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여기는 숲의 가장자리야. 너희들이 본 것은 이 숲의 아주 조그마한 부분일 뿐 사실은 아주 커. 어떤 뜻으로는 바다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세계는 너희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해."
"이 나무들은 보통 나무들이 아니군요."
“그거야 물론이지.”
“당신과 똑같군요.”
숲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러다 소녀와 눈이 마주치곤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껏 밤귀신이 있거나 말거나 한마디도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존재를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오빌리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것들은 어둠을 먹고 자라지. 나무들뿐만이 아니라 이 숲 안 모든 것이 그래. 이끼, 수풀, 꽃, 열매, 한낱 벌레까지도. 이곳에서는 천 년을 훌쩍 넘긴 나무들이 많아. 이 숲의 중심에는 가장 위대한 나무가 있는데 나이는 나도 짐작할 수가 없어. 지옥 밑바닥까지 뿌리가 뻗어 있는 태초의 생물이야. 줄기는 하늘까지 뻗어 있고 굵기는 산보다 더 굵지. 그 잎사귀 하나하나는 구름처럼 크고 어둠을 꾸역꾸역 뿜어내. 어둠을 전 세계에 흩뿌리는 거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어두운 감정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환상이 만든 악몽의 어머니야."
"맙소사, 어둠숲이 그렇게 큰가요?"
오빌리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 물음이 아주 재미있는 모양인지 정답게 눈을 반짝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신이 나서는 팔을 휘저어 가며 설명하였다.
"네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 악몽의 어머니는 스스로 결계(結界)를 만들지…… 아주 아주 큰 결계를 말이야. 그건 말이지, 진짜 마법이야. 지금 세상에 돌아다니는 얼치기 마법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위대한 마법이지. 아주 머나먼 시대의 신비가 그대로 남아있는 진짜 마법 말이야."
우와, 젠장. 여기서 밤귀신과 느긋이 한담을 나누는 이가 바로 나라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확실히 이건 진짜였다. 이 밤귀신은 넉살이 좋고 말솜씨는 아주 제법이어서 나는 어느새 그와의 대화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처한 상황이 생각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숲은 고대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 나도 여기가 썩 마음에 들었기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사실은 이 숲을 떠나지 않은 지가 엄청 오래 되었지. 마지막으로 햇살을 받아본 것이 언제쯤인지 기억도 희미하구나."
오빌리오는 내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곱씹을수록 말에 깊은 뜻이 있는 듯하였고 세상이 참 낯설어 보였다. 이 시커먼 사나이는 꽤 오래 살아왔던 모양인데 겉모습으로는 도저히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다만 아주 많을 거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단지 얼굴을 슬쩍 훔쳐보기만 했는데 오빌리오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금세 유쾌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래……. 나는 꽤 오래 살았지. 너희 인간들이 짐작도 못할 만큼 말이야. 나는 어떤 위대한 마법사가 지옥을 발아래 두고 하늘에 칼을 들이대는 걸 보았지. 그리고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제국이 멸망하는 것도 지켜보았어……. 세상을 휩쓰는 대홍수와 땅을 가르던 벼락이 있었던 거야. 깎아지른 빙하 위에서 내 아는 가장 강대하고 위대한 사나이가 칼을 쳐들고 당당하게 서 있었지.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겁내지 않았어. 도리어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쏘아봤는데…… 아! 정말 대단했지. 대단했어."
어느덧 오빌리오의 목소리는 마치 꿈꾸기라도 하는 듯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수백 배가 큰 나이를 가진 모양이었다. 꽤 오랜 시간 그는 회색빛 눈으로 어둠을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나뭇잎 한 장이 눈앞에 나풀나풀 떨어지자 몽상에서 깨어나 부끄러워하며 킬킬 웃었다.
“내가 너희들을 도와줄게.”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요?"
"그래, 그래. 그래야지. 잠시 추억에 빠졌군. 추억을 잠시 되새기는 것도 좋은 일이지. 더러운 것들은 모두 걸러져서 아름다움만 남게 되거든. 추억에 증오와 슬픔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영원의 존재인 우리들이라도 견디지 못할 거야.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것은 세월만은 아니지……. 어쨌든 따라와! 이대로 가다간 평생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게 될 거야. 내 집으로 초대할게. 그리고 숲 밖으로 데려다 주겠어."
