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Chapter 3: Dream
나라기는 살아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찢어진 몸을 붕대로 둘둘 감아 매고, 부러진 오른팔도 부목을 대어 꽉 동여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섰다. 벌써부터 붕대에 피가 뻘겋게 번지기 시작하는데도 나라기는 기세 좋게 빽 소리를 쳤다.
"내 칼 살려내!"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나라기는 끙 하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오, 요런 놈을 살려내려고 내 칼을 죽이다니 말이야. 내가 미쳤지."
칼이 무척이나 아까운지 몸부림을 치던 나라기는 정말로 으흐흑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술병을 덥석 잡아 병째 들이켜고 붕대에도 콸콸콸 부었다. 대체 생각이란 게 있는 사람인가? 기가 막혀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나라기는 낄낄거리며 또 잘난 체를 했다.
"술은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이 있다고. 알았냐?"
이제 나라기가 나는 불사신이다 말한대도 믿겠다. 나는 나라기가 내민 술병을 받아 마셨다. 이를테면 나라기 흉내를 낸 것인데 그리 독하지 않은 술이라 꼴깍꼴깍 달콤하게 넘어갔다. 내 꼴이 한심한지 이리엔이 혀를 차는데 별안간 나라기가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걸었다.
"우리는 다시 볼 거야.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라고. 그때까지 난 칼부터 새로 구해야겠어. 다시 만날 때는 더 멋있는 모습으로 나타날게. 안녕."
뭐라고 잡을 틈도 주지 않고 걸어가는데 결국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다. 한번 안 돌아보고 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보낸다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싶다.
*
"얼굴이 창백해."
웬일로 걱정이 되는지 이리엔이 그런 말을 했다. 창백하다고? 내 생각에도 그러겠다 싶다. 베헤모스가 죽을 때 아무래도 내 힘까지 빼앗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를 죽였는데 몸뚱이가 성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내가 그런 이야기를 이리엔에게 하자 그녀는 정말 이런 멍청이는 처음 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한마디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냥 칼이었으면 악마의 저주가 퍼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칼은 보통 칼이 아니란 말이야. 엉뚱한 생각 하지 마."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리도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밤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나도 궁금했다. 대낮에 햇빛이 쨍쨍한데도 참기 어려운 추위에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여름날 오한을 느끼다니 과연 정상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급기야 밥을 먹지 못하고 뱃속에 들어있는 것마저 토하는 지경에 이르자 이리엔도 허둥지둥하는 기색이었다.
"진짜 베헤모스의 저주 아닐까?"
나는 죽은 개구리처럼 벌렁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리엔이 이마에서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해? 마왕의 저주라 해도 월식검을 부수기 어려워. 하물며 그깟 악마의 저주가 월식검을 이기고 너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리가 없어. 장담하는데, 너한테는 아무런 악마의 힘도 닿지 않았어. 정신 좀 차려. 너는 멀쩡해."
이리엔이 계속 다그쳤지만 나는 도저히 멀쩡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진짜 나빠졌기에 우리는 발길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며 잔병치레도 없이 무척 건강하게 살았다. 정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더 이상은 몸을 가누기는 고사하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안개처럼 뿌연 의식 속에 혼곤한 잠에 빠져들어 밑바닥을 헤매었는데 거기서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소리가 있었다.
"침묵의 탑으로 가야 해."
우리가 그날 밤 처음 만났을 때 이리엔이 말해준 한마디였다. 침묵의 탑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만 되풀이해 말하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왔다. 여름에 끝자락 불어오는 마지막 폭풍 랑조드 사그나였다.
*
한창 비바람이 몰아칠 때 나는 잠에서 깼다. 등짝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온몸이 풀솜같이 무거워 기력이 없었다. 잠을 깨고서도 나는 한참이나 꼼짝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모닥불이 탁탁 소리를 냈다. 덕분에 동굴 안은 따뜻하고 밝았다. 이렇게 폭풍이 몰아치는데 이리엔이 무슨 수로 마른 나무를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멋진 솜씨였다. 슬쩍 눈을 돌리니 이리엔이 얌전하게 모은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동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앉아."
들켰다. 내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가까이 다가앉자 그녀는 자기 망토를 내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본의 아니게 한 망토를 같이 쓰게 되니 얼굴이 벌게졌다. 또 지금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어지간히 신경이 쓰여 바늘방석 앉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리엔은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마음 쓰지 않는 것인지 망토 자락을 매만지다 딱 한마디만 했다.
"망토가 큰 것이 다행이군."
내 망토는 베헤모스 마을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딱히 뭐라고 맞장구치지 못했고 그게 치명적이었다. 대화는 끊겼고 불편한 분위기가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어떡해야 할 지 몰랐다. 또래 여자애와 단 둘이, 그것도 무지 가까이 붙어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일곱 난장이가 머릿속을 와글와글 뛰어다니는 기분이다 불현듯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왜 침묵의 탑으로 가야 하지?"
