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Chapter 2: Behemoth
*
잠에서 깨었을 때에도 소녀는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나는 몸에 모포가 덮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는 소녀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그녀가 덮어준 것이 분명하였지만 차가운 성격을 생각해보았을 때 조금 의외여서 나는 소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녀는 무척이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깼구나."
"내가 얼마나 잤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녀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살폈는데 끔찍하게도 입가에 침이 질척질척했다. 얼굴 한쪽을 온통 범벅을 해놓고도 목까지 끈적끈적한 것이 침을 줄줄 흘리고 잔 모양이었다. 평소 입을 헤 벌리고 자는 버릇이 이토록 낭패인 적이 없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옷소매로 쓱싹쓱싹 닦고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펄쩍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잠을 자고 나니 몸은 어제보다 더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자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을 소녀는 지금 몸을 돌려 땅굴 벽을 만져보고 있었다. 나는 에헴! 기침을 했다.
"계속 가자!"
"응."
이번에는 소녀가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섰고 나는 뒤를 천천히 밟았다.
우리 둘의 그림자가 흙벽에 길게 드리워졌다. 소녀는 꼭 할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지 이렇게 걸어가는 내내 분위기가 꽤 딱딱하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또 오빌리오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오빌리오의 텅 빈 회색 눈을 떠올렸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 위대한 지혜를 가졌지만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숲에 숨어 세월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내일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빌리오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나 그를 통하여 나를 반추해볼 수는 있었다. 분명 그와 나는 닮아 있었던 것이었다.
"다 왔어."
드디어 소녀가 멈춰 섰다. 가까이 가보니 정말 땅굴은 끊겼고 위를 들어내고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올라갈까."
"그래야지."
아무래도 남자인 내가 키가 더 컸기에 팔을 쭉 펴서 위를 들어냈다. 풀과 나무 줄기로 만들어진 뚜껑이었는데 돌이라도 누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쉽게 들렸다.
뚜껑을 치우자 하얗게 밝은 빛이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 시간이 일러 새벽빛일 뿐인데도 꼬박 반나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어서 무척 아팠다.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쩔쩔매는데 소녀는 앞서 휙 뛰어 올라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날래고 재빠른 몸이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땅을 밟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또 숲이잖아."
숲을 벗어났는가 싶었더니 다시 숲이었다.
어둠숲은 아니었다. 어둠숲은 빛이 조금도 스미지 않았지만 여기는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햇빛이 비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어둠숲을 벗어났어도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새벽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아직은 어둑하였지만 금방 해가 환히 뜰 듯싶었다.
여행을 떠난 지 불과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도 햇빛이 아주 반가웠다. 어쩌면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찌르르 찌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달달한 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슬이 또르르 떨어지고 벌레가 윙 소리를 내며 귀 옆을 비끼어 갔다. 바람에 풀이 흔들리는 것이 꼭 수런수런 말을 나누는 것 같았다.
아침 해 아래 숲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를 봐."
소녀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저기 산 아래 커다란 강이 보였다.
고향에도 강이 있었지만 느낌이 아주 달랐다. 이곳 강은 더 컸고 고요하였다. 기슭에는 이끼가 켜켜이 끼어 있었고 물빛은 초록 빛깔이었는데 반짝반짝 흐르는 것이 넋을 잃을 정도로 예쁘기만 하였다. 오리 몇 마리가 빈둥빈둥 목을 긁으며 물장구를 쳤다.
강 너머에는 큰 마을이 있었다.
옛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마을이었다. 조막조막 하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굴뚝에서 연기를 뿜고 있는데 희뿌연 아침 안개에 잠긴 마을은 그대로 그림 한 폭이었다. 깎아지른 벼랑에는 영주의 하얀 성이 장엄하였다.
"저기로 갈까."
말은 했으나 소녀가 반대하면 떼라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기에 소녀도 동의하였고 우리는 이름 모를 마을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어둠숲이 얼마나 버려진 숲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여기 숲은 사람이 오가는 곳인지 여기저기 길이 나 있어 걸음이 한결 쉬웠던 것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예상보다 빠르게 산을 내려와 강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강 위 놓인 다리는 통째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꽃과 뱀이 조각되어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공들여 만든 작품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물빛이 초록빛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강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았다. 그런데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는 낯선 문자로 무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분명 처음 보는 문자인데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더듬더듬 읽으려 하기도 전에 소녀가 앞서 낭랑하게 읽어 버렸다.
“베헤모스.”
