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2
바람의 인도자
재회(再會)
‘……누나.’
‘……누나? 그만 일어나요, 스칸이 우리를 찾아왔어요,’
‘누나……… 성하, 정신이 드십니까?’
그녀는 눈을 떴다. 아른거리는 불빛에 비친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일각수는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흉물스럽게 웃었다.
“……마루?”
그녀는 멍하게 불러보았다. 일각수는 쑥스럽다는 듯이, 사람 하나는 가볍게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입 주변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딴에는 모처럼 마주하게 된 주인 앞에서 좋아서 미소 짓고 있는 것이었지만,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비명을 지르고 줄행랑을 칠만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가움에 목부터 메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의 수호수에게 누운 채로 두 팔을 벌린다.
“마루야……”
‘………’
엄마 품에 안기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일각수는 주인의 몸 위에 엎드렸다. 큼지막한 바위 같은 머리는 수북한 털로 뒤덮여있었고, 그것을 껴안은 그녀는 길고 무성한 수풀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얼굴에 밀려드는 털로 인해 숨도 쉬기 곤란할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마루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품안의 포만감이었다. 혼자 추운 산속을 헤매는 동안, 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털이불 같이 포근한 친구의 감촉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핏덩이 같은 눈알이 꿈틀대는 마루의 눈꺼풀 위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마음껏 비볐다.
사람도 잡아먹는 일각수는 얌전한 개처럼 귀를 쫑긋 세운 채 주인의 손길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마루의 털을 헤집던 손에 길고 딱딱한 물체가 들어왔다.
그녀는 마루를 놔주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담요가 흘러내려서, 탐스러운 과일처럼 영근 그녀의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가 일각수를 올려다봤다.
“마루? 어떻게 된 거야? 그 뿔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일각수는 무슨 소리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제가 여쭙고 싶은 말씀인데요. 성하께서 저를 살려주신 게 아닙니까?’
그녀는 입을 닫더니, 새삼스런 눈으로 일각수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봤다.
원래 눈 덮인 순백의 산처럼 거대한 그 몸이 지금은 응달이 진 것처럼 약간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보다 굵은 마루의 손가락을 붙잡아 자기 무릎 위로 가져왔다.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쓰다듬기도 하다가 다시 마루의 머리꼭대기로 눈을 돌렸다.
재생된 뿔은 부러지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천장을 찌를 듯이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에게 용의 피를 얻어주려고 여기에 왔었어. 하지만 난 그를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글쎄요. 하지만 전 분명 불멸의 존재의 피를 마셨습니다. 그것 외에는 제가 부활할 길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혼란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주인 앞에서 일각수는 힘자랑을 하듯 거대한 두 팔을 어깨 위로 굽혀 우람한 근육들을 만들어보였다.
‘게다가 깨어나 보니 온몸에 힘이 용솟음치더군요. 제 자신이 예전보다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
일각수를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만 짓고 있던 그녀의 뇌리 속을 갑자기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발가벗은 처녀답게 얼굴이 빨개져선, 담요를 턱까지 끌어당기곤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 애는? ……아니, 저……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 있지?”
‘누구…… 말씀입니까?’
일각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주인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다시 일각수를 쳐다본다.
“깨어났을 때,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어?”
일각수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부활하고도 성하께선 한참동안 잠들어계셨습니다. 몹시 지치신 것 같더군요.’
…날 두고 그냥 떠났다고?…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녀의 눈 속에 위태로운 꽃잎이 떠다니는 듯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담요를 가슴에 붙인 채 모닥불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땔거리가 부족했는지 빈 배낭이며 낡은 옷가지들을 태우면서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연료가 다해 사그러들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그 옆에 놓인 붉은 칼집에 몸을 담고 있는 자신의 칼이 보인다. 칼자루는, 잘 개어져 차곡차곡 쌓아놓은 그녀의 옷가지 위에 머리를 괴인 상태였다. 여자의 연두색 가슴가리개와 짧은 속치마도 제일 상단에 올려져있었다.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수치심 같기도 하고 조바심 같기도 한, 그녀는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혔다.
옷가지 옆에는 그녀가 신고 다니던 구두와 양말, 그리고 뚜껑이 닫힌 작은 반합이 놓여있었다. 뚜껑에 뭐라 쓰여 있는 듯해서 한쪽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당겨보았다. 거기엔 검은 숯으로 딱 하나만 써져있었다.
