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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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륙
두 개의 달
여섯 개의 봉인
일곱 개의 신전
그리고 하나의 별…
이것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들이 지켜야 할…
세라, 당신이 옳았어.
이 이야기의 끝은 우리가 정할 수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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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얼비친 수면 위로 요란한 물보라가 일어났다.
수면을 꿰뚫고, 그는 떠올랐다. 물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하늘에 대고 울부짖는 사람처럼 급하게 숨부터 들이마신다.
물얼음이 흘러내리는 그의 검은 머리칼은 벌써부터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근처를 지나는 얼음덩이들을 밀어내버리고, 그는 여자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수면에 둥둥 뜬 그녀는 익사한 시체마냥 고요했다. 달처럼 창백히 잠든 그녀의 얼굴 뒤로 금색 해파리 같은 머리칼들이 물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단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탑을 향해 서둘러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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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톳불 주위에 용병들은 쓰러져 잠들어있었다. 그들이 깰까봐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포로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자신의 포박을 쉽게 끊어낸 야스가 그들 전부를 풀어줬다. 수족을 묶고 있던 족쇄들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그들은 불 옆에서 일어섰다.
몸에다 모포를 둘둘 만 채 짐더미를 베고 잠들어있던 세스가 잠꼬대였는지,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들 모두는 한 순간 표정이 얼어붙었다.
랜드필드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손가락을 입에 붙인 채 일행들에게 소리 없이 주의를 줬다.
그는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세스나 데니보단, 자기 배낭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제러드가 더 신경 쓰였다. 율리안은 또 혼자 야영지를 빠져나가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랜드필드의 결의에 따라 그들은 오늘 새벽 탈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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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둘러싼 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렵사리, 용이 도사리고 있다는 갱도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모든 짐을 탑 속에 놔두고 왔다. 빈털터리가 된데다 슈나이더와 아살리나는 탑에서 마주친 정체불명의 여자에 의해 무장해제까지 당한 상태. 패잔병 같은 기색으로, 그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들이 갱도에서 업고 나온 정체불명의 소녀는 불 옆에 쓰러진 채 아직 깊이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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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은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도 영 심기가 꼬인,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을 둘러싼 채 모두들 그에게 시선이 집중돼 있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만 짓고 있었다.
사슴의 요청에 따라 목에 달린 방울은 욜이 제거해주었다. 그래도 그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사료 좀 드릴까요, 라는 소년의 말에 버럭 화를 내긴 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라미엘이 사슴에게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사슴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혹시 일부러 이렇게 한 거라면 널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사슴이 살기를 내뱉었다.
“이봐! 애써 도와줬더니 누구한테 행패를 부리려는 거야? 어쨌든 살긴 살았잖아!”
그녀의 옆에 있던 젊은이가 들고 있던 칼로 땅을 쾅 내리찍으며 그에게 으름장을 던졌다.
그에게 눈을 돌린 사슴은, 있지도 않는 송곳니를 내보일 것 같은 자세를 취하다가 그의 칼을 보고는 얼굴이 싹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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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오.…”
쿠마의 태도는 그랬다.
그는 불을 들여다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슈나이더의 몸 상태를 살피던 아살리나가 허튼 소리하지 말란 듯이 그를 째려봤다.
“아스킨이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우리는 알거지가 됐고요. 뭐가 다행이란 거죠?”
쿠마는 착잡한 표정으로 바뀌며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지자, 궁색하게 주변을 눈으로 더듬던 그가, 저쪽 편에 잠들어있던 소녀의 얼굴 위에서 시선이 멈췄다.
“이 애는 어떻게 할 거요?”
“…네 조카라고 하지 않았나?”
슈나이더가 힘든 기색으로 말을 흘렸다. 그의 벗은 웃통을 아살리나가 젖은 천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오래 묵은 흉터투성이 위에 붉게 그을린 상처들이 가득했다.
쿠마는 당황하는 얼굴이 되더니, 아하하하 하고 변명처럼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도 농담을 다 할 줄 아는 구료! 방금 정말 웃긴 거 아시오?”
