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6
4.
옛 집을 나온 마로는 아이지와 함께 물조합 건물로 향하였다. 악취와 쥐가 가득한 배꼽거리에서는 마로의 새로운 능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오히려 눈으로 길을 찾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을 가는 도중 강도들을 만나기도 했다. 거리가 폐쇄되며 음식과 생필품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죽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예사가 되었다. 원래부터 강도와 도둑이 적지 않았던 거리이긴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언제라도 강도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이지의 기이한 독과 괴기스러운 마법 앞에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어느덧 마로는 물조합 건물 1층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조합의 건달들이 모여 노름을 하고, 잡담을 하느라 시끌벅적 했을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들어서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쥐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로는 감지력을 발동시켜 보았다. 사방에서 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집중이 쉽지 않았던 데다가 도미의 방이 있던 3층까지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단 지금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사람이 없는 것은 확실하였다. 쓰레기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지 역시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적사병이 시작되면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이런 곳에 모여 있을 리는 없겠지.”
마로는 아무런 대꾸 없이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기자 마로는 우뚝 멈추어 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3층에 사람이 한 명 있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로의 뒤를 따르던 아이지는 그제야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얼른 가보자.”
앞으로 일어날 재미있는 일이 기대되어 못 견디겠다는 듯 아이지는 마로의 팔을 끌고 3층으로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3층에 도착하자 마자 아이지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지?”
“제일 끝에 있는 방이야.”
조합의 건물 구조에 환한 마로는 그곳이 도미의 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면서 마로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가슴이 두근거려서 좀처럼 차분하게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방 앞에 도착한 아이지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방 한구석에서 화살 하나가 매섭게 날아들더니 아이지의 가슴에 들어박혔다.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의 힘은 워낙 강력해서 아이지의 몸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이지의 뒤를 따르던 마로는 깜짝 놀라 아이지의 몸을 받쳐 들며 말했다.
“이봐, 괜찮아?”
하지만 마로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이내 깨닫고 아이지의 몸을 더듬어 화살을 힘껏 잡아 뺐다. 아이지가 상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바닥에 눕힌 마로는 화살이 날아왔을 곳, 사람이 웅크리고 있을 방 한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곳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로 온지!”
마로는 대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그래. 씨그. 나야.”
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 어떻게 네가 살아서 여기까지 왔지?”
마로는 씨그의 말에서 그 역시 내막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질문을 할 사람은 나일 텐데? 도미는 어디 있지?”
“삼촌?”
갑자기 씨그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삼촌이 어디 있냐고?”
정신없이 웃던 씨그는 갑자기 쿨럭거리며 코와 입에서 피를 내쏟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담요에 새빨간 핏물이 적셔졌다. 씨그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은 마로가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적사병에 걸렸구나.”
씨그는 코와 입에 묻은 핏물을 훔치며 킬킬거렸다.
“그래. 난 적사병에 걸렸어. 적사병에 걸린 사람은 3일을 버티지 못한다고 하니, 어차피 난 내일을 넘기지 못할 거야. 너에게도 전염될까봐 두렵나? 하하, 좋아 마로.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진실을 들을 테냐, 아니면 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나갈 테냐?”
하지만 마로로서는 적사병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마로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말해봐.”
“하하, 역시 대단하구나. 적사병에게 조차 굴복하지 않는군. 그 꼬장꼬장하고 오만한 자존심. 넌 한 번도 누구에게 진심으로 머리를 수그린 적이 없지. 누구나 꿈꾸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런 자존심이 널 망치는 것도 사실이지. 그래, 좋아. 모든 걸 이야기 해 주마.”
씨그는 핏물이 젖은 담요를 벗어 팽개쳤다. 그러자 벌겋게 허물어져 가는 피부가 드러났다.
“우선 네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자면, 삼촌은 지금 톨페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어. 조카는 적사병의 균이 가득한 이곳에 남겨두고 말이야.”
톨페 지구는 중하급 관리들이나 전문직 중산층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네 일이 있고나서, 삼촌은 시암제국의 황제로부터 벼슬을 받았거든. 삼촌이 어떤 벼슬을 받았는지 알아? 우습게도 삼촌은 급수부 샘터 관리관이 되었어. 배꼽거리의 샘터를 담당하게 되었지. 그리고 난 삼촌의 뒤를 이어서 물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지. 관리관과 물배달 조합이 완전히 한통속이 된 거야. 엄청난 돈이 쏟아져 들어왔지. 적사병만 돌지 않았다면, 나와 삼촌은 웬만한 상인들 못지않은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거야.
