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6
4.
맹인들이 마로를 방 구석에 내려 놓는 동안 사내는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새장에 가까워 질수록 사내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했다. 냉혹하다 못해 잔인하게 보이던 얼굴이 안타까움과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급기야 새장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사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오, 잘 있었소? 내가 다시 돌아왔소.”
사내의 목소리를 듣자 등을 돌리고 웅크리고 있던 새장 속의 인간이 일어섰다. 발가벗은 그의 몸은 가는 곡선이 부드러운 굴곡을 이르며 흐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본 사내는 무릎을 꿇더니 절규하듯 말했다.
“아아, 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는 내 무딘 혀끝이 원망스럽구나. 그대여, 혹시 내 말을 듣고 있다면 뒤돌아서 앞모습도 보여줄 수 없겠소?”
사내의 말에 따라 새장 속의 인물이 뒤돌아섰다. 길고 흑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였다. 묘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은 그 큰 눈으로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인의 뇌쇄적인 매력에 사내는 급기야 두 손을 움켜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인은 새장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앙가레즈. 이리 와 봐요.”
여인의 목소리를 듣자 앙가레즈는 감격하여 입을 크게 벌렸다. 비굴하다 못해 바보같은 그 모습에서는 칼레 최고의 부자이자 권력자라는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 그대가 지금 나에게 말을 한 것이오?”
“그래요. 앙가레즈. 이리 와 봐요.”
앙가레즈는 벌떡 일어서며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앙가레즈가 새장 앞으로 다가오자 쓰다듬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이리 주세요. 당신을 만져보고 싶어요.”
흐릿해진 눈으로 앙가레즈는 천천히 새장 속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다시 빛내며 들었던 손을 뒤로 숨겼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소.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여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그대와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갑자기 새장 속의 여인은 화가 난 듯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이! 당장 뒈져 버려라!”
갑자기 여인은 손을 들어 앞으로 내뻗었다. 놀랍게도 여인의 두 손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검은 독사들이 뭉쳐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앙가레즈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 앉았다. 여인은 앙가레즈에게 뱀떼를 문지르려는 듯 새장 밖으로 손을 내뻗었다.
여인의 손이 검은 철기둥을 지나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번득였다. 동시에 여인의 손에서 꿈틀거리던 뱀떼들이 묘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여인의 손에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뭉치만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분함을 이기지 못한 듯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급기야는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날에는 네 팔다리를 찢어서 돼지의 먹이로 주어버릴 테다. 네 녀석의 눈을 까지 파낸 후에 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는 장각충을 잔뜩 넣어 줄 꺼야. 네 배를 째고 창자를 잡아 빼주는 것도 좋겠군. 마지막으로 네 녀석을 긴 장대에 꿰어 매단 후에 가슴을 열고 심장을 갈가리 찢어서 먹어버릴 꺼야.”
하지만 앙가레즈는 그런 여인의 저주를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울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그대여. 제발 그런 잔혹한 말은 하지 말아요. 그대만 마음을 돌린다면 우리는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그대만 마음을 돌려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나는 이 모든 재산과 지위, 심지어는 신마저도 버릴 수 있어요. 제발!”
앙가레즈의 애걸하는 모습을 보던 여인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쳤다.
“꺼져 버려. 난 그렇게 매달리는 꼴이 가장 역겨우니까! 너 같은 인간을 보면 밟아 죽이고 싶어.”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발, 다시 생각해 봐요.”
하지만 여인은 더 듣기 싫다는 듯 대꾸도 없이 새장 가운데로 물러서더니 담요를 덮고 누워버렸다. 여인이 눕고 나서도 한참을 애걸하던 앙가레즈는 갑자기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태연한 얼굴로 눈물을 닦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방 한 편에 있는 호화로운 침대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공명석을 집어 들고 맹인 하인들에게 명령을 하였다.
“새로 들어온 자를 깨워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주도록 해라.”
그러자 하인들은 각성제를 들고 와서 마로의 코 앞에 대었다. 아까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던 마로였지만,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비로소 깨어난 체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이가 제법 많은 늙은이가 공명석 막대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로에게 일하는 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기묘한 하인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새장 속의 여인을 시중드는 일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앙가레즈는 여인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그 말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이들로만 하인을 만들었다. 하인들은 오로지 앙가레즈가 공명석을 통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앙가레즈가 거의 방을 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방에는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잠이나 생리적인 배설까지도 모두 밖에 나가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음식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끈을 잡아당기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도르래에 실어 올려 주었다. 그러면 맹인 하인들이 그 음식을 새장 속의 여인과 앙가레즈에게 차려주는 것이었다.
방에서 쓰이는 모든 도구에는 작은 홈을 만들어 놓아서 맹인들로서도 이를 만지고 각각 구별할 수 있게 하였다. 마로는 처음엔 그 표시들에 익숙지 않아 간혹 실수를 하기도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모든 물건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인들은 매일 한 번씩 교대로 방에서 나가 목욕을 하고 지검초를 배분받았지만, 워낙에 감시가 심한지라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인들은 아예 도망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골수까지 지검초의 인이 박혀서 오히려 이곳에서 쫒겨나기를 두려워 할 정도였다. 일은 바쁘거나 어려울 것이 없었기에 하인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언제나 구석진 곳에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서 지검초 통에 코를 대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바깥 세상에서 누릴 수 없던 쾌락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지금의 삶이 행복하였다.
