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과 조지
예니체리


서양에도 우리나라같은 ‘양판소’가 있을까?

고든 딕슨의 <드래곤과 조지>가 이 질문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드래곤의 조지>는 평범한 주인공 짐이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이세계로 차원이동하여, 드래곤의 몸을 가지게 된다는 차원이동+드래곤환생물이다. 이 작춤이 나온 후 미국에서는 개념을 덜 차린 소위 ‘양판소’같은 차원이동물이 속출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은 아류작들이 단순한 ‘양판소’라고 해서 <드래곤과 조지>가 오늘날 한국의 ‘차원이동물’들과 같은 레벨의 ‘이계고딩깽판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의 이름은 조지가 아닌 짐이다. ‘조지’라고 하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인간을 일컫는 보통명사다. 우리나라 전승에서의 도깨비들이 자신들이 처음 만난 인간의 이름이 김서방이었기에 인간전체를 ‘김서방’이라고 부르듯이, 이 소설의 드래곤들도 인간들을 그들이 처음 만났던 인간,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름 ‘조지’라고 부른다. 이렇듯 이 소설은 유머로 가득 차 있다.

짐의 여자친구가 이상한 친구의 실험에 휘말려 이세계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여자친구를 구해오기 위해 짐도 이세계로 뒤딸아 간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드래곤 고밧슈의 몸을 가지게 된다.

드래곤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짐이 먼치킨스러운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판타지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드래곤의 위상은 그저 ‘사악한 거대도마뱀’에 불과하다. 드래곤들은 오히려 갑옷으로 무장한 ‘조지’들을 두려워 한다. 짐역시 생각보다 약한 드래곤의 힘을 믿었다가 손해를 본다.

고밧슈의 친구인 말하는 늑대, 위장이 약한 마법사, 고지식한 기독교도 기사, 겁쟁이 호수드래곤, 주인공이 대귀족일 것이라는 망상을 가진 여자 궁사등의 기묘한 인물들이 주인공과 동료가 되어 짐의 여자친구와 그의 인간의 몸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고밧슈의 할아버지나 친구인 늑대는 짐을 고밧슈라고 생각하고, 반면 마법사나 기사, 여궁수는 짐이 드래곤의 몸에 깃든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짐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신이 살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에 가서 자신의 원래 몸과는 다른 몸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계에 가서 아무런 시행착오도 거치지 않고 적응해버리는 ‘양판소’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짐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오소리에게 길을 물어보려고 말을 걸어본다던지, 무모하게도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에게 덤빈다던지 하는 실수들은 짐이 살던 현실세계와 이세계의 차이, 짐이 생각하던 환상속의 이세계와 실제의 이세계의 차이, 짐의 몸과 고밧슈의 몸이 느끼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런 실수들이야말로 소설을 읽다가 미소짓게 만드는 유머의 묘미다. 현실과 환상사이의 구멍을 메워주는 존재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다.

다만 이 소설은 ‘양판소’에게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유치하고 싱거워 보일 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의 드래곤은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다. 주인공의 능력도 평범한 ‘거대도마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른 주인공들역시 나름대로 강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로맨스적인 전설에 나올 만큼 강하다. 아마 요즘 한국의 판타지소설이었다면 레벨3의 몬스터나 주인공에게 시비붙는 용병정도로 나올 법한 인물들이다. 쉽게 말해서 약하다. 그렇지만 약한 주인공들, 결점있는 주인공들이기에 오히려 몰입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맛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덧붙여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소위 말하는 ‘개념작’이지는 않다. <실마릴리온>, <반지의 제왕>, <어스시의 마법사>, <앰버연대기>, <얼음과 불의 노래>와 같은 소위 ‘개념작’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한다면 실망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판타지소설을 주제와 재미라는 요소로 양분한다면, 이 소설은 재미라는 요소를 추구한다. 소위 읽고 나서 남는 것이 없는 류의 소설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드래곤과 조지를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