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6
5.
두벡은 당황해 하는 마로를 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불멸의 힘이란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야. 이 힘의 주인도 영 죽을 수 없는 것은 아니거든. 인간이란 것은 매 순간에 무언가를 바란다고. 사소하게는 소변을 보는 것일 수도 있고, 거창하게는 돌을 금으로 바꾸어내는 신비한 기적일 수도 있어.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불멸의 힘을 받는 순간에도 가장 원하던 것이 있겠지? 그것이 바로 불멸의 힘을 옮길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거야. 불멸의 힘을 얻는 순간에 가장 원하던 것, 그것을 만족시키면 그 힘은 주인에게서 빠져 나가서 가장 가까운 불사자에게 옮겨 가는 거지.”
두벡은 갑자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나 같은 경우는 한창 누군가와 놀던 참에 그 힘을 맞아 들였어.”
“놀다뇨?”
“뭐 내가 종종 즐기던 것인데, 즉석에서 주고 받으며 함께 한 행씩 시를 완성시키는 놀이야. 거의 시가 막바지에 이르러 상대가 마지막 행을 말하며 마무리를 지을 참이었는데, 그 때 벼락같이 불멸의 힘이 쏟아져 들어왔단 말이야. 물론 아까 말했듯이 미리 계획했던 일이긴 한데,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져 잠시 딴 짓을 하던 차에 닥친 거지. 너도 겪어봐야 알겠지만, 처음 그 힘이 들어왔을 때는 몽롱해지면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 결국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지. 그래서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이 내 힘을 잃게 되는 열쇠가 된 거야.”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네 스스로 지은 것이어야 하니까.”
마로는 불평하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시라곤 들어본 일도, 지어본 일도 없어요. 아니 시가 다 뭡니까? 전 간신히 글씨나 읽고 쓸 줄 아는 녀석이란 말이에요.”
두벡은 다시 광기가 뻗치는지 갑자기 노기 섞인 고함을 질렀다.
“시를 모르다니! 시를 모르고, 또 예술을 모르고서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 이 짐승같은 작자야, 예술이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나?”
모욕적인 말에 마로는 은근히 화가 나 대꾸했다.
“저도 그림이나 악기 연주는 나름대로 즐길 줄 압니다.”
두벡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호오 그래? 맞아. 그거야.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 예술은 한 곳으로 통하게 마련이야. 굇세 랜번 역시 글을 몰랐지만, 훌륭한 시를 많이 남겼지. 얼마나 많이 배웠냐는 상관없어. 지식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예술의 눈을 가리기도 하니까. 자, 내 시를 듣고,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어울리는 말을 생각해 봐.”
두벡은 잠시 말을 끊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시를 읊기 시작했다.
잔혹한 신기루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피로한 나그네의 길은 멀기도 하다.
열쇠조차 사라져 모두에게 잊힌 감옥의 죄수는
암흑 속에서 흐느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향하고,
몽당손을 들어 별을 움키지만,
세상은 아무 것도 내 주지 않고,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니,
끝없는 어둠 속에서 어떤 길잡이를 만나야,
지치고 상처 입은 몸이 쉴 곳을 찾을 텐가?
아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찾을 뿐.
누구도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이르러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벡은 말을 멈추더니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마로에게 물어왔다.
“어때? 이 뒤에 이어 뭐 생각나는 말 있나?”
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이걸 다 말이라고 하나?’
마로로서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두벡은 그런 마로를 보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서 내 시가 멈추었어. 마지막 한 소절을 상대가 말하는 순간 그 힘이 몸에 들어온 것이지.”
마로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모두 미친 짓 같아요. 제가 이렇게 살아난 것을 때문에 아저씨의 이야기를 믿으려고 하긴 하는데, 도대체 이게 다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게다가 나보고 시를 지으라니.”
“하여튼 무척 중요한 일이야. 이걸 해내지 못하면 너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그럼 할 수 없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시를 짓던 그 때처럼, 나와 이 시를 한 구절씩 주고 받는 거야. 내가 먼저 주면 네가 받는 셈이지. 그러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네가 무언가를 지어내야지.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같다 붙이는 것은 안 돼. 나를 만족시킬 만한 것을 만들어 내야지.”
마로는 머리를 싸매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벡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읽었던 시를 외워라. 시의 기본은 암송이야. 나랑 주고받기 위해서도 외워야하지만, 마지막 구절을 짓기 위해서라도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어야 해. 연거푸 되뇌면서 그 심상과 감정을 머릿속에 익숙하게 만드는 거지. 이해하는 내용이 자신의 감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멋진 시가 나오게 되는 거야. 자, 따라 해라. 잔혹한 신기루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잔혹한 신기루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마로의 기억력은 뛰어난 편이어서 금세 두벡의 시를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력과 시를 짓는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다.
“……스스로 이르러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음. 이젠 편하게 쉴 수 있다?”
마로의 글귀를 들은 두벡은 만족하기는 커녕 벌컥 화를 내었다.
“그게 뭐야! 그따위 것을 어떻게 시라고 할 수 있어? 네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잖아. 그렇다고 시적인 재치를 갖춘 것도 아니고. 스스로 느끼지 않는 것은 상대도 느끼지 않는단 말이야. 다시 해봐!”
