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환상회랑 작품
글 수 59
두려움에 떨다
옹기종기 8마리의 동물이 모여 있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회갈색 털과 2쌍의 크고 작은 귀,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보면 누구라도 레그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을 어귀에는 레그뎁이 살고 있다는 걸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도 어김없이 레그뎁이 살고 있죠. 인근 마을에서 수 km가 떨어진 이곳, 작은 굴에는 8마리의 레그뎁이 살고 있습니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5마리의 자식들을 보며 입을 씰룩거립니다. 분명 웃음 짓는 것이나, 아무래도 어색하군요. 그러나 아내도, 아이들도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함께 웃습니다.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죠. 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 어색한 웃음을 짓습니다.
"어? 이상한데?"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굴을 나서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굴의 입구가 막혀 있었거든요. 가족 누구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걱정이 된 어머니도 밖을 나섭니다. 입구는 막혀 있고 작은 빵이 놓여 있네요. 그 빵을 보며 어머니는 이걸 어찌해야 할까 고민합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아빠, 왜 안 나가요?"
아이들도 걱정되어 부모님을 따라갑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거 움직일 수가 없는데? 좀 뒤로 가봐?"
"몸이 움직여 지지 않아요."
"뭐 이리 좁아, 이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따라나서자 가족들은 이 좁은 굴에 갇히고 말았어요. 하나, 둘, 셋, 넷이 이 들어오자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지요.
"엄마! 아빠! 형! 누나! 왜 그래!"
미처 따라나서지 못한 막내 레그뎁, 레이언 만이 뒤에서 가족들을 지켜볼 따름이었죠.
레이언의 눈으로 보니 가족들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한데 엉겨서 움직이질 못했어요. 레이언이 가장 가까이 있던 누이를 잡아당겼지만, 이상하고 투명한 무언가에 털이 엉겨붙을 뿐이었죠.
레이언은 알 수 없겠지만, 인간들은 그 실을 통발이라고 부른답니다. 굴의 모양에 맞는 통에 그물을 설치하고 입구에 놓아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이번처럼 아주 쉽게 레그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족들은 갇혀버린 것이지요.
"우와! 대박이다! 6마리잖아!"
"거참, 병신들. 옹기종기 모여 있구만."
갑작스럽게 막혀 있던 입구가 훤히 뚫리고, 밝은 햇빛을 비췄습니다. 레이언은 빛을 보고 놀라 굴 안으로 도망쳤지요. 고약한 냄새가 갑자기 굴 안에 진동합니다.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밖을 살짝 내다보니, 두 팔과 두 다리를 지닌 괴상한 괴물이 가족들을 데려가고 있었습니다.
레이언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하는, 엄마와 아빠가 언제나 곁에 있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죠. 멀어지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레이언은 덜덜 떨고만 있었습니다.
레이언은 너무도 무서웠습니다. 언제나 함께 있던 가족들이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 혼자만 남았습니다. 아무리 가족들을 불러보아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요.
그렇게 고약한 냄새는 굴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굴의 주인
그렇게 사흘 정도 있었을까요. 밖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굴까요?
"엄마?"
레이언은 그 소리가 떠나버린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 확신했지요. 엄마와 아빠는 잠시 집을 떠났었던 겁니다. 분명 자신을 다시 찾아 돌아온 것이겠죠.
"엄마!"
엄마를 높이 불렀으나 레이언을 반긴 건 한 마리 뱀이었습니다. 한 마리 작은 뱀이었지요. 먹이를 찾아 근방을 떠돌던 뱀은 지금 아직 어린 레그뎁을 발견한 것입니다.
뱀은 레이언을 보자마자 달려들었습니다. 혹시나 아이의 어버이가 있지 않을까 고민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 혼자 굴에 놔두진 않겠죠. 뱀은 아마 이 아이의 부모님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지키는 자가 없으면 사냥은 정말 쉬어집니다.
그러나 레이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사라지고 사흘,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었죠. 그러던 중 잠시나마 희망을 생각하던 중 바라본 뱀은 희망을 분노로 바꾸기 충분했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지만, 레이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레이언은 달려드는 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습니다.
레그뎁의 양 볼에는 작은 신경독 샘이 숨어 있습니다. 작고 가녀린 몸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무기이지요. 그리고 이 독은 제법 큰 곰도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런데 작은 뱀이 이 독을 견딜 수 있을까요?
