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은 거대한 열주 사이를 서둘러 달려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그러나 직선으로 쭉 뻗은 복도만 따라간다면, 벽이 나타날 때까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여기에 아무 것도 없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야영지 근처에 다다라서, 그는 여자에게서 뺏은 일각수의 지팡이와 그녀의 칼을 복도의 좌우 너머로 각각 멀리 던져버렸다. 땡그랑! 우당탕! 하는 소리가 왼쪽과 오른쪽의 어둠으로부터 조그맣게 솟아올랐다. 저걸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어차피 그녀에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자신이 염려할 바는 아니었다.
장대한 내벽 사이를 빠져나오자 탑의 외벽이 나타났다. 휘어진 복도 끝에서 어슴푸레한 주홍색 불빛이 벽에 닿아있는 것이 보였다. 단은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당연한 듯이 야영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 잃은 짐들만이 거의 다 죽어가는 불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단은 슈나이더의 배낭에서 자기 무기부터 꺼냈다. 토마호크는 오른쪽 허리춤에 걸어두고, 다마스커스의 칼집은 허리 뒤에 수평으로 매달았다. 활까지 챙겨든 그는 자기 배낭에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들을 닥치는 대로 쑤셔 넣고는 그것을 등에 맸다.
언제 그녀가 이리로 들이닥칠지 모른다. 서둘러야 했다.
탄화된 잿더미 사이로 간신히 얼굴만 내밀고 있던 불씨를 그는 탁탁 밟아 꺼트렸다.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지만 그는 외벽을 더듬으며 복도를 따라갔다.
쿠마 일행은 제대로 찾아갔다면 지금쯤 갱도를 거의 다 빠져나갔을 것이다. 지팡이를 되찾기 위해 여자는 자신을 따라올 터였다. 갱도 아래에 잠을 자고 있을 빙룡의 눈만 잘 피한다면 이제 그들은 안전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그도 자기 살길을 찾아야할 때였다.
단은 승강기를 타고 탑을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이 탑엘 혼자서 들어온 것이라면 틀림없이 그걸 타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자신이 사라진 걸 알고 그녀가 제일 먼저 발길을 향하는 곳도 거기일 것이다. 미련하게 그녀와 다시 마주쳐서 명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그는 그 여자가 쫓아오기 힘든 코스를 탈출로로 활용할 결심을 굳혔다.
잠시 후, 단은 탑을 빠져나왔다. 웅장한 탑이 머리를 처박고 있는 지각의 균열들로부터 희끄무레한 빛이 관통하고 있어서 바깥은 땅속인데도 환했다. 그는 탑의 발코니처럼 보이는, 외벽에 붙은 낭떠러지 위를 배낭을 맨 채 달려가고 있었다. 그 바로 밑으론 깊은 호수가 펼쳐져있어서 그는 방파제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탑이 잠겨있는 광활한 호수엔 덜 녹은 얼음들이 가득 떠있었다. 탑을 둘러싼 절벽 여기저기를 뚫고 나온 빙하수들은 까마득한 거리를 낙하하는 동안 산산이 흩어져, 얼음호수 위를 때릴 때에는 굵은 빗방울처럼 변해있었다. 그래서 탑 주변엔 찰방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낙비가 내리는 지점이 몇 군데 생겨났다. 천장의 균열에서 비스듬히 뻗어 나온 거대한 빛줄기 속을 소낙비가 관통할 때 물방울들은 일제히 껍질을 벗고 빛의 함성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큼직한 얼음덩이나 동토층의 일부가 통째로 떨어져내려 바다에 폭탄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요란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는 끊어진 절벽길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오래 전에 무너진 탑의 일부가 딱딱하게 굳어 험난하게 굴곡진 바위산처럼 변한 곳이었다. 단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 위로 뛰어올랐다.
그가 산을 타는 동안, 저 멀리 수면에서 쏴아아-하고 물을 쏟아 내리며 백색의 원반 하나가 솟아올랐다. 원반은 천천히 회전하며 나선의 궤도를 따라 형제들에게 날아갔다. 단은 그것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등반에만 집중했다.