하지만 지검초에 중독되지 않는 마로는 그들처럼 살 수는 없었다. 아버지 르로이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자꾸 마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항상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떻게 해야 방에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설령 나간다고 해도 베르가마로 어떻게 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 달여가 흘렀다.
그날도 하염없이 새장 속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앙가레즈는 침대 옆에 설치해 놓은 공명석 소리통이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앙가레즈는 소리통의 뚜껑을 열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공명석에서는 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오늘은 시 평의회 의원들이 모두 모이는 날입니다.”
“꼭 가야하나?”
“예, 이번 달 장님 새우의 매매가를 결정해야 하는…….”
“알았어. 알았어.”
앙가레즈는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상자를 닫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결국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도 새장 속의 여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공명석 막대기를 들며 말했다.
“난 지금 잠시 나갈 것이다. 그동안 너희들의 여주인을 잘 돌보도록 해라. 종소리를 잘 듣고 할 일을 놓치지 마라. 만약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사흘 동안 지검초를 주지 않을 테다.”
새장 꼭대기와 방 천정에는 공명석이 달린 종이 있어서 하인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종소리에 따라 하인들은 할 일을 하도록 연습되어 있었기에 앙가레즈가 없는 동안에도 새장 속의 여인을 돌볼 수 있었다.
앙가레즈가 나가고도 잠시 기다리던 마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앙가레즈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적다는 생각이 들자 슬그머니 방 한구석으로 갔다. 마로는 미리 방안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기에 그곳이 새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은 가구 뒤에 숨어서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해 볼 작정이었다.
마로는 오른쪽 귀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보았다. 역시 말랑말랑한 한천질의 무언가가 외이도를 틀어막고 있었다. 손가라으로 잡아 빼려고 해도 너무 깊숙이 있어 여의치 않았다. 결국 마로는 주머니에서 며칠 전에 감추어 두었던 날카로운 뼛조각을 꺼내었다. 며칠 전 음식을 먹을 때 슬그머니 챙겨두었던 것이었다.
마로는 잠시 쉼호흡을 하더니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귀에 뼛조각을 찔러 넣었다. 머리 전체가 어찔해질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일었지만, 마로는 어금니를 질끈 깨어 물며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하인들이야 아무 소리도 못 듣겠지만, 새장 속의 여인은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로는 뼈조각의 갈고리 같은 끝을 이용하여 귓속에 있는 것을 긁어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뼛조각이 귓속의 살을 고통스럽게 찢었지만, 마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주어 뿌리치듯 거칠게 잡아 빼었다. 결국 귀를 막고 있던 거품 괴물 구레를 모두 긁어 낼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워서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통증은 금세 사그라졌다. 숨 한 번 돌릴 사이에 이미 귀는 아물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 회복력이란 건 정말 굉장하군.’
문득 마로의 머릿속에 납치되기 전 야니의 다리를 치료하였던 당시가 떠올랐다.
다리가 부러진 채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는 야니를 바라보는 순간 문득 마로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새로 얻은 여섯번째 감각이 그전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었다.
마로가 느낀 것은 앞에 있는 야니의 기운 속에서 담긴 무엇이었다. 그것은 야니의 안에서 날뛰며 그 생명력을 격렬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순간 마로는 그것을 자신에게로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논리에 의한 것도 아니고 감각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전에 알았던 사실이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한 순간에 알았을 뿐이었다.
마로는 조심스레 야니 속의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옮겨보았다. 그것은 손으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코와 입으로 빨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만으로 마로의 몸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옮겨온 그것은 마로가 생각하는 머릿속 공간 어딘가에 도사렸다. 그러자 야니의 기운이 마로가 지금까지 느끼던 것과 다른 것으로 변하였다. 그 순간부터 마로는 야니를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기운과 구별할 수가 있었다.
‘내가 야니의 다리를 낫게 했던 방법이 두벡이 나를 치료했던 것과 같은 것이겠지?’
가구 뒤에 숨어서 이런 생각을 하던 마로는 문득 거품 괴물을 끄집어 낸 귀로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 이봐! 너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 거야?”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런 들켰구나.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어쩌면 상대가 넘겨짚은 것일지도 몰랐다. 마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히 가구 뒤에서 나와 자신의 의자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봐, 거울을 통해 봤다고. 넌 방금 뼛조각을 이용해서 귀에서 구레를 꺼냈잖아? 꽤 아팠을 텐데, 정말 지독한 인간이로군.”
‘아차, 방 한구석에 거울이 있었구나!’
마로는 끝까지 잡아떼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로가 잠시 망설이는 동안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난 너 같이 독한 남자가 좋아. 이봐, 이리 와 봐.”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로는 심장 근처가 아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애절하고도 안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여인은 미소를 짓더니 매혹적이고 요염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것 봐. 다 들을 수 있잖아, 어서 이리 와.”
