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2
…북으로 가라…
가서, 저 별을 훔쳐와라…
…수컷이 봉… 암컷이 황…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이래. 예쁘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그 사람의 부탁이 있었어.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단이라 지어달라고.…
…제국인들이 이 산맥엔 무슨 용무요?…
…나를 공격한 이유부터 설명해보시오…
…이름이 뭔가?…
…아스킨…
………
………
‘아스킨……’
슈나이더는 슬며시 눈을 떴다. 지푸라기가 깔린 축축한 바닥이 코앞에 붙어있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지푸라기들이 바닥에 들러붙어 꼬리를 떨었다. 벌거벗은 상반신에 겉옷이 덮여있었고, 그는 모로 누운 상태였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지… 풍경도 공기도 낯설었다. 여기는 밖이 아닌 듯했다.
“………”
주변은 대체로 어두웠고, 땅과 이어진 저 앞에 갇힌 창살 너머로 주홍색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누군가 탁상과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있는 것 같았지만 시야가 흔들려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조금 몸을 움직이자 전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격통이 그를 휩쓸었다. 그것을 이기지 못한 채 그는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화상을 입은 피부는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었다.
탑에서, 그 여자가 소환한 거대한 불새의 정수리에 대검을 내리치던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깬 것을 보고 쿠마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쿠마는 땅에 꿇어앉은 채 서둘러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위로 바짝 몸을 낮췄다. 그리곤 제국어로 낮게 속삭였다.
“…슈나이더 대장. 정신이 돌아와서 다행이오. 당신은 이틀간 사경을 헤맸소. 육신에 침범한 강력한 마야가 기를 흩어놓은 데다 심마(心魔)까지 겹쳐서 보통사람이라면 죽는 게 당연한 부상이었소. 탑을 빠져나온 즉시 내가 대장의 내상정도를 점검하고 영육 간에 들뜬 기운을 바로잡아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미안하오…. 당신이 너무 멀쩡해보여서 나도 그만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소.”
목을 틔어보기 위해, 슈나이더는 침을 삼키려했다. 그러나 입안이 말라서 그것은 시늉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냐, 여기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쿠마는 그의 상태부터 확인하려고 들었다. 속에서 피가 넘어오지는 않느냐, 눈은 잘 보이냐, 어디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는 없느냐, 자면서 무슨 꿈을 꿨냐는 등 귀찮은 질문들을, 슈나이더는 눈살을 찌푸리며 누운 채로 그냥 고개를 한번 끄떡여주는 것으로 넘겨버렸다.
쿠마는 그것으론 성이 안 찬다는 인상을 짓긴 했지만, 다시 주변을 자꾸 흘긋거리며 그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우리는 잡혀왔소. 당신이 기절해있는 동안 무장한 병력들이 야영지로 들이닥쳤소. 아살리나와 내가 저항해 보려했지만, 우리는 그 탑에서 무기도 잃은 데다… 불가항력이었소. 그들은 우리를 사로잡아 자신들의 주둔지로 끌고 왔소. 낡고 작은 토성이었는데 그 앞에 그들의 숙영지가 자리 잡고 있었소. 상당한 규모의 군대였소. 병사들마다 망치가 그려진 옷을 입었고 그들은 중부방언을 썼는데 기사들은 말 위에서 북방어로 고함지르고 있었소. 아살리나가 이르기를, 아르테니스 쪽에서 넘어온 용병들이 틀림없다고 했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슈나이더는 망치가 그려진 옷이라는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쿠마의 말은 낮고 빠르게 이어졌다.
“그들은 우리를 토성 안으로 데려와 지하 감옥에 처넣고 심문했소.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았는데 두 동강난 대장의 대검을 들어 보이며 누가 이런 걸 휘두를 수 있느냐고 물었소. 이상한 초상화 같은 걸 가져와선 아살리나와 그림을 대조해보며 ‘이렇게 늙은 년은 아닐 텐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소. 다른 말들은 우리가 알아듣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신분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벙어리처럼 굴었소. 심문이 끝나자 그들은 우리를 여기에 남겨놓고 아살리나만 따로 끌고 갔소. 여자는 나중에 공작이 봐야하니 다른 곳에 두라고 간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소. 그리고 만 하루가 지난 거요.”
