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사고를 당하고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하얀 이빨을 반짝이는 아나운서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학창 시절 번거롭게 시비를 걸어오던 짝꿍을 떠올려본다. TV는 오늘따라 잔소리가 많은 식구처럼 무언가를 열변하고 있었다. “다음은 새로운 장기 대체 프로그램에 관한 소식입니다.” 아나운서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아나운서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자연스럽게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TV에 표시되는 날짜는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달력과 많은 차이가 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기억하는 시간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뇌수에 저장된 기억을 붙잡아 끌어당기며,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해보았다. 머리를 쥐어 짜낸 끝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그것은 사고였다. 깜깜한 밤에 혼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인간, 악귀처럼 무시무시한 안광을 비추며 달려드는 트럭, 유성과도 같은 충돌이 영사기처럼 생생하게 눈앞을 스쳤다.
다음 순간 나는 인체에 유해한 궁금증이 두개골 안쪽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처럼 머리를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트럭은 나의 머리를 부수어놓았을 터였다. 따라서 나는 매우 놀라고, 더듬거리면서, 박살난 머리통이 아직도 달려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는 그대로 달려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내 머리는 무사한가?
두려움에 떨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Q. 나는 남자인가? A. 촉촉하게 젖은 속옷을 보면 그런 것 같다. Q. 책장 옆에 조그마한 공간에는 야한 잡지를 몇 개나 숨겨 두었는가? A. 학생 시절에 산 것이 10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새로 산 것이 5개였다. Q. 내가 자주 들르는 사무처 아줌마의 뱃속에는 나의 씨가 들어 있는가? A. 나는 사고를 당하기 전 수요일 밤에 그녀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었으므로, 그녀는 매우 높은 확률로 불륜의 증거를 품고 있을 것이다.
사고 능력은 완벽했다. 무엇보다도 머리가 붙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완벽한 증거로서 나에게는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상식적인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사고과정에 의해 내 머리는 제대로 붙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내가 생각한 것은 시간이었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것인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가 있었다. 나를 보고 놀라서 들고 있던 카르테를 떨어트린 것이다.
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깨어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휙휙 저었는데, 그때마다 안경이 반짝거렸다.
“당신은 2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르쳐 드릴까요?”
“빨리 듣고 싶군요.”
말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뻣뻣했다. 의식을 잃은 2달 동안이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사가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1월 1일. 새해 첫날에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차에 치었습니다. 할 일도 없이 도서관이나 기웃거리고 싸구려 소설책을 잔뜩 사들고 가족들이 있는 시간대를 피해서 늦게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죠. 한 손에는 책무더기를 들고, 남은 손으로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건널목을 건너던 순간이었습니다.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이 당신에게 달려온 겁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확하게 생각이 나는군요.”
“당신이 사고를 당한 경위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게, 두 달이었나요?”
“그렇죠, 두 달. 당신은 식물인간이 되어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트럭에 박살난 신체는 손상이 심해서 대량의 피를 수혈했고, 부득이하게 몇 가지 장기를 적출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몸을 움직이는데 허전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의사의 말에 갑자기 몸 안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에서 장기가 적출되었다고?
“잘 모르겠는걸요. 지금 정확히 제 몸에서 어떤 부위가 없는 거죠?”
“별로 중요한 기관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몸에서 어떤 장기를 빼어 버렸냐구요?”
“막 일어나신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면 별로 알려드리고 싶지 않은 부위입니다만.”
의사는 눈 대신 안경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뇌입니다.” 나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생각해보고 말했다.
“지금, 저에게, 뇌가 없다구요?”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어떻게 당신이랑 대화하고 있는 거죠?”
“간단합니다. 당신은 사고를 당하고 나서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뇌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식물인간이었던 당신에게 처방한 수술이 매우 적절하게 작용한 결과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군요.”
“뇌가 없다면, 나는 뭐죠?”
“당신은 당신입니다.”
“닥쳐요, 나는 지금 뇌가 없다고요.”
“하지만 대화는 하고 있죠.”
“그러니 뇌가 없을 리가 없지요. 농담이나 조롱, 방금 당신의 언변에서 어느 쪽에서든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도대체 어쩌자고 지금 막 의식을 회복한 환자에게 뇌가 없다는 황당한 말을 하는 겁니까?”
의사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번에는 제가 물어 보겠습니다. 뇌가 없다, 그게 그렇게나 큰 문제인지요? 지금 당신은 자신의 의사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일어서진 않았지만,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제 말에 분노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감정도 분명히 느낄 수가 있겠지요. 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뇌가 없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큰 문제입니까?”
