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건, 결혼하다

 


탐정 김재건의 일과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컴퓨터, 독서, 그리고 잠. 구체적인 시간표를 그릴 수는 없다. 졸리면 자고 심심하면 클릭 질이나 게임을 하고 그마저 지루해지면 책이나 집어드는 식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낮과 밤의 구분은 없으며 사무실에 얹혀사는 하나뿐인 조수이자 제자인 박마곤의 닦달이 아니면 제대로 씻지도 않는다. 사건 의뢰가 없는 날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의뢰는 한 달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이다.


“제발 일 좀 하며 살자고요. 이렇게 만날 폐인으로 살 거예요?”


재건은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책을 받쳐 들고 한 손으로는 프링글스를 입으로 나르는 모습이 꽤나 위태로워 보인다. 한 손으로 공중의 책장을 넘기느라 온몸 꿈틀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마곤은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어쩌겠니. 요샌 의뢰가 안 들어오는걸.”


재건은 소금 투성이 손가락을 빨며 말했다.


“옛날엔 사건 찾아서 떠돌기도 했다면서요? 일 없으면 알바라도 할 수 있잖아요.”


“나더러 그런 귀찮은 일을 하란 말이냐?”


“하다못해 나가 놀기라도 하든가.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나 얼굴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연락하면 간신히 얼굴은 떠올리고 마지못해 만나줘서 밥이라도 같이 먹어줄 친구도 없어요?”


“그런 수식어가 긴 친구는, 글쎄…….”


재건은 책을 잠시 가슴 위에 덮어두고 자신의 교우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곧 다시 책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몇 주 동안 뒹굴 거리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알아요? 삼수벌레를 방안에서 키우는 학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재건은 피식 웃었다. 마곤의 잔소리는 계속되었다.


“지금 일주일 가까이 단 한 번도 문밖에 안 나간 거 알아요? 그동안 옷도 안 갈아입었고요. 지금 이 안에 완벽하게 일체화돼서 모를 텐데, 냄새 난다고요! 이래선 의뢰인이 왔다가도 도망가 버리겠어.”


“내 일은 육체적으로도 전두엽적으로도 칼로리 소모가 너무 커서 한 번 일을 하면 이렇게 한동안은 쉬어줘야 해. 마치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처럼.”


“웃기는 소리 마요. 사람은 보아 뱀이 아니거든요?”


사실 마곤도 당장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김재건은 언제나 기묘한 사건을 이끌고 다닌다. 보통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건이 그를 따라다녔고 그도 그것들을 쫓았다. 그래서 사건은 늘 피곤했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금 마곤은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일이 없으면 차분히 공부할 수 있어 좋긴 하지만, 하지만 이 몰골은 너무하지 않은가.


“아니면 애인이라도 만들어보는 게 어때요? 그럼 조금이라도 사람다워질 수 있을는지.”


“애인? 어쩐지 생경한 발음의 어휘이군.”


“그렇겠죠. 그 나이(34) 먹도록 애인 한 번 못 사귀어봤을 테니 말이죠.”


마곤은 재건이 받치고 있는 책을 낚아챘다.


“룸…… 넘버 1301? 이런 책이나 보고 있으니 정상적인 연애관을 가질 수 있나.”


“이리 줘어.”


재건은 누운 채로 팔을 휘둘렀다. 마곤은 페이지를 엄지 끝으로 넘겨 훑어보고는 재건의 얼굴에 덮어버렸다.


재건은 다시 책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이 책은 아주 훌륭한 로맨스 소설이야. 연애와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느끼게 해주지. 지금 시리즈를 두 번째 읽고 있는데, 너도 한번 읽어봐.”


“됐거든요? 목차만 봐도 알겠던데 뭘. 나에게 연애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손조차 잡을 수 없다? 우리들은 성인 비디오를 빌리러 간다? 뭐 이런 제목이…….”


“직접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난 이렇게 가슴을 울리고 공감이 가는 로맨스는 처음 봐.”


“공감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죠. 생전 연애 경험도 없는 아저씨가 공감은 무슨.”


재건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를 긁적이며 책을 테이블에 놓는다.


“우리 조수는 탐정님에 대한 신뢰가 너무 부족하단 말야. 나도 한때는 한 로맨스 했지.”


그러자 마곤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진짜야. 영화화해도 좋을 만한 훌륭한 에피소드도 있다고. 너는 상상도 못할 가슴 애틋해지는 에피소드였지.”


재건은 추억을 회상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저씨의 추억이라면, 한밤중에 여잘 스토킹하다가 전봇대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침 질질 흘리다가 주민 신고로 붙잡혀 갔다든지?”


“야, 너 진짜…….”


재건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같군. 나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말야.”


“금방 지어낼 거면서.”


"아니야. 여기 앉아봐. 너한테만 특별히 이야길 해줄게.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던 얘기야."


마곤은 마주보는 소파에 앉았다. 재건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마치 추억을 일깨우는 듯한 기분 좋은 바람이다. 재건은 당장에라도 기억 속 창고 어딘가 소중하게 보관된 추억을 꺼내 들 수 있었다.


“이거 엄청난 폭로인데, 난 사실 결혼했었다.”


“아, 그래요?”


“정말이야.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고 나는 결혼을 했어. 넌 상상도 못 했겠지. 이 스토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마곤은 미심쩍어 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무슨 내용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재건은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소녀가 있었어. 고등학교 1학년 때였고 같은 반이었지. 때 묻지 않고 수줍음이 많은 애였어. 난 아마 몇 번 보지 않아 반해버렸었을 거야.”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됐다.

 

 

재건은 약속장소에 5분 정도 일찍 나왔지만 의뢰인은 그보다 앞서 나와 있었다. 재건은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꾸미지 않았어도 타고난 미모를 감출 수 없는 여성이었다. 재건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자 그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그럼 부탁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의뢰인은 말했다.


“부탁이 아니라 의뢰예요. 그리고 의뢰를 승낙하려고 했으니까 이렇게 얼굴을 비추는 거고요.”


사전 이야기는 채팅으로 끝내놓았다. 의뢰 내용과 수사 방침 등을 사전 교환하고 의뢰 계약을 맺기로 합의한다면 직접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건의 방식이다.


“네에. 정말 어려운 의뢰인 건 알지만…… 부탁드릴게요.”


의뢰인은 의례상 하는 부탁한다는 말이 이 상황에서 적절할지 잠시 고민했다.


“채팅으로 말했듯이 의뢰비는 재산과 사건 경중을 고려해서 차후에 청구합니다. 일이 끝날 때까진 일절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네에.”


마곤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재건의 개인 홈페이지는 탐정 김재건과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하지만 정보가 범람하는 웹상에서 진짜를 골라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페이지를 잘 꾸며놓았다 하더라도 인터넷에 걸어 놓은 탐정 사무소 명패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탐정 개념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개업 초창기의 일이었다.


