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
벼락이 치는 높은 탑 위에 한 사나이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번쩍이는 번갯불 때문인지 사나이의 눈동자에서 이글이글 불이 이는 듯싶었다. 그가 손을 휙 쳐들자 하늘이 울었고 발을 탕 구르자 바다가 울었다. 그는 눈을 돌려 탑 아래 세상을 굽어보았다. 사나이는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눈은 아주 아주 머나먼 곳까지 볼 수 있었으니 보이지 않는 곳은 오직 저 사악한 회오리 너머뿐이었다. 그러니 누군가의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볼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의 눈이 세상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산과 강도, 바다와 숲도 마법사의 눈에는 발가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마법사가 찾아 헤매던 누군가를 보았을 때 꽈르르릉 벼락이 떨어졌다.
마법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조바심을 누르며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옛적 그였다면 당장에라도 거기까지 날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랜 힘을 잃은 그는 탑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입술을 열어 나직이 말하였다.
“오너라.”
검은 구름이 갈라지고 천둥이 쳤다. 우르릉 꽈꽝. 마법사의 말은 천둥소리에 묻히었다.
“오너라. 어서 오너라.”
운명이 그를 여기로 이끌 것이었다.
*
달빛 내리는 밤의 심연 속을 비틀비틀 헤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야흐로 여름 축제가 막이 오른 것이었다. 거리가 온통 이상한 열기로 흥청거렸고 울긋불긋한 불빛이 창유리에 번졌다. 광장이 힐끗 보였다.
거기 마을 사람들이 모여 형틀에 매인 사나이를 빙 둘러싸고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너도나도 단검 하나씩을 손에 꼭 들고 있었다. 사내, 여인, 어린아이, 늙은이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하나씩은 작은 칼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춤을 추며 형틀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묶인 사내는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노랫소리는 높아지고 곳곳에서 짙은 연기가 올랐다. 낄낄 웃음소리를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뱉어내는데 들고 있는 저 단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창틀을 잡고 일어서는데 어쩐지 귀에서 잉잉대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거듭하였다. 방안을 둘러보니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아 어쩔까 궁리하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으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이나 자빠질 뻔해 얼른 벽을 붙잡고 걸었다.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비적비적 내려가는데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고 꼭 토할 것만 같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서 계단을 제대로 밟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러니 어쩌면 발을 헛디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뚱이는 계단을 우당탕탕 굴러 떨어져 눈가를 바닥에 호되게 부딪치고 말았다. 곧 둔한 아픔이 찾아왔고 나는 눈을 감싸주고 끙끙 뒹굴었다.
그러는 내내 귓가에는 저 이상한 노래가 메아리처럼 맴돌고만 있었다. 자꾸만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했는데 가락이 몹시 아름다워 무엇이든 노래가 바라는 대로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주고 팔을 자기 어깨에 둘렀다.
"누구야?"
나는 크게 당황하였지만 몸이 어지러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더듬거리는 것뿐이었다. 몸이 끌어올려지고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이제는 그 이상한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소녀의 말을 따라 두어 번 숨을 깊이 내쉬니 어지러움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나는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들었겠지만 그녀는 어쨌든 비틀비틀 하면서도 나를 짊어 매다시피 해 걸었다. 그런데 나는 손가락 까딱하기도 버거웠고 무엇보다도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아서 그냥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소녀는 힘겨워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끝내 날 의자에 앉히고야 말았다. 어지러움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힘이 쏙 빠지는 것은 여전해서 탁자 위에 푹 엎드렸다.
온 몸이 물에 푹 젖은 솜뭉치 같은 느낌이었다. 소녀가 뭐라고 말하는 듯싶었지만 소리가 너무 멀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들어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때렸는데 그 순간만은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더니 다시 스르르 힘이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깊이 한숨짓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내 뺨을 손으로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아마도 칼을 만지는 검객이어서 그런지 소녀의 손바닥은 꽤 거칠었다. 정말이지 곱게만 자란 여자애는 아니었다.
"아시라드의 ‘만트라’…… 놀라운데."
소녀는 내 눈을 슬슬 들여다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때 위태위태하던 속이 기어이 뒤집어지고야 말았다. 진지하게 눈을 맞추고 있던 그 순간 왁 하고 그녀의 품에 온통 토한 것이었다.
일 났구나 일 났어. 그녀의 옷자락이 오물에 젖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얼굴은 불덩이처럼 화끈거리고 도저히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소녀가 당장 내 뺨에 손바닥 도장을 찍어준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고 드디어 견디지 못한 나는 더듬더듬 사과를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작았다.