오빌리오가 오른손을 번쩍 들자 손에서 퍽 소리를 내며 보라색 불꽃이 치솟아 주위를 은은하게 밝혔다.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와 소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여기 사는 엘프들을 조심해. 그 치들은 성질이 좀 나빠. 오랫동안 갇혀 살아서인지 다른 종족들에게 많이 배타적이지. 아마 너희들을 보면 공격할 거야."
소녀와 나는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시선을 주고받다가 끝내는 오빌리오를 졸졸 따랐다. 저기 이상한 이름을 가진 밤귀신은 우리에게 아주 호의적이어서 적대감을 품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밤귀신의 집에 초대받는 첫 번째 인간이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칼이 술술 뽑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칼자루를 잡고 따라갔다. 내가 따라가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주제에 품위 없이 깔깔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낮으면서도 괴이한 울림이 있었다.
"우리가 귀족(鬼族) 취급이나 받다니. 모습을 감춘 사이 인간들에게 우리는 많이 왜곡되어 알려진 모양이군! 한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지낼 때도 있었건만!"
뜻밖에도 오빌리오의 집은 별로 멀지 않았다. 그를 따라서 나무들 사이로 어둠 속으로 구불구불 들어가자 이백 발짝도 채 걷기 전에 집이 나타났다.
집은 거대한 고목의 안쪽이 텅 빈 것이었는데 나무가 얼마나 큰지 그 안쪽은 내가 살던 집보다 열 배는 더 컸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무나 식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는데 어디나 이끼가 두껍게 깔려 있어서 마치 집모양이 초록색 궤짝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들을 나무가 여럿 얽혀 만들어진 식탁에 앉게 했는데 그 나무들은 진짜 자라고 있는 것들이었고 납작한 버섯이 의자 역할을 했다. 주변에는 오빌리오의 손바닥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똑같은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낯선 곳에 들어와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는 우리를 잠시 내버려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석으로 걸어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것이었다.
잠시 뒤에 그가 먹으라고 내놓은 것은 이끼를 쪄서 네모지게 뭉쳐 놓은 것 같은 진한 초록색 덩어리였다. 나는 조금 질려서 그 무서운 덩어리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우리는 파니스라고 부르는 거야. 여기 우리들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엘프들도 곧잘 만들어 먹지. 일종의 떡인데 아주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몸에도 좋아. 어서 먹어봐."
오빌리오는 자신 있게 권했지만 생김새가 너무나 꺼림칙하여 있는 식욕조차 사라질 지경이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히히 웃더니 그걸 집어 양쪽으로 찢었다. 그것은 진짜 떡처럼 꼬리를 길게 남기며 찢어졌는데 무시무시하게도 수많은 잔뿌리들이 보였다.
나는 파니스 대신 배낭 속에 들어있는 빵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기대로 가득 찬 오빌리오의 얼굴을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덩어리와 한참 눈싸움을 하다 결국 한 조각 찢어 입에 넣었다.
예상대로 맛이 지독히도 없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물처럼 풀어져버렸는데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났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마치 흙탕물을 마시는 것만 같았다. 그는 흥미 있는 눈으로 내가 다 씹어 넘길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것도 마셔."
오빌리오가 내민 것은 투박하게 깎았지만 반들반들한 나무잔이었는데 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잔 안에서 희고 검은 물이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둘이 섞이지는 않았다. 나는 이 밤귀신이 나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건 또 뭐죠?"
"별밤나무의 수액이야. 자네의 영혼을 살찌워 줄 거야."
그 괴이한 물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냄새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버섯과 비슷한 눅눅한 냄새였는데 역시 먹기에는 몹시 꺼림칙하였다. 그러나 오빌리오는 내 언짢은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더욱 들이미는 것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좀 마셔보았다. 고약한 맛을 걱정했지만 아무 맛도 없어 그냥 보통 물처럼 느껴졌다.
"달의 마법사 라샤트 아무긴이라고 알고 있어?"
"그럼요. 너무 유명하잖아요."
'달의 마법사' 라샤트 아무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마법사라 이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지만 달의 마법사는 그 이름값이 무척이나 다르다. 태양의 마법사 주가린, 침묵의 마법사 테라와 함께 현시대 가장 위대한 마법사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달의 탑'의 주인. 아시라드의 마법사 제왕으로 아시라드 전역에서 신처럼 추앙을 받는 존재.