생각해보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농담과 조롱. 어느 쪽이 환자분에게 더 안타까운 일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제가 한 말은 확실하게 농담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는 뇌 대신에 특수한 물질이 들어 가 있습니다.”
“특수한 물질?”
씩씩 거리는 내 얼굴을 대면하면서도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껌입니다.”
“잠깐만요.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말해줘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껌입니다.”
“당신이 넣었다는 특수한 물질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의사는 기린처럼 고개를 휘휘 저어대고 있었다.
“당신의 뇌를 적출한 두개골의 빈 공간을 채울만한 양의 껌을 준비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우리들은 한 달 동안 병원 주변의 공원을 돌면서 껌을 채집했습니다. 환경미화에도 도움을 주고, 처치가 곤란한 껌 찌꺼기도 재활용할 수 있었지요.”
“제정신입니까?”
“사실입니다. 우리는 1500cc가량의 껌을 모아서 당신의 머리에다 넣었습니다. 인공장기이지요. 인간의 몸을 대체하는 인공장기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당신은 굉장히 특수한 사례입니다. 세계최초로 뇌를 인공장기로 대체했음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에너지 자원인 껌을 재활용하여, 최근의 대세인 친환경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으니까요.”
“절반 정도만 친환경적이군요. 껌도, 인간도, 지구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니까요.”
투덜거리긴 했지만 의사의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아 있다. 생각도 할 수 있고, 감정도 남아있으며, 기억도 거의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의 말을 믿는다면 굉장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뇌가 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뺀다면.
의사의 설명에서 알아들은 말을 정리해보면, 엉망진창이 된 나의 뇌는 컴퓨터로 스캔해서 껌으로 재현한 인공두뇌에다가 매우 복잡한 과정으로 재현되었다. 본래 두뇌는 껌뇌와 합쳐져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 뇌에는 이상이 없는 겁니까?”
“우리들이 환자님에게 집어넣은 껌은 다 씹어서 단물이 빠진 찌꺼기입니다. 포도당이 매우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당분을 섭취하십시오.”
같은 이유로, 의사의 기술은 당뇨병 환자에게는 위험성이 매우 높아서 시술할 수 없다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환자님께서는 항상 아드레날린을 분비해야합니다. 엔돌핀도 마찬가지입니다. 껌으로 만들어진 뇌 속에도 인체의 제어신호인 호르몬 생성 장치를 급조해두긴 했지만, 뇌내마약인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예상보다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게 없으면 어떻게 되죠?”
“뇌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죠.”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껌뇌는 이미 한 달 전에 시술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수술이 끝나고도 한 달 뒤에 깨어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드레날린의 분비량이 적절치 못했던 것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당분과 뇌내 호르몬을 항시 분비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지 못 하면, 언제든지 다시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죽는다는 소리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죠?” 생각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너무 절박했기 때문에 도리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간단합니다. 항상 흥분하세요. 쾌락을 찾아다니세요. 단 것을 입에서 떼지 마세요. 지나치게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마세요. 생각은 당분은 빨리 소비하니까요. 그리고 언제나 즐겁게 웃으세요.”
나는 3일 후에 퇴원할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오는 죄수마냥 병원에다 보석금 대신 수술비를 지불해야했다. 입원비에는 1500cc 분량의 씹고 버린 껌 값, 그리고 의사가 작업을 할 때 마신 맥주 값이 더불어 청구되었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정말로 깨어났구나.” 하지만 그녀에 관한 기억은 내 의식에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여자에게 그런 말을 던진다는 생각만 해도 머릿속에서 뇌수가 말라붙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가 말한 것을 떠올리며 생각을 멈추었다. 나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는 다가와서 나를 껴안았다. “많이 고생했지?” 하지만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자 아내는 내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이 죽어버리는 줄 알고…….” 아내의 눈은 내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것 같다. 지금까지 왜 이렇게 쉬운 일을 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남아있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동안 왜 이렇게 아내를 힘들게 만들었단 말인가. 나는 그녀를 지키겠노라고, 작은 목소리로 맹세해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옛 이야기와 달라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좋은 결말로 귀결되는 일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벼락을 맞을 확률과도 흡사하다.
나는 밤중에 잠을 설쳤다.
머리가 너무나 아픈 탓이었다.
오늘은 아내도 회사에서 숙직을 하느라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비명을 지르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스무 번 정도 가위에 눌렸을 때, 나는 마침내 의사가 나에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엔돌핀, 아드레날린. 엔돌핀, 아드레날린.” 나는 의사가 해준 단어를 되뇌며 처방전을 실행하기 위해 잠자리ㅔ서 일어났다. 머릿속에 쥐가 들어온 것 같아서 아주 작은 행동에도 안간힘을 써야했다.