참 예스럽기도 희한하기도 한 말이었지만 ‘베헤모스’가 마을의 이름인 듯하였다. 그런데 그 말을 읽은 소녀는 얼굴을 좀 찌푸리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녀를 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조금 친해지고 싶기도 하여 머뭇머뭇 말을 걸어 보았다.
“왜?”
“그다지 뜻이 좋지 않은 말이야.”
“어, 그래?”
“응. 아무래도 심상찮아.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소녀는 마을 이름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야, 여긴 산중인 것 같은데 길도 모르고 어딜 간단 말이야. 일단 하루만 이 마을에 있자고. 내일 일찍 떠나면 되잖아.”
나는 마을에 더욱 들어가고만 싶어졌다. 하얀 집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자꾸만 눈을 끌었다. 저 마을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소녀는 내 눈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후우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이리하여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하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하였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른부터 아이까지 너도나도 몰려들어 자기 집으로 끌어가려 했다. 그 열렬한 환영에 오히려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하여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 준 사람은 퉁퉁하고 인자한 아주머니였는데 불룩한 양 볼의 보조개가 아주 인상적이어서 웃음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어찌나 잘 대해주는지 오래된 술병까지 따려 하는 것을 말려야 했다. 내가 술을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다는 이유가 있기도 하였지만 과한 친절에 마음 한구석이 슬슬 불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술병을 따지 못해 굉장히 실망한 표정이었는데 바로 그때 소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저 사람은 뭐 하는 거죠?"
집이 마을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창밖으로 광장이 잘 들여다보였는데 한 사나이가 형틀에 몸이 꽁꽁 묶여 축 늘어져 있었다. 언뜻 봐서는 죽은 것 같았으나 가끔씩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기만 해도 오싹하였다.
사나이의 빨간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엉켜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바지에는 오물이 진득하게 눌러 붙었다. 의식을 잃었다 찾았다 하는지 이따금씩 몸이 들썩였다. 지금 죽더라고 이상하지 않을 몸인데 차라리 형틀에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나는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덩치는 꽤 좋았으나 얼마나 먹지를 못했는지 바싹 말라 눈가가 푹 파였고 입술에 침 흐른 자국이 참으로 보기 안쓰러웠다.
아주머니는 술을 다시 찬장에 올려놓으며 창을 힐끗 보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까맣고 작은 눈이 경멸과 증오로 번득거렸다.
"죄인이에요. 곧 처형당할 사람이죠."
"저 사람이요?"
형틀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이 여럿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돌팔매질까지 당한 모양이었다. 남자 이마에 큼직하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섬뜩하였다.
"언젠가 우리 마을에 온 이방인인데 여기에 꽤 오래 머무르면서 마을의 법도를 어겼지요. 마을 사람들이 잘 살아가려 정한 법이란 것이 있는 거죠. 안 그런가요? 여기에 머무는 이상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저 남자는 뻔뻔하게 그걸 어겼어요. 하!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여자는 침까지 튀겨가며 그리 말하고 헤헤헤 웃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뜩하여 연거푸 기침을 하고 말았고 여자는 저런 조심해야죠 하면서 물을 따라 주었다. 여자는 부드러이 웃었지만 마주 웃는 내 마음이 더는 편하지 않았다. 마을 이름이 나쁘다는 소녀의 말대로 여긴 참 이상한 마을이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소녀가 식탁 밑으로 발을 찼다. 나는 얼른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자리를 떨쳐 일어섰다.
"가시려고요? 아쉽네요."
"예, 가야지요. 실례가 많았어요."
여자는 은근하게 웃었다.
"이 마을에는 얼마나 머무실 거예요?"
"이제 그만 떠나고 싶어요. 가는 길이 멀어서요."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싹하여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내 옷깃을 덥석 잡으며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저런. 그러시면 안 되어요. 우리 마을에 오신 이상 하루는 머물러야 한답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시면 되잖아요.”
예쁘게 웃고 있었지만 옷깃을 잡은 손은 은근히 단단하게 쥐고 있어 뿌리치기 어려웠다. 아무 말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만 있는데 거의 말이 없던 소녀가 대신 대꾸하였다.
“그렇게 하겠어요. 내일 아침에 떠나죠.”
그제야 여자는 옷깃을 잡은 손을 풀었다. 마을에는 여행자를 위한 여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 머물기를 권하기에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다. 여자는 문을 나와서까지 손을 흔들어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안녕 하고 얼굴은 웃고 있는데 속마음은 다른 것만 같았다.
광장을 지날 때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번쩍 머리를 쳐들어 우리를 쏘아보았다. 깜짝 놀라 얼른 눈을 돌렸지만 광장을 벗어날 때까지 남자의 눈초리가 뒤를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흘끗 본 소녀의 옆얼굴이 창백하였다.
