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드페이 가문에는 특이한 인간이 하나 있다. 그는 성인, 즉 성스러운 인간이라고 불리며, 그의 검은 책에는 오직 하나만의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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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조용했다.

주위는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덩굴줄기들이 땅을 헤집으며 제멋대로 뻗어 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숲에서 살아있는 동물이라고는 나와 내 동료 셀티어, 그리고 미치광이 살인마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방금전까지 내 동료였던 것의 잔해를 바라보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한 그루 떡갈나무의 양분이 되어 있었다. 대장이 무슨 나무가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워낙 처음에 당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냥 본가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부모님의 눈총이 두려워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딴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걸까. 어차피 난 지금 죽을 텐데. 나를 노리는 것은 도시 하나를 전멸시킨 괴물이고, 나를 지키는 것은 고작 한 사람의 칼리드페이, 거기에다 그녀는 애초부터 전투계가 아닌 추적계다. 오래 버텨 봤자 십 초 남짓...아니 대장이 당한 속도를 볼 때 그 절반도 못 버틸 확률이 높다. 참고로 그는 우리 가문에서도 최강자에 속했었다. 그의 환상적인 소검 다루기는 모든 가문원들에게, 심지어 어떤 것에도 의욕이 없는 나에게까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는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고 상대를 찌르는 것에 달인이었지만 그를 공격한 것은 상대의 검이 아니라 그의 뱃속에서 나온 나뭇가지였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무술가라고 할지라도 내장까지 단련할 방도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뛰어난 것과는 거리가 먼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빌어먹을. 무슨 소용이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여기와서 이렇게 추한 방식으로 죽는 게 뮐께서 내리신 내 운명이라면, 대체 나의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지?

"안티작! 안티작! 정신 차려!"

셀티어가 나를 부른다. 왜.

"정신을 놓고 있는거야? 그런 거 하기 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옮겨!"

어째서 그런 짓을 해야하는 거지? 그건 헛고생일 뿐이야. 우린 여기서 모두 죽을 텐데. 아니, 아니군. 나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너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는 나와 다르게 우수한 가문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퉁명스럽게(생각은 그렇게 했다지만,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관계로)내밷었다.

"다리가 망가졌어. 몸에 힘도 빠졌고. 이런 상태에서 나는 짐이야. 셀티어. 지금이라도 나를 버린다면 너는 살 수 있어."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혼란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 눈에 망설임이 어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쐐기를 박자. 나 대신에 셀티어가 살아난다면 세계적으로는 이득이겠지?

"서둘러. 그놈이 오고 있어. 난 이곳을 막지 못해. 다만 그녀석이 나를 죽이는 동안 잘하면 너는 도망칠 수 있을거야. 당장 뛰어간다면 말이지."

안절부절 못하는 다리, 흔들리는 눈, 붉어지는 뺨. 나는 그녀가 내린 결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지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옹호해 주었었다. 물론 그것은 이곳보다야 훨씬 안전한 본가 내에서의 이야기였을 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그녀가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안티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도와주러 올게. 약속할게."

그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웃었다.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는 고통의 단말마였지만, 그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도와주러? 내 시체를 찾아주러 오겠다는 뜻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겨우 이뤄낸 일을 망칠 수는 없지.

"그래. 믿을테니까, 나를 살리고 싶다면 빨리 뛰어."

사라져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덧붙였다. 이건 그나마 나를 잘 대해주었던 너를 위해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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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된 후, 나는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죽기 편한 자리를 찾기 위해서다. 마침 아늑해 보이는 나무 둥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주변에 살점 비슷한 것이 흩어져 있었고, 나는 신경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얼마 뒤에 나도 저 비슷한 것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뒤 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않자마자 나는 기막힌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살인광이 내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확신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군.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나 동료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놈이었다. 몸의 굴곡으로 봐서는 여자 같으니 그년이려나.

"옆에 앉아도 돼?"

...좀 많이 황당했던 것 치고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지극히 논리적이어서 나도 놀랐다.

"숲을 만든 건 너잖아. 그러니까 네가 주인이지. 맘대로 해."