그래서 페이지의 비공개 상담 게시판에는 장난성 글이나 남자친구의 뒤를 캐 달라는 초등학생 소녀의 독기 어린 의뢰나 제2금융권 대출금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등의 쓰잘데기 없는 글만의 가득했었다. 할 일이 없던 재건은 그런 글에도 하나하나 답을 달아주곤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이번 의뢰인의 진지한 상담 요청 글이 올라온 것이다. 그 내용은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장난처럼 보였지만 글에 자기 사진과 전화번호를 첨부했다는 것이 달랐다. 그것을 본 재건은 의뢰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의뢰인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A4에 프린트된 사진이었다. 큼직한 이목구비를 지닌 사내가 찍혀 있었다.


“이 사람이군요. 언제 한국에 온다고 했죠?”


“다음 주요. 갑자기 귀국을 앞당겨서. 원래 한 달 정도 더 뒤에 오기로 했었어요.”


“빠듯하겠네요. 얼마나 있을 거래요?”


“한 달 정도요. 여기저기 신세 질 생각인 듯해요. 우리…… 집에도 하루 이틀 묵겠다고 했어요,”


“그럼 우리 결혼 생활은 지금부터 한 달 하고 일주일 정도, 이겠군요.”


“지금부터요?”


“네. 예행연습을 하려면 지금부터 해도 부족해요. 결혼은 서로 간 어느 정도는 알고 나서 하는 거니까요. 뭐, 전부는 아니겠지만요.”


재건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의뢰 내용이었다. 며칠간 부부 행세를 해달라는 것. 의뢰인에게 이민 간 소꿉친구가 있었다. 둘은 아주 어렸을 적 장차 결혼하기로 약속했는데 아무래도 남자는 진지했던 것 같다. 남자가 출국하면서 둘은 또다시 약속했다. 훗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둘 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때 결혼하기로. 그리고 남자는 아직도 그 약속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재건은 의뢰인이 그동안 애인 하나 안 만들어 놓은 것에 의아해하면서 결혼보다는 애인을 가장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느냐고 채팅방에서 물었었다. 의뢰인은 이미 한 번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처음엔 당연히 남자친구 있다고 말했죠. 재작년이었어요. 그런데 그 애를 분명히 떼어놓으려고 결혼까지 고려중이라고 말한 게 문제였어요. 그뒤로 연락올 때마다 그앤 남자친구 안부를 물었어요. 그러다가 결혼했냐는 질문에 그만...’


그리고 그는 갑작스레 방한을 통보했고 소꿉친구를 낚아채간 남편 얼굴을 꼭 봐야겠다는 것이다. 의뢰인은 어디다 상담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 우연히 재건의 사이트를 발견했다.


“그 친구 분이 정신 나간 분이 아닌 이상 결혼증명서를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요? 그럼 우리의 깨소금 돋는 신혼 생활과 몇몇 심적 증거만 보여주면 되겠지요. 혼자 사신다고 했죠? 본인 집입니까?”


“부모님 집이에요. 부모님은 시골에 사세요.”


“그럼 그 집을 잠시 빌려야겠습니다. 한 달 동안만 신혼부부 집으로 꾸며놓고 돌아가면 다시 돌려놓는 거죠.”


“그럼…… 같이 사는 건가요?”


의뢰인은 불안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당연하지요. 누군가를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니까요.”


“저기, 그건, 그…….”


의뢰인은 줄어들듯 어깨를 움츠렸다. 재건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집안에서 같이 살겠다는 게 아니라, 전 차 안에서 대기할 거예요.”


“네? 그럼 좀, 힘드실 텐데…….”


“아뇨. 곁에서 항시 대기해야 하고, 또 의뢰인 보호까지가 제 임무예요. 미안해하실 것도 없어요.”


“네에…….”


재건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재건은 종이를 내려다보고 일의 순서를 잠시 가늠해 보았다.


“일단 집부터 확인해야겠군요. 어느 정도 리모델링해야 할지는 직접 보고 생각하는 게 나을 테니까요.”


재건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의뢰인은 핸드백을 끌어당기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재건은 잠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없이. 의뢰인은 마주보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말이 이어지지 않자 무안한 듯 가방 손잡이만 만지작거린다.


재건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의뢰인은 낯을 심하게 가렸다. 이렇게 재건을 만나러 나온 것이 가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재건은 말했다.


“호흡 맞추는 연습부터 해야 할 것 같네요. 우린 부부잖아요. 요즘 세상에 어느 부부가 이렇게 남편을 무서워해요.”


“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아녜요. 성격이 원래 그러시니까요. 대신, 확실히 해요. 미션을 내줄게요. 앞으로 호칭은 자기, 여보, 재건 씨♡로 할 것. 말은 서로 놓을 것. 말할 땐 서로 눈을 신뢰감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서로의 눈길만 느끼고 있어도 행복해할 것.”


“네? 아…….”


의뢰인은 그 말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재건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단 한 사람을 속인다 해도 우리를 부부처럼 보이게 하려면 어지간한 각오로는 안 될 거예요. 어색함을 없애려면 매 일상을 부부인 것처럼 지내야 돼요. 이제부턴 실전도 연습도 없습니다. 지금 우린 부부예요. 누군가가 어느 한 쪽 면을 자라내 들춰본다 해도 부부임을 알 수 있게, 그렇게 만들어야 해요.”


의뢰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말 놓을까요? 놓을까?”


“네. 아, 으응.”


“자기야.”


의뢰인의 얼굴은 납처럼 무거워지고 구리처럼 빨개졌다. 재건은 재차 말을 걸었다.


“응? 자기야. 얼굴 좀 들어봐.”


의뢰인은 천천히 얼굴을 들다가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재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우면 바로 말투를 바꾸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적응될 때까지 같이 노력해 보자고요. 그냥, 편히 친구라고 생각해요. 꼭 연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이렇게 부담감만 느끼지 않으면 돼요.”


“네에…….”


“난 계속 말 놓을게요. 수영 씨는 편하게 적응해보도록 해요.”


의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집에 가볼까? 지금 갈 수 있지?”


의뢰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재건은 일어났다. 의뢰인도 따라 일어났다. 고개를 숙인 채로.


계산은 자연스레 재건이 했다. 버튼식 자동문이 열리고 재건이 한 발짝, 의뢰인이 한 발짝 늦게 따라나갔다.


“옆에 따라붙어야지. 누가 보면 싸우고 나온 줄 알겠다.”


의뢰인은 황급히 한 발짝 더 내딛는다.


“팔짱 끼자.”


재건은 팔을 내밀었다. 의뢰인이 망설이자,


“우린 부부야.”


하고 재건이 주의를 주었다. 의뢰인은 조심스레 팔을 끼워 넣었다.


“혹시 차 있어?”


재건은 물었다.


“아니요. ……. 아니. 지하철 타고 다녀.”