물론 네가 정말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네가 그 꼴을 당했는가 하는 것이겠지? 그것도 대답해 주마. 어느 날 조합에 말라르디란 영감이 찾아왔어. 너도 잘 아는 사람이지?“
순간 마로의 목이 울컥거렸다.
“그 영감이 먼저 그러더라고. 네 녀석을 이렇게 저렇게 처리해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아, 왜 영감이 그런 일을 부탁했는지는 묻지 마. 그건 우리도 모르니까. 어쨌든 우리는 영감이 내놓은 방법을 조금 보완해서는, 당시 샘터 관리관에게 뇌물 좀 먹인 후에 일을 진행시킨 거야. 뭐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었어. 네 녀석에게 내 준 배달구역도 되찾아야 했고, 영감이 내놓은 보상이 워낙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거든. 삼촌은 네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워낙에 삼촌은 자기의 이득과 안전을 위해서는 어떤 인간관계도 주저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야. 지금 나를 봐. 삼촌은 적사병이 옮을까봐 나를 이 거리에서 꺼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잖아? 하지만 난 삼촌과는 달라.”
갑자기 씨그는 키득거렸다.
“난 아무 보상이 없더라도, 아니 심지어 내가 손해를 입는 일이 있더라도 널 엿 먹이는 일이라면 기꺼이 참여했을 거야. 너도 어느 정도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난 네 녀석이 정말 싫었거든. 너도 이해하지? 좋아. 그럼 기왕 내친 김에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어야겠네. 어차피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르로이라고 했던가? 네 아버지 말이야…….”
씨그는 무릎 위에 놓아둔 석궁을 슬그머니 집어 들며 말했다. 한 번에 두발을 장전할 수 있는 석궁에는 아직 한 개의 화살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사실 난 그 양반이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애초에 우리는 장례비를 보태주고 너를 조합으로 끌어들일 작정이었거든. 보통은 그 정도로 세게 머리를 부딪치면 죽던데, 그 아저씨는 용케도 살아남았더군. 하하.”
순간 마로는 벌떡 일어나더니 씨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씨그의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이 마로의 배에 들어박히자, 마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그런 마로를 보며 씨그는 요란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봐 예의 차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 석궁에 맞은 기분이 어때? 이거 아주 비싸게 주고 산 것이란 말이야. 뱃속이 후끈후끈한 것이 제법 쓸 만한 것 같아? 하하하”
하지만 씨그는 곧 깜짝 놀라며 웃음을 멈추었다. 석궁의 강력한 화살에 맞은 마로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던 것이었다. 마로는 이를 악물더니 배 깊숙이 박힌 화살을 힘껏 잡아 빼었다. 화살의 미늘이 내장과 살을 거칠게 찢었지만,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는 마로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마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씨그에게 다가섰다. 씨그는 황급히 석궁에 화살을 장전하려 했지만, 적사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는 장력이 강한 석궁을 빨리 다룰 수 없었다. 어느새 마로는 씨그의 목을 쥐고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 씨그는 큭큭거리더니 이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사병으로 말미암아 짓물렀던 목의 피부가 벗겨지더니 마로의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씨그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바닥을 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회복하여 일어선 아이지가 엎드려 있는 씨그의 턱을 차올렸다.
“크흑!”
씨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씨그를 보더니 아이지는 피식 피식 웃었다.
“이 개자식아. 갑자기 화살을 쏘면 어떻게 해? 깜짝 놀랐잖아.”
씨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지를 보며 더듬거렸다.
“아니, 어, 어떻게?”
아이지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 지금 그걸 아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을까? 저길 보라고.”
씨그는 아이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격렬한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마로는 미친 사람처럼 으르렁거리며 바닥을 더듬더니, 마침내 자신의 배에서 뽑아낸 화살을 집어 들었다. 거꾸로 쥔 화살을 높이 치켜든 마로는 씨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씨그는 그 살기등등한 태도를 보면서 요 며칠 계속 생각하던 자신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다.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마로에 대한 악의적인 조롱이 떠올랐다. 씨그는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 어차피 난 하루 이틀을 못 넘길 목숨이었으니까. 지금 네 손에 죽는다고 해도 나에겐 별로 손해될 것은 없지. 오히려 내 고통을 끝내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건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지경이로군. 하하하. 그래 당장 나를 죽이라고.”