말을 하자마자 무서운 현기증이 덮쳤다. 랑조드 사그나의 거센 비바람 소리가 귀로 달려들어 왔다. 과연 일 년마다 찾아오는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폭풍이라 할만 했다. 늦여름에 돌아온 폭풍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는 어지러운 중에서도 무심코 귀를 매만졌다.
"스승님의 명령이야."
왠지 비바람 소리가 잦아든 듯싶었다.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번개가 그늘을 하얗게 밝히는데 그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이리엔의 모습과 목소리만은 똑똑했다.
"나를 데리고 가?"
이리엔은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너를 데리고 침묵의 탑으로 스승님을 만나러 갈 거야."
그리고 갑자기 이리엔은 힘주어 말했다.
"꼭 함께 가야 해. 너를 데려오는 걸 스승님이 간절하게 원했어. 나는 스승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널 꼭 데려갈 거야.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은 꼭 침묵의 탑 스승님 앞에 이르게 하겠어."
이리엔의 스승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지럽지도 않았고 요 이틀간 이처럼 멀쩡한 상태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름을 듣고 싶지 않다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침묵의 탑이라는 말에서 그녀의 스승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름을 이리엔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리엔은 또박또박 이름을 말했다.
"침묵의 마법사 테라."
*
테라.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름이다.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묵의 마법사와 침묵의 탑을 생각했다. 마법사와 탑이 견디었을 세월의 무게를 떠올렸다.
저 옛날 전쟁의 창칼이 세상을 뒤덮었을 적 온 마법사들의 꼭대기에 선 이들이 세 명 있었다.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양성되었고 또 개중에 뛰어난 마법사가 혜성처럼 탄생했지만, 바다처럼 넘치는 마법사 중에서도 세 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렌 제국 출신 태양의 마법사, 아시라드 출신 달의 마법사, 그리고 강철연합 라이오스 왕국 출신 침묵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여전히 태양의 마법사 주가린이 강철연합과의 전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달의 마법사 라샤트가 아시라드를 지배하며 끊임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침묵의 마법사 테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탑에 은둔한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침묵의 탑이 어디 있는지 몰랐기에 테라가 살아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며 천하무적의 마법사로 군림하다 갑자기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침묵의 마법사는 백 년 전에 제국과의 전쟁에서 선봉에 섰다. 테라의 마법은 지옥의 마왕이 강림했다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고 그 무시무시하다는 제국기사단도 힘을 잃었다. 테라 같은 영웅은 세계 전쟁사에 다시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할 만 했다. 보통 세 명의 대마법사를 이야기하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을 꼽으라면 누구나 테라를 말할 것이다. 마치 전설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환상이 있을 테지만, 테라가 당시 대마법사 셋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테라는 온 마법사들의 지존이었다.
"테라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이야?"
"그래."
숨이 막히는 느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겨우 한마디를 했다.
"이제 전설로 남아 있는 사람이잖아."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테라보다 더 나이가 많은 주가린도 버젓이 살아있어 제국의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고, 아시라드의 마법사 왕 랴사트도 굳건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테라 같은 대마법사가 그만한 세월을 이기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이리엔의 말을 더 곱씹어 보았다.
"네가 테라의 제자라고?"
"응. 나는 테라의 유일한 제자야. 여태껏 모든 삶을 테라와 함께 지냈어."
곁에 앉은 여자애가 전설의 마법사를 스승으로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리엔은 뛰어난 칼솜씨는 물론이고 손가락에서 벼락을 쏘기도 했었다.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영락없이 진짜 마법사인 것이었다.
"서둘러야 해. 너를 찾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
이리엔의 얼굴이 무척 진지하여 나는 짐짓 장난을 쳐 보았다.
"내가 안 가겠다면 어쩔거야?"
그러자 이리엔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무척 서늘한 눈이었다.
"억지로라도 데라고 갈 거야."
나는 침을 꿀떡 삼키고 비슬비슬 웃었다. 나는 장난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리엔은 장난이 아닌 듯싶었다. 개처럼 흠신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가지 않을까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어쩌면 팔 하나쯤은 베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난이었어."
불가에 앉아 있으니까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동굴 아가리로 하늘을 보아하니 빗줄기가 좀 가늘어진 것이 보였다. 나는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그쯤에 이리엔의 머리가 꾸벅꾸벅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어도 몸이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툭 떨어졌다. 여자애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일은 평생 처음이었다.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이리엔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이리엔의 머리카락이 날려서 코를 간질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나는 다시 테라를 생각했다. 랑조드 사그나가 지나가는 기나긴 밤 동안에 아마도 자꾸 생각하게 될 듯했다. 어쩐지 테라가 보고 싶었다. 자꾸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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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거북이 연재....
