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어둠을 넘어서
Beyond The Darkness
1부 어둠 Darkness
Prologue: Moonmadness
*
어떤 순간은 영원과도 같다.
내게도 때때로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는 우유를 싫어한다. 우유를 마실 때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끈적끈적한 느낌과 그 텁텁함이 싫었고 마신 뒤 목구멍에는 거미줄이라도 쳐 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입가에 남는 하얀 자국도 싫었기에 나는 오래 전부터 우유를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사과즙은 좋아한다. 내가 사는 집 뒤편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어둠숲이라 부르며, 밤귀신이 출몰한다고 무서워해서 밤이건 낮이건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숲은 낮에도 어두웠지만 낮에는 밤귀신은커녕 다람쥐 한 마리도 없었다. 하여튼 그곳에는 사과가 많았으며 썩은 것처럼 거무튀튀하긴 했지만 맛은 썩 괜찮았다.
잘 익은 사과를 주머니에 넣고 양옆에서 꽉 조여 짜면 쪼그라든 사과에서 향기롭고도 달콤한 즙이 흘러나왔다. 사과즙을 컵 안에 받아, 한 방울도 아까워 찔끔찔끔 소중히 마시었다. 사과즙이 목으로 넘어갈 때면 긴장이 풀리며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과, 날카로운 갈증과, 잘 익은 사과의 달콤한 향은 한데 뒤섞여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일상의 작은 행복을 맛보며 홀로 조용한 행복을 느꼈다.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여겼다.
어린 시절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혼자 남겨진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사람들조차 기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래 전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려 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진다. 그것은 기억의 공백이었고 알아볼 수 없이 흐릿하여 이따금씩 나를 감상에 젖게 할 뿐이다. 가끔 꿈에서 기억이 되돌아 올 때가 있었는데 그런 기억들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를 때마다 나는 잔인한 고통에 몸을 떨었고 깨어나서는 역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세월은 모든 것을 까맣게 칠한다.
소중했던 것도 세월 앞에서는 조금씩 빛을 잃어 가고 결국은 낡아 떨어지고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터무니없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분명한 진리였다.
홀로 남겨진 나는 아직 어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부터 나는 고독하게 변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홀로 도움 없이 지금껏 잘 해왔지만 때때로 혼자라는 것이 쓸쓸하고 힘겨워질 때도 있었다.
가끔 답답한 외로움이 밀려올 때마다 저 멀리 끝없이 뻗은 지평선을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시간이 밀려가 아침도 금세 밤이 되었다.
내 또래들은 나와 전혀 가깝지 못했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꼭 내가 다른 또래들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고, 키가 크고, 무표정하고 눈매가 날카로웠으며, 밤귀신처럼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길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나를 피했지만 그들이 나를 멀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그들을 멀리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들과 나는 영혼이 너무나 달랐다. 나는 친구를 원했으나 이곳 사람들보다는 태양과 비와 눈과 흙과 바람이 좋았다. 바람이 속삭이는 노랫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졌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사람 친구를 원하였다. 나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흐르는 피를 부드럽게 핥아 주고 눈물을 떨어뜨려 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나는 집을 나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갔다.
가을이 오기 전 막바지 여름 태양은 맹렬하게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강물에 햇빛이 비쳐 반짝반짝했고 푸른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들이 둥둥 떠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혀 주었다.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이름 그대로 생겨먹은 난쟁이언덕 위의 풍차는 오늘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고 어린아이들은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는 길 한가운데를 깔깔거리며 뛰어갔다. 나는 조금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보면 볼수록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 나는 영혼이 다르다. 본질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퍼즐놀이와 같은 것……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인간이다. 그것들은 서로 맞는 조각끼리 끼워지고 끼워져서 관계를 만들지만 그 수많은 조각들 중 나와 맞는 조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 나는 폭풍 안에 있어 사나운 발톱을 피해 마음을 잠시 쉬게 해 줄 수 있는 안식을 원하였다. 어깨에 기대고, 꽉 끌어안고, 품에 안겨서 잠들 수 있는 안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역시나 오늘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밤이 될 때까지 골목에 조용히 앉아서 그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달이 떠오르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 안으로 사라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차가운 보름달은 음울한 달빛만을 던져주었고 창틀을 넘어 집 안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장에 달빛의 차가운 맥동이 느껴져 마치 달과 함께 숨을 쉬는 듯하였다. 그 숨결은 영혼으로 스며들어 나를 깊고 음습한 심연 속으로 떨어지게 했다.
끝없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일탈을 생각한다. 견딜 수가 없다. 지독할 정도로 평화롭고 고요한 이곳을 떠나 이곳저곳을 헤매고 싶다. 마음 가는 대로 보이는 대로 발걸음 가는 대로 바람이 불고 태양이 손짓하는 곳으로. 내가 애타게 갈망하는 사람을 찾아서.