여기까지 이야기한 씨그는 다시 눈, 코, 입에서 피를 내쏟기 시작했다. 마로에게도 씨그의 생명력이 꺼져가며 적사병의 죽음이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씨그의 말 대로였다.
마로는 화살을 든 채로 우뚝 멈추어 서서는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울분을 주체하지 못한 마로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입닥쳐, 개자식아!”
마로는 두 손으로 화살을 움켜잡고 내리찍기 위해 머리위로 번쩍 치켜 올렸다. 하만 씨그는 오히려 통쾌하다는 듯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 때 옆에서 아이지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봐! 지금 이렇게 낄낄거리 채로 녀석을 죽이면, 너는 평생 그 고통스러운 분노에서 벗어날 수 없어. 죽은 자를 상대로는 화풀이를 할 수 없는 법이니까.”
높이 들렸던 마로의 팔이 멈추었다. 아이지는 경련을 하듯 떨리는 마로의 손을 보며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이 녀석을 그렇게 죽이지 마. 저 녀석이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며 몸부림치도록 해야 해. 너 못지않은 분노로 고통 받게 하지 못하면 저 너절한 녀석을 죽인다고 해도 너는 영원한 패배자일 뿐이야.”
“그럼 뭘 어쩌란 말이야! 저 녀석이 적사병으로 죽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 주기라도 하란 거야!”
마로의 고함에 아이지는 나직하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멍청아. 이제는 너도 네가 가진 힘에 좀 익숙해져 봐!”
그 순간 마로의 머릿속에도 자신이 가진 힘이 이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막연한 느낌일 뿐 구체적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 나에겐 죽음을 거둘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힘으로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결국 이 녀석의 죽음을 미루어 두고 잔혹한 고문이라도 하라는 이야기인가?’
마로가 멍청하게 서 있는 동안 아이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고깔을 벗고 입을 막고 있는 가리개 떼어내었다. 이어 자신의 얼굴을 씨그에게 바짝 갖다 대고는 싱긋 웃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간아. 너는 방금 마로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며 살게 될 거야. 언제 끝날지 모를 아주 긴 시간 동안 말이지.”
그 악랄한 말에도 불구하고 아이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씨그는 그 신비로운 매력에 홀리고 말았다. 씨그가 넋을 잃고 아이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마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이 죽지 못하게 만든 후, 마음껏 화풀이를 하란 말이야?”
아이지는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너의 그 기발한 어수룩이 재미있다며 웃어 주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좀 짜증스럽네. 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수가 있는 거지? 지금 이 녀석에게 해줘야 할 것은 그런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원히 짊어질 정신적인 고통이라니까?”
아이지는 씨그의 어깨를 밀어 바닥에 눕혔다.
“이봐, 가만히 누워 있어.”
이미 아이지에게 매혹된 씨그는 멍한 표정으로 순순히 말을 들었다. 아이지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내 매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야. 이 녀석처럼 얌전히 구는 것이 그나마 가장 나은 편에 속하지. 다른 녀석들이 이 정도만 해주어도 그럭저럭 살만할 텐데.”
아이지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아까 마로에게 쥐의 주술을 시전할 때 쓰던 칼과 바늘이었다.
“이집 저집 다 뒤져봐도 도대체 쓸 만한 도구를 구하기 힘들어. 조만간 물건들 좀 잔뜩 장만해야겠어.”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이지의 손은 민첩하고 정교하게 움직여 어느새 씨그의 목덜미를 엄지손톱만큼 절개 해 놓고 있었다. 아이지는 그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씨그의 팔다리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있던 아이지는 손을 빼고는 씨그의 귀 뒤에 바늘을 깊이 찔러 넣었다. 바늘은 달구어 지기라도 한 듯 살을 태우는 냄새가 났다. 아이지는 몇 번인가 바늘을 빼어서는 그 끝을 살피더니 이윽고 이제 다 되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적사병이라도 치료를 받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물론 적사병의 증상은 평생 업고 살아가야하지만. 마로, 네 힘으로 이 녀석의 몸을 한 번 살펴봐.”