*
마을은 지금 축제 준비로 시끄러웠다.
집집하다 모두 문을 열어두었고 꽃장식이 거리를 수놓았다. 어쩌면 우리가 온 날이 축제날인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거리를 걸어가는 우리를 보면서 눈웃음을 짓기도 하고 가끔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남자들은 유쾌하게 손바닥을 부딪쳤고 여자들은 명랑하게 깔깔 웃었다.
그러다 어떤 꼬마아이가 풀꽃 다발을 주면서 축제를 기대하라며 웃었다. 나는 꽃다발을 받아들었지만 어쩐지 꼭 즐거운 기분만은 아니었다.
"아주 멋진 축제가 될 거예요. 꼭 보러 와요."
꼬마의 말로는 축제가 오늘밤에 시작된다고 한다. 우리가 여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올 듯싶었다.
*
여관 주인은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고 턱수염이 희끗희끗하였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웃을 때 주름이 가득 져 눈가 살이 구겨지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우리의 행색을 보더니 방 하나와 식사를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나는 고맙게 받아들였다.
방이 좀 작았고 침대가 하나뿐이긴 했지만 둘이서 쓰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갑옷을 벗었다. 별로 무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걸 걸치고 하루를 돌아다녔더니 어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었다.
“피곤하겠지만 잠이 들어선 안 돼. 밤에는 축제가 시작된다니 어지러울 거야. 밤을 틈타서 이 마을을 떠나야겠어.”
소녀는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이상한 마을이긴 했지만 몸이 너무 힘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은 꼭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하면 뭐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 생각을 그대로 말하자 소녀의 표정이 무섭게 딱딱해졌다.
그때 어딘가 먼 곳에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올 축제에 흥이 겨워 부르는 모양이었는데 편안한 가락이었고 목소리도 썩 멋진 노래였다. 가사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소리는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소녀가 몸을 잡아 흔들며 뭐라고 소리치는 듯싶었지만 이미 아득하니 멀어 들리지 않았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울긋불긋 노을이 지고 있었다. 구름이 수줍은 듯 발갛게 뺨을 붉혔고 새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늘에 빨간색이 깊고 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로 해가 질 것이었고 어느새 나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귓가에서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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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 Behemoth 시작했습니다.
*
잠에서 깨었을 때에도 소녀는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나는 몸에 모포가 덮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는 소녀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그녀가 덮어준 것이 분명하였지만 차가운 성격을 생각해보았을 때 조금 의외여서 나는 소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녀는 무척이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깼구나."
"내가 얼마나 잤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녀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살폈는데 끔찍하게도 입가에 침이 질척질척했다. 얼굴 한쪽을 온통 범벅을 해놓고도 목까지 끈적끈적한 것이 침을 줄줄 흘리고 잔 모양이었다. 평소 입을 헤 벌리고 자는 버릇이 이토록 낭패인 적이 없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옷소매로 쓱싹쓱싹 닦고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펄쩍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잠을 자고 나니 몸은 어제보다 더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자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을 소녀는 지금 몸을 돌려 땅굴 벽을 만져보고 있었다. 나는 에헴! 기침을 했다.
"계속 가자!"
"응."
이번에는 소녀가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섰고 나는 뒤를 천천히 밟았다.
우리 둘의 그림자가 흙벽에 길게 드리워졌다. 소녀는 꼭 할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지 이렇게 걸어가는 내내 분위기가 꽤 딱딱하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또 오빌리오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오빌리오의 텅 빈 회색 눈을 떠올렸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 위대한 지혜를 가졌지만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숲에 숨어 세월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내일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빌리오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나 그를 통하여 나를 반추해볼 수는 있었다. 분명 그와 나는 닮아 있었던 것이었다.
"다 왔어."
드디어 소녀가 멈춰 섰다. 가까이 가보니 정말 땅굴은 끊겼고 위를 들어내고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올라갈까."
"그래야지."
아무래도 남자인 내가 키가 더 컸기에 팔을 쭉 펴서 위를 들어냈다. 풀과 나무 줄기로 만들어진 뚜껑이었는데 돌이라도 누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쉽게 들렸다.
뚜껑을 치우자 하얗게 밝은 빛이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 시간이 일러 새벽빛일 뿐인데도 꼬박 반나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어서 무척 아팠다.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쩔쩔매는데 소녀는 앞서 휙 뛰어 올라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날래고 재빠른 몸이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땅을 밟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또 숲이잖아."
숲을 벗어났는가 싶었더니 다시 숲이었다.