…덥혀서…
“………”
뚜껑을 열어보니 식은 고깃국이 나타났다. 고깃국이래봤자, 얼마 남지 않은 재료를 쥐어짜내서 만든 국속엔 건더기도 몇 개 없었다.
그녀는 뚜껑을 다시 닫은 다음 반합을 옆으로 밀어뒀다. 그리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기 시작했다.
옷들은 모두 깨끗이 빨아져있었다. 그가 절대로 손대려 하지 않은 딱 한 장만을 빼놓고.
아래를 보느라 흘러내린 긴 머리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또 다시 붉게 물들었다.
뿔 달린 야수가 덩치 큰 사자처럼 네 발로 걸어와 주인을 옆에 두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바닥에 지펴진 불꽃이 그려낸 그들의 그림자가 벽 위로 꺾어져 길게 늘어나 있었다.
끈장식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색에 가까운 치마. 그녀의 차림새는 예복 같았다. 그대로 미사포만 쓰면 당장 예배라도 드릴 수 있을만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머리에 미사포를 쓰는 대신, 치마선이 착 달라붙는 허리에 기사들이나 쓰는 두 줄로 된 누런 가죽허리띠를 감고 있다. 거기에, 칼이 꽂힌 붉은 색의 화려한 칼집까지 매달아놓으려던 그녀는 땅바닥에 옷이 한 장 더 남아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릎을 굽혀 그것을 주워 들고 보니, 자신의 옷이 아니다.
두건이 달린 남자의 겉옷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그 옷을 펼쳐보았다.
여기저기 찢어졌다가 기워지고 거친 산과 바람에 시달린 흔적들이 역력하게 새겨져있는 허름한 상의였지만 역시 깨끗이 빤 다음 뽀송뽀송하게 잘 말려져있었다.
머뭇거리다가, 여자는 그것을 입어보았다. 남자의 상의는 그녀한테 커서 처음엔 두건이 앞도 못 보도록 여자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녀는 두건을 벗어 등 뒤로 넘겼다. 그리고 목 안으로부터 자신의 머리칼들을 끄집어내 쓸어 넘겼다.
남자의 옷이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그 옷의 양옆구리와 긴 팔의 안쪽과 가슴에는 두 개의 끈이 교차하며 서로 쪼이는 부분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체구에 맞게 치수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하자,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와… 이 옷은 참 따뜻하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무게가 가벼운 걸로 봐서 솜은 아닌데도 옷은 빈틈없이 외부의 공기로부터 체온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목 주변을 잡아당겨 옷을 벌리고 그 안에 코를 대보았다.
“………”
꿈에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그의 몸냄새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두건 속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무뚝뚝한 시선이 다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옷차림으로 산을 올랐소?…
‘성하? 왜 그러십니까?’
일각수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서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으응? …아, 아아……”
그녀는 당황해서, 눈시울을 황급히 소매로 훔쳤다.
“아니야, 아무 것도…”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수호수에게조차 표정을 숨기려고 들었다.
주인의 낯선 태도에, 일각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녀의 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워진 얼굴에 손을 대고 식히며, 그녀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재주도 좋은 녀석이네……”
‘예? 그게 무슨…’
“마루!”
그녀가 갑자기 휙 돌아서자, 일각수는 꿈틀 놀라 뒤로 물러날 뻔했다.
‘예? 예, 예…“
“이리와!”
그녀는 갑자기 터프해진 듯했다. 일각수의 주둥이로 손을 뻗어 두꺼운 방석 같은 윗입술을 잡아당기더니 자기 품속에 코를 처박게 한다.
당황한 일각수는 쩔쩔매며, 그 거대한 덩치가 가녀린 여자에게 쉽게 끌려갔다.
“냄새를 맡아! 넌 지금부터 나와 이 옷의 주인을 추적하는 거야. 할 수 있지?”
‘……그, 글쎄요. 냄새는 기억할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짐승처럼 오줌을 뿌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해! 무조건 하는 거야. 내가 또 눈물짓는 모습 보고 싶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좋아. 그럼 당장 시작하자. 아직 멀리 못 갔을 거야.”