작은 뱀은 몸을 덜덜 떨더니 곧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작은 레그뎁 한 마리뿐이라 방심하고 있던 것이죠. 레그뎁은 분명 약한 동물이지만, 그 독을 경시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레이언은 그렇게 뱀의 목덜미를 물고 힘을 주었습니다. 더욱 세게, 더욱 강하게, 이를 악물었습니다. 앙다문 입술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뱀의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레이언은 그렇게 흘러나오는 피를 마셨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도 않았기에 더욱 힘차게, 꿀떡꿀떡 삼켰습니다.
'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그 작은 몸에 깃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이 굴은 나의 집이다.'
소중한 보금자리이죠. 이제 레이언을 지킬 가족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난 이 굴의 주인이다.'
그러니 이런 작은 생각이 욕심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어느덧 레이언이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갑니다. 몸의 크기는 더욱 커지고, 이빨은 조금 더 날카로와 졌지요. 숲을 아무리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게 된 것은 몸에 고루 붙은 근육 덕분일 겁니다.
숲을 거닐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알았습니다. 고기버들, 바람개비 꽃 같은 것들이죠. 그렇게 사방을 거닐며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알아갔습니다.
레이언은 인간의 마을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먹이를 구하며 알게 된 이웃 레그뎁들이 그를 비웃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데려간 괴물이 인간임을 안 뒤로 레이언은 인간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온 산을 누빌 뿐이지요.
슬슬 하늘이 어둡게 변하고, 땅이 차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와 같이 한 식물의 덩이뿌리로 배를 채운 레이언은 집에 돌아와 몸을 웅크립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따뜻한 엄마의 품은 없습니다. 자신 혼자 웅크리고 몸을 녹여야 하죠.
그러나 가족들을 잃은 대신 얻은 것도 있습니다. 이 굴이 그의 것이 된 것이죠. 레이언은 이 작은 굴의 주인, 지배자입니다.
이 굴이야말로 레이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무언가입니다.
지배자의 부하
어느 날이었을까요. 언제나와 같이 레이언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몸을 눕혔습니다. 여기까진 평소와 같죠. 그러나 갑자기 자신의 보급자리에서 괴성이 들린다면 그 어떤 생물이라도 가만있을 순 없을 것이고, 레이언도 가만있을 순 없었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밖으로 튀어나갔습니다.
밖에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두 팔과 다리는 마치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비교하자면 자신의 굴과 닮은 냄새였습니다.
레이언은 팔짝 뛰어올라 괴물의 목덜미로 나가갔습니다. 그리고 괴물의 목덜미를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습니다.
난데없이 괴물을 공격하냐고요? 괴물이 그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집어삼키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깨물고 물어뜯어도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빨이 몸에 박히지도 않았고, 어쩌다 약간의 자국이 남아도 피가 흐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자신의 집을 삼키는 괴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이언은 울었습니다. 그저 서럽게 울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하나를 빼앗아가는 괴물이 미웠습니다. 그저 그렇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괴물이 레이언을 바라보았습니다. 입도, 코도, 심지어 눈조차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레이언은 그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 얼굴은 레이언에게 무언가를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지배자여, 겨우 작은 굴에서 만족할 것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이럴 수가! 레이언은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지배자입니다. 겨우 이런 작은 굴에서 만족해선 안 될, 큰 인물입니다. 어째서 만족하고 있었을까요? 집을 집어삼킨 괴물에게 감사할 정도입니다.
"넌 나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주었다. 고맙군. 그에 대한 답례로 널 이 몸, 지배자의 부하로 임명하지."
그것은 놀라운 깨달음이었거든요.
지배자의 정복
지배자가 된 레이언은 이런 작은 마을 어귀에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더 멀리, 더 힘차게 나아가기로 했어요. 자신의 부하와 함께 말이죠.
자신의 첫 부하, 바위괴물의 위에 올라탄 레이언은 괴물에게 명령했습니다.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가도록 하자구나."
바위괴물은 주인의 말씀을 받들어 숲 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숲 속의 거대한 나무도, 질긴 넝쿨도 그들의 길을 막을 순 없었지요. 눈앞에 보이는 모든 방해물을 무찌르며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숲에서 처음 정복을 방해한 건 날카로운 새였습니다. 한 마리 새가 칼날 같은 발톱을 들이밀고 레이언에게 달려든 것이죠. 레이언은 가볍게 새를 피해 움직였으나 새를 물어뜯지는 않았습니다.
