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Blackout


*

"너는 누구야."

나의 물음에 소녀는 대답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보름달을 등지고 서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인데 어쩌면 정말로 듣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지만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발을 움직여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 앉을 때까지 소녀는 여전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방안에는 아직도 달빛이 가득하였다. 밤하늘은 빛과 어둠이 적당히 섞여서 보랏빛 같기도 하고 남색 같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여자애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는 내 또래들보다 키가 훨씬 큰 편이었는데 그녀도 여자치고는 상당히 큰 키에 새하얀 망토를 입고 있었고 갈색 배낭을 가로질러 메었다. 잘 보면 망토 옆으로 칼자루가 삐죽 튀어나와 있어 칼을 차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는데 아주 잘 어울렸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얼굴에 차분한 갈색 눈동자. 머리카락은 어깨를 약간 넘을 정도로 길렀는데 이 역시 갈색이었다. 차가운 인상이었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주 예쁜 소녀였다. 여기 아주 오래 살았지만 이렇게 예쁜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스스로가 당황하여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분위기에 밀려 어느새 그녀가 여기 들어와 있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소녀의 눈동자를 보는 그 순간에 겁이 덜컥 났다. 이 집 뒤편이 바로 어둠숲이라는 것이 새삼 떠오르는데 이 소녀는 보름달 비치는 밤 조용히 찾아온다는 밤귀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인사하였다.

"안녕."

그녀가 내민 손은 작았지만 손가락은 꽤 긴 편이었다. 하얀 손을 보며 나는 이때가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라는 것을 알았다. 오랜 세월 우두커니 눌러앉아 있던 곳을 떠날 때가 왔고 이때를 그냥 보내버린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손발이 어지러웠지만 어쨌든 나는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는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는데 그제야 손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떼었다.
나는 워낙에 가진 것이 없어 떠나는 데에 챙길 짐도 없었으나 소녀가 다가와 무엇인가를 한 무더기 내밀었다. 웬 갑옷과 망토 그리고 칼 한 자루였다.
갑옷은 여러 개의 철제 고리가 촘촘하게 짜여 조끼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안에는 옷감이 덧대어져 있어 한눈에도 훌륭한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망토는 몸 전체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큰데다 온통 새카만 것이었는데 커다란 후드까지 달려 있어 어둠 속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칼을 넘겨받았다. 칼을 빼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은 것이 신기한데 칼날은 온통 새카만 색이어서 달에 비추어 보자 검푸른 빛이 흐르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홀린 듯 칼을 달에 비추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하였다. 어쩌면 그때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을 돌려 발을 멈추었으면 그냥 거기서 끝났을 일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발을 떼어 걸었고 소녀가 뒤에 따라붙었다. 다만 떠나기 전 사위를 둘러보고 듣는 이 없는 말을 하였다.

"안녕."

아무도 듣지 않는 작별인사를 하며 어쩌면 지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겠다 짐작했다. 잠깐 머뭇거리며 소녀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이 기다리기만 하였다.
밤하늘에 파란 보름달, 흐드러지게 반짝이는 별이 있었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훌쩍 떠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내 살던 곳에 작별을 고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집 뒤편으로 돌아가 어둠숲으로 걸었다. 어둠숲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었는데 아주 오래되고 사악한 나무들이 있다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숲은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아서 풀이 빽빽하였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숲 안쪽도 빛 한 점 없어 여기를 지나려면 퍽 고생할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하였고 낯선 여자애와 함께 어둠숲으로 향하였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물었더니 소녀가 답하였다.

"침묵의 탑으로 가야 해."

*

짐작한 대로 어둠숲 안은 온통 시커멓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밤을 그대로 머금은 듯 빛이 없었다. 눈앞 몇 걸음까지만 윤곽이 보일 뿐이고 나무들 사이사이 저 안쪽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사과를 얻으려고 낮에는 몇 번 와보았지만 밤은 처음이었고 아마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밤에 온 이는 나뿐일 것이다. 여름밤이어서 그런지 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답답한 어둠은 나의 정신을 온통 흔들어 놓아 조금밖에 걸어가지 않았는데 식은땀이 흐르고 마음 한구석이 오싹해졌다.

"너무 어두워."