슈나이더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불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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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세를 낮추고 서로의 꽁무니에 매달린 채 한 줄로 조심스럽게 야영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선두엔 언제나 그렇듯 랜드필드가 섰다. 용병들은 야트막한 언덕 밑에 참호를 파고 거기다 불을 지핀 다음, 감시하고 지키기 쉽도록 포로들을 그 안쪽에다 몰아넣은 상태였다. 따라서 야영지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그들은 용병들이 엄폐물 대신 쌓아놓은 짐더미를 피해, 잠든 병사들을 모두 타넘고 지나가야만 했다.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캄캄한 나무 위에는 지금 키클러가 석궁을 들고 번초를 서는 중이었다. 그가 고개만 조금 돌리면 야영장을 바로 시야에 넣을 수 있는 좋은 위치였지만, 아까 낮에 야스가 잡아준 빙청어의 뼈를 발라내느라 그쪽은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랜드필드는 허리를 ㄱ자로 굽힌 채 조마조마한 얼굴로 불을 돌아나갔다. 뒤로는 예레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뒤엔 라휄이 야스의 털투성이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거의 모든 일행들이 용병들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쯤, 탈출로의 마지막에 위치해있던 츠즈바시가 걸어 나오면서 바보 같이 세스의 발을 밟았다.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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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의 호수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하고 그녀도 탑의 발코니 위로 건져 올렸지만, 단은 잠시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에 몸 전체가 경직과 경련을 번갈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그는 발작에 시달리는 사람마냥 바닥에 엎어져서 팔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그런 몸으로 두건과 함께 상의를 벗어던지곤, 그는 돌아누워 주먹으로 자기 심장을 쾅쾅 내리쳤다.
그와 머리를 맞댄 채 여자는 조용히 쓰러져있었다. 발끝까지 흠뻑 젖은 탓에 블라우스와 치마가 몸에 착 달라붙어,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숨도 쉬지 않는 그녀는 생명이 없는 마론 인형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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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처녀와 숲처녀는 물론 아이와 청년까지 잠든 늦은 시각.
사슴은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불앞에 앉아있었다.
환생한 뒤, 기이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의 텃밭 위에 혼자 던져지게 된 그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자기 적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차에 묶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동족들(스스로는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반쯤 무너진 벽 위로 나란히 주둥이를 내민 채 이따금씩 자신에게 몇 번 짖어보기도 하는 개새끼들은 반드시 구워 삶아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를 아까부터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마침내 참지 못하고, 사슴은 불 너머를 향해 사납게 쏘아붙였다.
이리 같은 표정을 짓는 초식동물이라니.
활활 타는 불꽃 위에서 그 모습은 악마가 변장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그 초자연적 현상임이 분명한 위협에도 당사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눈을 치워주긴 했지만 여전히 착 가라앉아있는 얼굴이다.
반이 불 위로 눈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자신과의 눈싸움을 피하자, 사슴도 쳇! 하고 혀를 차더니 다시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불을 쳐다보며, 반이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사도장님.”
사슴의 표정은 단숨에 경직됐다. 사슴은 고개는 그대로 놔둔 채 커다란 눈동자만 스르르 옆으로 굴려 그를 바라봤다. 반도 눈을 들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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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스킨이 살아있다면 탑에서 짐을 가지고 자신들을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쿠마가 조심스럽게 피력해봤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 사람 얘기는 이제 더 이상 꺼내지 말기로 해요. 마음만 아프고…… 우리 사기만 떨어뜨린다고요. 그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꼭 무사해야 해요.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고요.”
슈나이더의 몸을 닦는 데만 열중하며, 아살리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슈나이더가 아무 것도 못해보고 나가떨어지게 만든 강적인 것이다. 헛된 희망은 빠른 체념보다 해롭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다시 무겁고 답답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한숨짓던 쿠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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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여자를 올라탄 채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고 있었다. 하얀 달빛 같은 얼굴은 그의 두 손에 딱 맞게 들어왔다. 그녀는 얼음장처럼 식어있었다. 황급히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본다.
……맥박이 없다.
그의 은색 눈에 당혹과 절망이 몰려왔다.
“……이봐요.”
그는 여자를 흔들어 깨우려 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은 더 세차게 그녀를 흔들었다.
“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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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질렀지만, 세스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뒤척이다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주목하고 있던 랜드필드와 그의 일행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초 새에 10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랜드필드가 호통이라도 칠 것처럼 츠즈바시에게 엄한 눈길을 던졌다. 발두개인은 무안한 듯이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예레나가 랜드필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곳으로 그는 시선을 돌렸다.
늙은 용병이 병상에 누운 채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비스듬히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 속엔 이미 생기가 없었다. 기름이 다해 꺼져가는 불꽃처럼 그는 탈색된 모습이었다.
랜드필드는 조금 놀란 기색을 띠긴 했지만 곧 상관없다는 듯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괜찮아. 그는 움직일 수 없소. 이제 여길 벗어납시다.”
야영지를 떠나려던 그는 멈칫했다. 다른 일행들도 무슨 일이냔 듯이 그쪽을 쳐다봤다.
라휄이 죽어가는 용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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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알았소?”
사슴이 그에게 물었다.
반은 자기 뒤에 감추고 있던 뼈칼을 집어 들어 조용히 그의 앞에 내려놨다.
사슴은 입을 꾹 다문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팔짱을 풀고 한쪽 앞발을 뻗어 뼈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울분을 견디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 라논의 사제가 아니요.”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사슴은 눈을 들어 그를 노려봤다. 그것은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들려줬던 말이었다.