산을 거의 다 올랐을 무렵, 어떻게 알고 그 여자가 산 밑에까지 쫓아왔다. 여자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 산을 기어오르는 중인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여자는 오기서린 눈빛을 하더니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단은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저러다 발이라도 헛딛는 날에는 그대로 굴러 떨어져 호수에 처박히게 된다. 그가 아래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 물건들은 탑 안에 버려뒀소. 혹시 발견 못했소?”
여자는 그를 한번 흘긋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경사가 급한 바윗길을, 그녀는 두 손과 두 발을 사용해 잘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런 수고조차 마다않는 걸 보니, 잡히면 확실히 죽음이다.
단은 신경 끄고 산 정상에 섰다. 발을 딛고 등반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앞은 탄탄하고 장대한 탑신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무너진 벽의 난간을 밟고 게걸음으로 이동해 등반시작지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암벽 틈새에 매달렸다. 그런 다음 그 위로 손을 뻗어 튀어나온 돌부리를 붙잡았다. 돌부리에 매달린 채 그는 위를 쳐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순간적으로 몸을 퉁겨 더 위로 솟구쳤다. 다른 틈새에 오른쪽 손끝을 걸치는데 성공한 그는 첫 번째 틈새에 한쪽 발을 걸어둔 채 왼손을 옆으로 뻗었다. 거기에 튀어나온 탑의 석조장식물을 붙잡고 그는 다시 몸을 날렸다. 장식물을 철봉삼아 매달린 채 몸을 완전히 한 바퀴 돌리고 나선, 그는 벽을 짚고 장식물 위로 올라가 섰다.
모든 셰르파가 암벽타기의 명수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분야에 있어서 최고의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떤 셰르파도 넘어보지 못한 ‘악마의 북벽’을 혼자서 정복한 것도 그였다. 그때는 야스도 없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루만 그를 따라와서 공식적으로 그 산은 아직 미개척코스로 남아있지만.
그를 뒤쫓아 온 미카엘이 산 정상에 섰을 때 그는 이미 그녀가 도저히 어찌 해 볼 수 없는 높이까지 도달해있었다. 외벽에 달라붙은 채,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젠 정말 안녕이라는 듯이 한쪽 손을 들어보였다.
청초한 미색엔 어울리지 않게도 그녀는 살기등등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며 분한 듯이 입을 꾹 다무는 게 다였다.
단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안전장비도 없이 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았다면 그녀가 손속에 사정을 뒀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하빈 크라이시스가 자기 안에는 없었다. 그녀로 인해, 버렸던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이야 말로 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였다. 뒤를 돌아보는 일 따위, 셰르파인 그는 하지 않는다.
정말 지축이라도 된 듯이 탑은 거대했다. 그 사실을, 그냥 올려다보기만 할 때보다 그는 좀 더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300층? 한참을 기어오른 것 같은데 아직 반에 반도 미치지 못했다. 이게 땅속이 아니라 지상에 세워져있었다면 틀림없이 웬만한 산봉우리보다도 컸을 것이다.
그는 이 탑의 꼭대기에 도달하면 땅속으로 숨을 생각이었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갱도 내부까지만 잠입에 성공한다면 여자를 따돌리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녀가 승강기를 타고 먼저 올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갱도로 진입하는 길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개였다.
단은 탑의 허리쯤에 이르러서 벽에 붙어있는 돌턱에 두발을 올리고 섰다. 그대로 돌아서서 벽에 등을 기댄다. 조금 숨을 돌리고 갈 생각이었다. 멀리 궤도를 떠도는 원반들과 그 뒤편에 펼쳐진 암벽, 그리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들이 보였다. 발밑은 호수 위로 피어오른 비안개가옅은 망상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작은 노랫소리에 흠칫 놀라 주위의 황량한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지나온 탑의 옆구리 뒤에서 백색의 원반 하나가 스르륵 나타났다.
단은 두건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노랫소리의 주인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카엘은 원반의 한복판에서 요정처럼 춤을 추며 고운 선율의 노래를 자기 몸에 휘감고 있었다.