마로는 아이지의 말에 따라 씨그의 몸을 살폈다. 피부에 난 외상들이 크고 작은 죽음의 가능성을 품고는 있었지만, 아까 느꼈던 뚜렷한 적사병의 죽음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자, 어때? 확실히 이 녀석 몸에서 적사병으로 인한 죽음이 사라졌지? 자 이제 이 녀석을 불사자로 만들어.”
그제야 마로는 아이지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씨그에게 죽음을 제거한 적사병의 고통을 안겨주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언제 끝날지 모를 오랜 시간동안 말이다.
하지만 마로는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분명 아이지의 방법은 잔혹하고 효과적인 복수이다. 씨그는 영원토록 피를 내쏟고 피부가 고통스럽게 허물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까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격렬하던 분노 상태는 아니었지만, 씨그에 대한 증오는 여전하기에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모를 불길한 느낌이 씨그를 불사자로 만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마로를 보던 아이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아까는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더니 뭐 하는 거야? 이미 이 녀석 엉덩이는 피부가 허물어져서 썩어 가고 있어. 적사병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해도, 저 상태로 놔두고 떠나면 굶어죽거나 상처로 죽게 돼. 이 녀석을 그렇게 죽게 만들면 그 후회는 네가 대신 짊어지게 될 거야. 도대체 망설일 이유가 뭐야? 어차피 넌 네가 원할 때 언제라도 저 녀석에게 죽음을 되돌려 줄 수 있잖아?”
‘그래. 아이지의 말이 맞다.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 이 비열한 자식에게 가장 비참한 삶과 절망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마로는 씨그에게로 다가가서는 씨그의 몸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모조리 거두어 들였다. 씨그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자, 아이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고깔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씨그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자 마로는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는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이 개자식아. 내 이야기 똑똑히 들어라. 이제 넌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죽을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넌 언제까지나 그 적사병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온 몸에서 피를 내쏟고, 피부가 물러 벗겨지는 고통을 말이다.”
하지만 씨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눈만 크게 치켜 뜰 뿐이었다. 마로는 씨그의 따귀를 힘껏 후려쳤다. 그 바람에 씨그의 뺨의 피부가 벗겨졌다. 마로는 나직하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렇다 해도 지금의 내 말을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난 네가 생각하던 마로가 아니야. 네 녀석 따위는 상상도 못할 힘을 가지고 네 녀석을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는 존재란 말이다.”
하지만 울분은 좀처럼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이 따위 녀석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말라르디 영감이다. 영감을 만나야 돼.’
마로는 멀뚱한 눈만 뜨고 있는 씨그를 구석으로 힘껏 내팽개치고는 벌떡 일어나 성큼 성큼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이지가 낄낄거리며 마로의 뒤를 따라 나가자, 어두운 방 안에는 씨그만이 홀로 남아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조합의 건물에서 나온 마로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미 밤인데다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도 거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거리였지만, 쥐들의 힘을 빌고 있는 마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로를 따라 잡기 위해 아이지가 달려오더니 기대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너, 들키지 않고 나를 황궁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어?”
“황궁? 그 말라르디라는 자를 찾으러 가는 거야? 그런데 솔직히 나도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워. 시암제국의 황궁에는 암살자의 침투를 막기 위해 마법을 무력화하는 결계가 쳐져 있거든. 그런 건 나도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밖에서 독을 풀어서 황궁의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어. 안개에 잘 섞이는 독이 하나 있거든. 약을 만들고 이 곳 저 곳에 설치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테고, 적당한 안개가 피어줄 때까지 기다려야겠지만, 효과만은 확실해. 어때, 생각 있어?”
마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안 돼.”
아이지는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하긴 나도 이런 식의 복수는 마음에 들지 않아. 복수라면 상대의 몸부림과 절규를 직접 보고 들어야지.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병사나 관리들을 유혹 해보기라도 할까? 그런데 나에게 집착하는 것과 내 조종을 받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둬야 해. 어떤 이들은 내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를 소유하고 싶어서 오히려 갖가지 술수를 쓰거든. 앙가레즈처럼 말이야.”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마로가 입을 열었다.
“나도 따로 방법이 있어.”
아이지는 의외라는 듯 깔깔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황궁에 들어갈 방법을 안다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네. 궁금해지는 걸? 하하하.”