하지만 오히려 마로는 울렁거리던 가슴이 다시 진정되는 것을 느끼고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마로가 갖고 있는 힘이 일탈적인 감정 상태마저 원래대로 회복시킨 것이었다. 마로는 자신이 방금 어떤 상황이었는지 깨닫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저 여자는?’
하지만 놀란 것은 마로 뿐이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에 이끌리던 마로가 멈추며 다시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넌 도대체 어떤 녀석이냐?”
이쯤 되면 마로도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었다.
“젠장! 도대체 너야말로 누구냐? 누군데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거야? 도대체 여긴 어디지?”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그렇게 거친 말은 아니었다. 앙가레즈에게 그토록 잔인한 저주를 퍼부을 정도의 여자가 이런 말에 새삼 당황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로의 거친 대꾸를 들은 여인은 어찌나 놀랐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마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마로로서는 여자가 어떤 표정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설득하듯 말했다.
“이봐, 너도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을 보니 좋은 꼴은 아닌 것 같은데. 이곳을 나가고 싶지 않나? 우리 협력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도와주겠다면 너를 풀어주겠어. 아니 잠깐, 설마 너도 앞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겠…….”
갑자기 여인은 황급히 마로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금만 가까이 와봐. 난 눈이 멀진 않았지만, 그렇게 멀리 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마로는 갑작스러운 여자의 다급함과 적극성에 왠지 불안해 졌다. 때문에 머뭇거릴 뿐 선뜻 다가서지 못하였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다급하다 못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걱정 마! 너를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네 말처럼 난 너의 도움을 받아야 해. 해칠 리가 있겠어? 그냥 조금만 더 앞으로 와 봐. 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오지는 않아도 되니까.”
망설이던 마로는 결국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었다.
“그래, 두 걸음 더. 그렇지. 그렇지. 좋아. 그럼 아까 구레를 꺼내었던 네 귀를 내 쪽으로 향하게 해봐.”
“구레가 뭐야?”
“네가 귓속에서 꺼낸 흐물거리는 거품 괴물의 이름이야. 어쨌든 빨리 귀를 내 쪽으로 향하게 해 봐. 앙가레즈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단 말이야.”
마로는 앙가레즈가 돌아온다는 말에 황급히 오른쪽 귀를 새장쪽으로 돌렸다. 여인은 마로의 귀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더니 나직하게 외쳤다.
“세상에, 침묵하는 자의 왕이로구나!”
마로는 알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침묵하는 자의 왕?’
여인이 갑자기 깔깔 웃었다.
“하하하! 이렇게 만나다니. 그동안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야.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낄낄 거릴 때가 아니야. 여기서 나가는 것이 더 급하지. 이봐, 어서 나를 불사자로 만들어줘.”
“뭐, 뭐라고?”
“내 죽음을 가져가 달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이 여자는 불멸의 힘에 대해서 알고 있다.’
마로는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너는 대체 누구야?”
“물론 나도 너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아.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야. 우선 여기서 나가야해. 자 빨리 나를 불사자로 만들어줘.”
하지만 마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여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넌 내 도움 없이는 절대 이곳에서 못나가. 나 역시 너의 힘이 없이는 이 새장에서 나갈 수 없고. 게다가 넌 언제든지 나에게 죽음을 되돌릴 수 있잖아. 네가 겁낼 것이 뭐가 있어?”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아직 마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두벡은 자신이 죽는 것에 급급하여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로는 왠지 여자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로 혼자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귀를 막고 있는 구레를 빼낸 것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었다기보다 주변 상황을 살피며 기회를 노리기 위함일 뿐이었다. 결국 마로는 결심했다.
‘그래, 지금 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겠지.’
“무슨 말인지 알았다.”
마로는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섰다. 가까워질수록 이글거리는 여인의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중상을 입었던 야니처럼 격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인의 몸에서도 미세한 기운의 요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로의 생각에 따라 그 떨림은 마로의 몸 안으로 옮겨 왔다. 그 순간 여자는 기절하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자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은 마로는 황급히 새장으로 다가와 철창사이로 손을 뻗었다. 여인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이봐! 괜찮아?”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에 마로는 흠칫하며 손을 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부드러운 피부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뱃속 깊은 곳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에게는 무언가 이상한 힘이 있다.’
마로는 다시 감히 여인을 만질 생각을 못하였다. 대신 마로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여인은 좀처럼 깨어나질 못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엎드렸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새장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로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봐, 이제 정신이 들었어?”
여인은 마로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급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는지 빠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네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돌아봐.”
“왜?”
“시간이 없으니까, 묻지 말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봐. 눈이 보이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여인의 말이 옳았다. 마로는 뒤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마로는 여인의 말대로 움직였다. 여인은 마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목소리로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대로 책상 위로 올라가. 그래. 벽에 딱 붙어 서서는 손을 머리 위로 뻗어봐. 그래. 긴 칼이 하나 만져지지? 그걸 떼어와! 무조건 잡아떼려고 하지 말고 위로 들었다가 내리란 말이야. 그래. 그렇게. 자 이제 이리 돌아와.”
마로가 돌아오자, 여인은 칼을 받아 들었다.