지배자는 진중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하는 그런 지배자의 충실한 손과 발이죠.
바위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새를 향해 날아들었고, 한 마리 칼날 깃털 새는 숨을 거뒀습니다. 곧, 근방의 모든 칼날 깃털 새가 숲을 떠나가게 되었죠.
두 번째 방해자는 거대한 거북이었습니다. 거인의 걷는 길 앞에 거북이가 잠들어 있었거든요. 거인의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잠에서 깬 거북이는 거인을 보자마자 껍질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거북이는 자신이 바위 거인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숨어서 바위 거인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죠. 마찬가지로 바위 거인도 거북이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배자는 자신의 위엄있는 행차를 방해하는 거북이가 아니꼬왔습니다.
레이언의 손짓에 바위 거인은 거북이를 내려쳤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거북이는 단단한 껍질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여덟 번, 아홉 번. 그 순간 껍질이 깨어지더니 거북이는 흉측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할까요? 그 뒤로도 지배자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어느새 근방의 동물들은 레이언과 바위 괴물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자신보다 상위 객체로 인정한 것이죠. 그렇게 그들을 피하자, 곧 레이언과 바위괴물의 영역이, 지배자 레이언의 영토가 생겨났습니다.
지배자의 숲
레이언은 자신의 영토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지배자의 부하도 마찬가지지요. 주인이 잘되면 부하도 잘 되는 법이랍니다.
하루하루가 편안한 생활이었습니다. 숲은 풍족했고, 이젠 먹이를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작은 풀잎도, 거대한 나무도 모두 맛있는 음식이었지요. 매일매일 배부르고, 평온한 나날이었습니다.
레이언은 행복했습니다.
이는 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이곳저곳 거닐며 흙을, 모래를, 자갈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으나 이젠 다릅니다. 자신의 몸에 맞는 바위를 찾아 숲을 유유자적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바위가 괴물을 맞이합니다.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주인의 얼굴을 생각하며 식사에 임합니다. 소중한 주인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난 것이 행복 아닐까요?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습니다. 숲에 찾아온 간악한 손님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게 말야, 오늘 대박이라니까! 몇 마리를 잡았는지 몰라."
"거 참 부럽네. 내 통발은 도통 잡히질 않던데."
레이언은 침입자를 보고 격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삶을 통해 깨달았지만, 아마 분노라는 감정이겠죠.
이들의 냄새는 어딘지 모르게 고약했습니다. 가족들을 잃었을 때 맡았던 그 냄새와 같이 말이죠. 너무도 고약해서 얼굴을 찌푸리고 침입자를 확인했습니다.
어쩜 좋을까요. 엄마와 아빠를 노렸던, 가족을 데려간 그들, 바로 그 인간이었습니다.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레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뭐야?"
"레그뎁?"
인간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으나, 인간은 아무렇지 않게 레이언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독샘이 통하질 않았습니다.
"이 것도 수확인가?"
"얼렁 챙겨. 오늘 수확 없다더니 잘 됐네."
몸이 찌뿌듯한 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움직여! 물어뜯어!' 하고 말이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에 치가 떨려 눈물이 나오려 합니다.
그때였습니다.
콰앙! 쾅?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두 사람을 짓뭉갰습니다. 그 무언가는 하늘 높이 연결된 기둥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긴 기둥은 거대한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위 거인……."
그렇습니다. 이 숲에서 레이언은 단순한 레그뎁이 아닙니다. 거대한 바위 거인을 부리는 지배자, 숲의 주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지배자는 든든한 바위 거인을 부하로 부리고 있습니다.
무능한 지배자와 바위 거인
인간은 간악한 동물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레이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생각할 테죠.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에 깜짝 놀란 것이죠. 그리고 진하게 나는 쇠 내음, 정말 역겨운 냄새였습니다.
저번에 만났던 인간과는 같지만 조금 다른 그런 냄새였지요. 비교하자면 조금 더 역겹고, 조금 더 끔찍한 냄새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많았죠.
레그뎁은 천적을 알아보는 생물입니다. 지난번에는 분노에 이끌려 덤벼들었으나, 보통 천적을 만나면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죠. 천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졌고, 다른 생물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합니다.
레그뎁은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위 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민한 감각 덕분이었죠. 일반적인 레그뎁이라면 바위 거인과 함께 도망가는 길을 택했을 겁니다.