하지만 평생 시를 읽어본 일이 없는 마로가 그럴듯한 글귀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엇다. 한참이 지나자 두벡은 화를 낼 힘도 잃어버렸는지, 눈을 감고 한숨을 쉬고 말았다. 마로 역시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두벡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너 그림이나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고 했지?”
마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왜요?”
“자아, 시짓는 것은 잠깐 잊어버리자. 네가 악기를 연주할 때, 또는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드나?”
“무슨 생각을 하긴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하지만 두벡은 웬일로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좀 성의 있게 대답해 봐. 보통 어떤 느낌이 들어?”
마로는 진지한 두벡의 말투에 더 이상 빈정거릴 수 없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였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선율이나 박자가 오르내리는 것에 내 몸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흠, 욕조를 흔들면 물이 출렁거리잖아요? 그 물속에 앉아서 같이 흔들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바람에 흔들거리는 그네를 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럼 그림을 그릴 때는?”
“흐음, 이건 좀 어려운데……. 내가 이미 머릿속으로 보고 있는 것을 빈종이 위에 두고 테두리를 두른다고 할 수 있으려나?”
두벡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래, 그거야. 시도 마찬가지야. 가락이나 박자를 손으로 만질 수 있나? 하지만 넌 그걸 느끼고 그것에 맞추어 손으로 뽑아내잖아. 시가 음악과 다른 점은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뿐이야. 꼭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돼. 네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진솔하게 표현하는 거야. 기교나 운율은 생각하지마. 어차피 우리가 짓는 시에 그런 것 따위는 없어. 자 시의 내용을 네 눈으로, 아니 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하고 다시 되새겨봐. 뭔가 숨은 뜻이 있을 거라고 지레 겁먹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단어와 문장의 뜻 그대로를 느껴도 좋아. 오히려 지금 넌 앞이 보이질 않으니 더 잘 볼 수 있을 거야. 자 처음으로 돌아가자. 자 숨을 편안하게 쉬어 봐. 네 심장을 점점 느리게 뛰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숨을 쉬는 거지. 그렇지. 그렇지.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고 있지. 그 맑아진 공간 안에서 어떤 그림이 보이잖아. 가만히 보니 신기루를 보며 하염없이 사막을 걷는 나그네로군…….”
두벡은 천천히 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로는 두벡에 말에 따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두벡의 말마따나 어둠 속에서는 오히려 더 머릿속에 장면들이 잘 떠오르고 있었다. 어떤 나그네가 사막을 걷고 있고, 죄수는 아무도 없는 감옥에 홀로 갇혀 있다. 두벡이 조심스럽지만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자, 어떤 느낌이 들어? 정답이란 것은 없어. 그냥 네 생각을 말해봐.”
두벡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뭔가 희한한 힘이 있었다. 마로는 긴장이 풀리면서 두벡의 말에 따라 머릿속의 장면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외로운 것 같아요.”
“그래. 그럴 거야. 사막을 걷는 나그네나, 감옥에 갇힌 죄수나 모두 피곤하고 외롭지. 그럼 그 다음은 뭘까? 생각해봐.”
마로의 머릿속에는 시의 내용을 따라 밤하늘을 향해 애절하게 뻗은 손이 보였다. 이번에는 두벡이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로의 입이 먼저 열렸다.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지만 가질 수 없어요. 아니 애당초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아니 도와줄 수도 없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걸 깨닫는 순간 그의 눈에는 뭐가 보이지?”
“별보다 훨씬 밝은 것, 저 멀리 떠 있는 달이요.
“달! 그래, 바로 달이야. 달은 모두가 쉬는 밤에도 쉴 수가 없고 외롭지. 그와 마찬가지야. 아니, 그렇지 않나? 너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말해보지 그래?”
마로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약간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젠 쉴 수 있어요. 잠 못 들던 달도 이젠 잠들어요.”
“하하하하!”
갑자기 두벡이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마로는 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나른한 것이 마치 꿈을 꾸던 것 같았다.
“상당히 잘하는데? 최면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바로 효과를 보이기는 어려운데……. 그만하면 넌 감수성이 꽤 좋은 편이야. 하하하.”
“최면이라뇨?"
“뭐 그런 게 있어. 어쨌든 넌 네 마음 깊은 곳에서 멋진 구절을 찾아냈어.”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네 입으로 ‘잠 못 들던 달이 잠든다’고 했잖아.”
그제야 마로는 그것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두벡은 흥분한 목소리로 마로에게 말을 건넸다.
“자 이제 시를 읊어보자. 잔혹한…….”
“잠깐만요.”
“왜?”
“만약 이 시를 읊어서 아저씨 몸에서 그 힘이 빠져나가게 된다면 아저씨는 바로 죽게 되는 것입니까?”
두벡은 마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래. 그래. 맞아.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군. 먼저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을 설명해 주어야겠네. 자 잘 들어. 내가 죽으면 듣고 싶어도 다시 들을 수 없을 테니.”
마로는 두벡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자 내 힘을 가져가면 주변의 생물체를, 생명을 느낄 수 있다고 했지? 사실 이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도 의외로 많은 생명이 살고 있어. 특히 네 뒤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호수와 폭포가 있는데, 그 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생명이 살고 있지. 동굴조개부터 장님새우까지…….”