“이봐, 지금부터 설명을 잘 들어. 난 지금부터 이 칼로 내 몸을 조각낼 거야. 한 덩이씩 네 손에 떨어뜨려 줄 테니 넌 그걸 이 새장 밖으로 끄집어내란 말이야.”
그제야 마로는 여인이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너무 끔찍한 방법이어서 내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고통스러운 방법을 쓰지 않고도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 철창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는다던가.”
“이 새장에 열쇠 따윈 없어. 문도 없어. 이건 마법으로 만든 새장으로 포획물을 안에 넣은 채로 조립된 것이란 말이야. 게다가 어떤 마법도 이 새장을 통과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 새장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야. 무지막지한 힘으로 새장을 부수거나, 몸을 조각내어서 빼내거나.”
“마, 마법?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단 말이야?”
마로의 말에 오히려 여인이 어리둥절해진 듯 멍하니 서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더니 이내 큰소리로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목을 베고 불로 태워도 죽지 않을 인간이 세상에 마법이 진짜로 있냐고 묻다니. 너 정말 웃긴 녀석이로구나. 하하하.”
다급하다고 재촉하던 그녀였으나, 웃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마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질문은 퍽이나 바보스러웠다. 하지만 여인이 너무 지나치게 웃자 마로도 슬슬 짜증이 나고 말았다.
“이봐!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던 네가 이렇게 마냥 웃고 있는 것도 나 못지않게 우스운 경우 같은데?”
퉁명스러운 마로의 목소리를 들은 여인은 갑자기 웃기를 멈추었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마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간질이는 듯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한 번 화내봐.”
마로는 순간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뭐?”
“다시 한 번 화내 보라고. 부탁이야.”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말을 듣자 마로는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 미친년아! 도대체 지금 이건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 지금 나를 갖고 노는 거야?”
하지만 여자의 반응은 더욱 희한했다. 마로의 욕설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마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바로 그렇게 말이야.”
마로는 그만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이 여자 진짜로 정신이 나간 것 아냐?’
여인은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는 마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칼을 들고 뒤로 몇 걸음 물러 섰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칼로 연거푸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철과 철이 부딪치며 귀를 찢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덧 칼이 부르르 떨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인은 재빨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더니 칼날에 발랐다. 여인의 피가 묻은 칼은 더욱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격렬하게 움직이느라 숨이 찬지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불사인이 되어도 피의 마법은 여전히 가능한 모양이군. 하지만 상처가 너무 빨리 아물어서 큰 수는 쓰지 못하겠어.”
여인은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로를 보며 말했다.
“손을 철창 사이로 뻗어봐.”
마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인의 말대로 새장 바닥에 팔을 들이 밀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은 서슴없이 자신의 오른쪽 골반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웅웅거리던 칼은 마치 진흙이라도 자르듯 너무도 쉽게 여인의 다리를 잘라내었다. 마로의 손에는 뜨거운 피와 함께 여인의 오른다리가 털썩 떨어져 내렸다. 예상못한 섬뜩한 느낌에 소스라치는 마로와는 달리 정작 다리가 잘린 당사자는 오히려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야, 이거 생각보다 짜릿한데? 아니, 뭐해? 빨리 다리를 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고.”
‘이 여자는 진짜 미쳤다.’
하지만 마로는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내뱉지 않고 여인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잡아당겼다. 여인의 가는 다리는 철창 사이를 쉽게 빠져 나왔다.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손이나 다시 뻗어. 이번에는 왼팔을 보낼 거야.”
기괴하고 끔찍한 탈출 작업은 계속 이어져서 마침내 새장 속의 여인은 두 다리와 왼팔, 허리 일부를 모두 내보낼 수 있었다.
상체 일부만 남아 바닥에 누운 여인은 기진맥진한지 들릴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젠 도저히 못 움직이겠어. 이봐, 이제부터는 네가 해주어야겠다. 칼에는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까 적당히 휘두르기만 해도 쉽게 잘릴 거야. 내 몸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꺼내 달라고.”
마로는 기가 막혔다.
“아니 그걸 내가 그, 그것을 하란 말이야?”
“이제 와서 뭘 망설여? 그냥 고기 몇 조각 썬다고 생각해. 아니 실제로도 그렇구나. 확실히 고기는 고기지. 크크. 이 통증도 슬슬 싫증이 나는 참이니까,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칼이나 들어.”
어쩔 수 없이 마로는 여인에게서 칼을 넘겨 받았다. 하지만 칼을 들고서도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 마로를 보며 여인은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재촉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봐. 어지러워서 이젠 말을 할 기운도 없으니까. 빨리 해 줘.”
마로는 이를 앙다물었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고르다간 칼을 번쩍 들고는 힘껏 내리쳤다. 여인의 마법이 걸린 칼은 기이할 정도로 예리해서 과도하게 기울인 마로의 힘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여인의 몸은 아주 간단하게 두 조각이 나며 떨어졌다. 마로는 여인의 몸을 벤 느낌이 너무 섬뜩하여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몽둥이를 들고 싸워 본 일은 많았지만, 이렇게 칼로 사람을 베어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로는 여인의 몸들을 모두 새장에서 끌어 냈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생명에 대한 감지력이 여인의 몸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마로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새장 밖에 늘어놓은 여인의 몸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맹인들이 마로를 방 구석에 내려 놓는 동안 사내는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새장에 가까워 질수록 사내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했다. 냉혹하다 못해 잔인하게 보이던 얼굴이 안타까움과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급기야 새장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사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오, 잘 있었소? 내가 다시 돌아왔소.”