라샤트가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듣기로는 그의 눈길만 받아도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픽픽 쓰러지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의 병사들은 모두 몰살당한다고 했다. 물론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별 힘이 없는 라이오스 왕국이고 '강철동맹'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작은 나라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어둠숲 부근이니 왕국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지만 그런 나조차 알 정도로 라샤트 아무긴이라는 이름은 유명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그러면……."
오빌리오는 별안간 내게 무엇을 주려고 했다. 내가 달의 마법사를 안다는 말을 오해해서 들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떨결에 받고 말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메달이었는데 중앙에 오각형 안에 든 별이 음각된 것이었다. 오래된 물건인지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는데다 녹이 슬어 있었고 그걸 매달았을 줄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오빌리오는 내 손에 메달을 꼭 쥐어 주었다.
"받아. 좋은 거야."
"이게 무엇이죠?"
그는 코를 훌쩍이더니 파니스 한 조각을 집어먹고 우물거렸다.
"라샤트는 또 내 오랜 친구야. 내가 오랫동안 여기서 나가지 않았지만 설마 라샤트가 나를 잊지는 않았을 테지. 그 메달은 나와 라샤트가 맺은 우정의 증표야."
"그런데 왜 제게 이런 것을 주시는 거죠?"
“필요할 테니까.”
무슨 근거로 필요할 것인지 일언반구도 없었지만 거절해보았자 좋을 일이 없을 것만 같아서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나는 속뜻을 묻는 눈빛을 보냈지만 오빌리오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더니 끄어억 하고 귀에 거슬리는 거대한 트림소리를 냈다.
"자아, 그럼 슬슬 가자고."
그는 일어서서 바닥을 더듬거리다 나무덩굴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끼가 덮여 있던 바닥 한 부분이 활짝 열리더니 지하로 뚫려있는 땅굴이 나타났는데 곰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굴이었다. 안으로 한 발 들어가 보자 굴을 따라서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기로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날 만나지 못했으면 너희들 여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이거 농담이 아니야."
"고맙습니다."
그는 몹시 으스대었지만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었기에 나는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고 소녀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오빌리오는 웃으면서 나무토막에 공중에 떠 있던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벌써 횃불을 들고 땅굴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갔지만 지금껏 말없던 소녀는 별안간 그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왜 숲을 벗어나지 않아요? 땅굴을 통하면 쉽게 나갈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들은 오빌리오가 웃음을 멈추고 소녀를 쏘아보아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고 다시 명랑한 모습이 되어서는 킬킬 웃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나는 오빌리오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기에 그전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내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군, 아가씨. 아주 머나먼 옛날에는 우리들과 인간이 어울려 살았지. 아직도 그때를 똑똑하게 기억해.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리는 멀어지고 말았고 나는 여기에 숨었어. 이제 나는 너무나 약해졌고 해가 두려워. 어쩌면 변한 세월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르지."
"정말인가요?"
소녀는 추궁하듯 물었고 오빌리오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이지."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보던 나는 그쯤에서 소녀를 말렸고 오빌리오는 우리를 웃는 눈으로 배웅하였다.
"우리는 아마 다시 만날 거야. 그때까지 안녕."
오빌리오는 뜻을 모를 말을 남기고 거짓말처럼 스르르 사라져 흔적도 없었다. 오빌리오의 말대로라면 땅굴로 가야 하겠지만 소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횃불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었다.
“저기, 우리 어떡할까?”
“가야지.”
소녀는 앞장서 땅굴로 쑥 들어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빌리오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아마 이 굴을 통해서 숲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정말일 거야.”
내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어쩐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쳐 걸었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아주 피곤했다. 아마 오늘밤 많은 일을 한꺼번에 겪어서 그런 것 같았다. 좀 버티려고 해보았지만 땅굴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고 걸음도 점점 느려지는 것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녀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피곤하다."
"자."
소녀는 차갑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짧게 대답하고 내 손에서 횃불을 홱 채갔다. 그 손이 너무 빨라서 나는 얼결에 횃불을 넘겨주고 말았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그녀가 내 옆에 반듯이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잠을 자지 않을 모양이었다. 남녀의 역할이 좀 바뀐 것 같았지만 마치 공주를 호위하는 기사 같아 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여행의 시작치고는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은 잠시뿐이었고 나는 곧 달콤한 잠에 혼곤히 빠져들었다.