그러나 레이언은 다릅니다. 레이언은 레그뎁이 아니라 지배자라는 걸 여러분은 알고 있을까요?
"저들을 무찔러라!"
당당하게 바위 거인에게 외쳤습니다.
바위 거인은 너무도 쉽게 쓰러졌습니다. 동족이 살해당했다는 걸 깨달은 인간들은 바위 거인을 무찌르는 전문가를 불렀거든요. 휘두르는 주먹은 너무도 쉽게 피했고, 내리꽂는 다리는 그들에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렇게 거인은 조각나고 등 뒤에 한 자루 검이 꽂히자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몸속에 담긴 핵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거인의 핵을 보더니 무심히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뭐야, 순 돌덩이잖아. 쓸모없게."
그렇게 핵을 휙 던져두고 떠나갔죠.
레이언이 어떤 기분일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단 하나 있는 부하를… 어머나! 실수했네요.
단 하나 있는 친구를 잃어버렸죠.
이건 어떤 기분일까요? 그 누가 느낀 어떠한 감정보다 비참하지 않을까요?
그에게는 이제 쓸데없이 넓은 영토 하나밖에 남질 않았습니다.
간악한 인간들! 어쩌다 흘리기 시작한 눈물은 곧이어 너무도 굵어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레이언은 거침없이 울었습니다.
너무도 서럽고, 억울했습니다. 너무도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쓰러진 거인을 버려두고 무작정 뒤를 돌아 달렸습니다.
숲에는 거대한 고목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고목에는 많은 동물이 살고 있겠지만, 이미 지배자가 쫓아버려 한 마리 동물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레이언은 무작정 고목을 파고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동물들을 내쫓았지?'
지배자는 고독하다고들 하죠? 왜 고독할까요?
'거인은 왜 쓰러졌지?'
지배자의 오른팔은 어디서든 가장 먼저 죽어버리더라고요.
'난 왜 고목을 파고 있을까?'
지배자는 진중함을 알아야 하는 데 말이에요.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한 마리 레그뎁은 계속 움직였고 어느새 고목은 훌륭한 둥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들어선 레이언은 잠이 들었습니다. 무능한 지배자의 꿈을 꾸면서요.
새로운 아침, 새로운 시작
무능한 지배자의 꿈은 너무도 길었습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주 긴 꿈이었습니다. 어느덧 눈을 떴을 때는 해가 한번 뜨고 다시 지기 시작한 때였죠.
지난 꿈을 회상하며 레그뎁은 어떠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기쁜? 슬픈? 허탈한? 행복한? 화난? 짜증 나는? 역겨운?
그냥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고 할게요. 한 마리 레그뎁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레그뎁은 지난밤 꿈을 생각했습니다. 지배자의 꿈, 너무도 무능해서 자신의 부하도 지킬 수 없는 안타까운 꿈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생각나 가만있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레그뎁은,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보금자리에서 달려나왔습니다.
조금 달리자 거대한 바윗덩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거대해서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바윗덩이였습니다. 바위가 그렇게 대단했던지 레그뎁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밤, 무능한 지배자의 꿈이 그렇게 슬펐던 건가요?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레그뎁의 감각은 상당히 뛰어나고, 이런 소리를 놓칠 리 없죠. 레그뎁은 소리가 난 바위 덩이 속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작은 인형이었습니다. 작은 바위 인형이었습니다. 바위 인형이 바윗덩이를 박차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위 인형은 만들어지다 만 투박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마치 꿈속에서 본 거대한 괴물과 흡사한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작았지만요.
그 인형은 주변에 널려 있는 바윗덩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먹어치우고 조금씩 삼켜가자 인형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때, 인형이 레이언을 바라보았습니다. 입도, 코도, 심지어 눈조차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레이언은 그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 얼굴은 레이언에게 무언가를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바위 먹어치우는 거 처음 보냐?' 이렇게 말입니다.
레그뎁은 웃었습니다. 지난밤 꿈이 생각나 웃었습니다. 눈앞의 인형이 우스워 웃었습니다. 그저 우스워 웃었습니다.
한 마리 레그뎁은, 레이언은 작은 인형을, 거대한 바위 거인을 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난 무능한 지배자거든. 그러니 거인아, 도와주지 않을래?"
작은 숲의 지배자는, 레이언은 그렇게 웃음을 머금었답니다.