반은 약간 착잡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요석 같은 그의 눈동자에 불빛과 함께 떠올라있는 전(前)사도장의 모습은 사슴이 아닌, 회색의 머리칼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칼자국 가득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반은 그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이 과거에 자신을 향해 꺼냈던 말을 마저 돌려줬다.
“…우리는 그런 존재니까요.”
사슴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둘 사이엔 한동안 활활 타는 화톳불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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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돌려줘야 하는데.”
쿠마는 은색의 작은 칼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무심코 그쪽으로 눈길을 돌린 슈나이더가 그걸 보곤, 그의 눈매 안에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이리 줘보게.”
쿠마는 왜 그러냔 듯이 그에게 칼집을 넘겨줬다.
슈나이더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유심히 살펴봤다. 자기 손의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칼집을 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고 거꾸로 고쳐 쥐기도 해보던 그는, 칼집의 겉면에 은으로 조각된 짝 잃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곤 정신이 번쩍 든 얼굴이 되었다.
“이걸… 어디서 났나?”
“아스킨 그 친구가… 처음에 몸수색을 하다가 발견하곤 내가 잠시 가지고 있었소. 여행이 끝나기 전에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내 옷을……내 옷을 가져와라. 빨리!”
그는 아살리나를 돌아보며 거칠게 명령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눈을 치켜뜨며 그의 명령에 응했다.
슈나이더는 그녀가 가져다준 자신의 상의에서 헝겊에 싸인 은장도를 꺼냈다.
칼날을 묶고 있던 천을 이로 물어뜯어내 버리고, 그는 쿠마에게서 넘겨받은 칼집과 자신이 지니고 있던 칼을 두 손에 나란히 들었다.
두 개의 물체는 형제라도 된 듯이 길이와 색깔이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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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압박법과 인공호흡. 기본적인 소생술을 미친 듯이 시행했지만, 그녀는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몇 분만 더 지나면 그녀는 영영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
단은 자신의 약지를 깨물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려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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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는 이미 틀렸소. 여신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살릴 수 없소. 어서 갑시다.”
랜드필드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라휄은 마지못한 듯이 움직였다. 돌아서는 그녀를, 늙은 용병은 고요한 촛불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랜드필드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게 주의하며 서둘러 야영지를 떠났다. 조금 가다가, 뒤처지는 기색이 있어 뒤를 돌아보니 라휄이 멈춰서있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난…… 나는 갈 수 없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남자들은 할 말을 잃고 서있는데, 예레나가 그녀에게 매달렸다.
“라휄, 라휄 이러지 마요. 같이 가요. 같이 가요, 제발…”
“미안해요…”
두 여자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랜드필드가 곤란한 듯이 그 뒤로 다가갔다.
“자, 시간이 없소. 순례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소. 당신이 그런다고 저들은 고마움도 느끼지 못할 거요.”
“생각하긴 뭘 생각해! 그냥 들쳐 업고 뛰어버립시다! 나 원, 이 아가씨는 진짜 대단하구만…”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다가오는 츠즈바시를 피해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야스는 길을 모른다고 내가 사실대로 고백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쓸모가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나라도 남아있으면 기를 쓰고 여러분들을 쫓으려고 들진 않을 거예요.”
“라휄…”
“당신 아버님 말씀이 옳아요. 예레나. 길은 여러 개에요. 걸을 수 있는 길은 그 중 하나고요. 지금은 여기에 있겠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예레나의 등 너머로 야스를 불렀다. 어린애에 불과한 야스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부르자 강아지처럼 좋아하며 그녀에게 달려가 붙는다.
라휄은 자기 머리를 묶고 있던 흰색 끈을 풀러, 그것을 야스의 손에 쥐어줬다.
“이걸…… 그 사람한테 전해줘. 그의 것이야.”
그때, 그들이 빠져나온 야영장 쪽에서 성난 고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돌아갔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부산을 떠는 모습들이 보이는 듯했다.
라휄이 그들을 재촉했다.
“가요. 어서 가세요.”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랜드필드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예레나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그런 후에, 순례자 처녀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렸다.
“……그들이 발견할 때까지 그냥 여기 엎드려 계시오. 잘못하면 화살을 맞을 수도 있소.”
그 손 위에 다시 자신의 손을 포개며, 라휄은 눈물겨운 아쉬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얼굴을 끄떡였다.
랜드필드는 심란한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행운을 빌겠소. ………라휄.”
야스를 앞장세운 채 예레나를 데리고 그마저 떠나버리자, 츠즈바시도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는 울분이 터질 것 같은 기색으로 그녀 앞에서 멈칫거렸다.
라휄은 그에게도, 랜드필드에게 보여줬던 것과 동일한 미소를 말없이 건넸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더니 그것을 입에 갖다 붙였다.
“여신이시여… 저들을 지켜주소서…”
눈물을 삼키는 그녀의 머리 위로, 냉랭한 바람이 어둠에 휩싸인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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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에, 사슴이 물었다.