“장님새우요?”
장님새우라면 더러워진 제헨멘강 대신 베르가마의 물 공급원이 된 센만 강에서만 잡히는 새우였다. 맛이 좋지만, 워낙에 귀해 비싸게 팔리는 것이었다.
“그래, 센만 강에서만 잡힌다는 장님 새우. 바로 여기에 있는 물줄기는 땅 속 깊은 곳을 흘러 센만 강으로 이어진다고. 사실 이 곳은 내가 처음 발견한 곳이야. 센만 강의 원류가 어디일까 찾다가 발견한 곳이지. 원래 저 위쪽을 허물어 버리기 전에는 좁은 틈으로 땅 속의 호수를 내려 볼 수 있는 곳이었어. 이 지저호수를 탐사하기 위해 밧줄을 타고 내려왔던 사람도 있었지. 그런데 마침 밧줄이 끊어져서 그자가 떨어졌단 말이야. 뭐 당시로는 감히 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지. 밖에서 보는 이 지저호수는 시커멓게 입을 벌린 무서운 곳이니까. 그런데 며칠 후에 떨어졌던 자의 시체가 수많은 장님새우들을 매단 체 센만 강 상류에서 발견되었어. 하하. 내 생각이 옳았던 것이지. 이 지하호수는 센만 강의 수원지였다는 거야.”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두벡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 대었다. 마로는 두벡과 대화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물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자,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나? 넌 여기에 있는 지하 폭포에 몸을 던져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거야.”
두벡의 말을 들은 마로는 궁금증이 들어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벡의 말이 더 빨랐다.
“아, 물론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런 방법은 무리겠지. 여기서 센망 강까지 가는 물줄기는 공기도 없는 땅 깊은 곳을 통해 며칠이나 흘러야 할 테니, 아가미라도 없는 이상 금세 숨이 막혀 죽을 거야. 설령 아가미가 있는 인간이 있다고 해도 성공확률은 거의 없어. 저 급류 속에 얼마나 많은 바위들이 솟아있을 것인가? 몇 분 못가서 머리가 깨지고 말겠지. 하지만 불멸의 힘을 가진 이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처음에는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뜨면 햇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아 참. 너는 눈이 멀었다고 했지.”
마로는 곰곰이 자신이 동굴을 빠져나갈 방법을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궁금한 점이 들었다.
“왜 아저씨는 이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죠? 이젠 아저씨도 갈 수 있잖아요?”
“아니, 난 나가지 않을 거야. 나가봤자 내 팔다리는 찾을 수 없어. 나를 여기에 가둘 당시 아드로 녀석이 부하들을 통해 전한 말에 따르면 내 팔다리는 납물에 녹여 굳혀서는 멀리 깊은 바다에 버려졌을 거야. 이런 몸으로 무얼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무엇보다 난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물론 나를 이렇게 만든 아드로 개자식에게 죽음을 다시 되돌려 주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어차피 지금 내 몸으로는 성공할 수도 없고, 그를 위해 아등바등할 의지도 없어. 난 오로지 모든 것을 잊고 싶을……. 아니다. 가만있어 보자, 이런 방법은 어떨까?”
조근 조근하게 이야기하던 두벡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소란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다급한 말투로 마로에게 물어왔다.
“네 녀석은 어디 출신이냐? 혹시 베르가마에 가 본 일이 있나?”
“가 본 정도가 아니라, 전 배꼽거리에서 살다가 왔어요.”
“허허, 이거 정말 신이나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는 거지? 시구절에, 배꼽거리까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두벡은 다시 마로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한 가지 부탁을 더 해야겠다.”
마로는 왠지 불안해졌다.
“뭡니까?”
“아드로 그 개자식에게 죽음을 되돌려줘.”
마로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잠시 후에 두벡이 말하던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소리쳤다.
“지금 제 정신입니까? 저보고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를 죽이란 말이에요?”
“하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아니야. 특히 네가 내 힘을 갖게 되면 아드로 따위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가까운 거리에만 있다면 네 생각만으로 아드로를 죽일 수 있어.”
두벡의 말이 이어졌다.
“너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나지? 이 불사의 힘을 가진 이는 다른 사람의 죽음까지도 빼앗거나 되돌릴 수 있다는 것 말이야. 이건 단숨에 되는 일이지. 지금 너만 해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에 떨어질 때의 상태로 한 순간에 되돌려 놓을 수 있어. 이건 내가 방법을 설명해 줄 필요도 없어. 네가 내 힘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 마치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갓난아기가 젖을 빠는 것처럼 말이야.
다만 죽음을 되돌리려면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야 해. 대략 손을 뻗어서 만질 수 있는 거리 정도? 그래, 그 정도 될 꺼야. 물론 이것도 네가 내 힘을 가지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마로는 답답하여 소리쳤다.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황제에게 그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접근할 수 있어. 내 말대로 하면 돼.”
두벡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벡의 설명을 듣던 마로는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되나?”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아저씨가 알고 있던 때로부터 벌써 몇 십 년이 흘렀다구요.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누가 압니까?”