그녀는 일각수의 손을 밟고 올라섰다. 일각수가 자신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돌아서서 일각수의 목덜미에 난 털을 붙잡은 다음 그 어깨에 등을 기댔다.
쿵! 쿵! 발굽이 달린 뒷발로 땅을 울리며 일각수는 야영지를 뒤로 한 채 캄캄한 복도 안을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야수의 두 눈이 불덩이처럼 빛났다.
그리고 탑을 빠져나오자 일각수는 광활한 얼음호수를 앞에 두고 자세를 웅크렸다.
용을 쓰느라 산처럼 구부러진 마루의 등을 뚫고 두 장의 커다란 날개가 뛰쳐나왔다. 몸의 색깔은 변했어도 그 날개는 여전히 눈부신 백색이었다.
활갯짓을 시작하자 발 앞의 수면이 밀리며 파도가 일었다. 마루는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대지의 첨봉 같은 탑신과 그것을 둘러싼 광대한 절벽.
그 사이를, 주인을 안은 일각수는 거대한 날개로 허공을 차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
단은 캄캄한 갱도 안을 지나가고 있었다. 허리에 달린 도끼와 단칼이 그가 걸을 때마다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위론 고작 반팔상의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위에다 옷을 세벌이나 겹쳐 입고 다녔지만 그중 안에 입는 옷 두벌은 아르비콘을 죽일 때 예레나에게 벗어줘 버렸고, 가장 따뜻한 겉옷은 아까…
정말 재밌는 인간이로군…… 넌 참 재밌는 놈이야……
어둠이 팔짱을 낀 채 그의 앞에서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왜 그녀를 안지 않았나… 병신이 아닌 이상 참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을 텐데…
단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무시하고 어둠을 뚫고 계속 걸었다.
어둠은 그를 돌아보다가, 형체를 폭발시킨 후 다시 그의 옆에 꾸물꾸물 모여들었다.
…생물의 성(性)은 영원히 존재하길 갈망하는 그들 무의식 속의 본능과 직결돼있다. 너희들은 끊임없는 생육과 번식, 재생산을 통해 종을 유지한다. 하지만 나무에서 태어난 것들은 그럴 필요가 없지. 창조 시부터 영원을 함유하고 있는 그녀들의 몸뚱이는 그래서, 한계를 지닌 너희들에게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거기다 그년은 첫 번째 딸이었지.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서 신들이 오히려 실수를 했다고 여기게 된…
“………”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너는 존재 그 자체의 본능을 거스른 것이다….
단은 코웃음을 치더니 어둠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왜? 나에겐 네가 있는데…. 네가 나한테 영생을 부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어둠은 쿡쿡쿡…, 웃었다.
아아, 네놈은 진정한 죽음을 갈망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냐? 죽음을 넘은 소멸인가?
…내가 셰르파가 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을 찾는 건 살아남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초월한 다른 존재로의 각성인가?
어둠은 다시 손가락을 퉁겼다. 정신적 메아리가 그의 앞을 어지럽혔다.
…바람은 따라잡거나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의 추적자가 아니면 바람의 인도자가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이여…, 환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단은 입을 다물고 걷는 데만 열중했다. 불빛 한 점 없는 곳을 바람소리에만 의지해 빠져나가고 있다 보니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존재에 심어진 본능이 영원으로의 회귀라면, 한계가 정해진 너희들이 꾸는 꿈은 과연 누구의 의지였을까?
어둠은 묻고 있었다.
조물주인가?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가진 염원인가?
단은 잠자코 걸었다. 딱히 녀석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아도, 녀석의 말은 청각이나 심언처럼 타인이 전달해주고 말에 담긴 정보의 습득여부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단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꿈꾸지 않는 창조는 없다. 환상을 긍정하지 않는 한 창조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
…그 재료들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탑이지….
그는 발을 멈추고 어둠에 휩싸인 갱도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둠은 조소를 입에 물었다.
이제 귀가 솔깃한가 보군….
“너도 그 탑을 알고 있었나?”
………
“그는 누구냐? 그가 나에게 말한 것이 무엇이었지?”
어둠은 놀리는 듯이 혼자 쿡쿡 웃고 있을 뿐이다.
단은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둠을 노려보다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그를 따라갔다.