마로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요란스럽게 울리는 아이지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옛 집을 나온 마로는 아이지와 함께 물조합 건물로 향하였다. 악취와 쥐가 가득한 배꼽거리에서는 마로의 새로운 능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오히려 눈으로 길을 찾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을 가는 도중 강도들을 만나기도 했다. 거리가 폐쇄되며 음식과 생필품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죽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예사가 되었다. 원래부터 강도와 도둑이 적지 않았던 거리이긴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언제라도 강도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이지의 기이한 독과 괴기스러운 마법 앞에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어느덧 마로는 물조합 건물 1층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조합의 건달들이 모여 노름을 하고, 잡담을 하느라 시끌벅적 했을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들어서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쥐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로는 감지력을 발동시켜 보았다. 사방에서 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집중이 쉽지 않았던 데다가 도미의 방이 있던 3층까지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단 지금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사람이 없는 것은 확실하였다. 쓰레기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지 역시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적사병이 시작되면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이런 곳에 모여 있을 리는 없겠지.”
마로는 아무런 대꾸 없이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기자 마로는 우뚝 멈추어 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3층에 사람이 한 명 있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로의 뒤를 따르던 아이지는 그제야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얼른 가보자.”
앞으로 일어날 재미있는 일이 기대되어 못 견디겠다는 듯 아이지는 마로의 팔을 끌고 3층으로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3층에 도착하자 마자 아이지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지?”
“제일 끝에 있는 방이야.”
조합의 건물 구조에 환한 마로는 그곳이 도미의 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면서 마로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가슴이 두근거려서 좀처럼 차분하게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방 앞에 도착한 아이지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방 한구석에서 화살 하나가 매섭게 날아들더니 아이지의 가슴에 들어박혔다.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의 힘은 워낙 강력해서 아이지의 몸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이지의 뒤를 따르던 마로는 깜짝 놀라 아이지의 몸을 받쳐 들며 말했다.
“이봐, 괜찮아?”
하지만 마로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이내 깨닫고 아이지의 몸을 더듬어 화살을 힘껏 잡아 뺐다. 아이지가 상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바닥에 눕힌 마로는 화살이 날아왔을 곳, 사람이 웅크리고 있을 방 한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곳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로 온지!”
마로는 대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그래. 씨그. 나야.”
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 어떻게 네가 살아서 여기까지 왔지?”
마로는 씨그의 말에서 그 역시 내막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질문을 할 사람은 나일 텐데? 도미는 어디 있지?”
“삼촌?”
갑자기 씨그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삼촌이 어디 있냐고?”
정신없이 웃던 씨그는 갑자기 쿨럭거리며 코와 입에서 피를 내쏟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담요에 새빨간 핏물이 적셔졌다. 씨그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은 마로가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적사병에 걸렸구나.”
씨그는 코와 입에 묻은 핏물을 훔치며 킬킬거렸다.
“그래. 난 적사병에 걸렸어. 적사병에 걸린 사람은 3일을 버티지 못한다고 하니, 어차피 난 내일을 넘기지 못할 거야. 너에게도 전염될까봐 두렵나? 하하, 좋아 마로.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진실을 들을 테냐, 아니면 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나갈 테냐?”
하지만 마로로서는 적사병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마로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말해봐.”
“하하, 역시 대단하구나. 적사병에게 조차 굴복하지 않는군. 그 꼬장꼬장하고 오만한 자존심. 넌 한 번도 누구에게 진심으로 머리를 수그린 적이 없지. 누구나 꿈꾸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런 자존심이 널 망치는 것도 사실이지. 그래, 좋아. 모든 걸 이야기 해 주마.”
씨그는 핏물이 젖은 담요를 벗어 팽개쳤다. 그러자 벌겋게 허물어져 가는 피부가 드러났다.
“우선 네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자면, 삼촌은 지금 톨페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어. 조카는 적사병의 균이 가득한 이곳에 남겨두고 말이야.”
톨페 지구는 중하급 관리들이나 전문직 중산층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네 일이 있고나서, 삼촌은 시암제국의 황제로부터 벼슬을 받았거든. 삼촌이 어떤 벼슬을 받았는지 알아? 우습게도 삼촌은 급수부 샘터 관리관이 되었어. 배꼽거리의 샘터를 담당하게 되었지. 그리고 난 삼촌의 뒤를 이어서 물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지. 관리관과 물배달 조합이 완전히 한통속이 된 거야. 엄청난 돈이 쏟아져 들어왔지. 적사병만 돌지 않았다면, 나와 삼촌은 웬만한 상인들 못지않은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거야.