나는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계속>
Beyond The Darkness
1부 어둠 Darkness
Prologue: Moonmadness
*
어떤 순간은 영원과도 같다.
내게도 때때로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는 우유를 싫어한다. 우유를 마실 때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끈적끈적한 느낌과 그 텁텁함이 싫었고 마신 뒤 목구멍에는 거미줄이라도 쳐 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입가에 남는 하얀 자국도 싫었기에 나는 오래 전부터 우유를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사과즙은 좋아한다. 내가 사는 집 뒤편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어둠숲이라 부르며, 밤귀신이 출몰한다고 무서워해서 밤이건 낮이건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숲은 낮에도 어두웠지만 낮에는 밤귀신은커녕 다람쥐 한 마리도 없었다. 하여튼 그곳에는 사과가 많았으며 썩은 것처럼 거무튀튀하긴 했지만 맛은 썩 괜찮았다.
잘 익은 사과를 주머니에 넣고 양옆에서 꽉 조여 짜면 쪼그라든 사과에서 향기롭고도 달콤한 즙이 흘러나왔다. 사과즙을 컵 안에 받아, 한 방울도 아까워 찔끔찔끔 소중히 마시었다. 사과즙이 목으로 넘어갈 때면 긴장이 풀리며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과, 날카로운 갈증과, 잘 익은 사과의 달콤한 향은 한데 뒤섞여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일상의 작은 행복을 맛보며 홀로 조용한 행복을 느꼈다.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여겼다.
어린 시절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혼자 남겨진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사람들조차 기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래 전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려 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진다. 그것은 기억의 공백이었고 알아볼 수 없이 흐릿하여 이따금씩 나를 감상에 젖게 할 뿐이다. 가끔 꿈에서 기억이 되돌아 올 때가 있었는데 그런 기억들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를 때마다 나는 잔인한 고통에 몸을 떨었고 깨어나서는 역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세월은 모든 것을 까맣게 칠한다.
소중했던 것도 세월 앞에서는 조금씩 빛을 잃어 가고 결국은 낡아 떨어지고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터무니없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분명한 진리였다.
홀로 남겨진 나는 아직 어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부터 나는 고독하게 변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홀로 도움 없이 지금껏 잘 해왔지만 때때로 혼자라는 것이 쓸쓸하고 힘겨워질 때도 있었다.
가끔 답답한 외로움이 밀려올 때마다 저 멀리 끝없이 뻗은 지평선을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시간이 밀려가 아침도 금세 밤이 되었다.
내 또래들은 나와 전혀 가깝지 못했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꼭 내가 다른 또래들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고, 키가 크고, 무표정하고 눈매가 날카로웠으며, 밤귀신처럼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길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나를 피했지만 그들이 나를 멀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그들을 멀리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들과 나는 영혼이 너무나 달랐다. 나는 친구를 원했으나 이곳 사람들보다는 태양과 비와 눈과 흙과 바람이 좋았다. 바람이 속삭이는 노랫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졌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사람 친구를 원하였다. 나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흐르는 피를 부드럽게 핥아 주고 눈물을 떨어뜨려 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나는 집을 나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갔다.
가을이 오기 전 막바지 여름 태양은 맹렬하게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강물에 햇빛이 비쳐 반짝반짝했고 푸른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들이 둥둥 떠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혀 주었다.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이름 그대로 생겨먹은 난쟁이언덕 위의 풍차는 오늘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고 어린아이들은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는 길 한가운데를 깔깔거리며 뛰어갔다. 나는 조금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보면 볼수록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 나는 영혼이 다르다. 본질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퍼즐놀이와 같은 것……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인간이다. 그것들은 서로 맞는 조각끼리 끼워지고 끼워져서 관계를 만들지만 그 수많은 조각들 중 나와 맞는 조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 나는 폭풍 안에 있어 사나운 발톱을 피해 마음을 잠시 쉬게 해 줄 수 있는 안식을 원하였다. 어깨에 기대고, 꽉 끌어안고, 품에 안겨서 잠들 수 있는 안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역시나 오늘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밤이 될 때까지 골목에 조용히 앉아서 그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달이 떠오르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 안으로 사라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차가운 보름달은 음울한 달빛만을 던져주었고 창틀을 넘어 집 안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장에 달빛의 차가운 맥동이 느껴져 마치 달과 함께 숨을 쉬는 듯하였다. 그 숨결은 영혼으로 스며들어 나를 깊고 음습한 심연 속으로 떨어지게 했다.
끝없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일탈을 생각한다. 견딜 수가 없다. 지독할 정도로 평화롭고 고요한 이곳을 떠나 이곳저곳을 헤매고 싶다. 마음 가는 대로 보이는 대로 발걸음 가는 대로 바람이 불고 태양이 손짓하는 곳으로. 내가 애타게 갈망하는 사람을 찾아서.
나는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