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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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어가던 나라기는 대뜸 쌓여있던 나무 상자를 주먹으로 꽝 부수더니 무언가 뒤적거렸다. 무얼 하냐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데 잠시 후 그 손에는 길쭉한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짐작컨대 아마도 포도주 병인 것 같았다. 나무 상자는 술병을 담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라기는 봉인을 이로 뜯어내고 코르크 마개도 물어 뽑았다. 잠시 킁킁 냄새를 맡던 나라기는 괜찮다 싶었는지 병을 쑥 들이켰다. 그야말로 호쾌한 기세로 병째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여기까지 꼴꼴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물을 마시는 듯하였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톡톡 털어 마신 나라기는 빈 병을 등 뒤로 아무렇게나 휙 던져버렸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날 때 나라기는 두 번째 병을 집어 들고 있었다.
“지금 무얼 하는 거예요?”
나는 기가 막혀서 따지는데 나라기는 히죽 웃더니 들고 있던 포도주 병을 휙 던졌다. 얼결에 받아들었는데 그동안 나라기는 또 한 병을 집어 봉인을 뜯고 있었다.
“저주받은 곳이지만 술맛은 일품이군.”
그러고 또 순식간에 병을 반쯤 비우더니 오히려 내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다.
“안 마시고 뭐하냐? 달달한 것이 기가 막히는데.”
거기서 드디어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야 이 주정뱅이 양반아! 퍼질러 앉아 술만 처먹고 있으면 다야? 목숨이 댓바람 앞의 성냥불 같은데 살 궁리를 해야 할 거 아냐! 네가 그깟 칼부림 좀 하면 죄다 무찌를 수 있을 거 같아!”
나라기는 빽 소리를 지르는 나를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어.”
귀를 의심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고하며 분명한 소리였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너 무슨 꼬맹이처럼 징징거리니? 어차피 우리는 마법사 왕이랑 떡 마주치게 된다고. 미로에 갇혔으니 어차피 싸워서 죽이지 않고서는 마법도 안 깨지고 빠져나가지도 못하지. 그냥 죽치고 있으면 놈이 알아서 찾아오잖아. 우리가 애써 낑낑 기어갈 필요가 뭐 있어.”
그때 갑자기 꽈꽈꽝 하고 귀가 터지는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우르르 흔들리는데 나라기가 반색을 하면서 일어섰다.
“우리의 마법사 왕이 드디어 납시었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내 얼굴이 파랗게 질렸나 보다. 나라기는 나를 아래위로 쓱쓱 훑어보더니 칼집을 흔들며 웃었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내 칼은 술을 먹어야 더 춤바람이 난다고."
컴컴한 어둠 저편에서부터 자욱한 안개가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은 안개였는데 시큼한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안개 저편에서부터 무언가 우당탕 부서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같은 것이 계속해서 들려오는데 가슴이 쿵쿵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개를 찢어발기고 거대한 늑대가 뛰쳐나왔다.
덩치가 무시무시한 늑대였다. 뻣뻣한 갈기를 세우며 노란 눈을 부라리고 으르르렁 으르렁 소리를 내는데, 그 아가리 크기를 봐서는 황소라도 통째로 꿀꺽할 수 있을 듯싶었다.
“오오.”
넋이 나갔는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소리가 나왔다. 늑대의 등에는 역시 엄청난 덩치의 기사가 올라타 있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거대한 양날 도끼를 들었다. 부는 바람에 붉은 망토가 거대한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머리꼭대기가 까마득하니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코를 괴롭히던 시큼한 냄새는 유황 냄새였다. 철갑 벌어진 틈새에서 불길이 뿜어져 유황 냄새를 매캐하게 뿌리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기사의 모습은 거의 새빨갛게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높은 곳 기사의 투구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보아라, 저 사나이가 마법사 왕이다.”