사내의 목소리를 듣자 등을 돌리고 웅크리고 있던 새장 속의 인간이 일어섰다. 발가벗은 그의 몸은 가는 곡선이 부드러운 굴곡을 이르며 흐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본 사내는 무릎을 꿇더니 절규하듯 말했다.
“아아, 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는 내 무딘 혀끝이 원망스럽구나. 그대여, 혹시 내 말을 듣고 있다면 뒤돌아서 앞모습도 보여줄 수 없겠소?”
사내의 말에 따라 새장 속의 인물이 뒤돌아섰다. 길고 흑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였다. 묘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은 그 큰 눈으로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인의 뇌쇄적인 매력에 사내는 급기야 두 손을 움켜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인은 새장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앙가레즈. 이리 와 봐요.”
여인의 목소리를 듣자 앙가레즈는 감격하여 입을 크게 벌렸다. 비굴하다 못해 바보같은 그 모습에서는 칼레 최고의 부자이자 권력자라는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 그대가 지금 나에게 말을 한 것이오?”
“그래요. 앙가레즈. 이리 와 봐요.”
앙가레즈는 벌떡 일어서며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앙가레즈가 새장 앞으로 다가오자 쓰다듬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이리 주세요. 당신을 만져보고 싶어요.”
흐릿해진 눈으로 앙가레즈는 천천히 새장 속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다시 빛내며 들었던 손을 뒤로 숨겼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소.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여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그대와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갑자기 새장 속의 여인은 화가 난 듯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이! 당장 뒈져 버려라!”
갑자기 여인은 손을 들어 앞으로 내뻗었다. 놀랍게도 여인의 두 손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검은 독사들이 뭉쳐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앙가레즈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 앉았다. 여인은 앙가레즈에게 뱀떼를 문지르려는 듯 새장 밖으로 손을 내뻗었다.
여인의 손이 검은 철기둥을 지나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번득였다. 동시에 여인의 손에서 꿈틀거리던 뱀떼들이 묘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여인의 손에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뭉치만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분함을 이기지 못한 듯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급기야는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날에는 네 팔다리를 찢어서 돼지의 먹이로 주어버릴 테다. 네 녀석의 눈을 까지 파낸 후에 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는 장각충을 잔뜩 넣어 줄 꺼야. 네 배를 째고 창자를 잡아 빼주는 것도 좋겠군. 마지막으로 네 녀석을 긴 장대에 꿰어 매단 후에 가슴을 열고 심장을 갈가리 찢어서 먹어버릴 꺼야.”
하지만 앙가레즈는 그런 여인의 저주를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울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그대여. 제발 그런 잔혹한 말은 하지 말아요. 그대만 마음을 돌린다면 우리는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그대만 마음을 돌려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나는 이 모든 재산과 지위, 심지어는 신마저도 버릴 수 있어요. 제발!”
앙가레즈의 애걸하는 모습을 보던 여인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쳤다.
“꺼져 버려. 난 그렇게 매달리는 꼴이 가장 역겨우니까! 너 같은 인간을 보면 밟아 죽이고 싶어.”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발, 다시 생각해 봐요.”
하지만 여인은 더 듣기 싫다는 듯 대꾸도 없이 새장 가운데로 물러서더니 담요를 덮고 누워버렸다. 여인이 눕고 나서도 한참을 애걸하던 앙가레즈는 갑자기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태연한 얼굴로 눈물을 닦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방 한 편에 있는 호화로운 침대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공명석을 집어 들고 맹인 하인들에게 명령을 하였다.
“새로 들어온 자를 깨워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주도록 해라.”
그러자 하인들은 각성제를 들고 와서 마로의 코 앞에 대었다. 아까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던 마로였지만,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비로소 깨어난 체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이가 제법 많은 늙은이가 공명석 막대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로에게 일하는 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기묘한 하인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새장 속의 여인을 시중드는 일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앙가레즈는 여인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그 말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이들로만 하인을 만들었다. 하인들은 오로지 앙가레즈가 공명석을 통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앙가레즈가 거의 방을 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방에는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잠이나 생리적인 배설까지도 모두 밖에 나가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음식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끈을 잡아당기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도르래에 실어 올려 주었다. 그러면 맹인 하인들이 그 음식을 새장 속의 여인과 앙가레즈에게 차려주는 것이었다.
방에서 쓰이는 모든 도구에는 작은 홈을 만들어 놓아서 맹인들로서도 이를 만지고 각각 구별할 수 있게 하였다. 마로는 처음엔 그 표시들에 익숙지 않아 간혹 실수를 하기도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모든 물건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인들은 매일 한 번씩 교대로 방에서 나가 목욕을 하고 지검초를 배분받았지만, 워낙에 감시가 심한지라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인들은 아예 도망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골수까지 지검초의 인이 박혀서 오히려 이곳에서 쫒겨나기를 두려워 할 정도였다. 일은 바쁘거나 어려울 것이 없었기에 하인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언제나 구석진 곳에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서 지검초 통에 코를 대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바깥 세상에서 누릴 수 없던 쾌락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지금의 삶이 행복하였다.