“아니 아직 그대로일 거야. 그렇게 쉽게 바뀔 만한 일이 아니야.”
마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두벡 역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참이나 조용히 있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할 일은 모두 정리하였다. 그럼 이젠 끝내야지. 후우, 오랫동안 기다리던 것이지만, 막상 모든 것을 끝낸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한데?”
두벡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천천히 시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경망스럽고 산만한 말투와는 달리 경건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두벡이 앞구절을 읊으면 마로가 답하였다. 결국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다.
“스스로 이르러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두벡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그 떨림에는 오로지 기쁨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로 역시 긴장하였는지 마지막 구절을 읊는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잠들지 못하던 달이 홀로 잠든다.”
그 순간 두벡의 눈을 감은 두벡의 눈꼬리에서 말간 물기가 흘러내렸다. 두벡은 나직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잠들지 못하던 달이 홀로 잠들 거야. 정말 멋진 말이로군. 잘 지었어.”
두벡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드는가 싶더니, 별안간 큰소리로 쿨럭 거리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잘린 팔다리나 배의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마로는 두벡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괜찮아요?”
하지만 마로도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욱이 두벡에게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한 끝에, 기침소리도 점차 잠잠해지더니 마침내 두벡은 죽고 말았다. 이제 마로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멍하니 혼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무언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잖아.’
마로는 두벡의 시신을 더듬어 보았다. 미루어진 죽음이 한꺼번에 닥친 시신은 그 짧은 순간에도 어느새 부패해 있었다. 마로는 소스라치며 손을 떼었다.
‘벌써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아닌 듯싶었다. 분명히 두벡은 힘이 들어올 때 정신이 몽롱해 진다고 하였다.
‘혹시 난 속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두벡대신 이곳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난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왜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 후로도 한참이나 아무 일 없이 시간이 지나자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마로는 화가 나기보다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문득 자신이 알던 사람들을 모두 생각하였다. 대부분이 자신을 이용하려 들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와 사리사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의심이 들었다.
‘아니, 사리사도 나를 정말 진정으로 대했던 것일까? 그냥 심심풀이로나, 자기 필요 때문에 대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로는 자신의 의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대할 때의 웃는 얼굴이나, 잘못했을 때 실망하는 얼굴이나 모두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마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리사의 표정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황궁으로 떠나기 전 골목에서 보았던 노기와 슬픔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언제 떠올려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 표정을 생각하자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겠지.’
그 때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로의 머릿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어찔해진 마로는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마로의 머릿속에 들어온 그것은 이리저리 헤집으며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황홀하면서도 구역질이 치미는 묘한 느낌이었다. 마로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현실을 느끼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뭔가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깜짝 놀란 마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말고도 뭔가 또 다른 감각이 하나 느껴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요하기만 하던 이 동굴에 뭔가 미묘한 기운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로는 그 중에 한 가지를 찾아 손을 뻗어 보았다. 축축하고 미끄덩한 작은 것이 손에 만져졌다. 마로는 소스라치며 만진 것을 내던졌다.
“뭐야?”
너무 짧은 순간이라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꿈틀거리는 느낌이 생물체의 그것과 같았다. 문득 마로의 머릿속에서 두벡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불멸의 힘을 갖고 있는 이는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거든.’
마로는 주변에서 움직거리는 수많은 느낌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래. 난 지금 주변의 생명체를 느끼고 있는 것이구나.’
이제는 두벡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의 몸과 정신이 사방으로 확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그 느낌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득 마로는 요란하게 들리는 물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섞인 축축한 공기가 이미 폭포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새로 획득한 여섯 번째 감각이 물 속에 사는 생물들의 흔적을 따라 그 물이 흐르는 길까지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마로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더듬으며 폭포 앞까지 나아갔다. 어느덧 땅이 끝나는 곳에서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거세게 튀기고 있었다. 이 지하의 급류는 매우 거칠었다.
손을 담가 물의 세기를 가늠해 본 마로는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두벡이 말한 그 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직 마로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마로는 결국 급류 속으로 뛰어내렸다.
처음 마로가 느낀 것은 순식간에 몸을 뻣뻣하게 할 정도의 냉기였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햇빛을 받지 못한 물은 어찌나 차가운지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흐르는 급류 속에서는 몸조차도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지만, 미리 담아둔 호흡이 한계에 달하자 결국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려워진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휘저으며 위로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물줄기가 낮은 바위 틈 속으로 들어선 후라 모두 물이 차 있을 뿐 공기가 있는 천장 따위는 없었다. 수면이 이미 뾰족한 돌로 된 천장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마로는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것도 잊고 공포심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연거푸 물을 들이키고서는 폐에 물이 가득 차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마로의 몸은 물살에 계속 휩쓸려 갔다. 중간 중간 물 속의 뾰족한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몸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깨지기도 했지만, 역시 놀라운 회복력으로 아물곤 했다. 하지만 회복력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마로가 지니고 있는 신비한 힘은 익사 상태에서도 그 주인을 회복시켰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의 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로는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익사의 고통과 공포심을 반복해 느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물론 마로로서는 정신을 차릴 때 마다 고통스러워하느라고 날짜를 헤아릴 겨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길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땅 속의 물길도 마찬가지다.
