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나라기는 두어 번 고개를 흔들고 소매로 땀을 닦았다. 흰 소매에 땀과 함께 그을음이 시커멓게 묻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베헤모스를 쳐다보던 나라기는 칼을 고쳐쥐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까닥했다.
“네 친구 일어났어.”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어느새 소녀가 일어서서 칼까지 빼들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칼이 번쩍번쩍 눈부신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한 칼이었다. 언제부터 일어나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을까? 그녀는 이마에서 피를 좀 흘리고 있긴 했지만 몸은 그럭저럭 괜찮은 듯싶었다. 그녀는 베헤모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마법사 왕의 진짜 모습이야. 아르모니아의 왕은 한때 현명한 마법사였고 온누리의 존경을 얻었지만 고대의 마법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영혼은 물론 몸뚱이까지 바쳤어.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왕국을 멸망시키고 말았어. 가만히 놔두면 지옥의 업화로 세상을 다 태워버릴 거야.”
그때 나라기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왔잖아. 그 머나먼 길을 달려서 말이야.”
소녀가 턱으로 흘러내린 피를 닦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동방의 호랑이. 높은 이름은 들었어요.”
나라기가 한껏 으스대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어진 소녀의 말에 나라기의 얼굴은 팍 구겨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신의 힘만으로는 어림없어요.”
나라기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한동안 잠자코 눈을 번뜩이고만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발을 쿵 구르며 화를 냈다.
“동방의 호랑이라는 이름값이 그렇게 싸구려였나? 나는 베헤모스와 호각으로 싸웠고 놈을 땅바닥에 처박은 검객이야. 솔직히 말해 이 세상 전부를 뒤져봐도 나만한 검객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자부하고 있어.”
자칫 오만하게 들릴 말이지만 그 말을 나라기가 했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나라기의 칼솜씨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경지였다. 이 세상을 다 뒤져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칼에 벼락을 담아 휘두르는 인간이 몇이나 더 있을까? 그러나 소녀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라기 당신의 이야기는 이 머나먼 곳까지 닿았고 나도 들은 바가 있어요. 물론 당신은 감히 인간으로서 다다르기 힘든 경지에 오른 검객이에요. 구름처럼 많은 검객들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었고 동쪽 땅에서 거의 전설처럼 불리는 남자라고 들었어요. 당신과 칼솜씨를 겨룰 수 있는 검객은 그리 많지 않겠죠. 하지만 베헤모스를 죽일 수는 없어요.”
소녀는 나라기의 칼을 가리키며 딱딱하게 설명했다.
“당신의 실력은 마법사 왕과 겨룰 만하지만 베헤모스를 죽이려면 아주 특별한 칼이 필요해요. 가티노올은 세상에 다시없을 훌륭한 칼이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의 이야기에요. 베헤모스의 몸은 지옥의 업화로 보호되고 있는데 가티노올은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냥 불이 아니죠. 지옥의 업화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나라기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여전히 검은 눈이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으나 그녀의 말에 수긍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신 질문했다.
“그럼 어떡하지?”
소녀는 내 칼을 한번 흘끗 눈짓하고는 자기 칼을 한번 휙 흔들었다.
“너와 나의 칼이 베헤모스를 죽일 수 있어.”
나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나라기도 깜짝 놀랐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대단한 칼인가? 베헤모스의 불은 지옥 밑바닥에서 가져온 거야. 너의 말대로 인간의 칼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예외가 있는 법이죠.”
소녀는 짤막하게 대답했고 나라기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그녀의 칼을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비록 내 눈이 어둡기야 하지만 칼은 조금 알아. 한번 볼까?”
그녀는 대꾸 없이 칼을 내밀었고 나라기는 꼼꼼히 그녀의 칼을 살펴보았다. 노련한 검객의 두 눈이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칼자루에서 칼끝까지 한참 눈을 굴리던 나라기는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만질 수 없는 칼이군.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는 칼이야.”
조금 더 살피던 나라기가 이윽고 짝짝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었다.
“대단해!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칼이야. 내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구나. 허허! 요정의 칼보다도 더욱 대단한 칼이로다! 너의 말이 옳다! 그 칼이면 능히 베헤모스를 죽이리라.”