<계속>
----
밤귀신의 이름을 '오빌리오'로 바꾸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보통 나무들이 아니군요."
“그거야 물론이지.”
“당신과 똑같군요.”
숲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러다 소녀와 눈이 마주치곤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껏 밤귀신이 있거나 말거나 한마디도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존재를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오빌리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것들은 어둠을 먹고 자라지. 나무들뿐만이 아니라 이 숲 안 모든 것이 그래. 이끼, 수풀, 꽃, 열매, 한낱 벌레까지도. 이곳에서는 천 년을 훌쩍 넘긴 나무들이 많아. 이 숲의 중심에는 가장 위대한 나무가 있는데 나이는 나도 짐작할 수가 없어. 지옥 밑바닥까지 뿌리가 뻗어 있는 태초의 생물이야. 줄기는 하늘까지 뻗어 있고 굵기는 산보다 더 굵지. 그 잎사귀 하나하나는 구름처럼 크고 어둠을 꾸역꾸역 뿜어내. 어둠을 전 세계에 흩뿌리는 거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어두운 감정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환상이 만든 악몽의 어머니야."
"맙소사, 어둠숲이 그렇게 큰가요?"
오빌리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 물음이 아주 재미있는 모양인지 정답게 눈을 반짝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신이 나서는 팔을 휘저어 가며 설명하였다.
"네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 악몽의 어머니는 스스로 결계(結界)를 만들지…… 아주 아주 큰 결계를 말이야. 그건 말이지, 진짜 마법이야. 지금 세상에 돌아다니는 얼치기 마법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위대한 마법이지. 아주 머나먼 시대의 신비가 그대로 남아있는 진짜 마법 말이야."
우와, 젠장. 여기서 밤귀신과 느긋이 한담을 나누는 이가 바로 나라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확실히 이건 진짜였다. 이 밤귀신은 넉살이 좋고 말솜씨는 아주 제법이어서 나는 어느새 그와의 대화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처한 상황이 생각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숲은 고대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 나도 여기가 썩 마음에 들었기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사실은 이 숲을 떠나지 않은 지가 엄청 오래 되었지. 마지막으로 햇살을 받아본 것이 언제쯤인지 기억도 희미하구나."
오빌리오는 내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곱씹을수록 말에 깊은 뜻이 있는 듯하였고 세상이 참 낯설어 보였다. 이 시커먼 사나이는 꽤 오래 살아왔던 모양인데 겉모습으로는 도저히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다만 아주 많을 거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단지 얼굴을 슬쩍 훔쳐보기만 했는데 오빌리오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금세 유쾌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래……. 나는 꽤 오래 살았지. 너희 인간들이 짐작도 못할 만큼 말이야. 나는 어떤 위대한 마법사가 지옥을 발아래 두고 하늘에 칼을 들이대는 걸 보았지. 그리고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제국이 멸망하는 것도 지켜보았어……. 세상을 휩쓰는 대홍수와 땅을 가르던 벼락이 있었던 거야. 깎아지른 빙하 위에서 내 아는 가장 강대하고 위대한 사나이가 칼을 쳐들고 당당하게 서 있었지.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겁내지 않았어. 도리어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쏘아봤는데…… 아! 정말 대단했지. 대단했어."
어느덧 오빌리오의 목소리는 마치 꿈꾸기라도 하는 듯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수백 배가 큰 나이를 가진 모양이었다. 꽤 오랜 시간 그는 회색빛 눈으로 어둠을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나뭇잎 한 장이 눈앞에 나풀나풀 떨어지자 몽상에서 깨어나 부끄러워하며 킬킬 웃었다.
“내가 너희들을 도와줄게.”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요?"
"그래, 그래. 그래야지. 잠시 추억에 빠졌군. 추억을 잠시 되새기는 것도 좋은 일이지. 더러운 것들은 모두 걸러져서 아름다움만 남게 되거든. 추억에 증오와 슬픔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영원의 존재인 우리들이라도 견디지 못할 거야.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것은 세월만은 아니지……. 어쨌든 따라와! 이대로 가다간 평생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게 될 거야. 내 집으로 초대할게. 그리고 숲 밖으로 데려다 주겠어."