옹기종기 8마리의 동물이 모여 있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회갈색 털과 2쌍의 크고 작은 귀,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보면 누구라도 레그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을 어귀에는 레그뎁이 살고 있다는 걸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도 어김없이 레그뎁이 살고 있죠. 인근 마을에서 수 km가 떨어진 이곳, 작은 굴에는 8마리의 레그뎁이 살고 있습니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5마리의 자식들을 보며 입을 씰룩거립니다. 분명 웃음 짓는 것이나, 아무래도 어색하군요. 그러나 아내도, 아이들도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함께 웃습니다.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죠. 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 어색한 웃음을 짓습니다.
"어? 이상한데?"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굴을 나서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굴의 입구가 막혀 있었거든요. 가족 누구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걱정이 된 어머니도 밖을 나섭니다. 입구는 막혀 있고 작은 빵이 놓여 있네요. 그 빵을 보며 어머니는 이걸 어찌해야 할까 고민합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아빠, 왜 안 나가요?"
아이들도 걱정되어 부모님을 따라갑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거 움직일 수가 없는데? 좀 뒤로 가봐?"
"몸이 움직여 지지 않아요."
"뭐 이리 좁아, 이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따라나서자 가족들은 이 좁은 굴에 갇히고 말았어요. 하나, 둘, 셋, 넷이 이 들어오자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지요.
"엄마! 아빠! 형! 누나! 왜 그래!"
미처 따라나서지 못한 막내 레그뎁, 레이언 만이 뒤에서 가족들을 지켜볼 따름이었죠.
레이언의 눈으로 보니 가족들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한데 엉겨서 움직이질 못했어요. 레이언이 가장 가까이 있던 누이를 잡아당겼지만, 이상하고 투명한 무언가에 털이 엉겨붙을 뿐이었죠.
레이언은 알 수 없겠지만, 인간들은 그 실을 통발이라고 부른답니다. 굴의 모양에 맞는 통에 그물을 설치하고 입구에 놓아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이번처럼 아주 쉽게 레그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족들은 갇혀버린 것이지요.
"우와! 대박이다! 6마리잖아!"
"거참, 병신들. 옹기종기 모여 있구만."
갑작스럽게 막혀 있던 입구가 훤히 뚫리고, 밝은 햇빛을 비췄습니다. 레이언은 빛을 보고 놀라 굴 안으로 도망쳤지요. 고약한 냄새가 갑자기 굴 안에 진동합니다.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밖을 살짝 내다보니, 두 팔과 두 다리를 지닌 괴상한 괴물이 가족들을 데려가고 있었습니다.
레이언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하는, 엄마와 아빠가 언제나 곁에 있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죠. 멀어지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레이언은 덜덜 떨고만 있었습니다.
레이언은 너무도 무서웠습니다. 언제나 함께 있던 가족들이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 혼자만 남았습니다. 아무리 가족들을 불러보아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요.
그렇게 고약한 냄새는 굴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굴의 주인
그렇게 사흘 정도 있었을까요. 밖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굴까요?
"엄마?"
레이언은 그 소리가 떠나버린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 확신했지요. 엄마와 아빠는 잠시 집을 떠났었던 겁니다. 분명 자신을 다시 찾아 돌아온 것이겠죠.
"엄마!"
엄마를 높이 불렀으나 레이언을 반긴 건 한 마리 뱀이었습니다. 한 마리 작은 뱀이었지요. 먹이를 찾아 근방을 떠돌던 뱀은 지금 아직 어린 레그뎁을 발견한 것입니다.
뱀은 레이언을 보자마자 달려들었습니다. 혹시나 아이의 어버이가 있지 않을까 고민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 혼자 굴에 놔두진 않겠죠. 뱀은 아마 이 아이의 부모님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지키는 자가 없으면 사냥은 정말 쉬어집니다.
그러나 레이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사라지고 사흘,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었죠. 그러던 중 잠시나마 희망을 생각하던 중 바라본 뱀은 희망을 분노로 바꾸기 충분했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지만, 레이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레이언은 달려드는 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습니다.
레그뎁의 양 볼에는 작은 신경독 샘이 숨어 있습니다. 작고 가녀린 몸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무기이지요. 그리고 이 독은 제법 큰 곰도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런데 작은 뱀이 이 독을 견딜 수 있을까요?