“그래? 그럼 당연한 말이지만 내 차 타고 가자. 중고로 헐값에 산 차지만 달리는 덴 충분해.”


재건은 차에 이르러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서는 재건은 의뢰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몸이 맞닿자 의뢰인은 잠시 숨을 멎었다. 재건이 떨어지자 그는 혹여나 들리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잠깐, 잠깐.”


이야기를 듣던 마곤은 끼어들었다.


“처음 이야기한 같은 반이었던 소녀는 어디 가고 웬 의뢰인? 게다가 이건 로맨스도 뭐도 아니잖아!”


“이봐. 첫사랑과 결혼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름답기만 할 뿐 전혀 영양가 없는 사랑이야. 어른의 세계를 알게 된다면 결국 그런 건 환상이었단 걸 알게 될걸?”


“저기요, 그보다 이야기가 전혀 일관성이 없잖아요.”


“그럼 어쩌겠어. 첫사랑 이야기랑 결혼 얘기를 동시에 하려면.”


“둘 중 하나만 하면 되잖아요!”


마곤은 그럼 그렇지, 하며 잠시나마 기대를 한 자신을 원망했다. 실실 웃으며 말하는 꼴이 또 놀려먹으려 하는 것으로 보였다.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마곤은 재건이 진지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대뜸 첫사랑이니 뭐니 하고 운을 뗀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었다.


“정 그러면 한 가지는 잊어버려도 좋아. 좋아. 구전설화 최초로 분기점이 있는 이야기다. 어느 쪽 이야기를 해줄까?”


“분기점은 무슨, 결혼 쪽이나 마저 해봐요.”


마곤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쨌든 그쪽으로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난 또, 아저씨가 무슨 결혼을 했다고…….”


“그래. 그런데 밥 먹을 때 안 됐냐? 뭐라도 시켜먹으면서 하자.”


“‘뭐라도’라뇨. 우리 처지에 자장면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던가요?”


“그래? 그럼 그걸로 콜.”


마곤은 사무실과 같은 상가 건물의 2,500원짜리 자장면 두 그릇을 주문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배달이 왔다. 재건은 면을 뒤섞으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의뢰인의 집은 평범한 25평형 아파트였다. 그에게는 그 집이 어릴 때 이사와 학창시절을 보낸 유일한 집이었지만 부모님에겐 아니었다. 아버지의 정년퇴임 후, 부모님은 본가로 내려갔고 의뢰인은 집을 물려받아 혼자 쓰게 되었다.


그래서 집안 살림에 크게 손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안방은 부모님이 떠나기 전 거의 그대로였고 식탁이며 식기, 가전제품 등은 그대로 두어도 신혼살림이 될 듯했다.


“여기다 내 짐만 좀 옮겨 놓으면 될 것 같다.”


재건은 방이며 화장실, 베란다까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방은 어릴 때 쓰던 방을 써?”


의뢰인이 쓰는 문간방에 이르러서는 물었다.


“응. 아무래도 그게 익숙하니까.”


어릴 때부터 써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방이었다.


“이 방은 정리하는 게 좋겠다. 결혼하고 개인 방을 쓰는 건 이상하지. 그리고…….”


거실로 나가서는 TV 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가리켰다.


“이건 잠시 치워두자. 대신 웨딩사진 같은 걸 걸어야 할 텐데.”


“웨딩사진?”


“응. 신혼이라면 그 정도는 있어야지. 없으면 많이 이상할 거야.”


“그래도 그건 돈이 들 텐데…….”


“필요경비야. 음. 그런데 큰 액자는 너무 과할라나?”


“그런 것 같은데. 설마 그런 걸로 의심하리라곤…….”


재건은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여긴 그냥 모험을 걸어보자. 물어본다면야 대충 둘러대면 되고. 대신 저기엔 적당한 그림이라도 걸어놓자. 액자를 떼어내면 좀 휑할 테니까. 그리고 큰 액자는 아니더라도 사진은 찍어야 해. 결혼사진이 전혀 없어선 안 되니까. 작은 액자라든지는 만들어야 하고 결혼식 앨범도 만들어야 해. 그 친구는 앨범을 보자고 할 거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방안에서 그것 말고 달리 시간 때울 게 없으니까. 아니, 재작년에 우리가 만났지? 그렇다면 그간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야겠다.”


“그런 걸 어떻게 다? 사진을 그럼 몇 장을 찍어야…….”


“웨딩사진 정도만 직접 찍으면 돼. 나머진 합성하면 되지. 신혼 여행지나 아님 일상사진이라든지는. 또 결혼식 같은 경우는, 친구나 친척 중 최근 결혼한 사람 있지? 그 사진을 빌려서 손보자.”


“그러려면 무척 번거로울 텐데.”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몇 년 만에 만나는데 앨범 정도는 꼭 보자고 말할 거야.”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날 스튜디오에 갔다. 거기서도 둘은 부부 행세를 해야 했다. 드레스를 입은 의뢰인은 카메라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진기사의 핀잔을 있는 대로 들어야 했다.


“신부, 좀 더 팔을 위로 올려 봐요.”


“아니, 신부 못 만질 거라도 만져요? 좀 더 가깝게!”


“좀 웃어 봐요. 신랑 혹시 신부 어디서 보쌈이라도 해온 거 아니에요?”


“잠깐, 그러면 신랑이 너무 신부를 쥐고 있는 것 같잖아요.”


“신부는 신랑 쪽으로 더 기울여서. 팔 빼지 말고요.”


잠시 쉬는 시간. 의뢰인은 의자에 축 늘어져 안자 있었고 재건은 캔커피를 뽑아와 내밀었다.


“고마워요. 아, 아니. 고마워.”


캔을 두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재건은 그 옆에 앉아 캔을 땄다.


“아무래도 저 아저씨는 우리가 부부인 걸 못 믿는 눈친데?”


“미안해…… 내가 잘 못해서.”


“아냐, 아냐. 다양한 부부가 있으니까 뭐.”


둘 다 커피를 마시느라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재건은 슬쩍 옆자리를 보았다. 그는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고 용기도 작았다. 모든 것이 재건과는 반대였다.


재건은 문득 생각했다. 이것이 진짜 결혼이라면 어떨까. 재건은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이었다. 그는 절대 결혼은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결혼하는 기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누군가가 곁에 붙어 있다는 것이. 대략 판단하기에 이 의뢰인은 예쁘고 성실하고 착하다. 배우자로 괜찮은 상대이다.


자꾸만 천 사이로 보이는 의뢰인의 빗장뼈로 눈이 내려갔다. 흰 드레스 사이로 더욱 하얗게 피어난 그곳은 묘하게 뇌쇄적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은 당연히 내가 처음이겠지. 재건은 내심 뿌듯해졌다. 그냥 일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당장 프로포즈 해볼까? 재건은 생각했다.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자, 몇 장면만 더 찍어봅시다. 건질 만한 사진이 나오긴 했는데 아직 뭔가 부족해요.”