나라기는 살아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찢어진 몸을 붕대로 둘둘 감아 매고, 부러진 오른팔도 부목을 대어 꽉 동여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섰다. 벌써부터 붕대에 피가 뻘겋게 번지기 시작하는데도 나라기는 기세 좋게 빽 소리를 쳤다.
"내 칼 살려내!"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나라기는 끙 하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오, 요런 놈을 살려내려고 내 칼을 죽이다니 말이야. 내가 미쳤지."
칼이 무척이나 아까운지 몸부림을 치던 나라기는 정말로 으흐흑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술병을 덥석 잡아 병째 들이켜고 붕대에도 콸콸콸 부었다. 대체 생각이란 게 있는 사람인가? 기가 막혀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나라기는 낄낄거리며 또 잘난 체를 했다.
"술은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이 있다고. 알았냐?"
이제 나라기가 나는 불사신이다 말한대도 믿겠다. 나는 나라기가 내민 술병을 받아 마셨다. 이를테면 나라기 흉내를 낸 것인데 그리 독하지 않은 술이라 꼴깍꼴깍 달콤하게 넘어갔다. 내 꼴이 한심한지 이리엔이 혀를 차는데 별안간 나라기가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걸었다.
"우리는 다시 볼 거야.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라고. 그때까지 난 칼부터 새로 구해야겠어. 다시 만날 때는 더 멋있는 모습으로 나타날게. 안녕."
뭐라고 잡을 틈도 주지 않고 걸어가는데 결국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다. 한번 안 돌아보고 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보낸다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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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창백해."
웬일로 걱정이 되는지 이리엔이 그런 말을 했다. 창백하다고? 내 생각에도 그러겠다 싶다. 베헤모스가 죽을 때 아무래도 내 힘까지 빼앗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를 죽였는데 몸뚱이가 성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내가 그런 이야기를 이리엔에게 하자 그녀는 정말 이런 멍청이는 처음 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한마디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냥 칼이었으면 악마의 저주가 퍼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칼은 보통 칼이 아니란 말이야. 엉뚱한 생각 하지 마."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리도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밤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나도 궁금했다. 대낮에 햇빛이 쨍쨍한데도 참기 어려운 추위에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여름날 오한을 느끼다니 과연 정상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급기야 밥을 먹지 못하고 뱃속에 들어있는 것마저 토하는 지경에 이르자 이리엔도 허둥지둥하는 기색이었다.
"진짜 베헤모스의 저주 아닐까?"
나는 죽은 개구리처럼 벌렁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리엔이 이마에서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해? 마왕의 저주라 해도 월식검을 부수기 어려워. 하물며 그깟 악마의 저주가 월식검을 이기고 너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리가 없어. 장담하는데, 너한테는 아무런 악마의 힘도 닿지 않았어. 정신 좀 차려. 너는 멀쩡해."
이리엔이 계속 다그쳤지만 나는 도저히 멀쩡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진짜 나빠졌기에 우리는 발길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며 잔병치레도 없이 무척 건강하게 살았다. 정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더 이상은 몸을 가누기는 고사하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안개처럼 뿌연 의식 속에 혼곤한 잠에 빠져들어 밑바닥을 헤매었는데 거기서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소리가 있었다.
"침묵의 탑으로 가야 해."
우리가 그날 밤 처음 만났을 때 이리엔이 말해준 한마디였다. 침묵의 탑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만 되풀이해 말하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왔다. 여름에 끝자락 불어오는 마지막 폭풍 랑조드 사그나였다.
*
한창 비바람이 몰아칠 때 나는 잠에서 깼다. 등짝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온몸이 풀솜같이 무거워 기력이 없었다. 잠을 깨고서도 나는 한참이나 꼼짝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모닥불이 탁탁 소리를 냈다. 덕분에 동굴 안은 따뜻하고 밝았다. 이렇게 폭풍이 몰아치는데 이리엔이 무슨 수로 마른 나무를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멋진 솜씨였다. 슬쩍 눈을 돌리니 이리엔이 얌전하게 모은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동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앉아."
들켰다. 내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가까이 다가앉자 그녀는 자기 망토를 내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본의 아니게 한 망토를 같이 쓰게 되니 얼굴이 벌게졌다. 또 지금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어지간히 신경이 쓰여 바늘방석 앉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리엔은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마음 쓰지 않는 것인지 망토 자락을 매만지다 딱 한마디만 했다.
"망토가 큰 것이 다행이군."
내 망토는 베헤모스 마을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딱히 뭐라고 맞장구치지 못했고 그게 치명적이었다. 대화는 끊겼고 불편한 분위기가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어떡해야 할 지 몰랐다. 또래 여자애와 단 둘이, 그것도 무지 가까이 붙어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일곱 난장이가 머릿속을 와글와글 뛰어다니는 기분이다 불현듯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왜 침묵의 탑으로 가야 하지?"