“………”
슈나이더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살 너머의 불빛 속에서 무엇이 보였는지,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빠르게 자신을 되찾았다. 망치를 부대의 상징으로 삼는 용병대야 클러드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의 패잔병들이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넌 잘 벼른 칼만 있고 칼집은 없는 녀석이구나. 그래서야 언젠간 너나 네가 지키려는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될 뿐이다.’
불타는 사막
작열하는 태양
모래폭풍 속에서 이루어진 10년만의 재회….
‘그렇군……. 그때의 꼬마가……’
‘내 부하들을 다 베어죽인 그 귀신같은 검기는 전부 어디로 간 거냐? 날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네 모든 것을 검에 담아 이 일격을 받아봐라. 그렇지 않으면 네 누나와 함께 구해줬던 그 목숨을 내 손으로 도로 거두어갈 수밖에…’
피투성이가 된 그가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렸다.
슈나이더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쿠마가 옆으로 좀 물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와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슈나이더는 내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잡념들이 가라앉고 있었다. 덮고 있던 겉옷이 흘러내려, 그을린 근육질의 건장한 육신이 드러났다.
일어나서 보니 자기 옆에는 그 소녀가 누워있었다. 갱도를 빠져나올 때 우연히 발견해 쿠마가 업고 나온 소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녀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든 상태였다. 그 모습이 너무 변함이 없어서 슈나이더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것인가. 현기증 때문에 소녀의 잠든 얼굴이 가물거렸다.
잠시 정신을 추스르는데, 쿠마의 뒤로 감방 구석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 두 명의 낯선 사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슈나이더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쪽을 쏘아보자, 뚱뚱한 발두개인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 옆에, 한쪽 무릎에 팔을 올려둔 채 벽을 기대고 있는 늙은 사내는 무슨 고민에 빠진 듯이 심각한 얼굴로 감옥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들은……?”
슈나이더가 낮은 소리를 흘렸다. 쿠마가 그쪽을 잠시 보더니 역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잡혀온 뒤 얼마 안 있어 끌려온 자들이요.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서 뭐하는 자들인지는 모르오. 행색이 초라한 걸로 보아 그냥 거지들 같소.”
슈나이더는 입을 다물고, 그들을 쳐다봤다. 발두개인이 ‘한번 해볼래?’라는 듯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가만히 있던 늙은 사내가 혀를 차며 동료를 돌아봤다.
“그만 두게, 츠즈바시. 이런 데까지 와서 또 말썽인가?”
“저 자식이 날 자꾸 째려보잖쑤. …어쭈, 등빨 좀 있다 이거지? 끝까지 눈 안 치우네.”
“그만 두라잖은가. 괜히 간수들 주의를 끌어 매를 벌 필요는 없네. 아까는 배가 고파서 맞을 힘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츠즈바시는 그제야, 쳇!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돌렸다. 랜드필드의 닦달을 못 견뎌서라기 보단,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던 붉은 머리의 사내가 먼저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기 때문인데 이로서 기선제압은 성공한 셈이다.
인간도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인지라 법과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곳에다 같은 것들끼리 모아놓으면 그 안에 서열이 정해지고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지배하게 된다. 감옥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고향을 떠난 뒤 이런저런 사고를 저지른 대가로 자주 감금당했다가 풀려나기도 하고 탈출한 적도 있는 츠즈바시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냄새나고 눅눅한 곳에 얼마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끼니도 잘 넣어주지 않는 마당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상대에 대한 확실한 우의를 점해놓는 편이 좋았다. 그동안 자신과 동고동락해온 영감이야 그렇다 쳐도, 생판 모르는 남인데다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들인지 인상도 안 좋은 저 둘에겐 누가 ‘방장’인지 분명히 인식시켜 줄 생각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랜드필드가 땅에 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산속을 헤매다가 수색대에게 붙잡혀온 내내 특유의 침착함을 잃고 있었다.