그놈(혹은 그년)은 납득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런 분위기가 지속되자 나는 이놈(혹은 이년...헷갈린다. 그냥 `놈`으로 하자.)" 에게 뭔가 말이라도 걸어서 이 분위기를 종식시켜야 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단심판관과 뮐을 부정하는 살인마가 처음 만났을 때는 뭘 물어봐야 하지. 내가 사로잡혔던 심각한 고민은 그놈이 먼저 말을 검으로서 사라졌다.

"저기, 네 이름이 뭐야?"

시작이 좋군. 나는 대답해주고, 그에 어울리는 다른 질문으로 이어주었다.

"안티작 칼리드페이. 애칭은 안티즈. 별칭은 무능력자, 해파리, 걸어다니는 먹구름 등이지. 그러는 너는 이름이 뭐냐?"

그러면서 옆을 돌아봤더니 그놈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봐준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기회가 이놈에게 몇 번이나 있었을까.

"부모님은 이에스라고 불렀어. 성은 람드갈이고, 애칭은 기오라므뉴, 부모님이 지어준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지어준 거야. 별칭은......음...부모님이 만들어준 건 딱히 없는데, 뭐 레드 잉크니 시원의 짐승이니 있었던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면서 나의 마음 속에는 아까전에 느꼇던 황당함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기오라므뉴는 `유일한 평등은 무었인가`라는 신학적 질문에서 나온 문구로서, 그 답은 `죽음`이었다. 레드 잉크는 일반적으로 역사사가들이 전쟁을 묘사할 때 쓰이는 관용어다. 시원의 짐승에서 시원(時原)이란 `시간의 근원` 을 뜻하는 말인데, 당연히 그건 허무, 파멸,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 세 단어는 모두 그놈에게 우리가 붙여 준 별명이고, 애칭과 별칭 따위하고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저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본명은 꽤 났군. 이에스라, 평범한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뮐로안(제 1계급 신인간)출신이라고 했었지.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놈은 어릴 적에 능력이 폭주해서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도주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폭주하기 전에 이놈에게는 어떤 인생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놈이 잠시 측은해졌다. 이놈도 결국에는 희생자인가. 이 생각을 내 부모님께 들킨다면 노발대발 하시겠다는 상상도 들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여기서 죽을 테고, 부모님은 아마 구차하게 살아있는 아들보다는 `영광스럽게 전사` 한 죽은 아들이 더 자랑스러우실 것이다. 내 사고가 미친듯이 뻗어나가는 것 - 우울한 방향으로 - 을 막아준 것은 녀석이 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너는 이단심판관이야? 이단심판관은 이단들을 처치한다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해주었다.

"그래. 맞아. 우리는 뮐과 올바른 신앙에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맏고 있어."

그리고 나는 부적격자였다. 나에게는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신앙과 믿음도, 그렇다고 반대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으므로, 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이단이란 건, 한 입장에서 어떤 것에 반대하는 모든 것들이야?"

놈의 질문에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응."

"그럼 나한테 너희들은 이단이겠네?"

그렇지... 잠깐, 뭐라고? 나는 갑자기 혼돈으로 떨어졌다. 떠듬떠듬 대답을 해 보려고 했으나 문장이 짜여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뮐 교의 교리에 그다지 큰 존경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허나 이렇게 충격적인 질문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지, 그놈이 말한 것을 틀렸다고 반박해 보려고 해도 마땅한 논리가 없었다. 그걸 가지고 나를 뮐 교 신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건 맞는 말이었으니까. 우리가 이단으로 취급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이단이라는 그놈의 주장에 허점은 없었다. 이 나사가 한 스물 몇개쯤 풀린 것 같아 보이던 놈에게서 정곡을 찔릴 줄이야.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하필 이런 걸 죽는 순간 깨닫게 되다니, 나도 참 운이 없는 녀석인걸.

그러고보니 이놈과 말해면서 미처 내가 물어볼 중요한 사실을 놓쳤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 말하려니 아무리 내가 해탈한 기분이라고 해도 목이 막힐 것 같았으나, 나는 결국 물어보는데 성공했다.

"생각해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에스, 언제 나를 죽일 거지?"

