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SunOfHorizon
http://fangal.org/xe/38806 (감상은 1월의 퇴고분으로 하였습니다.)

 

 일전에 올리신 작품들에 비해 몰입감이 다시 좋아진 느낌입니다. 서술의 빽빽함이 삭막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하는 특징까지는 Lunatic Juvenile과 비슷할지라도 그와 동시에 긴장감을 주기 위한 상황들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배치한 이 편이 글의 몰입감을 살리는 데는 더 주효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언뜻 영화 ‘더 문’을 떠오르게 하는 고립 상황인데, ‘더 문’에는 인공지능 친구라도 있었지만, 홀로 외떨어져 보급품마저 뜸해지는 상황은 보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느낌을 자아내는군요. 더욱이 경이로운 우주 공간이 아니고 방사능이 천지를 떠도는 절망적인 세계이니 말입니다.

 

 화자가 상황을 관찰하며 진술하는 목소리는 일견 매력적입니다. 아무래도 시간 흐름을 세밀하게 쫓는 작가의 특징에 따라 사건과 조우가 일어날 때마다 작품 속 정경과 상황, 절박함과 긴장감이 잘 전달되는 측면이 있었던 듯합니다.

 

 전개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괴물의 실체가 생각만큼 충격적이었거나 공포스럽지가 않았던 점을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초면에 너무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탓이 아닌가도 싶은데요. 사실, 작품에서는 괴물의 진짜 정체야말로 글쓴이가 생각하는 보다 중요한 지점이겠습니다만, 차라리 그 위험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뚜렷한 정체를 알수 없는 채로 두어 작중 화자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다, 글의 마지막 주인공이 통제력을 상실하는 순간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더라면 그 편이 공포와 충격을 극대화시키고 호러물 특유의 죄어오는 느낌을 잘 살려낼 수 있진 않았을까... 제 취향대로 생각을 해보았어요.

 

 한편, 작품 말미의 피폭 과정과 인물 심리의 묘사는 특히 섬뜩하고 현실감있어 인상적이더군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영웅', ‘23번가의 주민'  by RSNA
http://fangal.org/xe/38780 (영웅)
http://fangal.org/xe/38785 (23번가의 주민)

 

 엽편 ‘영웅’은 론 하워드의 코난의 세계가 연상되는 작품이로군요.

 

 분위기는 매력적이고 흥미롭지만 서사의 과정이 너무 짧은 느낌인데요. 작품에서 보이는 여러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소 진부하기는 해도 매력적인 분위기의 글을 뽑아낼 여건이 충분해 뵙니다. 문장이나 표현의 능력을 따져도 그렇고요. 엽편이라는 분량에 구애 받지 않고 상상의 타래를 좀더 풀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개인적으로는 기대가 됩니다.

 

 ‘23번가의 주민’은 어디선가 한번 제목을 얼핏 봤던 것도 같은데. 어디서 봤는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군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존재들.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광기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들. 인간 세계에 기어들어, 혹은 어딘가에 잠들어 깨어나길 기다리는 존재들.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더니 어느덧 스타일이 무르익고 있군요. 특히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스타일이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데, 누군가 제게 “이거 말이야.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이야.” 하며 보여줬대도 ‘아, 좋은 번역자에 의해 문장이 매끄럽게 윤색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인가보군.’ 했을 성싶을 정도입니다.

 

 호러 쪽으로는 창작 커뮤니티 활동을 못하다보니 러브크래프트 스타일로 쓰여졌을 법한 작품들을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는데, RSNA 님의 글이야 이전부터 이토 준지(저도 최근에 국내 발간된 몇몇 시리즈들을 다 빌려 읽었답니다.)나 러브크래프트의 느낌이 살아있다는 언급이 왕왕 있었습니다만, 다른 곳도 아닌 판갈에서 그런 식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작품들을 감상간에 접하게 되니 새삼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가 되네요.

 

 한편, 이런 능숙함에 있어 한 사람의 글쓴이로서는 거기에서 한걸음을 더 나아가 자신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맞딱드리게 될 것 같군요. 이리저리 용을 써본대야 선배들이 이런저런 글을 하도 많이 싸 놓아서 자신만의 포지션 잡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뵈기도 합니다만.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이나 한밤의 지하철에서 보듯,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오마쥬의 와중에도 자신의 특색을 적절히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제스츄어 씨 샘플 양을 만나다’, ‘슉슉슉’, ‘그런 선인장은 없습니다.’ by 일엽편주
http://fangal.org/xe/38781 (제스츄어 씨 샘플 양을 만나다.)
http://fangal.org/xe/38784 (슉슉슉)
http://fangal.org/xe/38786 (그런 선인장은 없습니다.)

 

 ‘제스츄어 씨~’는 카프카의 엽편을 읽는 느낌도 나는군요. 옅은 유머의 엷은 여운.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인상이 좀 덜 강한 편이네요.

 

 반면 ‘슉슉슉’은 재치도 있고, 서술은 유머러스하고, 인상도 적잖이 강렬한 것이 엽편으로서의 한방 펀치에 라이트, 레프트 잽까지 갖췄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런 선인장은 없습니다.’의 경우는 지난 에메랄드 선인장에 이어 몽환적인 느낌이 독특하니 좋습니다. 능숙한 서술도 좋았고요. 엽편 외에 단편 분량 즈음되는 작품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어지는데요.


 

‘내 좌익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마지막 사진’ by 예니체리
http://fangal.org/xe/38782 (내 좌익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http://fangal.org/xe/38783 (마지막 사진)

 

 ‘내 좌익이~’는 잘 읽기는 하였습니다만 평을 달기는 조금 애매할 작품입니다. 내용이 불건전하다거나 정치적으로 극단적이라거나 폭압적인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비/감란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직설적 얘기를 하기는 운영자의 입장에선 다소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지요.

 

 한편, ‘마지막 사진’ 같은 작품은 재밌는 구성으로 뵈는데, 이전까지의 작품을 평형 세계를 가정하며 화자가 직접 등장하여 하나하나 되짚어보고 있군요. 어찌보면 메타 픽션으로 읽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 사진’이라는 작품이 고별작이 된 것은 아쉬울 일입니다. 판갈 개설 이래 예니체리 님의 작품을 쭉 읽어온 저로서는 작품을 하나하나 되짚는 과정에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판갈에서의 자기 작품을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며 작품 활동을 그만두시겠다는 말씀에는 섭섭한 마음도 드는군요. (이를테면 저는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 할 수 있겠죠.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일본어로 쓰시는 소설이 언젠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스스로에게 더욱 만족스런 작품을 쓰시게 될 때, 잊지말고 판갈에도 함께 게재도 해주고 그러신다면 그 편이 의미도 있고 이 편으로도 영광이 크겠지요. 어찌되었든 언젠가는 반드시 작품란에도 돌아오시리라 믿습니다.

 

 참고로, 한국어로 작품을 올린 뒤에, 사이트 선택 언어를 Japanese로 바꾸시고 글을 수정하여 일문으로 작품을 다시 올리시면, 언어 선택에 따라 다른 언어의 글로 출력할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사이트 리뉴얼에서 채택한 XE의 위력이지요. 언젠가 예니체리님께서 일문/한글로 작품을 쓰시며 잘 활용해주실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