하지만 지검초에 중독되지 않는 마로는 그들처럼 살 수는 없었다. 아버지 르로이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자꾸 마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항상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떻게 해야 방에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설령 나간다고 해도 베르가마로 어떻게 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 달여가 흘렀다.
그날도 하염없이 새장 속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앙가레즈는 침대 옆에 설치해 놓은 공명석 소리통이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앙가레즈는 소리통의 뚜껑을 열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공명석에서는 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오늘은 시 평의회 의원들이 모두 모이는 날입니다.”
“꼭 가야하나?”
“예, 이번 달 장님 새우의 매매가를 결정해야 하는…….”
“알았어. 알았어.”
앙가레즈는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상자를 닫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결국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도 새장 속의 여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공명석 막대기를 들며 말했다.
“난 지금 잠시 나갈 것이다. 그동안 너희들의 여주인을 잘 돌보도록 해라. 종소리를 잘 듣고 할 일을 놓치지 마라. 만약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사흘 동안 지검초를 주지 않을 테다.”
새장 꼭대기와 방 천정에는 공명석이 달린 종이 있어서 하인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종소리에 따라 하인들은 할 일을 하도록 연습되어 있었기에 앙가레즈가 없는 동안에도 새장 속의 여인을 돌볼 수 있었다.
앙가레즈가 나가고도 잠시 기다리던 마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앙가레즈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적다는 생각이 들자 슬그머니 방 한구석으로 갔다. 마로는 미리 방안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기에 그곳이 새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은 가구 뒤에 숨어서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해 볼 작정이었다.
마로는 오른쪽 귀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보았다. 역시 말랑말랑한 한천질의 무언가가 외이도를 틀어막고 있었다. 손가라으로 잡아 빼려고 해도 너무 깊숙이 있어 여의치 않았다. 결국 마로는 주머니에서 며칠 전에 감추어 두었던 날카로운 뼛조각을 꺼내었다. 며칠 전 음식을 먹을 때 슬그머니 챙겨두었던 것이었다.
마로는 잠시 쉼호흡을 하더니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귀에 뼛조각을 찔러 넣었다. 머리 전체가 어찔해질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일었지만, 마로는 어금니를 질끈 깨어 물며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하인들이야 아무 소리도 못 듣겠지만, 새장 속의 여인은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로는 뼈조각의 갈고리 같은 끝을 이용하여 귓속에 있는 것을 긁어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뼛조각이 귓속의 살을 고통스럽게 찢었지만, 마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주어 뿌리치듯 거칠게 잡아 빼었다. 결국 귀를 막고 있던 거품 괴물 구레를 모두 긁어 낼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워서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통증은 금세 사그라졌다. 숨 한 번 돌릴 사이에 이미 귀는 아물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 회복력이란 건 정말 굉장하군.’
문득 마로의 머릿속에 납치되기 전 야니의 다리를 치료하였던 당시가 떠올랐다.
다리가 부러진 채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는 야니를 바라보는 순간 문득 마로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새로 얻은 여섯번째 감각이 그전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었다.
마로가 느낀 것은 앞에 있는 야니의 기운 속에서 담긴 무엇이었다. 그것은 야니의 안에서 날뛰며 그 생명력을 격렬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순간 마로는 그것을 자신에게로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논리에 의한 것도 아니고 감각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전에 알았던 사실이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한 순간에 알았을 뿐이었다.
마로는 조심스레 야니 속의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옮겨보았다. 그것은 손으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코와 입으로 빨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만으로 마로의 몸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옮겨온 그것은 마로가 생각하는 머릿속 공간 어딘가에 도사렸다. 그러자 야니의 기운이 마로가 지금까지 느끼던 것과 다른 것으로 변하였다. 그 순간부터 마로는 야니를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기운과 구별할 수가 있었다.
‘내가 야니의 다리를 낫게 했던 방법이 두벡이 나를 치료했던 것과 같은 것이겠지?’
가구 뒤에 숨어서 이런 생각을 하던 마로는 문득 거품 괴물을 끄집어 낸 귀로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 이봐! 너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 거야?”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런 들켰구나.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어쩌면 상대가 넘겨짚은 것일지도 몰랐다. 마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히 가구 뒤에서 나와 자신의 의자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봐, 거울을 통해 봤다고. 넌 방금 뼛조각을 이용해서 귀에서 구레를 꺼냈잖아? 꽤 아팠을 텐데, 정말 지독한 인간이로군.”
‘아차, 방 한구석에 거울이 있었구나!’
마로는 끝까지 잡아떼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로가 잠시 망설이는 동안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난 너 같이 독한 남자가 좋아. 이봐, 이리 와 봐.”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로는 심장 근처가 아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애절하고도 안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여인은 미소를 짓더니 매혹적이고 요염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것 봐. 다 들을 수 있잖아, 어서 이리 와.”