사진사가 말하자 의뢰인이 먼저 일어났다. 캔은 옆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정수기 물로 입을 헹군다.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재건은 말했다.


“사진사 아저씬 더 찐한 장면을 바라는 것 같은데.”


“찌, 찐한 장면?”


“응. 이를테면 허리 꺾기 키스라든가.”


“키, 키스…….”


안 그래도 비상사태였던 그의 얼굴에 사이렌이 울렸다. 재건은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농담이야.”


이번에는 의뢰인도 온 힘을 들였다. 키스를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심하다 싶은 정도의 애정행위를 보여줬고 촬영은 금방 끝날 수 있었다.


재건은 사전 고르기, 인화 방법과 매수 등을 자세히 사진사에게 전달했다. 다다음날, 그들은 앨범과 작은 액자 등 누가 봐도 웨딩 사진이라고 할 만한 물건을 얻을 수 있었다.

 

 

“야. 안 들어?”


재건은 자장면을 다 비우고 드러누워 눈을 감은 조수에게 말했다.


“듣고 있어요.”


"지금은 듣더라도 1분쯤 뒤에는 잘 것 같은데?"


“일분까지 가겠어요?”


재건은 테이블 밑으로 발을 뻗어 마곤을 건드렸다. 마곤은 귀찮다는 듯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아니, 어디서 삼류 드라마를 찍고 있으니까 그러지. 여기까지 왔음 뻔한 거 아녜요?”


“야.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냐? 진부한 삶을 사느니 죽자는 게 내 모토잖냐. 그런 쉽사리 짐작 당할 만한 이야기를 내가 할 것 같아?”


“흥. 내가 뭐라고 예측했을 거라 예측한 건데요?”


“응? 그야…….”


재건은 역으로 질문받는 상황이 묘하게 어색하다고 느끼며 말했다.


“그렇게 가결혼을 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 범상치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이렇게 예상한 거 아냐.”


그러자 조수는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야말로 날 뭘로 보고. 내가 아저씨를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내가 그렇게 예측했을 것이라 예측했을 거라 예측했어요. 난 이미.”


“그럼 내가 그렇게 예측했을 거라 예측하면서 뭐라 예측했어?”


“그야…….”


마곤은 말했다.


“의뢰인에게 웨딩사진을 찍게 한 아저씨는 의뢰인을 가지고 놀기 쉽겠다는 걸 알고 이렇고 저런 음흉한 수치 플레이를 강요하다가 그걸 빌미로 의뢰인을 감금하고는 양지에선 보기 어려운 흉물스런 도구로…….”


“야, 야! 그건 너무하잖아!”


재건은 울상을 지었다.


“충격이야. 내가 제자한테 그런 평가밖에 받지 못하다니. 난 탐정 실격이야. 아니, 인간 실격이야. 그래. 지금부터 숨을 쉬지 않고 죽을게.”


재건은 무릎을 가슴에 모아 웅크려 앉고는 숨을 멈추었다.


마곤은 손목시계와 얼굴이 빨개져가는 재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재건은 1분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토해냈다.


“넌 탐정님이 죽어가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냐?”


마곤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됐으니까 이야기나 마저 해봐요. 어디 얼만큼 대단한 로맨스인지 보자.”


재건은 말했다.


“다 듣고 질질 짜지나 말아라.”


어쨌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됐다.

 

 

그들은 매일 만나서 부부 연습을 했다. 재건은 앞서 말한 대로 근처에 주차해둔 차에서 숙식하며 의뢰인을 만났다. 의뢰인은 미안한 마음에 집안에서 자게 할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재건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재건은 단 한 차례도 불평하거나 힘들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추파를 던지거나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재건은 의식한다 싶을 정도로 자기 일에만 충실이었다. 물론 의뢰인도 처음에는 걱정했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 신혼 행세라니! 길거리에서 손목을 붙잡는 삐끼에게도 얼굴을 붉히는 그였다. 완벽하게 남편을 가장하는 고용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뢰인은 재건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기야. 근데 이 쇠고기 볶음에 설마 양상추를 넣은 거야?”


의뢰인이 차려준 아침을 먹으며 재건은 말했다. 밖에서 자는 것만 빼면 재건의 생활은 평범한 남편과 똑같았다. 기상 시간에 맞춰 신문을 가지고 집안에 들어와 상이 차려질 때까지 신문을 읽고 아침을 먹은 뒤에는 씻고 의뢰인과 같이 출근한다. 퇴근시간도 서로 맞춰놓고 들어와서는 잠잘 때까지 함께 드라마를 보든 추억을 점검하든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재건은 차로 돌아간다.


“내가 말했잖아. 아니, 자기한텐 안 말했나? 양상추는 악마의 채소야. 이걸 넣으면 모든 음식이 싱거워져 버린다고.”


재건은 반찬투정 역시 충실했다.


“하지만 고기만 볶을 순 없잖아. 채소가 들어가야…….”


“그럼 양상추 말고 다른 풀을 넣으면 되잖아. 그냥 상추라든가 고사리라든가.”


“그런 걸 넣으면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 어떤 풀을 넣을 진 창의력을 발휘해봐.”


의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접시에 손을 가져갔다.


“알았어. 미안해…… 다음부턴 주의할게. 그럼 오늘 이 고기는 어쩌지? 다시 해야…….”


재건은 접시를 빼앗듯이 끌어당겼다.


“다시 하다니! 우리 여보가 만들어준 요리인데! 그냥 그랬으면 더 좋았으면 하는 거지, 아무리 악마의 식물을 썼다 해도 자기가 한 건 무조건 맛있다고!”


그러면서 재건은 숟가락 채로 고기를 퍼다 먹었다. 볼 가득히 밥이며 이것저것을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에 의뢰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전을 앞두고 최종 점검을 하던 재건은 간과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침대. 이 침대 그러고 보니 싱글이지?”


안방 침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응. 침대를 누구한테 받은 건데 부모님은 그냥 쓰셨어.”


“이럴 수가. 내가 왜 이걸 이제까지 못 봤지? 그러고 보니 난 이 방에 별로 안 들어왔었지. 이걸 빨리 처리해야 돼.”


“우리도 그냥 싱글 같이 쓴다고 하면 되지 않아?”


“신혼인데 싱글 침대 사는 사람이 어딨어. 게다가 물려받았다면 더 이상하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침대는 당장 사기도 어렵고 산다 해도 사후 처리가 곤란한 물건이었다. 당장 경비 문제도 있고 어떻게 어디다 옮길지도 문제였다.


하지만 재건은 잠시 뒤 간결한 해답을 내었다.


“이 침대를 그냥 버리자. 부모님도 이제 안 쓰시지?”


지방에 있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사다리차를 불러 침대를 내놓았다. 둘은 바닥에서 자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이제 빠진 거 없지?”