“당신은 이 산에 무슨 일이요?”
그가 대답했다.
“단지 누구를 좀 찾으러 왔소.”
“……나도 그렇소.”
“산이란 원래 그렇지요.”
사슴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길 잃은 자들 천지지요. 산은…”
사슴은 입을 다물었다. 그만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엔 그가 물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가겠다고 한 겁니까?”
사슴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그를 쳐다봤다.
불 뒤에서, 그는 자기 칼을 멀리 던져 놓고 방심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흑암의 힘을 극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이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상대로,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그 방심조차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나 당신 친구들에겐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겠소. ……약속하리다.”
사슴은 겨우 자구책을 내놓았다.
반은 대꾸가 없었다. 무릎에 팔을 걸친 채, 그는 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불에 대고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졌다.
“당신도 길을 잃었나보군요….”
“………”
사슴은 잠자코 있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들은 그 이상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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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그녀를 안아들고 땅에서 일어났다. 꺾여버린 꽃처럼, 여자는 그의 두 팔 위에 축 늘어져있었다.
그는 서둘러 달려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이내 탑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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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새는 서로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한 마리는 칼집 위에, 한 마리는 칼자루 속에.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부부새는 기쁨의 춤을 추듯 빛나는 날개를 너울거리며 서로에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그마한 칼날이 칼집 속으로 사각- 들어가면서 봉황은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부리를 맞댄 두 마리의 새가 칼집부터 칼자루까지 하나로 부조된 은색의 검.
슈나이더의 얼굴에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아살리나가 오히려 더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맹세코 그가 이토록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두려운 보물이라도 된 듯이 은장도의 양끝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어울리지 않게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컷이 봉, 암컷이 황…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이래. 예쁘지?…
그 옛날, 행복에 겨워하던 누이의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다시 그를 괴롭혔다.
그녀가 황제의 눈을 피해 몰래 낳은 사내아이는 궁에 얼마 있지 못하고 자신에게 맡겨졌다.
급한 호출을 받고 비밀리에 입궁한 그날 밤,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려달라며 동생을 붙잡고 오열했다.
강포에 쌓인 아이를 안고 궁을 빠져나왔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자식과 생이별을 하게 된 누이는 자식의 품속에 눈물과 함께 자신의 보물을 밀어 넣었다.
그 날의 은장도가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정체불명의 자객들.
비가 쏟아지던 밤, 아기를 품에 안고 혼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 팔을 다쳤고, 자객들을 따돌리기 위해 차가운 굴속에 처박혔다.
은신처를 발각당하지 않으려면 숨소리도 죽여야 했지만, 아기는 계속 울어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몸부림처럼 당황하던 그는, 품안의 아기를 내려다보며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내 조카가 맞다면, 울지 마라. 네 삼촌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사내는 그래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갓난아기였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의 꼴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아이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그러더니 겨우 뜬 눈꺼풀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착하다……’
이 녀석…… 눈동자가 은빛을 띄고 있군. ……제 엄마와 같은……
왜 그때, 안도보다는 눈 주변이 뜨거워졌을까…
그 따스하고 자그맣던 품안의 뭉클거림이 왜 눈물겨운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신이 누군지 안다는 듯이 바라보는 갓난아기의 시선에 왜 자신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얼굴이 엄마가 아닌 이런 험상궂은 사내의 딱딱한 면상이어야 하는가하는, 그날의 슬픔은 젖비린내 속에 비벼져 있었다.
그래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아기의 슬픈 눈망울에서 그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이게 혈육이란 것이구나, 그때의 생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는 내가 보호하고 말리라는 그때의 결의와,
그때의 좌절이,
강포에 쌓인 채 용암 위로 떨어지던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날의 울부짖음이, 차라리 죽고 싶었던 고통이,
그의 안에서 한꺼번에 솟구치며 허리를 꺾게 만들었다.
“우욱… 욱!”
슈나이더는 땅에 대고 격렬하게 구토했다. 깜짝 놀란 일행들이 그의 몸에 손을 댔지만 그는 거칠게 뿌리쳤다.
“검… 내 검을…”
부러진 대검을 들고 일어서려는 그를 두 사람이 붙잡았다. 쿠마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대장! 갑자기 왜 이러시오?”
“탑… 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그게 무슨… 슈나이더!”
두 사람이 그를 붙잡고 늘어지자 그는 다시 허물어지듯 땅위로 쓰러져버렸다. 그래도 그는 땅을 잡아끌며 기어가려고 들었다.
“놔, 놔라…”
눈앞의 환영 가운데, 청년의 은색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위로 누이의 얼굴이 겹쳤다.