나라기는 가티노올을 빼들고 하하하 웃었지만 나는 후끈후끈한 열기에 땀이 뻘뻘 흐르고 입을 열기조차 힘겨웠다. 무어라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입이 딱 붙어버린 듯싶었다. 괴물 늑대를 타고 도끼를 비껴든 마법사의 모습은 진정 무시무시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귀를 막았다. 마법사 왕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려서 마치 귀 바로 옆에서 북을 치는 듯하였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데 나라기는 땀을 흠뻑 흘리면서도 무척이나 기세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도 이때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한때는 밝은 별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깊은 암흑으로 뒤덮인 곳의 군주여, 이제는 사라진 땅의 왕이여…… 베헤모스! 땅을 잃고 떠도는 비루하고 가엾은 망령이여!”
나라기의 조롱에 베헤모스는 크게 노했는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 순간 벼락 한 줄기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베헤모스의 고함이 들렸다.
“아르모니아의 베헤모스 왕과 맞서려 하다니— 어리석은 자들이여—!”
베헤모스가 도끼를 하늘로 치켜들고 두어 바퀴 빙빙 돌리자 커다란 불덩이가 이글이글 맺히기 시작하였다. 지금껏 자신만만한 태도로 히죽대던 나라기는 돌연 안색이 급변하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뒤돌아 뛰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요령껏 피해!”
빌어먹을! 나도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사람까지 안아들고 있으니 결코 나라기만큼 날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뛰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베헤모스가 빙빙 돌리던 도끼를 이쪽으로 척 겨누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에 나는 소녀를 꼭 안고 펄쩍 뛰어 땅바닥을 그대로 죽 미끄러졌다.
그러자마자 쿠콰콰쾅 꽈르르릉 하는 굉음이 들리고 자잘한 돌무더기가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고 잠잠해질 때까지 한참 동안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머뭇머뭇 겨우 고개를 들어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저쪽 골목이 폐허로 변하고 앙상하게 불타고 있었다. 골목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고 불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헤모스의 마법은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내 이름은 베헤모스— 아르모니아 모든 마법사들의 왕이다—!”
베헤모스를 태운 늑대가 한번 훌쩍 뛰어오르더니 나와 오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뚝 떨어졌다. 울고만 싶었다.
큼직한 노란 눈이 스르르 움직여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르렁대는 숨소리도 들렸다. 나는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턱이 제멋대로 딱딱딱딱 부딪혔다. 늑대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늑대의 눈을 외면하는 나의 눈에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뺨이 유령처럼 창백하였다.
나는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칼.”
나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 늑대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소녀가 내게 주었던 칼을 빼들며 일어섰다. 사나이로서 용감하게 칼을 들었으니 나라기처럼 한번 크게 웃어주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크으으— 키키— 키키키킥—!”
베헤모스가 비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저 웃음소리일 뿐인데도 그 싸늘한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하였다.
“그깟 쇠붙이로 나를 해하려 드느냐— 어리석은 사내구나— 그러나 그 용기를 보아서 네 목숨은 내 도끼로 거두어 주리라—!”
말이 끝나자마자 베헤모스의 도끼가 하늘 높이 솟더니 삽시간에 뚝 떨어졌다.
“베헤모스 왕 앞에 고개를 떨어뜨려라—!”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로 미치도록 살고 싶었고 저 거대한 도끼를 요 가느다란 칼로 맞받는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내빼야 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소녀의 몸이 대신 두 동강이 날 것이었다. 에잇,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무어 그리 문제냐 싶기도 했지만 오른손에 든 이 칼은 저 소녀가 주었다.
베헤모스의 도끼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칼을 들어 베헤모스의 도끼를 맞받았다!
“크으— 으으으—?”
베헤모스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어쩐지 신이 났지만 도끼가 칼 위에 올라간 상황에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베헤모스의 일격을 버텨냈다. 다만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팔이 저릿저릿하며 다리는 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토하고 싶었다.
“키이이— 크으— 으으— 왕의 도끼를 막다니— 너—!”
거대한 도끼가 또다시 높이 치솟았다. 방금 일격을 받는 데 정말 온 힘을 다했고 힘이 쭉 빠져서 이번에는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베헤모스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귀가 멀어버리도록 크게 고함을 질렀고 괴물 늑대도 덩달아 그르르릉 소리를 냈다.
