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기가 칼을 쳐들고 길게 소리를 쳤다.

“에헤라아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라기가 발을 탕 구르자 마치 몸이 다람쥐와도 같이 무너진 벽을 타고 훌쩍훌쩍 날았다. 돌무더기를 디딤판 삼아 뛰어오른 나라기는 칼을 위아래로 휘휘 저었는데 칼날에 시퍼런 빛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하였지만 칼에서 떠도는 새파란 빛무리는 더 이상 의심하기 힘들 정도로 선명했다.  

“나의 칼이 바람보다 빠르니 능히 너를 베리라!”

눈을 의심할 일은 또 있었다. 나라기는 나는 것처럼 뛰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날고 있었다. 나라기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계단처럼 밟으며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고 또 보아도 나라기의 발이 밟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에!”

목숨이 달랑달랑한 상황인데도 입에서 감탄이 절로 터졌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동방의 검객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저런 검객들이 동방에 득시글거린다 생각하니 정말 놀라웠다.

“크으으— 아— 아— 아— 아—!”

베헤모스의 도끼가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며 빙빙 도는 것이 보였다. 파란 빛은 번쩍번쩍 거의 나라기의 몸을 휘감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나라기는 마치 한 마리 매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가 베헤모스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하늘에서 꽈꽝 폭발이 일어나고 불똥이 후두두둑! 비처럼 떨어졌다. 불어오는 뜨거운 폭풍 때문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눈을 떠서 위를 올려다보니 나라기가 하늘에서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베헤모스와 맞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칼과 도끼가 부딪힐 때마다 땅을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나고 불똥이 떨어졌다.

“아하!”

꽈꽈꽝! 나라기가 힘껏 소리를 지르며 베헤모스의 철갑 허리를 휘둘러 쳤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 강력한 공격에 아무도 부술 수 없다는 죽음의 철갑 한쪽이 깨어져 나가고 말았다.

“키— 키— 키키— 흐으으— 아— 아— 아—!”

베헤모스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졌고 그 사악한 기운에 도망가던 새들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키킥— 크흐으으— 너— 이놈—!”

베헤모스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나라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헤야—!”

기합과 함께 나라기의 찌르기가 연속해서 이어졌다. 베헤모스는 얼른 뒤로 훌쩍 날았지만 나라기의 발은 무척이나 빨라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나라기의 찌르기는 앞의 두 번이 막혔지만 세 번째 찌르기가 베헤모스의 흉갑을 부수고 가슴 깊이 찌르고 빠져나왔다. 베헤모스의 가슴에서 불길이 피처럼 뿜어졌다. 승부를 가르는 무서운 일격이었다.

“키키키키—!”
“하! 하! 숨통을 끊어 주마!”

나라기는 칼을 번쩍 쳐들고 무서운 속도로 철갑 여기저기를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쫓기가 힘들었다. 베헤모스의 철갑 여기저기가 부서지며 철조각들이 불똥과 함께 펑펑 튀었다.
그러나 베헤모스는 역시 마법사 왕답게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도끼를 번쩍 치켜들자 불길이 화악 번져서 나라기의 몸을 아예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마법 공격에는 나라기도 속수무책이라 얼굴에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크흐흐으— 동쪽 땅의 야만인이 나에게 감히—!”

상황이 급변하여 이번에는 베헤모스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베헤모스는 그 거대한 도끼를 붕붕 휘두르며 사방팔방에서 치는데 나라기는 불길에 휩싸여 있어 마음대로 피하지 못했다. 때문에 나라기는 베헤모스의 도끼를 그대로 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키키키— 죽— 어— 라—!”

베헤모스가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저 도끼에 나라기의 몸이 두 동강이 날 것이었다. 그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어 나는 눈을 돌리고 싶었다.

“하!”

그때 나라기의 칼이 불길을 쑥 가르고 뛰쳐나왔다.
나라기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던 불길이 거짓말처럼 흩어졌고 새파란 빛이 제비처럼 빠르게 베헤모스의 가슴을 엇갈리게 휙휙 베고 지나갔다. 불 속에서 뛰쳐나와 칼부림을 할 때까지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여서 베헤모스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키— 이— 이—?”