다시, 그 비 내리던 굴속의, 아기의 은색 눈이…
그 애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 애가…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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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좀 길군요. 두 편짜리로 생각해주세요 ^.^
하나의 대륙
두 개의 달
여섯 개의 봉인
일곱 개의 신전
그리고 하나의 별…
이것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들이 지켜야 할…
세라, 당신이 옳았어.
이 이야기의 끝은 우리가 정할 수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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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얼비친 수면 위로 요란한 물보라가 일어났다.
수면을 꿰뚫고, 그는 떠올랐다. 물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하늘에 대고 울부짖는 사람처럼 급하게 숨부터 들이마신다.
물얼음이 흘러내리는 그의 검은 머리칼은 벌써부터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근처를 지나는 얼음덩이들을 밀어내버리고, 그는 여자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수면에 둥둥 뜬 그녀는 익사한 시체마냥 고요했다. 달처럼 창백히 잠든 그녀의 얼굴 뒤로 금색 해파리 같은 머리칼들이 물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단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탑을 향해 서둘러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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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톳불 주위에 용병들은 쓰러져 잠들어있었다. 그들이 깰까봐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포로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자신의 포박을 쉽게 끊어낸 야스가 그들 전부를 풀어줬다. 수족을 묶고 있던 족쇄들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그들은 불 옆에서 일어섰다.
몸에다 모포를 둘둘 만 채 짐더미를 베고 잠들어있던 세스가 잠꼬대였는지,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들 모두는 한 순간 표정이 얼어붙었다.
랜드필드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손가락을 입에 붙인 채 일행들에게 소리 없이 주의를 줬다.
그는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세스나 데니보단, 자기 배낭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제러드가 더 신경 쓰였다. 율리안은 또 혼자 야영지를 빠져나가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랜드필드의 결의에 따라 그들은 오늘 새벽 탈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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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둘러싼 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렵사리, 용이 도사리고 있다는 갱도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모든 짐을 탑 속에 놔두고 왔다. 빈털터리가 된데다 슈나이더와 아살리나는 탑에서 마주친 정체불명의 여자에 의해 무장해제까지 당한 상태. 패잔병 같은 기색으로, 그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들이 갱도에서 업고 나온 정체불명의 소녀는 불 옆에 쓰러진 채 아직 깊이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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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은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도 영 심기가 꼬인,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을 둘러싼 채 모두들 그에게 시선이 집중돼 있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만 짓고 있었다.
사슴의 요청에 따라 목에 달린 방울은 욜이 제거해주었다. 그래도 그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사료 좀 드릴까요, 라는 소년의 말에 버럭 화를 내긴 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라미엘이 사슴에게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사슴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혹시 일부러 이렇게 한 거라면 널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사슴이 살기를 내뱉었다.
“이봐! 애써 도와줬더니 누구한테 행패를 부리려는 거야? 어쨌든 살긴 살았잖아!”
그녀의 옆에 있던 젊은이가 들고 있던 칼로 땅을 쾅 내리찍으며 그에게 으름장을 던졌다.
그에게 눈을 돌린 사슴은, 있지도 않는 송곳니를 내보일 것 같은 자세를 취하다가 그의 칼을 보고는 얼굴이 싹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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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오.…”
쿠마의 태도는 그랬다.
그는 불을 들여다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슈나이더의 몸 상태를 살피던 아살리나가 허튼 소리하지 말란 듯이 그를 째려봤다.
“아스킨이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우리는 알거지가 됐고요. 뭐가 다행이란 거죠?”
쿠마는 착잡한 표정으로 바뀌며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지자, 궁색하게 주변을 눈으로 더듬던 그가, 저쪽 편에 잠들어있던 소녀의 얼굴 위에서 시선이 멈췄다.
“이 애는 어떻게 할 거요?”
“…네 조카라고 하지 않았나?”
슈나이더가 힘든 기색으로 말을 흘렸다. 그의 벗은 웃통을 아살리나가 젖은 천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오래 묵은 흉터투성이 위에 붉게 그을린 상처들이 가득했다.
쿠마는 당황하는 얼굴이 되더니, 아하하하 하고 변명처럼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도 농담을 다 할 줄 아는 구료! 방금 정말 웃긴 거 아시오?”
