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말 말리끄는 뭄바이의 빈민촌을 헤매는 소년이다. 인도의 진정한 모습. 거기서는 사람이 죽든 말든 경찰도 관심이 없다. 소경은 돈벌이가 두 배라는 말에 멀쩡한 눈을 멀게 하는 공간이다. 절대적 빈곤의 세계에서 자말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에게는 살림이란 형이 있다. 엇갈리는 생사의 난리통에서 겨우 만나는 사랑 라띠까는 잃어버리고, 자말은 라띠까를 되찾기 위하여 백만장자 퀴즈 쇼에 나간다. 여기까지만 해도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2008)]의 반절은 된다. 모양새는 발리우드 영화 같지만, 원작 소설도, 고친 각본도, 감독 자리도, 모두 영국 사람 것이다. 후줄근한 셔츠만 입어도 멋쟁이처럼 뵈는 자말 역의 데브 파텔도 영국인이다. 인도 빈민촌의 껍데기를 영국인의 돈으로 사서 만든 할리우드식 판타지 영화다. 영화 제목부터 대놓고 드러내듯 자본주의적 행복으로 끝을 맺는다. 단지 결말이 올바르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절대빈곤과 평생을 갈등하는 빈민들에게 백만장자는 그야말로 꿈이다. 모든 퀴즈의 답이 자말이 살아온 인생살이라는 것부터 이미 초현실의 영역이다.  

울화통이 터지는 순간은 영화가 안이한 운명론을 들먹일 때다. 라띠까와의 달콤한 로맨쓰를 포함하여 영화는 수도 없이 운명이란 말을 남발한다. 자말은 신이 이끄는 소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운명의 순간 나는 자말과 살림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살림은 절대빈곤의 공간을 벗어나 돈벌이를 하고 싶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는 거의 끝까지 자말과 살림을 선인과 악인의 구도로 만들어 신이 택한 소년을 지지하고야 만다. 하지만 살림의 악행들은 미치도록 빈곤을 벗어나고픈 인간의 피나는 아우성이다. 돈을 벌고 싶어 안달하는 살림은 파국을 맞고, 백달러를 옛동무에게 줘버릴 정도로 돈에 초연한 자말은 억만금과 사랑을 얻는다. 왜냐? 이 모든 게 운명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초현실의 승리다. 그리하여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정당하지 않다. 심장을 까부수도록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빈민촌을 배경으로 삼아 놓고서, 하층계급의 독한 통증을 살피지 않는다. 하층계급은 운명의 판타지를 위한 재료로 쓰였을 뿐이다. 기어코 영화는 운명론의 칼날로 계급의식을 도려낸다. 거듭되는 하루살이의 고통이 운명이란 판타지로 표백되는 자말보다는, 차라리 돈다발을 가득 채운 욕조에 들어가 마지막을 맞아들이는 살림에게 정이 간다. 슬럼독의 운명 판타지는 비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