처음에는 감옥창살에 달라붙어, 딸아이는 어디 갔나, 내 딸을 만나게 해달라, 왜 죄도 없는 여행자들을 해코지하는 것이냐며 거세게 항의하다가 간수장에게 한방 얻어맞았고, 곧 그것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곤 감방 안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혼자 방도를 강구하는 듯이 보였는데 이제는 제 풀에 지쳤는지 구석에 처박혀 내일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체념한 듯이 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츠즈바시가 위로란답시고 그의 등에 대고 이런 말을 꺼냈다.
“아, 우리가 제 놈들이 잃어버린 동료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는데 설마 더 이상 나쁜 일이야 있겠쑤! 아까 심문 받을 때, 그 ‘망치 든 괴물여자’ 패거리랑 줄곧 같이 있었다는 얘기를 내가 하니까 그 놈들 눈빛이 확 달라지는 거 형씨도 보지 않았쑤? 이래 뵈도 고향을 등진 뒤로는 눈칫밥만 먹고 살아서 눈썰미 하나는 선지자도 울고 가게 만들 정도인 나요. 딱 보니 그 여자는 패거리에 끼어있던 기사조차 자기한테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용병이라도 부대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진 게 틀림 없겠더라니까! 헤헷! 두고 보라지. 좀 있으면 이 부대 책임자가 우리를 만나러 지하 감옥소까지 몸소 찾아오게 될 테니.”
랜드필드는 그 주둥이를 확 문질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츠즈바시의 말대로 망치단은 실종된 사령관인 율리안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라휄만 남겨둔 채 간신히 율리안의 손아귀를 빠져나온 직후에, 자신들과 산에서 우연히 마주친 수색대도 기실은 그녀를 찾기 위해 파견된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율리안과 그녀의 용병대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들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면, 그녀에게서 두 번이나 탈출을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 일은 어쨌든 덮어질 것이고 불쌍한 순례자 아가씨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츠즈바시는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 그동안의 구속과 학대에 대한 위자료나 사례금 운운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랜드필드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그리 간단지가 않다.
율리안이 예레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
거기다 망치단은 현재 램스터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부터 북공국을 다스려온 램스터가는 대공으로부터 갖은 원조를 받으며 그의 끄나풀처럼 변한 지 오래였다. 대공의 모함을 받은 안드레이 왕자가 이 나라의 끝으로 수배지가 정해지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율리안이 자신의 용병대로 귀환하게 되면 그녀에게 있어서 예레나는 수중에 그냥 떨어진 보물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녀가 공주를 어떻게 처리할 지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존재해 짐작조차 가질 않았지만, 크게 요약하자면 몸값 아니면 명분일 것이다.
망치단 같은 중군단 규모 정도의 병력만으로, 공주를 내세워 닥쳐오고 있는 왕좌쟁탈 전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대공을 비롯한, 공주를 손에 넣길 간절히 원하는 세력들에게 그녀의 신병을 인도하기만 해도 거액의 실리를 챙길 수 있는 판국에, 망치단이 그녀를 가던 길 계속 가도록 순순히 풀어줄 리는, 바보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없었다.