슈나이더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불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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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세를 낮추고 서로의 꽁무니에 매달린 채 한 줄로 조심스럽게 야영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선두엔 언제나 그렇듯 랜드필드가 섰다. 용병들은 야트막한 언덕 밑에 참호를 파고 거기다 불을 지핀 다음, 감시하고 지키기 쉽도록 포로들을 그 안쪽에다 몰아넣은 상태였다. 따라서 야영지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그들은 용병들이 엄폐물 대신 쌓아놓은 짐더미를 피해, 잠든 병사들을 모두 타넘고 지나가야만 했다.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캄캄한 나무 위에는 지금 키클러가 석궁을 들고 번초를 서는 중이었다. 그가 고개만 조금 돌리면 야영장을 바로 시야에 넣을 수 있는 좋은 위치였지만, 아까 낮에 야스가 잡아준 빙청어의 뼈를 발라내느라 그쪽은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랜드필드는 허리를 ㄱ자로 굽힌 채 조마조마한 얼굴로 불을 돌아나갔다. 뒤로는 예레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뒤엔 라휄이 야스의 털투성이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거의 모든 일행들이 용병들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쯤, 탈출로의 마지막에 위치해있던 츠즈바시가 걸어 나오면서 바보 같이 세스의 발을 밟았다.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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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의 호수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하고 그녀도 탑의 발코니 위로 건져 올렸지만, 단은 잠시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에 몸 전체가 경직과 경련을 번갈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그는 발작에 시달리는 사람마냥 바닥에 엎어져서 팔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그런 몸으로 두건과 함께 상의를 벗어던지곤, 그는 돌아누워 주먹으로 자기 심장을 쾅쾅 내리쳤다.
그와 머리를 맞댄 채 여자는 조용히 쓰러져있었다. 발끝까지 흠뻑 젖은 탓에 블라우스와 치마가 몸에 착 달라붙어,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숨도 쉬지 않는 그녀는 생명이 없는 마론 인형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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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처녀와 숲처녀는 물론 아이와 청년까지 잠든 늦은 시각.
사슴은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불앞에 앉아있었다.
환생한 뒤, 기이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의 텃밭 위에 혼자 던져지게 된 그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자기 적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차에 묶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동족들(스스로는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반쯤 무너진 벽 위로 나란히 주둥이를 내민 채 이따금씩 자신에게 몇 번 짖어보기도 하는 개새끼들은 반드시 구워 삶아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를 아까부터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마침내 참지 못하고, 사슴은 불 너머를 향해 사납게 쏘아붙였다.
이리 같은 표정을 짓는 초식동물이라니.
활활 타는 불꽃 위에서 그 모습은 악마가 변장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그 초자연적 현상임이 분명한 위협에도 당사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눈을 치워주긴 했지만 여전히 착 가라앉아있는 얼굴이다.
반이 불 위로 눈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자신과의 눈싸움을 피하자, 사슴도 쳇! 하고 혀를 차더니 다시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불을 쳐다보며, 반이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사도장님.”
사슴의 표정은 단숨에 경직됐다. 사슴은 고개는 그대로 놔둔 채 커다란 눈동자만 스르르 옆으로 굴려 그를 바라봤다. 반도 눈을 들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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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스킨이 살아있다면 탑에서 짐을 가지고 자신들을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쿠마가 조심스럽게 피력해봤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 사람 얘기는 이제 더 이상 꺼내지 말기로 해요. 마음만 아프고…… 우리 사기만 떨어뜨린다고요. 그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꼭 무사해야 해요.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고요.”
슈나이더의 몸을 닦는 데만 열중하며, 아살리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슈나이더가 아무 것도 못해보고 나가떨어지게 만든 강적인 것이다. 헛된 희망은 빠른 체념보다 해롭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다시 무겁고 답답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한숨짓던 쿠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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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여자를 올라탄 채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고 있었다. 하얀 달빛 같은 얼굴은 그의 두 손에 딱 맞게 들어왔다. 그녀는 얼음장처럼 식어있었다. 황급히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본다.
……맥박이 없다.
그의 은색 눈에 당혹과 절망이 몰려왔다.
“……이봐요.”
그는 여자를 흔들어 깨우려 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은 더 세차게 그녀를 흔들었다.
“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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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질렀지만, 세스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뒤척이다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주목하고 있던 랜드필드와 그의 일행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초 새에 10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랜드필드가 호통이라도 칠 것처럼 츠즈바시에게 엄한 눈길을 던졌다. 발두개인은 무안한 듯이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예레나가 랜드필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곳으로 그는 시선을 돌렸다.
늙은 용병이 병상에 누운 채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비스듬히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 속엔 이미 생기가 없었다. 기름이 다해 꺼져가는 불꽃처럼 그는 탈색된 모습이었다.
랜드필드는 조금 놀란 기색을 띠긴 했지만 곧 상관없다는 듯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괜찮아. 그는 움직일 수 없소. 이제 여길 벗어납시다.”
야영지를 떠나려던 그는 멈칫했다. 다른 일행들도 무슨 일이냔 듯이 그쪽을 쳐다봤다.
라휄이 죽어가는 용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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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알았소?”
사슴이 그에게 물었다.
반은 자기 뒤에 감추고 있던 뼈칼을 집어 들어 조용히 그의 앞에 내려놨다.
사슴은 입을 꾹 다문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팔짱을 풀고 한쪽 앞발을 뻗어 뼈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울분을 견디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 라논의 사제가 아니요.”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사슴은 눈을 들어 그를 노려봤다. 그것은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들려줬던 말이었다.