어떻게 저걸 잡아탄 거지? 단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녀가 탄 원반은 정확히 그가 들러붙어있는 지점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선율이 없는, 단지 “리-”하는 소리만으로 바뀐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춤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단은 미간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원반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단은 한숨을 짓는 것처럼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나도 저기까지 좀 태워주겠소?”
여자의 몸동작이 앞으로 쏠리며, 그녀는 이마 위에서 교차한 두 팔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림자가 벗겨지듯 그녀의 전신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푸른 섬광은 성난 표범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단은 절벽을 박차고 그 자리에서 이탈했다.
꽝! 하는 충격음과 함께 움찔대는 탑신 위로 돌먼지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허공을 뒹구는 순간, 운 좋게 손가락을 넣을 수 있을만한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단은 거기에 두 팔로 매달린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금 전까지 자신이 붙어있던 벽에 거대한 야수가 앞발로 할퀴고 간 듯한 네 개의 기다란 상처자국이 나란히 박혀있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네가 최초야.”
여자가 그의 뒤에서 말했다. 싸늘하다 못해 새카만 그늘이 서린 얼굴로, 그녀의 춤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네가 유일해. 아무도 없었어… 그 긴 세월을 사는 동안 나를 이렇게까지 짜증나게 만든 사람은.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그거 영광인데…. 단은 하나도 재밌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주문이 다시 그를 덮쳤다. 단은 이번에도 절벽을 차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몸을 고정시킬 수 있을만한 다른 부가물을 찾지 못한 대가로, 그는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게 되었다.
추락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단은 허리춤에 걸어둔 토마호크를 꺼내들어 탑의 외벽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카가가각-! 세로의 금이 길게 일어나며 그를 뒤쫓았다. 다른 손으로도 탑을 할퀴며, 그는 필사적으로 벽에 들러붙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도끼날이 한 틈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가까스로 그의 하강에 제동이 걸렸다.
단은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쳐다봤다. 돌가루들이 툭툭 탑신에 부딪혀 튕겨 오르며 사라지고 있는 발밑의 풍경은 너무 까마득해서 여기의 높이가 제대로 실감이 안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위험은 지금 발밑이 아닌 머리 위에 있었다.
노랫소리가 다시 시작 되자,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자가 탄 원반이 허공을 빙그르르- 맴돌아 이상한 나선을 그리며 다시 그의 뒤로 이동했다.
“리-”하는 소리를 내며, 목표물을 사정권 안에 넣고 몸으로 주문을 그리는 여자는 꽃술을 눈앞에 둔 여왕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돌아보며, 단은 신음을 흘렸다. 멀리서 겨누고 있다가 쏘아보내기만 하면 되는 상대의 유리함에 비해 자신은 장기인 발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렇게 계속 피하기만 하다간 언젠간 그녀의 마법에 박살나든지 저 밑으로 떨어져죽든지 둘 중에 하나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의 안에 존재하는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또 그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로 녀석에게 영원한 실망을 안겨주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짐을 그녀에게 떠넘기는 꼴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살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단은 한손으로 도끼자루를 단단히 붙잡은 채 벽 위에서 반쯤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너는 장미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그보다 더 진한 향기가……”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그녀가 탄 원반이 자전을 시작한 덕분에 그녀의 춤이 흔들린 것이다. 그녀가 제자리에서 약간 주춤하는 동안, 원반은 단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서서히 이동을 개시했다.
“…너는 별빛보다 환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따사로워…”
단은 노래를 계속 하며 자세를 좀 더 뒤틀었다. 사정거리 안에만 들어오면 원반에 뛰어오를 생각이었다. 그녀를 제압하는 건 그 후의 문제였다.
미카엘도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코웃음 쳤다. 저 인간도 비공정의 성질을 아는 모양이었지만, 그 효과를 상쇄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는 토끼머리 모양처럼 만든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킨 채 잠시 춤을 멈추고, 인간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숲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온통 자연에 대한 찬가나 달의 사모곡뿐이라 구애가(求愛歌)는 물론, 그것의 반대라 할 수 있는 노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異性)이 존재하지 않기에 연정이라는 것의 개념조차 잘 모르고 영원을 사는 것이 그녀의 종족들이었다.
