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추리물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어디 가서 매니아라고 자칭할 만큼 추리 편력이 높은 친구는 아니었지만(또 그의 관심은 명탐정 코난이나 김전일같은 만화에 더 치우쳐 있던 것 같았지만) 내가 추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어느 날 교실에서 명탐정 코난을 돌려보던 중이었다. 그 친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돌려주고는 말했다.

 

"이거 여자가 범인이야."

 

그때 나는 책을 읽기 전이었다. 나는 화를 내며 스포일러를 하면 어쩌냐고 따졌다. 그러자 그 녀석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도망갈 뿐이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고 쉬는 시간에, 책상 밑으로 페이지를 다 넘기고 나서 나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가리킨 여자가 나온 에피소드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끊겨 있었던 것이다.

 

"딱 봐도 수상하잖아. 또 한동안 가까운 사람이 범인인 패턴이 안 나왔으니까 이 여자가 범인이지."

 

뭔 소리를 한 거냐는 내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이 이 책,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을 읽으면서 대번에 떠오른 에피소드였다. 본 작품은 미스터리에서 쓰이는 클리셰와 각종 장르적 패턴을 폭로하고는 뒤집어버린다. 미스터리 장르에 만개한 '장르적 위선'을 하나하나 까발리고 비웃는 것이 이 작품에서 선사하는 가장 큰 쾌감이다. 아마 미스터리만큼 위선적인 장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독자 역시 없을 것이다. 예로 든 내 친구처럼, 독자는 이미 미스터리의 실체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근엄한 척 구는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얼굴에 정면으로 대고 이 작품은 외친다.

 

"뻥 치시네."

 

본 작품에서는 우선 인물의 제시 방법이 비틀어진다. 작중 탐정과 경관은 종종 작품 세계 바깥으로 빠져나와 본인이 속한 작품을 비평한다. 사건이 일어나는 세계를 메타 세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얻는 효과는 인물이 직접적인 비판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작중 세계가 가상임을 강조한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훌륭한 문학 작품이나 몰입성이 강한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종종 현실의 끈을 놓치고 만다. 독자가 작품이 제시하는 세계에 매몰되어 그 안의 인물들의 삶을 진짜로 착각하도록 교묘하게 속이는 것. 그것이 바로 픽션의 기능이다. 하지만 미스터리는 거기에 한 단계의 사기를 더 친다. 미스터리 구조, 미스터리를 제시하고-해체한다는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늘 아래 인간이 해명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베이컨류의 계몽사상이다. 홈즈가 과학수사를 천명한 최초의 수사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는지. 미스터리는 그 어느 장르보다도 현대적이고 친이성적인 장르이다. 탐정, 혹은 탐정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모든 미스터리는 밝혀져야 한다. 미스 마플에 와서는 인간의 본성까지도 들춰지고 일본 사회파에 와서는 사회의 부조리나 모순적인 인간관계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렇게 무언가를 들쑤시고 끄집어내는 게 미스터리의 본질이다. 바로 여기에 미스터리의 기만이 있다. 애초에 미스터리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 아니냐, 범인과 탐정이 알고보니 한통속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논지는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둔다. 작품으로부터 자유자재로 떨어져나오는 인물들은 미스터리의 한심한 규칙들을 노골적으로 '깐다.'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작품론에서 시작된 장르가 아니라 밀실살인, 알리바이 트릭, 다잉 메시지 등 외적 제반으로부터 구조적으로 수렴된 장르라는 것이 이들이 폭로하려는 바이다. 규칙에 의한 설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중 세계를 우스꽝스럽게 하는가? 작중 인물인 오가와라 경감은 엘러리 퀸의 다잉메시지에 대한 '변명'을 인용한다. "죽음 직전, 그 유례 없는 신비스런 순간, 인간 머리의 비약에는 한계가 없어진다." 이는 두말 할 것 없는 횡설수설이다. 꼴이 우습지 않은가. 냉철한 두뇌를 캐치프레이즈로 삼는 탐정이 이런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다니. 본 작품은 이러한 속 보이는 뻥을 비웃으면서 결말을 통해 그 부조리를 직접 드러낸다. 수록 에피소드 중 다잉메시지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암호와도 같았던 메시지는 사실 피해자의 앞이 안 보이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다급하게 작성된 것. 그리하여 메시지를 바로 알아볼 수 없던 것뿐이었고 그 메시지는 '의사 불러'였다. 이 장면이 아무래도 범인의 이름을 암호로 남기고 죽는 것보다는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미스터리에서 숱하게 나오는 억지스런 설정과의 간극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자학적이면서도 자기 반성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 본인이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미스터리 작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렇게 자아비판에 열을 올리는 연유는 책 뒤쪽의 작품해설을 보면서 비로소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는 그의 작품이 전부 소개되지 않았고 작품세계를 완전히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히려 이것을 역설하고 있다. 미스터리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르적 안일함을 기저에 깔아둘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더욱 그럴듯하고 눈 동그랗게 뜨고서도 속아 넘어가도록 하는 치밀한 작품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가라는 것, 이러한 외설적 조롱을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다소 접해본 바, 이러한 작품의 보충적인 논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독 작품으로서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꼼을 위한 몇몇 말도 안 되는 트릭의 유쾌함은 물론, '제대로 된' 미스터리 본연의 즐거움도 놓치지 않고 제공해 준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전과는 달리 다소 진지하다. 그동안 추리소설을 연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탐정은 이제 자기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딜레마에 빠진다. 그야말로 자기 모순과 자학의 극에 달한다. 그것이 깔끔하고 통쾌한 한 편의 단편 추리소설로서 제시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뿌듯함은 여타 본격 추리소설에 못지 않다. 보는 내내 유쾌하게 웃을 수 있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장르 애호가로서 흡족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리고 부럽다. 한국에서 만일 이런 작품이 창작된다면? 맥락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호응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풍성한 일본 추리소설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추리소설을 읽는다. 에도가와 란포나 요코미조 세이지 등에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역사가 있고 두터운 작가진과 계보와 소비시장이 있다. 우리나라에 자기 패러디가 가능한 문화가 얼마나 있던가? 문화는 처음에는 모방에서 시작하여 현지화, 자기 모방 단계로 이어진다. 자기 모방이 가능할 때에야 그 문화는 독자적인 색과 시장을 얻는다. 자생하는 문화를 창안하려는 각계의 시도가 끊이지 않는 시기이다. 그러한 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나 상황은 여의치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논하는 것은 다음 자리로 미루도록 하겠다.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풍요롭고 축복받은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사는 옆나라가 부러워 속이 끓을 뿐이다. 이것이 필히 인구수와 경제력의 차이만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명탐정의 규칙"이 나오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