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초청 단편
제3회 판타지 갤러리 단편 대회 출품작
하늘을 느끼다
by ㅈㅈ
노인의 치매끼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실험실의 문짝이 깡그리 태워져 있었다.
"이대로가면 공방을 깡그리 태워버리겠어요. 이제 궁정마법사의 자리는 실력좋고 믿을만한 애제자에게 넘기시고 스승님은 요양원에나 박혀계시는게 어때요?"
"뭐라고? 요녀석아!"
되물었으면 대답을 들어야 할 것 아니야. 불평하고 싶었지만 갈아치운지 며칠 못된 이 문짝꼴이 되기는 싫은지라 그저 볼멘소리로만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무슨 실험을 하는거에요?"
"안 돼. 말해줄 수 없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실험이거든. 너라도 절대로 말해줄 수 없어."
"정말 궁금하군요. 뭔데요?"
"태양을 만드는 실험."
이 말을 듣고, 보통 사람이라면 펄쩍 뛰며 놀라거나 웬 미친녀석인가 하는 눈초리로 흘겨보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난 달랐다.
"그거 참 대단하시네요. 하지만 그 실험은 저번주에 이미 마치셨잖아요."
"뭐? 그럴리가?"
"저기 창밖을 봐요. 태양이 두개 있잖아요? 저것중 오른쪽 것이 저번에 스승님이 쏘아올린 거에요. 보이죠?"
물론 보일리 없다. 노인의 시력이 마법으로 어떻게 해결을 볼 수 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밖에 보이는 태양은 한개 뿐이다.
그럼에도 노인은 똑똑히 보인다는 듯이 말한다.
"으응... 확실히 보이는구먼."
"그렇죠? 그럼 이제 침실로 가서 그만 누워요."
노인은 나가는 문을 향해 어그적어그적 걸어나갔다. 난 오크의 식후 위장 속같은 방 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언제 또 다 치운다.
만일, 나라의 역사를 배우고 국왕의 은혜를 알고 궁정마법사의 드높은 명성을 아는 이 나라의 평범한 백성이 세월의 속에선 위대한 궁정마법사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주는 내 스승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낸들 알리 없다. 난 철들기 전부터 노인과 함께 지내왔고 노인의 치매끼를 처음 발견한 것도 나였으니 그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또 한번 한숨을 쉬어주고 어딘가에 쑤셔박혀 있는 물걸레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벽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닦아내려 했을 참이었다.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나요."
힐끗 바라보니, 웬 여자애가 홀라당 태워진 문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신경쓰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럼 이곳은 왜 이런 건가요."
"여긴 곧 전장이 될 장소거든. 건들면 해를 입게 되는 알 수 없는 괴기유해물질들과 나의."
여자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껏 농담을 한 내쪽이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방금 말은 농담이 아니야. 여긴 정말로 위험해. 저기 저 플라스크가 이유없이 펑 터질 수도 있......"
정말로 터졌다. 파편조각들이 방바닥으로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난 일거리가 더 늘어난 것에 짜증을 내고 싶었다.
"봤지? 이런 험한 곳은 귀족집 아낙네 분이 있을 자리가 아니야. 얼른 돌아가."
그러나 여자애는 내 충고가 개짖는 소리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 듯 무시하며 말했다.
"도미니는 어디에 있죠."
짧고도, 보통사람은 일단 듣자마자 경악해할 말이다. 왜냐하면 도미니는 내 스승의 이름이고 그는 이제 일흔이 넘은 황혼기이고,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서 재상 다음의 권위를 자랑하는 궁정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저 쬐끄마한 계집아이가 멋대로 부를만한 이름이 아니다.
"도미니가 누구지?"
"그를 모르나요?"
"난 이 성의 궁정마법사인 도미니는 알지만 스무살도 못되는 나보다 어린 계집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도미니가 누군지는 모르는데."
내 나름대로 비비꼰 말은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여자애는 금방 대답했다.
"난 그에게 볼일이 있어요."
"무슨 볼일 말이지?"
"그건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와 한지붕 아래 살면서 내 스승에게 봐야할 일이 썩 맘에 드는 녀석을 본 적이 없어. 그러면서는 언제나 몇 푼 안되는 보석같은 것들을 스승에게 건네주더군. 넌 지니고 있는 보석은 없는 것 같으니 몸을 내놓을 생각인가?"