재건이 든 쪽지는 닳고 구겨져서 더는 종이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필요한 것이 그때그때 추가되고 도저히 일주일 내에 맞출 수 없는 것(이를테면 도배라든지)이 대충 그어지고 중요 대사라든가 시나리오라든가는 정신없이 이곳저곳에 적혀 있었다. 너저분한 기획서였다.


침대를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침대를 내놓는 날이 의뢰인의 친구가 귀국하는 날이었다. 친척집에서 사흘 머물고 의뢰인의 집에서 하루 묵는 것이 그의 계획이라 했으니 조금 아슬아슬했던 셈이었다. 어쨌든 방문 전에 모든 준비는 다 마쳐졌다. 그리고 랑데부가 성큼 다가왔다.


만남 장소는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친구는 먼저 도착해 자리 잡고 있었다. 직원이 자리를 안내하기도 전에 의뢰인을 알아본 남자가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수영아! 너 맞지?”


남자는 찢어질 듯이 웃으며 포옹하려는 듯 양팔을 좌우로 펼치며 다가왔다. 코가 날 서 있고 얼굴이 창백한 남자였다. 당겨진 양복 소매 안으로 금빛 커다란 롤렉스가 드러났다. 의뢰인은 어색하게 남자와 포옹하고는 한 발짝 물러났다.


“이야, 넌 훨씬 예뻐졌네. 그치만 바로 알아보겠는데?”


“으응, 너도.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놀랐어.”


“하하. 다들 그러더라고.”


의뢰인은 옆으로 비켜섰다.


“이쪽이 남편이야. 호진 씨. 어릴 적 친구인 위석진.”


재건은 손을 내밀었다.


“김호진입니다.”


재건은 가명을 쓰기로 미리 입을 맞춰놓았었다. 남자는 재건의 손을 맞잡고는 재건을 올려다보았다. 미소가 자연스레 배겨져 있는 얼굴이었다. 재건은 단번에 이 얼굴이 영업용 미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고 이 자는 그런 얼굴을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위석진입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네가 결혼할 줄은 몰랐어. 그것도 이렇게 일찍 말이야.”


남자는 말했다.


“응. 어쩌다보니까 말이야.”


“예전에 말하던 애인이 이분이야?”


“응.”


“우와, 그럼 연애도 오래 한 거잖아. 날 제외하면 거의 첫 번째 남자였겠는걸?”


“그런 셈이죠.”


재건이 끼어들었다.


“우린 고등학교에서 만났으니 그 기간까지 친다면 수영인 제가 독식한 셈이죠.”


의뢰인은 무심결에 재건을 돌아보았다. 재건은 3년 전 만남으로부터의 시나리오를 준비해 놓았다. 만남에서부터 사이가 가까워지기까지의 사건, 이벤트, 추억 하나하나까지 실로 연애소설 한 편은 될 법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지금까지 철두철미함을 보여 왔던 재건이 갑자기 새로운 거짓말을 꺼내 들자 의뢰인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반응을 점검하며 새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돌발 상황에 따른 대처 역시 재건에게 훈련받았던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거예요? 사귄 건 최근이고요?”


“네. 그런데 제가 전학 가는 바람에 한 번 떨어졌었어요. 사실 수영이가 그때 제 첫사랑이었거든요. 그런데 3년 전에 딱,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와, 그럼 제가 확실히 진 것 같은데요?”


남자는 과장되게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저도 운명적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이민으로 헤어진 어릴 적 친구와 성인이 되어 재회한다! 하는 것이었는데 3년이나 늦어버리다니.”


“하하. 미안해요.”


재건은 친밀감을 자랑하듯 의뢰인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었다.


대화는 순조로웠다. 재건이 준비한 시나리오는 놀랄 만큼 정교했다. 둘이 공유했어야 했던 추억이며 서로의 집안일, 사소한 습관까지도 이야기에 올랐고 익힌 대로, 혹은 그때그때 재치를 발휘해서 넘어갈 수 있었다.


음식이 나올 무렵부터는 의뢰인과 남자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의 추억담으로 떠드는 동안 재건은 적당히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지금까지 나온 말들에 모순점은 없는지 끊임없이 검토했다.


식사가 끝나고, 다들 각자의 이유로 충만해진 만족감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의 이동은 재건의 차로 했다. 차에서 의뢰인은 창문에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 레스토랑을 나설 때 얼굴이 붉어지고 비틀거린 사람은 의뢰인뿐이었다. 재건은 운전해야 했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고 남자는 술에 강한 듯했다.


“남편 분은 무슨 일 하신다고 했죠?”


차내가 적막해지자 남자는 물었다.


“보안 업체에서 일해요.”


재건은 백미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해요?”


“그냥, 전문화된 경비원이에요. 전 주로 현장에서 뛰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건의 사무소는 허가받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남편이 경비원이라니, 정말 든든하겠네요. 그쪽 업종은 연봉도 세죠?”


“그렇지도 않아요.”


이 부분에서 재건은 아슬아슬하다 생각했다. 업종은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런 쪽의 연봉까지는 조사해놓질 않았다. 만일 생각보다 고 연봉이라면, 또 남자가 정확히 알고 있다면 지금 수영이 사는 집을 보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남자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수영이와 그렇게 만났다면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걸 믿으시겠어요.


다시 슬쩍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레스토랑에서의 표정 그대로, 웃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재건이 보기에는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 재건은 의뢰인이 이런 자와 결혼을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글쎄요.”


반면, 핸들을 쥔 재건은 표정을 펼 수 없었다. 운전 중에 이것저것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을 재건은 싫어했다. 하지만 성실한 남편을 연기중인 그는 불평할 수 없었다.


“솔직히 셈이 좀 나던걸요.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 아녜요.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 첫사랑과 몇 년 후 우연히 재회한다. 아니, 영화로는 좀 진부할라나요? 어떻게 그런 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 하고 말이에요.”


‘이 자식,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재건은 눈에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고는 괜한 브레이크를 밟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순간, 이 자가 의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설마. 그냥 농담이겠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눈앞에 있는 부부의 관계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건은 자신이 너무 섬세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뒷좌석의 남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드디어 공들여 재설계한 집을 보여줄 차례였다. 아파트에 다다라서는 의뢰인도 정신을 차렸다. 많이 취한 것은 아니고 한숨 자고 나니 멀쩡해졌다고 했다.


“그래도 술은 오늘 그만 먹어. 자긴 벌써 오늘 용적 다 채웠어.”


현관문을 들어서며 재건은 말했다. 집에는 밤을 지새울 백주와 주전부리가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아냐, 괜찮아. 오늘 같은 날 마셔보지 언제 마셔보겠어. 여기가 우리가 사는 집이야.”


의뢰인은 재건과 남자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 좀 질게요.”


