뮐력 1080년 나무의 시기 11일째 하루종일 습하고 어두움

오늘 운헤임 시에 도착했다. 장시간 여행을 하느라 지친 몸으로 도시 입구에 들어섰더니, 도시의 고위 성직자가 날 맞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고위라고는 하나 소도시여서 계급은 별로 높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뮐로안이 나 같은 라무톨 샤엘 뮐로안을 만날 때 흔히 보이는 경외함이라던가 두려움이라던가 비굴함 따위가 아닌, 오히려 자신만만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자신감. 게다가 나를 숙소로 안내하는 내내 그는 쉴새없이 말했다. 심지어 칼리드페이조차도 칼리드페이 앞에서는 말을 아끼는데, 내가 칼리드페이임을 모를 리 없는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역시 수상하다. 없던 것이 이유없이 생기면 일단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다.

숙소에 들어가니 자경단장이 인사했다. 성직자에게서 느껴지던 자신감을 그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간략하게 정보 전달을 할 때도 그 느낌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점은 나중에 있었다. 그의 설명을 다 듣고 숙소에 짐을 푼 다음 바깥으로 나가 가벼운 탐문을 했는데, 시민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들은 다른 이야기들은 대체로 쉽게 들려 주었으나 유독 내가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는 신전에 대한 화제만 꺼내면 나무옹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 나를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밤 늦게 숙소에 들어오니 숙소의 급사 소년이 나에게, 내일 아침에 자경단장이 나를 위해 안내원을 보내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이런 작은 곳에서 안내원은 그다지 필요치 않다. 아마도 순수한 목적을 위해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그, 혹은 그녀를 잘 관찰하면 뭔가 유용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오늘 탐문을 진행하면서, 비밀리에 블라녹과 접선했다. 그녀의 흔적이 이 도시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정보다. 뭔가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더 자세한 조사를 부탁했다.

+탄약의 비축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보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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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 밤 단장님이 나를 긴히 부르셧다. 오늘 수도에서 온 귀한 손님이 있는데 그 손님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다. 솔직히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일이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기분이 매우 좋았다.

뭐니뭐니 해도 이런 중요한 임무를 직접 맡긴 것은 단장님이 자경단원으로서 나를 인정해 주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가 술술 흘러나왔다. 골목에 있는 놈팡이들이 야유를 보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놈들 시비를 하루이틀 듣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놈들은 나에게 덤비지 않는다. 덤비는 즉시 깨진다는 걸 그놈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손님이 있다는 숙소에 도착했다. 역시 단장님이 신경 좀 쓰셨는지 우리 도시에서 가장 좋은 숙소다. 손님은 맨 위 층 끝방에 묵고 있다고 했다. 바깥 구경을 좋아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내가 사랑하는 도시인 우리 도시는 볼품없다. 온통 똑같은 색깔에다가 똑같은 건축 양식, 더러운 거리와 별로 없는 삼림, 그렇다고 역사가 오래된 것도 아니고, 유일하게 볼 거리라고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신전이지만 그곳도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다. 딱 하나, 신전을 우산처럼 덮고 있는 거목이 있는데, 웬만한 도시에는 다들 하나씩 있는 것이므로 딱히 그걸 보려고 불편한 방을 선택할 정도도 아니다. 참 독특한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계단을 올랐다.

드디어 그 방에 다다랐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어도 막상 들어가려니 긴장되었다. 어떤 사람일까. 문을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못 들었나. 다시 한 번 두드려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허탈해졌다. 설마 외출한 건 아니겠지? 혹시 시간을 잘못 잡은 거라면. 살짝 초조해진 내가 문을 탁 하고 밀어보자마자.

문이 열려버렸다.

뭐야 이거! 미리 열어뒀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거였냐! 부끄러워서 뺨이 새빨게졌다. 첫날부터 실수라니. 어쨌든 들어가기는 해야 한다. 머릿속으로는 여러가지 사과의 말을 떠올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뭐야 이거! 방문을 열어두고 밖으로 나간거냐! 황당해서 뺨이 새빨게졌다. 첫날부터 약속시간도 안 지키다니. 어쨌든 만나기는 해야 한다. 머릿속으로는 여러가지 비난의 말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나가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흰색 천이 먼저 보였다. 잠 잘 때 덮고 자는 모포일 것이다. 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지팡이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열려 있는 배낭이 있었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웬 검은 책을 발견했다. 제목도 없고 글씨도 씌여있지 않은 검기만 한 책이었다. 문득 호기심이 들어 다가가서 책장을 넘겨 보려고 했다. 가슴 속에서 보면 안 된다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호기심이 그것을 압도했다. 애초에 같이 일할 사람이니 한 번쯤은 봐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악의로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천 밑에서 튀어나온 억센 손이 넘기려던 내 손을 움켜쥐고 끌어당기는 동시에, 뭔가 깔쭉깔쭉한 것이 내 목에 들이대졌다.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몰랐을 따름이었다. 검은 색 눈이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위부터 밑까지 주욱 훓었다. 별로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이제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울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압도적인 공포가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겨우 눈물을 조금 흘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자는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심하게 당황한 것 같았다. 그 순간, 어쩌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모하나 시도해 볼만한 작전이었다. 나는 무작정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 잘못을 했지만 그 정도는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가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소문으로만 들어보던 구인간이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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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뭐라고 변명하려 했으나 내 귀에 그런 건 들리지도 않았다. 범죄자의 말에 현혹되면 언제 죽어나갈지 모른다.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어? 아니, 그게."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좋아, 기회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재빨리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운수 나쁘게도 미끄러운 천을 밣고 있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한 그는 요란하게 뒤로 넘어졌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뒤로 꺽었다.

"아악!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끄러워! 이 범죄자! 여기 있던 사람을 어떻게 한거냐!"

"아, 거 참!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거짓말 작작 하시지. 그런 변명은 나중에 늘어놓으라고!"

이 정도면 훌륭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했다. 내려다보니 그는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뻔뻔스러운 녀석,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자경단장 벤 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티작 칼리드페이 님.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헉!"

단장님은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처럼 격렬하게 숨을 멈추셨다. 어지간히 놀라셨나 보다. 그나저나 수도에서 온 귀한 손님이 칼리드페이 가문 사람이었구나.

"레셀 양.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겨우 정신을 차리신 단장님이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내게 물으시길레 자랑스럽게 대답해 드렸다.

"예, 이 `구인간 범죄자`가 여기 숨어 있다가 제 목숨을 노렸지만, 신속한 대응으로 제압했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 계시던 단장님은 머리를 감싸쥐고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시기 시작하셨다. 왜 저러시지? 오늘 속이 안 좋으신가. 그러던 중, 아까 봤던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저 칙칙한 색, 이 주인녀석의 성격도 마찬가지일 게 뻔하다. 그러고보니 칼리드페이 가문 사람들도 검은 책을 들고 다닌다지...어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담요와 모포, 벽에 걸려 있는 기묘한 지팡이, 땅바닥에 떨어진 톱날 단검, 열려 있는 배낭, 그리고 예의 검은 책과 내 밑에서 뭐라 중얼대고 있는 남자, 마지막으로 어느새 팔짱을 끼고 나를 죽일 듯 노려보시는 단장님.

너무나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설마,설마. `수도에서 온 귀한 손님`이..."

이미 방을 반은 빠져나가고 계시던 단장님은 아무것도 못 봤다는 태평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책임은 자네가 지는 거야. 레셀 양."

그 남자가 끙끙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죽어야 비명을 덜 지르고 죽을 수 있을지를 필사적으로 궁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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