"무례하군요."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표정은 별로 불쾌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보단, 표정이 없었다.
"넌 날 모르나?"
"당신을 알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요."
"그렇군. 날 한 번이라도 똑바로 본일이 있으면 내게 이렇게나 겁없이 나오지는 않았을거야."
"잘됐군요. 난 색맹이라 누군가를 제대로 볼 수 없어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겁먹을 이유는 없는 건가요?"
"농담치곤 센스가 부족해."
"멋대로 이해하도록 하세요. 도미니는 어디에 있죠."
"이곳에 없어. 집으로 돌아갔던지 아니면 정원에서 꽃이나 따고 있겠지."
치매끼를 보이고 난 뒤 노인의 행동은 일관성이 없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있으면 화장실 변기에 앉아 무언가를 고심하는 날도 있고 땡볕에 누워 뼈대만 앙상한 몸을 이리저리 뒹구는 날도 있다.
여자애는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일 다시 올테니 그에게 제가 온걸 전해줘요."
"난 스승외에 남의 명령은 듣지 않아."
"그럼 부탁하도록 하죠."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럼 누가 왔다고 전해주면 되는 거지?"
소녀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를란느 드 위셸이 다녀왔다고 전해줘요. 아니, 부탁해요."
난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어요. 어제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생각났어요."
뜻밖의 소리였다. 난 그녀의 이름만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을 뿐이었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은 없었다.
"분명 십 년 전인가였을거에요. 도미니가 왕궁에 웬 어린아이를 한명 데리고 왔어요. 그 아이를 보자 아버지가 호통을 쳤고 아래의 사람들도 모두 그말에 동조했지요.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을 기억하나요?"
그 말을 했던 것이 이 나라의 국왕이었으니 이 여자는 공주가 되는 셈이다. 뜻밖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꿀릴 것은 없었다.
"악마의 자식을 어째서 궁에 들인 것이냐고 했지."
"당신이 그 아이였군요. 그래서 도미니의 장소라고 하는 이곳에 있는 것이고."
그녀가 당시의 날 아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때의 공주는 나보다도 작은 아이였을 테니까.
"그때 스승이 했던 말은 더 가관이었지. 멍청한 놈들, 두려워 할 줄만 알고 써먹을 줄은 모른단 말이냐."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나요."
"늙은 면상에 주먹을 한대 갈겨주고 싶었어."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어제부터 변함없는 이 표정은 그녀가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난 아직도 궁금해요. 어째서 아버지와 그들은 어렸던 당신에게 그런 심한 말을 했던 거죠"
"그럼 지금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단 말이냐?"
"그럴 이유가 없으니, 그러지 않겠죠"
"시치미떼지마. 너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당신이 그렇게나 끔찍한 생김새를 하고 있나요."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괴물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지 마요. 자학해서 이로울 게 뭐가 있죠?"
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절대로 그녀의 말에 흥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내 저주스러운 붉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내 눈을 봐. 그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녀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 붉은 눈 떄문에 난 평생을 사람 아닌 사람으로 살아왔어. 아버지는 날 버렸고 어머니는 날 지키려다 돌에 맞아 죽었지. 날 사람으로 봐주는 유일한 자는 내 스승뿐이었는데 이젠 그도 늙어 미쳤지. 그리고 얼마 못가 죽게 될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나라의 위대한 마법사가 악마의 자식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리를 지껄여대겠지."
저절로 자조섞인 웃음이 나왔다. 내 앞의 소녀가 그것을 비웃음으로 봐주길 바랬다.
"날 모두에게 악마로 만들어버린 눈이야. 이 눈을 똑바로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넌."
이제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나의 눈도 하찮은 것이라, 당신의 눈이 어떠한 색인지는 볼 수 없어요."
"넌 정말로 장님인가?"
"제 눈은 색을 볼 수 없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런 제가 보기에, 당신의 눈은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군요."
사람의 눈......
그런 소리를 미친놈이 아닌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도미니는 오지 못했나요."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은 기분내킬때 뿐이야. 미친 사람에게 규칙성은 없지."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의 집을 알려줘요."
"몰라. 미치지 않았을 때 스승은 하루의 대부분을 이 공방에서 지냈지만, 내게 그의 집을 알려주진 않았어."