"미안해."
말도 못할 정도로 화가 나서 가만히 있는가 싶었는데 금방 대꾸가 돌아왔다.
"괜찮아."
나는 추욱 움츠러들었다. 소녀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는데 그것이 꼭 화난 듯이 들린 까닭이었다.
"얼굴 들어봐."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어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소녀가 직접 고개를 들어 주었다. 서로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자니 기분이 퍽 이상하였다.
그녀는 우리 눈을 서로 맞추고 똑바로 쏘아보았는데 그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난다고 생각한 순간에 꽈꽝 하고 천둥소리가 난 듯싶었다. 벼락이라도 쳤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고 파르르 떨리는데 한동안 눈앞이 번쩍거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잠깐 허우적거렸지만 곧 제정신을 찾았다. 그런데 소녀가 코가 닿을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뺐지만 얼굴은 삽시간에 새빨개져 화끈거렸다.
그녀는 또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아까까지 몸을 옭아매던 어지러움은 사라져 있었고 이상한 노래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소녀가 내 몸에 걸린 저주를 풀어주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미처 고맙다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사악한 마을이야. 온 마을이 이 노래로 가득 찼어."
"이 노래가 무엇인데?"
내 물음에 소녀는 진지하게 눈을 반짝였다.
"아시라드의 만트라야. 진언(眞言)이라고도 해. 보통 아시라드에서 ‘요기’라고 불리는 고행자들이 수련하는 거야. 영적인 기적을 발휘하게 하는 신성한 말인데 이렇게도 쓸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네가 바로 힘을 잃은 것도 당연해."
그녀는 한꺼번에 말을 쏟아내고 또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대단한 솜씨야…… 여기에는 무척 강력한 마법사가 있을 거야."
가만히 보니 내가 앉아 있는 데는 식당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만해도 사람들이 가득 차 시끌벅적했는데 지금은 우리 둘 뿐, 벽난로의 불만 외롭게 타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서 빨리 도망쳐야 해. 저 노래는 아주 강력한 저주야. 너도 나도 오래 있으면 아마 목숨을 부지하긴 힘들 거야."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틀에 묶인 남자도?"
"응. 아마 그들에게 당했겠지. 우리도 여유 없어. 어서 가자."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는 소녀가 하는 말을 더 듣지도 않고 몸을 홱 돌려서는 계단을 마구 밟으며 뛰어올라갔다.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미처 조심하지 못하였는지도 몰랐다.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
숨이 턱 막혔다. 눈앞에는 거대한 괴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꺼칠꺼칠한 촉수가 바닥이고 천장이고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는데 그 괴물의 뒤편에는 푸르죽죽한 자루 같은 것이 달려 있었고 가운데 수백 개의 보라색 알들이 뭉쳐진 끔찍한 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이 쩍 벌어지더니 갈고리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씩거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도 나름대로 엄청 기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꿈틀대는 괴물 저 뒤쪽에 갑옷과 짐이 보였다.
어떻게든 이 괴물을 피해서 가져오려 마음먹었으나 그 촉수가 쉭 소리를 내며 날아와 문짝을 와장창 박살내는 것을 보면서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미친 듯이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부서진 문짝을 괴물에게로 집어던졌다. 날아간 문짝이 촉수에 또 맞아 더 작은 조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재빨리 바닥을 굴렀는데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촉수가 철썩 떨어지면서 마룻바닥을 부수어 놓았다. 등골이 서늘했다.
배낭은 불과 이 미터 앞에 있었다. 손을 뻗던 나는 귀를 파고드는 바람소리를 느끼고 벽 쪽으로 몸을 던졌다. 재빠르게 움직였지만 괴물의 촉수는 나보다 더 빨랐다. 왼팔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벽에 등을 기댄 나는 왼팔을 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소매가 너덜너덜하고 살이 허물어져 피가 뭉클뭉클 새어나오고 있었다. 채찍에 맞아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싸쥐고 뒹굴고 싶었지만 괴물은 기다리지 않았고 내가 또 몸을 굴리자마자 벽을 박살내어 놓았다. 그 틈에 나는 짐이 있는 곳까지 다다라서 몸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뼈아픈 실수였다.
