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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을 비판할 때, 혹은 여론에 편승해 비판하는 시늉을 낼 때 가장 먼저 타겟이 되는 것은 설정이다. 그것이 현실 논리에 비추어 작중 타당성을 판단하기 가장 쉬운 대상이기도 하고 또 가장 파악하기 쉬운 작중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사실 '그럴 수 있으면 통과' 수준으로 조악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ㅋㅋㅋㅋ'라고 직관적으로 우긴다면야 저자로서도 딱히 할말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반응에 대응하려면 어린왕자의 양 상자 전략을 쓰든가 아니면 작정하고 전문적인 사항을 적확하게 늘어놓아 독자의 기를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다. 본 작품은 그런 재치가 부족했다. 대뜸 대한왕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하고 우긴다면야 독자로서도 반발할 여지가 없지만 2차대전에서 승리했다느니 태제가 어떻느니하며 어설프게 구체화하는 바람에 설득력을 얻는데 실패했다. 사실 눈높이를 낮춰서 그런지 난 그러려니 하고 봤지만.

 

대한왕국, 홍현종합학교, 학생자치로 인한 학생내 대립이라는 설정은 얼핏 보기에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만화적(라노벨적) 유연성 하에 허용되는 범위 안이다. 이미 궁이나 금서목록, 천상천하 등에서 쓰인 설정 아닌가. 문제는 위 설정을 모방하여 장르적 용인을 얻으려면 그러한 장르의 뉘앙스를 충분히 구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그것을 담당하는 것은 문장이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만화적 정취를 풍기도록 하거나 위트를 종종 삽입하여 분위기를 환기함으로써 본 작품은 원래 이런 스타일 작품이오, 하고 독자에게 일깨워줘야 한다. 바로 거기서 작가의 능력이 나오고 글의 맛이 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본 작품의 서술은 우직한 설명조이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해도 작가의 판단과 추측의 빈도수 조절로 컨트롤할 수 있다. 동작을 나타내는 어휘를 간결하게 함으로써도 생동감을 얻을 수 있다. 서술은 그런 점에서 다소 설명적이고 작가 개입적이다. 인물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도 작가의 명령 하에 움직이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정색하고 만화같은 뻥을 친다. 그것이 반어적인 묘사라면 또 모르지만 여기서는 그저 어설픈 농담으로만 보일 뿐이다. 차라리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 따위로 막나가는 문체가 더 어울릴 듯하다. 종종 시드노벨 작품을 일컬어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러한 감상이 나오는 연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야기만을 놓고 본다면 별다른 특색이 없었다 하겠다. 헌신적인 소년, 상처가 있고 왠지 그것 때문인 듯하지만 사실상 별다른 개연성 없이 이상 성격을 보이는 소녀. 별별 에피소드. 그 사이에 끼어든 서브히로인들. 그리고 그런 전형적인 비웃음을 꼭 날려야 했을지 의문인 대적자와 그로 인한 마지막 대립과 그 과정에 도출되는 이야기의 주제인 소년과 소녀의 기묘한 유대감. 이런 전형적인 구도를 꽤나 좋아하긴 하다만 영 감흥이 없다. 문장이 재미없다는 점이 하나고, 중심 갈등 구도를 잘 잡지 못했다는 것이 하나다. 내가 문장을 곱지 않게 보면 나머지를 좋게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문장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만 그 얘긴 윗 문단에서 했으니 통과. 서술력과 연출력이 아무리 보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야기 자체가 흥미있으면 재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본 작품은 전형성을 철저히 따르고 있고 이야기는 그 전형성에 파묻혀버린 형국이다. 공식에 맞춰서 글과 캐릭터를 집어넣었다고 해도 될만큼 이야기에 아무런 특징이 없다. 더군다나 돌출된 캐릭터와 관계로 인한 해프닝도 약식 하렘 구도에서의 불꽃 튀김도 중심 결핍에 대한 해소도 어느 하나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

 

캐릭터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자. 세군에게서는 역할 이상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에게서 고립된 인물이기 때문일까. 살아있는 고등학생이라는 느낌이 영 들지 않는다. 세군의 인간관계는 오로지 히로인에게 한정되어 있다. 마치 실험에서 독립변인 이외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것 같은 오로지 러브코미디라는 것을 그리기 위한 캐릭터 같다. 오타쿠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폐쇄적 자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물에게 사람이라 믿어질만한 특징이 없다는 뜻이다. 아, 물론 우직한 바보에 강철체력에 악운을 몰고다니고 한쪽눈을 머리로 가린, 이런저런 특징이 있긴 한데... 이것만 가진 사람이 어딨니? 세군과 관련된 모든 묘사는 이러한 상想 이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구질구질하게 사연을 읊으라는 뜻이 아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사실 이것도 문장의 문제이다. 사소한 버릇이라든가 말투라든가 캐릭터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한 에피소드라든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작중 배경은 학생사회라는 폐쇄된 곳이고 이 이중의 벽은 한층 세계관을 갑갑하게 만든다. 위예시는 비중에 비해 존재감이 없다는 느낌이다. 그냥 인물 관계중에 포스트잇으로 덧붙인것 같다. 공주는...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딱 이 정도.

 

결론은 시벨이 그러면 그렇지...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 장르문학 작가의 글솜씨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문화든간에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범이 되고 후대의 자양분이 될 선진 문화가 있어야 하고 그 씬을 뒷받침 해줄 지지층, 소비시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장르문학계는 그 둘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거울에서 본 문장인데, '시체로 강을 메워라.' 아직은 열심히 다이빙을 할 시기이다. 그런데 걱정이다. 이 강이라는 것이 그대로 고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체 하나 던져봤자 흘러가버리면 메우고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난 그래서 백마 탄 초인을 기다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갑자기 시장을 환기시킬 몹시 뛰어난 인재다. 그런 사람이 없으니 지금 시벨이고 노블코어고 그 모양이겠지만. 하지만 그래도 난 그런 사람이 나타날 것을 믿고 이따금 시드노벨 신간 목록을 점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