그때 눈앞에 빛무리가 번쩍하더니 늑대의 대가리가 뚝 떨어졌다.
“어어.”
괴물 늑대의 거구가 넘어가며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엄청나게 많은 피가 뿜어져 일대를 온통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나도 그만 흠뻑 뒤집어썼다.
“키이이이— 크으으—!”
하지만 늑대가 쓰러지는 바람에 거기에 타고 있던 베헤모스도 중심을 잃었고 도끼도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늑대가 죽자 베헤모스는 훌쩍 몸을 띄워서 저편 지붕에 착지했다. 베헤모스의 발에 지붕은 다 부서져 내려앉았고 철갑에서 나오는 불길에 서까래가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대단해! 베헤모스의 도끼를 받았어!”
나라기가 가티노올을 흔들어 피를 털어내고 으하하하 웃었다. 그는 저 커다란 늑대의 목을 단칼에 쳐버린 것이었다. 역시 굉장한 칼솜씨였다. 나라기의 칼이 다음에는 늑대가 아니라 베헤모스의 목을 쳤으면 싶었다. 과연 나라기는 베헤모스를 향하여 힘껏 소리를 쳤다.
“베헤모스! 사악한 마법사들의 왕이여! 이번에는 너의 목을 치겠다!”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망토 속에서 베헤모스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붉은 눈에서 분노의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어두운 저편에서 활활 불타는 베헤모스의 철갑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왕의 도끼 앞에 얌전히 목을 빼어놓아라— 모두 살아남지 못하리라—!”
망토를 활짝 펼치고 화르르르 불똥을 날리며 베헤모스의 몸이 어두운 밤하늘로 날았다.
도끼를 비껴들고 어둠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베헤모스의 공포에 밤하늘 모든 별이 꼭꼭 숨어버린 듯싶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도끼를 쳐드는데 살을 태우는 뜨거운 폭풍이 그보다 먼저 불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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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이름 바꿨다능...
굽신굽신.
길을 걸어가던 나라기는 대뜸 쌓여있던 나무 상자를 주먹으로 꽝 부수더니 무언가 뒤적거렸다. 무얼 하냐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데 잠시 후 그 손에는 길쭉한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짐작컨대 아마도 포도주 병인 것 같았다. 나무 상자는 술병을 담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라기는 봉인을 이로 뜯어내고 코르크 마개도 물어 뽑았다. 잠시 킁킁 냄새를 맡던 나라기는 괜찮다 싶었는지 병을 쑥 들이켰다. 그야말로 호쾌한 기세로 병째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여기까지 꼴꼴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물을 마시는 듯하였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톡톡 털어 마신 나라기는 빈 병을 등 뒤로 아무렇게나 휙 던져버렸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날 때 나라기는 두 번째 병을 집어 들고 있었다.
“지금 무얼 하는 거예요?”
나는 기가 막혀서 따지는데 나라기는 히죽 웃더니 들고 있던 포도주 병을 휙 던졌다. 얼결에 받아들었는데 그동안 나라기는 또 한 병을 집어 봉인을 뜯고 있었다.
“저주받은 곳이지만 술맛은 일품이군.”
그러고 또 순식간에 병을 반쯤 비우더니 오히려 내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다.
“안 마시고 뭐하냐? 달달한 것이 기가 막히는데.”
거기서 드디어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야 이 주정뱅이 양반아! 퍼질러 앉아 술만 처먹고 있으면 다야? 목숨이 댓바람 앞의 성냥불 같은데 살 궁리를 해야 할 거 아냐! 네가 그깟 칼부림 좀 하면 죄다 무찌를 수 있을 거 같아!”
나라기는 빽 소리를 지르는 나를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어.”
귀를 의심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고하며 분명한 소리였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너 무슨 꼬맹이처럼 징징거리니? 어차피 우리는 마법사 왕이랑 떡 마주치게 된다고. 미로에 갇혔으니 어차피 싸워서 죽이지 않고서는 마법도 안 깨지고 빠져나가지도 못하지. 그냥 죽치고 있으면 놈이 알아서 찾아오잖아. 우리가 애써 낑낑 기어갈 필요가 뭐 있어.”