물론 네가 정말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네가 그 꼴을 당했는가 하는 것이겠지? 그것도 대답해 주마. 어느 날 조합에 말라르디란 영감이 찾아왔어. 너도 잘 아는 사람이지?“
순간 마로의 목이 울컥거렸다.
“그 영감이 먼저 그러더라고. 네 녀석을 이렇게 저렇게 처리해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아, 왜 영감이 그런 일을 부탁했는지는 묻지 마. 그건 우리도 모르니까. 어쨌든 우리는 영감이 내놓은 방법을 조금 보완해서는, 당시 샘터 관리관에게 뇌물 좀 먹인 후에 일을 진행시킨 거야. 뭐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었어. 네 녀석에게 내 준 배달구역도 되찾아야 했고, 영감이 내놓은 보상이 워낙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거든. 삼촌은 네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워낙에 삼촌은 자기의 이득과 안전을 위해서는 어떤 인간관계도 주저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야. 지금 나를 봐. 삼촌은 적사병이 옮을까봐 나를 이 거리에서 꺼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잖아? 하지만 난 삼촌과는 달라.”
갑자기 씨그는 키득거렸다.
“난 아무 보상이 없더라도, 아니 심지어 내가 손해를 입는 일이 있더라도 널 엿 먹이는 일이라면 기꺼이 참여했을 거야. 너도 어느 정도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난 네 녀석이 정말 싫었거든. 너도 이해하지? 좋아. 그럼 기왕 내친 김에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어야겠네. 어차피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르로이라고 했던가? 네 아버지 말이야…….”
씨그는 무릎 위에 놓아둔 석궁을 슬그머니 집어 들며 말했다. 한 번에 두발을 장전할 수 있는 석궁에는 아직 한 개의 화살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사실 난 그 양반이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애초에 우리는 장례비를 보태주고 너를 조합으로 끌어들일 작정이었거든. 보통은 그 정도로 세게 머리를 부딪치면 죽던데, 그 아저씨는 용케도 살아남았더군. 하하.”
순간 마로는 벌떡 일어나더니 씨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씨그의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이 마로의 배에 들어박히자, 마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그런 마로를 보며 씨그는 요란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봐 예의 차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 석궁에 맞은 기분이 어때? 이거 아주 비싸게 주고 산 것이란 말이야. 뱃속이 후끈후끈한 것이 제법 쓸 만한 것 같아? 하하하”
하지만 씨그는 곧 깜짝 놀라며 웃음을 멈추었다. 석궁의 강력한 화살에 맞은 마로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던 것이었다. 마로는 이를 악물더니 배 깊숙이 박힌 화살을 힘껏 잡아 빼었다. 화살의 미늘이 내장과 살을 거칠게 찢었지만,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는 마로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마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씨그에게 다가섰다. 씨그는 황급히 석궁에 화살을 장전하려 했지만, 적사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는 장력이 강한 석궁을 빨리 다룰 수 없었다. 어느새 마로는 씨그의 목을 쥐고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 씨그는 큭큭거리더니 이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사병으로 말미암아 짓물렀던 목의 피부가 벗겨지더니 마로의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씨그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바닥을 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회복하여 일어선 아이지가 엎드려 있는 씨그의 턱을 차올렸다.
“크흑!”
씨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씨그를 보더니 아이지는 피식 피식 웃었다.
“이 개자식아. 갑자기 화살을 쏘면 어떻게 해? 깜짝 놀랐잖아.”
씨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지를 보며 더듬거렸다.
“아니, 어, 어떻게?”
아이지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 지금 그걸 아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을까? 저길 보라고.”
씨그는 아이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격렬한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마로는 미친 사람처럼 으르렁거리며 바닥을 더듬더니, 마침내 자신의 배에서 뽑아낸 화살을 집어 들었다. 거꾸로 쥔 화살을 높이 치켜든 마로는 씨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씨그는 그 살기등등한 태도를 보면서 요 며칠 계속 생각하던 자신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다.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마로에 대한 악의적인 조롱이 떠올랐다. 씨그는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 어차피 난 하루 이틀을 못 넘길 목숨이었으니까. 지금 네 손에 죽는다고 해도 나에겐 별로 손해될 것은 없지. 오히려 내 고통을 끝내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건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지경이로군. 하하하. 그래 당장 나를 죽이라고.”