어지간히 신이 났는지 나라기는 말을 끝내고서도 고개를 계속 끄덕거렸다. 소녀는 칼을 들어 베헤모스를 베는 시늉을 했다. 베헤모스가 어느덧 지척에 다가왔는지 살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용광로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라기가 베헤모스의 주의를 끌어 주세요. 우리 중에서 베헤모스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니까요. 베헤모스를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끔찍하게 달려들 거예요. 제가 기습해서 목을 베도록 할게요. 실패하면 눈치를 챌 테니까 기회는 단 한번이에요.”
“알겠어.”
나라기는 낄낄 웃으며 대꾸하더니 바람처럼 순식간에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그의 모습은 골목을 돌아 금방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니 소녀가 긴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후후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겉으로 말은 않지만 내심 꽤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는 손발을 어디다 둘지 몰라 괜히 우물쭈물하다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내 모습이 멍청이처럼 보였을 거라는 것은 잘 알지만 뭐가 목에 걸린 것처럼 말이 떠듬떠듬 나왔다.
“이름이 뭐야?”
아직 이름도 모르는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마법처럼 그녀에게 이끌려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어쩌면 정말 그녀의 눈에는 마법의 힘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녀는 새침한 얼굴로 또박또박 이름을 말해주었다.
“이리엔 드림워커.”
*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서 한 마법사가 지팡이 없이 섰다. 마법사라면 멋으로라도 지팡이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법한데 사나이는 맨손이었다. 하기야 지팡이를 짚기에 그는 아직 한참이나 젊었다. 사나이의 마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드디어!”
마법사는 두 주먹을 쥐고 몸을 떨다가 하늘 위로 활짝 뻗었다. 그러자 마른하늘에 꽈르르릉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카만 먹구름 떼가 머나먼 저편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어.”
사나이는 하하하 크게 웃으며 소매를 떨쳤다. 소매가 펄럭펄럭 떨어지는 동시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폭우를 맞으며 웃었다. 마치 춤이라도 추듯 몸을 비틀거리며 두 팔을 휘젓는데 그때마다 하늘이 울었다. 마법사가 뭐라고 더 소리를 질렀으나 빗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꽈꽝 하는 소리와 짐승 같은 괴성이 들렸다. 아마도 벌써 나라기와 베헤모스가 맞붙은 모양이었다. 과연 저쪽에 불기둥이 높게 치솟는 것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내 이름은 쉬카린 리제르야.”
머뭇머뭇 이름을 말했는데 이리엔은 눈을 찌푸렸다. 언뜻 화가 나 보였으나 사실은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고 이리엔은 곧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톡 쏘아붙였다.
“꾸물거리지 마. 어서 가자!”
그리고 나를 휙 지나쳐 달리는데 무척이나 발이 빨랐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죽어라 달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때문인지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금방 숨이 차올랐다. 한동안 골목을 돌며 달리던 이리엔이 벽을 등에 대고 딱 붙어 섰다.
“이 너머에 베헤모스가 있어.”
과연 벽 저편에 빛이 번쩍번쩍하더니 불기둥이 또 높이 치솟았다. 바로 앞에서 지옥의 불길을 보니까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주위가 매캐한 연기로 덮여 온통 후끈후끈한데 오히려 등골이 오싹한 것이었다. 베헤모스의 목소리도 너무 가까이서 들으니 귀가 울렸다.
“나는 베헤모스— 키키키킥— 이 세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다—!”
“지랄병 났네. 어디 내 칼부터 꺾어봐.”
나라기의 능글맞은 빈정거림도 들렸다. 나는 밖으로 머리를 빠꼼 내놓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나라기는 칼을 앞으로 겨누고 발을 뒤로 뺀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베헤모스는 온 몸에서 불길을 확 뿜어내고 있었다. 고약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흐으으— 건방진—놈—!”
