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마당 - 감상/비평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평일 조조 한산한 극장이었다. 잘 보일법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공교롭게도 앞뒤 좌우로 한 자리씩, 두 자리씩 앉은 사람들은 전부 여성이었다. 본 영화는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되었다. 효과음은 작중 카메라에 녹음된 소리가 전부이고 당연히 배경음악도 없다. 등장인물은 단 두 명이다. 클로버필드같은 재난물이자 도시에서 찍힌 영화는 카메라에 녹음된 소리만으로도 시끌시끌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떠드는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스산한 발자국 소리, 문 닫히는 소리가 전부이다. 이 고요함 속으로 자연스레 관객이 편입한다. 팝콘 먹는 소리, 다리 바꿔 꼬는 소리, 숨소리, 여성 관객의 비명 소리, 조금 과장 보태서 뒷 사람 심장 뛰는 소리까지 시시때때로 침범한다. 이런 소리까지 곁들여져야 비로소 영화가 완결된다. 이 영화는 그래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이다. 공포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불협화음은 이 작품에선 들을 수 없다. 대신 그것을 관객들이 보충해준다. 때로는 "어머머 저게 뭐야..." 하며 옆 사람과 소근대는 소리가 들릴 수 있다. 이를 극장소음이라 생각하지 말자. 그 자리의 모두는 충실한 제작자이니까.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핸드핼드 기법 영화는 '블레어위치'이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TV에서 해주는 것을 부분부분밖에는 보지 못했다. '클로버필드'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동 기법의 영화였다. '클로버필드'와 본 작품은 기법상 큰 차이가 있다. 클로버필드가 스텝롤정도는 갖춘 영화의 형식은 띠는 반면, 본 작품은 영화사 로고도 엔딩크레딧도 갖추지 않았다.(클로버필드에서 영화사 로고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제보좀.) 본 작품은 영화 형식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 작품에서 영화라고 믿게 할 장치를 모두 제거해 버린 것에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사의 경계는 지워져버린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영화라는 틀 안에서 서사가 종결된다. 부분적으로 홈페이지 이벤트니 관객과의 추리게임이니 하는 것이 있었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마케팅의 일환일 뿐이었다. 관객은 단연 서사와 관계가 없다. 관객은 로고가 뜨면 일종의 '무대적 환상'에 몰입하여 작중 서사를 체험하고 크레딧이 오르면 그곳에서 벗어난다. 본 작품은 그 경계를 무너트린 것이다. 그리하여 서사의 범위는 관객으로까지 확장한다. 일반적인 영화라 친다면 '카메라 속에 담긴 기이한 영상'만이 서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 작품은 '그 영상을 목격하는 관객'까지도 서사에 포함한다. 의도적으로 통제된 고요 속에서 옆 관객의 숨소리를 들으며 관객은 공동 목격자로서 작품내에 참여한다. 그러한 착각의 특징은 관객 하나 하나의 플롯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핸드핼드라는 점을 인지하고 두고보자는 식으로 좌석에 앉은 관객도 있겠고 사전정보 없이 무방비로 들어온 관객도 있겠다. 사실상 모든 감상은 개인의 경험을 반영하지만 본 작품은 더더욱 그렇다. 핸드핼드의 전략이 바로 그렇게 다양한 플롯을 영화 안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관객이 속든 속지 않든 간에 이미 영화의 플롯은 관객의 플롯을 흡수해버린다. 그러한 플롯을 우주의 누가 관찰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개별 플롯을 음미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플롯이 최종적으로 안착하는 곳은 관객의 나머지 삶이다.
영화가 주는 가장 큰 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관객은 극장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배우이다. 여기서 한 명의 관객은 분열하는데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는 관객과 이를 영화로 인지하는 관객이 공존하게 된다. 물론 배우로서의 관객이 실재로서의 관객을 침범할 수는 없다. 파라노말 엑티비티가 실화예요? 하고 묻는 사람이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실화니 아니니 하고 논쟁하는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는다. 이미 훼이크 다큐는 신선함을 잃은 장르이고 목격이라는 서사행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작품을 시큰둥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은 서로 거리를 둔다. 서사 안에서 카메라속의 영상은 언제까지나 참이고 그것을 목격하는 자신 역시 서사에 포함되어 있으니 관객은 그 안에 담긴 불안감과 긴장감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된 자신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때, 영화는 현실이 된다. 그 현실은 지식in 답변이나 친구의 한심하다는 듯한 핀잔으로 다시 무너지겠지만.
사실 나도 이 작품이 그렇게 무서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면 극적 구성은 떨어지게 된다. 1인칭 시점이라는 제한도 조금 답답하다. 클로버필드는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오감으로써 이것을 극복하지만 본 작품의 무대는 집에 한정돼 있다. 그 안에서의 갈등 역시 답답하기만 하다. 저 자식 그냥 이렇게 하면 될 거 가지고 왜 쓰잘데기 없는 고집을 부리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인물이 있잖은가. 결국 나도 적극적으로 서사에 참여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처 몰랐었다. 나는 나름 피아와 앞뒤를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고 심령 미스테리 프로그램이나 신문 사설을 보고 코웃음칠 정도로 정보에 생각 없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난 영화를 한 번 보면 대개는 바로 잊어버리는데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던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봤기 때문에 딱히 입에 담을 일도 없었다. 영화를 본 몇십 분 외에 이 작품이 내개 무슨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며칠 혼자 집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씻고 정리하고 잘 때까지 집 안엔 온통 적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똥을 쌀 때 언제나 책을 들고 들어간다. 보고 있던 책은 사전 두께는 되는 책이었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을 때에 난 책 선정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책을 펼치기에는 책장이 너무 두꺼웠고 불편했다. 결국 몇줄 읽지도 못하고 책은 세탁기 위에 올려놓았다.
볼일을 마치고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했다. 그러면 취침 준비는 모두 끝난다. 그리고 이불속에 들어가 책을 보든 글을 쓰든 음악을 듣든 하며 시간을 보내다 모두 잠드는 새벽 조용히 불을 끄는 것이 내 평소 일과이다. 나는 세수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물 첨벙대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야 했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비누칠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세탁기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바로 그 순간 떠오른 것이 본 작품, 파라노말 액티비티였다. 카메라에 발자국이 찍히는 장면, 책이 불타는 장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장면 등이 머릿속을 후비고 지나갔다. 나는 세탁기 표면의 각도를 살펴보았다. 또 무게와 마찰계수의 관계라든지 책과 세탁기의 접촉면적이라든지 하는 빈약한 과학적 가설이 머릿속을 오갔다. 하지만 두려움은 비논리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거품투성이 얼굴로 책을 잠시 노려보았다. 이것이 또 움직이는 건 아닌지, 난 책을 무척 아낀다. 저대로 둔다면 구겨지고 얼룩질 게 뻔했다. 그럼에도 난 내 마음속의 끈적거리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저 책에 눈을 못박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공포영화의 효용이라면 자고로 관객을 두렵게 하는 것이고 페이크 다큐의 효용이라면 이렇게 관객을 혼란시키는 것이리라. 문학이론에서 말하는 효용론이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무서워서 혼자 화장실 못 가는 건 아니다.

흑 글이 너무 어려워요 이해가 아니 됨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