곧장 괴물의 촉수가 붕 날아와 옆구리를 후려갈긴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벽에 파묻혀서 고개를 흔들고 있었는데 귀에서 잉잉 소리가 났다. 속이 답답하여 기침을 하자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 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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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가 나오긴 하였으나 능욕물은 아닙니다 ㄳㄳ
벼락이 치는 높은 탑 위에 한 사나이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번쩍이는 번갯불 때문인지 사나이의 눈동자에서 이글이글 불이 이는 듯싶었다. 그가 손을 휙 쳐들자 하늘이 울었고 발을 탕 구르자 바다가 울었다. 그는 눈을 돌려 탑 아래 세상을 굽어보았다. 사나이는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눈은 아주 아주 머나먼 곳까지 볼 수 있었으니 보이지 않는 곳은 오직 저 사악한 회오리 너머뿐이었다. 그러니 누군가의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볼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의 눈이 세상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산과 강도, 바다와 숲도 마법사의 눈에는 발가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마법사가 찾아 헤매던 누군가를 보았을 때 꽈르르릉 벼락이 떨어졌다.
마법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조바심을 누르며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옛적 그였다면 당장에라도 거기까지 날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랜 힘을 잃은 그는 탑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입술을 열어 나직이 말하였다.
“오너라.”
검은 구름이 갈라지고 천둥이 쳤다. 우르릉 꽈꽝. 마법사의 말은 천둥소리에 묻히었다.
“오너라. 어서 오너라.”
운명이 그를 여기로 이끌 것이었다.
*
달빛 내리는 밤의 심연 속을 비틀비틀 헤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야흐로 여름 축제가 막이 오른 것이었다. 거리가 온통 이상한 열기로 흥청거렸고 울긋불긋한 불빛이 창유리에 번졌다. 광장이 힐끗 보였다.
거기 마을 사람들이 모여 형틀에 매인 사나이를 빙 둘러싸고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너도나도 단검 하나씩을 손에 꼭 들고 있었다. 사내, 여인, 어린아이, 늙은이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하나씩은 작은 칼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춤을 추며 형틀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묶인 사내는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노랫소리는 높아지고 곳곳에서 짙은 연기가 올랐다. 낄낄 웃음소리를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뱉어내는데 들고 있는 저 단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창틀을 잡고 일어서는데 어쩐지 귀에서 잉잉대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거듭하였다. 방안을 둘러보니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아 어쩔까 궁리하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으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이나 자빠질 뻔해 얼른 벽을 붙잡고 걸었다.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비적비적 내려가는데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고 꼭 토할 것만 같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서 계단을 제대로 밟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러니 어쩌면 발을 헛디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뚱이는 계단을 우당탕탕 굴러 떨어져 눈가를 바닥에 호되게 부딪치고 말았다. 곧 둔한 아픔이 찾아왔고 나는 눈을 감싸주고 끙끙 뒹굴었다.
그러는 내내 귓가에는 저 이상한 노래가 메아리처럼 맴돌고만 있었다. 자꾸만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했는데 가락이 몹시 아름다워 무엇이든 노래가 바라는 대로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주고 팔을 자기 어깨에 둘렀다.
"누구야?"
나는 크게 당황하였지만 몸이 어지러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더듬거리는 것뿐이었다. 몸이 끌어올려지고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이제는 그 이상한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소녀의 말을 따라 두어 번 숨을 깊이 내쉬니 어지러움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나는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들었겠지만 그녀는 어쨌든 비틀비틀 하면서도 나를 짊어 매다시피 해 걸었다. 그런데 나는 손가락 까딱하기도 버거웠고 무엇보다도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아서 그냥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소녀는 힘겨워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끝내 날 의자에 앉히고야 말았다. 어지러움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힘이 쏙 빠지는 것은 여전해서 탁자 위에 푹 엎드렸다.
온 몸이 물에 푹 젖은 솜뭉치 같은 느낌이었다. 소녀가 뭐라고 말하는 듯싶었지만 소리가 너무 멀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들어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때렸는데 그 순간만은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더니 다시 스르르 힘이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깊이 한숨짓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내 뺨을 손으로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아마도 칼을 만지는 검객이어서 그런지 소녀의 손바닥은 꽤 거칠었다. 정말이지 곱게만 자란 여자애는 아니었다.
"아시라드의 ‘만트라’…… 놀라운데."
소녀는 내 눈을 슬슬 들여다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때 위태위태하던 속이 기어이 뒤집어지고야 말았다. 진지하게 눈을 맞추고 있던 그 순간 왁 하고 그녀의 품에 온통 토한 것이었다.
일 났구나 일 났어. 그녀의 옷자락이 오물에 젖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얼굴은 불덩이처럼 화끈거리고 도저히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소녀가 당장 내 뺨에 손바닥 도장을 찍어준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고 드디어 견디지 못한 나는 더듬더듬 사과를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작았다.