오빌리오가 오른손을 번쩍 들자 손에서 퍽 소리를 내며 보라색 불꽃이 치솟아 주위를 은은하게 밝혔다.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와 소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여기 사는 엘프들을 조심해. 그 치들은 성질이 좀 나빠. 오랫동안 갇혀 살아서인지 다른 종족들에게 많이 배타적이지. 아마 너희들을 보면 공격할 거야."
소녀와 나는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시선을 주고받다가 끝내는 오빌리오를 졸졸 따랐다. 저기 이상한 이름을 가진 밤귀신은 우리에게 아주 호의적이어서 적대감을 품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밤귀신의 집에 초대받는 첫 번째 인간이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칼이 술술 뽑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칼자루를 잡고 따라갔다. 내가 따라가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주제에 품위 없이 깔깔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낮으면서도 괴이한 울림이 있었다.
"우리가 귀족(鬼族) 취급이나 받다니. 모습을 감춘 사이 인간들에게 우리는 많이 왜곡되어 알려진 모양이군! 한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지낼 때도 있었건만!"
뜻밖에도 오빌리오의 집은 별로 멀지 않았다. 그를 따라서 나무들 사이로 어둠 속으로 구불구불 들어가자 이백 발짝도 채 걷기 전에 집이 나타났다.
집은 거대한 고목의 안쪽이 텅 빈 것이었는데 나무가 얼마나 큰지 그 안쪽은 내가 살던 집보다 열 배는 더 컸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무나 식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는데 어디나 이끼가 두껍게 깔려 있어서 마치 집모양이 초록색 궤짝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들을 나무가 여럿 얽혀 만들어진 식탁에 앉게 했는데 그 나무들은 진짜 자라고 있는 것들이었고 납작한 버섯이 의자 역할을 했다. 주변에는 오빌리오의 손바닥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똑같은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낯선 곳에 들어와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는 우리를 잠시 내버려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석으로 걸어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것이었다.
잠시 뒤에 그가 먹으라고 내놓은 것은 이끼를 쪄서 네모지게 뭉쳐 놓은 것 같은 진한 초록색 덩어리였다. 나는 조금 질려서 그 무서운 덩어리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우리는 파니스라고 부르는 거야. 여기 우리들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엘프들도 곧잘 만들어 먹지. 일종의 떡인데 아주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몸에도 좋아. 어서 먹어봐."
오빌리오는 자신 있게 권했지만 생김새가 너무나 꺼림칙하여 있는 식욕조차 사라질 지경이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히히 웃더니 그걸 집어 양쪽으로 찢었다. 그것은 진짜 떡처럼 꼬리를 길게 남기며 찢어졌는데 무시무시하게도 수많은 잔뿌리들이 보였다.
나는 파니스 대신 배낭 속에 들어있는 빵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기대로 가득 찬 오빌리오의 얼굴을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덩어리와 한참 눈싸움을 하다 결국 한 조각 찢어 입에 넣었다.
예상대로 맛이 지독히도 없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물처럼 풀어져버렸는데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났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마치 흙탕물을 마시는 것만 같았다. 그는 흥미 있는 눈으로 내가 다 씹어 넘길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것도 마셔."
오빌리오가 내민 것은 투박하게 깎았지만 반들반들한 나무잔이었는데 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잔 안에서 희고 검은 물이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둘이 섞이지는 않았다. 나는 이 밤귀신이 나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건 또 뭐죠?"
"별밤나무의 수액이야. 자네의 영혼을 살찌워 줄 거야."
그 괴이한 물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냄새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버섯과 비슷한 눅눅한 냄새였는데 역시 먹기에는 몹시 꺼림칙하였다. 그러나 오빌리오는 내 언짢은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더욱 들이미는 것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좀 마셔보았다. 고약한 맛을 걱정했지만 아무 맛도 없어 그냥 보통 물처럼 느껴졌다.
"달의 마법사 라샤트 아무긴이라고 알고 있어?"
"그럼요. 너무 유명하잖아요."
'달의 마법사' 라샤트 아무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마법사라 이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지만 달의 마법사는 그 이름값이 무척이나 다르다. 태양의 마법사 주가린, 침묵의 마법사 테라와 함께 현시대 가장 위대한 마법사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달의 탑'의 주인. 아시라드의 마법사 제왕으로 아시라드 전역에서 신처럼 추앙을 받는 존재.