여기까지 이야기한 씨그는 다시 눈, 코, 입에서 피를 내쏟기 시작했다. 마로에게도 씨그의 생명력이 꺼져가며 적사병의 죽음이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씨그의 말 대로였다.
마로는 화살을 든 채로 우뚝 멈추어 서서는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울분을 주체하지 못한 마로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입닥쳐, 개자식아!”
마로는 두 손으로 화살을 움켜잡고 내리찍기 위해 머리위로 번쩍 치켜 올렸다. 하만 씨그는 오히려 통쾌하다는 듯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 때 옆에서 아이지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봐! 지금 이렇게 낄낄거리 채로 녀석을 죽이면, 너는 평생 그 고통스러운 분노에서 벗어날 수 없어. 죽은 자를 상대로는 화풀이를 할 수 없는 법이니까.”
높이 들렸던 마로의 팔이 멈추었다. 아이지는 경련을 하듯 떨리는 마로의 손을 보며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이 녀석을 그렇게 죽이지 마. 저 녀석이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며 몸부림치도록 해야 해. 너 못지않은 분노로 고통 받게 하지 못하면 저 너절한 녀석을 죽인다고 해도 너는 영원한 패배자일 뿐이야.”
“그럼 뭘 어쩌란 말이야! 저 녀석이 적사병으로 죽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 주기라도 하란 거야!”
마로의 고함에 아이지는 나직하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멍청아. 이제는 너도 네가 가진 힘에 좀 익숙해져 봐!”
그 순간 마로의 머릿속에도 자신이 가진 힘이 이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막연한 느낌일 뿐 구체적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 나에겐 죽음을 거둘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힘으로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결국 이 녀석의 죽음을 미루어 두고 잔혹한 고문이라도 하라는 이야기인가?’
마로가 멍청하게 서 있는 동안 아이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고깔을 벗고 입을 막고 있는 가리개 떼어내었다. 이어 자신의 얼굴을 씨그에게 바짝 갖다 대고는 싱긋 웃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간아. 너는 방금 마로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며 살게 될 거야. 언제 끝날지 모를 아주 긴 시간 동안 말이지.”
그 악랄한 말에도 불구하고 아이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씨그는 그 신비로운 매력에 홀리고 말았다. 씨그가 넋을 잃고 아이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마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이 죽지 못하게 만든 후, 마음껏 화풀이를 하란 말이야?”
아이지는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너의 그 기발한 어수룩이 재미있다며 웃어 주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좀 짜증스럽네. 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수가 있는 거지? 지금 이 녀석에게 해줘야 할 것은 그런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원히 짊어질 정신적인 고통이라니까?”
아이지는 씨그의 어깨를 밀어 바닥에 눕혔다.
“이봐, 가만히 누워 있어.”
이미 아이지에게 매혹된 씨그는 멍한 표정으로 순순히 말을 들었다. 아이지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내 매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야. 이 녀석처럼 얌전히 구는 것이 그나마 가장 나은 편에 속하지. 다른 녀석들이 이 정도만 해주어도 그럭저럭 살만할 텐데.”
아이지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아까 마로에게 쥐의 주술을 시전할 때 쓰던 칼과 바늘이었다.
“이집 저집 다 뒤져봐도 도대체 쓸 만한 도구를 구하기 힘들어. 조만간 물건들 좀 잔뜩 장만해야겠어.”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이지의 손은 민첩하고 정교하게 움직여 어느새 씨그의 목덜미를 엄지손톱만큼 절개 해 놓고 있었다. 아이지는 그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씨그의 팔다리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있던 아이지는 손을 빼고는 씨그의 귀 뒤에 바늘을 깊이 찔러 넣었다. 바늘은 달구어 지기라도 한 듯 살을 태우는 냄새가 났다. 아이지는 몇 번인가 바늘을 빼어서는 그 끝을 살피더니 이윽고 이제 다 되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적사병이라도 치료를 받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물론 적사병의 증상은 평생 업고 살아가야하지만. 마로, 네 힘으로 이 녀석의 몸을 한 번 살펴봐.”