그때 갑자기 꽈꽈꽝 하고 귀가 터지는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우르르 흔들리는데 나라기가 반색을 하면서 일어섰다.
“우리의 마법사 왕이 드디어 납시었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내 얼굴이 파랗게 질렸나 보다. 나라기는 나를 아래위로 쓱쓱 훑어보더니 칼집을 흔들며 웃었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내 칼은 술을 먹어야 더 춤바람이 난다고."
컴컴한 어둠 저편에서부터 자욱한 안개가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은 안개였는데 시큼한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안개 저편에서부터 무언가 우당탕 부서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같은 것이 계속해서 들려오는데 가슴이 쿵쿵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개를 찢어발기고 거대한 늑대가 뛰쳐나왔다.
덩치가 무시무시한 늑대였다. 뻣뻣한 갈기를 세우며 노란 눈을 부라리고 으르르렁 으르렁 소리를 내는데, 그 아가리 크기를 봐서는 황소라도 통째로 꿀꺽할 수 있을 듯싶었다.
“오오.”
넋이 나갔는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소리가 나왔다. 늑대의 등에는 역시 엄청난 덩치의 기사가 올라타 있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거대한 양날 도끼를 들었다. 부는 바람에 붉은 망토가 거대한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머리꼭대기가 까마득하니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코를 괴롭히던 시큼한 냄새는 유황 냄새였다. 철갑 벌어진 틈새에서 불길이 뿜어져 유황 냄새를 매캐하게 뿌리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기사의 모습은 거의 새빨갛게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높은 곳 기사의 투구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보아라, 저 사나이가 마법사 왕이다.”
나라기는 가티노올을 빼들고 하하하 웃었지만 나는 후끈후끈한 열기에 땀이 뻘뻘 흐르고 입을 열기조차 힘겨웠다. 무어라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입이 딱 붙어버린 듯싶었다. 괴물 늑대를 타고 도끼를 비껴든 마법사의 모습은 진정 무시무시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귀를 막았다. 마법사 왕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려서 마치 귀 바로 옆에서 북을 치는 듯하였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데 나라기는 땀을 흠뻑 흘리면서도 무척이나 기세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도 이때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한때는 밝은 별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깊은 암흑으로 뒤덮인 곳의 군주여, 이제는 사라진 땅의 왕이여…… 베헤모스! 땅을 잃고 떠도는 비루하고 가엾은 망령이여!”
나라기의 조롱에 베헤모스는 크게 노했는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 순간 벼락 한 줄기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베헤모스의 고함이 들렸다.
“아르모니아의 베헤모스 왕과 맞서려 하다니— 어리석은 자들이여—!”
베헤모스가 도끼를 하늘로 치켜들고 두어 바퀴 빙빙 돌리자 커다란 불덩이가 이글이글 맺히기 시작하였다. 지금껏 자신만만한 태도로 히죽대던 나라기는 돌연 안색이 급변하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뒤돌아 뛰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요령껏 피해!”
빌어먹을! 나도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사람까지 안아들고 있으니 결코 나라기만큼 날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뛰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베헤모스가 빙빙 돌리던 도끼를 이쪽으로 척 겨누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에 나는 소녀를 꼭 안고 펄쩍 뛰어 땅바닥을 그대로 죽 미끄러졌다.
그러자마자 쿠콰콰쾅 꽈르르릉 하는 굉음이 들리고 자잘한 돌무더기가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고 잠잠해질 때까지 한참 동안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머뭇머뭇 겨우 고개를 들어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저쪽 골목이 폐허로 변하고 앙상하게 불타고 있었다. 골목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고 불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헤모스의 마법은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내 이름은 베헤모스— 아르모니아 모든 마법사들의 왕이다—!”
베헤모스를 태운 늑대가 한번 훌쩍 뛰어오르더니 나와 오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뚝 떨어졌다. 울고만 싶었다.