두벡은 당황해 하는 마로를 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불멸의 힘이란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야. 이 힘의 주인도 영 죽을 수 없는 것은 아니거든. 인간이란 것은 매 순간에 무언가를 바란다고. 사소하게는 소변을 보는 것일 수도 있고, 거창하게는 돌을 금으로 바꾸어내는 신비한 기적일 수도 있어.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불멸의 힘을 받는 순간에도 가장 원하던 것이 있겠지? 그것이 바로 불멸의 힘을 옮길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거야. 불멸의 힘을 얻는 순간에 가장 원하던 것, 그것을 만족시키면 그 힘은 주인에게서 빠져 나가서 가장 가까운 불사자에게 옮겨 가는 거지.”
두벡은 갑자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나 같은 경우는 한창 누군가와 놀던 참에 그 힘을 맞아 들였어.”
“놀다뇨?”
“뭐 내가 종종 즐기던 것인데, 즉석에서 주고 받으며 함께 한 행씩 시를 완성시키는 놀이야. 거의 시가 막바지에 이르러 상대가 마지막 행을 말하며 마무리를 지을 참이었는데, 그 때 벼락같이 불멸의 힘이 쏟아져 들어왔단 말이야. 물론 아까 말했듯이 미리 계획했던 일이긴 한데,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져 잠시 딴 짓을 하던 차에 닥친 거지. 너도 겪어봐야 알겠지만, 처음 그 힘이 들어왔을 때는 몽롱해지면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 결국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지. 그래서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이 내 힘을 잃게 되는 열쇠가 된 거야.”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네 스스로 지은 것이어야 하니까.”
마로는 불평하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시라곤 들어본 일도, 지어본 일도 없어요. 아니 시가 다 뭡니까? 전 간신히 글씨나 읽고 쓸 줄 아는 녀석이란 말이에요.”
두벡은 다시 광기가 뻗치는지 갑자기 노기 섞인 고함을 질렀다.
“시를 모르다니! 시를 모르고, 또 예술을 모르고서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 이 짐승같은 작자야, 예술이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나?”
모욕적인 말에 마로는 은근히 화가 나 대꾸했다.
“저도 그림이나 악기 연주는 나름대로 즐길 줄 압니다.”
두벡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호오 그래? 맞아. 그거야.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 예술은 한 곳으로 통하게 마련이야. 굇세 랜번 역시 글을 몰랐지만, 훌륭한 시를 많이 남겼지. 얼마나 많이 배웠냐는 상관없어. 지식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예술의 눈을 가리기도 하니까. 자, 내 시를 듣고,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어울리는 말을 생각해 봐.”
두벡은 잠시 말을 끊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시를 읊기 시작했다.
잔혹한 신기루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피로한 나그네의 길은 멀기도 하다.
열쇠조차 사라져 모두에게 잊힌 감옥의 죄수는
암흑 속에서 흐느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향하고,
몽당손을 들어 별을 움키지만,
세상은 아무 것도 내 주지 않고,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니,
끝없는 어둠 속에서 어떤 길잡이를 만나야,
지치고 상처 입은 몸이 쉴 곳을 찾을 텐가?
아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찾을 뿐.
누구도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이르러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벡은 말을 멈추더니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마로에게 물어왔다.
“어때? 이 뒤에 이어 뭐 생각나는 말 있나?”
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이걸 다 말이라고 하나?’
마로로서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두벡은 그런 마로를 보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서 내 시가 멈추었어. 마지막 한 소절을 상대가 말하는 순간 그 힘이 몸에 들어온 것이지.”
마로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모두 미친 짓 같아요. 제가 이렇게 살아난 것을 때문에 아저씨의 이야기를 믿으려고 하긴 하는데, 도대체 이게 다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게다가 나보고 시를 지으라니.”
“하여튼 무척 중요한 일이야. 이걸 해내지 못하면 너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그럼 할 수 없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시를 짓던 그 때처럼, 나와 이 시를 한 구절씩 주고 받는 거야. 내가 먼저 주면 네가 받는 셈이지. 그러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네가 무언가를 지어내야지.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같다 붙이는 것은 안 돼. 나를 만족시킬 만한 것을 만들어 내야지.”
마로는 머리를 싸매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벡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읽었던 시를 외워라. 시의 기본은 암송이야. 나랑 주고받기 위해서도 외워야하지만, 마지막 구절을 짓기 위해서라도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어야 해. 연거푸 되뇌면서 그 심상과 감정을 머릿속에 익숙하게 만드는 거지. 이해하는 내용이 자신의 감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멋진 시가 나오게 되는 거야. 자, 따라 해라. 잔혹한 신기루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잔혹한 신기루가 지배하는 사막에서…….”
마로의 기억력은 뛰어난 편이어서 금세 두벡의 시를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력과 시를 짓는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다.
“……스스로 이르러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음. 이젠 편하게 쉴 수 있다?”
마로의 글귀를 들은 두벡은 만족하기는 커녕 벌컥 화를 내었다.
“그게 뭐야! 그따위 것을 어떻게 시라고 할 수 있어? 네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잖아. 그렇다고 시적인 재치를 갖춘 것도 아니고. 스스로 느끼지 않는 것은 상대도 느끼지 않는단 말이야. 다시 해봐!”