…너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
“………”
하지만 신이 되고 싶어 한 존재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단은 다시 걷는 걸 멈췄다. 그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그들’은 누구냐?”
한참 후에, 어둠이 대답했다.
…신을 흉내 내려했던 자들, 자신들이 만든 영원한 환상 속에 갇힌 자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어도, 녀석이 제대로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나와 내 아이들에겐 특별한 형질을 심어놓았다.…’
‘…누군가 이 배에 올라 이 기록을 보게 된다면…… 당신이 여기에 온 건 우연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 그것은 기적이다……, 어쩌면…’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번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갱도가 뒤흔들렸다.
단은 벽에 손을 짚고 그것에 대항했다. 곧 이어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야수의 외침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어어어어어어엉!
소란을 떠는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단은 긴장한 채 한 발짝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못 박힌 듯이 서있었다.
몇 번의 진동과 울부짖는 소리가 산을 빠져나간 뒤에, 갱도가 잠잠해지자 그도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은 분명 낮일 터였다.
온통 눈산과 얼음뿐인 자신의 사냥터로 진작 떠나있어야 할 녀석이 아직까지 둥지에 남아 혼자 난동을 부린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심장이라도 잃어버렸나.
단은 생각을 멈췄다.
저 앞에 빛이 새어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서둘러 걸어갔다.
동굴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부터 그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환한 햇빛 속에 눈이 적응 될 때까지 그는 조금 기다렸다.
그리고 눈을 뜨자 그에게 익숙한, 바람 부는 설원과 끝없이 펼쳐진 산맥들이 일제히 눈인사를 건네 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감상에 빠져드는 것도 잠시.
휘잉- 북쪽 끝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셰르파인 그에게도 가차 없었다. 차가운 눈발이 서려있는 삭풍이 그를 덮치고 지나갈 때, 반팔차림의 그는 몸을 웅크리며 어깨를 떨었다.
아무리 혹한에 단련이 돼있다 한들, 이런 상태로는 하루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옷부터…
“………”
은색 눈을 가진 검은 머리의 청년은 정면에 보이는 산봉우리를 향해, 퍼퍽 눈을 튕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야 한다.
야스와, ……그 사람들을.
<4권 끝>
##Act tune
재회(再會)
‘……누나.’
‘……누나? 그만 일어나요, 스칸이 우리를 찾아왔어요,’
‘누나……… 성하, 정신이 드십니까?’
그녀는 눈을 떴다. 아른거리는 불빛에 비친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일각수는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흉물스럽게 웃었다.
“……마루?”
그녀는 멍하게 불러보았다. 일각수는 쑥스럽다는 듯이, 사람 하나는 가볍게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입 주변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딴에는 모처럼 마주하게 된 주인 앞에서 좋아서 미소 짓고 있는 것이었지만,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비명을 지르고 줄행랑을 칠만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가움에 목부터 메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의 수호수에게 누운 채로 두 팔을 벌린다.
“마루야……”
‘………’
엄마 품에 안기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일각수는 주인의 몸 위에 엎드렸다. 큼지막한 바위 같은 머리는 수북한 털로 뒤덮여있었고, 그것을 껴안은 그녀는 길고 무성한 수풀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얼굴에 밀려드는 털로 인해 숨도 쉬기 곤란할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마루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품안의 포만감이었다. 혼자 추운 산속을 헤매는 동안, 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털이불 같이 포근한 친구의 감촉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핏덩이 같은 눈알이 꿈틀대는 마루의 눈꺼풀 위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마음껏 비볐다.
사람도 잡아먹는 일각수는 얌전한 개처럼 귀를 쫑긋 세운 채 주인의 손길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마루의 털을 헤집던 손에 길고 딱딱한 물체가 들어왔다.
그녀는 마루를 놔주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담요가 흘러내려서, 탐스러운 과일처럼 영근 그녀의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가 일각수를 올려다봤다.
“마루? 어떻게 된 거야? 그 뿔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일각수는 무슨 소리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제가 여쭙고 싶은 말씀인데요. 성하께서 저를 살려주신 게 아닙니까?’
그녀는 입을 닫더니, 새삼스런 눈으로 일각수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봤다.