말을 하자마자 무서운 현기증이 덮쳤다. 랑조드 사그나의 거센 비바람 소리가 귀로 달려들어 왔다. 과연 일 년마다 찾아오는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폭풍이라 할만 했다. 늦여름에 돌아온 폭풍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는 어지러운 중에서도 무심코 귀를 매만졌다.
"스승님의 명령이야."
왠지 비바람 소리가 잦아든 듯싶었다.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번개가 그늘을 하얗게 밝히는데 그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이리엔의 모습과 목소리만은 똑똑했다.
"나를 데리고 가?"
이리엔은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너를 데리고 침묵의 탑으로 스승님을 만나러 갈 거야."
그리고 갑자기 이리엔은 힘주어 말했다.
"꼭 함께 가야 해. 너를 데려오는 걸 스승님이 간절하게 원했어. 나는 스승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널 꼭 데려갈 거야.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은 꼭 침묵의 탑 스승님 앞에 이르게 하겠어."
이리엔의 스승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지럽지도 않았고 요 이틀간 이처럼 멀쩡한 상태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름을 듣고 싶지 않다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침묵의 탑이라는 말에서 그녀의 스승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름을 이리엔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리엔은 또박또박 이름을 말했다.
"침묵의 마법사 테라."
*
테라.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름이다.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묵의 마법사와 침묵의 탑을 생각했다. 마법사와 탑이 견디었을 세월의 무게를 떠올렸다.
저 옛날 전쟁의 창칼이 세상을 뒤덮었을 적 온 마법사들의 꼭대기에 선 이들이 세 명 있었다.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양성되었고 또 개중에 뛰어난 마법사가 혜성처럼 탄생했지만, 바다처럼 넘치는 마법사 중에서도 세 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렌 제국 출신 태양의 마법사, 아시라드 출신 달의 마법사, 그리고 강철연합 라이오스 왕국 출신 침묵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여전히 태양의 마법사 주가린이 강철연합과의 전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달의 마법사 라샤트가 아시라드를 지배하며 끊임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침묵의 마법사 테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탑에 은둔한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침묵의 탑이 어디 있는지 몰랐기에 테라가 살아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며 천하무적의 마법사로 군림하다 갑자기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침묵의 마법사는 백 년 전에 제국과의 전쟁에서 선봉에 섰다. 테라의 마법은 지옥의 마왕이 강림했다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고 그 무시무시하다는 제국기사단도 힘을 잃었다. 테라 같은 영웅은 세계 전쟁사에 다시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할 만 했다. 보통 세 명의 대마법사를 이야기하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을 꼽으라면 누구나 테라를 말할 것이다. 마치 전설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환상이 있을 테지만, 테라가 당시 대마법사 셋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테라는 온 마법사들의 지존이었다.
"테라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이야?"
"그래."
숨이 막히는 느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겨우 한마디를 했다.
"이제 전설로 남아 있는 사람이잖아."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테라보다 더 나이가 많은 주가린도 버젓이 살아있어 제국의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고, 아시라드의 마법사 왕 랴사트도 굳건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테라 같은 대마법사가 그만한 세월을 이기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이리엔의 말을 더 곱씹어 보았다.
"네가 테라의 제자라고?"
"응. 나는 테라의 유일한 제자야. 여태껏 모든 삶을 테라와 함께 지냈어."
곁에 앉은 여자애가 전설의 마법사를 스승으로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리엔은 뛰어난 칼솜씨는 물론이고 손가락에서 벼락을 쏘기도 했었다.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영락없이 진짜 마법사인 것이었다.
"서둘러야 해. 너를 찾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
이리엔의 얼굴이 무척 진지하여 나는 짐짓 장난을 쳐 보았다.
"내가 안 가겠다면 어쩔거야?"
그러자 이리엔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무척 서늘한 눈이었다.
"억지로라도 데라고 갈 거야."
나는 침을 꿀떡 삼키고 비슬비슬 웃었다. 나는 장난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리엔은 장난이 아닌 듯싶었다. 개처럼 흠신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가지 않을까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어쩌면 팔 하나쯤은 베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난이었어."
불가에 앉아 있으니까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동굴 아가리로 하늘을 보아하니 빗줄기가 좀 가늘어진 것이 보였다. 나는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그쯤에 이리엔의 머리가 꾸벅꾸벅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어도 몸이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툭 떨어졌다. 여자애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일은 평생 처음이었다.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이리엔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이리엔의 머리카락이 날려서 코를 간질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나는 다시 테라를 생각했다. 랑조드 사그나가 지나가는 기나긴 밤 동안에 아마도 자꾸 생각하게 될 듯했다. 어쩐지 테라가 보고 싶었다. 자꾸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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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거북이 연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