소녀가 품속을 뒤적이다가 무언가 민들레 씨앗 같은 것들을 휙 뿌리자 그것들이 둥둥 떠서는 빛을 뿌렸다. 작은 빛이었지만 워낙에 어두워서 그런지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마음이 놓였다.
그 순간 비명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나무들이 꽥 비명을 지르며 가지들을 움직여 도망치려 하는 것이었다. 나무껍질이 마치 절규하듯 괴상한 형상을 만들어내며 우직우직 소리를 내었고 어둠은 빛에 밀려 아우성치며 저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등골에 서늘한 땀방울이 한 줄기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갔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속 걸었다. 말이라도 걸어주면 훨씬 안심이 될 텐데 소녀는 지독히도 말을 아꼈고 나는 쉴새없이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숲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살아온 듯 모두 새카만 색을 띠고 있었고 엄청나게 오래되어 커다란 것들이었다. 줄기는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굵었고 뿌리가 땅에 주름을 잡으며 서로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역시 검은 이끼는 지면을 두껍게 덮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양탄자를 밟는 것처럼 푹신푹신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지만 상당히 오래 걸은 것만은 분명했다.
숲의 심장부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커지고 빽빽해지는데 풀까지 수북하게 자라 있어 헤집고 발을 딛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어둠숲을 지나는 동안 정말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내가 앞장서서 걸어갔고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잘 따라왔다. 나는 슬슬 숨이 차는데 그녀는 조금도 숨 가쁜 기색이 보이지 않아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 떠돌던 빛이 삽시간에 모두 꺼져 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사위는 다시 짙은 어둠에 휩싸였고 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긴장하여 누가 등을 툭 쳤다면 악 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아주 느릿느릿 나무 사이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에 절로 숨이 가빠졌다. 사위는 무척 조용하여 나도 내가 숨을 씩씩 쉬는 것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덩치가 아주 좋았고 생김새가 어딘가 좀 이상해 보였다.
그림자를 향해 용기 있게 외치고 필요하다면 위협도 해보려 했건만 목소리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고 도리어 스스로 듣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누구지?"

그림자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어떻게 보면 춤을 추는 것 같았는데 그 그림자는 그렇게 빙글빙글 다가오더니 어떤 사나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름다워 보였고 또 어떻게 보면 추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더없이 유쾌해 보이기도 했다. 어린아이처럼 보였다가는 곧 노인의 얼굴로 변하기도 하였다. 남자는 흰자위 중앙에 박힌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껄껄 웃다가 조금 전 내 물음에 대꾸했다.

"밤귀신."

뭐라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밤귀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벌써 난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어둠숲에 들어와서 진짜 밤귀신을 보게 된 것이었다.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나는 승려도 신부도 아니었고 단지 열일곱 살 소년이었기에 무서워 몸이 뻣뻣하였다.
칼을 들기는 들었으나 나는 칼 쓰는 법을 모른다. 저 무서운 밤귀신이 나 같은 얼치기 칼잡이의 칼에 당할까? 아니, 밤귀신이 칼에 베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칼끝으로 밤귀신을 위협하며 최대한 무섭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위험한 칼을 가지고 있군."

남자는 빙긋 웃으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내 손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칼을 다시 칼집에 쑥 집어넣어 버렸다. 나는 황급히 검을 다시 빼내려고 했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칼은 마치 칼집에 붙어버린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애써봐야 헛수고야."

이제 무엇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칼자루를 잡고 낑낑대는 내 모습이 퍽 재미있는 모양인지 밤귀신은 실실 웃으면서 신나게 조잘거렸다. 나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칼을 포기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지는 것이었다.

"당신, 진짜 밤귀신입니까?"
"아, 미안해. 너희들 언어로 말하는데 힘이 드는군. 백 년도 더 전에 배워서 말이야.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우리들을 그렇게 부르더군. 나는 물결비늘족(波鱗族)의 '오빌리오'라고 하네."
"이상한 이름이군요."
"내게는 인간들의 이름이 우습게 들리는걸."

오빌리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더 걸어 나왔는데 내가 제풀에 놀라 펄쩍 뛰자 그는 피식 웃었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바지뿐 맨발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어 마치 남쪽의 야만족 같은 행색이었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 해골처럼 하얀 피부에 커다란 회색 눈동자는 아주 신비하여 무서움도 잊게 할 정도였다. 머리에는 검은색 불길이 머리카락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빌리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물결비늘족이라는 괴상한 말을 이해하였다. 갑옷처럼 탄탄한 근육을 드러낸 몸에는 새카만 비늘이 물결처럼 번들거렸고 그의 몸에서 하얀 부분은 손과 얼굴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