내 질문을 듣고 잠시 어깨를 흠칫한 그놈은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선고했다.

"나를 `이에스` 라고 불렀네."

이게 무슨 소리냐. 어라. 진짜 그렇군. 내가 언제부터 이놈이랑 친했다고. 그런데 왜 저런 걸 묻는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중요한 건가? 물어보려 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잘난 척 하던 내 몸도 결국은 예정된 죽음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이 나를 죽이고 나무의 양분으로 삼아버릴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니.

"미안, 너무 놀라서 네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못했어. 그런데 내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서 좀더 얘기해 보지 않을래? 내가 널 죽이는 건 아마도 170년 뒤가 될 것 같거든."

나는 신인간이다. 그 중에서도 제 2계급 신인간이다. 그리고 그 징글맞은 뮐의 축복 덕분에 나는 약 200년 쯤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차, 현재 내 나이는 30살이다. 또한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30더하기 170은 200이다. 따라서 그놈의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거냐?"

"무슨 소리야. 170년 뒤에 죽여준다고 했잖아."

그게 그거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소리였기에, 나는 다시 질문했다.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거잖아."

"아우~ 170년이라고. 4초 뒤가 아니고."

나 정도 죽이는 것에는 4초면 충분하다는 건가. 웬지 우울해지는군...이 아니라. 나는 이 예기치 못한 행운에 놀라 당장 도망치지 않는 바보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게다가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내가 한 그놈에게 한 질문이었다.

"왜?"

그놈, 이제는 이에스는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줬잖아."

그래서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다는 거냐는 말은 무서웠기 때문에 속으로 삼켜두고, 나는 온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아주 많은 상관이 있지. 안티작."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에스는 어쩐지 엄숙하게 얼굴을 바꾸고 나에게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너 빼고는 다들 나를 기오라므뉴라던가 레드 잉크라던가 시원의 짐승이라던가로 불렀어. 이게 뭘 의미하냐면, 그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그래. 날 `이에스` 라고 부른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당연하게도 이게 의미하는 건,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지. 이래도 모르겠어? 안티작? 너도 라무톨 샤엘 뮐로안이라면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거야."

이름이라고? 나는 기억을 되살려 이에스가 말한 `자신의 이름들` 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살려 보았다. 기오라므뉴(유일한 평등 = 죽음), 레드 잉크(파괴,전쟁,파멸,피), 시원의 짐승(죽음의 짐승),그리고 마지막 이름 이에스(뮐의 영광). 이 이름들의 공통점은 마지막 이름만 빼면 전부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 그렇다는 것은.

경악해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름의 의미, 다른 사람들이 불렀다, 앞의 세 이름과 마지막 한 이름의 차이, 그렇다는 것은.

"너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부른 이름의 `의미` 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었다는 거라고...?"

이에스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 하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거의 다 맞췄어. 정확히는 그게 아니긴 한데 뭐 봐줄게."

내가 한 추리지만 내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고작 그게 인간을 죽이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야? 그렇게 물어보자, 이에스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에 빠졌어. 안티작. 내가 말했잖아. 너는 이름의 중요함을 알고 있을 거라고 . 내가 반응한 것은 겨우 공기의 떨림 따위가 아냐. 나는 그 속에 담긴 의미에 반응한 거야."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간단한 문제였다. 이에스를 죽음과 관련된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그녀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자다. 인간들 중에 죽음을 적대하지 않는 이는 없다고 볼 수 있으니, 결국 이에스를 그렇게 부르는 자는 그녀를 적대하는 자다. 여기까지 진행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쉬워진다. 모든 두려움들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최상, 그들은 그녀를 최상의 적으로 대했고, 그녀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최상의 적` 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이에스` 라고 부르자, 그녀는 내가 그녀를 그들처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연기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에 불과했다. 알았다. 이름은 충분히 인간을 죽이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확실하게 못을 박아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아, 물론 `지금 당장` 은."

이런 말도 안 나오는 행운, 내 인생에 드디어 빛이 들어온 것인 듯 보였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죽을 때, 너를 지켜보러 가겠어. 그 때는 나를 기오라므뉴라고 불러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그냥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줘."