무엇보다 큰일은, 사냥놀이를 하다 낙마해서 죽은 부친의 뒤를 이어 새로이 북공국의 지배자가 된 그 난봉꾼이 자기가 그토록 탐내던 왕녀가 자신의 세력권 안에 수족을 결박당한 채 애처로이 쓰러진 사슴마냥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태는 정말 지옥불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
---------------------------------
>> 앞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들은 '바람의 인도자' 재회편 (26)> 을 참고해주세요
>> 내일이나 모레 중에 한 두편이 더 올라올 예정입니다. 기다려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_- 다시 달리는 겁니다~
가서, 저 별을 훔쳐와라…
…수컷이 봉… 암컷이 황…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이래. 예쁘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그 사람의 부탁이 있었어.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단이라 지어달라고.…
…제국인들이 이 산맥엔 무슨 용무요?…
…나를 공격한 이유부터 설명해보시오…
…이름이 뭔가?…
…아스킨…
………
………
‘아스킨……’
슈나이더는 슬며시 눈을 떴다. 지푸라기가 깔린 축축한 바닥이 코앞에 붙어있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지푸라기들이 바닥에 들러붙어 꼬리를 떨었다. 벌거벗은 상반신에 겉옷이 덮여있었고, 그는 모로 누운 상태였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지… 풍경도 공기도 낯설었다. 여기는 밖이 아닌 듯했다.
“………”
주변은 대체로 어두웠고, 땅과 이어진 저 앞에 갇힌 창살 너머로 주홍색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누군가 탁상과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있는 것 같았지만 시야가 흔들려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조금 몸을 움직이자 전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격통이 그를 휩쓸었다. 그것을 이기지 못한 채 그는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화상을 입은 피부는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었다.
탑에서, 그 여자가 소환한 거대한 불새의 정수리에 대검을 내리치던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깬 것을 보고 쿠마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쿠마는 땅에 꿇어앉은 채 서둘러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위로 바짝 몸을 낮췄다. 그리곤 제국어로 낮게 속삭였다.
“…슈나이더 대장. 정신이 돌아와서 다행이오. 당신은 이틀간 사경을 헤맸소. 육신에 침범한 강력한 마야가 기를 흩어놓은 데다 심마(心魔)까지 겹쳐서 보통사람이라면 죽는 게 당연한 부상이었소. 탑을 빠져나온 즉시 내가 대장의 내상정도를 점검하고 영육 간에 들뜬 기운을 바로잡아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미안하오…. 당신이 너무 멀쩡해보여서 나도 그만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소.”
목을 틔어보기 위해, 슈나이더는 침을 삼키려했다. 그러나 입안이 말라서 그것은 시늉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냐, 여기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쿠마는 그의 상태부터 확인하려고 들었다. 속에서 피가 넘어오지는 않느냐, 눈은 잘 보이냐, 어디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는 없느냐, 자면서 무슨 꿈을 꿨냐는 등 귀찮은 질문들을, 슈나이더는 눈살을 찌푸리며 누운 채로 그냥 고개를 한번 끄떡여주는 것으로 넘겨버렸다.
쿠마는 그것으론 성이 안 찬다는 인상을 짓긴 했지만, 다시 주변을 자꾸 흘긋거리며 그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우리는 잡혀왔소. 당신이 기절해있는 동안 무장한 병력들이 야영지로 들이닥쳤소. 아살리나와 내가 저항해 보려했지만, 우리는 그 탑에서 무기도 잃은 데다… 불가항력이었소. 그들은 우리를 사로잡아 자신들의 주둔지로 끌고 왔소. 낡고 작은 토성이었는데 그 앞에 그들의 숙영지가 자리 잡고 있었소. 상당한 규모의 군대였소. 병사들마다 망치가 그려진 옷을 입었고 그들은 중부방언을 썼는데 기사들은 말 위에서 북방어로 고함지르고 있었소. 아살리나가 이르기를, 아르테니스 쪽에서 넘어온 용병들이 틀림없다고 했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슈나이더는 망치가 그려진 옷이라는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쿠마의 말은 낮고 빠르게 이어졌다.
“그들은 우리를 토성 안으로 데려와 지하 감옥에 처넣고 심문했소.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았는데 두 동강난 대장의 대검을 들어 보이며 누가 이런 걸 휘두를 수 있느냐고 물었소. 이상한 초상화 같은 걸 가져와선 아살리나와 그림을 대조해보며 ‘이렇게 늙은 년은 아닐 텐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소. 다른 말들은 우리가 알아듣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신분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벙어리처럼 굴었소. 심문이 끝나자 그들은 우리를 여기에 남겨놓고 아살리나만 따로 끌고 갔소. 여자는 나중에 공작이 봐야하니 다른 곳에 두라고 간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소. 그리고 만 하루가 지난 거요.”