어둠숲은 아니었다. 어둠숲은 빛이 조금도 스미지 않았지만 여기는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햇빛이 비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어둠숲을 벗어났어도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새벽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아직은 어둑하였지만 금방 해가 환히 뜰 듯싶었다.
여행을 떠난 지 불과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도 햇빛이 아주 반가웠다. 어쩌면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찌르르 찌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달달한 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슬이 또르르 떨어지고 벌레가 윙 소리를 내며 귀 옆을 비끼어 갔다. 바람에 풀이 흔들리는 것이 꼭 수런수런 말을 나누는 것 같았다.
아침 해 아래 숲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를 봐."
소녀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저기 산 아래 커다란 강이 보였다.
고향에도 강이 있었지만 느낌이 아주 달랐다. 이곳 강은 더 컸고 고요하였다. 기슭에는 이끼가 켜켜이 끼어 있었고 물빛은 초록 빛깔이었는데 반짝반짝 흐르는 것이 넋을 잃을 정도로 예쁘기만 하였다. 오리 몇 마리가 빈둥빈둥 목을 긁으며 물장구를 쳤다.
강 너머에는 큰 마을이 있었다.
옛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마을이었다. 조막조막 하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굴뚝에서 연기를 뿜고 있는데 희뿌연 아침 안개에 잠긴 마을은 그대로 그림 한 폭이었다. 깎아지른 벼랑에는 영주의 하얀 성이 장엄하였다.
"저기로 갈까."
말은 했으나 소녀가 반대하면 떼라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기에 소녀도 동의하였고 우리는 이름 모를 마을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어둠숲이 얼마나 버려진 숲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여기 숲은 사람이 오가는 곳인지 여기저기 길이 나 있어 걸음이 한결 쉬웠던 것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예상보다 빠르게 산을 내려와 강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강 위 놓인 다리는 통째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꽃과 뱀이 조각되어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공들여 만든 작품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물빛이 초록빛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강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았다. 그런데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는 낯선 문자로 무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분명 처음 보는 문자인데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더듬더듬 읽으려 하기도 전에 소녀가 앞서 낭랑하게 읽어 버렸다.
“베헤모스.”
참 예스럽기도 희한하기도 한 말이었지만 ‘베헤모스’가 마을의 이름인 듯하였다. 그런데 그 말을 읽은 소녀는 얼굴을 좀 찌푸리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녀를 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조금 친해지고 싶기도 하여 머뭇머뭇 말을 걸어 보았다.
“왜?”
“그다지 뜻이 좋지 않은 말이야.”
“어, 그래?”
“응. 아무래도 심상찮아.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소녀는 마을 이름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야, 여긴 산중인 것 같은데 길도 모르고 어딜 간단 말이야. 일단 하루만 이 마을에 있자고. 내일 일찍 떠나면 되잖아.”
나는 마을에 더욱 들어가고만 싶어졌다. 하얀 집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자꾸만 눈을 끌었다. 저 마을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소녀는 내 눈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후우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이리하여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하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하였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른부터 아이까지 너도나도 몰려들어 자기 집으로 끌어가려 했다. 그 열렬한 환영에 오히려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하여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 준 사람은 퉁퉁하고 인자한 아주머니였는데 불룩한 양 볼의 보조개가 아주 인상적이어서 웃음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어찌나 잘 대해주는지 오래된 술병까지 따려 하는 것을 말려야 했다. 내가 술을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다는 이유가 있기도 하였지만 과한 친절에 마음 한구석이 슬슬 불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술병을 따지 못해 굉장히 실망한 표정이었는데 바로 그때 소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저 사람은 뭐 하는 거죠?"
집이 마을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창밖으로 광장이 잘 들여다보였는데 한 사나이가 형틀에 몸이 꽁꽁 묶여 축 늘어져 있었다. 언뜻 봐서는 죽은 것 같았으나 가끔씩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기만 해도 오싹하였다.
사나이의 빨간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엉켜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바지에는 오물이 진득하게 눌러 붙었다. 의식을 잃었다 찾았다 하는지 이따금씩 몸이 들썩였다. 지금 죽더라고 이상하지 않을 몸인데 차라리 형틀에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나는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덩치는 꽤 좋았으나 얼마나 먹지를 못했는지 바싹 말라 눈가가 푹 파였고 입술에 침 흐른 자국이 참으로 보기 안쓰러웠다.
아주머니는 술을 다시 찬장에 올려놓으며 창을 힐끗 보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까맣고 작은 눈이 경멸과 증오로 번득거렸다.
"죄인이에요. 곧 처형당할 사람이죠."