베헤모스가 손을 떨치자 불길이 마치 긴 채찍처럼 주욱 뻗어나갔다. 나 같았으면 진작에 통구이가 되었을 공격인데 나라기는 베헤모스의 공격을 슬쩍 옆으로 흘리며 앞으로 달려가 빠르게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역시 나라기의 칼은 지옥의 업화를 뚫지 못하는지 번번이 막혀 보통 치명적이었을 공격을 모두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과연 동방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검객이군. 칼이 막히지 않고 무척 자유로워. 인간 중에서는 칼솜씨로 적수를 찾기 어려울 거야.”
이리엔이 감탄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냥 나라기의 칼솜씨를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될까? 내 눈에는 나라기가 까딱 실수라도 하면 그대로 끽 저세상 갈 것만 같았다.
“야, 이러고 있어도 돼? 얼른 도와줘야지! 저러다 죽겠어!”
“우리가 끼어들어도 도움이 안 돼. 저 싸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어? 우리 실력으로는 싸우기는커녕 살아남기도 힘들어. 오히려 나라기에게 방해만 될 거야. 기회를 엿봐서 단칼에 베어야 해.”
그래서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베헤모스가 고함을 지를 때마다 등진 돌벽이 우르르 먼지를 떨어냈다. 이리엔은 참을성 있게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나는 조급한 마음을 참기가 힘들어 자꾸만 칼에 손이 갔다.
“후으으— 죽—어—라—!”
베헤모스가 가슴 앞에 두 주먹을 모았다가 옆으로 확 떨쳤다. 그러자 나라기에게 불길이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나라기는 급히 방어를 해보려고 했으나 워낙에 강력한 공격이라 훨훨 날아가서는 담벼락을 부수고 처박히고 말았다. 천하무적으로 보이던 나라기였으나 이번에는 입에서 피를 한바탕 뱉더니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키키키— 끝이다— 동방의 호랑이여—!”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헤모스는 기세등등하게 손을 쳐들고 나라기의 목숨을 거둘 준비를 했다. 이제 저 손이 내려가면 나라기는 죽을 것이었다.
그때 옆에서 이리엔의 속삭임이 들렸다. 돌아보니 갈색 눈이 새파란 빛을 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리엔이 칼을 빼들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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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넘어서'는 계속됩니다.
아무래도 챕터 2는 거의 새로 쓰고 있는 듯.
“네 친구 일어났어.”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어느새 소녀가 일어서서 칼까지 빼들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칼이 번쩍번쩍 눈부신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한 칼이었다. 언제부터 일어나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을까? 그녀는 이마에서 피를 좀 흘리고 있긴 했지만 몸은 그럭저럭 괜찮은 듯싶었다. 그녀는 베헤모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마법사 왕의 진짜 모습이야. 아르모니아의 왕은 한때 현명한 마법사였고 온누리의 존경을 얻었지만 고대의 마법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영혼은 물론 몸뚱이까지 바쳤어.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왕국을 멸망시키고 말았어. 가만히 놔두면 지옥의 업화로 세상을 다 태워버릴 거야.”
그때 나라기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왔잖아. 그 머나먼 길을 달려서 말이야.”
소녀가 턱으로 흘러내린 피를 닦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동방의 호랑이. 높은 이름은 들었어요.”
나라기가 한껏 으스대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어진 소녀의 말에 나라기의 얼굴은 팍 구겨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신의 힘만으로는 어림없어요.”
나라기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한동안 잠자코 눈을 번뜩이고만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발을 쿵 구르며 화를 냈다.
“동방의 호랑이라는 이름값이 그렇게 싸구려였나? 나는 베헤모스와 호각으로 싸웠고 놈을 땅바닥에 처박은 검객이야. 솔직히 말해 이 세상 전부를 뒤져봐도 나만한 검객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자부하고 있어.”
자칫 오만하게 들릴 말이지만 그 말을 나라기가 했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나라기의 칼솜씨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경지였다. 이 세상을 다 뒤져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칼에 벼락을 담아 휘두르는 인간이 몇이나 더 있을까? 그러나 소녀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라기 당신의 이야기는 이 머나먼 곳까지 닿았고 나도 들은 바가 있어요. 물론 당신은 감히 인간으로서 다다르기 힘든 경지에 오른 검객이에요. 구름처럼 많은 검객들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었고 동쪽 땅에서 거의 전설처럼 불리는 남자라고 들었어요. 당신과 칼솜씨를 겨룰 수 있는 검객은 그리 많지 않겠죠. 하지만 베헤모스를 죽일 수는 없어요.”