반은 약간 착잡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요석 같은 그의 눈동자에 불빛과 함께 떠올라있는 전(前)사도장의 모습은 사슴이 아닌, 회색의 머리칼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칼자국 가득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반은 그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이 과거에 자신을 향해 꺼냈던 말을 마저 돌려줬다.
“…우리는 그런 존재니까요.”
사슴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둘 사이엔 한동안 활활 타는 화톳불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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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돌려줘야 하는데.”
쿠마는 은색의 작은 칼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무심코 그쪽으로 눈길을 돌린 슈나이더가 그걸 보곤, 그의 눈매 안에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이리 줘보게.”
쿠마는 왜 그러냔 듯이 그에게 칼집을 넘겨줬다.
슈나이더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유심히 살펴봤다. 자기 손의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칼집을 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고 거꾸로 고쳐 쥐기도 해보던 그는, 칼집의 겉면에 은으로 조각된 짝 잃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곤 정신이 번쩍 든 얼굴이 되었다.
“이걸… 어디서 났나?”
“아스킨 그 친구가… 처음에 몸수색을 하다가 발견하곤 내가 잠시 가지고 있었소. 여행이 끝나기 전에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내 옷을……내 옷을 가져와라. 빨리!”
그는 아살리나를 돌아보며 거칠게 명령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눈을 치켜뜨며 그의 명령에 응했다.
슈나이더는 그녀가 가져다준 자신의 상의에서 헝겊에 싸인 은장도를 꺼냈다.
칼날을 묶고 있던 천을 이로 물어뜯어내 버리고, 그는 쿠마에게서 넘겨받은 칼집과 자신이 지니고 있던 칼을 두 손에 나란히 들었다.
두 개의 물체는 형제라도 된 듯이 길이와 색깔이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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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압박법과 인공호흡. 기본적인 소생술을 미친 듯이 시행했지만, 그녀는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몇 분만 더 지나면 그녀는 영영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
단은 자신의 약지를 깨물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려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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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는 이미 틀렸소. 여신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살릴 수 없소. 어서 갑시다.”
랜드필드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라휄은 마지못한 듯이 움직였다. 돌아서는 그녀를, 늙은 용병은 고요한 촛불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랜드필드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게 주의하며 서둘러 야영지를 떠났다. 조금 가다가, 뒤처지는 기색이 있어 뒤를 돌아보니 라휄이 멈춰서있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난…… 나는 갈 수 없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남자들은 할 말을 잃고 서있는데, 예레나가 그녀에게 매달렸다.
“라휄, 라휄 이러지 마요. 같이 가요. 같이 가요, 제발…”
“미안해요…”
두 여자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랜드필드가 곤란한 듯이 그 뒤로 다가갔다.
“자, 시간이 없소. 순례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소. 당신이 그런다고 저들은 고마움도 느끼지 못할 거요.”
“생각하긴 뭘 생각해! 그냥 들쳐 업고 뛰어버립시다! 나 원, 이 아가씨는 진짜 대단하구만…”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다가오는 츠즈바시를 피해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야스는 길을 모른다고 내가 사실대로 고백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쓸모가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나라도 남아있으면 기를 쓰고 여러분들을 쫓으려고 들진 않을 거예요.”
“라휄…”
“당신 아버님 말씀이 옳아요. 예레나. 길은 여러 개에요. 걸을 수 있는 길은 그 중 하나고요. 지금은 여기에 있겠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예레나의 등 너머로 야스를 불렀다. 어린애에 불과한 야스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부르자 강아지처럼 좋아하며 그녀에게 달려가 붙는다.
라휄은 자기 머리를 묶고 있던 흰색 끈을 풀러, 그것을 야스의 손에 쥐어줬다.
“이걸…… 그 사람한테 전해줘. 그의 것이야.”
그때, 그들이 빠져나온 야영장 쪽에서 성난 고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돌아갔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부산을 떠는 모습들이 보이는 듯했다.
라휄이 그들을 재촉했다.
“가요. 어서 가세요.”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랜드필드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예레나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그런 후에, 순례자 처녀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렸다.
“……그들이 발견할 때까지 그냥 여기 엎드려 계시오. 잘못하면 화살을 맞을 수도 있소.”
그 손 위에 다시 자신의 손을 포개며, 라휄은 눈물겨운 아쉬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얼굴을 끄떡였다.
랜드필드는 심란한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행운을 빌겠소. ………라휄.”
야스를 앞장세운 채 예레나를 데리고 그마저 떠나버리자, 츠즈바시도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는 울분이 터질 것 같은 기색으로 그녀 앞에서 멈칫거렸다.
라휄은 그에게도, 랜드필드에게 보여줬던 것과 동일한 미소를 말없이 건넸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더니 그것을 입에 갖다 붙였다.
“여신이시여… 저들을 지켜주소서…”
눈물을 삼키는 그녀의 머리 위로, 냉랭한 바람이 어둠에 휩싸인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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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에, 사슴이 물었다.