"저 사람이요?"
형틀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이 여럿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돌팔매질까지 당한 모양이었다. 남자 이마에 큼직하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섬뜩하였다.
"언젠가 우리 마을에 온 이방인인데 여기에 꽤 오래 머무르면서 마을의 법도를 어겼지요. 마을 사람들이 잘 살아가려 정한 법이란 것이 있는 거죠. 안 그런가요? 여기에 머무는 이상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저 남자는 뻔뻔하게 그걸 어겼어요. 하!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여자는 침까지 튀겨가며 그리 말하고 헤헤헤 웃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뜩하여 연거푸 기침을 하고 말았고 여자는 저런 조심해야죠 하면서 물을 따라 주었다. 여자는 부드러이 웃었지만 마주 웃는 내 마음이 더는 편하지 않았다. 마을 이름이 나쁘다는 소녀의 말대로 여긴 참 이상한 마을이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소녀가 식탁 밑으로 발을 찼다. 나는 얼른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자리를 떨쳐 일어섰다.
"가시려고요? 아쉽네요."
"예, 가야지요. 실례가 많았어요."
여자는 은근하게 웃었다.
"이 마을에는 얼마나 머무실 거예요?"
"이제 그만 떠나고 싶어요. 가는 길이 멀어서요."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싹하여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내 옷깃을 덥석 잡으며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저런. 그러시면 안 되어요. 우리 마을에 오신 이상 하루는 머물러야 한답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시면 되잖아요.”
예쁘게 웃고 있었지만 옷깃을 잡은 손은 은근히 단단하게 쥐고 있어 뿌리치기 어려웠다. 아무 말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만 있는데 거의 말이 없던 소녀가 대신 대꾸하였다.
“그렇게 하겠어요. 내일 아침에 떠나죠.”
그제야 여자는 옷깃을 잡은 손을 풀었다. 마을에는 여행자를 위한 여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 머물기를 권하기에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다. 여자는 문을 나와서까지 손을 흔들어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안녕 하고 얼굴은 웃고 있는데 속마음은 다른 것만 같았다.
광장을 지날 때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번쩍 머리를 쳐들어 우리를 쏘아보았다. 깜짝 놀라 얼른 눈을 돌렸지만 광장을 벗어날 때까지 남자의 눈초리가 뒤를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흘끗 본 소녀의 옆얼굴이 창백하였다.
*
마을은 지금 축제 준비로 시끄러웠다.
집집하다 모두 문을 열어두었고 꽃장식이 거리를 수놓았다. 어쩌면 우리가 온 날이 축제날인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거리를 걸어가는 우리를 보면서 눈웃음을 짓기도 하고 가끔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남자들은 유쾌하게 손바닥을 부딪쳤고 여자들은 명랑하게 깔깔 웃었다.
그러다 어떤 꼬마아이가 풀꽃 다발을 주면서 축제를 기대하라며 웃었다. 나는 꽃다발을 받아들었지만 어쩐지 꼭 즐거운 기분만은 아니었다.
"아주 멋진 축제가 될 거예요. 꼭 보러 와요."
꼬마의 말로는 축제가 오늘밤에 시작된다고 한다. 우리가 여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올 듯싶었다.
*
여관 주인은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고 턱수염이 희끗희끗하였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웃을 때 주름이 가득 져 눈가 살이 구겨지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우리의 행색을 보더니 방 하나와 식사를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나는 고맙게 받아들였다.
방이 좀 작았고 침대가 하나뿐이긴 했지만 둘이서 쓰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갑옷을 벗었다. 별로 무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걸 걸치고 하루를 돌아다녔더니 어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었다.
“피곤하겠지만 잠이 들어선 안 돼. 밤에는 축제가 시작된다니 어지러울 거야. 밤을 틈타서 이 마을을 떠나야겠어.”
소녀는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이상한 마을이긴 했지만 몸이 너무 힘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은 꼭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하면 뭐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 생각을 그대로 말하자 소녀의 표정이 무섭게 딱딱해졌다.
그때 어딘가 먼 곳에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올 축제에 흥이 겨워 부르는 모양이었는데 편안한 가락이었고 목소리도 썩 멋진 노래였다. 가사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소리는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소녀가 몸을 잡아 흔들며 뭐라고 소리치는 듯싶었지만 이미 아득하니 멀어 들리지 않았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울긋불긋 노을이 지고 있었다. 구름이 수줍은 듯 발갛게 뺨을 붉혔고 새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늘에 빨간색이 깊고 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로 해가 질 것이었고 어느새 나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귓가에서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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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 Behemoth 시작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