"그럼 그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어렵겠군요."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을거야. 들어봤자 십분도 안되서 잊어버릴 테니까."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녀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를 만나겠어요."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라. 말그대로 기분 내킬때니까. 한달이 지나서야 올 수도 있어."
"그를 만날 때까지 이곳에 매일 오겠어요."
난 뜸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멋대로 해. 폐만 끼치지 말라고."
이 공방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높은 언덕에 지어져 있는데도 그녀는 매일 같이 이곳에 왔다. 처음엔 이곳에 있는 내내 말없이 기다리다가 그냥 가버렸지만 며칠 후 부터는 내가 먼저 말을 걸게 되었다. 처음엔 나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지만 내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나서는 그녀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 그녀는 도미니, 그러니까 노인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왔고 그때만해도 나무랄 것 없이 훌륭한 마법사였던 그는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그래서 어느날 그녀는 노인에게 자신의 색맹을 고쳐달라고 부탁했고 내 스승은 그것에 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치매에 걸린 후로부터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국왕은 그녀에게 노인과 만나지 말라고 하였고 수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그때의 부탁이 생각나서 어렵게 찾아오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공방에 왔다.
"오랜만이야 도미니."
처음에 누군가 하며 쳐다보던 노인은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고 무척이나 반가워하였다.
"위셸, 그 동안 너를 못봐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이 녀석이 날 구박할 때면 네가 그리워지더구나."
"거짓말마요. 언제나 날 고생시키는 주제에."
노인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어렸을 때 플러버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게 생각나는 구나. 느낌이 좋다면서 내가 만들어준 플러버를 요리조리 굴려다니고서는 잃어버릴 때면 언제나 내게 또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
"나도 생각나는 게 있어. 그때 도미니의 얼굴은 주름이 이보다 적었는데."
이 순간에도 소녀는 무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워보였다.
"전에 부탁했던 일이 생각나서 찾아왔어."
"으음? 뭘 말이냐."
"내 눈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었지."
노인은 고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몇 년 전의 부탁일 테니 기억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기어코 생각해낸듯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래그래. 생각났어. 누구부탁인데, 어떻게 잊어버렸겠니. 그리고 해결책도 알아냈지."
소녀가 반가운 기색을 띄었다. 노인은 헐헐거리며 웃으며 공방의 이곳저곳을 찾아헤맸다.
그리고 어느 책상의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들며 말했다.
"바로 이거야. 이거면 네 눈을 낫게 해줄 수 있단다."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난 얼굴을 굳혔다. 노인이 서랍에서 꺼내든 것은, 미쳐버린 그가 의미도 없이 해부한 개구리시체였다.
노인을 돌려보내고서 긴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오지 않겠어요. 올 이유가 사라졌으니."
예상대로였다기 보다는 당연한 일이었다. 별로 화낼 이유도 없고 내가 화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잘가."
그녀가 발을 돌렸다. 어두운 공간에 문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비춰졌다.
"당신은 하늘을 본 적이 있나요."
그녀가 고개만 돌려 느닷없이 질문해왔다. 내가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본 적이 있다면 말해줘요."
"뭘 말이야."
"하늘은 무슨 색을 하고 있나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하면서도 답해줄 말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은 하늘색을 하고 있지."
내 대답을 듣고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했다.
"어릴 때, 하늘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었어요. 사람의 발자국조차 있을 수 없는 하늘은 무슨 색을 하고 있을까. 하늘이 안개처럼 칙칙하게 보이는 것은 나뿐이겠죠. 그래서 궁금해져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물어봤어요. 그리고 당신처럼 하늘은 하늘색이라고 해줄 뿐이었죠."
그녀의 세상은 모든 게 흐릿해서 다른 사람들이 안개라고 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 세상밖에 볼 수 없는 그녀에게 그들의 말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의 말을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늘색이 너무나 궁금했어요. 그래서 도미니에게 부탁한 거에요. 하늘의 색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는 내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줬으니 틀림없이 그 부탁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최고의 마법사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공방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가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모든 것이 되돌아와 나를 괴롭혔다. 공포, 경멸, 사람이 없는데도 이곳의 어딘가에 있는 어둠속에서 날 지켜보며 저주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돌아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저주받은 붉은 눈이 말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네 스승이 죽고 나면 넌 정말로 외톨이가 되겠지.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난 그녀를 붙잡겠어.
곧바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다려!"