“………”
슈나이더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살 너머의 불빛 속에서 무엇이 보였는지,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빠르게 자신을 되찾았다. 망치를 부대의 상징으로 삼는 용병대야 클러드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의 패잔병들이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넌 잘 벼른 칼만 있고 칼집은 없는 녀석이구나. 그래서야 언젠간 너나 네가 지키려는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될 뿐이다.’
불타는 사막
작열하는 태양
모래폭풍 속에서 이루어진 10년만의 재회….
‘그렇군……. 그때의 꼬마가……’
‘내 부하들을 다 베어죽인 그 귀신같은 검기는 전부 어디로 간 거냐? 날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네 모든 것을 검에 담아 이 일격을 받아봐라. 그렇지 않으면 네 누나와 함께 구해줬던 그 목숨을 내 손으로 도로 거두어갈 수밖에…’
피투성이가 된 그가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렸다.
슈나이더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쿠마가 옆으로 좀 물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와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슈나이더는 내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잡념들이 가라앉고 있었다. 덮고 있던 겉옷이 흘러내려, 그을린 근육질의 건장한 육신이 드러났다.
일어나서 보니 자기 옆에는 그 소녀가 누워있었다. 갱도를 빠져나올 때 우연히 발견해 쿠마가 업고 나온 소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녀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든 상태였다. 그 모습이 너무 변함이 없어서 슈나이더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것인가. 현기증 때문에 소녀의 잠든 얼굴이 가물거렸다.
잠시 정신을 추스르는데, 쿠마의 뒤로 감방 구석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 두 명의 낯선 사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슈나이더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쪽을 쏘아보자, 뚱뚱한 발두개인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 옆에, 한쪽 무릎에 팔을 올려둔 채 벽을 기대고 있는 늙은 사내는 무슨 고민에 빠진 듯이 심각한 얼굴로 감옥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들은……?”
슈나이더가 낮은 소리를 흘렸다. 쿠마가 그쪽을 잠시 보더니 역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잡혀온 뒤 얼마 안 있어 끌려온 자들이요.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서 뭐하는 자들인지는 모르오. 행색이 초라한 걸로 보아 그냥 거지들 같소.”
슈나이더는 입을 다물고, 그들을 쳐다봤다. 발두개인이 ‘한번 해볼래?’라는 듯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가만히 있던 늙은 사내가 혀를 차며 동료를 돌아봤다.
“그만 두게, 츠즈바시. 이런 데까지 와서 또 말썽인가?”
“저 자식이 날 자꾸 째려보잖쑤. …어쭈, 등빨 좀 있다 이거지? 끝까지 눈 안 치우네.”
“그만 두라잖은가. 괜히 간수들 주의를 끌어 매를 벌 필요는 없네. 아까는 배가 고파서 맞을 힘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츠즈바시는 그제야, 쳇!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돌렸다. 랜드필드의 닦달을 못 견뎌서라기 보단,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던 붉은 머리의 사내가 먼저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기 때문인데 이로서 기선제압은 성공한 셈이다.
인간도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인지라 법과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곳에다 같은 것들끼리 모아놓으면 그 안에 서열이 정해지고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지배하게 된다. 감옥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고향을 떠난 뒤 이런저런 사고를 저지른 대가로 자주 감금당했다가 풀려나기도 하고 탈출한 적도 있는 츠즈바시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냄새나고 눅눅한 곳에 얼마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끼니도 잘 넣어주지 않는 마당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상대에 대한 확실한 우의를 점해놓는 편이 좋았다. 그동안 자신과 동고동락해온 영감이야 그렇다 쳐도, 생판 모르는 남인데다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들인지 인상도 안 좋은 저 둘에겐 누가 ‘방장’인지 분명히 인식시켜 줄 생각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랜드필드가 땅에 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산속을 헤매다가 수색대에게 붙잡혀온 내내 특유의 침착함을 잃고 있었다.