그들은 거실에 퍼질러 앉아 자정이 넘어가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나 재건이 준비한 앨범은 쓸모가 많았다. 합성사진으로 앨범을 만들고 사진 한 장 한 장에 에피소드를 부여하는 일은 이번 작업 중 가장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거짓말하는 보람도 컸다. 마치 진짜로 3년간의 추억이 생긴 것처럼, 재건과 의뢰인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두 시가 넘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부부 이야기는 부이고 주는 의뢰인과 남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적정선에서 재건은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건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의뢰인이 먼저 씻는 동안 두 남자는 거실에 남아 있었다.


“방은 저 방을 쓰시면 돼요. 제 개인 방이긴 하지만 침대도 있으니 자는 덴 괜찮을 거예요.”


“예. 저 방은 나중에 자식한테 물려줄 건가요?”


“글쎄요. 전세라서 아이 낳을 때쯤이면 어떻게 될지…….”


“아, 전세였군요.”


“요즘 세상에 신혼부부가 집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죠.”


“그렇죠.”


남자는 말없이 잠시 거실을 둘러보다 말했다.


“그런데 결혼사진은 저게 단가요? 보통 큰 액자로 사진 걸어놓지 않나요?”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하는 소리였다. 그곳에는 재건이 어디선가 빌려온 모네 모조품이 걸려 있었다.


“그 돈으로 차를 샀죠. 여기저기서 많이 아꼈어요.”


“그렇군요.”


재건은 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대답 역시 미리 준비했었지만, 어째서 굳이 이런 걸 물어본단 말인가. 재건은 남자가 의심하고 있다는 가설을 놓지 않기로 했다. 이를테면 의뢰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못 먹는 감이나 찔러보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던지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재건은 지켜보기로 했다.


의뢰인이 나오고 두 남자가 차례로 욕실을 쓰고 이내 스위치가 내려갔다. 재건은 남자가 쓰는 방의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로 들어갔다.


바야흐로, 재건과 의뢰인이 동침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여자와 한이불을 덮은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죠.”


마곤은 또 끼어들었다.


“어머니는 제외하고…… 가 아니잖아!”


재건은 외쳤다.


“아니,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되는 거야?”


“이미 인정했어. 이걸로 탐정님의 불가사의한 마력의 정체가 밝혀졌군요.”


재건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마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는 말했다.


“넌 정말 나한테 무슨 억하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억하감정이라뇨.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나, 이거 참.”


재건은 말했다.


“조수 군.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말야, 내 인생 일대 가장 진지한 얘기야. 나한테서 이런 얘기 들을 기회는 좀처럼 없을 거야.”


“에이, 탐정님은 언제나 진지하시잖아요.”


“정말이라니까!”


“됐고, 이야기나 마저 해봐요. 어디, 어디까지 가나 봐보자고요.”


“자꾸 그러면 나 울 거야.”


재건은 다시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새침한 척 얼굴을 홱 돌리고는 말했다.


“그럼 난 때릴 거예요.”


제자는 말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동침하는 순간으로 돌아갔다.

 

 

재건은 쓸데없이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한동안 거실을 서성거렸다. 남자의 방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완전히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재건은 안방으로 돌아갔다.


의뢰인은 이불에 무릎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은은한 스탠드 불빛이 머리맡에 고여 있었고 그는 그 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의뢰인은 소리 나지 않게 책을 덮었다.


“우리도 이제 잘까?”


재건은 말했다.


“으응…….”


의뢰인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난 좀 떨어져서 문 옆에서 잘게.”


재건은 나름 배려해서 말했다. 하지만 의뢰인으로서는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가 남자와 한방에서 자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애인을 가졌던 적은 있었지만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한 적은 없었다. 친구로부터 남자 기피증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남자를 대하는 데 익숙하질 못했다. 그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붙임성 좋은 성격이거나 아니면 노골적인 속내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자연스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남자 친구가 드물었다. 이번 친구의 방문 역시 마냥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 헤어진 뒤로 많은 세월이 지났고 지금의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그들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뢰인에게 이 친구는 반쯤은 낯선 사람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상담 사이트에 대뜸 글을 올린 건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재건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재건은 눕지 않았다. 문턱으로 가서는 문지방에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다리를 뻗었다. 의뢰인은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재건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난 여기서 잘게. 넌 먼저 자.”


의뢰인은 쥐고 있던 이불자락을 놓았다.


“앉아서? 불편하잖아…….”


“안 불편해. 여기가 내 자리야. 만일에 신속히 움직일 수 있어야지.”


“아니, 그래도…….”


의뢰인은 등을 누일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재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말할 듯 혀끝을 찰 뿐이었다.


재건은 말했다.


“말했지? 의뢰인을 보호하는 것까지 내 일이라고. 거기엔 신변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포함돼. 네가 안심하지 않으면 내 일은 안 끝난다고. 그러니까 편히 자 줬음 좋겠어. 영 신경 쓰이면 난 소파에 가서 잘게.”


“아니…….”


의뢰인은 몇 차례나 말을 꺼내려 시도했다. 재건은 그런 의뢰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둘이 입을 다문 빈자리 안으로 냉장고 엔진 소리가 스며들었다. 은은하게 깔리는 그 소리에 밀려난 듯, 의뢰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의뢰인은 가슴 졸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냥 편히 자 줘……. 여기서…….”


“그래. 바깥보단 그래도 안방 근처에서 자는 게 낫겠지?”


"아, 아니."


“응?”


의뢰인은 가슴 속에 푹 잠긴 말을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밀어내었다.


“여기서, 이불 속에서 편히 자 줘…….”


“어엉?”


재건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내 옆에서, 같이 자줘. 왜냐하면, 왜냐하면…… 부, 부부니까…….”


그의 고개는 점점 떨어지더니 마침내는 이불 속에 파묻힐 것 같았다. 재건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가를 있는 대로 들어 올렸다.


“그럴까? 정말 그래도 돼?”


의뢰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럴게.”


재건은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의뢰인은 천천히 뒤로 기울어져 쓰러졌다. 이불은 그의 얼굴을 덮었다. 재건이 이불을 들추자 안에 갇혀 있던 여자의 온기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눈을 꼭 감은 의뢰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재건은 자리를 잡고 다리를 뻗었다.


“믿어줘서 고마워.”


한 이불을 쓴다는 것은 재건으로서도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 자제력을 잃었던 건지도 모른다. 욕망은 느닷없이 생겨났고 심장의 박동소리는 함성처럼 울렸다.


의뢰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그가 처음 상담 글을 올렸을 때부터 재건은 참고 있었다. 원칙을 깨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내도록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참아왔고 바로 여기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생각을 거듭했다. 차후의 영향, 그 손실, 그 뒷감당, 하지만 감정이 모든 계산을 짓누르고 있었다. 무엇이 마땅한 선택인지, 그때의 그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재건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의뢰인이 벌써 잠들지 않았기를 기도하면서.


“자기야.”


의뢰인은 아직 깨어 있었다.