두개골을 가득 채운 껌이 울부짖고 있었다.
쾌락, 쾌락, 쾌락만을 두뇌가 원하고 있었다.
부엌으로 갔다. 찬장에서 설탕병을 찾았다. 나는 얼굴에 병을 기울이고 설탕을 한입가득 씹었다. 바닥은 강정 요리를 할 때처럼 설탕범벅이 되었다. 침에 용해되다 남은 설탕은 입 안에서 턱이 빠질 정도로 튼튼해졌다. 하지만 나는 끈기 있게 설탕 덩어리를 씹어 삼켰다. 물을 마시고, 넘긴 다음, 그러한 공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당분을 보충한 다음에는 쾌락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새벽에 컴퓨터를 켰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하면 안 될 짓이었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몹쓸 인간이 되는 것보다도 죽음에 대한 공부가 더욱 집요했다. 나는 밤새도록 자위를 했다. 아침에는 잠들었다가, 다음날에는 다시 일어나서 TV를 보거나 설탕을 대접에 담아서 삼켰다.
결국 내가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아내는 다시 수척한 얼굴에 우울한 낯빛을 가면처럼 달고 살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짓거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아내는 내가 무엇을 해도 이해해주었다. 나는 그것조차도 못마땅해졌다.
“당신도 나를 경멸하고 있겠지?”
“아니에요.”
“뇌가 껌이라서 단 것을 먹거나 게임을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내가 밉겠지? 한 시라도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이 없으면 죽어버리는 고무 뇌 인간, 내가 되고 싶어서 이런 게 된 줄알아?”
“아니에요, 저는 절대로 당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가주지. 나도 혼자서 사는 게 훨씬 좋단 말이야.”
큰 소리를 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골목을 거닌다. 손가락 끝에 닿은 지갑이 납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갑에 남은 잔고를 확인한다. 5천원. 달력은 봄이었지만 날씨는 1월이었다. 난방이 없는 곳에는 아직 겨울이 남긴 입김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바람은 쇠붙이처럼 사정없이 맨살을 찢어 발겼다.
나는 집에서 나온 지 1시간도 되지 않아서 패배감과 추위로 난쟁이처럼 오그라들었다. 돌아갈까? 집을 상상하기만 해도 얼어붙은 몸에 온기가 돌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약한 놈인지 깨달았지만 굴복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돌아가도 부끄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거리에 이끌리고 있었다. 현란한 조명이 눈앞을 가득 메우는 순간, 나는 머리를 짓누르는 묘한 목소리를 들었다. 두개골 안쪽에서 말라가는 껌 조각이 쾌락을 애원하고 있었다. 집에는 나를 죽어가게 만드는 무미건조한 아내밖에 없었지만, 거리에는 뇌를 살찌우는 쾌락이 있었다.
나는 환호했다.
내가 어디서 살아야하는지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나는 그야말로 현대에 부활한 짐승이었다. 경찰들은 새로운 부랑자에게 치를 떨었을 것이다. 나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인간이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모든 여자들은 나의 노리개였고, 가치를 가진 모든 물건이 나의 지갑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도,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제공하는 피해자들도, 나를 따라 다니는 경찰조차도, 머릿속에 쾌락을 애원하는 뇌수를 가진 나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껌으로 만든 뇌를 갖지 못한 저급한 인간들, 그들은 법이나 도덕과 같은 의미 없는 단어에 자신의 목숨을 애원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불쌍하고 동정이 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많은 기회와 약탈과 즐거움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머릿속에 엔돌핀이 부족했다. 내가 가진 뇌는 스스로 즐거움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바깥에서 무언가를 채워 놓지 못하면 뇌가 죽어버린다. 그것이 껌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의 숙명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스스로 머리를 열었다.
길바닥에 선혈이 튀었다. 머리를 자를 때 사용한 톱이 맑은 소리를 내며 길바닥에 떨어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불쌍하고 나약한 인간들에게, 이 순간만큼은 나는 내가 도달한 처지를 울부짖을 필요가 있었다.
“여러분, 저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내심으로는 그들을 비웃고 있으면서도 나는 발톱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나는 나에게 시선을 던지는 시민들에게 열린 머리를 내밀고 호소했다.
“제 머릿속에, 껌을 뱉어주십시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시원하게 열어 제낀 머리를 사람들에게 향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물러서는 사람, 신기한 구경거리마냥 웃으며 지켜보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아프지도 않았다.