“…처음부터 내겐 없던 거야… 사랑이란 작은 여유도… 그래서인지 난 너무 쉽게 너의 눈빛 속에 빠진 걸…”
단에게 다가가던 원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러다가 완전히 멈추더니 다시 반대로 회전하기 시작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했다.
회심의 미소와 함께 여자의 춤도 재개됐다. 단은 난감한 듯이 신음했다. 저걸 타고 노래를 부르면 오히려 탑으로 가까이 와야 하는데… 노래가 가진 정서에 따라 그 효과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곤 더 큰 소리로 끌어당기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아는 사랑은, 그댈 위한 나의 마음… 그리고 그대의 미소…”
원반이 또 다시 멈칫거리면서 여자의 춤도 비틀거렸다. 그녀는 완고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음조를 높여 그의 노랫소리에 대항했다.
“…왜 하필 나를 택했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냥 스칠 인연, 한 번도 원한 적 없어…”
“…나는 울고 싶진 않아… 다시 웃고 싶어졌지… 그런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모습 보면서…”
“…기억하렴. 나의 서글픈 모습… 새벽녘까지 잠 못 이룬 날들. 이렇게 후회하는 내 모습이…나도 어리석어 보여…”
“…다시 울고 싶어지면, 나는 그대를 생각하며…지난 추억에 빠져있네… 그대여…”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원반은 소리 그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담긴 사람의 진심에 이끌린다는 것이었고, 원반을 두고 이런 식의 경쟁이 벌어질 경우 그것은 진심의 정도가 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한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었다.
원반이 지척까지 접근하자, 단은 채비를 갖췄고 여자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춤도 거의 막바지였다.
“……상처를 받은 나의 맘 모른 채… 넌 웃고 있니…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가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이번엔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매가 부리와 발톱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단은 오히려 뛰어들었다.
꽝! 하고 탑신에서 흙먼지가 끓어올랐다.
여자는 얼굴 앞에 손을 들어 부채질을 하면서 시선을 모았다. 그가 붙어서있던 자리엔 벽의 틈새에 걸린 도끼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노래가 끝나자 원반은 일단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기 위해 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움직이는 원반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 밑을 내려다보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가장자리에 그가 두 팔로 매달려있는 것이 쉽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치자, 단은 두건 속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웬일인지 오랜만에 싱긋 웃어 보인다.
두 사람이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은 여자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자는 단에게 다가가기 위해.
승부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팔의 힘만으로 원반의 원주전체를 달려야하는 그에 비해, 그녀는 단지 그의 손끝만 잘 보면서 직선으로 또박또박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자의 발이 그의 손을 질근 밟았다. 단은 그 한손만으로 매달려있는 상태였다.
미카엘은 두 손으로 치마를 누른 채, 발밑의 그에게 무감정한 눈길을 보냈다. 그 얼굴이 이제 좀 살인자다워 보여서, 단은 두건 밑에서 피식 웃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끝까지, 어이없는 인간이었다. 그녀가 한쪽 발을 그의 손등 위로 다시 들어올렸다.
“신의 용서가……”
단이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원반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는 여자의 발목을 확 낚아챘다.
어멋!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원반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공중에서도 그 둘은 티격태격 몸싸움을 벌였다. 여자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남자를 자기한테서 밀어내려고만 들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딴 데 있었다.
그녀를 부둥켜안고 밑을 보니, 다행히 다른 원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산대로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그녀가 자기 밑에 깔리게 된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공중에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원반에 충돌했다. 그의 위로 떨어지게 된 미카엘은 그가 쿠션 역할을 해준 덕분에 별 다른 충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중까지 감당한 채 등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 단은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안에 든 짐이 적어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데는 별 도움이 못 됐고, 보통사람이라면 척추가 부러질 만한 정도였다.
한동안 호흡마저 곤란한 상황에서 그는 절대로 그녀를 놔주지 않으려고 들었다. 춤을 못 추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여자는 그의 품안에 갇힌 작은 새처럼 몸부림 쳤다.
“이, 이게 뭐하는 짓…”
“……미안하지만.”