“응.”


하지만 반쯤 잠긴 목소리였다. 재건은 아예 깨어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 이 의뢰랑은 상관없는 거야.”


“말해 봐.”


재건은 침을 삼켰다.


“넌 말야, 난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었어.”


“무얼?”


“넌 너무 닮았어.”


“누구랑……?”


“내 첫사랑이랑.”


“…….”


“그래서 그러는데 널 이렇게 불러도 될까?”


“…….”


“‘영’이라고. 그 첫사랑의 애칭이었거든.”


“……”


재건은 입을 다물고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의뢰인은 말했다.


“나도 그렇게 불렸던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몰라.”


“정확힌 기억 안 나. 그냥 막연하게, 그냥 아주 희미한 느낌만…… 왜 그러지?”


의뢰인은 떠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아마 친한 사람이었을 텐데, 그는 생각했다.


“모르겠다. 그렇게 불러도 돼. 애칭이 있는 것도…… 보이기에 나쁘진 않을 거야.”


그는 말했다.


“그래. 고마워.”


재건은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영아.”


하지만 듣기에 자연스러운 애칭은 아니었다.


“으, 으응. 잘 자.”


“응. 영도. 잘 자.”


둘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재건은 날이 밝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하, 그래서 첫사랑 이야기로 시작했던 거군요.”


마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마곤은 어느새 일어나 앉아 재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재건은 조수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이야기를 장황히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 그건 치밀하고 정교한 복선이었다고……”


“라고 말할 줄 알았냐!”


하지만 마곤은 곧바로 표정이 사납게 돌변한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그건 그 사람한테 실례되는 소리잖아! 아니, 그전에 복선은 무슨, 역시 오프닝은 완전히 쓸데없는 얘기였잖아!”


“그럼 얘기를 마저 들어봐. 아직 얘기 안 끝났…… 뭐야, 어디 가게?”


마곤은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옷걸이로 가서는 재킷을 걸쳤다. 그리고는 재건을 잠시 흘겨보았다.


“얘기 마저 들어야지.”


마곤은 현관으로 가 신을 신으며 말했다.


“더 들을 것도 없겠구만. 피시방이나 갔다 올게요.”


“알았어. 그렇게 불만이면 첫사랑 닮았단 얘긴 뺄게. 응? 빼고 들어.”


“역시 지어낸 얘기였구만.”


“아, 아냐. 얘길 마저 들으면 알 거야. 좀 기다려봐.”


“아저씬 그 불량한 책이나 마저 보세요. 난 건전하게 레벨이나 올리고 올게요.”


재건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건전한 거였냐…….”


마곤은 결국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사무실 안으로 오후의 햇살이 한가로이 내려앉았다. 재건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햇빛이 얼굴에 드리워져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 괜히 건드려서 쓸데없이. 재건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한 것이 영 아쉬웠다. 하지만 뭐 어떠냐. 이렇게 오랜만에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았다.


재건은 추억 같은 것은 일부러 묻어두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날이 일상으로 불쑥불쑥 침범해와 살아갈 수 없었다. 이런 계기가 아니라면, 아마 이 기억은 계속 거기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잠시 기억을 뒤적거리던 재건은 창밖으로 스쳐가는 트럭의 확성기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불평불만 많은 제자 때문에 잠시 덮어두었던 소설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전 시리즈를 이미 한 번 보고 나서 다시 읽어보는 책이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족했다.

 

 

다음날, 남자는 의뢰인의 집에서 나갔다. 재건도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재건은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하며 상황을 점검했다. 부부 연기는 더는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말투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둘이 동갑이기도 했고 어느새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기대되리라 기대한 대로 둘이 진짜 연인 관계로 발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재건은 혹여나 의뢰인이 오해하지나 않을까 선을 분명히 했다. 의뢰인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는 것은 금물이라고, 나는 여기서 감정을 착각하거나 할 생각이 없다고.


어느덧, 남자가 출국하는 날이 다가왔다. 배웅을 의뢰인이 해주기로 해서에 그들은 한 번 더 만나야 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탐승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남자는 출국장 안에 미리 들어가 있기로 했다. 탑승객이 아니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남자는 입구에서 재건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의뢰인과 멀찍이 떨어져서, 남자는 나직이 말했다.


“마지막이니까 묻는 건데요, 둘이 정말 결혼한 거 맞아요?”


재건은 뭔가 중대한 실수를 한 건 아닌지 생각했다. 뭔가 확정적으로 의심할만한 건수가 있으니 이렇게 무례한 질문을 해오는 것일 테니.


“왜 그런 걸 묻는데요?”


창백한 남자의 얼굴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싸이를 닫아놨더라고요.”


재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건은 인정했다. 이 작전은 완벽한 실패였다.


“설마 했었는데, 싸이에 훨씬 이전부터 들어왔었죠?”


“네. 수영이 친구 중 몇 명이랑 개인적으로 연락이 돼요. 한참 전에 연락 터놓은 게 지금 와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 친구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수영인 결혼은커녕 애인도 없다는데요. 정말 대단하던데요? 그렇게 철두철미한 뻥을 치다니. 그쪽이 다 생각한 거죠?”


“네.”


재건은 짧게 말했다. 재건은 싸이월드라는 실명 블로그가 문제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능성 차원의 문제였기에 이름이 자주 보이는 친구의 아이디를 적어두고 사이트에서 탈퇴하는 정도로 조치했었다. 남자가 의뢰하기 훨씬 이전부터, 게다가 의뢰인의 친구와도 친분을 쌓았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도중에 스포일 할까 살짝 고민했는데요, 그냥 수영이한텐 속아 넘어간 척할게요. 쟨 놀리는 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애니까요.”


남자는 말했다.


“그러세요. 그런데 너무 자주 오진 마세요. 매번 이렇게 해야 한다면 아마 머리가 다 빠져버릴 거예요.”


“하하핫, 그런데, 와, 정말 말을 잘 짰더라고요. 이건 거짓말이겠거니, 하며 듣더라도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어요. 집도 그렇고 둘 사이도 그렇고요. 둘이 친구죠? 어디까지가 진실인 거예요?”


“고등학교 때 만났다는 건 사실이에요.”


“첫눈에 반하고 전학 간 것도요?”


“글쎄요. 하하…….”


의뢰인이 멀리서 눈치를 보내자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기껏 준비한 게 헛수고가 돼서 좀 아깝겠어요.”


남자는 말했다.


“헛수고는 아니에요.”


“제가 비밀 지켜준다고 해서요?”


“아뇨. 수영일 지킬 수 있어서요.”


“수영일요? 누구 한테서요?”


재건은 보여주듯이 가느다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쪽 한테서요.”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찔리나 보군요. 아님, 아쉬워서 그런 건가요?”


재건은 살짝 고민했다. 이 자를 들쑤실지, 고이 보내줄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패배감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고 있었으니까.