작은 뱀은 몸을 덜덜 떨더니 곧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작은 레그뎁 한 마리뿐이라 방심하고 있던 것이죠. 레그뎁은 분명 약한 동물이지만, 그 독을 경시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레이언은 그렇게 뱀의 목덜미를 물고 힘을 주었습니다. 더욱 세게, 더욱 강하게, 이를 악물었습니다. 앙다문 입술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뱀의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레이언은 그렇게 흘러나오는 피를 마셨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도 않았기에 더욱 힘차게, 꿀떡꿀떡 삼켰습니다.
'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그 작은 몸에 깃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이 굴은 나의 집이다.'
소중한 보금자리이죠. 이제 레이언을 지킬 가족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난 이 굴의 주인이다.'
그러니 이런 작은 생각이 욕심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어느덧 레이언이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갑니다. 몸의 크기는 더욱 커지고, 이빨은 조금 더 날카로와 졌지요. 숲을 아무리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게 된 것은 몸에 고루 붙은 근육 덕분일 겁니다.
숲을 거닐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알았습니다. 고기버들, 바람개비 꽃 같은 것들이죠. 그렇게 사방을 거닐며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알아갔습니다.
레이언은 인간의 마을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먹이를 구하며 알게 된 이웃 레그뎁들이 그를 비웃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데려간 괴물이 인간임을 안 뒤로 레이언은 인간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온 산을 누빌 뿐이지요.
슬슬 하늘이 어둡게 변하고, 땅이 차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와 같이 한 식물의 덩이뿌리로 배를 채운 레이언은 집에 돌아와 몸을 웅크립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따뜻한 엄마의 품은 없습니다. 자신 혼자 웅크리고 몸을 녹여야 하죠.
그러나 가족들을 잃은 대신 얻은 것도 있습니다. 이 굴이 그의 것이 된 것이죠. 레이언은 이 작은 굴의 주인, 지배자입니다.
이 굴이야말로 레이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무언가입니다.
지배자의 부하
어느 날이었을까요. 언제나와 같이 레이언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몸을 눕혔습니다. 여기까진 평소와 같죠. 그러나 갑자기 자신의 보급자리에서 괴성이 들린다면 그 어떤 생물이라도 가만있을 순 없을 것이고, 레이언도 가만있을 순 없었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밖으로 튀어나갔습니다.
밖에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두 팔과 다리는 마치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비교하자면 자신의 굴과 닮은 냄새였습니다.
레이언은 팔짝 뛰어올라 괴물의 목덜미로 나가갔습니다. 그리고 괴물의 목덜미를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습니다.
난데없이 괴물을 공격하냐고요? 괴물이 그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집어삼키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깨물고 물어뜯어도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빨이 몸에 박히지도 않았고, 어쩌다 약간의 자국이 남아도 피가 흐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자신의 집을 삼키는 괴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이언은 울었습니다. 그저 서럽게 울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하나를 빼앗아가는 괴물이 미웠습니다. 그저 그렇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괴물이 레이언을 바라보았습니다. 입도, 코도, 심지어 눈조차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레이언은 그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 얼굴은 레이언에게 무언가를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지배자여, 겨우 작은 굴에서 만족할 것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이럴 수가! 레이언은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지배자입니다. 겨우 이런 작은 굴에서 만족해선 안 될, 큰 인물입니다. 어째서 만족하고 있었을까요? 집을 집어삼킨 괴물에게 감사할 정도입니다.
"넌 나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주었다. 고맙군. 그에 대한 답례로 널 이 몸, 지배자의 부하로 임명하지."
그것은 놀라운 깨달음이었거든요.
지배자의 정복
지배자가 된 레이언은 이런 작은 마을 어귀에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더 멀리, 더 힘차게 나아가기로 했어요. 자신의 부하와 함께 말이죠.
자신의 첫 부하, 바위괴물의 위에 올라탄 레이언은 괴물에게 명령했습니다.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가도록 하자구나."
바위괴물은 주인의 말씀을 받들어 숲 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숲 속의 거대한 나무도, 질긴 넝쿨도 그들의 길을 막을 순 없었지요. 눈앞에 보이는 모든 방해물을 무찌르며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숲에서 처음 정복을 방해한 건 날카로운 새였습니다. 한 마리 새가 칼날 같은 발톱을 들이밀고 레이언에게 달려든 것이죠. 레이언은 가볍게 새를 피해 움직였으나 새를 물어뜯지는 않았습니다.