"미안해."
말도 못할 정도로 화가 나서 가만히 있는가 싶었는데 금방 대꾸가 돌아왔다.
"괜찮아."
나는 추욱 움츠러들었다. 소녀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는데 그것이 꼭 화난 듯이 들린 까닭이었다.
"얼굴 들어봐."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어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소녀가 직접 고개를 들어 주었다. 서로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자니 기분이 퍽 이상하였다.
그녀는 우리 눈을 서로 맞추고 똑바로 쏘아보았는데 그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난다고 생각한 순간에 꽈꽝 하고 천둥소리가 난 듯싶었다. 벼락이라도 쳤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고 파르르 떨리는데 한동안 눈앞이 번쩍거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잠깐 허우적거렸지만 곧 제정신을 찾았다. 그런데 소녀가 코가 닿을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뺐지만 얼굴은 삽시간에 새빨개져 화끈거렸다.
그녀는 또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아까까지 몸을 옭아매던 어지러움은 사라져 있었고 이상한 노래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소녀가 내 몸에 걸린 저주를 풀어주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미처 고맙다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사악한 마을이야. 온 마을이 이 노래로 가득 찼어."
"이 노래가 무엇인데?"
내 물음에 소녀는 진지하게 눈을 반짝였다.
"아시라드의 만트라야. 진언(眞言)이라고도 해. 보통 아시라드에서 ‘요기’라고 불리는 고행자들이 수련하는 거야. 영적인 기적을 발휘하게 하는 신성한 말인데 이렇게도 쓸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네가 바로 힘을 잃은 것도 당연해."
그녀는 한꺼번에 말을 쏟아내고 또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대단한 솜씨야…… 여기에는 무척 강력한 마법사가 있을 거야."
가만히 보니 내가 앉아 있는 데는 식당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만해도 사람들이 가득 차 시끌벅적했는데 지금은 우리 둘 뿐, 벽난로의 불만 외롭게 타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서 빨리 도망쳐야 해. 저 노래는 아주 강력한 저주야. 너도 나도 오래 있으면 아마 목숨을 부지하긴 힘들 거야."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틀에 묶인 남자도?"
"응. 아마 그들에게 당했겠지. 우리도 여유 없어. 어서 가자."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는 소녀가 하는 말을 더 듣지도 않고 몸을 홱 돌려서는 계단을 마구 밟으며 뛰어올라갔다.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미처 조심하지 못하였는지도 몰랐다.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
숨이 턱 막혔다. 눈앞에는 거대한 괴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꺼칠꺼칠한 촉수가 바닥이고 천장이고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는데 그 괴물의 뒤편에는 푸르죽죽한 자루 같은 것이 달려 있었고 가운데 수백 개의 보라색 알들이 뭉쳐진 끔찍한 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이 쩍 벌어지더니 갈고리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씩거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도 나름대로 엄청 기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꿈틀대는 괴물 저 뒤쪽에 갑옷과 짐이 보였다.
어떻게든 이 괴물을 피해서 가져오려 마음먹었으나 그 촉수가 쉭 소리를 내며 날아와 문짝을 와장창 박살내는 것을 보면서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미친 듯이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부서진 문짝을 괴물에게로 집어던졌다. 날아간 문짝이 촉수에 또 맞아 더 작은 조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재빨리 바닥을 굴렀는데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촉수가 철썩 떨어지면서 마룻바닥을 부수어 놓았다. 등골이 서늘했다.
배낭은 불과 이 미터 앞에 있었다. 손을 뻗던 나는 귀를 파고드는 바람소리를 느끼고 벽 쪽으로 몸을 던졌다. 재빠르게 움직였지만 괴물의 촉수는 나보다 더 빨랐다. 왼팔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벽에 등을 기댄 나는 왼팔을 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소매가 너덜너덜하고 살이 허물어져 피가 뭉클뭉클 새어나오고 있었다. 채찍에 맞아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싸쥐고 뒹굴고 싶었지만 괴물은 기다리지 않았고 내가 또 몸을 굴리자마자 벽을 박살내어 놓았다. 그 틈에 나는 짐이 있는 곳까지 다다라서 몸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뼈아픈 실수였다.
곧장 괴물의 촉수가 붕 날아와 옆구리를 후려갈긴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벽에 파묻혀서 고개를 흔들고 있었는데 귀에서 잉잉 소리가 났다. 속이 답답하여 기침을 하자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 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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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가 나오긴 하였으나 능욕물은 아닙니다 ㄳ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