원래 눈 덮인 순백의 산처럼 거대한 그 몸이 지금은 응달이 진 것처럼 약간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뚝보다 굵은 마루의 손가락을 붙잡아 자기 무릎 위로 가져왔다.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쓰다듬기도 하다가 다시 마루의 머리꼭대기로 눈을 돌렸다.
재생된 뿔은 부러지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천장을 찌를 듯이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에게 용의 피를 얻어주려고 여기에 왔었어. 하지만 난 그를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글쎄요. 하지만 전 분명 불멸의 존재의 피를 마셨습니다. 그것 외에는 제가 부활할 길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혼란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주인 앞에서 일각수는 힘자랑을 하듯 거대한 두 팔을 어깨 위로 굽혀 우람한 근육들을 만들어보였다.
‘게다가 깨어나 보니 온몸에 힘이 용솟음치더군요. 제 자신이 예전보다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
일각수를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만 짓고 있던 그녀의 뇌리 속을 갑자기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발가벗은 처녀답게 얼굴이 빨개져선, 담요를 턱까지 끌어당기곤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 애는? ……아니, 저……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 있지?”
‘누구…… 말씀입니까?’
일각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주인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다시 일각수를 쳐다본다.
“깨어났을 때,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어?”
일각수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부활하고도 성하께선 한참동안 잠들어계셨습니다. 몹시 지치신 것 같더군요.’
…날 두고 그냥 떠났다고?…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녀의 눈 속에 위태로운 꽃잎이 떠다니는 듯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담요를 가슴에 붙인 채 모닥불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땔거리가 부족했는지 빈 배낭이며 낡은 옷가지들을 태우면서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연료가 다해 사그러들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그 옆에 놓인 붉은 칼집에 몸을 담고 있는 자신의 칼이 보인다. 칼자루는, 잘 개어져 차곡차곡 쌓아놓은 그녀의 옷가지 위에 머리를 괴인 상태였다. 여자의 연두색 가슴가리개와 짧은 속치마도 제일 상단에 올려져있었다.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수치심 같기도 하고 조바심 같기도 한, 그녀는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혔다.
옷가지 옆에는 그녀가 신고 다니던 구두와 양말, 그리고 뚜껑이 닫힌 작은 반합이 놓여있었다. 뚜껑에 뭐라 쓰여 있는 듯해서 한쪽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당겨보았다. 거기엔 검은 숯으로 딱 하나만 써져있었다.
…덥혀서…
“………”
뚜껑을 열어보니 식은 고깃국이 나타났다. 고깃국이래봤자, 얼마 남지 않은 재료를 쥐어짜내서 만든 국속엔 건더기도 몇 개 없었다.
그녀는 뚜껑을 다시 닫은 다음 반합을 옆으로 밀어뒀다. 그리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기 시작했다.
옷들은 모두 깨끗이 빨아져있었다. 그가 절대로 손대려 하지 않은 딱 한 장만을 빼놓고.
아래를 보느라 흘러내린 긴 머리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또 다시 붉게 물들었다.
뿔 달린 야수가 덩치 큰 사자처럼 네 발로 걸어와 주인을 옆에 두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바닥에 지펴진 불꽃이 그려낸 그들의 그림자가 벽 위로 꺾어져 길게 늘어나 있었다.
끈장식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색에 가까운 치마. 그녀의 차림새는 예복 같았다. 그대로 미사포만 쓰면 당장 예배라도 드릴 수 있을만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머리에 미사포를 쓰는 대신, 치마선이 착 달라붙는 허리에 기사들이나 쓰는 두 줄로 된 누런 가죽허리띠를 감고 있다. 거기에, 칼이 꽂힌 붉은 색의 화려한 칼집까지 매달아놓으려던 그녀는 땅바닥에 옷이 한 장 더 남아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릎을 굽혀 그것을 주워 들고 보니, 자신의 옷이 아니다.
두건이 달린 남자의 겉옷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그 옷을 펼쳐보았다.
여기저기 찢어졌다가 기워지고 거친 산과 바람에 시달린 흔적들이 역력하게 새겨져있는 허름한 상의였지만 역시 깨끗이 빤 다음 뽀송뽀송하게 잘 말려져있었다.
머뭇거리다가, 여자는 그것을 입어보았다. 남자의 상의는 그녀한테 커서 처음엔 두건이 앞도 못 보도록 여자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녀는 두건을 벗어 등 뒤로 넘겼다. 그리고 목 안으로부터 자신의 머리칼들을 끄집어내 쓸어 넘겼다.