베헤모스의 거대한 덩치가 앞으로 쓰윽 기울어졌다. 나라기의 칼솜씨가 너무나 빨라서 베헤모스도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나라기는 마치 모든 공격을 다 계획한 것 같이 신속하고 정확하였다. 칼을 치켜든 나라기는 긴 기합을 뱉었다. 바싹 숙여진 베헤모스의 머리 위에 나라기의 칼이 뚝 떨어졌다.

“들어라! 내 이름은 나라기! 동방의 호랑이다!”

최후의 일격이었다.
나라기의 칼이 베헤모스의 투구를 쪼갰다.

“크흐흐으— 아— 아— 아아—!”

거짓말 같았지만 마법사 왕 베헤모스가 동방의 검객 나라기에게 패배했다.
새까만 강철 투구가 쫙 쪼개지며 엄청난 불기둥이 치솟았고, 유령왕의 날카로운 비명에 땅이 몸부림쳤다. 베헤모스의 몸뚱이는 무시무시한 흑연과 화염을 뿜어내면서 땅으로 추락했다. 그 모습이 마치 유성(流星)처럼 보였다.
우르르 꽈꽈꽈꽝! 베헤모스가 땅에 떨어질 때 엄청난 소리가 났고 불길이 순식간에 번져 주위를 새카맣게 태워 버리고 말았다.

“꼬마야. 나 죽는다.”

나라기는 무척 지친 표정으로 비실비실 하늘에서 내려왔다. 내려왔다기보다는 거의 떨어졌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독한 열기가 돌멩이마저 빨갛게 달굴 지경인데 나라기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오만한 태도가 아니꼽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라기는 마법사 왕을 죽인 사나이였다. 꼬마라는 말도 그냥 들어 넘길 수 있을 만큼이나 지금은 나라기가 굉장해 보였다. 게다가 나라기가 베헤모스를 죽이지 않았으면 나는 꼼짝없이 송장이 되었을 것이니 생명의 은인 아닌가?

“대단했어요!”

은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란 고작 이런 것이 다였다. 나라기는 어지간히 숨이 차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어쨌든 할 말은 했다.

“일곱 유령왕의 하나라더니 과연 지독한 놈이었어. 오늘 비기(秘技)를 무척이나 썼으니 수명이 삼십 년은 족히 줄었을 것이다.”

죽는다는 시늉을 하면서도 나라기는 눈을 찡긋거렸다. 자기 칼솜씨에 대해 무척이나 자존심이 센 이 양반은 유령왕을 베었다는 것이 꽤 멋진 일인 것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건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또 칭찬을 했다.

“이제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닿겠군요. 마법사 왕이 인간에게 죽었으니까.”

나라기의 대꾸는 그답게 오만하기가 짝이 없었다.

“내 이름은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하늘 너머에 닿았지.”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일찍 축배를 들었다. 나는 나라기 등 뒤에서 무진장한 크기의 불기둥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천천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예삿일로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불기둥이 아니라 거인의 모습이었다. 과연 금방 귀를 잡아먹을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키키키— 동방의 호랑이— 나라기—! 흐으으— 나는— 죽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칼로는— 결코— 나를— 키키키키— 죽일 수가 없다—! 북쪽 요정들의 칼도— 나를 해하지는 못했으니— 크흐으— 얌전히— 네 목을 바쳐라—!”

베헤모스는 큰 상처를 입었고 죽음의 철갑마저 잃었지만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도끼도 어디다 버려두고 왔는지 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다만 지독한 불길로 변신해서 성큼성큼 다가오며 손발에 닿는 모든 것을 다 절멸시키고 있었다.
귀가 멍멍해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오는데 그 기세가 오히려 전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온 몸뚱이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으로 손을 한번 휘두르면 집 한 채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크흐으으— 나— 와— 라—!”

또 다른 집이 하늘로 붕 뜨더니 박살이 나서 불똥이 되어 떨어졌다. 아까도 무서웠는데 지금은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흉흉한 기세였다. 베헤모스는 다행히 아직 우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았지만 발걸음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라기는 숨을 헉 하고 몰아쉬더니 울상이 되어 욕을 뱉었다.

“그냥 좀 자빠지면 안 되냐. 염병할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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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