지배자는 진중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하는 그런 지배자의 충실한 손과 발이죠.
바위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새를 향해 날아들었고, 한 마리 칼날 깃털 새는 숨을 거뒀습니다. 곧, 근방의 모든 칼날 깃털 새가 숲을 떠나가게 되었죠.
두 번째 방해자는 거대한 거북이었습니다. 거인의 걷는 길 앞에 거북이가 잠들어 있었거든요. 거인의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잠에서 깬 거북이는 거인을 보자마자 껍질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거북이는 자신이 바위 거인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숨어서 바위 거인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죠. 마찬가지로 바위 거인도 거북이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배자는 자신의 위엄있는 행차를 방해하는 거북이가 아니꼬왔습니다.
레이언의 손짓에 바위 거인은 거북이를 내려쳤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거북이는 단단한 껍질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여덟 번, 아홉 번. 그 순간 껍질이 깨어지더니 거북이는 흉측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할까요? 그 뒤로도 지배자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어느새 근방의 동물들은 레이언과 바위 괴물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자신보다 상위 객체로 인정한 것이죠. 그렇게 그들을 피하자, 곧 레이언과 바위괴물의 영역이, 지배자 레이언의 영토가 생겨났습니다.
지배자의 숲
레이언은 자신의 영토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지배자의 부하도 마찬가지지요. 주인이 잘되면 부하도 잘 되는 법이랍니다.
하루하루가 편안한 생활이었습니다. 숲은 풍족했고, 이젠 먹이를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작은 풀잎도, 거대한 나무도 모두 맛있는 음식이었지요. 매일매일 배부르고, 평온한 나날이었습니다.
레이언은 행복했습니다.
이는 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이곳저곳 거닐며 흙을, 모래를, 자갈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으나 이젠 다릅니다. 자신의 몸에 맞는 바위를 찾아 숲을 유유자적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바위가 괴물을 맞이합니다.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주인의 얼굴을 생각하며 식사에 임합니다. 소중한 주인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난 것이 행복 아닐까요?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습니다. 숲에 찾아온 간악한 손님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게 말야, 오늘 대박이라니까! 몇 마리를 잡았는지 몰라."
"거 참 부럽네. 내 통발은 도통 잡히질 않던데."
레이언은 침입자를 보고 격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삶을 통해 깨달았지만, 아마 분노라는 감정이겠죠.
이들의 냄새는 어딘지 모르게 고약했습니다. 가족들을 잃었을 때 맡았던 그 냄새와 같이 말이죠. 너무도 고약해서 얼굴을 찌푸리고 침입자를 확인했습니다.
어쩜 좋을까요. 엄마와 아빠를 노렸던, 가족을 데려간 그들, 바로 그 인간이었습니다.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레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뭐야?"
"레그뎁?"
인간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으나, 인간은 아무렇지 않게 레이언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독샘이 통하질 않았습니다.
"이 것도 수확인가?"
"얼렁 챙겨. 오늘 수확 없다더니 잘 됐네."
몸이 찌뿌듯한 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움직여! 물어뜯어!' 하고 말이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에 치가 떨려 눈물이 나오려 합니다.
그때였습니다.
콰앙! 쾅?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두 사람을 짓뭉갰습니다. 그 무언가는 하늘 높이 연결된 기둥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긴 기둥은 거대한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위 거인……."
그렇습니다. 이 숲에서 레이언은 단순한 레그뎁이 아닙니다. 거대한 바위 거인을 부리는 지배자, 숲의 주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지배자는 든든한 바위 거인을 부하로 부리고 있습니다.
무능한 지배자와 바위 거인
인간은 간악한 동물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레이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생각할 테죠.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에 깜짝 놀란 것이죠. 그리고 진하게 나는 쇠 내음, 정말 역겨운 냄새였습니다.
저번에 만났던 인간과는 같지만 조금 다른 그런 냄새였지요. 비교하자면 조금 더 역겹고, 조금 더 끔찍한 냄새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많았죠.
레그뎁은 천적을 알아보는 생물입니다. 지난번에는 분노에 이끌려 덤벼들었으나, 보통 천적을 만나면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죠. 천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졌고, 다른 생물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합니다.
레그뎁은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위 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민한 감각 덕분이었죠. 일반적인 레그뎁이라면 바위 거인과 함께 도망가는 길을 택했을 겁니다.