남자의 옷이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그 옷의 양옆구리와 긴 팔의 안쪽과 가슴에는 두 개의 끈이 교차하며 서로 쪼이는 부분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체구에 맞게 치수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하자,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와… 이 옷은 참 따뜻하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무게가 가벼운 걸로 봐서 솜은 아닌데도 옷은 빈틈없이 외부의 공기로부터 체온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목 주변을 잡아당겨 옷을 벌리고 그 안에 코를 대보았다.
“………”
꿈에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그의 몸냄새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두건 속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무뚝뚝한 시선이 다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옷차림으로 산을 올랐소?…
‘성하? 왜 그러십니까?’
일각수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서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으응? …아, 아아……”
그녀는 당황해서, 눈시울을 황급히 소매로 훔쳤다.
“아니야, 아무 것도…”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수호수에게조차 표정을 숨기려고 들었다.
주인의 낯선 태도에, 일각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녀의 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워진 얼굴에 손을 대고 식히며, 그녀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재주도 좋은 녀석이네……”
‘예? 그게 무슨…’
“마루!”
그녀가 갑자기 휙 돌아서자, 일각수는 꿈틀 놀라 뒤로 물러날 뻔했다.
‘예? 예, 예…“
“이리와!”
그녀는 갑자기 터프해진 듯했다. 일각수의 주둥이로 손을 뻗어 두꺼운 방석 같은 윗입술을 잡아당기더니 자기 품속에 코를 처박게 한다.
당황한 일각수는 쩔쩔매며, 그 거대한 덩치가 가녀린 여자에게 쉽게 끌려갔다.
“냄새를 맡아! 넌 지금부터 나와 이 옷의 주인을 추적하는 거야. 할 수 있지?”
‘……그, 글쎄요. 냄새는 기억할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짐승처럼 오줌을 뿌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해! 무조건 하는 거야. 내가 또 눈물짓는 모습 보고 싶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좋아. 그럼 당장 시작하자. 아직 멀리 못 갔을 거야.”
그녀는 일각수의 손을 밟고 올라섰다. 일각수가 자신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돌아서서 일각수의 목덜미에 난 털을 붙잡은 다음 그 어깨에 등을 기댔다.
쿵! 쿵! 발굽이 달린 뒷발로 땅을 울리며 일각수는 야영지를 뒤로 한 채 캄캄한 복도 안을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야수의 두 눈이 불덩이처럼 빛났다.
그리고 탑을 빠져나오자 일각수는 광활한 얼음호수를 앞에 두고 자세를 웅크렸다.
용을 쓰느라 산처럼 구부러진 마루의 등을 뚫고 두 장의 커다란 날개가 뛰쳐나왔다. 몸의 색깔은 변했어도 그 날개는 여전히 눈부신 백색이었다.
활갯짓을 시작하자 발 앞의 수면이 밀리며 파도가 일었다. 마루는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대지의 첨봉 같은 탑신과 그것을 둘러싼 광대한 절벽.
그 사이를, 주인을 안은 일각수는 거대한 날개로 허공을 차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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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캄캄한 갱도 안을 지나가고 있었다. 허리에 달린 도끼와 단칼이 그가 걸을 때마다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위론 고작 반팔상의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위에다 옷을 세벌이나 겹쳐 입고 다녔지만 그중 안에 입는 옷 두벌은 아르비콘을 죽일 때 예레나에게 벗어줘 버렸고, 가장 따뜻한 겉옷은 아까…
정말 재밌는 인간이로군…… 넌 참 재밌는 놈이야……
어둠이 팔짱을 낀 채 그의 앞에서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왜 그녀를 안지 않았나… 병신이 아닌 이상 참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을 텐데…
단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무시하고 어둠을 뚫고 계속 걸었다.
어둠은 그를 돌아보다가, 형체를 폭발시킨 후 다시 그의 옆에 꾸물꾸물 모여들었다.
