무서웠다.

“하아..하아.. 아저씨, 이제 그만 정체를 밝히는 게 어때? 엄청 힘드네. 끈질겨.”
어깨 숨을 쉬며 지친 표정으로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소녀는 말했다. 동시에 그 아이가 신은 파란색 캔버스 운동화가 가슴을 감싸 쥔 내 팔뚝 위에 얹혔다. 왜 때렸는지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팔뚝에 얹힌 신발에 대한 공포가 몸으로 다가와 나는 덜덜 떨었다. 대답이 없자, 그 소녀는 발에 체중을 살짝 실었다.

“말하는 법 잊어 버렸어, 아저씨?”

짜증을 섞어서 다시 질문했다. 모자에 가려서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소녀패]의 태욘만큼 예쁘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그 얼굴을 살짝 찌푸려 주름을 잡고 얘기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라고 타자를 치다가 오른손으로 마구 뒷머리를 긁으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욕지기가 났다. 복날 개마냥  맞아놓고, 그 아이의 얼굴이라든가 가슴팍위에 얹힌 다리를 타고 올라간 내 시선이라던가... 그 위를 타고 넘어 숏팬츠 사이에 속옷이라도 비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찬 눈빛을 하다가 몇 대 더 얻어터진 걸 생각하면 자신의 생각 없음에 더더욱 화가 났다. 애꿎은 담배만 재떨이에 비비며 무잡스레 늘어선 책상 위 잡동사니를 한손으로 거칠게 밀어 바닥으로 내쳐버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온라인 게임인 Wowoong을 하며 거칠어진 속내가 풀어보고자 로그인을 했다. 로그인 하자마자 나의 클루들이 보낸 쪽지들이 하나 둘 튀어 오르더니 이윽고 쪽지들로 화면이 가득 찼다.

[형,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 커뮤가 시끄러워요.]
[오빠, 설마 당한거야?]
[성북지부짱이 설마~]
[일은 해결했나요?]
.
.
.

채 쪽지들을 읽기도 전에 나는 [대화방]으로 강제소환 되었다. 제길 로그인하는 게 아니었는데........갑자기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하나둘씩 클루들이 속속들이 [대화방]에 [입장]했다.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며 방금 있었던 일을 마저 정리하고자 대화창을 시작바(bar)에 내려놓고, 다시 타이핑하기기 시작했다.

“아, 저...왜 이래......이러세요.”
째려보는 소녀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경어가 튀어나왔다. 물론, 그 아이가 주먹을 다시 그러쥔 걸 봤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소녀는 몰라서 물어?! 하는 표정으로 말 대신 벌어진 자신의 흰 후드 자켓의 한쪽을 잡아 내 밀었다. 이래도 모르겠냐는 식이다.

“저..저... 말로 하세요. 폭력은 좋지 않아요.”

나의 이 말에 그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쪽 발을 내 위에서 치웠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춤하다가 그 손을 잡았고, 역시나 보기와는 다른 그녀의 억센 힘에 의해 일으켜져 앉을 수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가드(?)를 풀고 손을 들어 흘린 침과 피를 닦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정중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에 나는 앉아서 어안이 벙벙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픈 턱을 부여잡고 그대로 돌이 되었다. 갑자기 때려놓고, 갑자기 사과라니? 아, 갑자기는 아니었지. 입술 꽉 깨물라고 선전포고는 했지.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여기서 현피뜨자고 했던 [나이트 후드]의 ‘성북지구짱‘ 인 줄 알았어요. 마포구는 저희 [나이트 자켓]관할이라 가끔 있지도 않은 물리력을 행사하러 [나이트 후드]분들이 넘어오거든요. 덕분에 오늘 대표로 제가 나왔는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약속 장소에는 문제의 [좀비]도 안 보이고 대신 아저씨가 후드티를 입고 있어서 저는 [나이트 후드]에서 오신 분으로 착각했지 뭐에요. 거기다가 일반인에게 폭력행사까지 하다니.. 위에서 알면 가만 안 놔 둘텐데.... 앗차, 이건 일반인에겐 비밀인데...어쩌지...” 안절부절 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가보다. 아까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정말 귀여웠다.

“아..아 괜찮아요. 그..그럴수도 있는거죠..뭐..하..하..하..”

그녀는 거듭 죄송하다며 사과하고는 약값에 보태어 쓰라고 현금 5만원을 쥐어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바닥에 앉아 그 돈을 힘껏 쥐고는 그 길로 맥주를 사갖고 터덜터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숨을 크고 깊게 들이쉬고는,
“씨~~~~~~~~~~~~~이 바아아알!!!!!!!! 열라 쪽팔려!!!!!!!!! 젠장할!!!!!!!!!!!!!!”

있는 힘을 다해 벽을 치고, 몸을 던지고 바닥에서 미친듯이 굴렀다. 그리고는 무작정 술을 들이부었다. 찢어진 입안이 따가웠지만,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내일쯤 [나이트 자켓]에서는 [나이트 후드의 성북구지부짱]이 현피가 무서워 숨었다는 이야기가 돌겠지. 하지만, 그게 훨씬 났다. 한참 나이어린 여자아이에게 뒤지게 얻어터졌다는 얘기보다는 덜 쪽팔리니까. 제길슨! 난 거기다가 눈물까지 흘렸지 아마.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여유롭게 [좀비]사냥하고 나서 어슬렁거리며 노닥거리다가 선수를 빼앗겨 쪽도 못쓰고 당했다는 얘길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못된 계집애, 선빵으로 얼굴부터 때려서 자존심 확 구겨놓은 다음에 패다니....... 얼굴이 예뻐서 처음엔 반항도 못하고 맞다가 나중엔 쪽팔려서 그대로 쭉 모른 척 했다는 걸 누구한테 말 하냐고!!! 그러니까 이렇게 노트북에 이 억울함을 무작정 내려 꽂는게 아닌가!! 아우!!!!!!! 쪽팔림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완전 통감!!

♪♩♬띠로로롱~♪♩♬!!
♪♩♬엽때여, 전화 받으세요! ♬♪♩♬♡♡

[대화방]에 입장해서 잠수를 타니까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선을 뽑고, 핸드폰 전원을 끈 후에 대화창을 클릭해서 내가 살아있음을 보였다. 그리고 내가 낸 [결론]을 알리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성북지구 클루 여러분, 급작스런 사정으로 인해서 하루 종일 로그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항간에 제가 마포구 [나이트 자켓] 지부쪽 분과 현피를 뜬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런 비문화인 같은 행동은 ‘비씨아웃사이덜‘의 소수 무뇌아들이 하는 행동이지 팀을 책임지고 있는 지부장이 해야 할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디 낭설에 휘둘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포구 좀비사건]은 [나이트 자켓]쪽에서 해결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희 ’성북지부‘에서는 이 일에서 손을 떼고, [나이트 후드] 본부와 협의하여 사실 확인 후에 다음 전달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북지부장]이 [강제 퇴장] 하셨습니다.*

마치 내 의도가 아닌 것 마냥 [대화방]에서 튕겨나가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러면 [대화방]으로 강제소환 당할 일도 없을 테지.

쏴아---------
밖에도 내 가슴 속에도 씁쓸한 비가 내린다.
그나저나 오늘은 담배도 술도 모두가 쓰다. 취할래야 취할 수가 없는 밤이다. 내 글은 끝나가지만, 밤은 여전히 그 그림자를 쓸 데 없이 어둡고 길게 늘어 뜨려놓았다. 내 변명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