처음에는 감옥창살에 달라붙어, 딸아이는 어디 갔나, 내 딸을 만나게 해달라, 왜 죄도 없는 여행자들을 해코지하는 것이냐며 거세게 항의하다가 간수장에게 한방 얻어맞았고, 곧 그것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곤 감방 안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혼자 방도를 강구하는 듯이 보였는데 이제는 제 풀에 지쳤는지 구석에 처박혀 내일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체념한 듯이 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츠즈바시가 위로란답시고 그의 등에 대고 이런 말을 꺼냈다.
“아, 우리가 제 놈들이 잃어버린 동료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는데 설마 더 이상 나쁜 일이야 있겠쑤! 아까 심문 받을 때, 그 ‘망치 든 괴물여자’ 패거리랑 줄곧 같이 있었다는 얘기를 내가 하니까 그 놈들 눈빛이 확 달라지는 거 형씨도 보지 않았쑤? 이래 뵈도 고향을 등진 뒤로는 눈칫밥만 먹고 살아서 눈썰미 하나는 선지자도 울고 가게 만들 정도인 나요. 딱 보니 그 여자는 패거리에 끼어있던 기사조차 자기한테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용병이라도 부대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진 게 틀림 없겠더라니까! 헤헷! 두고 보라지. 좀 있으면 이 부대 책임자가 우리를 만나러 지하 감옥소까지 몸소 찾아오게 될 테니.”
랜드필드는 그 주둥이를 확 문질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츠즈바시의 말대로 망치단은 실종된 사령관인 율리안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라휄만 남겨둔 채 간신히 율리안의 손아귀를 빠져나온 직후에, 자신들과 산에서 우연히 마주친 수색대도 기실은 그녀를 찾기 위해 파견된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율리안과 그녀의 용병대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들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면, 그녀에게서 두 번이나 탈출을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 일은 어쨌든 덮어질 것이고 불쌍한 순례자 아가씨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츠즈바시는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 그동안의 구속과 학대에 대한 위자료나 사례금 운운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랜드필드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그리 간단지가 않다.
율리안이 예레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
거기다 망치단은 현재 램스터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부터 북공국을 다스려온 램스터가는 대공으로부터 갖은 원조를 받으며 그의 끄나풀처럼 변한 지 오래였다. 대공의 모함을 받은 안드레이 왕자가 이 나라의 끝으로 수배지가 정해지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율리안이 자신의 용병대로 귀환하게 되면 그녀에게 있어서 예레나는 수중에 그냥 떨어진 보물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녀가 공주를 어떻게 처리할 지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존재해 짐작조차 가질 않았지만, 크게 요약하자면 몸값 아니면 명분일 것이다.
망치단 같은 중군단 규모 정도의 병력만으로, 공주를 내세워 닥쳐오고 있는 왕좌쟁탈 전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대공을 비롯한, 공주를 손에 넣길 간절히 원하는 세력들에게 그녀의 신병을 인도하기만 해도 거액의 실리를 챙길 수 있는 판국에, 망치단이 그녀를 가던 길 계속 가도록 순순히 풀어줄 리는, 바보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없었다.
무엇보다 큰일은, 사냥놀이를 하다 낙마해서 죽은 부친의 뒤를 이어 새로이 북공국의 지배자가 된 그 난봉꾼이 자기가 그토록 탐내던 왕녀가 자신의 세력권 안에 수족을 결박당한 채 애처로이 쓰러진 사슴마냥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태는 정말 지옥불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
---------------------------------
>> 앞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들은 '바람의 인도자' 재회편 (26)> 을 참고해주세요
>> 내일이나 모레 중에 한 두편이 더 올라올 예정입니다. 기다려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_- 다시 달리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