하지만 평생 시를 읽어본 일이 없는 마로가 그럴듯한 글귀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엇다. 한참이 지나자 두벡은 화를 낼 힘도 잃어버렸는지, 눈을 감고 한숨을 쉬고 말았다. 마로 역시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두벡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너 그림이나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고 했지?”
마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왜요?”
“자아, 시짓는 것은 잠깐 잊어버리자. 네가 악기를 연주할 때, 또는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드나?”
“무슨 생각을 하긴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하지만 두벡은 웬일로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좀 성의 있게 대답해 봐. 보통 어떤 느낌이 들어?”
마로는 진지한 두벡의 말투에 더 이상 빈정거릴 수 없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였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선율이나 박자가 오르내리는 것에 내 몸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흠, 욕조를 흔들면 물이 출렁거리잖아요? 그 물속에 앉아서 같이 흔들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바람에 흔들거리는 그네를 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럼 그림을 그릴 때는?”
“흐음, 이건 좀 어려운데……. 내가 이미 머릿속으로 보고 있는 것을 빈종이 위에 두고 테두리를 두른다고 할 수 있으려나?”
두벡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래, 그거야. 시도 마찬가지야. 가락이나 박자를 손으로 만질 수 있나? 하지만 넌 그걸 느끼고 그것에 맞추어 손으로 뽑아내잖아. 시가 음악과 다른 점은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뿐이야. 꼭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돼. 네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진솔하게 표현하는 거야. 기교나 운율은 생각하지마. 어차피 우리가 짓는 시에 그런 것 따위는 없어. 자 시의 내용을 네 눈으로, 아니 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하고 다시 되새겨봐. 뭔가 숨은 뜻이 있을 거라고 지레 겁먹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단어와 문장의 뜻 그대로를 느껴도 좋아. 오히려 지금 넌 앞이 보이질 않으니 더 잘 볼 수 있을 거야. 자 처음으로 돌아가자. 자 숨을 편안하게 쉬어 봐. 네 심장을 점점 느리게 뛰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숨을 쉬는 거지. 그렇지. 그렇지.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고 있지. 그 맑아진 공간 안에서 어떤 그림이 보이잖아. 가만히 보니 신기루를 보며 하염없이 사막을 걷는 나그네로군…….”
두벡은 천천히 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로는 두벡에 말에 따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두벡의 말마따나 어둠 속에서는 오히려 더 머릿속에 장면들이 잘 떠오르고 있었다. 어떤 나그네가 사막을 걷고 있고, 죄수는 아무도 없는 감옥에 홀로 갇혀 있다. 두벡이 조심스럽지만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자, 어떤 느낌이 들어? 정답이란 것은 없어. 그냥 네 생각을 말해봐.”
두벡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뭔가 희한한 힘이 있었다. 마로는 긴장이 풀리면서 두벡의 말에 따라 머릿속의 장면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외로운 것 같아요.”
“그래. 그럴 거야. 사막을 걷는 나그네나, 감옥에 갇힌 죄수나 모두 피곤하고 외롭지. 그럼 그 다음은 뭘까? 생각해봐.”
마로의 머릿속에는 시의 내용을 따라 밤하늘을 향해 애절하게 뻗은 손이 보였다. 이번에는 두벡이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로의 입이 먼저 열렸다.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지만 가질 수 없어요. 아니 애당초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아니 도와줄 수도 없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걸 깨닫는 순간 그의 눈에는 뭐가 보이지?”
“별보다 훨씬 밝은 것, 저 멀리 떠 있는 달이요.
“달! 그래, 바로 달이야. 달은 모두가 쉬는 밤에도 쉴 수가 없고 외롭지. 그와 마찬가지야. 아니, 그렇지 않나? 너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말해보지 그래?”
마로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약간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젠 쉴 수 있어요. 잠 못 들던 달도 이젠 잠들어요.”
“하하하하!”
갑자기 두벡이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마로는 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나른한 것이 마치 꿈을 꾸던 것 같았다.
“상당히 잘하는데? 최면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바로 효과를 보이기는 어려운데……. 그만하면 넌 감수성이 꽤 좋은 편이야. 하하하.”
“최면이라뇨?"
“뭐 그런 게 있어. 어쨌든 넌 네 마음 깊은 곳에서 멋진 구절을 찾아냈어.”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네 입으로 ‘잠 못 들던 달이 잠든다’고 했잖아.”
그제야 마로는 그것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두벡은 흥분한 목소리로 마로에게 말을 건넸다.
“자 이제 시를 읊어보자. 잔혹한…….”
“잠깐만요.”
“왜?”
“만약 이 시를 읊어서 아저씨 몸에서 그 힘이 빠져나가게 된다면 아저씨는 바로 죽게 되는 것입니까?”
두벡은 마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래. 그래. 맞아.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군. 먼저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을 설명해 주어야겠네. 자 잘 들어. 내가 죽으면 듣고 싶어도 다시 들을 수 없을 테니.”
마로는 두벡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자 내 힘을 가져가면 주변의 생물체를, 생명을 느낄 수 있다고 했지? 사실 이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도 의외로 많은 생명이 살고 있어. 특히 네 뒤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호수와 폭포가 있는데, 그 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생명이 살고 있지. 동굴조개부터 장님새우까지…….”