수치심이나 도덕 따위는 뇌가 껌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미물들의 것이다. 내가 발휘하는 용기와 실행력은 오롯히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뇌수에 의한 것이었다. 당분과 쾌락,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구걸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껌들을 머릿속에 던져주기를 기원했다. 길거리에서 씹다 만 껌을 구걸하는 거지는 나름대로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껌뇌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보완되었다.
머릿속이 충분히 묵직해졌을 때, 나는 다시 머리를 닫았다.
온몸에 힘이 솟았다. 신과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나는 감히 언어로는 표현할 수도 없는 만족감에 휩싸였다. 우선 생각난 것은, 나에게 아이가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서 나에게는 정확히 132명의 가족이 있었다. 그 중에서 87명이 한국인이었고, 32명이 미국인이었으며, 나머지 13억 명이 중국인이었다. 이러한 기억력으로 볼 때, 길거리에서 보충한 나의 계산 능력은 완벽했다.
머릿속을 보완하고 일어선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무언가가 부족하고 망가진 인간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보였다. 쾌락,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 누군가를 미워하는 방법, 그 밖에 유능한 기능들이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나는 이제 무작정 쾌락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당분과 쾌락이 저절로 따라오는 성공한 인생에 발을 들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겪은 이러한 일련의 모험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비극, 그리고 껌으로 만든 두뇌로 인한 인류의 새로운 진화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성공한 나날을 만끽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쾌락이나 당분이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자주 들르는 룸싸롱으로 향했다. 가슴이 크지만 머릿속은 보통 인간인 여자가 나를 반겼다. “어머, 자기. 오늘도 머리에 껌을 바꿨어?” 그녀는 나에게 교태를 부렸다. 하지만 나는 마침내 그곳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 한 새로운 여자를 보고 만 것이었다.
업소에 새로 들어온 여자는 순진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욕구가 솟아나는 것을 깨달았다. 껌뇌에서 진물이 흘러 나왔다. 내가 진짜 뇌를 잃고 나서부터는 별로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여자는 청순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느낀 것들이 밀려 나가고 하얀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사귀던 여자를 밀어 버리고, 순진한 여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다가갔다.
“이름이 뭐야?”
청순한 여자는 말이 없었다. 돈을 지불하고 둘 만 있는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행위 중에도 그녀는 허리를 흔드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일을 마치고 알몸으로 침대에서 잠들었다. 오늘 밤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뇌를 잃은 날, 오래 전에 버리고 떠나온 아내, 거리에서 떠돌았던 나날이 생각났다. 뇌가 바뀌어버린 이후에는 한 번도 꾸지 못했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뇌를 바꾼 이후 내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무로 만들어진 껌뇌는 기억의 재인 작용인 꿈을 꾸는 기능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옆에서 같이 잠이 들었던 청순한 여자가 일어났다.
“못 움직이겠죠?”
순진한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걸어서 확인했다. “당신은 지금 못 움직일 거예요.” 그러더니, 여자는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그녀는 커다란 쇠붙이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톱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걸 가지고 내 머리를 슥삭슥삭 자르기 시작했다.
맙소사. 나는 꽃뱀에게 걸리고 만 것이었다!
여자는 내가 의식하고 있는 눈 앞에서 나의 뇌를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대단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쾌락이나 감정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죽음? 그게 뭐가 그리도 나쁜 일이지? 점점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어간다. 여자는 마침내 내 머리에서 뇌를 힘차게 뽑아 들었다.
뇌수가 다시 접합되고 제거 되는 과정에서,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수상한 가운을 걸친 의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에게서 뇌를 빼앗아간 꽃뱀도 옆에 있었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성을 내고 있었다. 주변은 병원이라기엔 너무나 더러운 장소로 뒷골목에 마련된 불법적인 복제 매물을 거래하는 브로커들의 은신처와 비슷했다.
의사와 여자는 활짝 열린 내 머리와 껌으로 만든 뇌수를 들고 서로 지껄여댔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뇌가 손상된 나는 인간들의 대화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무거운 졸음에 깔려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의사에게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 남자가 또 도망쳤잖아요. 이걸 되찾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해줘요.”
“사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도구는 1500cc쯤 되는 껌이면 충분합니다.”
TV에서 아나운서가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뇌라는 건 어디에 써먹는 장기인지 용도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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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풍선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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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몸살로 고생하고 있을 때 생각해서 휘갈겨둔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어디선가 말했지만, 평범한 이야기이고 반전도 없으며 주제도 평범합니다.
몇 번 더 고쳐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올립니다.
단편 게시판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며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지금은 낮이지만 오늘 밤에는 모든 분들이 소재가 되는 악몽을 꿀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