마로는 아이지의 말에 따라 씨그의 몸을 살폈다. 피부에 난 외상들이 크고 작은 죽음의 가능성을 품고는 있었지만, 아까 느꼈던 뚜렷한 적사병의 죽음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자, 어때? 확실히 이 녀석 몸에서 적사병으로 인한 죽음이 사라졌지? 자 이제 이 녀석을 불사자로 만들어.”
그제야 마로는 아이지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씨그에게 죽음을 제거한 적사병의 고통을 안겨주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언제 끝날지 모를 오랜 시간동안 말이다.
하지만 마로는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분명 아이지의 방법은 잔혹하고 효과적인 복수이다. 씨그는 영원토록 피를 내쏟고 피부가 고통스럽게 허물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까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격렬하던 분노 상태는 아니었지만, 씨그에 대한 증오는 여전하기에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모를 불길한 느낌이 씨그를 불사자로 만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마로를 보던 아이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아까는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더니 뭐 하는 거야? 이미 이 녀석 엉덩이는 피부가 허물어져서 썩어 가고 있어. 적사병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해도, 저 상태로 놔두고 떠나면 굶어죽거나 상처로 죽게 돼. 이 녀석을 그렇게 죽게 만들면 그 후회는 네가 대신 짊어지게 될 거야. 도대체 망설일 이유가 뭐야? 어차피 넌 네가 원할 때 언제라도 저 녀석에게 죽음을 되돌려 줄 수 있잖아?”
‘그래. 아이지의 말이 맞다.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 이 비열한 자식에게 가장 비참한 삶과 절망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마로는 씨그에게로 다가가서는 씨그의 몸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모조리 거두어 들였다. 씨그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자, 아이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고깔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씨그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자 마로는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는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이 개자식아. 내 이야기 똑똑히 들어라. 이제 넌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죽을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넌 언제까지나 그 적사병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온 몸에서 피를 내쏟고, 피부가 물러 벗겨지는 고통을 말이다.”
하지만 씨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눈만 크게 치켜 뜰 뿐이었다. 마로는 씨그의 따귀를 힘껏 후려쳤다. 그 바람에 씨그의 뺨의 피부가 벗겨졌다. 마로는 나직하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렇다 해도 지금의 내 말을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난 네가 생각하던 마로가 아니야. 네 녀석 따위는 상상도 못할 힘을 가지고 네 녀석을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는 존재란 말이다.”
하지만 울분은 좀처럼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이 따위 녀석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말라르디 영감이다. 영감을 만나야 돼.’
마로는 멀뚱한 눈만 뜨고 있는 씨그를 구석으로 힘껏 내팽개치고는 벌떡 일어나 성큼 성큼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이지가 낄낄거리며 마로의 뒤를 따라 나가자, 어두운 방 안에는 씨그만이 홀로 남아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조합의 건물에서 나온 마로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미 밤인데다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도 거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거리였지만, 쥐들의 힘을 빌고 있는 마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로를 따라 잡기 위해 아이지가 달려오더니 기대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너, 들키지 않고 나를 황궁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어?”
“황궁? 그 말라르디라는 자를 찾으러 가는 거야? 그런데 솔직히 나도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워. 시암제국의 황궁에는 암살자의 침투를 막기 위해 마법을 무력화하는 결계가 쳐져 있거든. 그런 건 나도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밖에서 독을 풀어서 황궁의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어. 안개에 잘 섞이는 독이 하나 있거든. 약을 만들고 이 곳 저 곳에 설치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테고, 적당한 안개가 피어줄 때까지 기다려야겠지만, 효과만은 확실해. 어때, 생각 있어?”
마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안 돼.”
아이지는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하긴 나도 이런 식의 복수는 마음에 들지 않아. 복수라면 상대의 몸부림과 절규를 직접 보고 들어야지.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병사나 관리들을 유혹 해보기라도 할까? 그런데 나에게 집착하는 것과 내 조종을 받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둬야 해. 어떤 이들은 내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를 소유하고 싶어서 오히려 갖가지 술수를 쓰거든. 앙가레즈처럼 말이야.”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마로가 입을 열었다.
“나도 따로 방법이 있어.”
아이지는 의외라는 듯 깔깔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황궁에 들어갈 방법을 안다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네. 궁금해지는 걸? 하하하.”
마로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요란스럽게 울리는 아이지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