“장님새우요?”
장님새우라면 더러워진 제헨멘강 대신 베르가마의 물 공급원이 된 센만 강에서만 잡히는 새우였다. 맛이 좋지만, 워낙에 귀해 비싸게 팔리는 것이었다.
“그래, 센만 강에서만 잡힌다는 장님 새우. 바로 여기에 있는 물줄기는 땅 속 깊은 곳을 흘러 센만 강으로 이어진다고. 사실 이 곳은 내가 처음 발견한 곳이야. 센만 강의 원류가 어디일까 찾다가 발견한 곳이지. 원래 저 위쪽을 허물어 버리기 전에는 좁은 틈으로 땅 속의 호수를 내려 볼 수 있는 곳이었어. 이 지저호수를 탐사하기 위해 밧줄을 타고 내려왔던 사람도 있었지. 그런데 마침 밧줄이 끊어져서 그자가 떨어졌단 말이야. 뭐 당시로는 감히 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지. 밖에서 보는 이 지저호수는 시커멓게 입을 벌린 무서운 곳이니까. 그런데 며칠 후에 떨어졌던 자의 시체가 수많은 장님새우들을 매단 체 센만 강 상류에서 발견되었어. 하하. 내 생각이 옳았던 것이지. 이 지하호수는 센만 강의 수원지였다는 거야.”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두벡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 대었다. 마로는 두벡과 대화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물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자,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나? 넌 여기에 있는 지하 폭포에 몸을 던져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거야.”
두벡의 말을 들은 마로는 궁금증이 들어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벡의 말이 더 빨랐다.
“아, 물론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런 방법은 무리겠지. 여기서 센망 강까지 가는 물줄기는 공기도 없는 땅 깊은 곳을 통해 며칠이나 흘러야 할 테니, 아가미라도 없는 이상 금세 숨이 막혀 죽을 거야. 설령 아가미가 있는 인간이 있다고 해도 성공확률은 거의 없어. 저 급류 속에 얼마나 많은 바위들이 솟아있을 것인가? 몇 분 못가서 머리가 깨지고 말겠지. 하지만 불멸의 힘을 가진 이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처음에는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뜨면 햇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아 참. 너는 눈이 멀었다고 했지.”
마로는 곰곰이 자신이 동굴을 빠져나갈 방법을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궁금한 점이 들었다.
“왜 아저씨는 이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죠? 이젠 아저씨도 갈 수 있잖아요?”
“아니, 난 나가지 않을 거야. 나가봤자 내 팔다리는 찾을 수 없어. 나를 여기에 가둘 당시 아드로 녀석이 부하들을 통해 전한 말에 따르면 내 팔다리는 납물에 녹여 굳혀서는 멀리 깊은 바다에 버려졌을 거야. 이런 몸으로 무얼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무엇보다 난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물론 나를 이렇게 만든 아드로 개자식에게 죽음을 다시 되돌려 주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어차피 지금 내 몸으로는 성공할 수도 없고, 그를 위해 아등바등할 의지도 없어. 난 오로지 모든 것을 잊고 싶을……. 아니다. 가만있어 보자, 이런 방법은 어떨까?”
조근 조근하게 이야기하던 두벡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소란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다급한 말투로 마로에게 물어왔다.
“네 녀석은 어디 출신이냐? 혹시 베르가마에 가 본 일이 있나?”
“가 본 정도가 아니라, 전 배꼽거리에서 살다가 왔어요.”
“허허, 이거 정말 신이나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는 거지? 시구절에, 배꼽거리까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두벡은 다시 마로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한 가지 부탁을 더 해야겠다.”
마로는 왠지 불안해졌다.
“뭡니까?”
“아드로 그 개자식에게 죽음을 되돌려줘.”
마로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잠시 후에 두벡이 말하던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소리쳤다.
“지금 제 정신입니까? 저보고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를 죽이란 말이에요?”
“하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아니야. 특히 네가 내 힘을 갖게 되면 아드로 따위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가까운 거리에만 있다면 네 생각만으로 아드로를 죽일 수 있어.”
두벡의 말이 이어졌다.
“너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나지? 이 불사의 힘을 가진 이는 다른 사람의 죽음까지도 빼앗거나 되돌릴 수 있다는 것 말이야. 이건 단숨에 되는 일이지. 지금 너만 해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에 떨어질 때의 상태로 한 순간에 되돌려 놓을 수 있어. 이건 내가 방법을 설명해 줄 필요도 없어. 네가 내 힘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 마치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갓난아기가 젖을 빠는 것처럼 말이야.
다만 죽음을 되돌리려면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야 해. 대략 손을 뻗어서 만질 수 있는 거리 정도? 그래, 그 정도 될 꺼야. 물론 이것도 네가 내 힘을 가지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마로는 답답하여 소리쳤다.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황제에게 그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접근할 수 있어. 내 말대로 하면 돼.”
두벡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벡의 설명을 듣던 마로는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되나?”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아저씨가 알고 있던 때로부터 벌써 몇 십 년이 흘렀다구요.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누가 압니까?”