그러나 레이언은 다릅니다. 레이언은 레그뎁이 아니라 지배자라는 걸 여러분은 알고 있을까요?
"저들을 무찔러라!"
당당하게 바위 거인에게 외쳤습니다.
바위 거인은 너무도 쉽게 쓰러졌습니다. 동족이 살해당했다는 걸 깨달은 인간들은 바위 거인을 무찌르는 전문가를 불렀거든요. 휘두르는 주먹은 너무도 쉽게 피했고, 내리꽂는 다리는 그들에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렇게 거인은 조각나고 등 뒤에 한 자루 검이 꽂히자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몸속에 담긴 핵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거인의 핵을 보더니 무심히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뭐야, 순 돌덩이잖아. 쓸모없게."
그렇게 핵을 휙 던져두고 떠나갔죠.
레이언이 어떤 기분일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단 하나 있는 부하를… 어머나! 실수했네요.
단 하나 있는 친구를 잃어버렸죠.
이건 어떤 기분일까요? 그 누가 느낀 어떠한 감정보다 비참하지 않을까요?
그에게는 이제 쓸데없이 넓은 영토 하나밖에 남질 않았습니다.
간악한 인간들! 어쩌다 흘리기 시작한 눈물은 곧이어 너무도 굵어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레이언은 거침없이 울었습니다.
너무도 서럽고, 억울했습니다. 너무도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쓰러진 거인을 버려두고 무작정 뒤를 돌아 달렸습니다.
숲에는 거대한 고목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고목에는 많은 동물이 살고 있겠지만, 이미 지배자가 쫓아버려 한 마리 동물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레이언은 무작정 고목을 파고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동물들을 내쫓았지?'
지배자는 고독하다고들 하죠? 왜 고독할까요?
'거인은 왜 쓰러졌지?'
지배자의 오른팔은 어디서든 가장 먼저 죽어버리더라고요.
'난 왜 고목을 파고 있을까?'
지배자는 진중함을 알아야 하는 데 말이에요.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한 마리 레그뎁은 계속 움직였고 어느새 고목은 훌륭한 둥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들어선 레이언은 잠이 들었습니다. 무능한 지배자의 꿈을 꾸면서요.
새로운 아침, 새로운 시작
무능한 지배자의 꿈은 너무도 길었습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주 긴 꿈이었습니다. 어느덧 눈을 떴을 때는 해가 한번 뜨고 다시 지기 시작한 때였죠.
지난 꿈을 회상하며 레그뎁은 어떠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기쁜? 슬픈? 허탈한? 행복한? 화난? 짜증 나는? 역겨운?
그냥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고 할게요. 한 마리 레그뎁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레그뎁은 지난밤 꿈을 생각했습니다. 지배자의 꿈, 너무도 무능해서 자신의 부하도 지킬 수 없는 안타까운 꿈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생각나 가만있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레그뎁은,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보금자리에서 달려나왔습니다.
조금 달리자 거대한 바윗덩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거대해서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바윗덩이였습니다. 바위가 그렇게 대단했던지 레그뎁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밤, 무능한 지배자의 꿈이 그렇게 슬펐던 건가요?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레그뎁의 감각은 상당히 뛰어나고, 이런 소리를 놓칠 리 없죠. 레그뎁은 소리가 난 바위 덩이 속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작은 인형이었습니다. 작은 바위 인형이었습니다. 바위 인형이 바윗덩이를 박차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위 인형은 만들어지다 만 투박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마치 꿈속에서 본 거대한 괴물과 흡사한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작았지만요.
그 인형은 주변에 널려 있는 바윗덩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먹어치우고 조금씩 삼켜가자 인형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때, 인형이 레이언을 바라보았습니다. 입도, 코도, 심지어 눈조차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레이언은 그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 얼굴은 레이언에게 무언가를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바위 먹어치우는 거 처음 보냐?' 이렇게 말입니다.
레그뎁은 웃었습니다. 지난밤 꿈이 생각나 웃었습니다. 눈앞의 인형이 우스워 웃었습니다. 그저 우스워 웃었습니다.
한 마리 레그뎁은, 레이언은 작은 인형을, 거대한 바위 거인을 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난 무능한 지배자거든. 그러니 거인아, 도와주지 않을래?"
작은 숲의 지배자는, 레이언은 그렇게 웃음을 머금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