큼직한 노란 눈이 스르르 움직여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르렁대는 숨소리도 들렸다. 나는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턱이 제멋대로 딱딱딱딱 부딪혔다. 늑대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늑대의 눈을 외면하는 나의 눈에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뺨이 유령처럼 창백하였다.
나는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칼.”
나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 늑대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소녀가 내게 주었던 칼을 빼들며 일어섰다. 사나이로서 용감하게 칼을 들었으니 나라기처럼 한번 크게 웃어주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크으으— 키키— 키키키킥—!”
베헤모스가 비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저 웃음소리일 뿐인데도 그 싸늘한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하였다.
“그깟 쇠붙이로 나를 해하려 드느냐— 어리석은 사내구나— 그러나 그 용기를 보아서 네 목숨은 내 도끼로 거두어 주리라—!”
말이 끝나자마자 베헤모스의 도끼가 하늘 높이 솟더니 삽시간에 뚝 떨어졌다.
“베헤모스 왕 앞에 고개를 떨어뜨려라—!”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로 미치도록 살고 싶었고 저 거대한 도끼를 요 가느다란 칼로 맞받는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내빼야 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소녀의 몸이 대신 두 동강이 날 것이었다. 에잇,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무어 그리 문제냐 싶기도 했지만 오른손에 든 이 칼은 저 소녀가 주었다.
베헤모스의 도끼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칼을 들어 베헤모스의 도끼를 맞받았다!
“크으— 으으으—?”
베헤모스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어쩐지 신이 났지만 도끼가 칼 위에 올라간 상황에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베헤모스의 일격을 버텨냈다. 다만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팔이 저릿저릿하며 다리는 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토하고 싶었다.
“키이이— 크으— 으으— 왕의 도끼를 막다니— 너—!”
거대한 도끼가 또다시 높이 치솟았다. 방금 일격을 받는 데 정말 온 힘을 다했고 힘이 쭉 빠져서 이번에는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베헤모스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귀가 멀어버리도록 크게 고함을 질렀고 괴물 늑대도 덩달아 그르르릉 소리를 냈다.
그때 눈앞에 빛무리가 번쩍하더니 늑대의 대가리가 뚝 떨어졌다.
“어어.”
괴물 늑대의 거구가 넘어가며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엄청나게 많은 피가 뿜어져 일대를 온통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나도 그만 흠뻑 뒤집어썼다.
“키이이이— 크으으—!”
하지만 늑대가 쓰러지는 바람에 거기에 타고 있던 베헤모스도 중심을 잃었고 도끼도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늑대가 죽자 베헤모스는 훌쩍 몸을 띄워서 저편 지붕에 착지했다. 베헤모스의 발에 지붕은 다 부서져 내려앉았고 철갑에서 나오는 불길에 서까래가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대단해! 베헤모스의 도끼를 받았어!”
나라기가 가티노올을 흔들어 피를 털어내고 으하하하 웃었다. 그는 저 커다란 늑대의 목을 단칼에 쳐버린 것이었다. 역시 굉장한 칼솜씨였다. 나라기의 칼이 다음에는 늑대가 아니라 베헤모스의 목을 쳤으면 싶었다. 과연 나라기는 베헤모스를 향하여 힘껏 소리를 쳤다.
“베헤모스! 사악한 마법사들의 왕이여! 이번에는 너의 목을 치겠다!”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망토 속에서 베헤모스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붉은 눈에서 분노의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어두운 저편에서 활활 불타는 베헤모스의 철갑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왕의 도끼 앞에 얌전히 목을 빼어놓아라— 모두 살아남지 못하리라—!”
망토를 활짝 펼치고 화르르르 불똥을 날리며 베헤모스의 몸이 어두운 밤하늘로 날았다.
도끼를 비껴들고 어둠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베헤모스의 공포에 밤하늘 모든 별이 꼭꼭 숨어버린 듯싶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도끼를 쳐드는데 살을 태우는 뜨거운 폭풍이 그보다 먼저 불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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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이름 바꿨다능...
굽신굽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