라샤트가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듣기로는 그의 눈길만 받아도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픽픽 쓰러지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의 병사들은 모두 몰살당한다고 했다. 물론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별 힘이 없는 라이오스 왕국이고 '강철동맹'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작은 나라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어둠숲 부근이니 왕국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지만 그런 나조차 알 정도로 라샤트 아무긴이라는 이름은 유명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그러면……."
오빌리오는 별안간 내게 무엇을 주려고 했다. 내가 달의 마법사를 안다는 말을 오해해서 들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떨결에 받고 말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메달이었는데 중앙에 오각형 안에 든 별이 음각된 것이었다. 오래된 물건인지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는데다 녹이 슬어 있었고 그걸 매달았을 줄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오빌리오는 내 손에 메달을 꼭 쥐어 주었다.
"받아. 좋은 거야."
"이게 무엇이죠?"
그는 코를 훌쩍이더니 파니스 한 조각을 집어먹고 우물거렸다.
"라샤트는 또 내 오랜 친구야. 내가 오랫동안 여기서 나가지 않았지만 설마 라샤트가 나를 잊지는 않았을 테지. 그 메달은 나와 라샤트가 맺은 우정의 증표야."
"그런데 왜 제게 이런 것을 주시는 거죠?"
“필요할 테니까.”
무슨 근거로 필요할 것인지 일언반구도 없었지만 거절해보았자 좋을 일이 없을 것만 같아서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나는 속뜻을 묻는 눈빛을 보냈지만 오빌리오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더니 끄어억 하고 귀에 거슬리는 거대한 트림소리를 냈다.
"자아, 그럼 슬슬 가자고."
그는 일어서서 바닥을 더듬거리다 나무덩굴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끼가 덮여 있던 바닥 한 부분이 활짝 열리더니 지하로 뚫려있는 땅굴이 나타났는데 곰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굴이었다. 안으로 한 발 들어가 보자 굴을 따라서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기로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날 만나지 못했으면 너희들 여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이거 농담이 아니야."
"고맙습니다."
그는 몹시 으스대었지만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었기에 나는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고 소녀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오빌리오는 웃으면서 나무토막에 공중에 떠 있던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벌써 횃불을 들고 땅굴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갔지만 지금껏 말없던 소녀는 별안간 그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왜 숲을 벗어나지 않아요? 땅굴을 통하면 쉽게 나갈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들은 오빌리오가 웃음을 멈추고 소녀를 쏘아보아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고 다시 명랑한 모습이 되어서는 킬킬 웃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나는 오빌리오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기에 그전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내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군, 아가씨. 아주 머나먼 옛날에는 우리들과 인간이 어울려 살았지. 아직도 그때를 똑똑하게 기억해.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리는 멀어지고 말았고 나는 여기에 숨었어. 이제 나는 너무나 약해졌고 해가 두려워. 어쩌면 변한 세월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르지."
"정말인가요?"
소녀는 추궁하듯 물었고 오빌리오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이지."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보던 나는 그쯤에서 소녀를 말렸고 오빌리오는 우리를 웃는 눈으로 배웅하였다.
"우리는 아마 다시 만날 거야. 그때까지 안녕."
오빌리오는 뜻을 모를 말을 남기고 거짓말처럼 스르르 사라져 흔적도 없었다. 오빌리오의 말대로라면 땅굴로 가야 하겠지만 소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횃불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었다.
“저기, 우리 어떡할까?”
“가야지.”
소녀는 앞장서 땅굴로 쑥 들어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빌리오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아마 이 굴을 통해서 숲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정말일 거야.”
내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어쩐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쳐 걸었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아주 피곤했다. 아마 오늘밤 많은 일을 한꺼번에 겪어서 그런 것 같았다. 좀 버티려고 해보았지만 땅굴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고 걸음도 점점 느려지는 것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녀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피곤하다."
"자."
소녀는 차갑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짧게 대답하고 내 손에서 횃불을 홱 채갔다. 그 손이 너무 빨라서 나는 얼결에 횃불을 넘겨주고 말았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그녀가 내 옆에 반듯이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잠을 자지 않을 모양이었다. 남녀의 역할이 좀 바뀐 것 같았지만 마치 공주를 호위하는 기사 같아 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여행의 시작치고는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은 잠시뿐이었고 나는 곧 달콤한 잠에 혼곤히 빠져들었다.
<계속>
----
밤귀신의 이름을 '오빌리오'로 바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