소녀는 나라기의 칼을 가리키며 딱딱하게 설명했다.
“당신의 실력은 마법사 왕과 겨룰 만하지만 베헤모스를 죽이려면 아주 특별한 칼이 필요해요. 가티노올은 세상에 다시없을 훌륭한 칼이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의 이야기에요. 베헤모스의 몸은 지옥의 업화로 보호되고 있는데 가티노올은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냥 불이 아니죠. 지옥의 업화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나라기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여전히 검은 눈이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으나 그녀의 말에 수긍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신 질문했다.
“그럼 어떡하지?”
소녀는 내 칼을 한번 흘끗 눈짓하고는 자기 칼을 한번 휙 흔들었다.
“너와 나의 칼이 베헤모스를 죽일 수 있어.”
나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나라기도 깜짝 놀랐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대단한 칼인가? 베헤모스의 불은 지옥 밑바닥에서 가져온 거야. 너의 말대로 인간의 칼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예외가 있는 법이죠.”
소녀는 짤막하게 대답했고 나라기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그녀의 칼을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비록 내 눈이 어둡기야 하지만 칼은 조금 알아. 한번 볼까?”
그녀는 대꾸 없이 칼을 내밀었고 나라기는 꼼꼼히 그녀의 칼을 살펴보았다. 노련한 검객의 두 눈이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칼자루에서 칼끝까지 한참 눈을 굴리던 나라기는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만질 수 없는 칼이군.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는 칼이야.”
조금 더 살피던 나라기가 이윽고 짝짝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었다.
“대단해!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칼이야. 내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구나. 허허! 요정의 칼보다도 더욱 대단한 칼이로다! 너의 말이 옳다! 그 칼이면 능히 베헤모스를 죽이리라.”
어지간히 신이 났는지 나라기는 말을 끝내고서도 고개를 계속 끄덕거렸다. 소녀는 칼을 들어 베헤모스를 베는 시늉을 했다. 베헤모스가 어느덧 지척에 다가왔는지 살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용광로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라기가 베헤모스의 주의를 끌어 주세요. 우리 중에서 베헤모스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니까요. 베헤모스를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끔찍하게 달려들 거예요. 제가 기습해서 목을 베도록 할게요. 실패하면 눈치를 챌 테니까 기회는 단 한번이에요.”
“알겠어.”
나라기는 낄낄 웃으며 대꾸하더니 바람처럼 순식간에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그의 모습은 골목을 돌아 금방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니 소녀가 긴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후후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겉으로 말은 않지만 내심 꽤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는 손발을 어디다 둘지 몰라 괜히 우물쭈물하다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내 모습이 멍청이처럼 보였을 거라는 것은 잘 알지만 뭐가 목에 걸린 것처럼 말이 떠듬떠듬 나왔다.
“이름이 뭐야?”
아직 이름도 모르는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마법처럼 그녀에게 이끌려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어쩌면 정말 그녀의 눈에는 마법의 힘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녀는 새침한 얼굴로 또박또박 이름을 말해주었다.
“이리엔 드림워커.”
*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서 한 마법사가 지팡이 없이 섰다. 마법사라면 멋으로라도 지팡이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법한데 사나이는 맨손이었다. 하기야 지팡이를 짚기에 그는 아직 한참이나 젊었다. 사나이의 마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드디어!”
마법사는 두 주먹을 쥐고 몸을 떨다가 하늘 위로 활짝 뻗었다. 그러자 마른하늘에 꽈르르릉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카만 먹구름 떼가 머나먼 저편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어.”