하지만 오히려 마로는 울렁거리던 가슴이 다시 진정되는 것을 느끼고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마로가 갖고 있는 힘이 일탈적인 감정 상태마저 원래대로 회복시킨 것이었다. 마로는 자신이 방금 어떤 상황이었는지 깨닫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저 여자는?’
하지만 놀란 것은 마로 뿐이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에 이끌리던 마로가 멈추며 다시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넌 도대체 어떤 녀석이냐?”
이쯤 되면 마로도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었다.
“젠장! 도대체 너야말로 누구냐? 누군데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거야? 도대체 여긴 어디지?”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그렇게 거친 말은 아니었다. 앙가레즈에게 그토록 잔인한 저주를 퍼부을 정도의 여자가 이런 말에 새삼 당황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로의 거친 대꾸를 들은 여인은 어찌나 놀랐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마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마로로서는 여자가 어떤 표정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설득하듯 말했다.
“이봐, 너도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을 보니 좋은 꼴은 아닌 것 같은데. 이곳을 나가고 싶지 않나? 우리 협력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도와주겠다면 너를 풀어주겠어. 아니 잠깐, 설마 너도 앞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겠…….”
갑자기 여인은 황급히 마로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금만 가까이 와봐. 난 눈이 멀진 않았지만, 그렇게 멀리 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마로는 갑작스러운 여자의 다급함과 적극성에 왠지 불안해 졌다. 때문에 머뭇거릴 뿐 선뜻 다가서지 못하였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다급하다 못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걱정 마! 너를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네 말처럼 난 너의 도움을 받아야 해. 해칠 리가 있겠어? 그냥 조금만 더 앞으로 와 봐. 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오지는 않아도 되니까.”
망설이던 마로는 결국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었다.
“그래, 두 걸음 더. 그렇지. 그렇지. 좋아. 그럼 아까 구레를 꺼내었던 네 귀를 내 쪽으로 향하게 해봐.”
“구레가 뭐야?”
“네가 귓속에서 꺼낸 흐물거리는 거품 괴물의 이름이야. 어쨌든 빨리 귀를 내 쪽으로 향하게 해 봐. 앙가레즈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단 말이야.”
마로는 앙가레즈가 돌아온다는 말에 황급히 오른쪽 귀를 새장쪽으로 돌렸다. 여인은 마로의 귀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더니 나직하게 외쳤다.
“세상에, 침묵하는 자의 왕이로구나!”
마로는 알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침묵하는 자의 왕?’
여인이 갑자기 깔깔 웃었다.
“하하하! 이렇게 만나다니. 그동안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야.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낄낄 거릴 때가 아니야. 여기서 나가는 것이 더 급하지. 이봐, 어서 나를 불사자로 만들어줘.”
“뭐, 뭐라고?”
“내 죽음을 가져가 달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이 여자는 불멸의 힘에 대해서 알고 있다.’
마로는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너는 대체 누구야?”
“물론 나도 너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아.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야. 우선 여기서 나가야해. 자 빨리 나를 불사자로 만들어줘.”
하지만 마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여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넌 내 도움 없이는 절대 이곳에서 못나가. 나 역시 너의 힘이 없이는 이 새장에서 나갈 수 없고. 게다가 넌 언제든지 나에게 죽음을 되돌릴 수 있잖아. 네가 겁낼 것이 뭐가 있어?”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아직 마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두벡은 자신이 죽는 것에 급급하여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로는 왠지 여자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로 혼자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귀를 막고 있는 구레를 빼낸 것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었다기보다 주변 상황을 살피며 기회를 노리기 위함일 뿐이었다. 결국 마로는 결심했다.
‘그래, 지금 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겠지.’
“무슨 말인지 알았다.”
마로는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섰다. 가까워질수록 이글거리는 여인의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중상을 입었던 야니처럼 격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인의 몸에서도 미세한 기운의 요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로의 생각에 따라 그 떨림은 마로의 몸 안으로 옮겨 왔다. 그 순간 여자는 기절하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자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은 마로는 황급히 새장으로 다가와 철창사이로 손을 뻗었다. 여인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이봐! 괜찮아?”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에 마로는 흠칫하며 손을 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부드러운 피부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뱃속 깊은 곳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에게는 무언가 이상한 힘이 있다.’
마로는 다시 감히 여인을 만질 생각을 못하였다. 대신 마로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여인은 좀처럼 깨어나질 못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엎드렸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새장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로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봐, 이제 정신이 들었어?”
여인은 마로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급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는지 빠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네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돌아봐.”
“왜?”
“시간이 없으니까, 묻지 말고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봐. 눈이 보이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여인의 말이 옳았다. 마로는 뒤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마로는 여인의 말대로 움직였다. 여인은 마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목소리로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대로 책상 위로 올라가. 그래. 벽에 딱 붙어 서서는 손을 머리 위로 뻗어봐. 그래. 긴 칼이 하나 만져지지? 그걸 떼어와! 무조건 잡아떼려고 하지 말고 위로 들었다가 내리란 말이야. 그래. 그렇게. 자 이제 이리 돌아와.”
마로가 돌아오자, 여인은 칼을 받아 들었다.