“아니 아직 그대로일 거야. 그렇게 쉽게 바뀔 만한 일이 아니야.”
마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두벡 역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참이나 조용히 있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할 일은 모두 정리하였다. 그럼 이젠 끝내야지. 후우, 오랫동안 기다리던 것이지만, 막상 모든 것을 끝낸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한데?”
두벡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천천히 시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경망스럽고 산만한 말투와는 달리 경건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두벡이 앞구절을 읊으면 마로가 답하였다. 결국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다.
“스스로 이르러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두벡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그 떨림에는 오로지 기쁨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로 역시 긴장하였는지 마지막 구절을 읊는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잠들지 못하던 달이 홀로 잠든다.”
그 순간 두벡의 눈을 감은 두벡의 눈꼬리에서 말간 물기가 흘러내렸다. 두벡은 나직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잠들지 못하던 달이 홀로 잠들 거야. 정말 멋진 말이로군. 잘 지었어.”
두벡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드는가 싶더니, 별안간 큰소리로 쿨럭 거리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잘린 팔다리나 배의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마로는 두벡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괜찮아요?”
하지만 마로도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욱이 두벡에게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한 끝에, 기침소리도 점차 잠잠해지더니 마침내 두벡은 죽고 말았다. 이제 마로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멍하니 혼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무언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잖아.’
마로는 두벡의 시신을 더듬어 보았다. 미루어진 죽음이 한꺼번에 닥친 시신은 그 짧은 순간에도 어느새 부패해 있었다. 마로는 소스라치며 손을 떼었다.
‘벌써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아닌 듯싶었다. 분명히 두벡은 힘이 들어올 때 정신이 몽롱해 진다고 하였다.
‘혹시 난 속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두벡대신 이곳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난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왜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 후로도 한참이나 아무 일 없이 시간이 지나자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마로는 화가 나기보다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문득 자신이 알던 사람들을 모두 생각하였다. 대부분이 자신을 이용하려 들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와 사리사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의심이 들었다.
‘아니, 사리사도 나를 정말 진정으로 대했던 것일까? 그냥 심심풀이로나, 자기 필요 때문에 대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로는 자신의 의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대할 때의 웃는 얼굴이나, 잘못했을 때 실망하는 얼굴이나 모두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마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리사의 표정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황궁으로 떠나기 전 골목에서 보았던 노기와 슬픔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언제 떠올려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 표정을 생각하자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겠지.’
그 때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로의 머릿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어찔해진 마로는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마로의 머릿속에 들어온 그것은 이리저리 헤집으며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황홀하면서도 구역질이 치미는 묘한 느낌이었다. 마로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현실을 느끼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뭔가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깜짝 놀란 마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말고도 뭔가 또 다른 감각이 하나 느껴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요하기만 하던 이 동굴에 뭔가 미묘한 기운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로는 그 중에 한 가지를 찾아 손을 뻗어 보았다. 축축하고 미끄덩한 작은 것이 손에 만져졌다. 마로는 소스라치며 만진 것을 내던졌다.
“뭐야?”
너무 짧은 순간이라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꿈틀거리는 느낌이 생물체의 그것과 같았다. 문득 마로의 머릿속에서 두벡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불멸의 힘을 갖고 있는 이는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거든.’
마로는 주변에서 움직거리는 수많은 느낌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래. 난 지금 주변의 생명체를 느끼고 있는 것이구나.’
이제는 두벡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의 몸과 정신이 사방으로 확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그 느낌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득 마로는 요란하게 들리는 물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섞인 축축한 공기가 이미 폭포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새로 획득한 여섯 번째 감각이 물 속에 사는 생물들의 흔적을 따라 그 물이 흐르는 길까지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마로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더듬으며 폭포 앞까지 나아갔다. 어느덧 땅이 끝나는 곳에서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거세게 튀기고 있었다. 이 지하의 급류는 매우 거칠었다.
손을 담가 물의 세기를 가늠해 본 마로는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두벡이 말한 그 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직 마로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마로는 결국 급류 속으로 뛰어내렸다.
처음 마로가 느낀 것은 순식간에 몸을 뻣뻣하게 할 정도의 냉기였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햇빛을 받지 못한 물은 어찌나 차가운지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흐르는 급류 속에서는 몸조차도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지만, 미리 담아둔 호흡이 한계에 달하자 결국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려워진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휘저으며 위로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물줄기가 낮은 바위 틈 속으로 들어선 후라 모두 물이 차 있을 뿐 공기가 있는 천장 따위는 없었다. 수면이 이미 뾰족한 돌로 된 천장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마로는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것도 잊고 공포심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연거푸 물을 들이키고서는 폐에 물이 가득 차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마로의 몸은 물살에 계속 휩쓸려 갔다. 중간 중간 물 속의 뾰족한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몸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깨지기도 했지만, 역시 놀라운 회복력으로 아물곤 했다. 하지만 회복력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마로가 지니고 있는 신비한 힘은 익사 상태에서도 그 주인을 회복시켰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의 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로는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익사의 고통과 공포심을 반복해 느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물론 마로로서는 정신을 차릴 때 마다 고통스러워하느라고 날짜를 헤아릴 겨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길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땅 속의 물길도 마찬가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