“무슨…….”


“그쪽은 수영일 잘 알겠죠. 어릴 적 친구였으니까요. 심약하고, 마냥 착하고, 소심하고, 순진하고. 귀국을 결정하고 그걸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을 겁니다. 물밑 작업으로 어릴 적 약속을 꺼내든 거죠. 심리적으로 속박하고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려고요. 그쪽처럼 잘생기고 사교성 좋은 사람이 확실하지도 않은 순정 찾아서 한국에 올 리는 없겠지요?”


“이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돼요. 나도 물증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같이 잘 때 짐을 살짝 살펴봤는데 재밌는 게 나왔어요.”


재건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보였다.


“그, 그건…….”


“네. 콘돔이죠. 상자 채로 있길래 하나 슬쩍 했어요. 모처럼 찾은 고향인데 이런 걸 왜 갖고 다니는 걸까요? 처음엔 그냥 섹스 투어나 다니는 바람둥이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수영이의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았다고 하니 수영이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맘이 없었다곤 생각할 수 없겠는데요.”


“이봐요. 그건,”


“네, 네. 알아요. 미국에서 갖고 다니던 게 어쩌다 딸려온 것일 수도 있죠. 허나 분명한 건 당신은 언제든 바지를 벗을 수 있는 준비된 사람이란 것과 수영이의 순진함을 가지고 장난쳤다는 거죠. 또 할 말 있나요?”


남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끝났네.”


재건은 말했다.


“응.”


의뢰인은 말했다.


“수고했어. 이제 우리도 헤어지는 거네. 뒷정리가 좀 남았지만.”


“으응…….”


재건은 의뢰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키는 재건의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둘은 서로 바라보았다.


재건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의뢰인은 살짝 손을 맞잡았다. 재건은 손도 컸다. 의뢰인의 손을 거의 감쌀 정도였다. 재건은 아무 말 없이 수영의 손을 붙잡고 그 눈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 무언의 언어에, 수영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수영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재건의 시나리오 수정본, 고등학교에서 만났다가 헤어졌다는 대목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었다. 재건은 수영이 의뢰를 해온 그 순간부터 스스로와 끊임없이 투쟁해야 했다. 재건은 수영을 만나는 매 순간순간 진실을 외치고자 하는 충동과 맞부닥쳤다. 갑자기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거짓 속에 진실 묻어두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재건이라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수영은 재건의 첫사랑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등교일에 처음 만났고 같은 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만남이야말로 운명적 만남이라고 재건은 일생에 걸쳐 주장해 왔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것은 흔하디 흔한 우연일 뿐이었다. 재건은 인연이란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기적을 간절히 바랐다. 재건은 수영에게 자신의 소망을 투영했다. 그리고 수영을 여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 수영은 재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왔다. 재건의 소원은 수영 같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었다. 순전히 가정 속에서라면 그 논리는 옳았다.


재건이 자신의 특이한 체질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재건은 다소 목소리가 크긴 해도 상식을 체득한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당연히 상상과 현실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재건은 그저 그것을 빌미로 수영을 쫓아다닐 뿐이었다. 수영은 자석처럼 자신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재건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싫은 소리는 하지 못했다. 둘은 언제나 점심을 함께 먹었고 함께 하교를 했다. 물론 재건이 멋대로 따라붙었을 뿐이었다. 둘이 부부 아니냐고 놀림 받을라치면 재건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고 수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재건은 느낄 수 있었다. 픽션이 현실로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재건은 처음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놀이에 불과했던 수영에 대한 가설이 들어맞는다는 증거가 하나 둘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자신의 능력 내에서, 수영은 그에게 소망한 모든 것을 이루어주었다. 아주 우연히 망상과 이상 현상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재건은 곧 흥미를 느끼고 수영의 증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재건은 여러 차례 실험했다. 수영은 재건의 소원은 무조건 이뤄주었다. 새벽 5시에 등교하기를 소망하면 수영은 그렇게 했다. 밤새워 시험공부를 하기를 소망한다면 수영은 그렇게 했다. 춤을 추라면 춤을 췄고 노래를 하라면 노래를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소원은 확률적이었다. 재건은 그 차이를 골몰하다가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재건이 관계할 때, 수영은 타인의 소원도 들어주었다. 하지만 재건이 없을 때에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재건은 수영에 관한 법칙을 정리했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심리가 수행에 미치는 영향, 가능함의 판단 시기, 소원의 지속시간. 그리고 소원을 없애는 소원도 가능한지 실험해 보았다. ‘다시는 누구의 소원도 들어주지 마라’는 소원을 수영의 면전에 대고 말해 보았다. 하지만 수영의 소원 들어주기는 수영의 능력 내에서만 가능했다. 수영에게는 증상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 규칙은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점차 재건이 수영 근처에 있지 않아도 수영의 증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점차 잦아졌던 것이다. 결국 재건은 법칙을 수정했다. 자신은 오로지 이상 증상의 발현 가능성에만 영향을 줄 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이것도 재건의 증상일 뿐이었다. 타인의 잠재적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은 재건으로서는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수영에게 지속적으로 증상이 발생한다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수영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누구의 부탁도 거절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수영은 중요한 순간마다 누군가의 소원으로 말미암아 일을 그르칠 것이었다. 또 어쩌면 몹쓸 짓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도 모른다. 재건은 수영의 증상이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일을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면, 재건은 수영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상대를 멀쩡히 눈앞에 두고 외면하는 일을 재건은 할 수 없었다. 서서히 관계를 끊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수영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마는 것이었다. 결국 재건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증상을 잠재우고자 재건은 무딘 애를 다 써보았다. 하지만 방법은 결국 그것뿐이었다.


2학년으로 진급하여 학급이 나뉘는 날, 재건은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했다.


“오늘 이후로 나에 대한 모든 일을 선별적으로 잊어줘. 적당한 기억을 붙여서. 다른 친구들한테는 내가 말해 놓을게. 그리고 두 번 다시 내게 접근하지 말고 날 쳐다보지도 마.”


있는 대로 폼을 잡으며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수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던 재건이 난데없이 작별을 고했다. 수영은 울먹이면서 왜냐고 물었다. 재건은 이유를 말해줄 수 없었다.


“널 좋아하니까. 그래서야. 그것만은 알아줘.”


그리고 재건은 말했다. 수영을 돌아보며, 평소에 그답지 않게 몇 번이고 말을 곱씹고 되뇌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모든 마음을 담아 말했다.


“만일, 먼 훗날 언젠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나를 보게 된다면, 딱 한 번만 날 만나줘. 그때에도 날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 남남으로라도 상관없으니까 말을 걸어주고 인사하고 아주 잠시만 즐겁게 지내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소원이야.”


마치 소원을 주입시키려는 듯이, 수영과 마주 보고 어깨를 양손으로 굳세게 움켜쥐고는,


“행복해줘. 영원히.”


재회의 날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