…생물의 성(性)은 영원히 존재하길 갈망하는 그들 무의식 속의 본능과 직결돼있다. 너희들은 끊임없는 생육과 번식, 재생산을 통해 종을 유지한다. 하지만 나무에서 태어난 것들은 그럴 필요가 없지. 창조 시부터 영원을 함유하고 있는 그녀들의 몸뚱이는 그래서, 한계를 지닌 너희들에게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거기다 그년은 첫 번째 딸이었지.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서 신들이 오히려 실수를 했다고 여기게 된…
“………”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너는 존재 그 자체의 본능을 거스른 것이다….
단은 코웃음을 치더니 어둠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왜? 나에겐 네가 있는데…. 네가 나한테 영생을 부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어둠은 쿡쿡쿡…, 웃었다.
아아, 네놈은 진정한 죽음을 갈망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냐? 죽음을 넘은 소멸인가?
…내가 셰르파가 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을 찾는 건 살아남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초월한 다른 존재로의 각성인가?
어둠은 다시 손가락을 퉁겼다. 정신적 메아리가 그의 앞을 어지럽혔다.
…바람은 따라잡거나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의 추적자가 아니면 바람의 인도자가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이여…, 환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단은 입을 다물고 걷는 데만 열중했다. 불빛 한 점 없는 곳을 바람소리에만 의지해 빠져나가고 있다 보니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존재에 심어진 본능이 영원으로의 회귀라면, 한계가 정해진 너희들이 꾸는 꿈은 과연 누구의 의지였을까?
어둠은 묻고 있었다.
조물주인가?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가진 염원인가?
단은 잠자코 걸었다. 딱히 녀석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아도, 녀석의 말은 청각이나 심언처럼 타인이 전달해주고 말에 담긴 정보의 습득여부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단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꿈꾸지 않는 창조는 없다. 환상을 긍정하지 않는 한 창조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
…그 재료들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탑이지….
그는 발을 멈추고 어둠에 휩싸인 갱도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둠은 조소를 입에 물었다.
이제 귀가 솔깃한가 보군….
“너도 그 탑을 알고 있었나?”
………
“그는 누구냐? 그가 나에게 말한 것이 무엇이었지?”
어둠은 놀리는 듯이 혼자 쿡쿡 웃고 있을 뿐이다.
단은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둠을 노려보다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그를 따라갔다.
…너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
“………”
하지만 신이 되고 싶어 한 존재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단은 다시 걷는 걸 멈췄다. 그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그들’은 누구냐?”
한참 후에, 어둠이 대답했다.
…신을 흉내 내려했던 자들, 자신들이 만든 영원한 환상 속에 갇힌 자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어도, 녀석이 제대로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나와 내 아이들에겐 특별한 형질을 심어놓았다.…’
‘…누군가 이 배에 올라 이 기록을 보게 된다면…… 당신이 여기에 온 건 우연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 그것은 기적이다……, 어쩌면…’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번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갱도가 뒤흔들렸다.
단은 벽에 손을 짚고 그것에 대항했다. 곧 이어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야수의 외침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어어어어어어엉!
소란을 떠는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단은 긴장한 채 한 발짝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못 박힌 듯이 서있었다.
몇 번의 진동과 울부짖는 소리가 산을 빠져나간 뒤에, 갱도가 잠잠해지자 그도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은 분명 낮일 터였다.
온통 눈산과 얼음뿐인 자신의 사냥터로 진작 떠나있어야 할 녀석이 아직까지 둥지에 남아 혼자 난동을 부린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심장이라도 잃어버렸나.
단은 생각을 멈췄다.
저 앞에 빛이 새어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서둘러 걸어갔다.
동굴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부터 그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환한 햇빛 속에 눈이 적응 될 때까지 그는 조금 기다렸다.
그리고 눈을 뜨자 그에게 익숙한, 바람 부는 설원과 끝없이 펼쳐진 산맥들이 일제히 눈인사를 건네 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감상에 빠져드는 것도 잠시.
휘잉- 북쪽 끝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셰르파인 그에게도 가차 없었다. 차가운 눈발이 서려있는 삭풍이 그를 덮치고 지나갈 때, 반팔차림의 그는 몸을 웅크리며 어깨를 떨었다.
아무리 혹한에 단련이 돼있다 한들, 이런 상태로는 하루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옷부터…
“………”
은색 눈을 가진 검은 머리의 청년은 정면에 보이는 산봉우리를 향해, 퍼퍽 눈을 튕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야 한다.
야스와, ……그 사람들을.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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