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마당 - 장르 리뷰
쌍화점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여성들은 이를 남자끼리의 동성애(BL)영화라 보고, 어떤 이들은 사극영화라 보며, 또 다른 이들은 忠과 愛의 질투가 빚어낸 비극을 다룬 영화라 본다. 그러나 영화관을 찾은 관객의 과반수는 이 영화를 야한 영화로써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관객들 대부분이 만족을 하며 영화관을 떠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쌍화점은 남녀 간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다룬 성인영화이다. 따라서 본 감상평 역시 남녀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다루겠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서 이젠 상투적인 표현이 있다. ‘널 목숨보다 사랑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저 표현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남녀가 사랑한다고 누가 죽이진 않지 않은가. 하지만 영화 ‘쌍화점’은 시작하자마자 이를 확인해주고 싶은가보다. 영화가 시작된 지 채 4 분도 지나지 않아, 궁녀와 무사가 목숨을 건 도피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이미 목숨을 걸었다.
영화 속에는 왕과 홍림 그리고 중전은 삼각관계를 맺는다. 우선 왕과 홍림의 사랑이 있다. 그리고 홍림과 중전의 사랑이 있다. 왕과 홍림의 사랑은 남자끼리의 사랑이다. 그러나 나이차, 무력차, 권력차, 신분차로 인해 홍림이 좀 더 여성적인 위치에 서있다. 또한 홍림은 어린 아이 때부터 왕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왕과의 사랑에 특별한 자각이 없고 忠이라는 매개물을 거친다. 반면에 왕은 홍림을 자신의 정인으로써 깊이 있게 사랑한다. 왕과 홍림 사이에도 배드신은 있지만 왕이 불구이고 홍림은 진짜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욕정)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다.
홍림과 중전의 사랑에는 왕과 홍림의 사랑이 먼저 관계한다. 왕이 굳이 홍림과 중전을 합방시킨 이유는 홍림과 자신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왕은 자신의 중전과, 자신이 사랑하는 홍림을 결합시켜 홍림과 자신 사이에 사랑의 결실을 대신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왕의 바람과 달리 홍림과 중전은 그들의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아무튼 왕의 명령으로 인해 홍림과 중전은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인 사랑을 먼저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곧 욕정을 넘어서 연모(정신적인 사랑)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림과 중전은 첫 번째 합방을 시도하지만 중전이 거부함에 따라 실패한다. 두 번째 합방에서는 이와 달리 중전이 스스로 옷을 벗음으로써 육체적인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시작된 육체적인 사랑은 둘 사이에 연모의 감정마저 생기게 한다. 이때부터 영화의 중후반부까지는 이들의 사랑에는 욕정과 연모가 함께 간다. 이는 중전에게도, 홍천에게도 진정으로 깊이 있는 사랑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자 이들의 사랑에 큰 난관이 봉착한다. 홍림과 중전이 왕에게 자신들의 사랑은 연모라고 말하자 왕은 홍림을 거세한다. 이 때 대사가 참 재밌는데 중전과 홍림 모두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친다. 이 장면을 보면 목숨보다 소중하던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덜 소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섹스로서 사랑을 시작했고 사랑에 있어서 끊임없는 섹스로 서로의 사랑을 키워온 그들에게 섹스의 부재는 사랑의 부재와 마찬가지였다.