“이봐, 지금부터 설명을 잘 들어. 난 지금부터 이 칼로 내 몸을 조각낼 거야. 한 덩이씩 네 손에 떨어뜨려 줄 테니 넌 그걸 이 새장 밖으로 끄집어내란 말이야.”
그제야 마로는 여인이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너무 끔찍한 방법이어서 내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고통스러운 방법을 쓰지 않고도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 철창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는다던가.”
“이 새장에 열쇠 따윈 없어. 문도 없어. 이건 마법으로 만든 새장으로 포획물을 안에 넣은 채로 조립된 것이란 말이야. 게다가 어떤 마법도 이 새장을 통과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 새장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야. 무지막지한 힘으로 새장을 부수거나, 몸을 조각내어서 빼내거나.”
“마, 마법?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단 말이야?”
마로의 말에 오히려 여인이 어리둥절해진 듯 멍하니 서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더니 이내 큰소리로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목을 베고 불로 태워도 죽지 않을 인간이 세상에 마법이 진짜로 있냐고 묻다니. 너 정말 웃긴 녀석이로구나. 하하하.”
다급하다고 재촉하던 그녀였으나, 웃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마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질문은 퍽이나 바보스러웠다. 하지만 여인이 너무 지나치게 웃자 마로도 슬슬 짜증이 나고 말았다.
“이봐!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던 네가 이렇게 마냥 웃고 있는 것도 나 못지않게 우스운 경우 같은데?”
퉁명스러운 마로의 목소리를 들은 여인은 갑자기 웃기를 멈추었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마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간질이는 듯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한 번 화내봐.”
마로는 순간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뭐?”
“다시 한 번 화내 보라고. 부탁이야.”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말을 듣자 마로는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 미친년아! 도대체 지금 이건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 지금 나를 갖고 노는 거야?”
하지만 여자의 반응은 더욱 희한했다. 마로의 욕설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마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바로 그렇게 말이야.”
마로는 그만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이 여자 진짜로 정신이 나간 것 아냐?’
여인은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는 마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칼을 들고 뒤로 몇 걸음 물러 섰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칼로 연거푸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철과 철이 부딪치며 귀를 찢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덧 칼이 부르르 떨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인은 재빨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더니 칼날에 발랐다. 여인의 피가 묻은 칼은 더욱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격렬하게 움직이느라 숨이 찬지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불사인이 되어도 피의 마법은 여전히 가능한 모양이군. 하지만 상처가 너무 빨리 아물어서 큰 수는 쓰지 못하겠어.”
여인은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로를 보며 말했다.
“손을 철창 사이로 뻗어봐.”
마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인의 말대로 새장 바닥에 팔을 들이 밀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은 서슴없이 자신의 오른쪽 골반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웅웅거리던 칼은 마치 진흙이라도 자르듯 너무도 쉽게 여인의 다리를 잘라내었다. 마로의 손에는 뜨거운 피와 함께 여인의 오른다리가 털썩 떨어져 내렸다. 예상못한 섬뜩한 느낌에 소스라치는 마로와는 달리 정작 다리가 잘린 당사자는 오히려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야, 이거 생각보다 짜릿한데? 아니, 뭐해? 빨리 다리를 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고.”
‘이 여자는 진짜 미쳤다.’
하지만 마로는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내뱉지 않고 여인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잡아당겼다. 여인의 가는 다리는 철창 사이를 쉽게 빠져 나왔다.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손이나 다시 뻗어. 이번에는 왼팔을 보낼 거야.”
기괴하고 끔찍한 탈출 작업은 계속 이어져서 마침내 새장 속의 여인은 두 다리와 왼팔, 허리 일부를 모두 내보낼 수 있었다.
상체 일부만 남아 바닥에 누운 여인은 기진맥진한지 들릴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젠 도저히 못 움직이겠어. 이봐, 이제부터는 네가 해주어야겠다. 칼에는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까 적당히 휘두르기만 해도 쉽게 잘릴 거야. 내 몸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꺼내 달라고.”
마로는 기가 막혔다.
“아니 그걸 내가 그, 그것을 하란 말이야?”
“이제 와서 뭘 망설여? 그냥 고기 몇 조각 썬다고 생각해. 아니 실제로도 그렇구나. 확실히 고기는 고기지. 크크. 이 통증도 슬슬 싫증이 나는 참이니까,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칼이나 들어.”
어쩔 수 없이 마로는 여인에게서 칼을 넘겨 받았다. 하지만 칼을 들고서도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 마로를 보며 여인은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재촉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봐. 어지러워서 이젠 말을 할 기운도 없으니까. 빨리 해 줘.”
마로는 이를 앙다물었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고르다간 칼을 번쩍 들고는 힘껏 내리쳤다. 여인의 마법이 걸린 칼은 기이할 정도로 예리해서 과도하게 기울인 마로의 힘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여인의 몸은 아주 간단하게 두 조각이 나며 떨어졌다. 마로는 여인의 몸을 벤 느낌이 너무 섬뜩하여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몽둥이를 들고 싸워 본 일은 많았지만, 이렇게 칼로 사람을 베어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로는 여인의 몸들을 모두 새장에서 끌어 냈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생명에 대한 감지력이 여인의 몸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마로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새장 밖에 늘어놓은 여인의 몸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