못할 이유도 없겠지. 나는 문득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더이상 살인마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내려다 본 그녀는 슬프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뭐지.

"나를 기오라므뉴라고 부르는 인간이 오고 있어. 타는 냄새가 나."

아직 지원군이 남아있었던 건가. 상관없지만 신경은 쓰였다. 다 죽었던 것이 아니었나. 누군가 죽는 모습은 보기 싫은데.

"안티작! 거기 있지! 기다려!"

어라,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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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된다는 경고음이 머리에서 울려나왔다. 그러나 먼저 나간 것은 발이었다. 셀티어를 이에스와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셀티어는 분명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녀는 분명 셀티어를 죽일 것이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내가 달리던 중, 뒤에서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들어볼까.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힘껏 소리질렀다.

"이쪽으로 오지 마! 셀티어!"

"다행이야! 내가 늦은 건 아니겠...!"

셀티어는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횃불을 떨어뜨리며 `기오라므뉴`라고 중얼거렸다. 그랬던 거군.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버릴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던 거다. 그녀가 나를 떠나면서 했던 말은 진실이었던 거야. 멍청이같이, 등신같이, 이 울창한 숲을 뚫고 불을 구하러 갔던 거야.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서 `기오라므뉴` 와 `나` 의 냄새가 함께 나는 걸 보고 걱정되서 위험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작정 온 것일 것이다. 놀라는 모습을 보아하니 실제로 위험은 실감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인간이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단심판관, 칼리드페이의 인간들은 그녀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르곤 했었지. 그녀는 지금까지 어떤 이단도 직접 처단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남들 도와주는 건 기꺼이 나섰어. 지금도 그와 같다.

죽게 할 수는 없다. 절대 놔두지 않겠어. 나는 이에스를 향해 돌아서서 전력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뭔가 해명하려고 했다.

"이에스, 잠깐 기다려! 그녀는 너를 죽이러 온 게 아니 -"



무었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 뒤를 돌아보기 싫어지게 만드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나는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뒤를 돌아보고 즉시 후회했다. 뒤에는 셀티어가 없었다. 단지 호랑가시나무 한 그루가 낙옆까지 피우고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무언가의 잔해.

나는 온 몸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 걸었던 거리, 했던 대화. 모든 것이 저 핏빛 낙옆 한 줌에 사라졌다. 단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되어 그녀의 목숨을 빼았았다. 정오 12시를 가리키는 시계, 땅바닥에 깔려 있던 이끼, 손때가 묻은 검은 책, 날이 서지 않은 단검, 깨끗하게 빨려진 옷, 머리카락 냄새, 그녀와 관계있던 것이 두서없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누군가 소중한 것은 곁에 없어야 그게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임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놈은 그런 나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다가 예고하지 않은 때에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넌 나를 뭐라고 부를 거지?"

망할 놈, 저주받을 악마의 자식. 너를 뭐라고 부를 거냐고? 네가 원하는 이름대로 불러주마.

"이에스."

명백히 놀란 그놈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고통스럽게 웃음을 짓는 쾌감을 누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평정했고, 마음만이 들끓었다. 우습게도 나는 삶의 의욕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네가 방금 전 죽인 그녀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어. 네가 그녀를 죽이고 나서야 안 거지만. 그래서 나는 너에게 복수할거야. 그런데 난 살인마 기오라므뉴에게 복수하고 싶지는 않아. 그건 너의 죄를 너무 줄여주는 것 같거든. 그녀의 죽음이 살인마에게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인해 `아 그건 어쩔 수 없지. 기오라므뉴는 살인자니까` 따위의 말로 당연시되는 것 따위는 바라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너를 이에스라고 부르겠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너에게 복수할거야. 살인마에게가 아니라, 개인 `이에스` 에게."

그녀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고, 다 듣자마자 등을 돌렸다.

"반드시 기다리고 있을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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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드페이 가문에는 특이한 인간이 하나 있다. 그는 성인, 즉 성스러운 인간이라고 불리며, 그의 검은 책에는 오직 하나만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의 이름은 안티작 칼리드페이, 그리고 그 책에 적혀 있는 이름은 이에스 람드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