왕도 이를 알고 있다. 홍림과 중전 사이의 사랑에는 강력한 육체적인 사랑이 기반이 되지만 자신과 홍림의 사랑에서 섹스의 의미는 미미하다. 그래서 홍림을 거세시켜도 자신과 홍림의 사랑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홍림과 중전 사이의 사랑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홍림을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고 거세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중전에 의해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아 탈출한 홍림은 자신의 곁에 중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에 그는 중전에게 가기 위해 말을 탄다. 이 때 동료들이 홍림에게 다가와 홍림을 말리지만 그들의 만류는 홍림의 귓바퀴를 스쳐갈 뿐이다. 그러나 한백(첫 액션신에서 궁녀와 도망치려고 했던 무사)의 발언은 홍림의 발걸음을 막는다. 다른 무사들과 달리 남녀 간의 사랑을 경험한 한백은 이렇게 말한다. “헌데, 마마를 뫼시고 나서 어쩌시게요? 평생 바라만 보시겠습니까? 마마가 퍽이나 행복하시겠습니다.” 홍림은 거세를 당하였기에 중전과 육체적인 사랑을 이룰 수 없고(마마를 뫼시고 나서 어쩌시게요?) 이는 더 나아가 중전과의 사랑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마마가 퍽이나 행복하시겠습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홍림은 육체적인 사랑 없는 정신적인 사랑을 선택한다. 말을 박차며 성에 도착한 그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베어진 중전의 목을 본 것이다. 이는 왕을 향항 홍림의 사랑을 증오로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이 전까지만 해도 홍림은 왕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변함없이 왕을 사랑했다. 그러나 단지 섹스가 없는 정신적인 사랑이라서 섹스가 있는 중전과의 사랑에 밀렸을 뿐이다. 그러나 중전이 죽었다는 사건을 통해 홍림은 왕과의 정신적인 사랑마저 증오로 전환시킨다.
홍림이 도착하기 직전, 왕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그 그림 속의 홍림은 홍림이 원하는 대로 활을 들었다. 홍림이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왕의 여자라는(활을 들지 않고 왕을 쫓아가는 홍림의 그림) 위치에서 벗어 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은 이를 수용하여 홍림 역시 활을 든 주체 혹은 남성으로써 묘사하였다.
영화는 바야흐로 홍림과 왕의 마지막 싸움으로 흘러간다. 홍림은 마지막 절을 올림으로써 그동안 왕을 사랑하는데 매개물 역할을 했던 忠을 버린다. 그리고 칼을 빼드는 홍림에게 왕은 이렇게 말한다. “미훅한 놈.” 이는 자신을 찌르려고 하는 홍림의 배신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진정으로 목숨을 초월한 사랑을 가지지 못한 홍림의 부족함을 탓하는 말이다. 홍림은 (중전의) 죽음을 초월해 중전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사랑을 왕에 대한 복수심으로 바꿀 뿐이었다. 그러나 왕의 사랑은 다르다. 싸움 끝에 왕은 홍림의 가슴 깊숙이 칼을 찔러 그를 죽인다. 그러나 곧 죽게 될,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홍림을 왕은 여전히 사랑한다. 그래서 홍림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애정을 품은 적이 있느냐? 너는 정녕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정인이라 생각한 적 있느냐?” 이에 홍림은 이렇게 대답한다.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전의를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심지어 목숨마저 포기한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홍림의 칼에 찔려 죽으며 눈물을 흘린다. 왕에게 있어 홍림에 대한 사랑은 섹스도 목숨도 초월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거세를 했을 때도, 홍림이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칼에 찔렸을 때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홍림이 자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할 때, 왕은 사랑을 잃는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을 잃었으니 목숨도 당연히 잃는다. 육체와 정신을 초월한 왕의 사랑은 그 사랑이 상호간의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욕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이는 진실이 아니긴 하지만) 이별의 눈물을 흘린다.
섹스를 의미하는 단어들은 무수히 많다. 동침, 성교, 합궁, 정사, 밤일, 관계, 성행위, 등 등 비속어를 제외하더라도 끝이 없다. 그러나 섹스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육체적인 섹스(욕정)와 정신적인 사랑(연모)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 홍림이 중전과 사랑하는 것처럼 욕정이 연모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연모해서 섹스를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사랑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는 정신적인 사랑에 조금 더 의의를 둔다. 욕정은 거세라는 현실적 장애를 넘지 못 하지만 연모는 목숨마저 넘나든다. 정신적인 사랑이 가로막힐 때는 오직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부인했을 때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