사나이는 하하하 크게 웃으며 소매를 떨쳤다. 소매가 펄럭펄럭 떨어지는 동시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폭우를 맞으며 웃었다. 마치 춤이라도 추듯 몸을 비틀거리며 두 팔을 휘젓는데 그때마다 하늘이 울었다. 마법사가 뭐라고 더 소리를 질렀으나 빗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꽈꽝 하는 소리와 짐승 같은 괴성이 들렸다. 아마도 벌써 나라기와 베헤모스가 맞붙은 모양이었다. 과연 저쪽에 불기둥이 높게 치솟는 것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내 이름은 쉬카린 리제르야.”
머뭇머뭇 이름을 말했는데 이리엔은 눈을 찌푸렸다. 언뜻 화가 나 보였으나 사실은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고 이리엔은 곧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톡 쏘아붙였다.
“꾸물거리지 마. 어서 가자!”
그리고 나를 휙 지나쳐 달리는데 무척이나 발이 빨랐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죽어라 달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때문인지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금방 숨이 차올랐다. 한동안 골목을 돌며 달리던 이리엔이 벽을 등에 대고 딱 붙어 섰다.
“이 너머에 베헤모스가 있어.”
과연 벽 저편에 빛이 번쩍번쩍하더니 불기둥이 또 높이 치솟았다. 바로 앞에서 지옥의 불길을 보니까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주위가 매캐한 연기로 덮여 온통 후끈후끈한데 오히려 등골이 오싹한 것이었다. 베헤모스의 목소리도 너무 가까이서 들으니 귀가 울렸다.
“나는 베헤모스— 키키키킥— 이 세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다—!”
“지랄병 났네. 어디 내 칼부터 꺾어봐.”
나라기의 능글맞은 빈정거림도 들렸다. 나는 밖으로 머리를 빠꼼 내놓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나라기는 칼을 앞으로 겨누고 발을 뒤로 뺀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베헤모스는 온 몸에서 불길을 확 뿜어내고 있었다. 고약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흐으으— 건방진—놈—!”
베헤모스가 손을 떨치자 불길이 마치 긴 채찍처럼 주욱 뻗어나갔다. 나 같았으면 진작에 통구이가 되었을 공격인데 나라기는 베헤모스의 공격을 슬쩍 옆으로 흘리며 앞으로 달려가 빠르게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역시 나라기의 칼은 지옥의 업화를 뚫지 못하는지 번번이 막혀 보통 치명적이었을 공격을 모두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과연 동방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검객이군. 칼이 막히지 않고 무척 자유로워. 인간 중에서는 칼솜씨로 적수를 찾기 어려울 거야.”
이리엔이 감탄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냥 나라기의 칼솜씨를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될까? 내 눈에는 나라기가 까딱 실수라도 하면 그대로 끽 저세상 갈 것만 같았다.
“야, 이러고 있어도 돼? 얼른 도와줘야지! 저러다 죽겠어!”
“우리가 끼어들어도 도움이 안 돼. 저 싸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어? 우리 실력으로는 싸우기는커녕 살아남기도 힘들어. 오히려 나라기에게 방해만 될 거야. 기회를 엿봐서 단칼에 베어야 해.”
그래서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베헤모스가 고함을 지를 때마다 등진 돌벽이 우르르 먼지를 떨어냈다. 이리엔은 참을성 있게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나는 조급한 마음을 참기가 힘들어 자꾸만 칼에 손이 갔다.
“후으으— 죽—어—라—!”
베헤모스가 가슴 앞에 두 주먹을 모았다가 옆으로 확 떨쳤다. 그러자 나라기에게 불길이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나라기는 급히 방어를 해보려고 했으나 워낙에 강력한 공격이라 훨훨 날아가서는 담벼락을 부수고 처박히고 말았다. 천하무적으로 보이던 나라기였으나 이번에는 입에서 피를 한바탕 뱉더니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키키키— 끝이다— 동방의 호랑이여—!”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헤모스는 기세등등하게 손을 쳐들고 나라기의 목숨을 거둘 준비를 했다. 이제 저 손이 내려가면 나라기는 죽을 것이었다.
그때 옆에서 이리엔의 속삭임이 들렸다. 돌아보니 갈색 눈이 새파란 빛을 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리엔이 칼을 빼들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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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넘어서'는 계속됩니다.
아무래도 챕터 2는 거의 새로 쓰고 있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