“당신은 이 산에 무슨 일이요?”
그가 대답했다.
“단지 누구를 좀 찾으러 왔소.”
“……나도 그렇소.”
“산이란 원래 그렇지요.”
사슴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길 잃은 자들 천지지요. 산은…”
사슴은 입을 다물었다. 그만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엔 그가 물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가겠다고 한 겁니까?”
사슴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그를 쳐다봤다.
불 뒤에서, 그는 자기 칼을 멀리 던져 놓고 방심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흑암의 힘을 극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이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상대로,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그 방심조차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나 당신 친구들에겐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겠소. ……약속하리다.”
사슴은 겨우 자구책을 내놓았다.
반은 대꾸가 없었다. 무릎에 팔을 걸친 채, 그는 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불에 대고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졌다.
“당신도 길을 잃었나보군요….”
“………”
사슴은 잠자코 있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들은 그 이상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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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그녀를 안아들고 땅에서 일어났다. 꺾여버린 꽃처럼, 여자는 그의 두 팔 위에 축 늘어져있었다.
그는 서둘러 달려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이내 탑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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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새는 서로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한 마리는 칼집 위에, 한 마리는 칼자루 속에.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부부새는 기쁨의 춤을 추듯 빛나는 날개를 너울거리며 서로에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그마한 칼날이 칼집 속으로 사각- 들어가면서 봉황은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부리를 맞댄 두 마리의 새가 칼집부터 칼자루까지 하나로 부조된 은색의 검.
슈나이더의 얼굴에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아살리나가 오히려 더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맹세코 그가 이토록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두려운 보물이라도 된 듯이 은장도의 양끝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어울리지 않게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컷이 봉, 암컷이 황…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이래. 예쁘지?…
그 옛날, 행복에 겨워하던 누이의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다시 그를 괴롭혔다.
그녀가 황제의 눈을 피해 몰래 낳은 사내아이는 궁에 얼마 있지 못하고 자신에게 맡겨졌다.
급한 호출을 받고 비밀리에 입궁한 그날 밤,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려달라며 동생을 붙잡고 오열했다.
강포에 쌓인 아이를 안고 궁을 빠져나왔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자식과 생이별을 하게 된 누이는 자식의 품속에 눈물과 함께 자신의 보물을 밀어 넣었다.
그 날의 은장도가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정체불명의 자객들.
비가 쏟아지던 밤, 아기를 품에 안고 혼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 팔을 다쳤고, 자객들을 따돌리기 위해 차가운 굴속에 처박혔다.
은신처를 발각당하지 않으려면 숨소리도 죽여야 했지만, 아기는 계속 울어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몸부림처럼 당황하던 그는, 품안의 아기를 내려다보며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내 조카가 맞다면, 울지 마라. 네 삼촌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사내는 그래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갓난아기였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의 꼴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아이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그러더니 겨우 뜬 눈꺼풀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착하다……’
이 녀석…… 눈동자가 은빛을 띄고 있군. ……제 엄마와 같은……
왜 그때, 안도보다는 눈 주변이 뜨거워졌을까…
그 따스하고 자그맣던 품안의 뭉클거림이 왜 눈물겨운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신이 누군지 안다는 듯이 바라보는 갓난아기의 시선에 왜 자신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얼굴이 엄마가 아닌 이런 험상궂은 사내의 딱딱한 면상이어야 하는가하는, 그날의 슬픔은 젖비린내 속에 비벼져 있었다.
그래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아기의 슬픈 눈망울에서 그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이게 혈육이란 것이구나, 그때의 생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는 내가 보호하고 말리라는 그때의 결의와,
그때의 좌절이,
강포에 쌓인 채 용암 위로 떨어지던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그날의 울부짖음이, 차라리 죽고 싶었던 고통이,
그의 안에서 한꺼번에 솟구치며 허리를 꺾게 만들었다.
“우욱… 욱!”
슈나이더는 땅에 대고 격렬하게 구토했다. 깜짝 놀란 일행들이 그의 몸에 손을 댔지만 그는 거칠게 뿌리쳤다.
“검… 내 검을…”
부러진 대검을 들고 일어서려는 그를 두 사람이 붙잡았다. 쿠마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대장! 갑자기 왜 이러시오?”
“탑… 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그게 무슨… 슈나이더!”
두 사람이 그를 붙잡고 늘어지자 그는 다시 허물어지듯 땅위로 쓰러져버렸다. 그래도 그는 땅을 잡아끌며 기어가려고 들었다.
“놔, 놔라…”
눈앞의 환영 가운데, 청년의 은색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위로 누이의 얼굴이 겹쳤다.
다시, 그 비 내리던 굴속의, 아기의 은색 눈이…
그 애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 애가…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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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좀 길군요. 두 편짜리로 생각해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