수치심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를 깔고 누운 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거나 때려보기도 하고 발버둥을 쳤지만, 젊은 남자의 힘은 완강했다. 추락의 여파로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아예 두 다리까지 동원해 그녀의 치마 위를 단단히 감싸 안아버렸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이 올라탄 원반은 그들의 숫자에 반응하여 어느새 궤도가 많이 기울어있었다. 거기다, 본래 가장 낮은 높이를 부유하고 있던 원반 중 하나였다. 밑에서 얼음의 호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수치심이 극에 달한 순간, 마침내 그녀가 외쳤다.
“Dust!"
원반 위에 백색의 섬광이 번쩍였다. 단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에 외마디 비명을 토했다.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도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기에, 그 와중에도 그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받아야하는 고통은 그 몇 배에 달했지만 그는 여자를 놔주지 않았다. 지금 와서 포기해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다.
“Dust!"
여자가 다시, 충전된 마야를 터뜨렸다. 단은 온몸의 구멍을 뚫고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여자는 이제 자기 육신으로 반항하는 일은 멈추고 있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댄 채, 이대로 그를 초신성 폭발로 태워죽일 작정이었다.
어둠이 그를 장악하기 위해 그의 목을 조르며 난동을 부렸다.
어서 나를 해방시켜! 그 부적을 네 몸에서 떼어내! 좀 전과 같은 공격을 한번만 더 받게 되면 너도 나도 끝장이다!
‘닥쳐…’
이런다고 내가 사라질 것 같나?!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네 놈 육신이 다 썩어 없어지기 전에 네가 이토록 금지옥엽처럼 다루고 있는 이 두 번째 달의 끄나풀을 내가 마음껏 범해주지! 차라리 죽여달란 소리가 나올 때까지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빌어먹을, 닥쳐!”
단이 그녀를 안은 채 거칠게 돌아누워 그녀를 바닥에 밀어붙였다.
그에게 깔리고 나서, 인상을 쓴 얼굴로 그녀는 다시 외쳤다.
“Dus… 읍?!?!?”
그의 두건 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부딪쳤다. 혼비백산한 미카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누르면서 입술로 그녀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홍당무처럼 빨개진 여자의 얼굴에선 눈물이 삐죽 튀어나왔다. 주문의 발성보단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는 아예 고개를 좌우로 재껴가며 그녀의 입속을 빨아먹다시피 했다.
그때, 그들이 탄 원반이 호수의 수면 위로 착륙했다. 거대한 탑신이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촤아악- 원반의 가장자리로부터 긴 물보라가 일어났다.
그 순간, 단은 두건 안에 감추고 있던 눈을 떴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우수를 띤 은빛의 눈동자…
여자의 저항이 멈췄다.
단은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자기 밑에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보는 그들 위로, 공기방울이 차오르는 시리도록 찬란한 세계가 펼쳐졌다.
두 사람은 원반과 함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원반이 그들을 버려둔 채 더 깊숙한 수심으로 떠나버리자, 단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수압 때문에 두건이 벗겨지면서, 물속에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그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녀가 다시 보고 싶어 한 그 소년의 얼굴이, 그녀를 가슴 저리게 만들던 그 서글픈 은색 눈이 거기엔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왜…
답답한 질문을 던져오는 것 같은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도 단은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자신은 하빈 크라이시스가 아니었다.
그 얼굴을 만져보기 위해, 그녀는 샛노란 해초같이 피어오른 자신의 머리칼 너머로 꿈결처럼 손을 뻗었다.
단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점점 가라앉고 있는 차가운 물길 속.
새카맣게 채워진 바닥의 상념들.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은 작은 돌멩이 틈에 숨은 공기방울처럼 소리 없이 여기저기 떠올라 수면으로 향했다.
물속을 파고든 사선의 빛줄기조차 그들 주위에 얼어붙어있었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아득해져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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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음흉한 놈;;;

>> 단과 미카엘이 부른 노래는 각각, 신승훈 씨의 '미소속에 비친 그대'와 엄정화씨의 '배반의 장미'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운율을 마춘 노래를 직접 만들어내볼까 하다가, 그냥 이게 나을 것 같아서 이대로 했어요. 소설의 설정과는 아무 상관 없으니 혼란을 느끼지는 마세요;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