언덕의 아래쪽에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 외침을 들은 그녀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언제나 변함없는 그 무표정. 난 대체 언제부터 그 애교없는 얼굴을 사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던 것일까.
"알아냈어."
나는 헐떡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뭘 말이죠."
"네가 하늘을 볼 수 있는 방법... 알아냈어."
"당신이 말인가요."
괜찮을까. 속으로 잠시 생각했지만 금새 결단지었다.
"그래."
"잘 됐어요. 정말 고마워요."
기쁜 표정을 짓진 않았지만 그녀는 기쁜 기색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공방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럼 어떻게..."
"내 손을 잡아."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난 다시 말했다.
"손을 잡아."
내 손에 여린 그녀의 손이 겹쳐졌다. 처음으로 맞잡은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눈을 감아."
그녀는 다시 고민했다.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가 날 믿어주지 않는다면 나도 미련없이 그녀를 털어낼 수 있을 테니.
그녀의 눈이 감겼다. 난 황홀한 기분을 느끼고 주문을 외웠다.
"기분이 어때?"
"허전한 느낌이에요. 뭘 한거죠?"
"이제 눈을 떠."
그리고 다른 세계가 펼쳐졌을 것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구름, 까마득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지상. 이 순간 우리는 새들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도미니는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했어요."
"노인의 헛소리는 믿지마. 난 그보다 뛰어나거든."
"당신은 정말로 인간이 아닌가요."
"반은 그럴지도 몰라.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니까."
그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려줘요."
"무서워하지마."
"내려줘요."
"날 믿어."
"그럴 수 없어요. 내려줘요."
"머릿속을 비우고 온몸에 정신을 집중해."
그녀는 그렇게 하였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과 구름이 느껴지지. 공기가 몸을 떠받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아?"
"...맞아요."
"하늘을 굳이 눈으로 볼 필요는 없어. 네가 물컹거리는 플러버의 느낌을 좋아했던 것처럼 하늘을 느끼는 걸로도 하늘을 볼 수 있어. 네가 느끼고 있는 바람과 구름과 공기의 느낌이 바로 하늘의 색이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손끝으로 전해져 오던 떨림 또한 사라졌다. 두려움을 잊은 그녀는 지금 하늘을 온몸으로 보고 있었다.
"당신만이 내게 하늘을 보여줄 수 있던 거군요."
노인의 치매끼가 시작되었다. 노인은 공방을 몇 시간째 이리저리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안 돼. 말해줄 수 없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거든. 너라도 절대로 말해줄 수 없어."
"정말 궁금하군요. 뭔데요?"
"위셸의 눈을 낫게 해주는 주문."
난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그거 참 대단하군요."
그리고 노인의 뒤꽁무니를 따라 그가 어질러놓은 공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몇 십분이나 시간이 지나고서 노인이 외쳤다.
"찾았다 찾았어!"
"뭘 말인가요?
"안 돼. 말해줄 수 없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거든. 너라도 절대로 말해줄 수 없어."
"정말 궁금하군요. 뭔데요?"
"위셸의 눈을 낫게 해주는 주문."
이번엔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라도 들고 있는 건가, 생각하며 그가 찾아낸 것을 보았다.
정말로 뭔가의 주문이 적힌 두루마리가 있었다.
"이게 위셸의 눈을 낫게 해주는 주문인가요?"
"그래그래. 몇 년전인가 분명 완성했었는데 까먹고 있었어. 내가 대체 왜그랬을까. 어서 그녀에게 가봐야겠다."
노인은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그리고 난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뭐하는 거냐?"
"위셸의 눈은 고쳐줬잖아요. 그보다 태양을 만드는 실험은 하지 않는건가요?"
"음? 그럴리가? 그리고 태양을 만드는 실험은 이미 마쳤잖니."
"저기 창밖을 보세요. 태양이 하나 뿐이잖아요?"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당연하게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구먼.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오늘은 피곤하실테니 내일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에요. 침실로 돌아가 주무세요."
노인은 순순히 밖으로 나가주었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빽빽한 문자가 수북히 적혀있었다. 이것은 그가 미치기 전에 쓴 글이 틀림없었고 주문은 내가 보기에도 완벽했다.
난 생각했다. 그녀가 색을 보게 되어 나의 눈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답은 금방 나왔다. 내 손에 들린 두루마리는 흔적도 없이 태워졌다.
